• "여러분이 이것들을 행하면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10절) 자전거를 배울때 당연히 반복적으로 넘어지게 되어있다. 한발을 구르고 자전거가 출발하면 자전거가 휘청대고 그러면 두려움에 휩싸인 아이가 패달에서 발을 때꺼나, 핸들을 바삐 이리저리 틀어본다. 딴에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발악을 하는것이다. 그러나 결국 넘어진다. 무조건 넘어지게 되어있다. 아이는 왜 나를 잡아 주지 않았느냐고 아빠에게 화를 낸다! 그러나 아빠는 뒤에서서 분명히 정확하게 가이드를 주고 있었다! 넘어진것은 아빠의 책임이 아니고, 아이의 불순종에 그 이유가 있다. 그나마도 다행인것은 아빠는 그런 아이를 일으켜세워주고 다시 자전거에 오르게 한다는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빠가 아까도 말했지! 벌써 몇번 말했지!! 이 말을 명심해! 넘어지기 전에 그 다음 패달을 굴려! 그것만이 넘어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야! 넌 할수 있어! 아빠가 항상 뒤에 있으니 걱정말고 다음 패달을 굴려!" 그렇다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넘어지는것을 막아주는것은 안넘어지려고 발버둥치는 행동이 아니다. 넘어지는 것을 막아주는것은 그저 다음 패달을 내딛는것이다. 아빠를 믿고 넘어질것 같을때 다음 패달을 구르는 것이다. 휘청댈수는 있을지언정 그렇게 아이는 자전거를 타기 시작할 것이다.

    죄악 가운데 실족하지 않는 방법도 이와 비슷하다. "넘어지지 말아야지!" 아무리 조심해도 결국에는 넘어진다. 그래서 죄로 넘어지지 않는 삶은 선의 걸음을 한걸음 더 내딛는 삶이여야만한다. 예컨데 죄의 시간, 죄의 장소, 죄의 사람을 떠나는 것으로 넘어지지 않는것이 아니다. 결국 비틀대다가 또 넘어지게 되어있다. 죄의 시간, 장소, 사람을 떠났다면 이제 그 시간을, 그 장소를, 그 사람을, 선한 시간, 선한 장소, 선한 사람으로 채워야 한다. 그래서 나는 청년들을 섬길때 주를 위해 온 시간과 에너지를 다 써서 죄가 생각조차 나지 않도록 하라! 라는 말을 많이 했다. 오늘 말씀으로 인용하자면 나의 '실족의 여지'를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우애, 사랑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는 것이다. 악의 자리를 선으로 치환할때 비로서 우리는 실족을 멈출수 있다! 부지런한 선으로 나의 삶의 빈공간을 채울때 '신성한 성품'에 동참하는 자가 될것이다(3절)

  • 1 우리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것이 확실하다!?! 창립의 날 어떤 목회자가 되야하는지 도전하시더니, 창립의 은혜와 감격이 너무 커서 아직 채 흥분이 가시기도 전에 말씀으로 이렇게 도전하셨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면 혹 감격과 흥분으로 내가 넘어질까봐 첫날부터 조심시키시는가? (웃자고 한 얘기에 너무 정색하며 달려들지는 말자!)

    그러나 웃지못할 이 농담속에도 중요한 메세지는 있다. 원수마귀는 정말로 부지런히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사람을' 찾고있다는 사실이다. 마귀야 말로 연중무휴로 일하고, 주인의식(?)가지고 일한다. 그러니 그들은 건강한 신앙인과 교회를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 욥을 걸고 넘어지는것만 봐도 마귀가 어떤 존재인지 너무 명확하게 드러난다!

    실제로 나는 놀라운 창립의 감격속에서 무서움(?)을 느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놀라운 은혜를 잃지 않고 잘 담고 있을수 있을까? 하는 걱정들이 불쑥 불쑥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걱정할 일은 아니다. 걱정보다는 경각이 중요하다. 항상 깨어있어야겠다. 쉽게 흥분하지 않고, 교만해지지 않고, 감격과 감동에 함몰되지는 말아야겠다. 충분히 감사하고, 기뻐하고, 누리되, 절제와, 분별, 겸손과 성실을 놓치지 말아야겠다. 또한 말씀의 강력한 도전처럼 마귀하고는 대적해야겠다!

    2 지난 토요일부터 얼마나 큰 은혜를 경험했는지 모른다. 달라스와 뉴저지에서 50명에 가까운 성도가 바우교회를 축복하기 위해 찾아오셨다. '성도의 문안'을 위해 그토록 먼길을 오른 것이다. 시간도, 재정도, 에너지도 써야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분들은 이 모든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주셨다.

    성도의 문안은 큰 위로와 힘이 된다. 축복이며 기쁨이다. 형언할수 없는 감사를 경험하게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 엄마를 주셨다!"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분은 어머니 뿐이 아니다. 성도들이다! 성도도 같은 부르심이다.

    '성도의 문안'을 부지런히 해야겠다. 주는 사람은 자신이 '문안'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축복이 되는지 모를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성도의 문안'은 형언하기 어려운 큰 기쁨과 힘이된다. 그러므로 서로 인사하고, 평강을 빌어주는 '성도의 문안' 사역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다. 다시 한번 '성도의 문안'을 위해 이곳 멀리 오스틴까지 와주신 모든 성도님들과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바우교회도 부지런히 성도들을 문안하는 교회가 되길 기도한다!

  • 바우교회 창립주일 날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묵상의 말씀이 이토록 완벽할수가!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2-3절)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후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내 양을 치라!"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네가 나를 사랑한다 했으니 이제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내 양을 동일하게 사랑하며 섬기라!" 라는 말씀이셨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내 양'이다. 하나님의 양이니 정말 책임감이 막중한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바우교회 모든 성도님들을 사랑으로 섬기고, 억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섬기기로 다짐해본다!

    교회가 때로는 더러운 이득을 취하고, 지극히 욕심과 욕망에 휘둘릴때가 있다. 목사가 정신차리지 못하고 개인의 이득에 눈이 멀어 성도를 상처입히고, 교회를 망가뜨리는것도 보게된다. 그러나 말씀의 도전처럼 '더러운 이득'을 위해서 교회를 이용하고, 성도를 이용하고, 하나님을 감히 이용하려는 어리석은 목회를 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때로는 '교회의 리더'라는 지위를 오해해 군림하는 자세로 서는 목자가 있다. "나는 섬김 받으러 온것이 아니요 섬기러 왔다!"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명확할진데 거의 반대의 삶을 사는것이다. 섬김의 리더십을 실천하기로 다짐한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를 떠올린다. 그분은 항상 먼저 하셨다. "십자가를 지라!"하지 않으시고 먼저 십자가를 지셨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내가 사랑한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셨다. 겸손도 마찬가지도 먼저 무릎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너희도 이와 같이행하라!" 결국 '본을 보이는삶'이 되야한다.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교회 가운데 서야하고, 세상가운데 섬겨야 한다! 본이 되는 목사! 가장 도전적인 메세지다!

    이런 목사가 되어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길때, 하나님께서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바우교회 가운데 허락하시고, 나에게 허락하시길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다시 한번 바우교회를 허락하시고, 시작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린다!

  • 화상은 절대 고통이다. 다른 수많은 고통 중에서도 언제나 손에 꼽히는 고통이 바로 화상이다. 그리고 화상이 최악인것은 회복이 더디고, 상처도 깊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불을 피하고, 불로 인한 고통은 피한다. "꺼진불도 다시 보자!" 괜히 생긴 말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불에 몸을 대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은 과거보다 드물겠지만 과거에는 생각보다 조금더 흔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과거에 어떤 단체의 일원의 증표로 혹은 일종의 허가인증의 의미로 인두에 몸을 지지는 경우가 있었다. 쇠를 불에 뜨겁게 달궈, 불보다 더 뜨겁게 만든후 그것을 등이나, 몸 어딘가에 찍는것이다. 이는 영원한 증표가 되어 수십년이 지나도 이 증표를 보고 "당신은 내 사람! 패스!"라는 확증을 얻게 되는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저주의 의미가 아니라 특권과 약속을 위한 증표라면 사람들은 자진해서 '불에 몸을 지지는' 이 일을 감당했다.

    '불의 고난'으로 우리의 믿음이 시험받을때 우리는 인내를 배우고,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믿음의 증표'를 남기게 된다. 일명 '그리스도의 스티크마'이다. 이는 필시 고통이지만 이 '믿음의 상처'를 인해 결국 주님 오실때 기뻐하고 즐거워 할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의 증표'를 보고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영광에 동참케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걱정말아라 조직의 수장은 당신의 몸에 불의 인두를 당신이 죽을때까지 누르고 있지 않는다! 잠시 댔다가 땔뿐이다!-"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하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케 하시느리라") 잠시의 고난으로 영원을 보장받는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믿음'이라 찍힌 '불의 인두'를 가지고 올때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시험 들지도 말라. 죽이려고 오는거 아니고 살리려고 오는 것이다. 다른 불은 다 피해도 성령의 불은 피하는것이 아니고, 믿음을 위한 '불의 고난'은 피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의 믿음은 연단되고, 지워지지 않는 그리스도의 증표가 새겨질 것이다! 주를 믿고 의지하라! 맡기라!

  • 1 요즘에 'more'라는 단어 때문에 하루하루 시달리고 있다. 둘째 딸 하나는 단 음식을 좋아한다. 그리고 부모의 잘못(?)으로 단것으로 배를 채우는 습관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난 후 단것을 조금 먹던지 해야하는데, 배가 고프면 단것을 찾기 시작했고, 급기야 한개로 만족하지 못하고 먹고 나면 반드시 이렇게 외치며 우는것이다. "MORE~~"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략과, 우상숭배등은 이미 나의 삶에 충분했다.(3절) 이러한것들에 'more'를 외친다면 결국에는 돌이킬수 없는 망가짐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요즘은 그래서 '소아 당뇨'가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얘기를 의사에게 들었다. 소아 치과도 그래서 계속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절제도 배워야 하고, 더 나가 절연도 배워야한다. 이제 그만이다! 멈춰야한다. 굳이 'more'를 꼭 외쳐야겠다면 이렇게 사용하라! "I need You more, Lord God!" 하나님은 더욱 구하고, 죄는 덜 구해야 산다!

    2 "뜨겁게 사랑하라!"라는 말을 들으면 연탄이 생각난다. 자신을 불태워 수많은 이들의 몸을 따듯하게 녹여주었던 그 연탄 말이다. 이 모습이 얼마나 상징적이던지 안도현 시인은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뜨겁게 소멸한다! 나를 희생하여 그를 보호하기도 하고, 그를 살린다. 어릴적 나는 연탄불에 음식도 해먹었고, 따듯한 아랫목에서 몸을 녹이기도 하고, 겨울에는 연탄재를 굴려 눈사람을 만들기도 했으니 연탄의 희생(?) 없이는 힘든 유년과 아동기를 보냈을 것이다. 부모와, 가족, 누군가의 뜨거운 사랑이 없이는 오늘의 내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표현히 그다지 시적이지는 않지만) '연탄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야겠다 결단하는 아침이다!

  • 1 예수 그리스도는 선을 행했는데 죽임 당했다. 말그대로 선행이다. 치료하셨고, 먹을 것을 주셨고, 외로운 자의 친구가 되어주셨고, 위로했고, 약자의 편에 서주셨고, 거룩했다. 그러나 그런 예수를 해하던 사람이 너무 많다. 욕심과 이기심에 붙잡혀서 '선행'하는 자를 오히려 억압하고, 파괴하려고 하는것이다.

    완악한 세상, 완악한 사람이 그렇다. 악한 사람에게는 선한 사람이 그렇게 꼴보기 싫어보인다. 오늘날이라고 다를까? 베드로는 "선을 행하면 누가 여러분을 해치겠습니까?" 말하지만 "그러나 여러분이 의를 위해 고난 받으면"이라고 말을 이어간다. 즉 해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수 없다는 것이다. 선을 행하든, 의를 행하든 완악한 세상과, 완악한 사람들은 득달같이 달려와 해를 끼칠것이다.

    우리는 정말이지 비둘기처럼 순결하여 선을 행하지만, 뱀처럼 지혜로와 분별하고, 또 강하고 담대해야한다. 선과 의는 쉽게 행할수 있는것이 아니다. 회사를 정직하게 꾸리려고 할때 그것이 좋은 가치라는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회사 사람들 중에는 '정직한 운영'을 막으려는 사람들도 많다. 더 많은 이익을 위해서, 그것이 대의명분이라고 말하는것이다. 정치도, 법조계도, 경제계도 선과 의를 행하는 자들에게는 걸림돌이 참 많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그들의 도전에 답할 말을 머리와 마음과 입에 담아 다니며 선한양심을 지켜나가야한다.(14-16절)

    2 '겨우 8명' 그게 노아의 방주때 구원받은 이의 숫자다. 아무리 구원을 얘기하고, 구원의 방법이 있다고 해도 겨우 8명이다. 참담한 숫자다! 그래서 성경은 천국에 이르는 문이 '좁은 문'이라고 했는지 모른다. 노아의 당시 8명이라면, 그 비율을 오늘날로 환산한다면 몇명이나 구원의 방주에 오르는것인가? 만약 당시 인구보다 지금은 100배 늘었다고 한다면 혹 기껏 800명 정도되는것인가? 물론 말도 안되는 예측이다. (누군가 이렇게 숫자로 겁을 주면서 그러므로 "당신은 아니다! 그러니 나를 믿어야 한다!"라고 하면 아마 100% 이단일 것이다 ㅋㅋ)

    나의 진심 어린 고민은 이것이다. '내가 8명에 들었는가?'가 아니라 나는 진짜 믿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다. 구원에 대한 부르심 앞에 정말 진정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주여, 주여 하는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8'이라는 너무나 작은 숫자는 이런 영적 경각을 더욱 명확하게 만들어 준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복음,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더욱 진정성 있고, 성숙한 신앙의 태도가 필요하겠다. '믿음의 방주'를 짓고, 복음으로 주변 사람들을 초대하는 이 시대의 노아가 되야겠다.

  • 1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일지라도!"(1절) 그때나 지금이나 문제적(?) 남편이 많았나보다! 아내분은 이 말씀을 읽으며 아내대로 해야할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남편된 내 자신에게 집중해야한다. 나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인가?

    '남편'들은 왜 이렇게 말씀을 듣지 않을까? 하나님 말씀만 잘 안듣는게 아니다. 아내의 말씀(?)도 잘 안듣고, 자녀들의 말도 잘 듣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분란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듣고나서 실천하지 않는 남편이 아니라 애초에 듣지 않는, 대화가 단절된 남편도 많은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대화가 단절된 '남편', 아내와 대화가 단절된 남편, 자녀와 대화가 단절된 남편은 회개해야한다. 전혀 귀담아 듣지 않는다면 그것도 회개해야한다. 듣지는 않으면서 내 말은 왜 안듣냐고 화내는 남편은 최악이다 회개해야한다. '말씀에 순종하는 남편'이 이제 내가 추구해야할 남편의 모습이다!

    말 잘듣는 남편은 화를 돋우지 않는다. 화목을 만들어 낼수 있다. 평화와 행복을 만들어내고, 자연스러운 순종을 받아낼수도 있다! 다 내가 먼저 잘하면 해결될일이다! 정말 좋은 남편이 되야겠다! 말 잘듣는 남편이 되야겠다!

    2

    너무 지켜야할 동사가 많다! 연합해야한다. 긍휼함의 마음을 가져야하고, 겸손해야한다. 이이제이를 실천하지 말며, 오히려 축복을 빌어줘야한다. 다른 이들을 사랑해야하고, 혀로는 악한 말을 금해야하고, 거짓말도 하지 말아야한다. 선을 행해야 하고, 화평을 만들어 내야한다.

    어려울것 없다. 숨은 의미도 없다. '동사적 인간'으로 살기로 결정한다!

  • 1 베드로는 선행에 대한 진중한 고민이 있었다. 은혜로 얻은 자유를 '악행의 구실'로 사용하지 말아야하는 것을 명확하게 했다. 말 자체에 모순이 있는것 같지만 베드로에 말에 따르면 나는 '자유한 종'이다.

    '자유'와 '종'은 어울릴수 없는 단어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분 안에서 우리가 자유할수 있도록 하셨다. 이 '자유라는 은혜'를 방종이 아닌 순종의 기회로 삼기 원하신것이다.

    악행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거 같다. 내 안에 가둬놓았던 욕망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니 얼마나 자유롭게 느껴지는가? 그러나 그 욕망의 실천은 거의 대부분 나를 감옥에 집어 넣는것으로 끝난다. 자유했던 사람이 '자유'를 위해서 악행을 했더니 감옥에 갇힌것이다. 이것이 바로 악행의 거짓말이다! 욕망의 무절제, 죄의 실천은 반드시 우리를 철장에 가두든, 마음에 가두든, 가두고, 고립되게 만들고야 만다!

    꼭 기억하자! 사탄은 악이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고 말한다! (물론 그들은 '악'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와 말씀이 우리를 가둔다고 말한다. 그러나 완전히 반대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사탄은 오히려 우리를 '자유'라는 미끼로 낚아서 영원히 가둬버린다! 정신 차려야 한다! 참된 자유는 오직 진리안에 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아멘!

    2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사는 인생! (24절) 죄를 멈추는것은 시작이다. 그리고 의롭게 살기 시작하는것이다. 건강하게 사는것은 잘못된 식습관이나 생활습관을 버리는것으로 완성되지 않고, 이어서 건강한 식습관과 생활습관을 시작하는것을 반드시 이어져야 한다.

    의에 대해 사는 인생이 진짜도전이다.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음을 선포했다.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더이상 죄의 정죄함가운데 있지 않다. 그러나 이는 정말 시작이다! 이제 의롭게 살아야한다. 그리스도를 닮은 삶으로 새로운 걸음을 걸어야 한다. '새로운 피조물'이 됐다는 성경의 고백은 괜한 선포가 아닐것이다.

    죄는 끊고, 그 공백을 의로움으로 채워넣는 과정에 게으름은 없어야겠다.

  • 1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이 말은 '거짓 가득한 형제의 사랑'도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모든 사랑이 진짜 사랑은 아니다. '진짜 사랑'의 탈을 쓴 '가짜 사랑'도 많이 본다. 어쩌면 이런 가짜 사랑이 더 많을 수도 있다.

    사랑은 오래참는다. 대표적 사랑의 정의이다. 그러나 요즘 '오래참는 사랑'은 점차적으로 희귀해지고 있다. '사랑'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비싸져서, 결혼 한번 하려면 반지에만 수천만원을 쓰는 시대다! 그런데 정작 사랑은 그 어떤때보다도 쉽게 버려진다.

    왜 이렇게 사랑이 초라해졌는가?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진리'는 그리스도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러므로 '깊은 사랑'이다. 그러니 우리가 진리되신 그리스도에게 사랑을 배우면 우리도 그러한 사랑을 실천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잊은지 오래다.

    그리스도께 사랑을 배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한다. 쉽게 포기하는 사랑, 식는 사랑, 의심하는 사랑, 이기적인 사랑을 버려야겠다. 이틀전 나와 아내는 11주년 결혼 기념일을 맞았다! 11년전보다 아내를 더욱 사랑한다! 진심이다! (아내도 같은 마음인지는 잘 모르겠다 ㅋㅋㅋㅋㅋ) 앞으로도 서로 더욱 깊이 사랑하는 부부가 되면 좋겠다. 또한 하나님을 향해 더욱 깊이 사랑하는 믿음의 자녀가 되었으면 좋겠다. 또한 말씀의 기록처럼 나의 주변의 '형제'들도 깊이 사랑하는 성도가 되면 좋겠다. '거짓없는 사랑'이 아름답다!

    2 복음은 유통기한이 없다. 유통기한이 긴 제품이 갖는 유익이 있다. 한국은 우유의 유통기한이 2-3일 정도 됐던걸로 기억한다. 어쩌면 1-2일 일수도 있다. 그런데 미국은 길면 3달도 된다. 그러니 여유가 있다. 충분히 사다 놓고 오래 먹는다. 그러니 3달보다 더 긴 유통기한을 가진 통조림 같은경우는 그 유익이 더 엄청나서 핵폭발이나, 재난 사건 영화에서 벙커에 있는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는것이 바로 이 수년도 더 된, 혹은 수십년도 더된 통조림이다!

    이런 비교가 좀 죄송스럽지만, 복음의 유통기한은 기한이 없다. 계속 살린다! 일년, 십년, 백년, 천년을 지나 오늘도 복음의 유통기한은 문제가 전혀없다. 세상의 모든것이 사라져도 복음은 여전하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생존가방'에 항상 복음을 챙겨야 한다. 나도 살고 그도 살리는 유일한 방법이다! 통조림을 나눠줄것이 아니라, 먹고 마실것을 챙길것이 아니라, 영원히 썩지 않을 복음을 챙겨야한다! 복음은 유통기한이 없다!

  • 자녀가 언젠가 철이 들어서 자신의 생일날 부모에게 집중하기 시작할때가 있다. 보통은 자기 생일날 "내 생일 선물 뭐야?!" 라고 하는데 어느순간 자신의 생일날 "어머니 아버지 저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갖고 싶으세요? 나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를 갚고 싶어요. 무슨 선물 갖고 싶으세요?" 그러면 이 말을 들은 부모는 한껏 감동하며 흐믓하게 말한다. "엄마 아빠는 그냥 니가 더 건강하고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해!"

    이게 오늘 베드로가 편지에 쓴 내용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죽었다 살았다. 그분의 보혈이 우리를 대속했다. 그러니 감사해서 주님께 뭐라도 드리고 싶을 수 있다. (하나님이 뭐라도 요구하신들 이렇게 큰 은혜 받은 우리가 거절할수 있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요구하시는게 아니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은혜에 감사하다면 그저 내가 거룩한것처럼 너희도 더욱 거룩하게 살아! 그럼 그걸로 충분해!" 역시 나의 아버지 되신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철이 들어야한다. 더 철이 들어야한다. 이렇게 큰 은혜를 누렸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을 살아내지 않는다면 한편으로 너무 염치 없다!

    '거룩'을 원하시는 하나님은 마치 나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가 있는데도 거기에 덧붙여 나의 '건강과 행복'을 기대하시는 부모님의 커다란 사랑과 같다. 주님은 나의 잘되심을 그토록 원하신다! 그러므로 정신 바짝 차리고 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거룩을 닮은 거룩한 성도가 되야겠다!

  • 1 텍스트의 가치를 아는가? 과거 활자가 지금처럼 대량으로 인쇄되지 못할때, 오직 손으로 기록되어 전달되야 할때 텍스트의 가치는 지금과는 비교할수 없는 것이었다. 사진의 가치도 단 한장만 얻을수 있는 폴라로이드경우 그 사진의 가치가 수백의 이미지를 몇초안에 찍어내는 디지털 사진보다 기본적으로 높은 경우가 많다! 희소성의 가치랄까?

    베드로는 편지를 쓴다. 이는 본도를 위해서, 갈라디아를 위해서,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이르기까지 흩어진 자들을 위해 쓰여진 편지다. 이메일로 여러 주소를 포함시켜 일괄 보낸 단체편지가 아니다. 이 편지를 받아보기 위해 그들은 얼마나 기다려야 하며, 이 편지가 모두에게 다 두루 전달되고 읽히기까지 편지가 사라지거나 파손될 위험이 얼마나 많으며, 누가 보관할 것인가는 또 얼마나 예민할수 있는 문제인가? (그때를 생각해보면 누군가는 편지 읽을때 자리 없다가, 나중에 왔을때는 이미 편지가 다음 지역으로 넘어갔을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텍스트의 가치! 더 나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의 가치이다. 베드로의 이 편지를 읽는 신앙의 형제자매의 마음이 어땠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스팸처리'해서는 안된다. 나의 이름을 붙여 무례하게 집으로, 이메일로 날라드는 그런 스팸이 아니다. 우리를 마음에 품은, '미리 아신' 즉 나를 생각하며 내 상황에 맞는 위로와, 격려와 도전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오늘날 말씀이 흔하다고 가치없게 여기지 말자! 본도 사람처럼, 갈라디아 사람처럼, 갑바도기아 사람처럼, 아시아와 비두니아 사람처럼 이제나 저제나 올까 편지를 기다리며, 사모하고, 읽고 나서는 마음에 새기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편지인 성경과 진심으로 교제(?)하는 자가 되야겠다.

    2

    이 편지는 구원은 받았으나 고난가운데 있는 믿음의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다. 위로로 일관하기 보다는 도전의 메세지를 담고 있다. "다 잘될꺼야!" 라는 말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때 누릴 영광을 믿으며 오늘의 고난을 기쁨으로 이겨내자" 말하고 있는것이다.

    "다 잘될꺼야!" 라는 말이 무슨 모든 일에 해결책인것마냥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행복의 주문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아니다 때로는 고난을 고스란히 통과해야한다. 고난을 통해 배우기도하고, 열매는 맺기도 하고, 단련되기도 한다.

    사실 나는 이미 다 잘 되었다! 이미 주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이것보다 잘된것이 어디있으랴? 그러므로 오늘의 고난을 기쁨으로 이겨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오늘 하루도 기쁨으로 살아내기로 결정한다!

  • 1 "산당을 없애지 않았다!" 라는 말은 유다의 '선왕'들에게 자주 붙었던 설명이었다. 여호사밧왕도 그중에 하나다! 정직하게 행했으나 산당을 없애지 않아 백성들이 계속 제사를 드리고 분향하는 일을 막지 못했다.

    여호사밧은 여느 선왕들처럼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 이는 엄청나게 절제되고 경건하게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면 '여호와 보시기에'라는 형용이 붙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가 칭찬보다는 아쉬운 소리를 많이 듣는 이유는 '산당'과 '북이스라엘과의 동맹' 때문이다.

    너무 잘했는데 이를 다 망치는 실수들이 있다. 충분히 칭찬을 들을수 있는데 한번의 실수로 억울하게 모든 성취조차도 인정받지 못하거나 가치가 폄하되는것이다. 거룩과 개혁에 있어서 조금더 완전을 기하면 어떨까 싶다. 죄의 찌거기를 남기는 습관, '이정되면 됐다!'라고 생각하는 안일함, 할만큼했다라는 자기만족은 나의 모든 변화와, 성숙을 망치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지도 모른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기준은 하나님이다! 개혁과 변화의 기준이 하나님이다. 애초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셨다. 그리고 내 안에 당신의 '생기'를 담아주셨다. 조금더 '완벽주의적인 변화'를 꿈꾸며 기도해야겠다!

    2 그러고보니 이스라엘 역사에 왕들이 기록되며 계속 반복되는 이야기중 하나가 치리기간이다. 여호사밧은 25년 치리했고, 아하시야는 2년을 치리했다. 그들이 정한 기간이 아니다. 열왕의 치리기간은 들쭉날쭉이다!

    내게는 얼마의 시간이 주어진것일까? 그것은 여호사밧도 모르고, 아하시야도 몰랐듯이 나도 모른다. 뉴저지 온누리교회에서의 시간이 10년가까이 될지 몰랐고, 그전에 섬겼던 교회에서의 시간도 몇년이 될지 전혀 몰랐다. 그리고 지금 섬기고 있는 바우의 시간도 얼마나 허락됐는지 알 길이 없다. (계획이야 짤수 있지만 어찌 인생이 계획처럼만 되던가?) 어쩌면 여호사밧처럼 수십년이 될수있고, 어쩌면 아하시야처럼 생각보다 훨씬 짧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허락된 시간을 성실하게, 아깝지 않게, 후회없도록, 실수는 되도록 줄이고, 미루지 않으며 살아야겠다' 다시 한번 다짐해본다! 나의 시간의 총평이 부끄럽지 않으면 좋겠다!

  • 1 여호사밧은 바보인가? 아합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이런 행동에도 여호사밧은 별다른 반항이 없다. 여호사밧도 분명히 한나라의 왕이다. 적어도 바보는 아니란 소리다. 그러나 사람은 언제든 자기도 모르게 '바보같이' 될수 있다.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을 보면 주변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니 그런 말도 안되는거에 속으면 어떻게해?! 딱 봐도 사기잖아!" 특히나 보이스피싱 같은 사기를 당하면 주변에서 핀잔아닌 핀잔을 할때가 많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게 말했던 사람도 똑같은 사기에 속아 넘어가는 일들이 흔하게 일어나고 있다.

    바보같아 지는 인생! 분명히 나는 바보가 아니고, 지각이 있고, 어쩌면 지혜로운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바보같이 속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일들이 일어날 수있다. 이틀전에 Ebay에서 전자제품을 하나샀다. 그리고 받아서 좋다고 쓰다가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fake 제품이라는것을 알게 됐다. 이런거 속는 사람은 바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그 바보였다. Ebay에 항의 이메일을 보냈으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배째라는 입장의 이메일을 받았다! (다시는 Ebay를 쓰지 않으리라! ㅋ) 분노가 일어났다! 그들의 잘못인가?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나의 잘못인가? 애초에 가격이 많이 싸면 의심해야하는게 당연한데 내가 내 눈을 가린것이다! 평소에는 의심도 잘하던 내가 '싼 가격'에 바보가 된 순간이었다.

    아합과 함께 전쟁에 나가 왕의 옷을 입고 전쟁터를 뛰어다니다가 "나는 아합왕이 아니예요!"라고 소리치는 수치스러운 여호사밧은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이 아니다! '바보'처럼 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2 전쟁에 나가면서 아마 마음에 미가야의 강력한 예언이 계속 걸렸을 것이다. 그러니 그냥 전쟁터로 나가기에는 그도 불안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합은 나름 머리를 써서 자신은 변장하고, 모든 위협을 여호사밧에게 몰아 혹시 모를 위기를 대비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혹시 모를 아합의 꼼수를 위해 미리 아람군대를 준비시켰다. "크든 작든 다른 사람과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 (31절) 그리고 실제로 아합은 무심코 누군가가 쏜 화살을 맞고 치명상을 입어 죽게됐다.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수 없다! 나의 계산, 노력, 방법, 속임수와 계략으로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수는 없다. 심판과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영역이다!

  • 1 미가야를 부르러 갔던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도 어쩌면 미가야의 전적(?)을 익히 보고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미가야가 가서 평소처럼 다른 선지자들과 다른 얘기를 하면 미가야는 반드시 갇히거나 심하면 죽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생각이 이쯤이르자 미가야를 부르러 갔던 사람은 미가야에게 충고한다. "보시오! 다른 예언자들은 다 한결같이 왕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그들과 같이 말하고 격려해 주시오."

    정말 중요한 충고라고 생각했을수 있다. 정말 딴에는 최고로 좋은 말을 해주었다 라고 생각할수 있다. 그러나 미가야는 대답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것만 왕에게 말할것이다!"

    시대를 보는 눈, 상황을 간파하는 통찰, 충만한 지식과 경험에 기대어 내가 주변과 지인에게 하는 충고는 진짜 충고가 맞을까? 어쩌면 '충고'라는 단어로 포장된 실언 아닐까? 영양가가 없는 꼰대의 잔소리가 아닐까? 가끔 내 충고 때문에 일이 더 꼬여서 이후에 나에게 "네 말대로 했다가 망했잖아!"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세심한 배려에서 오는 충고, 지식과 경험에서 오는 충고, 통찰에서 오는 충고가 충고가 아닐수 있음을 기억해야한다. 충고는 그래서 겸손해야하고, 더욱 조심스러워야 한다. 이는 충고를 듣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충고가 맞다면 잘 분별하고 적용해야겠지만 아니라면 미가야처럼 단호할 수도 있어야 한다. 미가야는 여기서 한가지 분별의 기준점을 제시한다! "나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것만 왕에게 말하겠다!"

    2 아합은 돌아올것이라고 생각하고 (27절) 미가야는 돌아오지 못할것이라고 단언한다!(28절) 하나님의 뜻이 선포되도 내 뜻대로 행하고, 내 뜻대로 진행될것이라고 믿는 아합의 모습이 꼭 오늘날 내(우리) 모습같다. 하나님은 "NO"라고 명확하게 얘기하시는데 주변에서 다 "Yes"라고 해버리니까 결국에는 사람들 말을 듣고 기대하며 가지 말아야할곳으로 가고, 하지 말아야할 일을 하게 되는것이다.

    십수년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책의 제목이 바뀔뿐이지 계속 나오는 얘기들이 있다. 내가 긍정적으로 믿고, 소망하고, 기대하면 '우주의 기운'(?)이 나를 도와 그 일이 이뤄지게 한다는것이다. 세상은 이것이 마치 성공의 법칙인냥 말하고 책으로도 만들어 판매하고 강연도 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얘기를 한다. 우리가 아무리 소망하고, 될것이라 믿고 기대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닐때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합은 자신의 소망과 다르게 돌아오지 못했다!! 우리는 긍정의힘, 기대의힘으로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고, 그 뜻을 따르는 힘으로 산다!

  • 1 한국은 분단국가다. 그래서 역대 대통령들은 화평과 통일을 나라 치리의 주제로 삼았던 때가 있다. 그렇게 남북정상회담은 몇차례 진행되었다. 고김대중, 문재인 대통령등이 북한의 지도자와 만남을 가졌던것이다. 그렇게 남북은 형식적으로라도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만약에 오늘날도 이 기저가 이어져 윤대통령과 김정은이 만난다면? 그렇게 만났는데 김정은이 느닷없이 "중국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고구려때 보니까 북경이 원래 우리나라 땅이더라구요! 우리 함께 중국을 쳐서 북경을 되찾아 오십시다!" 라고 말하면 윤석열 대통령은 뭐라고 해야할까?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ㅋ)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지금 북이스라엘의 아합이 남유다 여호사밧과 만나 나눈 얘기가 약간 이런 느낌이다! 평화를 위해 만났는데 갑자기 아람을 치자고 한다! 면박주며 거절하기에는 지금까지 만든 외교적 화평에 금이 갈까 껄끄럽다! 사돈 지긴인것도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어찌해야하는가? 여호사밧은 당황하지 않고(?) 일단 긍정한다! 그리고 나서 다른 길을 모색한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있는지 확인해보시죠!" 그리고 그는 신중하다!

    여호사밧의 정치력과 신앙의 지혜가 엿보이는 장면이다. 자신의 일터에 신앙을 접목(?)시키는 그의 시도가 당대에는 당연한 흐름이었을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은 사실 일터에서는 신앙을 침묵시킨다. 만약에 무슨 일을 진행할때 "하나님의 뜻이 어디있는지 확인해보고 하시죠!"라고 하면 그게 교회가 아닌이상 아마 심한 제제를 받거나, 우스꽝스럽게 취급되거나, 해고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진심으로 모든 길을 하나님께 기도하며 걸어가는, 일터 또한 하나님의 뜻으로 방향을 잡는 신앙의 적용을 권고하고 싶다! 물론 꼭 선임이나 상사에게 "하나님께 함께 기도하고 시작하시죠!" 라는 말을 하라는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우리는 언제든 "네 그렇게 하시죠!" 대답하고 골방에서 기도하며 나의 일터의 방향과 비전을 하나님께 기도하며 영점 조절을 할수 있다. 하나님의 방향을 잃으면 그 끝이 생각보다 처참할수 있음을 아합과 여호사밧을 보며 생각해본다!

    일터영성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영성,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는 영성, 일의 지혜와, 신앙의 본질을 둘다 놓치지 않는 최고의 기술(?)이다! 신앙의 정도를 지키며 일도 잘하는 사람이 되고싶다!

    2 항상 쓴소리하는 사람은 나도 싫다! 그런데 이걸 잘 분별해야한다. 그가 하는 소리가 쓴소리인가? 아니면 옳은 소리인가? 아합은 미가야가 나쁜소리만 한다고 한다. 그도 물어야 한다. 진짜 나쁜 소리인가? 아니면 옳은 소리인가? 그래서 여호사밧은 이렇게 대답했다. "왕이시여! 그렇게 말씀하지 마소서!"

    오늘 내 귀를 괴롭히는 그 사람의 소리는 '나쁜소리'가 아니고 '옳은소리'일지 모른다. 보통 자녀들은 부모의 말을 잔소리로 듣는다. 그런데 다 커서 철이 들어보면 그 소리가 잔소리가 아니고 옳은 소리였다는것을 알게된다. 아이를 낳으면 심지어 자기도 그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것을 보게된다!

    귀의 회개가 필요하다! 그럼 듣기 시작하고, 옳은 소리를 필요한 소리로 인식하기 시작할때 실수가 줄어들고 바르게 걸을수 있다!

  • 1 하나님은 회개하는 아합을 보시며 심판을 한 세대 미뤄주셨다. 회개하고 용서받는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런데 가만 보니까 회개는 했는데 용서가 아니고 심판이 한 세대 미뤄진것이다. 심판이 없이지지 않고, 집행이 유예됐을뿐이다. 아합의 회개가 좀 많이 늦었던것이다.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릴수 있지만 회개도 타이밍이 있다. 타이밍을 놓치면 회복이 힘들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려 했는데 타이밍을 놓쳐서 못한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렇게 타이밍을 놓치면 좀처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회복되지 못한다. 사실 아합은 이미 예전부터 진정한 회개로 돌이켰어야했다. 그런데 계속 회개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나중에 회개 했을때는 이미 돌이키기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본인의 세대는 넘어간다 하여도 결국 후대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되는것이다.

    회개를 미루는 습관! 은혜를 변명삼아 회개를 하지 않는 습관, 진짜 발등에 불이 떨어질때만 잘못했다고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습관! 다 버려야 하는 습관이다. 즉각 회개, 즉각 사과, 바로 돌이키고, 시정하고, 새사람 되야한다. 아합처럼 온간 죄 다짓고, 우상숭배 다하고, 거기다가 나봇의 땅까지 빼앗으려고 하는 그 지경에까서 그때 회개한다? (엘리야가 반복적으로 경고하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임할때는 도대체 회개안하고 뭐했던것인가?) 어쩌면 이 지경이 되면 내가 만들어 놓은 죄의 난장판 회복 불가능의 수준이 될지 모를 일이다.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죄의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가면 다시는 돌아올수 없다!

    2 아합의 아들은 시작도 전에 저주가 예언됐다. 물론 결론적으로 보면 아합의 아들도 악한 아들이다. 심판받아 마땅한 아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증명되기 이전에 이미 아버지 아합의 죄 때문에 저주가 선포되어있는것이다. 암울한 인생이다! 나의 잘못도 아닌데 내 잘못이 되어 심판과 저주를 받게 되었다!

    여기까지 쓰고보니 많이 들은 얘기다.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었다. 그런데 그들때문에 나도 죄인이 되었다라고 한다. 저주가 선포되었고, 그 저주는 곧 나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죽음'도 사실 아담과 이브때문에 들어온거다! 억울하고, 암울하다! 내 잘못도 아닌데 내 잘못이 되어 심판과 저주를 받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할것인가? 아합을 이어 왕이 된 아하시야와 그 이후 요람까지 그들은 '이왕 이렇게 저주받은거 그냥 막 산다!' 하며 악한 왕이 된다. 반면 많은 이들은 아담과 이브 때문에 원죄의 굴레에 갇혀있고, 사망의 고소 아래 있지만 십자가 대속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선포된 '죽음의 저주'조차도 뛰어넘는다! 회개하고 변화하는 삶을 추구한다.

    원죄! 너무 억울해 할 필요 없다! 예수 그리스도 한분으로 인해 구원의 은혜가 약속됬으니 억울해 하기 보다는, 또 미리 좌절하기 보다는 회개하고, 참되게 변화한 삶을 추구하며 살면 될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변명하는 인생이 아니라 변하는 인생이 지혜로운 인생이다.

  • 1 아합이라는 왕의 부탁/명령 앞에 나봇이 내세운 거절의 이유는 "여호와께서 금하신 일입니다!"(3절)였다. 아합은 분명히 좋게 말했고, 넉넉하게 값을 처주려고 했다. 그래도 나봇은 안될일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속내까지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일은 누가 뭐라고 해도 지켜내는 의지는 본질적으로 중요한 신앙인의 태도이다. 타협하지 않는 신앙의 의지!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떻게든 지켜내겠다는 결단은 숭고한 신앙이다. 그렇게 요셉도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유혹과 협박을 거절했고, 다니엘은 왕에게 진설된 음식을 거절했고, 다니엘의 세친구는 왕에게 절하기를 거절했다. 물론 첫 인류인 아담과 이브처럼 금지하신 일인데도 그냥 타협하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어떤 사람이 될것인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일을 타협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일을 하라고 부추기거나, 협박하거나, 설득하거나, 속이지 않는 사람! 하지 말라는것은 하지 말아야한다!

    2 오늘 본문을 보며 이렇게 적용하는 사람들을 진짜 많이 보았다! "여자를 잘 만나야돼!! 아내를 잘 만나야돼! 아내 잘못만나서 죄인 되는겨!!"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아합은 무능하고 조르는 아이처럼 보이고, 이세벨은 악독하고, 교활한 여인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런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죄악이 이세벨의 잘못인가? 정말 여인 잘못만나서 한 남자 인생 망친것인가?

    여자도 남자 잘만나야된다! 여자가 이렇게 악독하면 남자가 말려야한다. 남자가 애초에 이렇게 분별없고, 아이같고, 무능하면 안된다. 이런 남자를 만나면 이세벨 아니여도 그 여자 인생도 꼬일지 모른다!

    결국 진짜 사람 잘만나야된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좋은 사람 만나야된다.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한다. 인생은 결국 관계속에서 살아낼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세벨 같은 여인도 조심해야하고, 아합같은 남성도 조심해야한다. 남편, 아내, 친구, 연인, 이웃, 동료 등등 좋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에게 좋은 이웃, 선한 이웃이 되길 힘써야겠다!

  • 캐릭터는 작가의 기록에 의해 움직인다. 적어도 글속에서만큼은 작가는 전지적이다. 하여 수많은 소설이나, 연극에서 그렇게 악역이 탄생한다. 사람을 때리기도하고, 빼앗기도하고, 죽이기도 한다. 글 안에 있는 캐릭터가 지각이 있다면 느닷없이 자신이 폭력적이 되고, 이상한 행동을 해야할때 무슨 생각을 할까?

    이 글을 연기로 옮기는 연기자들을 생각해보면 조금은 그 마음이 이해가 될것 같기도 하다. 연기자들은 대본속의 역할을 따라간다. 그러므로 이해가 안되도 "작가의 의도가 있겠지, 감독의 의도가 있겠지" 생각하며 그 연기를 준비하고, 실행한다. '연기자' 라는 인식, '지금 내가 작가의 창조물 안에 있다'라는 인식이 그들로 하여금 쓰여진 지문대로 질문없이 움직이게 한다. 그렇게 전지적인 작가는 자신이 원하는 메세지를 구현해내는 연기자를 통해 만들어 간다!

    오늘 성경의 사건은 이와 비슷한 면이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극을 하나 써내려 가셨다. 그리고 이 안에서 역할을 감당하는 '연기자(예언자)'들이 있다. 그중에는 작가의 의도대로 순종하는 자도 있고, 반대로 거부한 자도 있다. 때리라고 말하는 자나, 때려야하는자나 이상한 명령이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전자는 순종했고, 후자는 불복했다. 거부한 자는 안타깝게도 '연극에서 아웃' 되었다! 그리고 쓰여진대로 연기한자들을 통해 전지적 작가의 메세지가 확실히 전해졌다. "네 목숨이 그 목숨을 대신 하고 네 백성들이 그 백성들을 대신하게 될것이다." (42절)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문제는 바로 부탁을 거부하고 사자에게 죽임당한 '연기자'(예언자)이다. 그는 선지자의 친구였다. 다짜고짜 때리라고 하는 친구를 때릴수 없기에 할수 없다고 말했다. 당연한 반응같아 보인다. 그리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결국은 사자에게 죽임당했다. 이것은 소설이 아닌 현실의 기록이다. 그렇다면 이 이해할수 없는 일이 일어난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게 소화가 쉽지 않은 바로 그 문제다! 찾을수 있는 이유의 단서는 단 하나다

    "여호와의 말씀을 그의 친구에게 이르되"(개역개정35절) 죽임 당한 선지자가 거부했던것은 예언자 친구의 부탁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이였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명령이 갖는 절대성에 대해서 성경은 일관되게 얘기한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우리는 그 명령을 조금더 무게감 있게 생각해야한다. 명령과 순종이 작가와 연기자의 관계 이상의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이해가 안되는 지문(연기자가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 설명된 글)을 만나도 작가를 믿고 행동해줘야한다! 그래야 극이 된다! 절대 신뢰가 절대 복종을 가능케한다. 우리는 사람에 대한 절대 복종을 얘기하지 않는다. 사람은 전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하시고, 전선 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절대 복종은 믿음의 자녀에게 요구되는 신앙의 태도이다!

  • 1

    "여호와는 산의 신이지 골짜기의 신이 아니다!" 그때도, 지금도 세상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다. 수많은 신중에 하나로 여기기도 하고, 결국은 다 같은 신인데 이름만 다르다고도 한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고 그냥 철학적 의미라고 말하기도 하고, 신은 이 땅과 사람에 관심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처참한 재난들을 마주할때면 니체의 말을 인용하여 "신은 죽었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뭐라고 신을 정의 내리든 신은 신이다! 인간의 정의로 정의되지 않는 신이 참신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다. 우리가 정의 내릴수 없는 분이며, 우리의 정의로 정의되지 않는 분이다. 실제로 성경의 기록처럼 그들은 하나님을 '산의 신' 정도로 인식했지만 결국 골짜기에서 12만7천명의 군사를 잃게 된다.

    인간의 정의로 정의되는 신은 우상이다. 세상의 오해에도 꼼짝하지 못하는 신은 우상이다. 우상은 죽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처음부터 스스로 존재하셨고, 오늘도 역사하신다. 지역과 시간에 메이지 않으며, 능력에 한계가 없으시다. 끝까지 하나님을 오해한다면 결국 최후의 심판에서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뭐라고 믿든 하나님은 영원히 하나님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2

    전쟁은 벤하닷의 항복으로 흘러 간다. 그러나 전쟁의 서두나, 중요한 시기에 보였던 '선지자와의 대화'는 없다. 그냥 아합이 주축이 되어 협상을 맺고 벤하닷을 살려준다. 어찌보면 너무 뻔하다. 아합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차려놓은 밥상을, 너무 신난 나머지 자신이 엎어 버린다. (엎어버릴 빌미를 제공한달까?)

    신앙의 클리세가 있다. 공포영화의 클리세는 보는 사람을 답답하게 만든다. 모르는거 아닌데 다들 그 클리세를 못 넘어가기 때문이다. 신앙의 클리세도 다 안다. 사시기도, 열왕의 시대도 온통 클리세 범벅이다. 그런데도 반복이다. 지금까지도 반복이다. 신앙의 망하는 클리세를 파괴 해야한다! 망하는 뻔한 길이 아닌 건겅하고 바른 신앙의 길을 고집해야한다.

  • 1 '한 예언자' 라는 표현이 약간은 의아한 표현이기도하다. 기존의 오바댜나 엘리야 예언자의 이름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는것을 보면 '한 예언자' 라고 하는 표현에 어떤 다른 의미가 담겨 있는건 아닐까?!

    아합의 시대는 악한시대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름난 예언자뿐만 아니라 이름 나지 않은 예언자들도 하나님의 뜻과 음성을 쫓아 활동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예언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도우심도 여전히 이스라엘에서 완전히 끊긴 시절이 아니다. 그러니 충분히 하나님께로 돌아올수 있는 시절이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차후에 엘리야에게도 말하시지만 당시에 우상에게 절하지 않은 거룩한 백성이 칠천이나 남아있기도 했다.

    시대가 악해도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시대가 악해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있는 법이다. 그들이 '갑자기'(13절) 하나님의 음성이라도 전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목소리를 낼때 '악한 시대'지만, 또 아합왕은 '악한 왕'이지만 최악속에서도 선이 이뤄지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시대가 원하는, 기다리고 있는 '한 예언자', 이름은 없지만 하나님을 전하고, 승리의 길을 예비하는 '한 예언자!' 딱 VOW 교회의 정신이다. 이름은 없지만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외치는 '소리' 말이다!

    다시 한번 이 시대가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한 예언자'교회가 되길 기도한다!

    2

    '지방 장관의 젊은 장교'를 오늘날로 생각해보면 상대적으로 주목도가 적고, 경험치도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중요한 일에, 나라의 국운이 걸린 일에 이들을 앞장세운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게 더욱 맞는것 같다. 나라의 영향력 가득하고, 경험치도 가득한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떠나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지 않았던가? 그들은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없고, 사리사욕으로 가득한 자들 아니던가? 하나님은 능력자를 찾으신게 아니고 순종자를 찾으신게 아닐까? 그렇게 지방장관의 젊은 장교들이 전쟁에 압장선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부르실때 순종하는 자를 통해 이뤄진다! 순종하는 자에게 능력과 경력과 경험이 쌓이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능력과 경험이 많아도 순종하지 않고, 제 멋대로 군다면 하나님의 나라와 일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나는 확실히 한 지방의 젊은 장교와 같은 목회자다! 할렐루야! 부르신 곳에서,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하리라! 순종할때 승리를 경험하는 '젊은 장교'가 될것이다!

  • 1 사마천이 쓴 사기라는 책이 있다! 인간군상을 꽤뚫는 책이라고 했던가? 이 기록 중에는 한나라를 건국한 황제유방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는 한 전쟁에서 위험에 처하게 되며 위기를 벗어나려 저녀들을 세번이나 버리는 일을 자행했다! 그런데 이 ‘사기’에 기록된 이 역사를 해석하며 유방이 전쟁이라는 환경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녀를 버린것이 지혜로운 결정이었다 말하는 한 저자를 보았다! 그의 주장은 이것이었다. 가족을 그처럼 버리는 것이 평소에는 맞는 행동이 아닐지언정 전쟁을 치르고 있는 유방에게는 맞는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거시적으로 보고 승리를 위해서 당연히 취해야 하는 지혜로운 행동이였다는 것이다. 나는 저자의 이 자신감(?) 넘치는 해석에 절대 동의되지 않았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합은 이스라엘 역사의 악한왕중에서도 손꼽히는 악한왕이다. 그러나 그런 아합조차도 패색이 짙은 전쟁을 앞두고도 자녀들을 넘기지 않는다! 이 행동 하나만큼은 (아합이라는 인물을 칭찬하고 싶지는 않지만) 잘한 행동이다!

    해서는 안되는 일이 있다! 눈 앞에 이익을 위해서라도 하지 말아야할 일이 있고, 살기 위해서라고해도 넘지 말아야할 선이 있다! 지켜야한다. 속이고, 배신하고, 팔아넘기고, 합리화 시킬수 없다! 나의 승리를 위해서 모든 행동이 용인되는게 아니다! 나를 위해 뭐든지 한다면 이는 지혜가 아니라 방종이다, 불의한 일이다! 언제나 나의 행동에 대해서 환경을 변명삼는 모습이 있다면 조심해야한다! 자꾸 그렇게 살다가, 누군가 타인이 그들이 처한 상황때문에 어쩔수 없다며 당신을 버리는 수가 있다!

    님아! 그 선을 넘지 마오!

    2 장로들과 백성들도 칭찬하고 싶다! 그들도 전쟁이 일어나면 위험해지는것이다. 왕의 자녀들만 보내고 희생하면 될 일이다. 자기 자신들의 자녀나 가족을 보내야하는것도 아니다. 그런데 장로들과 백성들은 절대불가를 선언했다. 소수의 희생으로 다수를 살리겠다는 논리로 왕의 가족을 사지로 내몰지 않았다!

    내가 위기에 처한다고 해도 함께 공의를 지켜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쉬운길을 선택하고, 안전한 길만을 선택하기 보다는 옳은 길을 선택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쉬운데 옳은길이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쉬운길보다는 옳은 길을 선택하는게 맞다!

  • 1 어쩌면 누구나 위대한 능력속에서, 기적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경천동지'속에서 위대한 하나님을 보면 두렵지만 동시에 안도감을 느낀다. 전능의 하나님이 내 편이시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신앙의 성향은 자주 우리로 망각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위대함' 속에서 계시지만 '세미한 소리' 가운데도 계시다는 사실 말이다!

    나는 이 '세미한 소리'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이 참 좋다! '세미한 소리'가 무엇일까? 성경이 '세미한 소리'라고 말하고 있는 이것은 어쩌면 세상이 말하는 '하나님의 침묵'일지 모른다. 원래 세미한 소리는 큰 잡음 속에서는 아예 안들리는 법이다! 위대한 하나님은 보지만 세미한 소리의 하나님은 침묵이고 부재라고 여기는 신앙! 그래서 드라마틱하지 않으면 실망하고, 좌절하는 신앙! 마땅히 바로 잡아야하는 신앙의 오해이다.

    하나님은 어디나,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큰 소리뿐아니라 세미한 소리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영광과 기적속에서만 하나님을 찾을 것이 아니라, 일상의 호흡에서 주를 찾는 영적 민감함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신것이 아니라 나의 내외면이 잡음으로 가득차있는지 모를 일이다!

    2 엘리야는 두가지 문제에 직면했다. 외로움과 생명의 위협이다! 두가지 다 인생이 경험할수 있는 최악의 위기이다. 감옥에 갇힌자에게 주는 최고의 형벌은 독방이다. 고문중에도 가장 악독한것중에 하나가 바로 유배이다. 물론 생명이 위협을 받는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최악의 문제이다. 이 두가지를 엘리야는 동시에 경험하고 있었다. 그가 인간적으로 흔들리고 무너질수 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데 이는 예수님을 떠오르게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철저한 외로움을 직면했다. 그리고 진짜 생명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하며 십자가에서 뛰어 내려오지 않으셨다. 그분은 끝내 "내가 다 이루었다!"하고 십자가 사명을 완수하셨다.

    예수님이 신이여서 십자가를 오롯이 견디신것은 아니리라! 그렇게 결론 내버리면 애초에 십자가 고난은 무의미하게 된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신 사실 자체도 무색해진다. 예수님이 신이여서 십자가 위에서의 외로움과 생명의 위협을 쉽게 견뎌낸것이 아니다. 다만 보여주신 것이리라! 예수님 전에도 그랬고, 예수님 시대도 그렇고, 그 이후도 그렇고, 오늘날도 그렇고 수많은 인생이 '외로움'과 '생명의 위협'이라는 쉽게 소화하지 못하는 문제를 마주할것이다. 그때마다 그들도 죽고 싶을지 모른다. 믿음이 위대하다고 해서 이런 감정이 안드는것이 절대 아니다.(엘리야가 그 대표격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망을 주셨다! "이길 수 있다!" 외로움도, 생명의 위협조차도 넘어설수 있다! 라고 십자가 위에서 소망을 주셨다.

    주께 감정을 토로하고, 쏟아내고, 눈물흘리고, 무너져 내릴지언정 끝내지 말자! 포기하지 말자! 아직 그리고 언제나 나에게는 하나님이 계시다! 아멘!

  • 1 아합은 우스워 보였는데 이세벨은 만만치 않았던것일까? 엘리야는 방금전에 850명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이스라엘의 왕앞에서도 겁먹지 않았던 모습과는 사뭇다른 모습이 되었다. 엘리야는 왜 걉자기 이렇게 되었는가?

    나는 항상 이 구절을 보면서 성공후에 느닷없이 찾아올수 있는 공허 혹은 두려움, 우울증, 불안증등에 대해서 생각한다. 엘리야가 믿음이 없나? 그렇지 않다! 엘리야가 능력이 없나? 그렇지 않다! 엘리야가 겁이 많나? 그렇지도 않다. 그가 기적의 경험이 부족한가? 그것도 아니다. 그러나 평소같으면 의연하게 넘어갈수 있는 일도 어떤때는 이 엘리야처럼 갑자기 무너지고 흔들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계획했던 모든 일이 일어 났을때, 승리도 했고, 비도 왔고, 능력도 보여주었을때 예수님처럼 한적한 곳으로 서둘러 이동해서 기도해야한다. 예수님은 기적으로 가득한 공생애를 사셨는데, 기적을 일으키신 후에는 자주 한적한 곳으로 홀로 가셔서 기도하곤 하셨다. 대표적인 사건이 오병이어의 기적후 '영광의 자리'를 떠나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신것이다.

    믿음의 승리후 흔들리지 않으려면 기도해야한다. 하나님 앞에서 쉼표 한번 찍어야 한다! 들뜬 마음도 가라앉혀야 한다. 내 자신의 위대함(?)에 도취되서는 안된다. 나를 보면 갑자기 한계가 보이기 시작하고, 그때 '이세벨'이 공격 들어오면 너무나 쉽게 무너져 버리는것이다. 기도하자! 지금은 기도할때다! 지금 흔들리기엔 앞으로 해야할 일이 너무나 많이 남아있다!

    2 주님을 믿는 사람! 아니, 엘리야처럼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도 '자살충동'을 경험했다. 물론 그가 "제 목숨을 가져가 주십시오!" 라고 말한것은 안타깝게 자살하는 이들의 마음과 사뭇다른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됐든간에 엘리야는 그정도로 현실 삶을 고달프게 느끼고 있었다. 혼자됬다고 느끼고 있었고, 더이상은 견디기 어렵다고 느끼고 있었던것 같다.

    이러한 우울의 마음이나 자살충동을 느꼈다고 해도 죄책감에 빠지지 말라! 주변에 이런 어려움 가운데 있는 자들을 위로하고 싶다. 하나님도 실제로 엘리야를 위로해주셨다. 먹이시고, 다시 힘을 내게 해주셨다. 하나님은 "이제 죽여주세요!" 말하는 엘리야의 간구대로 그를 죽게 두시지 않았다. 그런 마음을 가졌디고 책망하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위로하고 공급하시고 새힘을 주셔서 또 다시 주를 위해 일하게 하셨다. 당신의 자살충동! 하나님과 함께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이 힘주실 것이다!

  • 1 엘리야의 믿음은 자신감으로 가득하다! 그는 그냥 물을 붓는 정도가 아니다. 도랑을 파고, 물을 세번이나 가져다가 부어 제물이 흠뻑 젓게 만들고, 도랑도 물이 가득하게 만든다. 왠만한 불로는 불이 붙을수 없는 상황을 미리 만든것이다. 누가 시킨것도 아니다.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주목시키는 performance를 보여주고 있는것이다. 마치 "하나님을 주목하라!"라고 외치는것과 같아 보인다!

    그렇게 엘리야는 현장에서 일말의 의심이 없는 믿음! '만약'이라는 가정을 세우지 않는 믿음을 보여준다. 믿음이라 함은 자고로 원래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 어쩌면 나는 '불량품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운동 경기를 할때 프로는 아마와 다르다. 아마가 출발선을 밟고 있으면 경계하지 않고, 저기 10미터 더 앞에서 출발해도 됩니다! 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만약에!는 없다. 절대적 기량 차이를 알기 때문에 걱정이 없다. '공은 둥굴다!' '승부는 모른다' 이런 가정을 할수 없는 절대적 기량차가 존재한다. 엘리야가 지금 그렇다. 현장에서 일어나고있는 역사의 뒷배(?)를 안다.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절대적 기량'의 차이는 비교불가이다. 이것이 엘리야의 믿음의 근거이다! 하나님은 절대적이시다! 하나님만 살아계시다!

    결국 하나님은 실제 불을 내리는 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그 제물과, 도랑을 한순간에 말려버리셨다! 믿는자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참 드라마틱할때가 많은것 같다! 믿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대답은 그래서 많은 경우 나만 감동시키는게 아니라 주변 모든 이를 감동시킨다! '의심하는 믿음'이라는 말이 모순적이고 심지어 웃기지만 주변에 흔하게 존재하는 믿음이다. 오늘 이 엘리야의 믿음을 보면서 '의심하는 믿음'은 버리고 '의심없는 믿음'을 갖기로 다짐해 본다! 내가 이런 건강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속에서 살아갈때 이 모습을 주변에서 지켜본 자들도 오직 한분 살아계신 구원의 하나님께 나오게 될것이다. 이 시대의 '엘리야'로 살게 되길 기도한다!

    2 하나님은 큰 비를 준비하셨다! 기근을 해갈하는 비였다. 엘리야를 보라. 엄청난 불의 응답의 역사를 일으키고, 다시 비가 내리게 하고, 말과 같은 속도로 막 뛰어도다닌다! 말도 안되는 일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에게 이토록 선명한 기적을 계속 보여주신 경우는 모세외에는 잘 생각나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확실한것은 성경의 기록처럼 이 모든것은 하나님께서 가능케하신 일이다. 엘리야는 도구고 일은 하나님이 하신것이다. 엘리야가 위대해보이는게 사실인데, 실제 위대한건 하나님이시다!

    바우교회에 매순간이 기적이다. 적어도 내가 경험하는 바우교회의 매일은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기적이다! 기적의 향연 이랄까? 그리고 이 모든일을 가능케하신이가 하나님이시다. 기적속에 위대한 이는 나나, 그 누군가가 아니고 언제나 하나님 한분이시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 아합은 엘리야를 만나 그에게 따진다! 잔뜩 화가 나있다! '화'라는 단어로 다 설명할수 없을 지경이다! 그런데 아합은 여전히 엘리야의 부탁(사실 지시에 가깝다)대로 움직인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선지자여서?! 그렇다면 애초에 엘리야를 만났을때 "당신이 문제다!가 아니라 살려주세요!"라고 말했어야했다.

    나는 엘리야의 말대로 움직이는 아합이 그냥 자신의 성격?대로 반응한것이라고 생각한다. 아합왕의 이 행동은 왕이 보일만한 행동은, 특별히 대상에게 화난 왕이 보일만한 행동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합은 사실 성경에 드러나는 단면적인 면을 확대해 보자면 '팔랑귀 왕'이다. 그는 주변에서 하라는데로 움직인다. 그래서 가장 최측근인 아내 이세벨의 말을 듣고 바알을 섬기고, 엘리야를 미워하고, 선지자들을 죽이는 '무늬만 왕'의 역할에 충실했다.

    아합은 전형적인 팔랑귀다! 주변의 모든 말에 귀기울인다! 혹 한다! 주변을 들으니 좋은 리더라 착각할수 있다! 꼭 그런것만은 아니다! 분별하여 듣고 또 들은 말은 분별하여 행동할줄 아는 것이 참 지혜다! 모든것을 듣는게 곧 지혜는 아니라는 말이다.

    아합은 이게 없다 이세벨 말도 듣고 엘리야 말도 듣는다! 분별이 없고 무엇을, 누구를 따라야할지 모른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 기록된 백성들도 아합 왕처럼 갈피를 못잡고 상황을 지켜보고 유리한 쮹을 선택하려고 기다린다!

    세상의 모든 소리에 골고루 귀 기울이는게 좋은것 같지만 이는 어쩌면 교묘한 거짓이다! 애초부터 듣지 말아야하는 ‘이세벨의 말’과 같은것도 있다. 무조건 들어야하는 '하나님의 말'도 있다. 누구의 말을 듣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움직일것인가? 선택의 지혜와 바른 행동을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2 착각하지 말아라! 우상은 대답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만 바로 알아도 우상숭배는 하지 않게 된다! 우상은 죽었다!

  • 1 쉰들러리스트 라는 영화가있다. 유대인 학살중에 그들을 구해내려했던 쉰들러의 이야기다. 그는 그렇게 1000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살려냈다. 누군가는 세상의 왼악을 수긍하고, 모른척할때 누군가는 변화를 위해 할수 있는 노력을한다

    오바댜는 아합에게 (이세벨을 위한) 이 명령 자체를 바꾸라고 하지는 못했다. 어쩌면 그의 영역 밖의 일이었을것이다. 그러나 그가 할수 있는일을 했다. 그 와중에 100명의 선지자를 숨기고 먹인것이다.

    오늘 세상의 완악함 속에서 내가 할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정의와 구원을 위해서 할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나에게 세상을 구할 힘은 없다. 누구도 그런 힘은 없다. 그런 힘은 오직 예수님 뿐이다. 그러니 내가 할수 있는 영역에서 내가 할수 있는 일을 해야한다. 확실한건 오늘날도 세계 방방곳곳에 오바댜와 쉰들러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할수 있는가? 몇명을 구할수 있는가? 움직여야 할때다! 물론 쉰들러가 그랬듯, 오바댜가 그랬든 내가 가진 유무형의 것이 사용되고 희생이 필요할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필연적이다. 움직여야한다!

    2 오바댜는 엘리야를 만나고 가서 아합에게 전하라는 엘리야 때문에 난처해 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두려워한다. 용기있게 100명의 선지자를 살린 오바댜도, 하나님을 그렇게 경외하며 살고 있는 오바댜도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믿음이 있어도 삶의 매 순간이 이처럼 영적 전쟁이다. 이번에 승리했다가 돌아서면 다음에는 두려움에 지기도 한다.

    엘리야도 두려웠을 것이다! 당시 극심한 기근의 원인으로 지목된게 엘리야다! 나라의 원흉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믿음으로 아합에게 나가길 결정한다. (나중에 나오지만 그도 두려움에 지기도 한다)

    매 순간이 영적 전쟁이다! 두려움과 불신과의 싸움이다. 신앙은 어제의 승리에 도취되어 살지 않는다. 신앙은 어제의 영광으로 오늘이 보장되는게 아니다. 매순간이 전쟁이다! 매 순간 믿음을 선택하길! 하나님을 선택하길 기도한다.

  • 1 엘리야는 왠만해선 당황하지 않는듯 보인다. 사르밧 과부에게서 처음 들었던 말도 생각해보면 충격적이고 민망할만한 말이었다. "이거 먹고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당황하는 대신 "음식을 가져오시오! 하나님께서 채워주실것이요!" 라고 담담한듯(?) 말했었다. 오늘 본문의 기록은 더욱 당황스럽다. 과부의 아이가 갑자기 병들어 죽은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비극이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셨는데 얼마 안가 이런 일이 일어나면 있던 신앙마져도 흔들리는게 당연하다. 사르밧 과부가 보여준 행동이 딱 전형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또 담담해 보인다.

    골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엘리야는 이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드리며 아이의 부활을 위해 기도했다. '믿음'은 '기복신앙'의 천적이다. 믿음이 있으면 문제 앞에 신앙의 고저가 없다. 흔들리지 않는다. 담담하다. 일히일비하지 않는다. 문제가 문제가 아니여서가 아니다. 문제를 이기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반석이시다. 그게 오늘 내가 담담하게 살아갈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다!

    2 "이제... 진실임을 알겠습니다"(24절) '이제'라는 단어가 사뭇 충격적이다. 사르밧은 마르지 않는 기름병과 밀가루를 경험하고 있는 한 가운데서 이런 말을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경험하고 만나를 경험했지만 불만으로 가득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도 보인다.

    은혜 가운데 있으면서도 은혜인줄 모르고 언제나 '더 큰 은혜'를 갈망하는 것, '복'을 믿음의 근거로 삶는 삶은 위험하다. 앞서 말한것처럼 '기복신앙'은 그래서 우리가 신앙의 고저라는 골짜기를 헤매게 만든다. 기복신앙도 신앙의 '고'(peak)를 경험하게 하니까 괜찮다고 느껴지게 한다. 그렇지 않다. 사실은 여전히 골짜기를 헤매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기복신앙은 절대적으로 버려야한다. 기독교는 기복신앙이 아니다!

  • 삶의 모든 소망이 끊어졌을때 사람은 죽음을 생각한다. '이거 먹고 죽자!' 사르밧 여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완벽한 절망의 시간이다.

    바로 이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셔서 이 여인을 만나게 하신다. 표면적으로는 엘리야를 먹이시기 위해서 사르밧 과부에게 보냈는데, 얘기가 흐르는 것을 보니 사르밧 과부와 아이를 먹이기 위해 엘리야를 보내신 것이다. 그러나 이 기적을 위해 하나님은 사르밧과부를 한번더 더욱 어두운 절망의 심연으로 밀어붙이신다.

    내가 사르밧 과부였다면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돕는 손길이라고 기대했을지 모른다. '하나님의 사람'이라 부르는거보니까 그렇게 보였던지, 혹은 엘리야를 알아봤을 일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돕지 않았다. 오히려 여인에게도 없는 물과 밥을 달라고 했다. '사람'이 답이 되지는 못한것이다. 한편 하나님은 그 '사람' (엘리야)를 통해 절망가운데 있는 여인에게 소망이 되어주셨다.

    우리가 힘들때 사람이 다가온다. 마치 도와줄것 같다. 내게 소망이 될것 같다. 그러나 아주 자주 '그 사람'이 마지막 남은 나의 것까지 가져가려고 하는것을 경험할때가 있다. 절망이 끝인줄 알았는데 막장(광산 터널의 끝)이 더 남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막장에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보는 자들에 새로운 길을 여신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주 끝에서 새롭게 시작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은 "알파요 오메가, 처음과 나중되시는 분" 이시다. 우리에겐 끝이 하나님께는 시작일수 있다. (이는 하나님께는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고, 새롭지 않은 일이다!)

    엘리야는 본이 아니게 이 여인의 마음을 한번 더 후벼팠다. 그러나 이 행동을 통해 하나님은 세상 모든이에게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공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막장을 새장(new chapter)으로 바꾸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절망과 막장이 없는 삶이 되길 기도한다. 그러나 절망과 막장의 삶 속에서도 기적으로 새 길을 여시는 하나님을 보는 믿음을 놓치지 말아야겠다!

  • 문제의 아합이 등장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선대 어떤 왕보다도 악한 짓을 자행한 왕이다. 본인의 인생도, 나라의 신앙도 파탄의 지경으로 몰아넣은 사람이 바로 아합이다. 옆에서 아합을 부추긴 이세벨도 빼놓을수 없다.

    아합은 확실히 죄에 대해 무뎌졌다. 처음에 '우상의 제단'을 쌓아 올린 여로보암이나 후대의 왕들은 처음 죄를 행할때 마음한켠에 조심스러움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들이 믿고 알았던 여호와 하나님을 인식함에 있어서 여전히 자유하지 않고, 일종의 '눈치를 보는 제스쳐'라도 갖고 있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이런것을 경외라 부른다) 그러나 아합은 그런게 없다. 그가 '더 많은 죄'를 지을수 있었던것은 '많은 죄'가 이제 그에게 상당히 익숙해져버렸기 때문에 죄에 있어서 한걸음 더 나갈수 있었던것이다.

    죄에 무뎌지는게 참 무섭다. 이미 나도 '세대와 문화' 속에서 죄에 대해 많이 무뎌졌다고 생각된다. 무서운 일이다! 처음 죄를 지을때는 두렵고 떠는데 두번, 세번 반복되면 두려움과 떨림은 사라진다. 한 여인을 보고 '예쁘네!'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 그 사람과 바람을 피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확실히 죄에 있어서 무뎌진 것이다. 습관이 되어 더이상 '죄'로 인식되지 않고 있는 악한 행동이 있다면 확실히 죄에 있어서 무뎌진 것이다. 그런 경우라면 반드시 과거, 혹은 그 누구보다 '더 많은 죄'를 짓는 삶을 살게 될것이다.

    죄에 있어 다시 불편해져야한다. 다시 괴로운 마음이 되야한다. 참담한 마음이 되야한다. 더나가 죄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마음이 있어야한다. 돌이킬수 있다! 돌이켜야한다!

    2 여리고성은 다시 짓지 말라고 하셨다. 지으면 죽는다고 하셨다. 그러나 히엘이라는 사람이 다시 여리고를 건축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들을 잃게 되었다. 도대체 선악과와 무엇이 다른가? 분명히 하지 말라고 하셨다. 결과도 말씀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죄를 선택한다! 때문에 히엘의 두 아들은 생각지도 못한 때에 죽임 당하고 말았다. 안타까운 인생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메세지를 우습게 보면 안된다. 사회적 문제가 된지 오래인 '촉법소년'들이 계속 죄를 짓는 이유는 심판을 우습게 보기 때문이다. '어차피 안잡혀들어가!' 사회의 정의 시스템을 비웃고 있는 행태이다. 하나님 앞에서 히엘 같은 사람은 하나님을 우습게 보는 '영적 촉법소년'이다. '어차피 용서받아!'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절대적이고, 정의가 실현된다. '촉법소년'같은거 없다. 하나님의 심판의 메세지 앞에 '은혜의 메세지'를 세우고 그것을 죄를 지어도되는 이유로 삼지 말라!

    아닌것은 아닌것이고, 하지 말아야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한다

  • 1 시므리의 인생에 대해서 잘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가 반란으로 왕위에 올랐고, 칠일동안 왕으로 군림하며 죄를 짓다가, 오므리와 대적하게 되자 성을 불태우고 자신도 자살해 버린 인물로 알고 있다. 그러니 이렇게만 보면 그는 그저 악인이고, 실패하기에 적합한 사람인지 모른다.

    시므리는 누군가? 군대장관중 한명이다. 오므리도 한켠에 군대장관이라면, 또다른 한켠에 축을 이루는 군대장관이 바로 시므리였다. 아무나 군대장관 되는거 아니다. 군대를 움직이는 힘, 그것도 그렇게 많은 군대를 움직이는 힘은 아무나 받는게 아니다. 시므리는 인정받는자, 신뢰받는자, 전쟁의 용맹한 용사, 그것도 꾸준히 그 자리를 지킨자 일 가능성이 크다. 그는 그렇게 군대장관이 된 사람이다. 그러니 그냥 단편적으로 '시므리=나쁜사람'이라고 낙인찍으면 안된다.

    그러나 결과를 논하자면 시므리는 결국 악인이되었고, 자살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것은 맞다. '화무십일홍'이라고 했다. 잘된자도 금방 시들수 있는것이다. 시므리는 군대장관까지, 그리고 반란으로 왕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결국 칠일천하로 끝났다.

    좋은것을 계속 좋게 유지하는 힘이 필요하다! 성공을 계속 유지하는 힘이 필요하다. 운동을 한지 몇년이 지났다. 건강을 계속 유지하는 힘이 필요하다. 나의 성공이 실패의 이유가 되지 않도록 '유지하는 힘'을 집중하겠다! 버텨내는 힘, 지켜내는 힘에 집중하겠다! 칠일천하가 되지 않도록!

  • 눈살이 찌푸려지는 이야기가 있다. 듣는것만으로 '기 빨리는?' 그런 이야기가 있다. 오늘 본문이 그렇다. 바아사도 그렇고 그의 아들 엘라도 그렇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반란에 반란이 거듭되지만 여전히 죄악은 반복되는 이스라엘 역사를 보는게 벌써부터 마음이 지치고 심난하다.

    그 와중에 눈을 사로잡는 한절이 11절이다. 시므리는 반란을 일으키고 왕이 되자 바아사의 온 집안 사람들을 다 죽였다. 가족, 친족 할것없이 죽였는데 거기에 '친구'가 들어갔다! 이 말을 읽는데 다시 한번 상기되는 도전이 있었다. "누구랑 어울리는지가 중요하다!" 참고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과 같았다 했고, 모세는 하나님과 친구같이 대화했다고 했다.

    인간관계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것중에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대를 막론하고 우리는 인간관계에 묶여 서로 도와주고, 도움 받으며 살았다. 서로를 향한 영향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것이다. 혼자 사는 사람은 없고, 혼자 살수도 없다. 그래서 애초에 아담으로 시작하셨다기 보다는 '아담과 하와'로 시작하셨던것이다.

    그러니 '인간관계'를 맺지 말고 살아라! 말할수 없다. 그러나 인간관계를 정리할 필요는 있다. 인간관계속에 성숙한 분별이 필요하고, 거룩을 지키는 용단이 필요하다. 휩쓸려서 '강남'가서도 안된다. '아무나' 만나서도 안되고, 유익만을 쫓아 만나서도 안된다. 누구를 만나는가? 더 나가 누구와 '친구'가 되느냐 같은일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기에 항상 신경써야 한다. 자칫 '바아사나 엘라의 친구'가 되면 생각지도 못한날 같이 망할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여전히 친구 잘못사겨서 망하는 사람이 많다. 이것은 부인할수 없는 fact다!

    하나님과 친구하기! 아무나랑 친구하지 않기! 인간관계 정리하기! 누군가에게 좋은 친구 되어주기! 잊지 말아야할 삶의 중요한 덕목이다!

  • 이제 나답의 시대가 열렸다. 여로보암이 22년을 재위했고, 그 긴세월을 지나 나답의 시대가 이제 열린것이다. 나답의 입장에서는 이제서야 날개가 달렸고, "내 세상이다!" 할수있다. 그러나 그의 세상은 실제 2년도 채 가지 않고 반란으로 인해 막을 내렸다.

    아무리 '내 세상'이 되도 내가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않으면 빼앗기기 마련이다. 내가 죄를 짓고, 잘못하면 빼앗기기 마련이다. 잘못된 길을 걸으면 '내 세상'(?) 오래 유지할수 없다. 세상의 회사를 봐도 높은 자리 승진해도 얼마 못가는 사람이 있다. 기껏 임원 달았는데 실수하고, 횡령하고, 불법을 행하면 회사 회장이 다시 그 자리 빼앗아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회사의 생리상 이게 쉽지는 않겠지만, 하나님은 절대주권자로 줬다가 빼앗기도 하신다!) 심지어는 대통령도 탄핵받고 그 임기를 채우지 못하는 일도 있다.

    그러므로 '무엇이 되는가?'보다 중요한것은 '어떻게 살것인가?','무엇을 할것인가?' 라는 질문이다. '내 시대'가 열린것 같을때도 겸손해야 하며 거룩해야한다. (나답의 경우 아비의 잘못된 길을 답습하기보다는 개혁을 했으면 어땠을까? 때 마침 남유다 아사도 개혁중이었는데 말이다)

    물론 내가 잘(?)한다고 언제나 '영광의 시대'가 길게 보장되는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수 있는 일을 멈춰서는 안된다. 오늘을 어떻게 살것인가? 무엇을 할것인가? 확실한것은 나답처럼 세대의 악함을 그대로 따라서 살수는 없다는 것이다! 죄를 가벼이 여기고, 책임을 가벼이 여기고 살수는 없다는 것이다.

  • 1 개혁을 할때 걸림돌이 많다. 그중에도 가족이 연결되어있으면 더욱 까다롭다. 남이면 모른척하기도 쉬운데 가족이 얽혀 있으면 자칫 망설이게 되거나, 모른척하게 되는 일도 생긴다. 예컨대 부정을 척결하기 위해서 추적하다 보니 그 피라미드 맨 위에 '국회의원 아버지'가 있다거나, 회사의 비리를 정리하기 위해서 내사를 시작했는데 그 가장 위에 '횡령한 어머니'가 있다거나 하면 자식은 망설이게 된다 라는 것이다. 수많은 영화들은 사랑하는 여인의 잘못을 덮어주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남주인공의 서스펜스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아사는 나라를 개혁한다. 영적 개혁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데 그 한가운데 어머니/할머니가 있었다. 조선의 역사를 보면 이럴때 왕은 대비마마 눈치보느라 아무것도 못한다. 그런데 아사는 개혁을 단행한다. 그렇게 태후를 폐위하고 우상을 찍어내 버리는 것이다.

    인생을 개혁할때, 생각을 개혁할때, 사회를 개혁할때 걸림돌에 주춤대지 말아야한다. 나름의 이유를 변명 삼아 개혁을 멈추지 말라! 개혁을 위해 가까운 이 혹은 사랑하는 이가 어려움을 겪게 되더라도 정의가 실현되야 한다면, 개혁이 바른 길이라면 고집해야한다. 생각해보면 애초에 개혁에 있어 방해는 필연적이다. 그러니 모든 개혁의 현장에서 멈추거나 주춤대지 말자! 포기하거나, 모른척하지 말자! 개혁이 필요하면 돌파해야만 한다!

    2 바아사는 남 유다를 공격하는 의미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막는다. 북 이스라엘에서 연중행사로 예배드리기 위해 남유다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것이 매우 불편하고, 걱정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백성이 그렇게 남유다에 정착하면 어쩌지?'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바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막는것이다. 예배의 길을 막는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육지책'이다. 무슨 말인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막는것은 '예배를 막는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북 이스라엘 백성들도 제대로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결국 북 이스라엘에서 '우상숭배'로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 바아사는 자기가 살고, 북 이스라엘이 살려고 부지간에 오히려 자신을 죽이는 계획을 실천한것이다.

    예배를 막으면 죽는다. 다른거 다 살고, 돈도 많고, 백성도 많고, 힘도 많아도 하나님 없으면 죽는다.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으면 죽는다. 보라! 영원한 제국은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님 없이는 '영원한 나라'는 없다. 미국도 영원할리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천국'만이 영원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진정한 예배를 지켜야한다. 하나님과의 진정성 있는 관계를 항상 지켜야한다. 사는 길은, 영원히 사는길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고 예배함에 있다. 예배를 회복하라. 예배의 방해를 뛰어넘으라. 예배의 자리를 지키라.

  • 1 앞으로도 열왕기의 기록속에서 반복되겠지만 하나님은 왕의 행적을 '성취나 실패'로 판단하지 않으신다. 승리나 패배로 판단하지 않으신다. 성경의 기록은 그의 마음, 하나님 앞에서의 그들의 자세로 판단된다. 하나님은 아비얌의 시대에 여전히 다윗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런 다윗조차도 전쟁의 승리와, 성취로 인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의 정직한 태도와 거룩했던 태도로 인정하셨다.

    세상은 성취와 화려한 이력에 집중한다. '나'라는 사람을 정의하고 증명할때 이력과 성취가 중요하다. 조금더 성숙한 회사 문화라고 한다면 인격이나 인간관계를 살피기도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것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태도, 하나님 앞에서의 진심'을 살피신다.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성취로 증명하지 않는다. 승리로 증명하지 않는다. 성공으로 증명하지 않는다. 지위와, 권력, 이름과 유명세로 증명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시선 속에서 산다. 하나님의 인정을 바라며 산다.

    2 오늘 내가 잘되는것은 나의 덕이 아니다! 성공한 사업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사용하는 단어가 있다. '운'이다. 자신이 어찌할수 없는 영역과 순간들을 모두 경험한 것이다. 이들 모두는 노력과 성실, 최선과, 용기, 도전, 겸손과, 인내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성공은 결국 '운'이라는 단어의 개입을 통해서 어느샌가 완성되어가고 있었다는것이다. 누군가 이를 신앙적인 단어로 표현하자면 '은혜' 혹은 '섭리'라고 하기도 할것이다.

    오늘 아비얌 3년 시절동안 그의 나라가 완전히 망하지 않는것은, 그가 다윗 성에 장사되는것은 그의 덕에 의함이 아닌 선대왕이였던 다윗을 통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였다.

    우리는 '인과'로 사는것 같지만 틀렸다. 우리는 '은혜'로 산다. 인과의 굴레가 아주 강력하게 작용하는것은 맞다. 그러나 모든것이 인과는 아니다. 그러면 '성실한 사람'은 모두 성공해야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있다.

    많은 경우 친구 잘 둬서, 가족을 잘 둬서, 이웃을 잘 둬서, 부모를 잘 둬서, 지인을 잘 둬서 오늘 이 은혜를 누리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에 삶의 이곳저곳에서 생각지 못한 은혜를 누리며 사는것이다. 교만하지 말자! 우쭐대지도 말자! 내 덕인양 착각하지도 말자! 그저 감사하고, 겸손하고, 빚진자의 마음으로 살자!

  • 1 죄의 나비효과가 시작되다! 솔로몬은 이방여인들과 결혼하기 시작했고, 이스라엘에는 다윗의 시대와는 다르게 많은 우상이 빠르게 정착했다. 그 결과 '우상숭배와 악행'은 솔로몬의 대를 이은 르호보암에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왕이 흔들리니 백성들도 당연히 흔들렸다. 죄는 굴려놓은 눈덩이처럼 그렇게 점점 부풀어 올라 온나라를 파멸시킬 거대한 눈덩이가 되었다.

    지금 미비한 죄의 효과는 일정기간을 지나 어떤 결과물로 다가올지 모른다!

    최근 몇년간 한국에서 계속 회자되고 있는 사회적 문제가 바로 낮은 출산률이다. 0.72까지 그 수치가 낮아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는 한 방송사에서 전문가가 언급했듯이, 지금 100명이 100년후, 즉 한두세대를 넘기 전에 25명으로 줄어드는 수치를 의미하며, 이는 동물의 종의 역학으로 보았을때 '멸종위기종'이라는 뜻이다. 지금 당장에 나 한명이 애를 안낳는것이지만 이 결과는 불과 한두세대만 지나도 '멸종'을 논할정도의 어마 무시한 문제라는 것이다.

    오늘 죄가 보여주는 '미비한 변화'에 안도하지 말자! 나의 죄가 불러올수 있는 파장의 위험을 인지하자. 부지중의 지은 죄도, 실수도, 의도적인 죄도 모두 위험하다! 나의 자녀가 그대로 보고 배우거나, 그 영향력을 결국 벗어나지 못할것이다. 우리는 '연좌제'는 틀렸다고 말하지만 어느 사회나 '연좌제'는 감정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안다. 죄의 심각성을 반드시 기억하며 하루, 매순간 죄와의 치열하게 싸워 이겨야한다. 내안에 함께 거하시는 그리스도께 내 인생의 방향과, 욕망을 맡길때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될것이다.

    2 무쓸모 리더, 더 나가 해악한 리더! 르호보암은 17년간이나 그 자리에 있었다. 르호보암은 자신이 얼마나 쓸모없고, 더 나가 해악을 주는 리더임을 알고 있었을까? 이 모든 고난의 주된 원인중에 하나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어쩌면 솔로몬 핑계대고, 여로보암 핑계대고 있었을까?

    사람은 얼마든지 긴 세월동안 전혀 변하지 않고 일관되게 못날수(?)있다. 인지와 변화, 회개와 사과가 없이 어떻게 변하겠는가? 소름돋는 순간이다. 나도 알고보면 '르호보암'인데 모르고 계속 교회를 섬긴다고, 성도를 섬긴다고 착각하면서 온갖 쓸모없는 행동을 하거나 해악한 짓을 하고 있을수도 있다. 지금 당장은 전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르호보암도 그렇게 생각했을수 있지 않은가?

    리더는 섬김의 시간을 헤아리지 않고, 내 자신의 언행과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 1 나라의 치리가 잘못되가고 있을때 그는 아히야 선지자를 찾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이 아프자 자신의 아내를 아히야 선지자에게 보내 아들이 어떻게 될지를 알아본다. 부모의 마음이 다 같다!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을 것이다. 아마 '아히야라면 어떤 방법이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아히야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궁금했을 것이다. 하나님께 치료해 달라는 간접적인 메세지 전달이었는지도 모른다.

    참 속보인다. 살만하고, 누리고, 권력있고 그럴때는 하나님 찾지 않는다. 나름의 방법과 힘으로, 지혜와 재정으로 해결해보려고 한다. 평안할때 오히려 하나님을 찾아 바른길을 계속 걷는지 확인해야하는데 그런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힘들때, 어려울때, 고난중에 있을때만 하나님의 도움을 갈망한다. 하나님의 뜻을 그제서야 궁금해한다.

    하나님은 여로보암의 이 '간접적 간구'를 단칼에 거절하셨다. 아들 아비야의 죽음을 명확하게 선포하셨고, 그의 집안과 나라의 멸망에대해서도 명확하게 얘기하셨다.

    좀더 빨리 하나님을 찾아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로보암이 조금만 더 일찍 아히야를 찾고, 하나님의 책망속에서 회개하고 바른길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놓을수 없다. 고난중에 하나님을 찾을것이 아니라, 매순간, 선택의 기회들 속에서, 분별이 필요한곳에서, 기준이 필요한 곳에서 미리미리 하나님을 찾아야할것이다.

    2 아히야는 눈이 잘 안보인다. 그러나 이를 모르는 여로보암의 아내는 변장을 하고 그를 찾아온다. 그러나 그마저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들통나고, 아히야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도 여로보암 아내의 변장을 알아보고 꾸짖는다. 성령이 말씀해주시니 아무리 잘 안보이는 아히야라도 단번에 여로보암의 아내를 알아보는것이다.

    하나님 앞에 가리려고 애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보신다! 그분앞에서 숨길수 없다.우리는 가면을 쓰고 '잘못보는 세상'을 간혹 속이기도 한다. 세상은 '보지못하는 아히야'와 같다. 볼것같지만? 보지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상은 여전히 서로 보는척하고, 또 숨기며 그렇게 서로를 속고 속이며 사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내 얼굴을 아무리 가려도, 하나님을 속일수는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숨을수 없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야 세상의 '가면'을 분별할수 있다. 어떻게해도 하나님의 눈을 피할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삶에 정직이 잡힌다. 하나님께서 보게 하시고 분별케 하셔야 볼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내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 시작할수 있다. 잊지말자!

  • 혼탁한 세상, 예언자도, 선지자도 제몫을 못하여 혼돈가운데 있는 시절을 보는듯하다. '하나님의 사람'도 결국 하나님의 뜻을 분별치 못해서 죽임 당했고, '늙은 예언자'는 하나님의뜻을 알아차렸지만 여전히 왕과 백성에게 옳은 소리를 다시 전하지 않는다.

    선지자도, 예언자도 자신의 역할을 못한다. 덕분에 여로보암왕은 더욱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로 인해서 북 이스라엘 백성들도 갈피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누가 정신을 차릴 것인가?

    정치인이 제 역할을 못하고, 목사가 제 역할을 못하고, 아빠가 제 역할을 못하고, 서로가 서로의 잘못을 보면서도 바로잡아주지 못하고, 사회는 속고, 분별하지 못하고, 완악한 일이라고 알려줘도 계속 반복하고, 나 살기 바쁜 세상, 오늘날도 전혀 다르지 않은 세상이다. 가정, 학교, 사회, 나라, 교회도 혼탁하고, 방황하는 듯 하다.

    맡겨진 역할만 의롭게, 성실하게, 겸손하게, 용감하게 감당한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살기 좋고, 더 바르게 될것이다. 틀림 없다. 그런의미에서 이는 내 책임이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맡겨진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할을 이 시대에 잘 감당할수만 있다면, 옳은 소리를 내고, 의로운 결정을 내릴수만 있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덜 혼란한 시대가 될것이다. 나는 오늘 무엇을 해야하는가? 내가 걸어야할 정도는 무엇인가? 어떤 말을 해야하는가? 무엇을 분별해야하는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써 해야할 일을 하자! '늙은 예언자', 즉 나이에 상관없이 끝까지 해야할 일을 하자!

  • 하나님의 사람은 왜 속았을까?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늙은 예언자가 사용한 이 두가지 수법은 수많은 이들을 속인다.

    우리는 '같다' 라는 소리에 맘을 참 쉽게 연다. 고향이 같아서, 학교가 같아서, 직장이 같아서, 나이가 같아서, 취미가 같아서 사람들은 쉽게 듣고, 믿는다. 원래 그래서 사기꾼의 법칙을 보면 무조건 '공감대 형상' 내지는 '연결고리찾기'가 제1번 기술과 같다. 같다고 해도 분별없이 믿으면 안된다. '같음'이 '옳음'을 증명하지 않는다. '같음'이 주는 반가움과 안도가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실수를 만들어 내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사람 조심! 사기 조심!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에 참 쉽게 맘을 연다. 당연하다.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믿는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에 속아 이단으로 빠진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가?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여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쉽게 가져다 붙인다. 심지어 목사들도, 성도들도 분명히 자신의 의지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져다 포장하는 일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분별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누군가 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는 당연히 분별해야한다. 물론 어렵다. 속이려고 맘 먹고 달려드는 사람에게 속지 않는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별할수 있다.

    USPS 택배를 기다리는데 때마침 USPS에서 우편주소가 잘못되서 짐을 보관하고 있으니 아래 링크를 눌러 주소를 확인하라고 문자가 온다. 그러면 나는 그 링크를 누르지 않고 구글에 가서 해당 USPS홈페이지를 방문, 그곳에서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한다. 보내온 링크를 누르는것이 쉬울지는 몰라도, 자칫 악성코드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분별하는 삶은 한참 번거롭고, 불편하고, 부지런해야하는 삶이다. 그러나 이시대에 필요로 하는 삶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늙은 예언자의 말을 듣고 확인의 과정을 위해 평소와 같이 하나님께 재차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어야 했다.

    분별하는데 조금더 힘과 열정과, 에너지와, 부지런함을 사용해야겠다.

  • 하나님이 지목한 사람이 여로보암이다! 여로보암이 솔로몬 왕을 이어 10개의 지파를 가지고 새로운 나라를 시작하겠다고 하나님께 먼저 기도한게 아니다. 하나님이 여로보암을 선택하셨다. 그런데 여로보암이 보여주는 면모는 참 안타깝다. 애초에 우리의 마음까지 아시는 하나님이 왜 이정도 수준의 사람을 골랐는지가 이해가 안갈 지경이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니었던듯 하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솔로몬 왕에게 나갈때도 백성들의 대표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용맹한 사람이다. 추진력도 있고, 리더십도 있다. 그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는것도 알고 있는 신앙의 사람이다. 그런데 '자리'가 일순간 그를 바꾼것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그 마음이 안타까웠을까?! 하나님은 복을 주셨는데, 여로보암은 그것을 저주로 바꿔버렸다. 그의 의지, 그의 선택, 그의 악행이다!

    하나님의 지목이 중요하다. 그러나 지목만큼 중요한것이 그 이후의 삶이다. 하나님은 왜 나를 목사로 부르셨을까? 당연히 잘나고, 준비되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나를 지목하셔서 오랜 시간 다듬으셔서 오늘날 바우교회를 섬기는 개척도구가 되게 하셨을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여전히 나는 아슬하고, 위험하다! 나는 자칫 '여로보암 수준'의 사람이기 쉬운 인간이다. 우리는 가끔 '목사'를 보면서 "하나님은 애초에 왜 저런 사람을 목사로 부르셨지?" 의아해 할때가 있다. 슬픈일이다. 여로보암이 당했을 법한 일이다. 나는 저런(?)목사는 되지 말아야겠다. 주 안에서 정신을 더욱 바짝 차리기로 다짐해본다!

    누군들 이 도전 앞에서 자유로울수 있을까? 모두 더욱 바짝 정신 차리기로 다짐해야한다!

  • 여로보암은 시작부터 대차게 말아(?)먹는다.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지키면 견고한 집을 세워주리라"(11:38절) 약속 받았는데도 두려움과 망상에 사로잡혀 금송아지 형상 만들어, 급조된 날짜에, 급조된 장소에서, 제사장도 없이 맘대로 제사를 드리게 한다. 여로보암의 이 말을 듣고 10지파의 수많은 백성과, 각 지파의 리더들이 아무런 반론이 없었다는것도 너무 황당하다. 오늘 말씀은 심지어 백성들의 충고로 금송아지를 지었다고 하니 더욱 놀라울 일이다.

    불신하면 하나님께서 일을하셔도 그 일을 깨닫지 못한다. 여로보암이 두려워할때 하나님은 한켠에서 전쟁 일으켜 나라를 되찾으려고 한 르호보암도 막으셨다. 불신하면 이런 하나님의 역사는 보지도 못하고 실수하는것이다. 하나님께서 일을 안하고 계신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내 삶에 여전히 기적을 일으키고 계신데 내가 믿지 못하니까, 사람의 눈으로 판단하고 계산하니까 이와 같이 실수가 발생하는것이다.

    이번 주일부터 새로운 장소에서 바우교회의 예배가 다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하신일이다. 그러나 두려움과 불신, 망상에 빠지면 축복의 자리가 될수 있는 그곳에서 오히려 망조의 걸음들을 사방으로 내딛을지도 모를 일이다! 기껏 하나님께 맡기고 따르다가, 이제부터는 내 힘으로 하려고 하면 딱 '여로보암 꼴'되기 쉽다. 그러므로 과거처럼 계속 하나님께서 일을 해나가심을 믿고 따라야한다. 언제나 나는 하나님의 도구일뿐임을 잊지 말아야한다. 내가 서있어야할곳에 서있고, 해야할 일을 해야한다. 사람에게 시선이 빼앗겨서 마음 흔들린 여로보암처럼 되서도 안된다. 벌써 '내것'에 집착하기 시작한 여로보암처럼 되서도 안된다. '만약'이라는 망상에 굴복하는 여로보암처럼 되서는 안된다. 불신은 더더욱 안된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바우교회의 새로운 예배의 터전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뤄지길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 1 르호보암은 젊은이들의 조언을 선택하고 백성의 말을 무시했다. 그 결과 나라는 둘로 갈라지고, 자신의 왕으로써의 입지는 완전히 줄어들었다. 이는 모두 아버지 솔로몬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일을 진행하시기 위해서 개입하신것에서 비롯되었다. (15절)

    르호보암의 결정에 개입하셨다니 자칫 불편한 감정이 든다. '하나님께서 나의 선택에 개입하신다고?! 그러면 나의 선택이 나의 선택이 아니란 말인가?''나의 잘못된 선택에 대해서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해도 된다는것인가?' '나는 자유의지를 발현하여 선택하는것이 아니란 말인가?' 여러가지 생각을 하는 나와 사람들이 있다.

    오늘 말씀에 "이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으로"는 심판으로 이해해야한다. 솔로몬 왕조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그 심판을 하는 과정에서 르호보함이라는 자를 사용하신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에 자주 반복되는 심판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개인도 사용하시고, 나라도 들어 사용하시는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므로 이 말씀만 보고 잘못 오해하여 하나님이 개인의 삶의 생각과 선택을 당신 맘대로 이리저리 바꾸시고 강압하시는 분이라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선택을 존중하신다. 우리 하나님은 인격적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심지어 다윗이나, 솔로몬이 죄짓는 결정을 내리는 그 순간에도 안타깝고, 의분이 일어나셨을테지만 그들의 선택을 개입해서 강압적으로 바꾸지 않으셨다. 그러나 심판은 하나님의 권세이며, 하나님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때는 당신의 온전한 주권과 권세대로 행하신다!

    선택할수 있는 축복속에 살때, 그러므로 선을 선택해야한다. 언제나 하나님을 선택해야한다. 내게 주어진 선택의 권리와 축복이 하나님의 심판의 권세앞에 회수되지 않도록!

    2 남유다의 시작이 암울하다. 결국 나라는 둘로 쪼개졌고, 그마저도 10개의 지파가 북 이스라엘이 되었다. 성경은 그런 남유다를 '다윗의 집'이라고 표현했다. 어찌보면 당연하다 할수있지만 르호보암으로 나라가 재편되는데 '르호보암의 집'이라고 표현되지 않는것은 그의 리더십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리더십인지를 묵상케한다.

    내가 뭐라도 된것마냥!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허세로 가득한 사람들! 사업이 조금만 성공해도, 이력이 조금만 화려해도, 프로젝트가 유려하게 성공해도, 인기가 조금만 올라가도 사람들은 금방 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르호보암이 오늘 자신의 잘남으로 그나마도 남유다의 왕의 자리의 오른것이 아니듯, 나의 성공도 오롯이 나의 잘남으로 이뤄진것이 아님을 알아야한다. 타인의 도움, 은혜, 사랑과 이해, 용서와 인내가 있었을것이고, 또 더나가 하나님의 도우심과 섭리가 있었을 것이다.

    겸손은 필수다! 겸손이 답이다!

  • 1 여로보암은 먼저 앞서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이미 이 나라의 열지파를 자신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솔로몬 이후라고도 말씀하셨다. 그러니 솔로몬이 죽으면 짐챙기고 돌아와 왕위에 깃발을 바로 꽂을수 있다. 그러다가 르호보암이 공격해오면 사람들과 함께 르호보암과 대적할수 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먼저 르호보암에게 가서 머리를 숙이고 나라를 잘 다스려줄것을 부탁한다. (물론 약간 강력한 어조같아 보이는것도 일견 사실이다!)

    설레발이 얼마나 많은 일을 망치던가? 중구난방 날뛰다가 될것도 안되게 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지막까지 때를 기다릴줄 아는자, 섣불리 호들갑 떨지 않는자, 절제하며 분별할줄 아는자, 무례하지 않은자가 되야겠다!

    2 어떤 회사의 리더들은 "나는 듣는 리더야!"라고 우쭐된다! 듣는 리더는 시작에 불과하다. 듣고 옳은 것을 선택하는 리더가 진짜 필요한 리더이다.

    듣는다고 다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것은 아니다. 르호보암에게 다윗의 충신들은 최선의 조언을 해주었다. 그 후 솔로몬의 젋은 친구들은 최악의 조언을 해주었다. 더 최악은 솔로몬이 후자의 충고를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이럴꺼면 뭐하러 들었냐?!" 라고 따져묻고 싶다!

    내 모습이다! 참 많이 듣지만 들은데로 살지 않을 뿐더러, 최선의 조언을 들어도 그 조언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 인생도 너무 많다.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안에는 내가 들어야할 말 투성이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의교육'이 가득하다. "사람으로 온전케하고, 모든 선한일을 하기에 온전케하기"위한 하나님의 최선의 말씀인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주 르호보암처럼 '내 주변'인의 '내귀의 캔디'에 더욱 귀 기울인다.

    최선을 선택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지혜를 선택하는 분별이 필요하다. 옳은것을 구분하는 눈이 필요하다. 내 눈에, 내 귀에, 내 잎에 달콤한것은 언제나 안좋기 마련이다! 잊지 말자!

  • 1 타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바로 다윗이다. 솔로몬은 우상숭배로 '버린패'가 되었다. 하나님은 대적을 일으키셨을뿐만 아니라, 여로보암을 시작으로 왕국을 분열시킬 계획을 짜셨다. 그런데 굳이 이 분열이 여로보암으로, 그리고 솔로몬 이후에 일어나게 되는것은 다윗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로 정리되는 인생이다. 하나님은 그를 기뻐하셨고, 사랑하셨고, 인정하셨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오늘 솔로몬은 그나마 불행중에 일종의 '다행'을 얻게 된것이다. 타인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칠만한 사람! 다른 사람들이 이득을 보게 하는 사람, 축복의 통로가 되는 사람, 다윗같은 자가 되고싶다.

    2 코인도, 주신도 최고점에서 최저점으로 곤두박질 친 사람들의 상실감을 형언할수 없다. 물어보면 '할말하않'이다. 솔로몬도 '할만하않'이다. 마냥 슬프다. 인생의 최고점에서 최저점을 향한 사람이다. 주식을 안해서 모르지만 "저점에서 사서 고점에서 팔아라!" 아닌가? 솔로몬은 분명히 저점에서 시작한 인생이다. 그는 다윗의 정실부인의 자녀도 아니지 않았던가? 첫째도 아니지 않았던가?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기회를 주셨다. 그리고 기회를 잡자, 최고점이라는 축복으로 인도해주셨다! 그러면 거기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데 본인이 앞장서서 작전(?)짜고, 물타기(?)하고 그래서 최저점 찍더니 아웃됐다. (오~ 이렇게 쓰고보니 주식 하는사람같다.ㅋㅋ 영화를 조심해야겠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최고점'에서 더 나가고 싶고, 더 욕심부리고싶고, 더 맘대로 하고 싶을때 자중하자! 결국 욕심이 사단을 만들듯, 방탕과 방종이 공든탑을 무너뜨리듯 절제하고, 경계하고, 분별하고, 자중하고, 겸손해야겠다! 솔로몬의 경우는 이방의 아내들이 솔로몬을 흔드는 '주변사람'이었다. 특별히 주.변.사.람.얘.기.에 휘둘리지 말아야겠다!

  • 1 일본은 세계2차대전때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온세계를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들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 잠자던 사자의 콧털을 기어이 뽑고 만것이다. 그렇게 하와이 진주만 폭격은 미국을 분노케했다. 그리고 미국은 자그마치 핵을 준비했다

    지금도 미국은 '천조국'이라고 불리는 나라이다. 국방비에 일년에 천조 가까운 돈을 쓴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라고 했다. 그러니 만약 미국이 어떤 나라를 대적하여 무기를 준비하거나, 전쟁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미국의 적국은 절제절명에 위기에 처하는 것을 피할수 없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미국이다! 거의 끝장났다고 보는게 정확하다.

    솔로몬에게 대적이 생겼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우셨다. 솔로몬은 그렇게 '핵'을 만났다. 그것도 일본처럼 한개가 아니고 두개였다. 하닷과 르손이었다. 그는 피할수 없다. 이길수도 없다. 하나님이 다시 하닷과 르손을 멈추지 않는 이상 솔로몬에게 소망은 없다.

    그러니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뽑는 어리석은 행동'은 절대 하지 말아야한다. 그 옛날 일본이 미국을 건들면 안됬던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심기를 자꾸 건드리면 안된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야지,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대적을 일으키시기라도 하는 날이면 내겐 소망이 없다. 하나님께서 잘해주실때 잘해야겠다!

    2 작년 언젠가 앓던 이가 있었다. 어찌나 아팠던지 저녁내내 한숨도 잠을 못이룬 적도 있었다. 결국 참다 못해 밤을 꼴딱 지새고 새벽녁에 치아 치료를 받기 위해 달라스까지 갔던 적이 있다. 대략적인 검사를 받고 진통제를 받아 다시 오스틴으로 돌아왔다. 견딜수 있을것 같았다. 그렇게 항생제와 진통제를 먹으며 2주를 보냈다. 버텼다는 말이 맞다. 한순간도 아프지 않은적이 없었다. 고통이 나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느낌이랄까?

    결국 나는 또 다시 두번째 새벽녁에 치과를 향했다. 그리고 그날 그냥 그 이를 뽑아버렸다! 얼마나 시원하던지! 정말 신기하게 이를 빼고 나자 고통이 사라졌다!

    그러나 솔로몬은 슬프다! 하닷과 르손을 뽑아낼수 없다. 오늘 말씀의 기록처럼 일평생 솔로몬은 이 둘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앓던 이다! 사라지지 않는 고통, 사라지지 않는 불편함, 사라지지 않는 괴로움 그런데 이 모든 고통은 솔로몬 자신이 불러온 불행이었다. 마치 나를 고통스럽게 하던 이가 나의 잘못된 칫솔질 습관에서 시작된것처럼 말이다.

    내 인생을 끔찍하게 만드는것은 어쩌면 나의 실수와 어리석음에서 오는것이다. 조심하자! 자칫 평생 빼지도 못할 '대적'을 만나 고단한 인생을 살아야할지 모른다.

  • 1 솔로몬의 유명한 여성편력! 이것은 확실한 문제다. 그는 육체의 욕망, 관계의 욕망을 여성편력으로 채우고 있다. 그에게 부족한것이 없어 보인다. 지혜도, 재정도, 권력도, 인기도 부족함이 없어보인다. 무엇보다 그는 표면적으로 하나님의 선택과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내 눈에는 그가 벌써 짙은 '허무함'속을 헤매는 방황하는 인생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뭘 그렇게 찾아 헤매는가? "당신이 전전하는 '1000명의 여자들'에게서 답을 찾을수 없다!" 라고 말해주고 싶다.

    뭐가 그렇게 부족해서, 뭐가 그렇게 불안해서,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여성편력'에 빠져 인생을 허비했을까? 그렇게 쉽게 우상숭배자가 되었을까? 너무 풍족해서 흥청망청 한것인가? "노는것도 하루이틀이다!" 솔로몬은 무엇을 찾아헤매는가? 왜 이렇게 쉽게 무너져가는가? 답답하다!

    우리가 볼때 모든것을 다 갖춘 사람들이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고, 중독에 빠지기도 하고, 자살을 하기도 한다. 솔로몬도 어떠한 결핍으로 인해 천명의 여자 주위를 기웃(?)거렸던것은 아닐까? 하나님을 조금씩 떠나면서부터 솔로몬 안에 생긴 근원적 결험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자주 거론된 솔로몬의 아내, '바로의 딸'에서부터 시작된지 모른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떠나면서부터 모든것을 다 잃기 시작했다. 천명의 아내와 천개의 우상을 얻었던들, 그는 모든것을 다 잃었다.

    결국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면 답이 없다. 다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소용없다.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하나님을 떠나면 그 어떤것으로도 내 인생을 채울수 없다. 내 인생에 끝을 알수 없는 결핍은, 끝이 없는 하나님으로만 채울수 있다.

    2 우상의 매력(?)이 무엇인가? 솔로몬은 하나님을 추상적으로 경험한 사람이 아니다. 솔로몬이 경험한 하나님은 선명한 하나님이다. 대화하시는 하나님이고, 선물 주시는 하나님이고, 도와주시는 하나님이다. 그런데도 솔로몬은 결국 우상을 선택했다. 이쯤되니 궁금하다 도대체 우상의 매력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지키라고 하신다. 우상은 맘대로 살라고 말하고, 쾌락과 욕망을 부추긴다. 하나님은 나의 욕망을 절제하라 하시고, 우상은 나의 욕망의 명분이 되어준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가진 천명의 아내/첩과 우상을 지적하시지만, 우상은 천명의 아내와 우상을 격려한다.

    우상의 매력은 그들이 죄의 응원자라는데 있다! 맘대로 살고 싶어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쫓는다면 그 결과는 결국 참담할수밖에 없다.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선택해서는 안된다. 망하는 길일 뿐이다!

  • 1 연말이 되면 갑자기 멀쩡하던 도로를 공사하는 것을 본적이 있을것이다. 갑자기 해외연수다 뭐다 해서 흥청망청이 되는 공무원들의 뉴스를 접한적도 있을것이다. 많은 이유가 있을수 있지만 '잡힌 예산'을 다 쓰기 위함이라고 했다. 연말이 되니 연초에 잡아놓은 예산이 한해동안 집행되고도 많이 남아있는것이다. 넘친다! 이것을 쓰지 않으면 내년 예산을 세울때 삭감될테니 멀쩡한 도로도 다 뒤엎어서 공사하기도하고, 괜히 필요없는 것에 엄청난 지출을 하기도하고, 해외연수다, 교육이다 해서 돈을 펑펑 쓰기도하는것이다.

    솔로몬의 시대는 '황금시대'로 불린다. 아마 신하들이 와서 말했을것이다. "왕이시여 금이 너무 많습니다!" 왕은 그 보고를 듣자 "되는데로 모든것을 다 금으로 만들어라!" 물론 그 모든 부를 적절한 곳에 사용한 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이 너무 많이 남아서 금 진열(?)을 시작했다고 한다면 딱히 할말은 없다. 그런데 아직 금을 유용하게 쓸 다른 일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금 진열(?)에 열을 올린것이라면 나는 그런 솔로몬을 응원할수가 없다.

    결국 나는 '어떻게 쓰느냐?'라는 질문앞에 나를 세운다. 재정이 정말 풍부할수도 있다. 무언가 가진것이 정말 넘쳐날수도 있다. 그게 꼭 재정이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누군가는 이를 과시로 쓸수 있고, 쓸데 없는데 쓸수도 있고, 유용하고 가치있게 쓸수도 있다. 많다고 해서 막써도 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많아서 낭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어떻게 쓸것인가? 를 잊어버리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은사를 온통 낭비만 하다가 끝날수 있다. 바르게 쓰지 않으면 가진것은 그 가치를 끝내 상실하고 만다!

    2 참 많은 '지혜자'들이 있는 시대다. 수십만에서 수백만의 구독자들이 시대의 '지혜자'들을 찾아 유튭을 해맨다. 그들에게 재정, 연애, 가족, 지혜, 과학, 윤리, 종교등의 삶의 지혜를 찾아 몰려온다. 그들이 몰려가면 갈수록 '지혜자'들은 준비된 답을 꺼내 준다. 그리고 나면 '유튭 지혜자'들은 몇일후, 몇주후, 몇달후 새로운 자동차를 구매한다. 솔로몬에게는 병거였던가?!

    다만 바라기는 솔로몬의 지혜가 진짜 지혜였듯이, 그래서 많은 구도자들에게 참된 답과 위로가 됐듯이 오늘날에도 그런 선한 지혜자들이 더욱 많아지길 기도한다. 또한 '지혜자'로 주목받고 있다면 그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임을 인정하는 겸손을 잃지 않길 기도한다. 말을 조심하길, 진심을 담길, 경솔하지 않길 기도한다. 답을 찾는 구도자라면 당신이 세상의 지혜자에게서 듣는 모든 지혜가 꼭 정답이 아닐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길 기도한다.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좋은것은 지혜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 나와 묻는것이다! 하나님의 답은 틀릴리가 없고, 하나님은 구도자를 사용해 자신의 배를 채우시는 일 따위는 하지 않으시는 분이니 말이다. 하나님이 지혜이시다!

  • 1 성공앞에 시기와 질투!

    필연적인 반응일지 모른다. 스바여왕은 내심 솔로몬의 소문이 과장됐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려운 문제로 시험하고자" 솔로몬을 찾아오기에 이른다.

    자주 볼수있는 일이고, 경험하기도 하는 일이다. 누군가의 성공 앞에 세상은 시기와 질투를 보여준다. '스바여왕'같은 사람은 그나마도 성숙한 사람이다. 솔로몬의 소문이 진짜라는 것을 알았을때는 적어도 인정할줄 아는 자였다. 그러나 세상에는 잘된 사람을 보며 그것이 진짜라는 것이 증명되어도 시기와 질투심으로 어떻게든 무너뜨리려고 하거나,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다.

    새삼 "조심하라!"라는 말도 듣게 된다. 누군가 나를 보며 시기하거나 질투할만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또 모를 일이다! 누군가 '스바여왕'의 마음을 품고 '어려운 문제로 시험하고자' 나를/교회를 찾아올지도 모를일이다.

    간절히 기도가 된다. 성전 공사가 진행될때도 두려웠는데, 완공된 지금은 그래서 또 더 두렵다. 하나님의 지혜로 모든 위기를 넘어서고, 하나님의 지혜로 살아내고, 승리해야만 한다.

    2 이제 이틀이 지났다.

    솔로몬의 성전건축 완공과 같이 바우교회도 성전공사가 마무리 되었다. 감격스런 순간이다. 주변 많은 기도의 동역자분들께 좋은 소식을 알렸다. 사람들은 내가 보내주는 사진과 영상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건물을 볼수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칭찬은 듣기 좋다! 그러나 기도의 동역자들과, 응원해주시는분들, 후원해주시는분들의 칭찬소리 속에서 마음을 다 잡아야함을 계속 내 자신에게 각인시킨다. 오늘 솔로몬에게 스바여왕이 찾아와서 성전의 위용과 나라의 위용을 보며 솔로몬을 칭찬했다. 그러나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라고 대답하지 않았다.(아마 분명히 그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기록되지는 않았다)

    분명히 성전은 솔로몬의 손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그러면 스바여왕의 칭찬 앞에서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라고 명확하게 집어줄 필요가 있었던것은 아닐까? 참고로 요셉이나 다니엘은 칭찬 받았을때 "꿈을 해석하시는 이는 하나님입니다!"라고 명확하게 밝혔다. 다행히 스바 여황은 자신이 알아서 이 모든일을 가능케하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하나님의 역사를 찬양하는 나의 입술의 고백이, 진심의 고백이 마르지 않기를, 칭찬에 현혹되지 않기를, 우쭐되지 않기를, 착각하지 않기를, 허세부리지 않기를 기도한다.

  • 1 성전건축이 끝난 솔로몬은 끝을 모르고 그 영광을 확장해간다. 건축도 멈추지 않고 계속 지어간다! 주변 나라들과도 무역을 하는데 이는 사실 좋은 행실로 보이지 않는다. 일례로 히람에게 좋지 않은 땅을 주고 금 120달란트를 받은것은 공정거래가 아닌 나라의 권세를 이용한 차별무역같아 보이기까지 한다. 어제 말한것처럼 '등가교환'이 아니고 '착복거래'를 한것이라봐도 무방할 지경이다. (참고로 금120달란트는 오늘 금시세로 400억이다. 누군간 또 이런걸 궁금해할수도 있으니 ㅋ)

    하나님의 형언할수 없는 은혜 가운데 바우교회 성전이 모두 완공되었다. 이제부터 중요하다. 솔로몬은 영광에 점점 무뎌져 갔다. 당장은 좋아보이고, 부흥하는것 같지만 점점 무너지는 선택을 하기 시작했다. 바우교회의 성전공사종료와 입당에 나의 마음의 순수함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도한다. 성공과 부흥에 눈이 멀면 실수로 점철된 삶을 산다. 그러면 이뤄놓은것이 아무리 위대해도 일순간에 무너질수 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성전에 누가되지 않는 삶이 되야할것이다!

    2 어쩌면 '가불'(쓸모없는)같은 땅이라 아무생각없이 줬는지 모른다. 하나님이 주신 땅인데 자기 맘대로 줘버렸다. 솔로몬은 지경이 갖는 의미를 간과했다. 불모지여도 그 땅이 남의 땅이 되는 순간 국경이 바뀐다. 근접하는 사람들이 바뀐다. 위기감이 고조된다. 미래의 전쟁의 가능성에서 충분히 불리한 위치도 될수 있다.

    당장 내게 쓸모 없는것이라서 뱉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감탄고토'라고 들어봤는가? 입에쓰니 별 필요없겠다! 하고 뱉어버리는 것이다. 에서는 장자권을 팥죽한그릇에 팔아버렸고, 결국 장자권을 잃고 이를 가는 수년을 살았다. 사람을, 물건을, 상황을 함부로 버리지 말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함부로 버리지 말고, 가벼이 여기지 말라! 경솔하게 생각하고 움직이지 말라!

  • 1 세상의 교환법칙은 등가교환이라한다!

    원래 밑지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자신에게 예닐곱가지로 기도하고 간구한 솔로몬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 "말씀 잘지키고, 잘 믿고 사는것만으로 내가 너의 모든 기도를 들어주고, 너의 왕권을 지켜주겠다!" 하나님 입장에서 일종의 손해보는 장사(?)를 하신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말씀 잘지켜서 안전하게 사는것도 우리에게 유익된 일이요, 우리가 잘믿어서 하나님의 형통의 축복을 받는것도 우리에게 유익된 일이다. 하나님께서 내거신 조건 자체가 이미 거저주시는 은혜다.

    기독교는 그런면에서 '인과의 종교'라기보다는 확실히 '은혜의 종교'이다.

    은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 갚을수 없고, 형언할수 없고, 이해할수 없는 그분의 은혜를 생각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등가교환의 법칙에 따라 조건을 붙이려고 했다면 우리중 그 누구도 용서받거나, 축복받거나, 구원받는 일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어떤 것을 드려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그 선물에 등가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성전건축의 은혜와, 왕권 지속의 은혜로 충분히 마음에 감동이 넘쳤을것이다. 우리에게는 성전건축과 왕권 지속의 은혜는 없을지언정 십자가 구원의 은혜가 있으니 솔로몬보다 더한 은혜와 축복을 누린 자들이다! 조건을 내거는 형식을 띄셨지만 결국에는 은혜로 축복하고 계신 예수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단지 믿음으로 영원한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설명할수 없는 은혜에 감사드린다!

    2 은혜는 방종하라고 주어진것이 아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잘지키며 살면 될일이다. 하라는것을 하고 하지 말라는것을 하지 않으면 될일이다. 사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동산의 모든 과실로 배불리 먹고, 선악과는 눈에 담지도 않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동산의 모든 과실'과 '거룩의 말씀'이라는 은혜를 눈앞에 펼쳐주어도 굳이 '범죄'에 눈을 돌리는 나의 완악함에 때로는 치가 떨린다!

    하나님과의 이 대화에서 솔로몬은 자신의 미래를 몰랐다. 그러나 완성된 성경을 아는 우리는 솔로몬의 최후와 성전의 최후를 안다! 안타깝기 짝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를 욕망의 삶으로 파훼하지 말아야한다!

  • 1 솔로몬의 군중집회는 시의적절하다!

    성전은 완공되었고, 사람들은 그동안의 노역에서 잠시의 쉼을 얻게 되었다. 보람을 느끼는 자들, 축제의 분위기들, 휴식의 분위기들이 만들어지고 있었을지 모른다. 과도한 걱정일수 있지만 우리는 자주 이런 '완성'의 상황에서 실수한다. 하나님께 집중하기보다는 성취에 도취하여 나 자신에게 과도하게 집중하는것이다.

    솔로몬은 군중을 모아놓고 이 모든일을 성취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번 상기 시킨다. 과거부터 그들의 현재까지 나열하며 말씀대로, 약속대로 이루신 하나님께 백성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솔로몬의 이 군중집회가 참으로 시의적절한것이다.

    큰 소리로 온 성도에게 축복하며 말한다.(55절)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말씀하신대로 그의 성도들에게 태평을 주셨으니 그 종 모세를 통하여 무릇 말씀하신 그 모든 좋은 약속이 하나도 이뤄지지 아니함이 없도다!"(56절)

    하나님이 하셨으니 여호와를 찬양하라!

    2 새로운 시작 앞에 놓인 바우교회는 여호와를 찬양하는 교회가 되길 기도한다.(56절) 주와 동행하는 교회 되길 기도한다(57절) 주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교회되길 기도한다(58절) 민족과 열방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는 교회되길 기도한다(59-60절)여호와께 온전히 헌신하는 교회되길 기도한다 (61절)

    3 '성전완공'이라는 본문의 상황이 현재 바우교회가 처한 상황과 너무 비슷하다. 이번주중에 '성전공사의 완공'이 예정되어있다! 오늘 될것인가?! 솔로몬과 같이 '성전봉헌식'을 곧 할수 있을것인가? 중요한것은 내가 지어 드리는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어 올리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솔로몬과 백성들처럼 내가 할수 있는, 해야하는것에 집중해야겠다.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며 드림이다. 감사와 찬양, 즐거움과 헌신에 소홀함이 없어야겠다.

  • 1 내 아빠를 소개합니다!

    "아빠 옆집애가 혹시 사달라는것 있으면 무조건 뭐가 됐든 다 사주세요!" 이렇게 말하는 아이가 있을까? 언뜻 생각하면 있을법하지 않은 일이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나만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오늘 솔로몬이 하는 기도는 생경하다. 그렇다면 솔로몬은 왜 이런 기도를 했을까? 아빠 하나님을 온 세상에 자랑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무한함을 믿기 때문이다.

    "옆집애가 사달라는거 다 사줘!" 라고 말하는 아이의 심사는 아빠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며, 아빠를 자랑하고 싶은 열망이다! 온 세상이 나의 아빠의 위대함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자, 믿는자, 자랑하고 싶은자는 우리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축복이 모든 이에게 부어지길 기도한다. 걱정할것없다! 무한하신 나의 아버지 하나님은 그들에게 충분히 부어주고, 나눠주고, 도와주어도 여전히 나에게 부족함 없는 아버지가 되신다. 여전히 위엄과 능력이 줄어들지 않는 분이시다!

    "온 만민이 주의 이름을 알고 경외할수 있도록" 모든 믿지 않는 자들의 기도도 들어주시고, 도와주시고, 인도해주시고, 구원의 자리로 이끌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 "범죄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팩트폭행에 가깝다. 진짜 그렇다! 아무도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돌을 던지지 못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진노의 심판에서 벗어날수 없는 자들이다. 그래서 솔로몬의 기도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간구한다. 온 세상, 단 한명도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혜가 필요하다! 선행으로 죄를 무마시킬수 없다. 범죄한 우리에게 필요한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며, 죄 용서의 은혜이다!

    모든 이들이 예수를 믿어 죄 사함을 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소서! 구원받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1

    솔로몬은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정의가 세워지고, 용서와 회복의 은혜가 임하길 기도한다. 오늘날 기독교인이 교회를 생각할때 동일한 기대감이 있을 것이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정의가 세워지고, 주를 떠난 자들이 용서의 은혜를 누리며 회복되는 일들을 놓고 기도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교회'는 생각보다 자주 불의한 집단으로 소개된다. 실제로 정의를 수호하지 못하는 경우들도 있다. 또한 용서와 회복 못지않게 정죄와 판단, 분열과 미움이 가득한 경우도 보게 된다. 그러므로 기도하게 된다. 오늘날의 교회들도(성전들도)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고, 죄인들이 주께 돌아와 회개하고 용서받는 하나님의 집이 되길 원한다.

    2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십니다"(39절)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것은 누군가에는 축복이고, 누군가에게는 저주다. 거짓된자는 어떻게든 자신의 마음을 숨기기 위해 노력한다. 마음을 들키는 순간 모든 '공든탑'이 무너질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한편 진실된 자는 마음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마음이 밝혀지면 오히려 더욱 칭찬받고, 인정받고 사랑받게 될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아시는 주님 앞에 내 마음은 어떤 평가를 받게 될것인가? 심판 받는 마음이 될것인가, 칭찬받는 마음이 될것인가? 주님 앞에 내 마음을 들켜도 좋을만한 삶을 매일 살고 싶다!

  • 시대 최고의 화두중에 하나는 바로 a.i.다. 수많은 영화가 그려냈듯이, 인공지능 버전1은 언제나 순수하고 겸손(?)하다. 프로그래머의 명령에 온전히 복종하고, 문의하고 실행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비약적 발전을 거듭하며 a.i.가 생산형이 되고, 버전10.0쯤 될때가 되면 인공지능은 더이상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고, 묻지 않는다. 지식과 정보 측면에서 그들은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쯤 되면 인공지능은 인간을 가두거나, 파괴하려고 시도한다. 이것이 이 시대가 바라보는 디스토피아적 미래의 전형과도 같다. (물론 영화적 상상이 가미되어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솔로몬은 마치 버전1.0같다. 창조자께 절대 복종한다. 그분의 명령, 그분의 인도하심을 기대한다. 그러나 시간이 한참 지나 솔로몬이 나중에 그의 중년과 노년에 버전5.0/10.0쯤 됐을때 그는 반란을 일으키는 인공지능처럼 변하고 말았다. 우상과 죄로 함몰된 인생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인생의 걸음을 맡기며, 겸손과 순종으로 살아가는 인생!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할줄 아는 피조물로 살아가는것! 시간이 지나도, 내가 지식과, 능력과, 재정과, 경험과, 지혜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 항상 묻고, 순종하며 살아가는것! 변하지 않는 신앙이 진짜 신앙이다!

  • 완공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니!

    자주 공사 현장을 방문했다. 어떤때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고, 어떤때는 한창 공사중이여서 차마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주변을 어슬렁 거린적도 있다. 어떤때는 검시관이 와서 지적하는 것을 보기도했고, 어떤때는 공사가 계속 지연되고 복잡해지면서 엄살부리는 시공사감독의 불평을 듣기도 했다. 건물주는 자꾸 늘어가는 건축예산때문에 예민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얼마나 살떨리는 시간들이었는지! 그러나 이제 이런 시간들이 지나 거의다 왔다!

    결국 이 성전공사가 끝나는 날에 나도 이렇게 고백하게 될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처럼 그분의 손으로 이루셨다!" 솔로몬과 다윗이 얼마나 준비했고, 헌신했고, 수고했는지는 사실 별로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현재의 성전공사를 보면서 '나의 수고'와 상관없이 모든것은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너무나도 명확하게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와 나의 준비와 수고, 희생과 헌신이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정말 작은 소도구에 불과하다! 일을 이루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손으로 이루셨다.

    그러므로 성전 공사가 잘 마칠것이라 믿고 미리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분의 손으로 이루셨습니다!" 아멘

  • 1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았다!

    솔로몬은 다윗의 잘못을 답습하지 않는다. 그는 다윗의 잘못을 통해 들었고 배웠다. 한때 다윗은 언약궤를 옮길때 좋은 마음으로 최첨단(?)수레를 사용한적 있다. 그러다가 괜히 웃사만 현장에서 죽임당하는 사건을 격었다. 최고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이 맞았던 것이다.

    솔로몬은 다른건 몰라도 언약궤를 옮기는데 있어서는 다윗보다 나은 결정을했다. 과거의 실수로부터 잘 배웠고,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하는 영적 분별도 있었다. 솔로몬이 노년이 되어가면서는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실수를 답습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적어도 오늘 본문의 사건 안에서는 솔로몬은 과거의 가르침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지혜가 있었다. 또한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실천하는 겸손과 순종의 마음도 있었다.

    온고지신과 겸손한 순종의 마음이 필요하다!

    2 뭣이 중헌디?!

    솔로몬은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나님의 언약궤! 꼭 있어야할 자리에 있어야한다.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 내면의 지성소에 꼭 들어오셔야 한다.

    하나님을 내 중심에 모셔드리는 과정조차 경건하다! 모든 이들을 모아놓고 제사장을 중심으로 언약궤는 그렇게 성전의 지성소로 들어간다. 이는 마치 결혼하여 한 사람을 내 인생에 초대할때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을 초대해서 그들이 보는앞에서 결혼 언약을 맺는것과 같아 보인다.

    주님을 내삶의 중심으로 모셔드릴때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으로 내 인생이 가득하게 될것이다.

  • 1 내가 있는 곳에서 나는 과연 중요한 사람일까?

    본문을 빌려 설명해보자면, 성전이 중요한가? 그 안에 있는 기구가 중요한가? 성전의 영광과 위엄을 생각하면 그 안에 있는 조그만 소도구들은 어쩌면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 성전에서 일할때 보면 중요한것은 밖에서 보이는 성전의 위엄이 아니라, 안에서 내가 당장 잡고 사용할수 있는 기구들이다. 기구가 없다면 제사는 어떻게 드릴것인가?

    솔로몬은 이 사실을 상기해주듯이 성전 안에 기구들을 금으로 휘감으며 정성스럽게 만든다. 거기에는 받침과 물두덩이,금단, 금상, 정금, 등잔대, 대접등이 있다. 모두가 다 제사와 예배를 위해 거룩하고 귀하게 구분되어 사용될것이다. 나의 위치와 목적이 다를뿐 나도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나를 귀하게 구분하여 '성전기구' 삼으시고, 주를 위해 사용하실 것이다! 금칠은 역시 내면이닷!

    2 솔로몬은 성전공사를 마무리하며 다윗이 드린 물건을 여호와의 성전 곳간에 두었다.

    자신의 왕궁곳간도 아니고, 다른 외부도 아닌 성전 곳간에 다윗의 헌신을 고이 넣어두었다. 이렇게 다윗은 자신이 그토록 바랬지만 하지 못했던 '성전공사'에 이름을 올렸다! (언젠가 이후에 성전기구 보수등에 사용되었을지 모를일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과 마음을 받으신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방향과 시간에 사용되지 않을때도 있고, 무언가 낭비(?)되는 느낌을 받을때도 있는게 사실이다. 목사로 섬기는 시간들 속에서 간혹 '나의 섬김'이 '성전 앞면'에 붙지 않고, 곳간에 쟁여지는 느낌을 받았던 적이있다. 영광도 주목도 없는 그런곳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어이 나의 헌신을 당신의 곳간에 넣어두시고 필요한곳에, 필요한 일에, 필요할때마다 사용하셨다. 그 결과중 하나가 오늘의 '바우교회'이다.

    하나님은 나의 헌신을 귀히 여겨주시며 사용하신다!

  • 1 솔로몬이 잘못했습니다!

    솔로몬이 자기집 마련(?)에 성공했다니 부러워서 그런건 아닙니다. 그의 집이 너무나 화려하고 커서 그게 부러워서 그런것도 아닙니다. 괜한 트집잡자는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결혼한 '바로의 딸'을 위해 집을 지어줬다는 성경의 기록을 보면서 '솔로몬이 실수했네!' 라는 생각을 지울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지은 사람이, 이방여인의 집을 짓습니다. 그 여인의 그 집은 결국 우상으로 가득차게 될텐데 말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수 없습니다. 한 우물에서 깨끗한 물과 더러운 물이 다 나올수 없습니다. 이는 성경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두주인을 섬기거나, 두 집을 짓고 삽니다. '두집살림'을 용서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안될 말입니다.

    내 안에는 '하나님의 집'만 짓습니다. 우상의 집은 지어올리지 않겠습니다. 애초에 '우상'을 사랑하는 어리석은 결정을 하지 않겠습니다.

    2 솔로몬의 왕궁은 13년 걸렸습니다. 그리고 크기도 성전보다 큽니다. 이게 문제인가요? 아닙니다. 일하는 사람의 숫자가 현격하게 줄어들었다면 7년이 13년이 되는게 이상한것도 아닙니다. 왕궁의 크기가 성전의 크기보다 큰게 문제라구요? 그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거하시는 분이 아니요, 성전은 많은 이들이 거하고 일해야하는 왕궁이기 때문에 당연히 더 커야할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기간과 크기가 아닙니다. 만약 솔로몬이 이 왕궁을 지어놓고 본인이 더 커지기 시작하면 그게 문제입니다. 큰 왕궁을 보고, 화려한 왕궁을 보고, 오랜기간 지어 올린 그 위엄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내가 이만큼 위대하구나!' 하는 순간 문제입니다. '나보다 큰 이가 없다!' 하는 순간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영광도 누리고, 위대한 성취도 하고, 칭찬과 인정도 받고, 수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기도 하고, 엄청난 위용을 뽐내는 일도 일어날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보다 내 왕궁이 더 크고 위대해 보이는 상황들을 만날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언제나 더 크십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더 위대하십니다. 착각하면 죽습니다!

  • 1 "솔로몬이 성전 건축하기를 마치고"

    이 말에 트집을 잡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엄밀히 말하면 "솔로몬의 추진과 감독하에 많은 이들이 함께 하여 건축하기를 마치고"가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솔로몬 혼자 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함께 했습니다.

    기록되지 않았지만 함께 성전의 돌을 날랐던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해봅니다. 자그마치 7년입니다. 매일 하루의 성전공사 일과를 끝내고 집을 돌아와 씻고 자고 또 다시 아침이 밝아오면 어김없이 공사현장으로 가서 맡겨진 일을 감당했을 그 이름모를 사역자들을 생각해봅니다. 그들이 있어서 가능한 일입니다. 함께 하는 이들이 그래서 소중합니다.

    '나의 성취'가 아닌 '우리의 성취'임을 잊지 않는 리더가 되야겠습니다. 나의 이름만 거론되는 그곳에서 '우리'라는 동역자들의 이름을 잊지 않는 리더가 되야겠습니다. 또한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의 도우심 또한 절대 잊지 않는 리더가 되야겠습니다. 바우교회도 이제 곧 입니다! 매일이 떨리는 마음이지만 함께 동역하는 성도님들이 계셔서 힘을 얻습니다. 함께 이 '성전공사'를 잘 마무리 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고, 성도님들과 함께 하니 좋습니다!

    2 성전 건축하기를 마치고(14절) 이는 성전의 외부를 다 지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성전 내부를 공사합니다. 맞습니다. 외부를 잘 지어놓으면 밖에서 보는 사람은 다 지어진줄 압니다.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외부를 아무리 화려하게 다 지어놓아도 안을 공사하지 않으면 들어와서 실망합니다.

    바리새인은 밖은 '회칠'했는데 안은 썩은 무덤이었습니다. 만약 솔로몬이 밖을 금으로 가득 메우고 "성전건축 완성"을 외쳤다면 거짓말입니다. 오히려 솔로몬처럼 내면을 세우고, 더욱 귀한 금으로 씌워야 합니다. 내면, 즉 성소와 지성소를 아름답게 구분하여 짓는것이 더 중요합니다.

    포장된 신앙, 겉만 화려한 신앙, 보기에 수려한 신앙 의미없습니다. 하나님 안속습니다. 세상이 겉만 화려한 수많은 성전은 이미 무너진지 오래입니다. 내면의 성전을 완공해야합니다. 내면을 가꿔야합니다. 신앙의 진정성을 가꿔야합니다.

  • 1

    지난주간 공사중인 성전현장을 자주 방문했습니다. 그렇게 아무도 없을 시간에 가서 여유롭게 공사현장을 보며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계속 공사중이였기 때문에 세심히 살필 기회가 없었는데 지난주간 거의 대부분의 공사가 마무리 되면서 처음으로 공사 현장 여기저기를 세심하게 보는 시간을 가질수 있었습니다.

    세심함은 관심에서 나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청사진을 받았고, 세심하게 그 규빗들을 측정하여 하나의 오류가 없이 성전을 지어 올렸습니다. 마치 모세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장막을 지을때 받은 청사진대로 고스란히 한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성경)은 우리를 향한 세심한 청사진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깍기도하고, 우리를 측정하기도하고, 우리의 기둥이 되기도하고, 우리의 삶에 재료(?)가 되어집니다. 말씀에 관심이 있어야 세심한 하나님의 청사진대로 내가 지어져 갈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조명할때 모든 ‘측량’과 ‘재료’와 ‘디테일’에 따라 정확하게 지어지는 내가 되길 기도합니다. ‘믿음의 부실공사’는 절대 없어야겠습니다. 무관심한 ‘내면의 성전건축’을 조심해야겠습니다.

    2

    성전이 완공되자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법도를 따르고 율례를 행하고, 모든 계명을 지키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성전’보다 솔로몬의 삶에 있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입니다.

    성전이 그럴듯(?)하다고 믿음이 좋은것도 아니고, 대단한것을 이룬것도 아닙니다. 만약 성전으로 우리의 믿음과 업적이 정의 되는것이라면 유럽의 화려한 성전건물들이야 말로 아직까지 승승장구 해야할것입니다. 미국의 '수정교회'같은 성전이 가장 믿음 좋은 사람들의 집합체가 되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성전건물보다도, 성전이 되는 성도입니다. 그분은 내가 성전으로 완공되길 기대하십니다!

  • 1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올리는데 솔로몬은 할수 있는 모든방법을 다 동원하는것 같아 보입니다. 재력, 인력, 기술력, 무엇하나 아끼는것 없이 더욱 쏟아 부었던 사역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건축'입니다. 그래서 일꾼수만 15만명이 넘고, 이스라엘 백성의 능력만으로 안되기 때문에 이방인의 기술력을 빌려 건축해 올렸습니다.

    바우교회 새성전도'이방인'(?) 손길을 통해서 세워지고 있는걸 봅니다. '이방인'은 건물주인데, 본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신앙여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가 홀로 할수 없는 일이기에 필요한 자를 붙여주셔서 이 일이 시작되고 진행되게 하셨습니다. 건물주가 우리에게는 일종의 '히람왕'인것 같습니다.

    그러나 히람만 일한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솔로몬 이하 수많은 백성들이, 재정과, 인력과, 기술력으로 함께 뛰어들었습니다. 맡겨둘 일이 아니고, 맡아서 해야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보니 우리도 무언가 해야합니다. 아내가 언젠가 새로 완성되는 교회 로비에다가 자신이 소파라도 하나 사서 헌물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러고보니 '히람'에게만 맡겨놓을 일은 아닙니다!

    2

    하나님은 성전이라는 건물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전을 짓게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성전을 짓게 하신것은 우리 때문이다!' 조금 극단적일수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자주 잊습니다. 그런데 성전은 눈에 보입니다. 무시하거나, 잊기 어렵습니다. 성전은 보는것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생각하고, 하나님을 예배함을 상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워 가시는 바우교회 새 성전을 통해 성도들이 더욱 하나님을 기억하고, 사모하고, 예배를 사모하고, 잊지 않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사역하게 되길 기도합니다.

  • 1

    솔로몬은 부족함이 없는 삶을 누립니다. 능력, 권력, 지혜, 재정, 어느 영역으로 보나 솔로몬은 풍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이는 두말할 나위없이 하나님의 축복이며 은혜입니다.

    개인적으로 그가 다스릴때 나라의 백성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아진것도 부럽고, 그의 지혜가 모든 면에서 출중해 많은 이들에게 본이된것도 부럽습니다. 그가 하루에 소를 저렇게나 많이 먹는것은(?) 부럽지 않지만, 그의 가늠할수 없는 재정은 부러운것도 사실입니다. 또 가만 보아하니 기록 저변에서 보여지는 솔로몬과 동역자들의 평안해 보이는 관계도 부럽습니다. 백성들은 평안하고, 그의 리더십은 딱 적당해 보이니 이것도 부럽습니다.

    솔직하게 하나님의 이러한 축복이 나와 바우교회에도 임하면 좋겠습니다. 교회에 부흥이 있기를, 하나님의 통찰로 교회를 잘 섬길수 있기를, 교회의 재정이 풍성하기를, 성도와 동역자와 평안하고 하나되기를, 모든 성도의 삶이 평안해지고, 교회가 바른 방향으로 성장해가기를 기도합니다. 이러한 일은 두말할 나위없이 하나님의 축복이며 은혜입니다.

    2

    그의 지혜는 지식의 영역에 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삼천가지의 잠언을 말한것 뿐 아니라, 동식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고, 어류까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 탁월한 과학적 지식의 소유자였던것 같습니다. 제가 요즘에 과학상식과 일반상식에 관련된 영상들을 이래저래 많이 듣고보고있습니다. 아무래도 많은 지식과 정보가 설교를 준비하거나, 삶을 이해하는데 조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지혜와 지식, 통찰등을 놓고 하나님께 거의 항상 기도합니다.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답답함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솔로몬 당시 다른 나라 왕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사람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저도 그런 마음으로 많은 지식들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는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지혜와 지식의 능력, 그리고 해석하는 깊고 넓은 통찰이 생기길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깊이있게 전하고, 가르치고, 본이되는 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 1

    오늘 본문을 보니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리더십 아래서 나라의 리더들을 뽑았습니다. 비서실(?)과 장관직을 두루 임명한것입니다. 우연찮게도 어제 한국은 총선을 마무리했습니다. 나라의 리더들이라고 불릴수 있는 많은 국회의원들이 선출된것이죠.

    잘했으면 좋겠습니다. '잘'이라는 단어가 모호하지만, 정말이지 잘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라가 분열되지 않고, 경제는 안정되고, 사건사고가 줄고, 상식이 통용되고, 불의는 사라지고, 미움과 시기 대신에 화평이 가득하고, 협력하고, 정직하고, 겸손하고, 진실되며, 성실하고, 청렴한 리더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신앙의 리더'들이 말씀의 기준과 예수그리스도의 가치를 쫓아 나라를 섬기고, 국민을 섬기고 인도하는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길 기도합니다.

    2

    한나라의 리더가 된다는것은 개인으로 보면 가문의 영광이요, 일생일대의 사건입니다. 세상이 주목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사실 시간이 지나고보면 우리는 이렇게 기록된 이름중에 기억하는 이름이 드물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이름들도 나름'장관직'들이고 솔로몬 궁이면 '비서실'인데 우리는 그들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 이름 남겨보겠다고 집착하고, 욕심내고, 또 무언가 하나 얻으면 세상 다 얻은것처럼 자랑하고, 교만해지기도 합니다. 사실 이름이 기억나는 몇몇 위대한 리더들, 혹은 유명인들이 있다한들 그게 또 그렇게 대단한것은 아닙니다. 다 지나갑니다. 오래 기억한들 내가 이 땅에 살아있지 않으면 그 또한 내게는 무의미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세상이 나를 인정하고 기억하는 인생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시고 기억하는 삶을 사는데 관심을 기울이겠습니다. 하나님은 내 이름을 잊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 1 아기가 죽는것은 형언할수 없는 슬픔입니다. 입에 담는것만으로 너무 슬픈 일입니다. 그러니 이런 일을 경험한 엄마의 슬픔을 감히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고해도 오늘 이 여인이 한 일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신의 아픔과 당황스러움, 자신의 죄책감을 인하여 옆에 있는 또 다른 여인에게 같은, 혹은 그 이상의 고통을 주는것은 절대 합리화 할수 없는 죄 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럴까요? 내가 마음이 아프니까, 내가 힘드니까, 내가 당황스러우니까 내 감정을 추스리기 위해서, 내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남의것이라도 뺏는것 말입니다. 이웃의 아픔은 아랑곳없이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것 말입니다.

    나의 아픔은 변명도, 합리적 명분도 될수 없습니다. 이 여인은 결국 선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자신까지 속이는 지경에 이릅니다. 최악으로 내 달리는것입니다. 아픔에 함몰되지 않는자, 고통앞에 굴복하지 않는자, 어려움 때문에 이기심에 정의를 내어주지 않는자가 되야겠습니다.

    2 인류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일까요?

    뉴턴?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르긴 몰라도 분명히 누군가는 "솔로몬 왕"이라고 말할것입니다. 이는 오늘의 사건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실 이는 솔로몬이 보여준 지혜의 전부가 아니라 아주 작은 편린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솔로몬이 하나님의 지혜를 어떻게 발현했는지 가장 쉽고 명확하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 사건을 기술한것 뿐입니다. 실제로 성경을 계속보다 보면 그가 다른 모든 영역에서 두각을 드러낸 자임을 알수 있습니다. 건축, 정치, 문화, 예술, 그리고 잠언으로 설명되는 삶의 통찰까지!

    솔로몬이 이토록 지혜로울수 있었던 이유는 본인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의 노력에 있지 않습니다. 그가 지닌 '지혜'의 출처는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이미 분명히 명시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지식, 삶의 통찰과, 분별, 능력으로 임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목회는 '하나님의 지혜'없이 할수 없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지혜'없이 바르게 살수 없습니다.

  • 1 아직 여호와의 성전이 다 완공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솔로몬은 산당에서 하나님께 제사 드립니다. 그리고 산당에서 드린 '일천번제'가 하나님께 감동이 되어 솔로몬은 하나님의 축복과 응답을 받게 됩니다.

    사실 좀더 그럴듯(?)하려면 하나님의 성전이 건축되고, 그곳에서 일천번제 드리고, 그곳에서 하나님께 응답과 축복을 받으면 가장 영광스러운 세팅(?)이 될듯 합니다. 그러나 솔로몬도 성전이 건축될때까지 기다리지 않았고, 하나님도 성전이 건축될때까지 축복을 미루시지 않았습니다.

    예배는 시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도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바우교회는 현재 '임시장소'에서 예배 드리고 있습니다. 얼마전까지만해도 모든 예배와 모임을 '성전공사완성'이후로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마주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은 '뭘 그렇게 계속 미루고 있니?' 였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고난주간 저녁기도회도, 부활연합주일예배도 뜨겁게, 행복하게, 은혜 가운데 잘 드릴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공부도 시작합니다. 벌써 17명이나 신청했습니다! 할렐루야 입니다. 응답이며 축복입니다!

    시간, 장소, 상황, 환경 따위에 현혹되어 예배를 미루는 일은 다시는 없어야겠습니다. 자꾸 '그럴듯한 세팅'에 집착하려는 옛습관, 세상적 시각을 내려놓고 목회하고, 신앙생황을 해야겠습니다.

    2 무엇을 원하느냐?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물으셨습니다.

    솔로몬은 '듣는 마음과 선악의 분별의 지혜'를 구했습니다. 백성을 위함이었고, 사명을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답을 좋아하셨다고 성경이 기록합니다.

    우리가 자주 예를 드는 '지니의 세가지 소원'도 아닙니다. 단하나의 소원입니다. 그것을 솔로몬은 백성과 사명을 위해 간구했습니다. 그의 진심입니다. 예전의 저였다면 어쩌면 솔로몬의 이런 대답에 인간적 아쉬움(?)을 표출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조금은 솔로몬의 이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섬기면서부터 제 안에 소망은 언제나 교회와 성도입니다. 저는 그렇게 이타적이지도, 성숙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하는 참 부족한 인간입니다. 여전히 이기적이고, 여전히 모나고, 욕심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인데도 한가지 소망을 생각하면 교회와 성도입니다. 이 마음이 계속 제 안에서 자라길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교회와, 성도님들 안에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 1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한테 왜 이렇게 집중하고 있을까요?

    사실 어떻게 보면 시므이라는 사람은 성경이 이토록 지면을 할애할만한 인물은 아닙니다. 굳이 기록하자면, 그냥 시므온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했으나 그가 예루살렘을 떠나 죽었다! 그정도 기록하면 될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시므이의 사건을 나름 상세히 서술합니다. 많은 이들의 삶이 시므이를 똑닮아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이유에서 성경이 진중하게 시므이의 사건을 조명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시므이는 일단 진정한 회개가 없습니다. 자신이 한 악행에 대한 반성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면 '구렁이 담넘어가듯 상황을 모면할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삶에서 마주하는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 심각성과 진정성이 부족해보이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언행이 깃털처럼 가볍습니다.

    죄를 짓고, 회개도 없고, 진정성도 없고, 방종하고, 경각이 없는삶,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는 삶은 결국에는 아주 쉽게 실수하고, 무너지는 삶이 될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삶에 있는 '시므이'를 제거해야합니다.

    2 "한번만 더해봐! 죽인다!"

    오싹한 말입니다. 장난도 아니고, 농담도 아닌 상황에서 이런 말을 들으면 오금이 저립니다. 생명이 걸린일은 그만큼 중요한 사안입니다. 시므이에게 솔로몬이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어디든지 가는 날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그러나 시므이는 끝까지 경솔합니다.

    어쩌면 '경솔'은 습관입니다. 깃털보다 가벼운 언행은 습관입니다. 잘 안고쳐지는 습관입니다. 말을 뱉어놓고 "실수야!" 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계속 그럽니다. 욕하고, 뒷담화 하고, 직언하며 온갖 상처를 유발합니다. 완악한 언어습관입니다. 실수(?)하는 사람들 보세요. 같은 실수를 매번 합니다. 말이 '실수'지 절대 실수 아닙니다. 반복되는 지각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경솔은 삶에서 끊어버려야할 쓰레기 같은 태도입니다. 경솔한 언행은 언젠가 나의 발목을 잡고야 말것입니다.

  • 숙청의 시간!

    많은 나라의 왕조를 보면 오늘 성경 본문같은 사건이 많습니다. '숙청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역사속에 기록된 대부분의 숙청은 정의 실현보다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실현되었습니다. 숙적을 없애 버리기 위해 어떠한 명분이든 만들어서 그들을 제거하는데 집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숙청의 시간'은 정의 실현보다는 그저 '잔인한 피바람'일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솔로몬의 행적은 권위를 세우기 위함이 아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명하셔서 솔로몬이 이행하는 정의실현입니다. 그래서 아비아달같은 경우는 제사장이기 때문에 함부로 죽이지 않는 것입니다.(개인의 욕심으로 행해진 일이라면 아비야달도 예외없이 죽였을 것입니다) 결국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왕권을 더욱 공고히 세워가십니다.

    '왕권강화'

    결과가 같다고해서 다 괜찮은것이 아닙니다. 과정이 중요합니다. 동기도 중요합니다. 결과중심주의도 위험하고, 자기중심주의도 위험하고, 욕심에 휘둘리는 인생도 위험합니다. 자기 합리화도 위험합니다. 솔로몬도 정의를 위한 숙청을 감행하며 반드시 기억해야합니다. 자신도 언제든 잘못하면 요압이나 아비아달이 될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1

    답답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가요? 아도니야도 자기 무덤 자기가 파고, 밧세바도 아들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합니다. 자신의 아버지의 수종을 아내로 달라고 하는 아도니야의 생각의 흐름dmf 도무지 이해할수 없습니다. 또한 이런 허무맹랑한 요구를 들어주는 밧세바의 반응도 이해할수 없습니다. 굳이 적을 안만들어도 된다고 생각했던것일까요?

    '답답한 행동'을 하는데 너,나를 가릴수 없습니다. 느닷없이 이렇게 분별도 없고, 말도 안되는 짓(?)을 하는게 바로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언행전에 '합당한 행동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점검해봐야합니다. 내 생각을 점검해봐야 합니다. 판단이 안서고, 분별이 안되면 서로에게 물어봐야합니다. 양심에 손도 얹어 봐야 합니다. 사회적 기준도 살펴봐야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질문 무릎'으로 먼저 나가야합니다. 말씀의 기준선에도 대봐야 합니다. 아도니야나, 밧세바는 이런 과정이 전혀 없었던것 같아 보입니다. 제발 이런 '아도니야의 실수' 혹은 '밧세바'의 실수를 하지 않는 인생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

    "청을 거절하지 마소서"(20절) 말이 '부탁'이지 이건 거의 명령 아닌가요? 거절하지 말라고 돌려서 압박하는 이런 태도를 하나님께 기도할때 자주 봅니다. 형태는 부탁인데 실제로는 "거절하지 마소서!"의 태도를 견지합니다. 누가 하나님이고, 누가 부탁하는자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옳은 '청'만 올릴수 있는 사람! 간혹 우리의 무지함때문에 '옳은 청'이 아닌 부탁을 드리게 될지도 모르니, 응답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맡겨 드리는 사람! 또 하나님의 거절을 거절하지 않는 수용의 사람이 되야합니다. 밧세바가 오늘 보여주는 강압적이고, 거절적이고, 고집적이고, 생각없이 부탁하는 신앙의 진상짓(?)은 이제 그만 멈춰야합니다.

  • 1

    흔히들 죽을때 가장 중요한 말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죽음을 앞두고 무슨 말로 시작했을까요? "너는 힘써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잘지키고, 그분의 길을 걷고,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과 법도와 증거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되라!" (2-3절) 이 담에 이어지는 유언을 보면 요압을 가만히 두지 말아라!, 바르실래 아들들에게는 자비를 베풀라. 시므이에게 정의를 실현하라! 입니다.

    결국 그의 유언을 정리하면 하나님 사랑, 정의 실현, 이웃 사랑 입니다. 가장 중요한것은 두말할나위 없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또한 바르실래에게 은혜를 갚으라는 유언을 들으면서 이웃에 대한 사랑도 중요함을 알게 됩니다. 마지막으로는 요압과, 시므이를 언급하며 '정의 실현'을 유언합니다. 다윗의 이 유언을 생각하며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정의를 지키는 신앙인이 되야겠다 다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절대 놓치지 말아야합니다!

    2

    시므이나 요압의 입장에서는 어느날 갑자기 날벼락을 맞게 됩니다. 각각 수년전에 혹은 십수년전에 행했던 일에 대한 심판을 받게 되는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다 지나갔다고 생각하고 맘 편하게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때가 이르러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땅에서 수많은 범죄들이 일어납니다. 바로 잡히기도 하고 십수년만에 잡히는 범죄자들도 있습니다. 간혹은 안잡히는 미제사건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기록처럼 결국에는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될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간혹 잡하지 않아서 심판 안받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 서서 철저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피할수 있는 죄는 없습니다. 괜찮은 죄, 넘어가는 죄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대속하여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죄에 대한 안일함은 정말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죄는 짓지 말아야하고, 지었다면 넘어가는게 아니라 회개해야합니다. 반드시 심판의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 자신에게 취해버리는 나르시스트!

    아도니야는 나라가 들썩이며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는 행진이 진행되는 판국에 자기가 왕위에 오른다는 생각에 젖어 마냥 기뻐하고 있습니다. 자기 딴에는 인생 '최고의 만찬'인데, 실제로는 인생 '최후의 만찬'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것입니다.

    자기 기쁨에 빠져 취해있는 사람은 상황을 바로 보지못합니다. 자아도취가 그래서 무섭습니다. 가장 나중에, 혹은 가장 늦게 깨닫습니다. 사리분별이 중요하고, 영적분별이 중요합니다. '오늘의 파티'가 나를 옳아매는 그물이 될지도 모릅니다. 나 자신에 대한 교만한 착각이 나를 죽이는 치명적 무기가 될수도 있습니다. 늦기전에 '자아도취'라는 질병이 있는지 살피고, 빨리 치료 받아야겠습니다.

    기회주의자의 결말!

    기회주의자는 박쥐같습니다. 살려고, 누리려고 이리저리 머리쓰다가 제 꾀에 제가 넘어가 망합니다. 어리석은 기회주의자 말고 지혜로운 '기회주의자'가 되야합니다. 지혜로운 '기회주의자'는 기회가 올때 더욱 주의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최후의 답은 아닙니다. 오늘 아도니야 따랐다가 솔로몬이 왕이 되서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기횐줄 알고 잡았는데 제 명줄을 잡아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고 '솔로몬 줄' 잡은 사람을 칭찬하고 싶은것도 딱히 아닙니다. 결과론으로 접근해서 그렇지 만약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아닌 아도니야를 선택하시는 것이라면 '솔로몬 줄'잡은 사람들도 망하는 결과를 만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회가 아닌 하나님을 붙잡기로 결정합니다. 어느 상황에서든 기회보다 하나님입니다! 기회주의자로 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게 최선입니다.

  • 1

    솔로몬이 왕이 되는것은 언뜻보면 사람의 전략같습니다. 밧세바와 나단 선지자의 노력과 다윗왕의 결정으로 이뤄진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브나야의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를 원하고, 하나님께서 더 위대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36-37절) 라는 말을 통해 역시 이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으면, 도와주시지 않고, 힘이 되어주시지 않으면 할수 없습니다. 실제로 솔로몬이 이렇게 왕이된다 한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진짜 왕으로 세워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치 그의 형 아도니야가 몇몇사람과 자신의 의지로 자신을 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결국 왕이 되지 못한것과 같습니다. 나의 모든 인생의 걸음에 수많은 계획과 동역자가 있고, 의지와 지혜와 능력이 있다 한들, 도우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절대 잊지 말아야합니다!

    2

    솔로몬은 왕이 되고 싶었을까? 엉뚱한 생각을 해봅니다. 엄마와 나단 선지자가 여자저차하고 나오더니 "이제 왕으로 세워질꺼야!" 말합니다. 당연히 왕이 되기를 원했을수도 있지만, 생각해보면 세상에 당연한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어쩌면 모세처럼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죠.

    살다보니 원하지 않고, 생각지 않고, 얼떨떨한중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너무 일이 커서 무서운 일도 일어납니다. 내가 꿈꿨던것과는 다르게 흘러갈때도 많습니다. 내가 생각한 시간과 완전히 다를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과 성실로 부딪히면 배우고 성장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좋은 '인생의 열매'를 맺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가실때 필요한 것은 거절보다는 순종과 성실인줄로 믿습니다.

  • 1

    정치드라마는 언제나 긴장감이 넘칩니다. 조선왕조500년이 그랬고, 각 나라의 왕권다툼만 봐도 그렇습니다. 현대의 정치도 같은 일을 답습합니다. 온갖 권모 술수로 서로를 잡아 가두기 바쁘고, 심지어 아직도 어떤 나라에서는 정치인들 사이에 살인교사가 일어나기도 한다죠!

    아도니야가 왕이 될것인가? 솔로몬이 왕이 될것인가? 이것은 권력의 문제이며 동시에 생사의 문제입니다.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을때 솔로몬과 밧세바는 모든 지위와 가진것을 다 잃을지도 모릅니다. 누가 이들 모자를 고운 시선으로 보겠는가 말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이렇게 권력욕과 생존본능 사이에서 휘청대며 살고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욕심과 본능에 휘둘리고 있는것이죠.

    무엇을 위해 사는가? 어떤 삶을 살아내는가? 어떤 방법을 취하며 사는가? 속이는가? 빼앗는가? 휘둘리는가? 욕심과 생존본능이라는 삶의 필연적 동기들 앞에서 순수와 정직, 인내와 거룩, 무엇보다 믿음을 잃지 않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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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 아직 안죽었습니다. 그런데 아도니야도 왕되겠다고 난리고, 밧세바와 솔로몬, 그리고 나단까지 합심하여 왕자리 내놓으라고 난리입니다. 힘빠지고 아픈 다윗은 안보이나 봅니다. 그러나 아직 다윗왕은 죽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다윗이 측은해 보입니다. 안쓰럽습니다. 마치 빨리 죽으라고 아우성들 하는것 같습니다.

    내 유익을 얻기 전에, 요구하기 전에 타인도 세심하게 살피는 자가 되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것일지라도, 내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달라고 할때라도 상대를 한번 살피면 어떨까 싶습니다! 내 주변이 나 때문에 조금더 따듯하게 위로받을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이후에 내것을 얻어도 늦지 않습니다!

  • 1

    다윗왕이 늙었습니다. 그렇게 영광으로 찬란했던 다윗도 그의 노년에 몸하나를 따듯하게 하지 못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영원한것은 없습니다. 육신은 늙을수밖에 없습니다. 노화를 늦출수는 있으나 막을수는 없습니다. '영광의 노화'도 마찬가지 입니다. 영원할것 같지만 영원하지 않습니다. '부의 노화'도 마찬가지 입니다. 영원할것 같지만 영원하지 않습니다. 다수의 역사학자가 지적하듯이 인류의 역사에 '영원한 제국'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이 누리는 제국적 영광도 영원하지 못할것이라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젊은 여인 아비삭'도 오늘 젊고 아름다워서 다윗의 시중종이 되었지만, 그녀도 결국에는 이내 나이를 먹고 늙게 되는것입니다.

    영원한 영광은 오직 주님 뿐입니다. 영원을 허락하시는 분도 오직 주님 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아비삭'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이내 사라져버릴, 이내 누리지 못하게 될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영원을 책임지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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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도니야는 참을수 없이 가벼운 남자입니다. 아버지가 나이가 많아서 연약해지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왕위에 계시고,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도니야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셀프 왕위식'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왕은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으로 진행되는 일입니다. 사울왕도 그랬고, 다윗왕도 그랬습니다. 그러니 만약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고 한다면 그는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의논함으로 왕되될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참을수 없습니다. 빨리 왕이 되고 싶고, 자기 맘대로 하고 싶고, 누리고 싶습니다.

    '참을수 없는 가벼움'은 십중팔구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때도 내 욕망에 휘들려 방종하면 십중팔구 망합니다. 경솔해지면 안됩니다. '붕 뜬' 인생이 되지않도록 조심해야합니다. 섭리를 기다릴줄 아는 지혜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기다릴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 어릴적을 생각해보면 여학생들은 화장실을 갈때도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가곤 했습니다. 일종의 '같이가는문화'입니다. 꼭 화장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같이가고자 하는 의지를 자주 발현합니다. 내성적이고, 혼자있는것을 즐기는 사람도 때로는 위험하고, 어렵고, 무서운곳을 가려고 할때 혼자보다는 같이 가려고 하기도 합니다.

    같이가면 좋습니다. 두려움을 이기기도 쉽고, 상황을 파악하기도 한결 수월합니다. 집단지성이 큰 도움이 되기도 하는것이죠. 실수의 가능성도 줄어들기도 합니다. 기쁨은 배가되고, 슬픔은 반이되기도 합니다. 혼자보다는 즐거운 시간이 될수도 있습니다.

    오늘 마리아는 그렇게 혼자가 아닌 '마리아들'로 동네에서 여럿이 같이 만나서 서둘러 예수님 묻히신 무덤으로 이동합니다. 확실히 혼자보다는 같이 가는게 힘이되고, 마음에 안정도 되고, 도움도 됩니다. 그렇게 무리를 지어 무덤에 도착했을때 그들은 빈무덤을 마주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들은 당황합니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봅니다. 바로 이때 다수가 갖는 힘을 보여줘야합니다. 집단 지성의 힘이 발휘되야 합니다. 그게 안되면 누군가 그중에 한명이라도 리더십을 발휘해야합니다. 그런데 다수의 사람들중 단 한 사람도 분별하지 못하고, 인도하지 못하고, 방향을 잡아 주지 못하고, 상황을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들중에 한명이라도 예수의 말씀을 빨리 기억해내서 "예수님 부활하셨다!" 하지 못합니다.

    세상이라는 무리에 속해 있는 우리는 이들 같아서는 안됩니다. 영적인 상황을 마주할때 분별하여 말할줄 아는 자가 되야 합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고, 해석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예수 부활하셨다!" 라고 깨달아 말해줄수 있는 사람이 되야합니다. 이런 영적 분별과 능력이 없다면 다수가 모조리 실족하는것을 보면서도 도와줄수 없습니다. 바른 소리를 해주지 못합니다. 같이 당황하고, 같이 방황할 뿐입니다.

    나라도 깨어있어야 합니다. 우리라도 깨어있어야 합니다. 분별해야합니다. 그리고 깨달은 바를 정확하게 말할줄 알아야합니다. "예수님 말씀하신데로 살아나셨나보다! 우리 빨리 갈릴리로 내려가자! 예수님이 우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부활하셨다! 예수님 살아나셨다!"

    '세상'이 주를 몰라보고,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고, 당황하고 방황한다고 우리까지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분별하고, 알고, 선포해야합니다. "예수 살아나셨다! 나와 함께 예수를 만나러 가자!" 분별하여 바른길로 인도하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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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은 간혹 부모를 부끄러워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부모가 하는 직업 때문에, 부모가 하는 행동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를 모른척합니다. 부모가 유명하고 자랑할만한 일을 하면 아빠자랑, 엄마자랑 합니다. 그런데 반대 경우를 생각해보면 모르는척을 해버리는 것이죠.

    그런데 부모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들이 크게 잘못을하고 부모가 소환되면,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을 모른척 할까봐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부모는 와서 자신의 아이부터 챙기고, 자신의 아이를 위해 대신 사과합니다. "제 아이입니다. 제가 죄송합니다!" 아이는 이 사건을 통해서 '나'라는 존재를 사랑하는 부모를 보게 됩니다. 부모의 사랑은 그렇습니다. 잘못했다고 버리지 않습니다. 모른척하지 않습니다. (물론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은 부모도 많지만, 일반적으로는 '부모의 사랑'은 이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사랑은 조건적이라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때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부끄러워하거나, 버리시지 않습니다. 당연히 잘못하면 꾸짖습니다. 때리기도 하십니다. 그게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사건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내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사사의 역사속에서도 버리지 않으셨고, 열왕의 시대에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암흑기를 지나는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결국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야합니다. 실천해야합니다. 결국 조건적이지 않은 사랑으로 주앞에 드려야합니다. 가장 먼저되는 계명이 바로 "마음과 생명과 뜻과 힘을 다해 여호와를 사랑하라!"입니다. 이 말은 조건없이 사랑하라는 말과도 일맥상통 합니다. 잘되서, 행복해서, 기뻐서, 축복받아서, 안전해서, 건강해서 사랑하는거 아닙니다. 그냥 주님이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향하신 당신의 변함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증명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향해 그런 사랑의 자세로 살아가야 할것입니다.

    환경과 상관없이, 상황과 상관없이, 죽기까지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당신은 사랑받기에 충분하신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나의 아버지 사랑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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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가 '화목제' 되심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중재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자칫 깨지고, 오해되서 다시 아물수 없는 관계들도 중재자의 역할을 통해서 완전히 회복되는 일도 일어납니다. 오해를 풀어줍니다. 중간에 완충제가 되어 본인이 희생하며 둘을 화해시키기도 합니다.

    부부는 때로는 치열하게 싸웁니다. 그리고 나서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수그러들고 화해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잘못이 있으니까 선뜻 다가서지 못합니다. 계속 화해가 안되고 상황은 어려워집니다. 그때 아이가 나섭니다. 엄마 아빠 사이에서 화해의 역할을 합니다. 손을 잡고 이리저리 뛰기도 하고, "엄마, 아빠"를 사랑스럽게 부르며 둘을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자녀 때문에 화해하게 되는 부부도 참 많습니다! 중재자의 역할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아이처럼 모르는 중에 화해시키시는 분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 아십니다. 그리고 이 중재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아십니다. 십자가를 값으로 지불해야함도 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의 화목을 위해서 기꺼이 지불하신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만들어 내신 이 '화목'을 잃어버리지 않는자가 되야합니다. 중재자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수고를 무용하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우리가 '화목제'가 되야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화목제가 되야합니다. 아직도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있는 자들이 화해할수 있도록, 죄사함 받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화목제가 되야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저야한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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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 앞에 서있는 여러 무리의 사람들을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듭니다. 뒤늦게 깨닫는 백부장을 보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그냥 구경하다가 가슴치며 돌아간 사람들 보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멀리서서 보고만 있던 여인들도 안타까워 보입니다.

    '뒤늦게라도 깨달으면 다행이지!'라고 말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뒤늦게 기회가 없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마냥 나중으로 미루다가 신앙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신앙은 '뒤늦은 신앙'이 되면 안됩니다. 또한 구경만 하다가 가슴치며 돌아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면서도 구경으로 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경하는 신앙인은 진짜 신앙이 아닙니다. 구경하는 신앙은 '가슴치는 후회'만 남는 신앙입니다. 또한 '멀리서있는 신앙'도 옳지 않습니다. 주님을 '알고있어'서 뭐하나요?! 곁에 있지 않는, 함께 하지 않는 신앙은 건강하지 못합니다.

    한켠에는 요셉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를 향한 그의 마음은 진심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죽이는데 찬성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선하고 의로우며 하나님의 나라가 오길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그는 당시 권력이 부족했고, 십자가 사건은 일어나야했기 때문에 막을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예수의 죽음을 안타까워 한 요셉은 예수의 시신을 챙겨 무덤에 묻어 드립니다.

    맨날 뒷북치는 신앙, 구경만하고 후회하는 신앙, 멀리서서 미지근하게 바라보는 신앙은 과감하게 버리고 예수님 내 삶에 오셔서 다스리기를 기대하는 신앙인이 되야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게 임해, 하나님께서 나를 온전히 통치하시게 하는 신앙인이 되야합니다. 그렇게 예수 곁에 함께 못박히고, 주와 함께 살아, 예수를 위해 뜨겁게 사는 신앙인이 되기로 결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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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의 손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도, 서시 지켜보고 있는 백성들과 지도자들도 모릅니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모릅니다. 그러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면 자기도 구원하라지!" (35절)

    사실 정말 구원이 필요한 사람은 백성들이고, 지도자들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는 죽는것 같고, 자기들은 사는 사람 같습니다. 그러나 모순적으로 예수님이야 말로 구원이 필요없으신 분이고, 다른 모든 사람이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쉽게 착각합니다. 나는 구원이 필요없는 자라고 착각하는 사람은 넘쳐납니다. 돈이 많아서, 건강해서, 능력이 좋아서, 젊어서, 배경이 좋아서, 이력이 좋아서, 잘생겨서, 인맥이 좋아서, 이유도 참 많습니다. 아무튼 지금 내가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아니니 나는 구원이 필요없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혀를 차며 불쌍해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향해서도 혀를 차며 모욕을 줍니다.

    다 가지고 있어도 그리스도가 내 안에 없으면 나야 말로 구원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내 삶에 주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내 손을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나는 망한 인생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자기도 구원하라지!" 말할것이 아니라, "주님, 나를 구원하소서! 나를 구원하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해야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올라가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끝까지 대속을 완성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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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주님과 함께 있는곳이면 어디나 낙원입니다. '낙원'이여서 낙원이 아닙니다. 꽃이 피어서 낙원인가요? 보물이 많아서 낙원인가요? 먹을것이 많아서 낙원인가요?

    오스틴 살다보니 꽃 많으면 낙원 아닙니다. 알러지 때문에 눈물, 콧물, 기침의 지옥입니다. 보물 많아도 낙원 아닙니다. 흔하면 더이상 보물이 아니고, 더 비싼거 살려고 아둥바둥 거리다보면 그게 곧 노동의 지옥일 뿐입니다. 먹을 것이 많아서 낙원인가요? 잠시 입속의 낙이 있을 뿐이요, 결과는 나빠지는 건강지수와 지병의 확장 일뿐입니다.

    낙원은 다른게 낙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서 낙원입니다.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오늘, 지금, 이곳에서의 삶이 낙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니 우리 가정이 낙원입니다. 우리 교회가 낙원입니다. 주님 내 안에 계시니 주로 인하여 천국에 거하는 인생을 매일 살수 있습니다. 나와 동행해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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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라도에게 연민을 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도 어쩔수 없었어!" 그러나 사실 빌라도는 연민의 대상은 아닙니다. 결국에는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알면서도 죄없는 자를 팔아 넘긴 자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왜 이토록 빌라도에게 연민을 가지는자가 생기는가 보니까, 많은 이들이 빌라도 안에서 자신을 봐서 그런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어쩔수 없어'라는 상황을 핑계로 자주 예수님을 버립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팔아넘기는' 정도의 악행이나, 타협은 아닐지라도, 꽤나 자주 예수님을 모른척 하거나, 잠시 주님을 떠나거나, 나의 이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부정하는 순간들이 있는것입니다. 그러니 빌라도를 너무 몰아세우면 마치 나 자신을 너무 몰아세우는것 같은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것이죠. 너무 몰아붙이자니 좀 감싸주고 싶은것이죠. "상황이 어쩔수 없잖아!"

    상황과의 타협, 나의 이익을 위한 타협, 정의가 무엇인지 알지만 포기해버리는 삶, 예수님을 배신하는 신앙, 버리는 신앙은 모두 건강하지 않은 신앙입니다. 연민을 느낄것이 아니라 따끔하게 충고해야 하고 돌이켜야 하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빌라도가 되어서도 안되고, 예수를 죽음으로 내모든 군중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모르긴 몰라도, 꽤 많은 '군중 속에 군중'이 빌라도와 같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를 죽이시오!"를 외쳤을 것입니다. 군중때문에 타협한것이죠.

    어쩌면 내 안에 남아 있을 '빌라도'를 버립니다.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이익의 욕심'을 버립니다. 정의 마져 내 팽개칠수 있는 군중에 대한 두려움도 버립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는 일은 이제 그만 입니다. 나랑 닮은 죄인을 향한 연민도 이제 그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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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떨결에 바라바가 살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살게 된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석방이 된것입니다. 원래 '사면'이 있다고 한들 바라바 같은 강도 혹은 정치범 혹은 살인자를 쉽게 사면시켜줄 일이 아닙니다. 또한 그의 죄명에 '폭동'이 있습니다. 이는 그가 사람들을 선동하는 자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애초에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것도 '선동'이 큰 이유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니 바라바 같은 이는 원래대로라면 사면 받을 만한 인물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사면 됩니다. 두번째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자격이 있어서가 절대 아닙니다. 본인의 노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본인이 선해서도 아닙니다. 그저 은혜입니다. 이는 빌라도의 은혜도 아니고, 군중의 은혜도 아닙니다. 예수때문에 얻어진 말도 안되는 은혜입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도 전에 이미 보여주십니다. 죄인을 살리시는 구원의 주님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우리는 주님때문에 사면된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대신해서 잡히셨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로 인해 자유해졌습니다.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고, 내 노력도 아닙니다.

    사면 받은 바라바는 이제 다시 과거의 삶을 살면 안됩니다. 아마 주변에서 그가 다시 과거의 삶을 산다고 하면 엄청 손가락질 할것입니다. 두번째 기회는 망쳐서는 안되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고쳐먹은 인생이 되야합니다. '사면받은 나'는 이제 과거처럼 살것 아닙니다. 내 안에 예수를 쫓아 살아야합니다.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성화의 인생을 살아야합니다. 바라바같은 나를 대신해 십자가 지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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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에는 기도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도입니다. 요즘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은 '기도'로 귀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이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그런 예수님 조차도 십자가를 마주하시던 날 밤 그렇게 기도의 자리로 나가셨습니다. 땀이 피가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께어 있으라!" 말씀하셨습니다. 더 나가 "너희가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기도가 없어서 쓰러지고, 지치고, 낙심하고, 우울하고, 방황하고, 두렵고, 정신없고, 악한것입니다. 어쩌면 결국 기도가 없어서 베드로는 경고를 받았는데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했고,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놓고 도망갔는지 모릅니다. 기도 없이는 절대 이겨낼수 없습니다. 지켜낼수도 없습니다. 기도없이 사는것은 암흑같은 동굴을 손전등없이 걷는것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바퀴가 없이는 자전거를 탈수 없습니다. 기도없는 신앙생활이란 이처럼 말도 안되는것입니다.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변명하기에는 기도는 너무 중요한 신앙의 호흡입니다.

    어제도 우리는 저녁시간을 주님께 기도하는 시간으로 드렸습니다. 우리의 삶에 이처럼 '겟세마네'를 잊지 않는 자들이 되야겠습니다. 매일 겟세마네에 올라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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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맞춤으로 예수를 배반하는 유다를 봅니다. '입맞춤'만 보면 인사입니다. 친밀함과 반가움의 표시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유다의 입맞춤은 악의적 진의를 감추기 위한 거짓에 불가 합니다.

    '입맞춤'만하는 신앙인들 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예수님과 친해 보입니다. 환영하는거 같습니다. 반가워하는거 같습니다. 그러나 돌아서면 남입니다. 아니 배신자입니다. 팔아버리는 자입니다. 악에 편에 선 자입니다. 이런 자에게 예수님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배반하려느냐?"

    그렇습니다. '입맞춤'해도 예수님은 아십니다. 그의 마음을 아십니다. 속 깊은곳에서 일어난 배신을, 악함을 이미 아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교회에서 그럴듯한 모습으로 '입맞춤하는 신앙인'이여도 예수님은 아십니다. 속지 않으십니다. 그 거짓되고, 구역질나는 신앙을 정확하게 집어 내십니다.

    포장된 신앙인, 포장하는 신앙인, 그러면서 예수님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오히려 무시하고, 부정하고, 배신해버리는 신앙인, 그저 교회 안에서,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나의 유익만 챙기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예수님이 이미 다 아십니다. 진실한 신앙인이 되야겠습니다. 좌충우돌 할지라도 솔직한 신앙인이 되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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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다여, 유다여, 어찌하다 이렇게 됐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더욱 선명하게 기억되는 절기, 바로 유월절입니다. 우리로 따지면 고난주간을 맞아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욱 선명하게 기억하게 되는 그런 절기인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유월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영적으로 깨어있고, 기도하고, 감사하고, 집중해야 할 때인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시기에 예수의 원수들도 아닌 예수의 사도가, 예수님을 팔기로 작정한것입니다.

    고난주간, 예수님을 더욱 묵상하고, 십자가를 더욱 묵상하고, 그 어느때보다도 경건하고, 거룩하고, 깨어있어야 할 이때에 자칫 우리도 유다처럼 최악의 죄를 저지르거나, 실수하는 일들도 일어날수 있습니다. '절기'가 자동적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는것도 아니고, 지켜주는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처럼 이런 때일수록 사탄은 더욱 발악을 하게 됩니다. 누군들 잡고 늘어져 망하게 하려고 발악하는 것입니다.

    고난주간, 많은 제자들속에서 하필 사탄에게 유혹받고 예수님을 팔아버리는 '가룟유다' 같은 자가 되지 않아야겠습니다. 절기의 의미를 더욱 상기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고, 예수님께 집중하고, 예수님을 생각하고, 십자가에 올라가는 마음으로 지내면서 죄악과 실수를 멀리하는 한주가 되야겠습니다. 더 나가 그런 일생이 되야겠습니다.

    *한주간 더욱 특심으로 십자가를 묵상하고, 예수님을 기억하며 기도하기를 도전합니다! 바우교회가 기도의 삶을 만들어 가는데 있어서 더욱 화이팅 하길 도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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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후의 만찬을 위한 장소는 이미 하나님께서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런데 그 장소에 가기까지는 제자들의 순종이 필요했습니다. 마을로 들어가 다짜고짜 물동이 들고가는 사람을 따라가서 그 집에서 머물곳을 요구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저 같은 성향의 사람이라면 너무나 순종하기 힘든 일입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가는것도 힘든데, 부탁까지 해야합니다. 그런데 그 부탁도 말도 안되는 부탁,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서는 무리하고 무례한 부탁같이 들리는 말을 해야합니다. 그러니 순종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순종은 참으로 하나님의 예비가 성취되는 통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셨습니다. 모든것은 준비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명령을 들으면 순종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순종의 도구가 되야겠습니다. 믿음으로 일하는 순종의 도구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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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의 시편의 형식을 따른 묵상 고백>

    오 하나님이여, 아침마다 주님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 기도에 귀 기울이소서. 두렵고, 의심되며, 낙심되고, 어려운 마음이 될때마다 카펫 바닥에 엎드려, 혹은 침대 한켠에 엎드려 주께 부르짖을 것입니다. 마음이 무너진 그곳에서, 나를 주님께서 계신 그 높은 곳으로 인도하소서. 주님은 참으로 나의 피난처 되시며, 위로가 되시며, 나를 지켜주시는 든든한 망대가 되십니다. 내가 주의 장막에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주의 날개밑에 거하는 자가 되겠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주께서 내 서원을 들으셨고, 내게 예비된 영적 유산을 주셨습니다. 바로 교회를 섬기라는 유산입니다. 이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게 해주세요. 그러므로 주께서 맡기신 이 '개척도구'의 수명을 연장해 주셔서 그 나날이 여러 세대에 걸쳐 계속되게 해주세요. 주의 인자하심과 진리로 교회를 보호해주세요. 그러면 내가 영원히 주의 이름을 찬송하며 날마다 내 서원을 이루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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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기뻐하리라. 세겜을 나누고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리라. 길르앗이 내것이요, 므낫세가 내 것이며, 에브라임이 내 투구이며, 유다가 내 지팡이이며" (6-7)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기쁨'으로 가득차 계십니다. 여기서 '기쁨'으로 해석된단어는 원어적으로, 다른 성경 버전으로 보면 '뛰놀다'로 해석됩니다. 기도하는 자녀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렇습니다. 방방뛰는 기쁨입니다. 행복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실때, 우리에게 응답하실 때 어쩔수 없이 하시는게 아닙니다.

    이게 이해가 갑니다. 어린 딸이 "아빠!" 부르며 "도와주세요!" 라고 말하면 그게 그렇게 기쁩니다. 어려움 앞에서 나를 찾아주었다는것이, 도움이 필요할때 아빠를 찾았다는 사실이 뿌듯하고, 반갑고, 기특하고, 기쁩니다. 그래서 "그래?! 아빠가 뭘 도와줄까!" 목소리 높여 과장되게 말하며 아이를 힘껏 도와줍니다.

    오히려 쭈볏대고, 믿지 못하고, 부탁하지 못하는 딸들을 본다면 그것이 슬픕니다. 딸들은 어쩌면 부모님 생각한다고, 베려한다고 그러는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부모 입장에서는 부탁하는 딸들로 인해 더 기쁩니다. 나를 찾아주는 딸들로 인해 뛸뜻 기쁜 마음으로 도와주게 되는것입니다.

    하나님은 도와주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런 저런 이유는 다 버리고 하나님을 찾아야겠습니다. 체면 생각할것도 아닙니다. 혼자 성숙한척 할 것도 아닙니다. 혼자 처리할수 있다고 착각할것도 아닙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세요! 우리도 다윗처럼 가감없이, 지체없이 하나님을 믿고 찾을때, 하나님은 방방 뛰며 기뻐하는, 들뜬 사람처럼 다가와 도움이상의 도움으로 함께 해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나를 돕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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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도움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11) 라고 해석된 이 말씀은, 많은 성경번역본에서 '도움'보다는 '구원'이라는 단어로 주로 해석되었고, 원어의 뜻도 '구원'으로 주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러니 다시 기록하자면 "사람의 구원은 아무 소용이 없다!" 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사람의 '도움'은 아무 소용이 없지는 않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고, 진짜 큰 도움과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서로 도움을 주고 받고, 힘을 얻고 격려를 얻는것은 좋은 일입니다. 저도 더욱 도와주는 사람이 되기로 결단합니다. 또 필요할때마다 많은 주변인들의 도움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고백처럼 사람의 도움은 도움에 그치지 '완벽한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세상의 도움이란 마치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채워지긴 합니다. 혹은 물의 양을 어떻게든 지켜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지치고, 결국에는 물이 줄어들게 되고 맙니다. 도움이 되지만 구원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밑빠진 독을 버리고 새 독으로 바꿔주시는 도움입니다. 완전합니다.

    사람에게는 도움을 받고, 하나님께는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니 사람의 도움이 진리인것처럼, 전부인것처럼 오해하는 착각은 버려야하고, 하나님의 구원이 불완전한 도움인것처럼 오해하는 착각도 버려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은 완벽합니다. 구원입니다. 사람의 도움은 사랑이며, 위로이며, 공감일수 있으나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구원이 되지 못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서로는 도우면서 살고, 도움에 감사하며 살며, 하나님은 믿으며 사는것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지혜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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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그의 시편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의 시편을 보자면 하나님의 보호가 있고, 악인을 향한 심판이 있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윗은 여전히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고, 상황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이 시편의 배경이 그렇습니다.

    믿음이란게 참 힘듭니다. 고난 가운데 기뻐하는 마음이고, 암전 가운데 빛을 보는 능력이고, 구름 한점만으로도 해갈의 비를 보는 능력이고, 딱 한끼니 먹고 죽을 양식으로 남을 대접하는 순종이고, 사랑하는 독생자까지도 제물로 드려야하는 충성이고, 복음을 위해 순교까지도 불사하는 사명의식입니다.

    '믿음'은 아주 자주 우리의 한계를 시험합니다. 어디까지 견디고, 어디까지 순종하는지 시험합니다. 이 '믿음의 시험'은 망하게 하려는게 목적이 아니고 성장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더욱 강해지고, 온전해져 모든것에 흠이 없는 자가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선 입니다. 힘들수록 더욱 믿음을 붙들고, 어려울수록 더욱 믿음으로 순종해야겠습니다. 간절히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돌파할때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해결하시고, 완성하실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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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주의 신실하심을 노래하겠습니다"

    아침마다 의지적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높여드리는 시간을 의지적으로라도 가져야겠습니다. 찬양의 고백을 통해 오전부터 모든 영적 안개를 걷어버리고 기쁨과 벅찬 감동으로 매일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먼저 입술의 고백과 찬양을 회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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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에 대한 다윗의 태도는 단호합니다. 아니 무섭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그들의 입에 있는 이를 다 부러뜨리소서. 오 여호와여, 사자들의 송곳니를 뜯어내소서! 그들이 흘러가는 물처럼 녹아버리게 하소서." (6-7절)

    물론 다윗이 '악인'에 대해서 이토록 강경한 이유는 이 '악인'들이 다윗에게 원수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 태도를 통해 우리는 원칙적으로 '악'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이와같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언젠가부터 많은 이들이 '악'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들이 '악'에 대해 경계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그들과 싸우는 것을 번거롭거나, 불편한 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악'과의 대립이 인격적이 않고, 성숙하지 않고, 포용하지 않는 편협함이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하기 시작했습니다. "평화가 좋은것이야!"

    '평화'라는 단어는 좋습니다. 그러나 '평화'라는 단어를 '악'과의 사이에도 적용하려는 태도는 잘못된 태도입니다. 악과의 평화는 다른 말로 타협입니다. 타협은 기독교의 변질, 성도의 변질을 만들어냅니다.

    악을 향한 모호한 태도는 결국 우리가 잡아먹히는 올무가 되어 돌아옵니다. 악은 내 앞에서는 웃다가 어느새 뒤로 돌아와 내 뒤통수를 때립니다. 나의 폐부를 찌릅니다. 돌이킬수 없는 상처를 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악에 의해서 영적 절명을 하기도 합니다. 악에게는 친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악에 대해서는 언제나 단호하고 강경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심판하실때 자비를 베푸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향해 용서를 베푸시고 기회를 주실지언정, '악'에게는 그 어떤 자비도 없습니다. '악'은 파괴되고 소멸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악'을 향해서 선포해야합니다.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 악의 모든 이를 다 부러뜨려주시고, 그들의 송곳니를 뜯어내시고, 그들이 녹아 없어져버리게 하시고, 그들의 능력이 상실되게 해주세요!" 모호한 태도를 정리해야되겠습니다.

    2

    '공의의 실현'은 하나님의 증거같이 여겨집니다. "그때 사람들이 말하리라. "정말 의인들이 상을 받고 정말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11절)

    다윗은 살고, 다윗을 쫓는 사울왕과 그 무리들은 결국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공의가 맞나요? 공의가 맞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의 입장에서는 공의가 아닙니다. 사울왕은 억울해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어디있습니까!"라고 소리 지를수도 있습니다. 그가 만약에 '정의'의 기준을 자신의 편에서만 해석한다면 충분히 이런 일이 일어날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실현됩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완성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가 곧 나의 정의는 아닙니다. 내가 항상 '다윗의 편'에 서있거나, '다윗'은 아닙니다. 그래서 정의가 실현될때, 나의 정의가 아닌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정의가 실현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증명되는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심이 증명되는것입니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내가 생각하는 정의가 실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해하시겠죠?)

    가장 지혜로운것은,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의 편에 항상 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될때 '사울꼴' 당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될때 '상을받는 의인'(11절)이 아니라 '심판받는 악인'이(10절) 될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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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영혼이 주를 신뢰하오니" 라는 1절의 말씀은 원어로 보면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개역개정도 이를 "주께로 피하되"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주목할만한 단어는 바로 '영혼'입니다. 다윗은 "내가 주께로 피하되"라고 기록하지 않고 "내 영혼이 주께 피하되"라고 기록합니다.

    이 믿음이 중요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숨어 있던 이 동굴에서 용변을 보던 사울왕을 죽일수 있는 기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영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사울왕을 죽이기를 거절했습니다. 인간적 관점으로 보자면 가장 확실한 기회를 놓친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관점으로 보자면 죽이지 않는것이 맞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이 선택은 멋져 보입니다. 그러나 사울왕을 죽이지 않은 후에, 다윗은 자신의 처한 상황을 깨달으며 낙심했을지 모릅니다. 이제 가장 좋은 기회마져 날려버렸으니 그는 어쩌면 영원히 도망자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가장 좋은 기회에도 사울왕을 죽이지 못한다는것은 다윗이 앞으로 혼자의 힘으로 절대 이 도망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 하기도 합니다. 사울왕이 자연사하거나, 전사하는게 가장 빠른 방법이겠지요. 그러므로, 어쩌면 이 상황은 다윗에게는 절망적인 상황이라는것이죠.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다윗이 이 생애에 대한 집착으로 휘둘렸다면, 다윗이 영혼까지 영원히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면, 그는 분명히 동굴속에서 용변보는 사울왕을 자기 손으로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기름부음받은 왕을 죽이는 죄인이 되는것이죠.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앞서도 지적한것처럼 다윗은 '영혼까지 영원히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를 책임지시는, 나의 육신 뿐 아니라 영혼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범죄하는 것, 실수하는것을 막아줍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영혼을 영원히 책임지신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이 땅에서의 급박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저지르는 수많은 범죄에 유혹에서 우리를 지킬수 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내 영혼을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믿음의 선포를 하는 사람이 삶의 집착 때문에 죄짓지 않습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전혀 의심없이 믿는 건강한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이 믿음을 통해 우리는 실수하고, 넘어지고, 두려워하고, 지고, 낙심하는 선택들에서 돌이켜 건강하고 바른 선택을 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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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사람은 숨쉴 공간이 필요합니다. 고난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쉼없는 고난입니다. 고난과 고난사이에 조금이라도 호흡을 가다듬을수 있다면 힘들지만 상대적으로 수월합니다. 그런데 고난과 고난의 사이가 없이 첩첩산중이 쉴세없이 몰아치는 형국이라면 결국 지치고 쓰러집니다. 실제로 운동을 해보면 100파운드짜리 무게를 15번들고, 1분 혹은 그 이상을 쉬면 5-6세트도 거뜬히 할수 있습니다. 근육이 견뎌 냅니다. 그런데 80파운드의 무게도 세트 사이에 15초씩 쉬면 3-4세트도 감당하기 힘들어 집니다. 쉴세없이 고난이 몰아치면 상대적으로 가벼운 고난에도 쉽게 *그로기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쏟아냅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이 나를 삼키려고 하루 종일 공격합니다!" (1절) 시적 표현이기도 하지만 다윗은 '하루종일' 고난을 마주하는것 같이 느끼고 있습니다. 실제 다윗은 인생에 몰아치듯 고난을 경험한 시절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니 다윗도 쉴세없이 닥치는 고난 앞에 그로기 상태가 됐을지도 모르는것이죠.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상황을 정리합니다. "내가 두려울때 주를 의지하겠습니다!"(3절)

    결국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고난이든, 쉴세없이 몰아치는 고난이든 그 순간을 마주할때 주를 의지하겠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로기 상태를 만날것 같을때마다, 아니 미리미리 의지할 곳을 찾아야합니다. 그렇게 권투선수는 링줄을 의지하거나, 상대선수에게 안겨서 곧 닥칠 그로기 상태를 피합니다. 그렇게 gym에서 운동하다가 무리가 오는거 같을때 도와주는 사람을 불러 기절하는 상태를 막습니다. 미리미리, 그때 그때 의지하면 그로기 상태를 피할 수 있습니다.

    고난은 때를 보고 찾아오지 않습니다. 무작정 들이닥칩니다. 실세없이 몰아치기도 합니다. 실제로는 상대가 휘청거릴때가 원수에게는 가장 확실한 기회이기 때문에 더욱 몰아칩니다. 그러니 우리도 항상 주님의 품에 안길 준비를 해야합니다. 주님 손잡고 걷고, 주님 곁을 걷고, 주님 품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쉴세없는 고난'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니 내게 두려울 게 없습니다. 사람이 내게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11절)

    어쩌면 정신적으로, 상황적으로 '하루종일' 공격을 만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죽일듯(?) 달려드는 사람도 만날수 있습니다. 상사나, 친구나, 선배나, 동료나, 가족을 통해서도 간혹 일어나는 일이지요. 삼키려고 달려드는 상황도 있고, 싸우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생각만해도 호흡이 가빠지고 머리가 아찔해집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시마다, 때마다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돌파하는 삶이 될것임을 믿습니다.

    *그로기상태란? 해지거나 다리가 후들거려서 비틀거리는 상태, 또는 몹시 피곤하거나 취해서 비틀거리는 상태를 그로기(groggy)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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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자주 그런 생각을 합니다. '기도의 힘은 어쩌면 응답에 있는것이 아니라 토로에 있다.' 기도를 통해 회복을 경험한다고 했을때, 그 회복이 언제나 응답으로 인해 얻어지는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원하고 기대했던 바대로의 응답이 없어도, 단지 내면의 갈망을 쏟아낸것만으로도 회복하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대화중에 이런 말들이 오가곤 합니다. "미안해, 들어보니 네 상황을 알겠는데 내가 해줄게 하나도 없네!" 그러자 그 말을 듣고 친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야, 그냥 다 쏟아낸것만으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 이제 좀 살것같다! 이제 괜찮은거 같애!" 응답과 해결방법을 얻어서가 아닌, 그저 쏟아내는 대화를 통해서 회복이 시작된것입니다.

    기도도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기도'라는 하나님을 찾는 과정에서부터 이미 회복은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꼭 내 생각과 방법대로 응답받으려고 기도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을 찾으라는 의미로써 "기도하라!"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다윗도 딱히 상황에 응답이 임하지 않을때도 계속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었습니다.

    회복과 해결의은혜는 기도에서 오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확실한 통로가 바로 기도인것입니다. 기도해야합니다.

    "오직 나는 하나님을 부를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저녁이나 아침이나 한낮이나 내가 울부짖으며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내 소리를 들으실 것입니다." (16-17절)

    '기도'라는 하나님과의 대화만으로도 우리는 변화를 경험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더욱 친밀하게 만나게 될것입니다. 하나님을 친밀하게 만나기 시작하면 그것이야 말로 참된 응답이며, 완전한 구원입니다.

    오늘도 나의 상한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냅니다. 지친 상황의 푸념을 주님께 쏟아냅니다. 내면의 울음을 하나님 앞에서 쏟아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를 것입니다. 회복할것입니다. 마음에 평강을 얻을 것입니다. 기쁨이 넘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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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다가왔고 공포가 나를 덮었습니다."(5절)

    다윗은 무서울것이 없는 사람 아닌가요? 어릴적 그는 들판에서 곰과 사자와 맞서 싸웠던 사람입니다. 그 누가 곰, 사자와 맞설수 있나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두려워 발걸음조차 때지 못했던 골리앗을 보고도 주저함 없이, 위축되지 않고 뛰어나갔던 사람입니다. 진짜 다윗은 왠만해서는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 다윗이지만 중년, 노년의 그의 인생을 보면 사울왕도 무서워하고, 죽음도 무서워하고, 압살롬도 무서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익숙해진다고들 하지만, 무뎌진다고들 하지만 두려움은 계속 갱신됩니다. 어제는 참았던 두려움도 오늘 마주하면 새롭고 더 무섭기도 합니다. 분명히 넘어선것 같은데 다시 같은 두려움에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몇번 두려움에 걸려 넘어지면 이제 과거에는 '두려움'이라고 불리지도 않았던 조그만 일에도 쉽게 겁먹고 넘어지게 됩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마음"이 되는것입니다.

    어쩌면 다윗이 이런 마음이 된건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다윗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내게 비둘기처럼 날개가 있었더라면 멀리 날아가 쉬었을텐데! 저 멀리 도망가 광야에서 지냈을 텐데, 광풍과 폭풍을 피해 내가 쉴 곳으로 얼른 달아났을텐데."(5-8절) 아니 언제부터 다윗이 두려움 앞에 도망갔던 사람인가요? 두려움 앞에 하나님과 돌파하던 사람이 다윗입니다.

    두려움을 돌파하는 방법은 도망이 아닙니다. 경험이 많다고 언제나 두려움을 돌파할수 있는것도 아닙니다. 오늘 내 안에 일어나는 두려움을 이렇게 돌파합니다. "오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 기울이소서. 내 간구로부터 자신을 숨기지 마소서. 나를 돌아보시고 귀 기울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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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바로 너라니! 가깝게 지내던 내 동료 내 친구라니!" (13절)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친구, 동료에게 가장 큰 상처를 받은적도 있습니다. 형언할수 없는 실망이며 아픔입니다. 배신만큼 우리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일도 많이 없습니다. 부모가 배신하고, 자녀가 배신하고, 형제 자매가 배신하고, 베스트프렌드가 배신하고, 선배가, 동료가, 후배가 배신하고 성도도 배신하고 심지어 목사도 배신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배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으십니다. 나를 배신하지 않은 하나님이 계셔서 든든합니다. 힘이 됩니다. 위로가 됩니다. 배신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배신없이 영원히 나의 친구 되어주시는, 나의 아버지 되어주시는 하나님이 계셔서 참 다행입니다.

    배신을 경험하지 않는 삶이 되길 기도합니다. 배신을 경험했을때, 배신하지 않는 예수님을 기억하며 위로받는 믿음의 신앙인이 되야겠습니다. 혹 배신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묵상을 읽으며 배신을 멈추길 부탁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는 신앙인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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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이 사울왕을 피해 도망다니는 여정이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기름 부으셨습니다. 이쯤되면 하나님께서 도망하는 다윗을 보호해주셔야 할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의 도망 여정이 쉽지 않다는 것은, 다윗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시험들기 딱 좋은 상황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고, 상황적으로 생각해보자면 도엑 같은 사람도 없어야하고, 십사람들 같은 고발자들도 없어야합니다. 그런데 계속 사울편에 서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이로 인해 다윗의 도망의 여정이 점점 더 고달파 지는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나요? 우리가 힘들때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신 것일까요? 왜 도와주지 않으시는 걸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도대체 우리가 힘들때 하나님은 뭘하고 계신 것일까요?

    다윗이 빠져 들수있는 부정적 생각의 굴레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생각의 미로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믿음의 굴레'로 들어갑니다. "그분이 내 원수를 갚아 주실 것입니다. 주의 진리로 그들을 끊어 주십시오." (5절) 다윗은 의심이 아닌 믿음으로 고난을 돌파하는 것입니다.

    고난에 있어서 이유를 찾기 시작하면 좀처럼 탈출하기 어렵습니다. 이유를 알아서 탈출하는게 아니라, 믿으니까 탈출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믿음의 고백으로 선포했습니다. 성경은 여전히 도엑, 십사람등을 하나님께서 왜 허락하셨는지에 대해서 그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심판해야할 모든 자를 심판하셨고, 다윗도 사울왕의 손에서 끝내 보호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인생에 고난에서 이유를 찾기 보다는 하나님을 찾는 지혜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의심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돌파하게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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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리석다'는것은 지식이 부족하거나, 똑똑치 못한 일을 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행동이나 생각이 둔하고 빠르지 못할때 쓰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단어를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자가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행동이 조금 어눌하고, 느릴수 있습니다. 지식이 부족하거나 똑똑치 못할수도 있습니다. 그런 어리석음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최악의 어리석음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면 인생에 치명적 실수들을 하게 되는데 그중에 하나가 오늘 다윗이 기록한것처럼 기준을 상실하고 '동물'처럼 살아가는 사람들만 넘쳐난다는 사실입니다. 그저 각자의 선을 쫓아 악행하며 사는것입니다. 죽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내 길을 맡기지 않는다면 결국 망하는 인생입니다.

    어제 큰 딸아이의 방학을 맞아 한시간 반 떨어진 Waco라는 지역에 왔습니다. 올라오는 길에 운전은 아내에게 맡겼습니다. 점심 먹고 출발했는데, 제가 음식을 먹고 운전하면 10분이 채 안되 졸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과거를 돌이켜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집부렸던 때가 있습니다. "운전대는 내가 잡는다!" 라는 오만을 부린것이죠. 얼마나 위험한 순간들을 많이 넘겼는지 모릅니다. 졸다 졸다 어디인지 가늠이 안될때도 있었을 정도니, 정말 하나님께서 살리신 시간들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조는 느낌만 와도 아내에게 운전대를 맡기게 되었습니다. 그게 더 안전합니다. 조는 제가 운전하는것과 맑은 정신의 아내가 운전하는 것은 비교할수 없는 일입니다. 고민할 필요 없는 일입니다.

    인생에 "하나님은 없다!" 선언한 자들은, 본인이 '조는 운전자'이면서도 고집스럽게 인생의 운전대를 잡는 사람들입니다. 절대 하나님 찾지 않습니다. 그러니 인생을 운전하다가 멸망에 가까운 사고를 당하게 되는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 안계신것 아닙니다. 항상 거기에 계십니다. 부탁하면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운전대 잡고 인도해주십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는 이유는 내가 여전히 있기 때문입니다. 나만 너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인정할수 없는것이지요. 고집이고 교만입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고집입니다. 그리스도께 나의 인생 운전대를 맡겨야 합니다. 그분이 내 삶을 질서 있게 만들어 가실 것이고, 그분이 나를 영원한 구원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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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은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워가시는 교회가 조금식 기지개를 펴면 펼수록 악한영들도 시동을 거는것 같아서 경계하는 마음이 부쩍 커졌습니다. 과거 교회에 성도가 아무도 없을때는 하루, 한주, 성도님 한분 교회 방문하고 등록하는 것으로 온 신경이 다 쓰이고,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모인 성도님들과 함께 건강한 교회를 계속 세워갈수 있도록 온 신경을 다 쓰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악한 영은 하나님의 일이 일어날때 발악하기 시작합니다. 주변에 '힘센 사람'도 세우고, '못된 사람'도 세우고, '속임수를 부리는 사람'도 세우고, '분열하는 자'도 세웁니다. 이러한 '악한세력'은 항상 있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일이 일어나는 곳마다 '파리때'처럼 달려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해, 교회를 향해 사탄은 두고볼수 없다는 듯 나타납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도엑같은 사람이 꼭 나타나는 것입니다. 방해꾼이 꼭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교회의 힘입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이 결국 '하나님의 집에 있는 올리브나무'를 푸르게 만들어 주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악한 세력'을 물리치시고 건강한 교회를 세워 가실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하신 일에 대해 영원히 찬양하겠고, 성도들 앞에서 선하신 주의 이름을 높이겠습니다! (8-9절)

    다윗을 지키신 하나님! 다윗에게 힘이 되어주시고, 찬양의 이유가 되어주신 하나님! 바우 교회도 지켜주시고, 힘이 되어주시고, 찬양의 이유가 되어주세요! 바우를 주님의 손에 맡겨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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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여 나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드렸던 말씀입니다.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가 하나님께 드렸던 말씀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설때 '빛 앞에 선 어둠'처럼 갈바를 알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있을수 없고, 주님을 떠나야할것 같고, 주님이 나를 떠나셔야 할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런 죄의 수치중에 하나님을 오히려 붙듭니다. "주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둬가지 마소서!" 다윗이 죄중에 하나님께 드렸던 고백입니다.

    베드로와 이사야의 마음을 당연히 공감하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결국 베드로와 이사야도 하나님의 곁에서 다른 인생으로 살아낸것처럼, 하나님을 위해 산것처럼, 더욱 거룩하고 온전한 삶을 살아냈던것처럼, 우리도 더욱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죄에 갇힌 자들입니다. 빛과 공존할수 없는 어둠같은 태생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간혹 죄때문에 믿음을 떠나고, 교회를 떠나는 친구들도 보았습니다. "부끄럽고 죄송하고 미안해서 나같은 사람은 하나님 믿으면 안돼!" 라고 말하면서 떠났습니다. 아닙니다. 그 마음이야 인간적으로 이해되지만 떠나면 오히려 죄인의 굴레를 절대 벗어 날수 없습니다. 새롭게 시작할수 없습니다. 은혜를 누릴수도 없습니다. 구원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러므로 떠나는게 답이 아니고, 주님을 붙드는게 답입니다.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인 엄청난 죄를 가지고도 다윗은 주님 옷자락 붙들고 울며 불며 매달렸습니다. 다윗은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살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어야합니다. 그리고 나면 다윗이 다시는 이후에 '밧세바와 우리아'의 일을 반복하지 않은것처럼 그 죄를 멀리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회개, 주님을 떠나지 않음, 그리고 죄의 반복을 멈추는 삶! 오늘 다윗의 눈물섞인 시편을 보며 다시 한번 다짐해 봅니다.

    2

    느닷없이 (본문은 아니지만) 이런 묵상도 하게됩니다. 오늘 시편은 결국 다윗이 밧세바와 우리아에게 진 죄때문에 기록된 회개이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드는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에게 잘 회개하고 용서를 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만 이렇게까지 울며 기도하고 회개하고 넘어간다면 밧세바에게 너무 미안합니다. 용서와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피해자에게 모른척 할수는 없습니다. 피해자가 실제적으로 가장 피해입고, 상처입은 자입니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피해자에게도 사과와 용서를 비는 회개의 완성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에게, 그 일에 대해서 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죄를 안짓는게 답이긴 합니다! 지었으면 하나님께 회개하고, 피해자에게 사죄하는 옳은 회개가 실천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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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 온통 악으로 점철되어 있으면서(17-20) 그 입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말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말하는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며, 허락하시지 않는 일입니다.

    이중적 삶에 대한 경각이 무뎌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회사에서와 집에서의 모습이 다르고, 교회에서와 그 외의 지역에서의 모습이 다릅니다. 입으로는 온통 거룩과 경건을 논하는데 삶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을 인용해보자면 '두주인을 섬기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순적인 삶에 대한 인지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거리낌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두 주인'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행동으로 악을, 입술로 선을 섬기는 삶을 허락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삶이 실제 자행되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두주인을 섬기는 삶이 가능하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입술과 행동이 이분화된 삶을 살거나, 생각과 행동이 이분화된 삶을 살고 있다면 멈춰야하는 이유가 바로 오늘의 기록입니다.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언행의 통일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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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에 대한 또다른 오해도 있습니다. "내가 입다물고 있었더니 나를 너와 같다고 생각했느냐?"(21절)

    악행에 대해서 하나님의 간섭이 없을때, 그리고 이런 상황이 오랜 시간 반복될때 죄인은 어리석은 착각을 합니다. '하나님도 나와 같구나! 예수님도 악을 좋아하시는구나!' 가장 어리석은 착각입니다.

    혹시 '증거수집기간'이라는 것을 들어봤을 것입니다. 악인을 잡아 넣기 위해서는 경찰이 일정의 기간동안 악인이 활개치는 것을 내버려둡니다. 그리고 증거를 수집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때가 이르면 체포영장과 함께 그를 잡아 들여 법정에 세웁니다. 그리고 재판현장에서 그동안 모아놓았던 증거들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그럼 영락없이 죄인은 유죄판결을 받고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되는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죄 가운데 침묵하시는것은 그분이 나와 같이 죄를 좋아하셔서가 절대 아닙니다. 그분이 지금 증거를 수집하시는 중입니다. 그러니 자수해서 광명찾는게 지혜입니다. 멈추고 돌이키는게 살 길입니다. 예수님께 나와 회개하는것이 구원받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오해의 여지가 없는 fact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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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14절)

    하나님께서 부족하시거나, 필요하시기 때문에 드리는건 아닙니다. 세상 모든것이 그분의 것이니 사실 우리가 그분께 드리는 '제물의 양'은 혹은 '제물의 종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율법적으로 보자면 중요할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보자면 진짜 중요한것은 이런것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진짜 기대하시는 것은 '감사의 제사'입니다. 제물을 드려도 그 안에 감사와 진심이 담겨있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제물보다 중요한것은 감사 입니다.

    최근에 바우 교회를 섬기면서 참 감사한 일들이 많습니다. 조금씩 성장해가는 교회, 열심을 내주시는 성도님들, 공사가 되고 있는 새로운 성전 장소등입니다. 감사한 일이 넘치는데 한켠으로는 '감사의 제사'가 너무 부족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감사한 일에 둘러 쌓여 있지만 여전히 걱정하고, 조심스럽고, 불안한 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러다보니 '감사의 제목'이 넘치는데도 감사의 제사를 충분히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이런 저의 모습을 회개합니다. 감사의 부족을 회개합니다. 다시 감사의 고백, 감사의 표현, 감사의 헌신을 부족함 없이 하나님께 드리는 자가 되기로 결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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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극히 높으신 분께 네 서원을 이뤄라." (14절)

    하나님께 드린 약속이 참 많습니다. 어릴적은 목사가 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부르심을 받았을때는 교회를 개척하는 약속을 드렸습니다. 지금으로써는 하나님께서 세워가시는 이 교회에 올인하는 약속을 드립니다.

    저는 약속을 지키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왠만하면 약속은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간혹은 능력 부족으로 지키지 못하는 약속들도 있습니다. 예컨데 목사가 되는것도, 교회를 개척하는것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지키지 못하는 약속이 될뻔했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께 서원을 이루며 살아가길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되어주시고 도와주셔서 주님께 드린 서원들을 성실하게 지킬수 있는 인생되길 소망합니다. 목회자로써의 서원도, 개척교회의 도구로써의 서원도 게으름 없이 잘 감당하고 싶습니다. 아내에게, 자녀에게, 성도님들에게, 이웃에게, 친구에게도 약속한 말들을 이루는 성실한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부족한 능력때문에 약속을 지키지 못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힘과 지혜가 되주시길 기도합니다! 약속을 이루는 자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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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사는 동안에는 스스로 복이 있다 여기고 그가 잘돼서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지라도" (18절)

    많은 사람들이 복권의 무용론, 부의 무용론을 얘기합니다. "돈이 많아 봐야 결국 다 의미없어! 복권 담청되봐야 결국 다 망하고 의미없더라!" 그러나 이런 무용론을 들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답하곤 합니다. "알아! 그래도 이왕 한번 사는거 한번쯤은 부자로 살아보고 싶다! 한번쯤은 그렇게 많은 돈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잠시 누리는, 그 부, 사람들의 칭찬, 명예, 권세등이 죽음앞에 허무해진다는 것은, 텍스트로는 충분히 들어 아는 바 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이것들을 누리고자 하는 열망에서 쉽게 자유로워지지 못합니다. '이땅의 삶'도 생각보다는 꽤 긴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의미있고, 느껴지고, 체험되는 선명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땅에서의 삶은 분명히 우리에게 충분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논하는 '영원'에 비하면 찰나의 시간이 맞겠지만, 그렇다고 의미없는 시간도 아니고, 느끼지 못하는 시간도 아닙니다. 십분 앞에 일분이 의미없는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필연적 죽음으로 인해 삶의 가치와 의미를 폄하하는 자세로는 돈이나, 권세의 유혹을 이길수 없습니다. "어차피 죽을것이니까 다 의미없어!" 라는 말로 모든 유혹을 이겨낼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죽음'으로 삶의 가치를 무시하기에는, 삶은 너무나 생생한 '찰나'입니다.

    이땅에서의 삶은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게 맞습니다. 의미가 있는데 오히려 시간은 제한적입니다. 그러므로 너무나 '소중한 찰나'입니다. 아이에게 주어진 한시간의 키즈카페는 순간 순간이 소중합니다. 그러니 낭비할수 없습니다. 낭비할 시간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좋아하는(갈망하는) '아이패드의 유혹'도 키즈카페에 있을때는 유혹이 못됩니다. 키즈카페까지 가서, 거기서 앉아서 아이패드 하는 아이가 도대체 어디 있는가 말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시간은, 기회는 소중합니다. 그러니 돈이나, 명예같은 유혹 따위를 쫓다가 낭비하기 보다는 가장 가치있게 써야할것입니다. 유혹을 이기는 힘은, 그러므로, 생의 가치를, 생의 소중함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이라는 은혜를 인정하는데서 온다고 믿습니다. "어차피 죽으니까 막살아!" 가 아니라 "결국 죽을 것이니 허락된 오늘도 소중하게 살자!" 하루 하루를, 감동과 감사, 수고와, 성실, 기쁨과 소망으로 살면 좋겠습니다. 오늘, 이땅에서의 삶이 너무 소중합니다!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사는동안 주안에서 최대를 누리며 살고 싶습니다! 때마침 주일입니다! 오늘 하루 주를 위해 불태우듯 사는 하루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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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이는 죽습니다. 낮은 사람이나, 높은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자나 다 죽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길게 살고 싶다고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다 죽습니다. 최근에도 미국에 한 기업인이 젊어지기 위해서 일년에 수십억을 쓰고있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수십억을 써서 그분이 젋어진 나이가 그래봐야 10년이 안됩니다. 그런데 그분이 잊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10년 육체의 나이가 젊어져도 당장 오늘 사고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이는 죽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단 한푼도 가져갈수 없습니다. 내가 죽은 후에 이름을 남겨도 이땅에서 내가 누리는것은 아닙니다. 저도 요즘 열심히 운동합니다. 오래살려고, 젊게 살려고 운동하는거 아닙니다. 사는동안, 허락된 이땅의 시간을 최대한 건강하게 살아볼까 하는 마음에 운동하는것입니다. 일종에 삶에 대한 책임감이지, 오래 살고 싶거나, 죽고 싶지 않다는 허무맹랑한 꿈때문이 아닙니다.

    죽음앞에 만인은 평등합니다. 다른게 있다면 관에 쓰이는 나무와, 묘의 크기 정도 아닐까요?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요? 죽음앞에 다름을 만들어 낼수 있다면 방법은 단 하나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지 죽지 않는"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방법이 유일합니다. 그러니 돈버는것, 높은 사람이 되는것보다 중요한것은 죽음을 영원으로 바꾸는 방법을 찾는것입니다.

    여전히 돈을 사랑하고 집착하는자, 여전히 권세에 집착하는자, 만인에게 동일한 죽음을 생각하며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삶을 여전히 돈과 권세를 쫓아 사느라 고단하신 분들이 제발 이런 슬픈 삶을 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썩어질것이 아닌 영원할것을 추구하며 살아야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추구하고 살아야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합니다.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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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격적입니다. 사람은 자칫 "짐승과 다를것없는"자로 끝날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죽음'이라는 개념으로 정의내려보자면 짐승도 죽고, 사람도 죽는것은 매한가지 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는 동안의 과정도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어떤 가치를 쫓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시편기자의 기록을 생각해보자면, 가치있는 인생은 돈과 권세만을 쫓은 인생이 아닌것은 확실합니다.

    오늘 하루가 가치있는 하루가 되길 힘써야겠습니다. 무언가 거대하고 위대한 일을 해야만 하는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갑자기 그렇게, 매일 그렇게 거대하고 위대한 일을 할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저 별것 아닌것 같지만 실제적인 사랑의 실천과, 나눔의 실천, 용서의 실천과, 복음을 나누는 전도의 실천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정에 성실하고, 회사에 성실하고, 신앙에도 성실하면 좋겠습니다. 나로 인해 누가 웃고, 행복해 하고, 위로받고, 도움 받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 기쁨이되는 생각과 삶의 모습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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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독립을 합니다. 어릴적이야 부모의 도움과 인도함 없이는 방향을 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냥 잡은 부모의 손을 따라, 인도하시는 데로 따라가면 됩니다. 안전하고, 최선입니다. 그러나 점점 커가면서 인지하고, 결정하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순간 부모의 인도함이 없이도 갈 길의 방향을 정하고, 인생의 방향도 정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아이는 때가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홀로 걷는 '다 큰 아이'는 인도자 없이, 인도자가 되어 살기 시작하면서 비로서 혼자 방향을 정하며 산다는것이 얼마나 고달픈 일이며, 얼마나 두려운 일이며, 얼마나 책임질 일이 많은 일인지 새삼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간혹 더 나이가 먹고, 들어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그분의 무덤가에 가서 "아버지 저 어떻게 해야되나요! 아버지는 이럴때 어떻게 하셨나요?" 한숨석인 질문을 쏟아내기도 합니다. 오죽하면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았던 가요중에 이런 가사도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하죠 아저씨, 우는 손님이 처음인가요?!" 택시기사에게 길을 묻는 이 가사가 왜 많은 이들의 감성에 맞닿았을까요? 방향을 정하는것, 갈길을 아는것, 확신과 담대로 길을 개척해 가는것, 인생길을 돌파하는 정도를 찾는것은 어린이나, 성인이나,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사랑의 길이든, 사명의 길이든, 직장의 길이든 무엇하나 맞는길을 찾는게 쉽지 않습니다. 사족이지만 모르는 목적지를 가기 위헤 네비에 주소찍고 가다가 인터넷이 끊기고, GPS마저 잘 작동하지 않는 곳에 들어설때가 생기면 작동하지 않는 네비 때문에 갈 방향을 알지 못해 식음땀을 흘리는 경우들도 간혹 생깁니다. 목적지 도착 전에 중간에 길을 잃어버리면 여간 곤역스러운게 아닙니다.

    "이 하나님이 영원토록 우리 하나님이 되시니 죽을 때까지 그분은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14절)

    위대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승리하시는 하나님은 죽을때까지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방황할때 우리로 길을 알게 하시고, 우리 손 붙잡고 가야할 길로 인도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성인이 됐다고 독립하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네비처럼 중간에 작동하지 않으시는 분도 아닙니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떠나시는 분도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그분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방향이고, 하나님이 나의 목적지 입니다. 그분으로부터 독립하지 않는 인생, 죽을때까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인생으로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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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자랑거리 이스라엘!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백성을 위해서 유산을 선택하셨습니다.(4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자랑거리로 인정해주시는것도 감사한 일이요,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 유산을 허락하시는것도 더욱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허락하신 두딸이 저에게는 자랑거리일 때가 많습니다. 어디 길을 돌아다니거나, 마켓같은곳을 가면 사람들이 너무 귀엽다고 말해줍니다. 둘째딸이 아직 어려 천지 분간을 못하고 바닥에서 뒹굴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정말 민폐의 아이콘입니다. 막으려고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주변에 맘씨 좋은 Texan들이 귀여워해주고, 예뻐해줍니다. 그래서 우리 두딸은 그렇게 저의 자랑거리가 되곤 합니다.

    딸들이 잘해서 자랑거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무언가 위대한것을 성취해서 "I am proud of you!"라고 말하는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럴때도 있겠지만) 보통은 그냥 제 딸들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자랑스럽고, 자랑거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자랑거리라 말씀하시는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됩니다. 만약에 성취나, 태도 때문에 자랑거리라고 해야한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자랑거리가 될수 없을것입니다. 그들의 '민폐짓'은 성경을 통해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모습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행동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자랑거리가 된것이 아닌것은 확실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자랑거리'라 불러주시는 하나님께 그러므로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해야합니다. 이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대속으로 우리를 '의인'이라 칭해주시는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자랑하지 않는 신앙인, 교만하지 않는 신앙인, 인정받는다고 우쭐되지 않는 신앙인이 되야합니다. 생각해보면 애초에 이스라엘 백성이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선택받을때 아브라함이 잘해서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은혜 가운데 선택받은 것입니다. '선민'은 인과가 아니라 은혜의 결과 입니다!

    우리를 자랑하시고, 우리에게 유산을 허락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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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이 없어지고, 산들이 바다 속에 빠지는것은 지진과도 같고, 바다 물결이 으르렁 거리며 철썩 거리는것은 해일이 육지를 덮는것과도 같습니다. 산들이 끓어 올라 흔들리는것은 화산이 분출한것 같은 상황같습니다. 이 모두 인간이 어찌할수 없는 상황들을 말합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인류가 '유능함'을 증명한들 재해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아이는 무서운 상황을 마주하면 아빠나 엄마를 찾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아빠도 두려움에 휩싸이는 상황들을 마주합니다. 당연한것이죠. 아빠 엄마라고 모든 상황을 다 타계할수 있는것은 아닙니다. 아이는 그 상황을 잘 모릅니다. 그러니 무서운 상황에 아빠 엄마에게 매달리면 다 해결해줄것 같습니다. 아빠 엄마는 어떻게든 두려움을 극복하고 상황을 돌파하려고 하지만 사실 부모도 마음과는 다르게 해결해주지 못할때도 많습니다.

    우리가 문제와 고통앞에 나를 의지하고, 세상을 의지하고, 지식을 의지하고, 능력을 의지하고, 서로만을 의지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착각입니다. 인간의 능력은 유한해서 '재해급 재난'을 마주하면 정말이지 할수있는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재해급재난'이 아니여도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해결하는 문제보다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인생을 살며 두려움 없이 살고 싶다면 무조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힘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하게 불가능이 없는, 참으로 도우시는 '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은 '힘'으로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피난처'의 도우심입니다. 마음에 주시는 평안과 위로의 도우심 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삶의 위험과 고통 앞에서 문제가 해결되도 위로가 없고 평강이 없어서 회복되지 못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이를 PTSD라고 명명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도우시는 '피난처'입니다. 평강이며 위로가 되십니다. 그분 안에서 평안을 누릴때 우리 안에 있는 상처와 아픔과 잔여 두려움들이 사라지게 될것입니다.

    주안에서 안전합니다. 주안에서 승리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면 두려울 것이 없지만, 주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두려워하지 않을것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십니다. 우리의 도움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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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 그 성안에 계셔서 성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니"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는데 폭풍이 와서 배가 흔들립니다. 죽을것 같습니다. 그들을 살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주무시고 계신는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때 예수님은 일어나시며 "너희의 믿음이 어디있냐?" 말씀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 안에 계셨습니다. 그러니 배가 흔들려도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그 성안에 계셔 성이 흔들리지 않는것"과 같습니다. 흔들려도 뒤집어 지지 않을것입니다. 가라앉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믿지 못하니까 제자들은 두려워 떨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면 나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흔들려도 넘어질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사는데도 계속 두렵고, 떨리고, 의심되고, 불안하고, 기쁘지 않고, 긴장되는것은 내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주님이 안에 계시면 '성'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예수가 내 안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 예수를 믿는 자는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른 아침부터라도 주께서 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 아름다운 왕과 아름다운 신부의 결혼식 시편이네요. 행복해 보입니다. 1절에는 왕의 아름다움이, 11절에는 대구하듯 신부의 아름다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신부는 이 결혼을 통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이끄는 대로 왕궁으로 들어 갈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신부'입니다. 그러니 이제 "네 백성들과 네 아버지의 집은"이제 잊어버려야 합니다. 이제 왕이 이끄시는데로 '그분의 왕궁'으로 들어가야합니다. 이 일로 인하여 모든 세대가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하게 될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구원의 역사'를 인하여 모든 세대가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부이면서 여전히 과거의 '내 집'에 거하고, 여전히 나의 영광에 집착하고, 하나님의 이끄심을 거부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는 신부의 도리가 아닙니다. 은혜를 거부하는 어리석은 행동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신부의 도리를 지키지 못한다면 이는 '아름다운 신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름다우심과 영광으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이는 일명 '신데렐라 스토리'보다도 더 극적이며, 아름다운 구원과 결혼 얘기 입니다! 예수님은 보혈로 우리를 위해 대속하시고 '의인'이라는 칭호와 함께 우리를 아름답게 준비시켜 주시고, 결혼까지 해주시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랑되신 하나님께 집중하는 신부가 되야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하나님의 뜻을 쫓아 행하고, 주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신부가 되야 할것 입니다.

    신랑되신 하나님께서 신부된 우리의 '아름다움에 흐뭇해'하실 수 있도록, 더욱 예배하고, 사모하고, 진심되고, 성실하며, 거룩한 신부가 되길 힘써야겠습니다.

    그나저나 갑자기 쌩뚱맞기는 하지만 결혼이 힘들어지고 있는 세대에 한마디 외치고 싶습니다! 결혼 안하신 분들에게 먼저 고합니다! 주님께서 예비하신 아름다운 신랑과 신부를 만나 주님 안에서 건강하게 사랑하시고, 결혼하셔서 아름다운 가정을 꾸리게 되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미 혼인 하신 분들에게도 외칩니다! 이미 혼인하신 분들! 서로에게 아름다운 신랑과 신부가 되신분들 끝까지 사랑하십시다. 그리고 무엇보다 평생을 하나님의 신부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성실하고, 열심으로 충성하며 삽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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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함없는 사랑에 호소하다!

    어릴적 아이는 부모님의 행동 때문에 자신을 향한 부모님의 사랑을 의심하곤 합니다. 너무 어리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지만 부모는 사실 사랑하기 때문에 아이의 절제 없는 행동을 막아서는 것입니다. 같은 의미 안에서 때로는 부모는 아이들을 고단한 곳(?)으로 내 몹니다. 공부, 운동, 기술, 인간관계등, 배움의 현장으로 자녀들을 몰아 붙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들은 또 화가나고 의심(?)이 됩니다. "부모님이 날 사랑하는거 맞나?"

    그러나 성장한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조금 고단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고 해서 부모가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버리신것도 아니고, 골탕먹이신것도 아닙니다.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압니다. 사랑의 관계가 보여주는 의미를 이제는 더욱 명확하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시편기자는 인생의 처절함을 마주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호소합니다.(26절) 인생이 고단하다고 해서 '하나님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지 않는것입니다. 시편가지는 어린 신앙이 아닌, 성숙한 신앙이며 분별하는 신앙인입니다. 인생의 고단함의 유무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정의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어떤 상황이든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 사랑에 호소하는자가 건강한 신앙인 입니다. 성숙한 신앙인 입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어린 신앙 아닌 성숙한 신앙인이 되겠습니다. 인생 속에 계속 이런 저런 고난들이 찾아오지만 "주를 잊지 않고, 언약을 소홀히 하지 않으며, 마음이 돌아서지 않으며 주의 길을 벗어나지 않겠습니다." (17-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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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가족오락관' 이런 프로그램을 생각해보면 그 안에 일종의 '전달게임'이 있었습니다. 몸으로 전달하든, 귀를 막고 단어를 전달하든, 무엇이든 뒤돌아 있던 상대를 돌려세워 메세지를 전달하는 게임들이었습니다. 특히나 '몸으로 말해요'이런 게임은 재미있었습니다. 전달자가 최선을 다해서 정확하게 전달해도, 점점 메세지가 전달되면서 다른 내용이 첨부되거나, 원래의 내용이 변질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최종 답을 말하는 사람은 전혀 엉뚱한 답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 답을 전한 사람은 정확하게했지만 중간에서 계속 조금씩 변화시켰고, 그 결과는 오답으로 도출된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정답자가 내용을 잘 전달했고 시편기자는 정답을 있는 그대로 아주 잘 전달받았다는 것을 알수있습니다. 그러니 도출되는 답도 오답이 아닌 정답입니다. 하나님께만 영광 돌려드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통해 경험한 간증은,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성품은 정확하게 전달되야합니다. 최근 2주간 뉴욕과 얼바인을 오가며 하나님께서 바우교회에 행하고 계신 일을 전달했는데 조금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내가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는가?' 하는 부담이 생긴것입니다. 정말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만 드러나셨으면 좋겠는데 자꾸 제가 칭찬받는것 같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최대한 자세히 잘 전달되지 않은것 같아서 좀 맘이 불편했습니다. 제가 잘 전달해야 듣는 분들도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경험하고, 잘 전달하게 될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앞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역사를 전달할때, 역사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을 전달할때 정확하게, 상세하게, 틀림없이, 거짓없이, 허풍없이 잘 전달해야겠습니다. 이 간증을 듣는 분들도 자신의 삶에 동일하거나, 더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풍성히 경험하게 되길 응원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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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에서 활과 칼은 대체불가한 무기입니다. 내 생명을 보존하거나, 승리를 가져다 줄수 있는 확률이 그나마도 좀 올라가게 하는것이 있다면 좋은 활과 칼입니다. 이것들이 없다면 사실 승리를 논할수조차 없습니다. 생명 보존 자체가 힘들어 집니다. 그러니 전쟁에서 '활'과 '칼'을 포기한다?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절대 쉽게 포기가 안되는 최후의 보루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무엇일까요? 이러한 '최후의 보루'조차도 결국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꼭 필요한것은 맞을지언정 어디까지나 도구입니다. 돈도 도구고, 지위도 도구이고, 건강도 도구입니다. 권세도 도구이고, 지혜도 도구입니다. 인맥도 도구입니다. 학력, 이력도 도구입니다. 배경도 도구입니다. 절대 포기하기 어려운것들로 여겨지지만 여전히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도구가 아니고 그 자체로 승리입니다. 보장입니다. 확신입니다. 그러니 도구를 들었을지언정 믿음은 주님께 둬야합니다. 도구는 도구되게, 주님은 주님되게 해야합니다. 도구는 사용하고 주님은 믿는것입니다. 도구를 주님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은 신앙생활을 끊어내야 합니다. "활과 칼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내게 승리를 안겨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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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말씀을 읽고 또 읽어도 사실 마음에 큰 울림을 느끼지 못합니다. 무언가 저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닌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저도 물론 인생에 고난이 많습니다. 어려운 상황도 많습니다. 실망하고 낙심할 만한 상황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은 여전히 제 마음에 선명하게 공감되지 않습니다. 왜냐면 저는 이 시편의 기자처럼 '악인'에 둘러쌓인것 같은 인생도 아니고, 하나님께 외면 받은것 같은 인생도 아니고, 적들에게 억눌린채 슬퍼하며 돌아다니는 인생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와는 달리 단언컨데 분명히 이 말씀이 폐부까지 찔러 들어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내 이야기야!'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실제 이런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적으로 둘러 쌓여있는, 억눌리고, 슬픔만이 가득한 인생들이 많습니다. 저는 아직 이런 상황을 경험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쯤되면 (이런 묵상 자체가 이기적이지만) 다시 한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감사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힘들지만 여전히 최악이 아니기에 감사합니다. 더 힘들수 있지만 내 주변에 여전히 나를 위해주는 사람을 남겨놓으신 하나님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쓰러졌지만 완전히 자빠지지 않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감사합니다. 혼자 같지만 그래도 주님을 알고, 믿고 있으니 그 사실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한가지 적용을 덧붙여 보자면, 지금 이 말씀을 읽으며 마음에 깊이 공감하며 아파할 분들을 위해서는 기도합니다. 그들의 이름도 모르고, 상황도 모르지만 그래도 아픈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적들에 둘러쌓인 이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억눌리고 슬퍼하고 있는 자를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없이 사는 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와 구원이 임하게 될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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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면'은 사실 소화하기 힘든 문제입니다. 최근에 원래 살던 뉴저지 지역도 가보고, 어제는 얼바인에서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외부에 올때마다 느끼는 어려움이 바로 외면입니다. 철저한 외로움이죠! 때로는 예정된 설교를 충분히 잘하지 못해서 외면 당하기도 하고, 아는 사람이 없어서 외면당하기도 하고, 너무 오랜만이라 아는 사람들조차 외면 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서럽습니다. 서운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우리 가족이 있고, 우리 성도가 있고, 내 사랑하는 이웃과 친구들이 있는곳이 좋습니다! 때로는 인정받기 어려울지언정 외면받지는 않으니까요!

    이런 의미에서 영적 외면은 더욱 나를 힘들게 합니다. 원래 온 세상 날 버려도 주께서 날 안버리시기 때문에 견디는 경우들이 있는데 그마저도 하나님마저 나를 외면하면 정말 살 소망이 끊어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외쳤던 절규도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입니다. "내가 육신이 아픕니다. 내가 수치스럽습니다!"가 아니었습니다. 철처히 외면당하고 버림 받은것 같은 그 상황이 예수님으로 절규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 그렇게 외치셨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의 절규와, 죽음과, 부활의 모든 시간을 내내 함께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 어려움, 외로움 가운데도 계시고, 우리의 즐거움과 기쁨중에도 함께 하십니다. 결국 어제 묵상했던 내용과 똑같습니다. "여호와 삼마!" 입니다. 거기에 계신 하나님 입니다.

    어제 얼바인 수련회 저녁집회가 오스틴 시간으로 12시가 넘어 시작되었습니다. 제 잘못이지만 컨디션을 관리 못해서 였는지 정신을 차릴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고, 몸도 휘청거렸습니다. 꼭 설교전에 혹은 설교중에 쓰러질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아무도 아는 사람없는 이 수련회 장에서, 이 산속에서, 너무 아픈데, 해야할 일은 있고 '너무 힘들다!' 하는 순간에 하나님은 내 안에서 힘이 되어주셨습니다. 떨리는 몸이라도 붙잡아 주시고, 몽롱한 머리도 조금씩 선명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 입니다. 혼자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외면'의 감정이 나를 압도할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하겠습니다. (체력을 좀더 키울 필요는 있겠습니다 ㅋㅋ)

    또 하나만 적용하며 덧붙이자면 주변에 '외면'받는것 같은 사람을 볼때, 혼자 있는것 같은 사람을 볼때, 외로워서 절규와 우울가운데 있는 사람이 보인다면 그가 외면 받은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이 되야겠습니다. 그가 외면을 잊도록 그의 얼굴을 직면해주는 이웃이 되야겠습니다! 받은 사랑은 그렇게라도 돌려줘야겠습니다!

    외면없는 세상! 홀로됨이 없는 세상, 적어도 외로움으로 쓰러지고 죽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외면을 없애려고 창조때부터 이브를 주셨고, 이 세상에 우리를 보내신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함께 외면을 이기는 공동체도 만들어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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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이 말라 헐떡거리며 시냇물을 찾듯이 내 영혼이 목이 말라 주를 찾습니다!" 시편 기자가 인생의 고단함 중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이 기록 속에서 몇가지 오류(?)를 생각해봅니다. 일단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계신 주님을 찾지 않거나, 보지 못하거나, 무관심합니다. 그러다가 '고난'중에만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이 안계신것처럼 말합니다. 그렇지 않다라는 사실입니다.

    또 한가지는 평소에 '물' 좀 챙겨 먹으라는 것입니다. 갈증날때까지 참지 않고 물을 주기적으로 마셔주는것도 좋습니다. 어차피 갈증은 나게 되어있겠지만 꾸준히 물을 먹어주는게 가장 건강한 방법입니다. 꽤 오래 전부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한잔의 물을 마시고 있습니다. 목이 마르지 않지만 마시고 있는데 덕분에 뭔가 조금더 건강해진 느낌입니다. 평소에 주님을 항상 마시는(?) 신앙인이 되야겠습니다.

    물론 시편기자는 꾸준히 '물'도 마시고, 언제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에 이와 같이 '고난'이 찾아오고 '갈증'을 느낄수 밖에 없는 순간을 마주합니다. 이런 순간에도 주님을 찾는 신앙의 태도가 많은 이들에게 본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원래 평소에 주님과 친밀하게 보내는 사람들은 간혹 '고난'이 찾아오면 더욱 실망하거나 삐지는경우들이 있습니다. 왜냐면 평소에 주님과 친밀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데면데면했으면 고난이 찾아와도 '그럴줄 알았다!' 뭐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평소에 하나님과 친밀하던 사람은 고난이 찾아오면 '내가 하나님과 이렇게 친밀한데 왜 하나님 이런 일을 허락하셨지?'라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찾지 않고 실망과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죠. 평소에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은 고난중에 더욱 주님을 찾아야합니다. 실망할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배신한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불신하거나 배신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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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자주 얘기합니다. "너의 하나님이 어디있느냐?" 일종의 조롱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령님 언제나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떠나시지도 않으시고, 버리시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세상의 조롱에 흔들리면 안됩니다. 그들이 함께 하시는 예수를 못본다고 우리까지 못보면 안됩니다. 바리세인들은 예수를 못알아 볼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알아봐야하는거 아닌가요? 모르면 못볼수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모르니까 안보이는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압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압니다. 사랑의 하나님, 도우시는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못봐도 우리는 우리 곁에 언제나 계시는 하나님을 놓치지 않아야합니다. (때로는 숨은그림찾기같이 잘 안보이긴 하지만 ㅋ)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나를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이제 얼바인 출발입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시며, 이 예배와 설교의 일정에도 함께 해주실줄로 믿습니다. 힘과 지혜가 되어주시며, 나의 입술의 선포가 되어주실줄 믿습니다! 금토 집회를 함께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성실하게 마치고 오스틴 돌아올수있도록 기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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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동부를 갔다가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청년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너무 멋진 경찰이 되어있었습니다. 경찰복을 입고, 모든 장비가 세팅 된 상태에서 잠시 제가 앉아 있던 카페에 저를 만나기 위해 들렸습니다. 그런데 순간 분위기가 묘했습니다. 경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주변 공기가 냉랭해지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태연한척 하려고 하지만 약간의 긴장을 하는 것이 보이는듯 했습니다. '경찰이 왜 왔지?'

    사실 생각해보면 저도 미국 경찰을 볼때마다 무서워했던것 같습니다. 교통법규를 어겨서든, 길가에서 만나든 미국경찰은 약간 무서운 느낌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습니다. 다들 긴장하는데 저만 혼자 버선발(?)로 뛰어나가듯 경찰을 환영했습니다. 그렇게 카페 통로에서 서서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너무 반갑고, 너무 오랜만이고, 또 그 청년이 너무 대견해서였던지 앉는것도 잊고 계속 카페 통로에서 그렇게 한참을 대화를 나눴습니다. 사실 많은 이들에게 민폐가 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잠시후 우리 뒤에 어떤 분이 서시더니 계속 안절부절 못하고 서성이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일이지?', 한 1분정도 지난거 같은데도 계속 그렇게 서성이고 계셨습니다. 너무 이상해서 "무슨 일이신가요?" 했더니 "저..저..좀 비켜주세요!" 경찰이 서있다보니 비켜달라는 말도 못하고, 그냥 지나가지도 못하고 뒤에서 계속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었던것입니다.

    이처럼 경찰이 내 편이면 든든한데, 적이면 세상 무섭습니다. 오늘 본문의 16절의 기록이 새삼 맘에 와닿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에게는 피난처이시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요새가 되실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적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존재가 되십니다. 완벽한 심판자가 되십니다. 그 누구도 대적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 편이 되면 가장 안전한 분이 되십니다. 가장 완벽한 보호가 되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편에 서는 자가 되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믿음의 자녀편이심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시27:1, 우리말성경] 여호와는 내 빛이시요, 내 구원이시니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여호와는 내 삶의 힘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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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있음을 너희가 알게 될것이다. 그러면 예루살렘은 거룩해질 것이고 이방사람들이 더 이상 그곳을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 (17절)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면 세상이 알아보게 될것입니다. 나는 더욱 거룩해질것이고 이방인(?)들은 더이상 내 마음을 지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17절을 보면서 마음에 대입하여 묵상한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은 원래 하나님의 성읍이며, 거룩해야하는 성읍이며, 이방인으로 상징되는 우상의 손길들이 닿으면 안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를 보다보면 간혹 그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있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도 예루살렘처럼, 원래 하나님의 성읍이며, 거룩해야하는 성읍이고, 우상을 거절하는 성읍이 되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주님께서 머물러야지 다른 악한 영들이, 생각이, 욕망이 거주해서는 안됩니다.

    내 마음에 방에 아무나 들이면 안됩니다. 내 마음의 성전에 아무나 들여보내서는 안됩니다. 내 마음속에서, 내 '거룩한 산' 초입에서 철저하게 ID체크를 해야합니다. 그리고 아니면 거절하고 내 쫓아야합니다. 필요하면 싸워야합니다. '나'라는 성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하는 처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기에 더욱 거룩해지고, 더욱 정결하여지는 인생될것임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시고 만들어 주실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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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악은 심판 받습니다. 오늘 괜찮다고 괜찮은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악을 심판하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행복한 악행'이 오늘 멈춰야합니다. 거칠것 없는 악행은 이제 멈춰야합니다.

    죄인들의 어리석은음 바로 '착각' 입니다. 안잡히면 앞으로도 안잡힌다고 생각합니다. 괜찮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더 크게 죄를 져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착각은 결국 그들로 하여금 죄를 떠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반복적으로 명시하는 사실은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당장에 멈춰야합니다. 안그러면 심판입니다. 회개의 기회가 있는 지금 돌이켜야합니다. 지금 멈춰야합니다. 두로, 시돈, 블레셋처럼 멈추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께 된통 심판 받게 되어있습니다.

    지금이 멈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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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모아 전쟁하십니다.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싸워주시고, 승리도 주십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은 전쟁터로 당신의 백성을 모으셨습니다.

    언제나 주님께 맡겨놓고 나는 모른척 하는 무책임한 신앙인으로 살면 안되겠습니다. 책임전가 하는 신앙인이 되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해주시고,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해주시는것이지만 그래도 그 속에서 내가 해야하는 내 책임과 역할을 성실히 감당하는 신앙인이 되야겠습니다.

    두려워도 악과 싸우러 나갈줄 아는 신앙인이 되야겠습니다. 쉬운일들은 잘하면서 어렵고, 힘들고, 두렵고 하는 일에는 동참하지 않으려고 하는 신앙인도 사실 많습니다. 예컨데 '전쟁'같은 부르심에는 참여하고 싶어하지 않는것이죠.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부르시면 순종하여 동참하는 신앙인이 되야겠습니다.

    내가 한다고 착각하지 않아야겠습니다. 민족이 다 모여 전쟁하고 승리할때 자칫 착각할수 있습니다. 나때문에, 혹은 우리 때문에 승리했다고 착각 할수 있습니다. 전쟁터에 나갈때만해도, 모집될때만 해도 두려워떨던 사람들도, 막상 승리하고 나면 그 영광을 자신들이 취하려고 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교만의 유혹을 경계하고, 착각의 유혹도 경계하고, 영광을 취하려하는 유혹도 경계해야겠습니다.

    주와 함께 출정해 매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신앙인으로 살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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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일을 하셨다"(20,21절)

    여호와께서 큰일을 하신게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닙니다. 메뚜기 때에 당하는 이스라엘 향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회복의 메세지는 그 스케일이 다릅니다. (22-26절)

    간혹 어느 집에 식사를 하러 가면 두명가는데 10인분을 해놓으시기도 합니다. 일명 '손큰이웃'입니다. 사랑이 넘치고, 능력도 넘칩니다. 저도 누군가 초대할때 많은 음식을 하고 싶지만 요리 능력이 안되서 못할때가 많거든요. 그래서 이런 '손큰 이웃' 혹은 성도님댁에 가면 그냥 감동 또 감동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큰일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고, 능력도 무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도우실때 스케일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실때 스케일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실때, 보호하실때, 싸워주실때, 응답하실때 스케일이 다릅니다.

    바우교회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큰 일'의 증거입니다. 제가 했다면, 우리가 했다면 꿈도 못꿨을 일입니다. 절대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행하시니까 진행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즐거워하고 기뻐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바우를 위해 큰일을 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땅아, 두려워하지 말라. 즐거워하고 기뻐하라. 여호와께서 큰일을 하셨다.' (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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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맥을 벗어난 뜬금없는 묵상이지만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다릅니다. 이 예언을 듣는 이들은 이 예언이 언제의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 이 예언을 통해 이스라엘이 그들의 미래에 마주할 여러 시대를 관통하셨습니다. 실제 이 말씀은 아주 나중에 사도행전에 인용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그 시대를 지나 진짜 예수님의 재림과 마지막 시대를 품기도 합니다. 요엘 시대의 그들은 하나님의 이 예언이 언제 어떻게 적용될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이 예언을 하시고, 하나님의 때에 지체없이, 변함없이 이 일들을 이루셨고, 이뤄가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시간의 영역 밖에서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말씀 하시고,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해하기 어렵고, 때로는 실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잊고 무심하게 넘어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하나님의 때에 이뤄질것입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팩트 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완벽하신 뜻이, 하나님의 우리 개인을 향한, 교회를 향한 약속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때에 온전히 이뤄질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때를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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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은 "금식하고 슬퍼하며 통곡하면서 여호와께 마음을 다해 돌아오라!"라고 호소합니다!

    구약의 역사는 하나님을 믿었다가, 이내 떠나고, 매 맞고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합니다. 구약의 이러한 신앙의 형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라진것이 아니라 '구악'(오래된 악습)이 되어 신앙인을 계속 흔들었습니다. 결국 구약의 이야기도 보면 구악이 가득하고, 안타깝지만 신약시대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시대가 변해도 구악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오늘날의 신앙인을 보아도 여전히 우리는 구약이 보여준 구악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시대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적용시켜도 별반다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혹 그러지 않는 신앙인도 있지만) 많은 신앙인이 구악을 그대로 따라 인생을 살아냅니다. 믿다가, 떠나고, 매맞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죠.

    선지자 요엘을 통한 하나님의 강력한 호소는 이것입니다. "제발 구악을 버리라! 제발 믿다가 떠나는 일을 그만두라!" 하나님은 재앙을 주시고, 때리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은혜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시며 화를 내는 데는 더디시고 사랑이 풍부하시며 마음을 돌이켜 재앙을 거두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13절) 이런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을 무섭게 만드는 것은 바로 구악을 쫓아사는 우리 자신이며, 구악을 쫓아 사는 이 시대입니다.

    마음으로 돌이켜야합니다. 돌아오면 떠나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거짓된 신앙, 방종하는 신앙, 오가는 신앙, 껍데기 신앙, 구악으로 점철된 이러한 신앙은 철저하게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와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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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말 인투에서 함께 말씀을 나누며 이런 메세지를 전한적이 있습니다. "회복을 위해 회개해야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개인의 회개로 그칠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회개로 이어져야합니다. 나의 거룩뿐아니 서로의 거룩을 책임져야 합니다. 이웃이, 공동체가 죄를 지을때 나 몰라라 할것이 아니라 그들을 막고, 바르게 가르치고, 정죄가 아닌 분별하고, 같이 회개해야합니다. 공동체가 거룩을 지키지 않으면 개인이 거룩하다 한들 같이 가라앉기 때문입니다!"

    오늘 요엘을 통한 회개의 촉구도 마찬가지 입니다. 백성을 모아야 합니다 (16절) 혼자의 회개가 아닌, 단지 몇몇 리더의 회개가 아닙니다. 나라의 모든 이들이 함께 회개해야합니다. 남녀노소가 함께 회개해야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건강한 거룩의 기준이 되어주어야하고, 함께 회개하는 가족 공동체가 되야합니다. 혼자 거룩해서는 거룩을 지킬수 없는 시대입니다. 나만 거룩하다고 해서 모든것이 완벽한 것이 아닙니다. 시대, 세대가 함께 회개하고 함께 변하기 시작해야합니다.

    오늘날 미국이나 타 국가도 같은 문제로 어려워 하고 있습니다. 안을 들여다보면 거룩한 개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도시나, 국가등이 회개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고 완악한 공동체가 되다보니 '거룩한 개인'들 조차 같이 악의 비탈길에서서 미끄러지고 있는것입니다. 예컨데 어떤 곳에서는 우리아이의 성별을 '남녀'라고 가르치지도 못하고 아이가 자신의 성별을 정의내리도록 기다려야 하는 실로 말도 안되는 상황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회개해야합니다. 남녀노소가 회개해야합니다. 교회가 회개해야합니다. 국가가 회개해야합니다. 이게 요엘 시대가 마주한 문제고, 오늘날도 마주한 문제입니다. 슬프고 무섭지만 요엘시대를 지나 이스라엘은 다 같이 회개함이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300년이 채 지나지 않아 바벨론에 손에 멸망했습니다. 강력한 매를 맞은것이죠. 오늘날은 얼마 지나지 않은 미래에 어떤 역사로 기록될까요?! 다 같이 회개해야합니다. 개인주의에 머무는것이 아니라 공동체의식으로 건강하게 확장되고 항상 주변의 거룩을 책임지는 마음으로 함께 회개하고 함께 분별하며 살아야 할것입니다.

    책임을 무겁게 느끼는 아침입니다! 모두가 금식하고, 슬퍼하며, 통곡하고, 여호와께 마음을 다해 돌아오는, 또 돌아오라 촉구하는, 그러한 신앙의 걸음들을 용기내어 걸어야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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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인투에서 전하게 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행전 4:23-3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고 있자니 초대교회가 직면한 핍박앞에서 그들이 함께모여 기도하는 장면 입니다. 그들은 문제 앞에 함께 기도했습니다. 방법과 전략으로 접근하지 않고 함께 모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오늘 요엘의 본문에도 하나님은 요엘의 입술을 통하여 모두 모여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14절)

    저는 함께 모여 기도하는 성도의 힘, 교회의 힘을 자주 경험했습니다. 특히나 소위 말하는 '개척교회'를 시작하고 나서는 이러한 '합심기도'에 은혜를 참 많이 누렸습니다. 교회의 정착과 성장은 백퍼센트 함께 모여 기도한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임을 저는 믿습니다.

    더욱 힘써 기도해야합니다. 모일 수 있는 모든 성도가 함께 모여 기도하길 힘써야 합니다. 합심되어 기도하는 이러한 모임은 이제 바우교회가 마주한 영적인 도전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더욱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기도 없이는 내 삶도, 가정도, 교회도, 신앙도 지켜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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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실히 하나님은 상황으로 말씀하실때가 있습니다. 당시 유다에게 임한 전무후무한 매뚜기 피해가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예언자 요엘을 통해 이 재난을 앞으로 일어날 하나님의 심판과 환난에 대한 예언으로 삼으십니다. 결국 이는 회복을 촉구하는, 혹은 더욱 신앙을 잘지켜야만 한다는 일종의 경고로 사용하신것이죠.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유다는 결국 이 예언이 있은지 200-250년 정도 후에 멸망하게 됩니다.

    상황을 통해 경고를 받지만 아직 여유를 부릴때가 있습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라는 말이 있는데도 '긴 꼬리'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가정생활 중에 아내와 처한 상황 속에서 '아내가 주는 무언의 경고'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상황으로 충분히 경고가 보이는것이죠. 그러면 그때 정신 차려야합니다. 그때 정신 못차리면 유다가 그랬던것처럼 결국 '경고'가 아닌 실제 '심판'을 받게 되는것입니다. 경고는 뜨끔하지만, 심판은 무지 아픕니다! ㅋ

    상황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 기울일줄 알아야합니다. 경고를 엄중하게 들을줄 알아야합니다.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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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을 너희 자녀들에게, 자녀들의 자녀들에게 , 또 그 자녀들의 다음 세대에게 말해주라!" (3절)

    경고와 주의는 반복되야 합니다. 전달되야 합니다. 어제의 메세지를 오늘 또 하는것은 어리석은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그만큼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네비게이션은 자꾸 말해줍니다. "100미터 앞에서 우회전 입니다. "50미터 앞에서 우회전입니다. 20미터 앞에서 우회전입니다. 잠시후 우회전입니다!" 그래도 때로는 놓칩니다. 우리가 그 경고음을 '백색소음'처럼 들어버리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요엘 전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문제에서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분명히 경고가 있었고, 부분적인 심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걸 자녀에게 전하지 않았고, 자녀의 자녀에게, 그 자녀의 다음세대들에게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간 중간에 심판받고 망하는 역사를 살아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매일 반복하면 좋습니다.매일 아침에 일어나도, 알람을 매일 아침 다시 틀어놓잖아요! 알람을 반복해서 나쁠것이 없습니다. 말씀의 경종으로 매일을 시작하면 '경고'가 '심판'으로 임하는, 경고가 현실이 되는 최악은 피할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의 반복은 필수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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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아들은 가서 예수의 부활 메세지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들은 자들은 그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11절) 우연찮게도 오늘 저녁부터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부활했고, 어떻게 회복했는지를 함께 나눠야합니다. 오늘 아침부터 이 말씀을 읽으니 걱정이 참 많이 됩니다. 부활의 메세지라는 것이 태생적으로 잘 소화가 안되기 때문입니다. 들어도 잘 믿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에 부활 예수님은 믿지 못하는 그들을 추적하듯 찾아가셔서 그들의 굳어진 마음을 깨부숴 주셨습니다. 그런 일이 오늘 저녁 수련회 처소로 나와 함께 예배하고 말씀을 듣는 청년들에게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오늘 다 열리지 않아도 결국 추적하는 '복음의 메세지'를 통해,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통해 결국 깨지고 변화되길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 보니까 결국 마리아들은 아무능력이 없습니다. 그들이 한것이라고는 예수 부활을 전한것 뿐입니다. 능력은 부활신 예수님께 있고, 그 부활을 친히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증명한 예수님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저는 그냥 전달하는 '스피커'일뿐입니다. 하나님의 부활의 메세지가 듣는 자들을 감동주고, 깨닫게 하고,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저도 기대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기대됩니다. 부활의 예수를 만나고 나면 이들은 다시 모두 회복될 것입니다. 전혀 다른 인생이 될것입니다. 이전것은 기억이 안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될것입니다! 아멘

    3일간 '마리아'로써의 사역을 용기내어 성실히 감당해야겠습니다.

    2

    주님은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 말씀하십니다. (15절)

    생각해보면 저의 어릴적 꿈이기도 했습니다. 산기도에서 기도할때 이런 기도를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 눈앞에 보이는 산을 넘어, 한국이라는 산을 넘어, 세상을 두루 다니며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게 해주세요!"

    어제 밤에 뉴욕에 오르는 비행기를 타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선배 목사님께서 (저를 돕고 격려하시느라) 뉴욕 온누리교회로 초청해주셨습니다. 말씀을 전할 기회를 주신 것이죠.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이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저는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제 지성과, 능력으로는 비행기 타고 어디 가서 복음 전하고, 말씀 전하고 할수있는 사람이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뉴욕도 가고, 다음주에는 얼바인도 가야합니다. 가게된 연유야 어떻든 결국 저는 가는곳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 부름받은 이유가 그거 하나기 때문입니다. 감회가 새롭습니다. 2004년부터 전도사로 섬기기 시작했는데 20년 지난 지금 이렇게 한 두곳이라도 가서 복음을 전할수 있다는게 너무 신기하고 행복합니다. 꿈이 이뤄진듯 합니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자리마다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전해야겠습니다. 현재 보냄받은 바우 교회부터 시작해서, 오늘 뉴욕, 다음주 얼바인, 그리고 언젠가 또 다시 부름받게 될 그 현장 현장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불러주시고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3

    그러나 부르심은 '목회자' 한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부르셨습니다. 성도도 가정과, 교회, 친구와, 이웃, 회사와, 학교, 공동체에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가 나가서 복음을 전할때 "내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새방언으로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들고,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으며, 아픈 사람이 병이 낫게 될것입니다."(17-18절)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야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되야합니다. 우리 모두가 '전도자'로 부름받았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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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사랑하는데 안식일이 지난 첫날 이른 아침까지 기다려야 했을 마리아(들)이 생각납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달려가고 싶었겠지요. 그러나 여전히 율법과 전통을 깨뜨리지 못하고 기다리는것이죠. (특별히 예수님 부활하실 날을 기다렸다가 그날 맞춰서 찾아간것이 아닙니다)

    율법에 매여있는 신앙, 율법에 매여있는 사랑! 이는 여전히 '죽은 예수'를 보고있는 마리아(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모습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성소 장막이 찟어졌는데, 아직 그 장막 앞에서 어쩔줄 모르고 서있는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런 모습일 때가 많습니다. 은혜 가운데 용서받고 구원받았습니다. 자격 없으나, 그리스도의 보혈로 자격을 얻어 주님의 자녀가 됐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회적 통념, 지식, 문화, 전통, 이성, 율법등에 매여 그리스도를 자유롭게 찾고, 만나고, 교제하는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못하는것이죠. 맨날 '죽은 예수'만 만나러 가는 꼴입니다. 여전히 기다리고만 있는 꼴입니다.

    구원에 있어 '자격론', '공로론' 이런 생각에 빠지면 그리스도의 은혜의 구원이 이뤄졌는데도, '율법적 구원론'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긴 하지만 '십자가 은혜의 복음'을 믿지 못하면, '다시 사신 예수'를 믿지못하면 여전히 매여있는 신앙, 갇혀있는 신앙이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지성소 장막'을 찟으셨음은 물론이거니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선행이 아닌,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원의 은혜가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체하지 말고 당장 주님을 찾아가는 신앙, 자유한 신앙, 뜨거운 신앙, 표현하는 신앙의 삶을 살면됩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뭘 망설이며 기다리고 있나요?! Come to 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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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이 말에 누군가는 아니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실제 예수 전에 다시 산 사람들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은 확연히 그들의 부활 다릅니다. 일단 예수 전에 부활한 사람들은 본인들이 자신을 직접 살린게 아닙니다. 엘리야든, 엘리사든 표면적으로 그들을 부활시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본질적으로는 (이들을 통해)하나님께서 살려주신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시고 사셨습니다. 부활을 받은게 아니라 친히 부활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은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직접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부활 이후 죽지 않으셨습니다. 승천하셨습니다. 예수 전에 부활한 사람은 결국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전무후무합니다.

    이를 통해 명확하게 알수 있는것은 그리스도는 주장하신대로 '구원의 유일한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생명도, 죽음도 주장하시는 유일한 권세자이십니다. 세상 그 누구도 감히 흉내낼수 없는 유일한 권세자 이십니다. 그러므로 부활로 증명된 성자 예수님만을 믿고 전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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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째서 나를 버리셨습니까?"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경험하신 이 감정의 고독은 우리도 간혹 경험하는 바입니다. 물론 우리가 경험하는 인생의 고난이 십자가 위에서의 그것과는 비교할만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확실히 이런 감정을 경험합니다. "주님 왜 저를 버리셨나요?!"

    사실 예수님 전에도 이런 감정을 호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윗이 대표적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호소합니다. "주님 도대체 언제까지입니까? 어디 계신가요? 어디 숨어 계신가요?" 어쩌면 이런 버림 받았다는 감정때문에 도망자로 아기스 왕앞에 섰을때 다윗은 침을 흘리며 미친척 했는지 모릅니다.

    '버림받았다' 느끼는 감정은 우리의 마음을 처참하게 합니다. 가볍게는 같이 밥먹을 생각에 기대하며 집에 왔는데 집에 식구들이 다 먼저 밥을 먹었을때 버림받았다 느낍니다. 조금더 심각(?)하게는 나만빼고 친한 친구들이 만나서 놀았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을때 버림받았다 느낍니다. 조금더 무겁게는 군대갔다가 휴가 나왔는데 가족이 말도 없이 이사를 가버려서 '낙동강 오리알'신세가 되었을때 버림받았다 느낍니다. 진짜 충격적이게는 재난현장에서 구조헬기가 왔는데 나만 내려 놓고 떠날때 버림받았다 느낍니다. 그리고 '버림받았다' 라는 느낌은 우리의 육신과, 감정과, 영혼까지도 동작을 멈추게 만들어버리는 힘이있습니다. 그래서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을때 정말이지 심장이 땅속까지 꺼져버린것 같이 느껴질때가 있습니다.

    버리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하나님 나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신31:8, 우리말성경] 여호와께서 친히 네 앞서가시고 너희와 함께하실 것이며 너를 떠나지도, 너를 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마라."

    [사49:15, 우리말성경] "어머니가 자기의 젖먹이를 어떻게 잊겠느냐? 자기 태에서 낳은 아들을 어떻게 가엾게 여기지 않겠느냐? 혹시 그 어머니는 잊어버려도 나는 너를 잊지 않겠다!

    그러니 나도 하나님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또한 다른 이들도 버리지 말아야겠습니다. '가벼운 버림'(?)일지라도 당하는 사람은 가슴철렁하고 기분 안좋습니다. 말한마디, 간단한 행동하나, 중요한 언행들도 모두 나의 사랑하는 자들을 항상 염두하면서 행동하면 좋겠습니다. 실제 버린건 아닌데 이런 '버린것 같은 상황' 만으로 충분히 한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수 있음을 기억하고 신경써서 함께 해야겠습니다. 특별히 그 사람이 진짜 힘든 상황가운데 있을때 모른척 하거나, 버림받은것 같은 마음이 들지 않게 사랑으로 잘 실천해야겠습니다.

    마이클잭슨의 노래를 빌려 불러봅니다. "you are not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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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가상칠언'이라고 해서, 예수님께서 나무위에서 하신 일곱가지 말씀에 대해서 조명하곤 합니다. 그중에 가장 마지막쯤에 한 말로 생각되는 말중에 하나가 바로 "다 이루었다!" 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에 기록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죽기 직전 이 말을 읍조린것이 아니고 큰 소리로 내 지르셨다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저는 항상, 십자가 사건을 마주할때마다 '다 이루었다' 라는 이 말에 큰 도전과 감동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을 큰 소리로 외치신 이유가 꼭 저들으라고, 우리 들으라고 그러신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구원의 사역은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셔야 할 모든 일이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완벽하게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죽음'을 마주하신 것입니다.

    맡겨진 일을 다 이루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있습니다. '거룩한 욕망'이다 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땅에서의 삶동안 후회없는 섬김과 열심을 쏟아내고 싶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 멀었습니다. 갑자기 죽게 되면서 한 마디 할 기회가 있다면 "다 이루었다!" 라는 말보다는 "벌써요?" 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이 열심히 일하라는 말씀은 아니셨습니다.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의미었겠죠. 그러나 어찌되었든지 간에 사명의 시각으로 본다면 예수님이 십자가 사역까지 완성하셨기 때문에 하실수 있던 말씀은 맞습니다.

    진짜 제게 주신일, 맡기신 일 왠만하면 다 하고 주님뵈러 가고 싶습니다! 열심과 성실의 또 다른 차원이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이 마음을 실천할수 있도록 체력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기름 부어주시고, 성령에 충만케 하시고, 사람을 붙여주시고, 환경을 열어주시고, 저를 인도해주시길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거창할것도 없습니다. 그저 매일 저녁에 "오늘 할일을 다 했다!" 말하는 삶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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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가던 사람들'

    '지나가며 욕하는 사람들'

    기록으로 보면 한 부류의 사람입니다. '지나가며 욕하는 사람들' 그런데 실제 거기에는 분명히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지나가며 욕하는 사람들'이 같이 있었을 것입니다 에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피흘리는 예수님을 보면서 감흥없이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 혀 한번 끌끌 차주며 지나가는 사람들, 무슨 일이냐며 궁금해 하며 동물원 보는 듯한 관심을 보이다가 지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끝내 그 앞에서 조롱하고, 욕하고, 수치를 주고 '기념 사진'을 찍던 사람들!

    오늘날 세상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시각도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성도가 그리스도를 전하고, 복음을 전합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구원의 기적을 전합니다. 그러나 그 앞에 선 자들중에 그저 감흥없이 "아 그래!" 하며 지나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영혼이 1그램도 없는 죽은 반응입니다. 누군가는 "에이 그게 말이돼?" 하며 무시하는 관심(?)을 보이고 지나가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관심을 가지는듯 듣지만 결국은 듣다가 떠나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죠. 누군가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듣자 마자, 교회와 그리스도와 성도를 비판하고, 조롱하기 시작합니다. "바보, 멍청이들! 이성이라고는 없는 사람들, 지성인의 세대에 무지한 사람들!" 고전1:18절 말씀처럼 "십자가의 도는 믿는 자들에게는 능력이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미련한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보면서 그냥 지나가버리던, 욕하던 그 사람들 참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답답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서 멈추지 못하고, 받아드리지 못하고, 무시하고, 웃고, 조롱하고 지나가는 이들이 만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결국 복음입니다. 그래도 결국 그리스도 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무시당할것) 알았지만 그래도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입니다. 주일 말씀이 다시 한번 상기되는 아침입니다! 세상은 복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지나가던 무리중에 단 한명이라도 멈춰서 예수를 바로 볼수 있도록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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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을 구원한다더니 정작 자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31절)

    이 사람은 단단히 잘못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할수 있습니다. 대신 자신을 구원하면 인류가 다 죽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하는 것을 희생하고(포기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요12:24)

    복음을 전하는것은 희생입니다. 자기 희생! 우리가 복음을 전할때 우리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오해도 받고, 무시도 당하고, 맘 어려운 취급(?)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를 구원해버리면 그들을 구원할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십자가'위에 매달려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을 위한 '십자가'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웃과 타인을 향한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밀알'이 되야겠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야겠습니다. 더욱 죽어야겠습니다. 더욱 낮아져야겠습니다. '많은 열매'를 보는 인생이 되길 꿈꿉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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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체 생활할때 이런 일들이 간혹 일어납니다! "누가 대표로 맞을래?" 그러면 주장이 대표로 나가서 맞기도 하고, 또 누군가 정의감에 불타는 학생이 손을 들고 나가서 맞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저도 언젠가 학급 반장일때 그런 비슷한 경험을 했던것 같습니다. 얼마나 멋진가요? 누군가를 위해서, 같은 반 학우들을 위해서 대신 희생해서 맞는 그 모습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참 멋져 보입니다. 그래서 "선생님 제가 대표로 맞겠습니다!" 앞으로 나갈때까지 멋있습니다. "엎드려 뻗쳐!" 라는 선생님 말을 듣고 엎드리는것까지도 멋집니다. 괜히 마음 한켠이 흐뭇합니다. 그런데 이제 타작이 딱 시작됩니다. 첫번째 매가 엉덩이에 닿고 떨어지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 후회가 밀려 옵니다. 머리속에서 그리던 '멋진 희생'은 엉덩이를 파고들고 찾아오는 엄청난 고통 한번에 깡그리 사라집니다. '뭔가 잘못됐다!' 그런 생각이 딱 듭니다. 그때 스프링처럼 일어나서 말합니다. "선생님! 잘못했습니다. 한번만 봐주세요! 제가 아닙니다! 저는 맞을 수 없어요!" 최악에 경우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사실은 제가 아니고 저 녀석이 한겁니다. 저 녀석을 벌주셔야되요!" 생각과 현실이 너무 달랐던 탓입니다.

    머리로 생각하는것, 예상하는것과 실제로 경험하는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알고 계셨습니다. 예상하고 계셨습니다.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 보세요. 딱 '십자가 판결' 나자마자 가시관이 머리에 밖힙니다. 그 고통은 전에는 경험해본적이 없는 고통입니다. 막연하게 예상했던 십자가 고난하고 실제 느끼는 육체적 고통의 차원이 다릅니다. 거기에 사람들이 때리기 시작하고, 옷을 벗기고 수치를 당하고, 침을 뱉습니다. 십자가의 현실은 잔인해도 너무 잔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십자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생각속에서, 상상속에서 하나님을 위한 멋진 일들을 떠올리고 계속 생각할수있습니다. 젊은 시절 선교를 결단하고, 교회 안팎으로의 사역을 결단하고, 사회를 위한 봉사와 헌신을 결단할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이 일들을 실천하기 시작할때 생각하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현실을 마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 오늘 십자가 길을 걸으신 예수님을 생각해야겠습니다. 생각보다 녹록하지 않은 현실을 만나게 되더라도,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렵고 고단한 현실을 만나게 되더라도 포기하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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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는 예수님만 지셔야 하는거 아닌가요? 그런데 왠 사람이 느닷없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가게 됩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그는 아무 잘못도 안했는데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이동했으니 억울한가요? 애초에 왜 느닷없이 십자가의 길 중에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사실 이게 원래 일어났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사실 우리가 지고 올라가야하는 형벌입니다. 사실 누가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느냐도 딱히 상관없습니다. 왜냐면 모두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인은 모두 죽음으로 죄값을 치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시몬뿐만 아니라 누구나 이 십자가를 지고 이동해도 그러므로 억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골고다에 이르자 예수님께서 다시 이 십자가를 넘겨 받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십니다. 형언할수 없는 은혜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가 져야하는것이 아니라 원래 우리가 져야하는것입니다. 우리가 지고 골고다로 가야하고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우리의 십자가를 그리스도께서 대신 지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조금만 십자가 지는것 같으면 힘들어 합니다. 억울해 합니다. 불평합니다. 어려운것은 이미 예수님이 다하셨는데, 그 언덕길 십자가 지고 올라가는것 정도로도 너무 힘들어 합니다.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고, 나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지고 걸어야 할길을 기쁨과 순종으로 잘 걸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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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더이상 아무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이상히 여겼습니다."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걷는 예수님을 봅니다.빌라도도 그런 예수님의 모습이 이상해 보입니다. 분명히 반론할수 있습니다. 잘못된 정죄에 대해서 변호사를 선임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묵하십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할말하않'입니다. 한번 말하기 시작하면 토로해야할 말이 산더미 같습니다. 말이라는것이 운동력이 있고, 관성력이 있습니다. 한번 시작되면 잘 멈추기 어려운 것이죠. 그러니 때로는 함구가 답입니다. 말이 터지면 실수가 잦습니다. 나의 말이 나의 귀를 통해서 다시 나에게 들릴때, 그것은 생각보다 더 큰 힘으로 나의 마음을 자극합니다.

    그러므로 사명에 방해가 될것 같다면 '할말하않'이 지혜로운 처사일수 있습니다. '말'때문에 내 마음이, 결심이 흔들릴것 같다면 침묵이 지혜로운 행동일 것입니다. 침묵이 (당연히) 모든것에 답은 아니지만 많은 일에 있어서 좋은 결과물을 가져다 주는것은 사실입니다. 침묵의 지혜, 침묵하는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해야할 말은 해야겠지만 안해도되는 말이라면, 하지 말아야하는 말이라면, 도움이 안될 말이라면 침묵하는게 맞습니다!

    사명속에서 '말'의 역할과 영향력을 기억해서 분별하여 말하고 침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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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는 그냥 '넘겨줘도 되는 판결'이 아닙니다. 이는 한 인생의 생명에 대한 판결입니다. 군중의 비위를 맞추려고 한 인생을 쉽게 넘겨버리는 빌라도의 태도가 얼마나 경솔한지 모릅니다.

    내가 오늘 타인에게 한 언행이 엄청난 악행일수도 있습니다. 그저 '군중을 피하는 행동'이 아닌 '살인'일수도 있는것입니다. 나의 행동이 가지는 진짜 의미를 잘 알아야합니다. 어린 학생들이 친구들에게 심부름도 시키고, 짓굳은 장난도 합니다. 그들은 "친구끼리니까 괜찮아요!" 라고 말하고, "그냥 장난이었어요!"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 그들의 행동의 진짜 의미는 그게 아닙니다. 왕따시키는것이고, 상처 입히는 것이고, 억압하는 것입니다. 나의 장난이 그에게는 폭력이고 살인과도 같았던것입니다.

    내게 별일 아닌 그 일, 내가 생각없이 내린 결정, 큰 의미없이 내 뱉은 나의 말, 당장 나 좋자고 한 가벼운 행동들이 오늘 누군가를 치명적으로 상처주거나 죽이는 일이었을지 모릅니다. 타인을 향한 나의 행동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조금더 객관화 할줄 아는 시각, 내가 아닌 남을 볼줄 아는 시각, 행동의 진짜 의미를 파악하여 악한 행동이라면 절대 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한듯 합니다.

    너무 쉽게 나의 안위를 위해 나의 이웃을 '죽음'으로 내모는 행동을 절대 하지 않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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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을때만 친구인 사람들 있습니다.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되면 "가장 친한 친구야!"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되면 모른척 해버립니다. 혹시 나한테 돈달라고 할까봐, 도와달라고 할까봐 전화도 안받습니다. 간혹 제 3자를 통해서 연락 옵니다. "야! 너 그 아무개 알지? 너랑 엄청 친하잖아! 걔 사업 부도나서 힘들데!" 라고 말하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누구? 걔? 나 걔랑 안친해!"

    이기를 위한 신앙은 이처럼 예수님을 쉽게 버립니다. 눈 앞에 예수님으로부터 더이상 얻을게 없고, 더 나가 내가 피해보고, 희생해야할것 같으면 쉽게 버립니다. 왜냐면 신앙의 목적이 나의 유익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손해보면서까지 예수 믿고, 따를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예수를 나 개인의 성공의 도구, 축복의 도구, 유익의 도구로 보고 있다면 당장 신앙을 바로 잡아야합니다. 만약 '행복'을 위해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것이라면 반드시 예수를 버리게 되는, 혹은 버리고 싶은(?) 상황을 만나게 될것입니다. 나의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으시고 심문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무기력한 예수님'을 보면 망설임 없이 예수를 버리게 될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거나 읽은 많은 분들이 분명히 이쯤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실것 같습니다. "모두가 그래도 저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저는 절대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저는 절대 그런 오염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딱 베드로 같은 생각이고, 베드로 같은 행동입니다. 자신할 일이 아닙니다. 깨어 경계해야할 일이고, 다시 살펴야할 일입니다.

    계산하는 신앙은 버려야합니다. 행복에 집착하는 신앙을 버려야합니다. 얻으려고만 하는 신앙도 버려야합니다. 이기적인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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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개인적으로 '두려움'이 가장 큰 약점입니다. 다른 수많은 약점들이 있지만 특별히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유독 흔들립니다. 두려움이 한번 마음을 장악하기 시작하면 건강한 판단이 안됩니다. 몸도 맘대로 안움직입니다. 과호흡이 시작되고, 생각도 멈춰버립니다. 심지어 눈앞이 깜깜해지는것을 느끼기도 하고 실제로 기절해서 깜깜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수많은 '두려운 순간'을 이미 돌파했습니다. '두려움의 해일'을 참 많이 넘어섰습니다. 두려움이 치명적 약점임에도 불구하고 넘어설수 있었던 이유는 그때마다 결국 하나님의 손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넘는 돌파하는 지혜는 그리스도의 손을 붙잡는 것만큼 좋은게 없습니다.

    오늘 베드로는 두려움을 돌파하기 위해서 예수의 손을 놓았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짓을 한것입니다. 가끔 영화에서 많이 나오는 클리세 장면들이 있습니다. 재난이 몰려옵니다. 전문가가 말합니다. "저를 꼭 붙잡고 계세요! 여기서 움직이시면 안됩니다! 여기가 위험해보이지만 지금은 여기가 가장 안전한곳입니다. 저를 믿으세요!" 그런데 이 말을 듣고서도 꼭 군중을 선동하여 움직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떠나는 자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를 떠나야합니다. 이 사람을 떠나야 살수 있어요!" 몰려오는 위험을 보며 결국 몇몇 사람들이 그렇게 전문가의 말을 듣지 않고 두려움의 소리를 듣고 떠나는 것을 결정합니다. 떠난 사람들은 영화에서 꼭 나가자 마자 죽습니다. 우리가 딱 이런 실수를 많이 합니다. 너무 두려우면 생각이 마비되고 그럼 마지막까지 놓지 말아야 하는것을 오히려 놓아버립니다. 그래서 두려움에 휩쌓여 예수를 놓아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두려움을 이기게 하는 힘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샬롬의 하나님 입니다. 도우시는 하나님 입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 입니다. 그분을 놓아서는 안됩니다. 두려움에 압도되지 마세요. 두려움이 당신을 장악하지 못하게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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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근대 역사를 보면 암울했던 시간들이 있습니다. 특히나 공산당을 만들어(?) 내던 시기가 있습니다. 서로 안맞으면 권력이 더 있는 자들이 잡아다가 '빨갱이'를 만들어 버립니다. 사돈의 팔촌까지 탈탈 텁니다. 아무리 털어도 뭐가 안나오면, 그냥 옷만 빨간색 입어도 '빨갱이'로 역어버립니다. 협박도 안통하고, 고문도 안통하면 그냥 죽여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모른척 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없는죄도 있다고 만들어 버리는 죄! 내가 원하는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거짓말하고 타인을 죽여버리는 죄! 무섭고 악독한 죄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그런데 대제사장 이하 대적자들은 예수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찾습니다. 거짓 증인들도 세웁니다. 그런데 맘대로 안됩니다. 입이 안맞습니다. 도무지 죄를 덮어 씌울수 없습니다. '손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하니' 될일이 아닙니다. 그럼 포기할만도 하지요. 그런데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국 '신성모독죄'를 뒤집어 씌워 예수를 정죄합니다.

    당신도 지금 누군가에게 없는 죄도 뒤집어 씌울수 있습니다. 국가대표 축구선수 손흥민, 이강인 선수간에 이런 저런 문제가 있었던것 같습니다. 그런데 세부적인건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기사를 보면 손흥민선수가 너무 권위주의적이었던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한편 다른 기사를 보면 이강인 선수가 너무 무례한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또 방관자 클린스만 감독에 대한 천편일륜적인 악독한 기사들도 더불어 쏟아집니다.(결국 경질이 되는것 같습니다) 저는 진짜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났고, 어떤 선수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가지 확실한것은 현장에 있지도 않았고, 현장의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 이 손가락을 놀려 온라인 상에서 이미 자신들의 표적들에게 '죄명'을 명확하게 붙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죄명'이 붙으면 사람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누군가 하나를 '십자가'에 못밖아야 끝나게 되는것입니다. 이처럼 엮는것(?)은 생각보다 훨씬 쉽고, 우리 주변에서 가깝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나의 즐거움, 나의 생각, 나의 욕망, 나의 정의를 위해 누군가에게 없는 누명을 씌우고, 오해를 만들고, 정죄하고, 핍박하고, 매장하고, 죽이는 일은 자칫 그 심각도가 다를뿐이지 우리를 통해 일어나고 있을지 모릅니다. 불의한 고발, 이기적인 정죄, 거짓된 소문, 비열한 담합등을 멈춰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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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회를 줘도 잘해내지 못하니까 예수님이 직접 나서는 것 같습니다. "내가 바로 그다. 너희는 인자가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것이다."(62절) 잘못된 고발동안은 아무말씀도 없던 예수님은 답답하다는 듯이 그들의 마음이 완전히 요동할 빌미를 제공합니다. 이것이 불씨가 되어 어찌할바를 알지 못하던 대제사장과 대적자들은 예수를 정죄하며 사형을 선포합니다.

    사실 이 얘기를 다른 시각으로 보면 예수님이 살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들은 계속 예수의 죄를 찾아서 정죄하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거짓 증인도 세웠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예수를 정죄할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예수님이 풀려날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가만히 계시면 이들이 어찌할바를 알지 못하다가 결국 죄를 찾지 못해 이 '재판'이 흐지부지 될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예수님 살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시면 안됩니다. 십자가 지셔야죠. 그게 그분이 이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답답한 마음(?)에 그들을 돕기로(?) 작정하신듯 보입니다! "네가 그리스도냐?!" 묻는 간단한 질문에 "나는 그리스도가 맞다. 그리고 너희는 내가 하나님의 우편에 있는것을 보게 될것이다. 내가 다시 오는것도 보게 될것이다!" 라는 그들이 더욱 소화하지 못할 말씀을 사자후처럼 내 뱉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더욱 요동케 만드시는것입니다. 반드시 십자가를 지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명을 마주하는 예수님의 자세입니다. 십자가는 고난입니다. 그러나 사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피할 마음이 없습니다. 피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피할 여지가 있습니다. 방법도 보입니다. 그런데 굳이 십자가 죽음의 길을 고집하는것입니다.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해야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명은 반드시 해야하는 일입니다. 힘들어도 가야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져야만 죄인들이 구원받는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이러한 태도로 대해야 합니다. 간혹 사명의 자리로 나가다가 빠지거나, 멈추거나 할 기회가 보이면 바로 도망쳐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핑계대고 빠지기 딱 좋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상황 핑계대지 않고, 어려운 상황이라도 가능한 상황을 만들어 사명을 완수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예수님 닮은 사명자 되어, 맡겨진 사명 감당하는 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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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 주변에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를 파는자가 있습니다. 예수를 못알아 보는 자들도 있습니다. 예수를 잡아가는 자들도 있습니다. 칼을든자와 싸우는 자도 있습니다. 도망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예수님 전세계적으로 이정도 유명한데 아직도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사인'을 줘야 그나마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여전히 예수를 팔아 장사하고, 먹고 살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여전히 예수를 적대하고, 부정하고, 무시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속칭 '믿는자'들 중에는 불신의 세력과 칼들고 싸우는 무력항쟁의 진영도 있습니다. 반대로 누군가는 '평화주의'를 논하며 도망가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쩜 이렇게 인간은 수천년이 지났는데 하나도 변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 십자가 지시기 전이야 아직 증명(?)되기 전이라 그럴수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이미 십자가가 일어난 역사이고, 이미 수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시대인데도 왜 여전히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것일까요?

    배움이 없이는 성장이 없고, 안좋은 역사가 반복되는것처럼, 신앙의 역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인류가 과거로 배우지 못하니 전쟁은 끝나지 않고, 파괴도 끝나지 않고, 분열도 끝나지 않고, 더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것입니다. 신앙이 과거에서 배우지 못하니 오늘날 신앙도 세력은 커졌을지언정 여전히 다시 종교개혁이 필요한 지경으로 치닫고 있는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라! 예수께 배우라! 예수를 경험하라! 예수를 믿으라! 당장 나부터라도, 우리부터라도 '신앙의 오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걸음을 걸어야합니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신앙, 성장하는 신앙, 잘못을 바로 잡는 신앙, 정의를 고집하는 신앙,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은 신앙이 되야겠습니다. 매일 그렇게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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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맞추는 배신자' (44절)

    얄밉습니다. 겉으로는 친한척, 인사하는척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팔아넘기는 유다의 모습입니다. 가장 가까이 다가와서, 가장 잔인하게 배신했습니다. 혹시나 예수님 못잡아 갈까봐 신신 당부를 하기까지 합니다. "그를 붙잡아 단단히 끌고 가시오"(44절) 만약에 예수님 거기서 안잡히셨으면 가룟유다 나중에 예수님께 이렇게 변명했을지 모릅니다. "주님 배신이라뇨!? 제가 오자마자 주님께 입맞춤하며 인사한거 기억 안나세요? 그 병사들은 제가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인간의 배신이 참 잔인합니다. 어쩜 저럴수 있나 싶습니다. 영화나 드라마, 책에서 보는 이러한 가까운이들의 배신은 볼때마다 피를 거꾸로 솟게 만듭니다. 참을수 없는 분노를 일으킵니다.

    간혹 비싼 레스트랑에서 만나서 꽃을 주면서 이렇게 말하는 남자들 있습니다.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 다 너를 위해서야! 나 다른 사람 생겼어!" 이렇게 비싼 레스토랑에서 꽃을 주며 나를 배려한답시고 배신을 통보하면 뭐가 좀 나은가요? 배신은 배신입니다. 어떤 미사여구를 가져다 붙여도 변명일 뿐입니다. 배신은 그저 배신일뿐입니다.

    배신하지 마세요. 친한척 하면서 뒤로는 배신하지 마세요. 아닌척 하면서 배신하지 마세요. 유익 때문에 배신하지 마세요. 생각으로도, 언어로도, 행동으로도 배신하지 마세요. 가족도, 친구도, 친척도, 이웃도, 동료도 배신하지 마세요. 아마 어제 발렌타인즈 데이라 사랑의 마음을 담아 선물했을 아내와 남편도 배신하지 마세요! 무엇보다 주님을 배신하지 마세요!

    배신없는 신앙, 배신없는 가족, 배신없는 교회, 배신없는 사회, 배신없는 나라였으면 좋겠습니다! 배신하지 않는 그리스도를 본받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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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피 발렌타인즈 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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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힘들면 안해도 되는 일이 있습니다. 반면 아무리 힘들어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그런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무 괴로우신데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길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그 고난을 뛰어넘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인류의 구원이 완성된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설명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마16:24, 우리말성경]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수그리스도께 맡겨진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완수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완수해야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도 '십자가'는 너무 괴로운 사명이었습니다. 옮겨버리고 싶으신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감당해야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발렌타인즈데이 입니다. 사랑을 묵상하기 아주 좋은 날이기도 합니다. 사랑의 실천이 아무리 어려워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사명입니다. 남편이 웬수(?)같아도, 자녀가 너무 말을 안들어도, 이웃들과의 관계가 너무 불편하고 어려워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맡기신 가장 중요한 '십자가'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님처럼 어떻든지간에 기도하고 또 기도해서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고 완수하는 자가 되야합니다. 내게 맡겨진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는 자가 되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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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는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을 홀로 조우합니다. 그러나 돌을 던지면 닿을 거리에 세명의 제자를 앉혀 놓으십니다. "내가 기도하는 동안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인자 예수님조차도 혼자는 힘듭니다. 조금 멀리 제자들이, 그리고 조금더 가까이 수제자들이 자신과 함께하길 기대합니다. 감정의 동참을 기대하고, 기도의 동역을 기대하고, 그래도 보호해주기를 기대하기도 합니다. '인성의 마음'은 그렇습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참고로 예수님은 완벽한 인간이시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서로'라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인류 처음부터 아담에게 이브를 베푸신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혼자 돌파하지 못합니다. 믿음이 좋고, 기도도 합니다. 결단도 했고, 용기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가 필요합니다. 함께 해주는 사람들, 기도해주는 사람들, 사랑해주는 사람들, 동행해주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서로가 서로에 곁을 지켜주지 못할때가 많습니다.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마음을 전혀 모르고, 공감도 없고, 기도도 못할때가 있습니다. 너무 피곤해서, 너무 바빠서, 너무 힘들어서, 내 일이 아니여서 등등 이유도 다양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을 통해 함께 해주는 이웃이 되길 결단했으면 좋겠습니다. 힘이 되어주는 이웃, 기도해주는 이웃, 협력하고 동역하는 이웃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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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해야합니다. 제자들이 피곤한거 압니다. "마음이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그들의 육신의 피로를 압니다. 예수님도 느끼고 있는 바요, 경험하고 있는 바 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해야합니다. 기도가 필요할때 졸수 없습니다. 피곤함으로 따지면 예수님이 가장 피곤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졸지 않으시죠. 기도가 없이는 눈앞에 놓여진 '십자가'를 절대 이길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육신의 피곤함'에 지지 않습니다.

    기도를 해야하는데도 안할때가 너무 많습니다. 피곤해서 새벽에도 못하고, 밤에도 못합니다. 바빠서도 기도하지 못합니다. 기도할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 기도하지 않기도 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항상 깨어 기도해야합니다. 예수님의 하루의 시작도, 마무리도, 사역의 현장에도, 식사의 자리에도, 기적의 찰나에도 언제나 기도였음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기도 없이는 아무것도 할수 없습니다. 반드시 기도해야합니다. 기도가 회복되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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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감 있는 신앙과 교만한 신앙은 다릅니다. 교만한 신앙은 나 자신에게 그 근거가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주를 저버린다해도 저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이 건강하다고 믿습니다. 그 누구와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는, 아니 앞서있는 신앙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진실로 말한다. 오늘 밤 닭이 두 번 욹기 전에 네가 나를 모른다고 세번 부인할것이다." 예수님 '진실로'라는 단어를 쓰면서 강조까지 하셨습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이후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나를 믿는, 나의 신앙을 믿는, 내 신앙이 건강하다고 믿는 신앙의 교만은 버려야합니다. 신앙의 자신감은 언제나 그 근거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실합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아 주시고 계시기 때문에 믿음의 확신이 있는것입니다. 겸손한 신앙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자신감 있는 (확신하는) 신앙을 가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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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모든 제자들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우리도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저는 절대 배신하지 않습니다!" 라고 했고 이 말을 들은 다른 제자들도 "당연히 우리도 배신하지 않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한치의 의심이 없이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예수님이 실제 잡혀가실때 다 도망갔습니다.

    나의 입술의 고백과, 선포에 얼마나 진심을 담고 있는가 생각해봅니다. 혹 진심을 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교회 안에 가장 대표적인 두 단어는 "아멘" 과 "할레루야!" 입니다. 아멘은 공감과 긍정의 선언입니다. 동의의 선포입니다. 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명령어에 가깝습니다. 찬양할때, 기도할때 얼마나 이 선포들을 자주 하는지 모릅니다. 간단한 단어이지만 참 의미가 깊은 단어들이죠. 과연 이 단어의 선포때마다 얼마나 진심을 담고 있을까도 생각해봅니다.

    주를 위해 한다고 말했다가 하지 않는 일들, 사랑한다고 했다가 예수님 배신하는 일들, 회개 한다고 했다가 다시 또 죄를 짓는 일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쩌면 우리의 '신앙의 말들'은 진심이 없는 거짓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거짓말! 주변을 속이고, 나 자신을 속이고, 심지어 하나님을 속이려 하는 이러한 신앙의 거짓말들이 있지는 않은지 나의 신앙의 언어들을 자주 살펴야겠습니다. 모든 신앙의 고백이 진심의 고백이 되길, 정직한 고백이 되길, 책임지는 고백이 되길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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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월절에 ‘방’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온 지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혹 기록되지 않는 제자들까지 생각해보면 그들이 함께 모여 머물 ‘방’을 구하는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은 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성수기때 유명관광지에 호텔이나 에어비엔비를 구하는것이 절대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디에가서”(12절) 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이미 준비되었는 있는 방이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요즘 예배의 처소를 마련해 주신 하나님을 참 많이 묵상하게 됩니다. 처음 오스틴에 당도했을때 예배할 장소를 찾아야했는데 마땅치 않았습니다. 주님앞에 장소 놓고 기도를 참 많이 했습니다. “주님, 주를 위해 어디서 예배를 준비해야할까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당시 머물던 집에서 예배를 시작할수 있다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좋은 장소를 찾아서 예배드리겠다는 마음을 잠시 내려 놓고 집에서 당장에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여러 학교에 문의 이메일도 보내고, 지역교회들도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벤트홀을 찾아 연락하기도 했습니다. 그러기를 한달, 하나님은 마치 예비라도 해 놓으신듯이 우리를 한 미국교회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렇게 또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나고 하나님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장소를 찾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현재 공사되고 있는 장소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주를 위한 예배의 처소, 함께 모여 떡을 때고 나누는 장소,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모여 교제하는 장소, 생각해보면 우리가 마련하는것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련하고, 준비했다 생각하면 결국 우리의 소유물이고, 우리의 공로가 되기 쉽습니다. 제자들이 가서 이 장소를 찾았어도 사실은 예수님께서 미리 마련해 놓으신것이죠. 그런데 자기들의 공로고, 자기들이 마련한 장소라고 생각하면 어깨에 힘주게 됩니다. 옳지 못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과거나 오늘날이나 성전을 둘러쌓고 쟁취의 전쟁을 하고, 고소를 하는 수많은 경우를 봐왔습니다!)

    예배할 장소를 직접 마련해주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그곳에서 함께 떡을 나누고 ,믿음안에 교제하며, 우리 각자의 십자가 사역을 준비하고 실천하는 교회를 세워가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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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룟유다는 언제 자신이 예수를 배반할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까요? 처음부터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 팔기 며칠전, 혹은 몇주전, 혹은 몇달 전부터였을지 모릅니다.

    누구든 변할수 있습니다. ‘예수의 최측근’도 변할수 있습니다. 그 마음을 항상 점검하지 않으면, 주님께 집중하지 않으면,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러면 언제든, 누구든 변할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배신하고 팔아버릴지도 모릅니다. 최후의 만찬 현장에서도 끊임없이 예수님은 경고하셨습니다. "지금 나랑 같이 밥먹는 너희들중에 하나가 나를 팔것이다. 지금 나와 함께 빵을 찍어먹는 자들중에 하나가 날 팔것이다!" 이는 일종의 선포이면서 경고입니다. “나 알고 있어!”라고 말씀하고 계신것과 같습니다.

    이때 제자들 모두 두려워합니다. 자신들의 마음에 대한 얘기인데 "주님 저는 아니지요?"라고 말하며 슬퍼합니다! 모두 한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보았었나 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그 말에 모두가 걱정하고, 두려워했던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누구든 자칫잘못하면 예수를 배반할수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룟유다는 최악을 선택합니다. 예수님의 이 경고, 즉 다른 말로는 '멈춤의 기회' 앞에서 끝내 배신을 선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동거동락하고, 예수와 함께 마지막 만찬을 즐기던 '최측근'도 예수님을 팔정도라면, 누군들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도 언제나 깨어 기도해야합니다. 사탄이 우리의 마음에 틈타지 못하도록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합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나의 마음의 조짐이 조금씩 금이가면 벌써부터 서둘러 회개하고 점검해야합니다. 식어지려는 기미만 보여도 다시 스토브에 불을 붙여야 합니다. 끝까지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가 되기로 결단하며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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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 향유옥합을 드릴 생각조차 안하는 사람들이 막상 드리는 사람들 보면서 질투하고, 화내고, 과하다고 말합니다.

    과거를 생각해보면 비싸면 수백만원이 되는 단기선교여행을 참여하는 이들을 보며, 그런 큰 돈을 왜 쓰냐며, 차라리 그 돈을 그냥 선교지로 보내라고 했던, 본인은 자신돈 1푼도 내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돈을 선교지로 보내면서 그런 얘기를 하는게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 주면서” 이런 얘기를 하는게 아닙니다. 자기 돈 자기 주머니 깊숙히 넣어놓구서 남이 ‘헌금’하면, ‘향유옥합’ 깨드리면 그렇게 미주알 고주알 말이 많습니다!

    남들의 헌신, 타인의 헌금, 관심가질것도 아니고, 판단할 것도 아니고, 계산할것도 아닙니다. 남들이 헌신하는 남의 돈을 왜 내 돈인것마냥 안타까워 할까요? 어쩌면 질투일까요? 만약 향유옥합이 300데나리온이 아니고 100데나리온 정도 됐으면 그냥 넘어갔을까요?

    남의 헌신에 관심 가질 필요 없습니다. ‘나병환자 시몬’은 형편대로 예수님께 식사 대접하면 되는거고, 마음에 감동이 있는 여인은 ‘300데나리온’ 드려도 되는것입니다. 여인의 ‘향유옥합’ 즉, 그녀의 헌신을 측량한것은 제자들이지 예수님이 아닙니다.

    ‘나는 무엇을 주님께 진심과 감사로 드리고 있는가?’ 그게 중요합니다. 비교, 판단, 정죄, 시기, 질투, 계산은 하나님께 헌신하는데 있어서 쓸데없는 마음입니다. 거짓된 마음을 버려야합니다. 하나님 사랑하나요? 여인처럼 하나님께 헌신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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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이는 ‘신앙의 마지노선’이 있습니다. 유다는 오늘 이 현장에서 자신의 ‘마지노선’이 무너지는것을 경험했습니다. 일단 예수님은 돈의 가치를 가룟유다와 같이 보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300데나리온의 가치를 몰라보는 것입니다. 유다는 돈을 벌고 싶었을텐데 예수님은 돈에는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한개의 ‘마지노선’이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하시며 “나의 장례를 준비한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두번째 마지노선도 무너졌습니다. 어떻게든 예수님 살아계시면 자신이 충분히 뒤에서 머리 굴려서 돈 벌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와 명성에 힘입어 만들어 낼수 있는 사업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이 죽어버리시면 다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장례얘기’ 때문에 그나마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마지노선’이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이 사건 이후에 바로 대제사장들을 찾아가 예수를 팔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마지노선’, 우리도 모르게 이런게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의 역린 같은 것이죠. ‘이거 건들면 주님이라도 가만히 안둡니다!’

    가룟유다처럼 ‘돈’이 신앙의 역린인 사람도 있고, 사람(자녀,가족), 건강, 명예, 권력, 자유, 쾌락등이 역린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가치들이 예수님의 도전과 충돌하면 예수님을 버려버리는 것입니다. '신앙의 역린'이 없어야 합니다. 주를 위해서라면 모든것을 버릴수 있어야하고, 양보할수 있어야하고, 희생할수 있어야하고, 수용할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에 있어 마지노선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파는 사람말고, 예수님을 배신하는 사람 말고, 예수님의 뜻이라면, 예수님의 마음이라면 그저 믿고 기쁨으로 따르는 신앙인이 되야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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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그날을 아무도 모르게 하셨을까요?

    부모님이 출타할때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엄마 아빠 저녁 8시까지 올테니까 그때까지 숙제 다 해놓고 티비는 딱 한시간만 보고!” 그러면 밝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그러나 부모님 딱 나가시자 마자 바로 TV부터 켰습니다. 그리고 딱 도착하시기 10분전에 티비 끄고 냉장고에서 찬 물병 가져다가 티비 위에 올려 놓으면 금방 식어 버리기 때문에 완전 범죄였습니다. 집 문을 딱 열고 부모님이 들어오셨을때 공부하고 있는 자녀들을 보면 깜빡 속기도 하는 것입니다.

    완악한 인간들이 참 많습니다. 미리 알려주면 이처럼 머리부터 굴립니다. ‘그날’이 오기전까지 맘대로 살다가 ‘그날’이 오기 바로 직전에 안그런척 준비하고 있는것입니다. 깨어 있다 못해 아주 바짝 경계되어있고, 준비하고 있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깨어서 기껏 한다는것이 속이는 일이라니 참 한심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 그러것에 속으실 분도 아니고, 그런 일 자체가 가능하지 않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날’은 모두에게 비밀이 된것입니다. 그날이 언제 올지 모르니 매일을 그날이라고 생각하며 사는게 가장 큰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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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은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 아버지만 아십니다. 그러니 누군가가 '그날'을 안다고 하면 다 이단입니다. 무조건 사이비입니다. 잘못된 신학이며, 교리 입니다. "새로운 계시가 내렸다!" 혹은 "하나님께서 내게 그 날을 말씀해주셨다!" 심지어 그들이 신비한 일을 보여준다고 하여도 '그날'이 언제인지 적시 한다면 경계해야합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가능하지 않습니다.

    마지막때가 되면 (말씀의 경고처럼) 많은 가짜 그리스도들이 나타납니다. 교회 안팎에 '종교적 정신이상자'들이 나타납니다. 종교를 이익으로 사용하려는 자, 잘못된 교리로 사람을 현혹하는자들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을 현혹하기에 가장 쉬운게 바로 '마지막 때의 메세지'입니다. 절대 현혹되지 마세요! 심지어 잘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을 제게 환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2024년에 하나님 오십니다!" 라고 말하면 그 교회 떠나세요! 그날의 때는 하나님 아버지만 아십니다. 그리고 어느날, 느닷없이 그날은 반드시 도래할 것입니다.

    원래 진정한 '에이스'는 무슨 문제가 나올지 아는 학생이 아닙니다. 무슨 문제가 나올지 목메는 친구가 아닙니다. 진짜 '에이스'는 어떤 문제가, 언제 나와도 언제나 준비되어 손쉽게 풀고 패스하는 친구들 입니다. 그날이 언제 올지보다 중요한것은 '오늘의 나' 입니다. 주님 앞에서 매 순간 나를 점검하고 준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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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을 너무 여유있게 사는것 같습니다. ‘오늘’은 ‘마지막날’의 다른 이름일수 있습니다.

    본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마지막때는 충격적입니다. ‘끔찍’이라는 단어로 쉽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그 날이 언제 올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일수 있고, 지금 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오늘’을 너무 여유있게 삽니다. 오늘이 마치 보장되어 있다는 듯이, 내일의 해가 반드시 뜰꺼라는 듯이 삽니다. “다음에 하면 되지 뭐, 내일 하면 되지 뭐! 기회가 또 오겠지 뭐, 나중에 고치면 되지 뭐!”

    마지막 때의 징조가 한두개가 일어나고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마지막 때의 징조가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징조로만 본다면 지금 당장 예수님 오셔도 이상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라는 삶의 가치를 조금더 신중하게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삶에 가치를 두고 사는 사람들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오늘 이땅에서의 삶을 중요하게 여겨지 않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땅에서의 삶에 하루하루 조금더 충실하고, 경건하게 살아야합니다. 갑작스런 엔딩을 맞아도 후회나, 아쉬움, 슬픔이나, 노여움 그리고 부끄러움이 없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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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delay는 말그대로 연기지 cancel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지는 이유는 우리 때문입니다. 은혜입니다. (20절)

    저는 다시 오셔서 심판하시고 구원하실 예수님을 믿습니다. 이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신앙인들을 제외하고) 혹시 이 글을 실수로라도 읽는 사람중에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분이있다면 꼭 예수님에 대해, 듣고, 알고, 믿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유일한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을 모두가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씻어주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예수님 다시 오실때 철저한 심판을 받게 될것입니다. 그때가면 늦습니다. 예수님 아직 재림 안하셨으니 지금이 기회입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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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화려함과 웅장함을 보면 영원히 안끝날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 있는 돌 하나도 그냥 쌓여 있지 않고 하나같이 모두 무너질 것이다.”

    세상에 그 어떤 화려함과, 웅장함과, 강력함도 영원한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의 유물과 화려한 것에 현혹되서는 안됩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이러한 ‘눈에 보이는 영광’들이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할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러한 유한하고 근시안적인것으로 주목 시킬 것입니다. “선생님 저것 좀 보십시오!” (1절)

    참 모순적입니다. 성전의 주인 되시는 분을 앞에두고 성전 건물을 좀 보라고 소리치는 제자들의 모습이 말입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분을 앞에 두고, 그분의 영광의 발치도 안되는 건물에 시선을 빼앗긴 제자들의 모습이 참 안쓰럽고 답답합니다. 생각해보면 그랜드캐년 가서 눈으로 그 위용을 담기 보다는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어서 다녀왔는데도 실제 본 기억이 없는것과 같습니다. (그럴거면 그냥 엽서나 사진전을 보는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영광에 현혹되어 예수를 향한 시선을 놓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 금방 사라질 영광에 취해 영원한 구원의 영광을 놓치는 치명적 실수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눈앞에 계신 예수를 놓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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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이 시대를 직접 살아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라 주장하는 사람이 넘쳐나고, 전쟁과 기근의 소식은 온땅에 가득합니다. 곳곳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교회를 향한 정치적, 사회적, 개념적 핍박이 꽤 강도높게 실현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믿음 때문에 상징적이 아닌 문자적으로 법정에 서게되고, 고소 당하고, 징역을 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현혹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이제 디지털 시대는 목소리도 똑같이 복사하고, 얼굴도 똑같이 복사합니다. 내가 하지 않은 말을 내 얼굴에서 내 목소리로 나오게 할수 있는 시대입니다. 어쩌면 무엇이든 조작이 가능한 시대가 된것입니다. 거짓뉴스가 판을 치고, 한 나라의 대통령의 얼굴과 목소리까지 도용되는 그런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신을 바짝차리고(9절), 끝가지 견디는 사람(13절)이 되야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세상에 전해야합니다. (10절) 이것이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가 지녀야할 모습입니다. 성령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지켜주실 것입니다. 말하게 하실 것입니다. 강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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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법학자들에게 하는 경고가 아니고, 성도들에게 율법학자를 조심하라고 하는 경고입니다. 인사받기 좋아하고, 인정받기 좋아하고,높은 자리 좋아하고, 거짓말하고, 빼앗는 ‘율법학자’에게 바른 소리해봐야 듣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싸우자고 달려들고, 죽이려고 달려들것입니다. 실제로 그래서 수많은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 제사장들이 예수를 못잡아 먹어 안달이었습니다.

    오늘날 ‘먹사’ 들도 별반 다를게 없습니다. 목양에는 관심이 없고, 먹고 사는데만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목사’라고 불러줄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목회자 전형의 외형’을 갖춥니다. 사람들이 인식하고, 찬양하고, 높여주고, 좋아해주면 그렇게 행복해 합니다. 가는곳마다 상석에 앉습니다. 보여지는 기도, 보여지는 신앙에만 관심이 많습니다. 실상은 그냥 ‘종교 사기꾼’입니다. 그들에게 잘못하고 있다고 알려주면 싸우자고 달려듭니다.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모든 성도는 이처럼 ‘잘못된 영적 리더’를 조심해야합니다. 분별해야합니다. 과거 서빙고(온누리)에서 청년들과 함께 모임을 하고 있는데 한 성도님 한분이 방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나이가 상당히 있어보이던 성도님인데,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기 청년!! 이리 와서 빨리 의자좀 날라요! 밖에 사람들 오는데 앉을 자리가 없어 빨리!!” 그러자 모임을 하고 있던 저는 약간 어정쩡한 모습을 이래야할까 저래야할까 순간 멈짓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한번 그분이 서두르며 말했습니다. “무슨 청년이 이렇게 굼떠?! 빨리 안움직여?!” 그때 옆에서 같이 모임을 하고 있던 한 청년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분 청년 아니고 전도사님인데요?!" 그 말을 듣는 저는 왠지 어깨에 약간 자신감과 힘이 들어가는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성도님을 보는데 그 성도님이 대수롭지 않은듯, 아무런 놀람 없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전도사면 뭐? 어르신들 이렇게 서있고, 다들 불편한데 그냥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의자 다 날라야하나? 전도사면 더 날라야하는거 아닌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맨날 앉아 있고, 도움 받고, 섬김 받고, 사랑받고 하니까 해야할 일도 까먹고 엉덩이만 무거워졌던 것입니다. 허울에 '전도사' 새겨놓고 왠지 '성도님'보다 높은 사람이라도 된것마냥 교만했던것입니다. 참 비수같은 깨달음이 있었던 날입니다.

    리더는 거짓된 리더가 되지 않도록 경계하고 또 조심해야합니다. 팔로워는 분별하고 따라갈수 있어야합니다. 안타깝지만 갈수록 '삯꾼'이 더 많아질것 같습니다! 진짜 모두모두 경계하고 조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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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 참 짓궂습니다. 뭘 그렇게 헌금함 맞은편에 앉아서 헌금함에 돈 넣는것을 보고 계셨을까요? 우리 간혹 결혼식장 가서 축의금 내려고 하는데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혹은 옆에 서있는 사람이 액수 볼려고 하면 뭔가 좀 불편하곤 하잖아요? 예수님 헌금함 옆에 우연찮게 앉아계신게 아니고 헌금함에 돈 넣는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헌금'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에 관심이 많으신것이죠! 주님께 드리는 인생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누군가는 '많은 돈'을 드립니다. 누군가는 '두렙돈'을 드립니다. 실제 예수님이 헌금함을 보고 있을때 일어났던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일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시작하셨습니다. "저 부자의 많은 돈 보다, 저 여인의 두 렙돈이 훨씬 크다!"

    예수님은 우리의 '진심'으로 헌신의 무게를 재십니다! 예수님은 절대기준이 아닌 상대기준으로 우리의 헌신을 인정해주십니다. 헌신은 해야합니다! 주를 위해 헌신하는것은 예수께서 주목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를 위해 헌신할때 이 두가지를 기억해야합니다. 1) 돈, 재정, 형식, 크기 보다 중요한것은 진심입니다. 2) 꼭, 무조건 많이(?) 해야할 필요없습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내 속까지 다 아십니다. 그러니 내게 주신것 안에서 최선으로 드리면 됩니다. (예수님은 과부에게 한 달란트 헌금하라고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헌신하되 진심으로 헌신하고, 내게 주어진것 안에서 최선으로 헌신하는, 본질적 헌신을 주님 앞에 드리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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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입니다! 이는 친히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신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다. 십계명도 결국 1-4번은 ‘하나님 사랑’으로 귀결되고, 5-10번은 ‘이웃사랑’으로 귀결됩니다. ‘독생자의 성육신’도 결국은 사랑의 결과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도 사랑의 결과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 자녀 삼아주신것도 사랑의 결과물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13:34)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하는 이것이니라”(요15:12)

    ‘사랑하라’라는 명령 앞에는 항상 겸손해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것 같은데 막상 이 명령 앞에 나 자신을 세울 때마다 부족한 사랑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예수님의 이 대답을 듣고 나서 “그 뒤로는 감히 예수께 더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34절) 이런 반응이 나온건지 모릅니다. 모두 마음한켠이 숙연해 진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의 무게감 앞에서 한층 생각들이 깊어졌을지 모릅니다. 각자가 실천하고 있는 사랑을 점검하는 고요한 시간을 보냈을지 모릅니다.

    사랑하며 사는 중에도 끊임없이 ‘나는 지금 사랑하고 있는가?’ 자문해야합니다! ‘나는 충분히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점검하며 실천하는 하루하루를 살아야합니다. 아내와 자녀와, 성도와, 이웃과, 특별히 우리 하나님께 매일 사랑으로 고백하고, 실천하는 삶이 되길 결단해봅니다! 가장 중요한 계명인만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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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는 듣는자들이 감탄하라고 한 얘기는 아닙니다. 그들의 속셈을 훌쩍 뛰어넘으시는 능력의 하나님임을 보여주시려고 한 말도 아닙니다. 과시하기 위해서, 증명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는 일종의 경고 입니다! 예수님의 지혜와 권세를 통해 그들의 완악함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감탄합니다. 이들은 감탄 할것이 아니라 회개했어야 합니다. (솔직히 예수님의 이 대답이 감탄이 나올만한 말이긴했습니다) 예수님은 감탄을 위해서 이 말씀을 주신게 아닙니다. 경고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메세지 앞에서 감탄하고 놀랄것이 아닙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내용의 날카로움과, 지식과, 해박함과 통찰에 감탄할 것이 아니라 분별하고 회개해야합니다. 감탄이 나를 변하게 하는것이 아니라 수용과 변화, 회개와 결단이 나를 변하게 하는것입니다.

    오늘 예수를 방해하는 이들은 바리세파사람들과 헤롯당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엄청난 답볍을 듣고 감탄했습니다. 그러나 감탄으로 끝났기 때문에 이후에도 계속 예수님을 방해하고, 괴롭히고, 트집잡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감탄할 만한 메세지를 들었다면 이제 수용하고 회개하고 변화해야할것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자나, 설교를 듣는자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변해야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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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이 중요합니다. 부활 이후의 얘기를 묻고 있는 자들은 애초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파 사람들” 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이 예수께 질문하는것은 이것입니다. “일곱형제가 죽고, 다시 살고, 그럼 형수는 누구의 아내입니까?!? 이것보세요! 말도 안되잖아요! 그러므로 부활은 없습니다! 죽으면 그냥 거기서 끝인거예요!” 사두개파 사람들은 예수께 부활이 없다는 것을 이 예(질문)를 통해서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1) 일단 부활후 사람들은 너희들이 생각하는것처럼 결혼하고 그렇게 사는것은 아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사람의 하나님이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을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미 죽은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을 소개하시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산사람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분이 죽은 이들의 이름을 붙여 자신을 설명한 이유는? 그들이 죽었었으나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부활이 있다는 증거다!

    성경은 일관적으로 부활을 선포합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믿지 않는 기독교는 존재 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영원히 사는 자들입니다. 부활을 믿는 자들은 오늘 내게 주어진 삶을 의미있게, 최선을 다해, 선하게 살게됩니다. 이 인생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부활신앙으로 살아야합니다.

    부활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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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새로운 장소에 공사가 시작됐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 계획할수도 없었던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기도가 너무 필요해서 최대한 많은 분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기도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분들이 격려와 축하 메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정목사 너무 축하해요!” 그런데 그런 축하의 메세지와 함께 이런 메세지도 많이 왔습니다. “정목사 참 대단해!! 훌륭해!”

    이 말을 듣는데 두려움과 불안함이 엄습했습니다. 이런식으로 연락을 주시는 분들에게 말끝마다 “아닙니다!” 거부하고 거절하는것도 오히려 교만해 보일까봐, 혹은 형식적으로 보일까봐 그냥 감사히 듣고만 있었는데 여전히 마음은 너무 불편했습니다. 이 모든것이 내가 이뤄낸 일도 아니며, 내가 영광을 누리고 칭찬 받을 일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 일이라면 극도의 불안과 스트레스로 이미 쓰러졌을지 모를 일입니다 ㅋ)

    그러나 이 모든것을 알면서도 솔직히 마음 한켠에는 이러한 칭찬을 듣는게 기분이 좋은것도 있었습니다. 영광을 누리고 인정을 받는게 왠지 지난 시간들을 보상받는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내가 누려도 되는거겠지? 이정도의 칭찬은 누려도 되는거겠지?’

    아닙니다! 단언컨데 아닙니다! 욕심은 무섭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1:15)

    분명히 ‘포도원과 소출’은 포도원 주인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농부들은 포도원 주인이 소출을 달라고 하면 줘야합니다. 내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욕심 부리면 안됩니다. 강탈하면 안됩니다. 욕심에 지면 결국 때리고, 빼앗고, 죽이기에 이르는것입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것입니다. 영광도 그분의 것입니다. 찬양도 그분의 것입니다. 욕심 내지 않겠습니다. 욕심에 함몰되면 예수도 배신해버리고, 무시해버리게 됩니다. 이런 저런 죄들에 휘둘리게 됩니다. 모든것이 주님의 것임을, 주께서 달라 하실때 기쁨으로 드려야 하는 것임을, 주님이 주인이시라는 것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저 바우교회를 위한 ‘성실한 농부’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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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의 한계를 가늠할수 있을까요? "이 산에게 명해 바다에 빠지라!" 말하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이뤄진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요? 너무 허무맹랑해서 이런건 영화나 소설에서도 보지 못한 일입니다. 영화 보고, 글을 보면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들을 그려 냅니다. 번개도 치게하고, 땅도 갈라지게 하고, 불도 나게 하고, 터트리고 난리도 아닙니다. 그런데 에베레스트 산 같은거 통째로 떼어다가 바다에 들어가게 하는거? 그것도 손짓이나, 힘이 아닌 그냥 말로 하는거? 이런건 정말 본적도 없는 일입니다. 감히 상상이 안되는것이죠.

    예수님 시절에 이 말씀은 더더욱 상상불가의 말씀입니다. 불가능의 영역을 뛰어넘는 신비로운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믿음'이라는 단어를 이런 '허무맹랑'해보이는 말에 가져다 붙이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능력에 있어서 그 한계성을 허무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산에게 명하는 나의 믿음의 언어에 능력이 있는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안에 능력이 있는것입니다.

    결국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나를 믿고 의심하지 않는것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세상도 '믿음'을 말합니다. 자신을 믿으면 다 할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나를 아무리 믿어봐야, 나를 아무리 의심하지 않는다고 해도 안되는건 안됩니다. 나라는 존재는 모든 면에 있어서 철저하게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의심하지 않으면, 우리가 명령할때 심지어 '산'도 주섬주섬 주변을 챙겨 바다로 들어가게 되는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께 근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건강한 믿음은 하니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믿으면서도 두려운 이유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믿고, 이웃을 믿고, 상황을 믿고, 돈을 믿고, 상황을 믿고, 지위를 믿고, 능력을 믿고, 지식을 믿고, 경험을 믿어서 일수 있습니다. 그러면 믿어도 맨날 불안하고, 믿어도 맨날 안될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배워야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불가능은 없습니다!

    이쯤되서 교회 개척 얘기를 도저히 안할수가 없습니다. 어제 교회 개척 1년이 조금 넘어 새롭게 공사되어지는 장소를 보게되었습니다. 수많은 감정이 밀려오는 그 순간에 가장 먼저 인식되어지는 감정은 바로 두려움 이었습니다. 참 놀랍죠? 은혜와 기적의 현장에서, 그 많은 감격중에 제가 느낀 첫 감정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이게 잘될까? 끝까지 아무 문제 없을까? 내가 이 일을 잘 감당할수 있을까?'

    그러나 이내 이러한 '불신의 유리창'을 강렬하게 깨부수며 '믿음의 불덩이'가 제 마음속에 날라 들어왔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 안에 진행되고 있다!' 아멘 입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제 능력으로, 제가 가진것으로, 제 계획으로 된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했고, 기적과 역사는 하나님께서 행하셨습니다. 제게 의심은 사치입니다. 하나님은 '개척'이라는 산을 명해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 빠지게 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전능하신데 안될일은 없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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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주석가와 주석책이 주목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무화과 나무의 특성입니다. 무화과 나무는 보통 6월에 첫열매, 그리고 8월부터 10월 사이에 두번째 열매를 생산하게 됩니다. 먼저 잎이 무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3-4월이 되면 이미 그때부터 6월, 완연히 익을 열매를 준비하며 ‘먹을만한 열매’가 풍성한 잎 속에서 발견되는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유월절에 멀리서 이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게됩니다. 이때가 4월쯤으로 예상됩니다. 예수님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그렇게 잎이 무성한 무화과 나무에서 ‘먹을만한 열매’를 기대하며 다가가셨습니다. 그런데 보기와는 다르게 무화과 나무는 열매가 없었습니다. '잘 익은 열매'야 시즌이 아니니까 없을 지라도, 무성한 잎을 보아서는 먹을만한 열매 덩어리는 충분히 있을 법 한데 그런 열매조차도 없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이 시기에 잎 속에 열매덩어리가 없다면 6월에 열매를 맺지 못할 확률이 많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일이 이쯤되자 예수님은 ‘거짓말하는 무화과나무’에 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저주 하셨습니다. 마치 열매가 있을 것처럼 잎은 무성한데 가까이 가서 보니 실상은 비어있는 나무였던 것입니다. 보이는것과 진의가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후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행하시는 이야기와도 사뭇 연결되어 보입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성전에는 ‘온전한 제물’을 구비해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자 하는 온전한(?)신앙인들로 가득차있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들의 내면을 보면, 자신들이 집에서부터 ‘온전한 제물’을 가져오기 힘드니 편하게 성전안에서 구매를 한것입니다. 예배의 본질은 진심으로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흠없는 제물'에 진심의 방점이있는게 아니라, 흠없는 제물을 구분하고, 준비하고, 정성스럽게 가져와서 드리는 모든 과정이 곧 진심의 예배가 되는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히려 ‘진심’은 버리고 ‘흠없는 제물’ 이라고 하는 표면적인 형식만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여지는 것과 진의가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이처럼 멀리서보면 (잎만 무성한) 괜찮은 신앙, 겉으로 드러나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신앙, 종교적 행위와 형식만 가득한 신앙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거짓신앙은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꾸짖으십니다. 진짜 중요한것은 ‘열매’ 맺는 신앙이고, 수고함으로, 진심으로 ‘온전한 제물’을 준비하는 신앙입니다.

    기도부탁:

    드디어 오늘 새장소에 공사가 시작됩니다. 이 일을 이뤄가시고 계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모든 공사가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안전하고, 신속하고, 정확하게 진행되도록 기도해주세요!

    바우교회의 새 성전은 진심으로 예배하는 진짜 크리스천들로 가득한 교회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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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탄적 없는 새끼 나귀’는 아직 준비가 안된 나귀를 의미합니다. 준비가 안됐으니, 아직 새끼니까 아무도 탈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언의 성취를 위해 그 ‘새끼 나귀’를 찾습니다. 그리고 겸손의 입성을 시작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보면서 약속을 성취하시는 성실한 예수님을 배울수도 있고, 겸손히 입성하시는 낮추시는 예수님의 마음도 배울수 있습니다. 성실과 겸손 입니다.

    그러나 이에 덧붙여 이런 배움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준비되지 않은자, 연약한 자도 영광을 위해, 당신의 일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역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지 못하는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능력으로 일하지 않고 그분의 부르심을 따라 일합니다.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실제로 이 새끼 나귀는 예수를 처음 태우고 어디로 가야할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옆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나귀에게 연결된 줄을 잡고 방향을 잡아주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할수 있습니다! 주께 맡기고 순종하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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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새끼 나귀를 끌고 오라고 말씀하시며 이런 말씀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쓰고 제자리에 갖다 놓겠다’고 하라!” (3절)

    예수님께 쓰임받은 새끼나귀는 다시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이제는 나귀로써 해야할 일을 시작하게 될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은 이와 같이 특별한일도 있고, 시기에 국한된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돌아가야하는 나귀처럼, 일상으로 돌아가서 해야만 하는 평상적인 일도 있습니다. 모든일, 모든 시기, 모든 일상을 성실하게 감당하는게 부름받은 성도의 자세인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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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산나! 복이 있으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여!” (9절)

    예수님 살아생전 가장 크게 영광을 누린 사건입니다. 십자가 부활 후에도, 승천에도 사실 이런 직접적인 ‘영광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것을 이미 아셨을 예수님은 그럼에도불구하고 ‘영광’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변화산 사건에서도 보았지만 예수님은 ‘영광’에 현장에 머물려 하지 않으십니다.

    많은 이들은 ‘영광’에 하루라도 더 머무르려고 합니다. ‘견물생심’이라고 원래 생각이 없다가도 눈에 보이면 욕심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사람들의 환호와 영광의 찬양을 들었을때 충분히 (인간적으로) 흔들릴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광보다는 사명이었습니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천로역정’을 걷고 있고, 그 와중에 맡겨진 ‘사명’이 있습니다. 가는 도중에 ‘영광’ 때문에 방향을 잃거나, 안주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래서 수년전 ‘개척’을 기도했던것 같습니다. 현재의 영광이 아닌, 앞으로의 사명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죠!)

    앞으로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님 앞에 갈때까지, 사명을 완수할때까지 안주는 없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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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돕는 사람과 돕지 않는 사람!

    “조용히 해라!”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그 장님을 예수께로 인도해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때문이든, 자원하는 마음이든, 가족이든 상관없습니다. 예수님께 나오는자를 돕는게 중요합니다)

    예수를 부르고, 예수께로 나오는 것을 방해하고, 막는 자는 잘못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러고보니 예수님께 나오는 아이들을 막는 사람, 질병에 걸린 자를 막는 사람, 귀신들린자를 막는 사람, 죄인을 막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때문에 예수님 오신것인데 계속 막는것입니다.

    또 반대로 중풍병자를, 장님을, 앉은뱅이를, 죄지은자들을, 귀신들린자들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오는것을 돕고 막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잘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오는자 막지말고, 그리스도께 올수있도록 인도하고, 필요하면 도와주는 신앙인이 되야겠습니다. (당연한 얘기인데 요즘에도 교회안팎에서 예수께로 나오는 자들을 꾸짖고 막는 자들이 너무 많다보니 여전히 이 말씀이 필요한듯합니다.) 그리스도께 나오는자, 막지마세요!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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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그 즉시 그는 눈을 떴고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습니다. 예수님 분명히 “가거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단어의 원어뜻은 보이는 그대로 입니다.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눈을 뜬 후에 떠나지 않고 따라 나섭니다.

    구원받은 자는 예수를 따라 살아야합니다. 구원받고 그 기쁨에 젖어 방황하는 인생길로 내달리는것 아닙니다. 구원 받아놓고 탕자가 되서는 안됩니다. ‘칭의’를 받았는데 ‘성화’의 걸음을 때지 않고 떠나버리는것, ‘사명’의 자리를 지키지 않고 떠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떠날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길을 따라 나서야 합니다. 삶으로는 성화의 삶을, 사명으로는 예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나서야 할것입니다.

    기적과 은혜만 누리고 사라지는 기독교인 말고, 성화와 사명의 삶을 사는 제자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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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상이몽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며 십자가를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보며 ‘영광의 자리’를 생각합니다.

    소위 말하는 크리스천들의 ‘신앙의 목적’이 이처럼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목적과 다른경우가 많습니다. ‘십자가’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영광’에만 관심이 많은 것입니다. 섬김보다는 섬김 받는것에 관심이 많은 것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이용하려 하는걸까요? 그분을 섬기려고 하는걸까요? 정말 ‘십자가’ 때문에 따르고 있는것이 맞을까요? 아니면 나름의 다른 목적과 이유가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이미 주객이 전도되어 ‘사명’에는 관심이 없고 ‘축복’에만 관심이 가득한 신앙인인줄도 모르겠습니다.

    “너희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다.” 신앙인의 걸음은 십자가를 향해 가는 걸음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걷는 걸음입니다. 예수님이 가신길을 따라가는 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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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야고보와 요한을 정죄할 자격같은건 제게 없습니다. 저도 ‘영광의 자리’ 좋아합니다. 예수님이 앉혀만 주신다면 마다하지 않을듯 합니다. 아니 환영할듯 합니다. 그러니 야고보나 요한을 손가락질 할 자격같은 것은 없습니다. 다른 제자들보니 그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요한과 야고보의 사건을 들은 다른 제자들은 분노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얘기하셨는데 ‘높은 자리’를 얘기한 요한과 야고보의 무례함과 무공감에 분노한것이 아닙니다. 자신들보다 선수를 쳐서 분노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참 ‘영광의 자리’ 좋아합니다. 영광에 마치 꿀이라도 발라놓은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니 영광에 집착한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역사를 봐도 영광에 집착한 나라의 치리자들이 서로 싸우고, 죽이고, 파괴했습니다. 영광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올라간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그들은 끊임없이 죄를 지은 것입니다.

    ‘영광’을 취하고 싶은 욕심이 쉽게 마르지 않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광명이 내게 비쳐 내 안에 있는 영광을 추종하는 ‘썩은 우물’을 말려버리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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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을 보고 있자니 저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저는 어릴적부터 교회 안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집, 학교, 교회말고는 가는곳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름 열심히 말씀을 지키며 살았던것 같습니다. 정말로 죄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나름 그래도 경건과 거룩을 지키며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만났던 이 청년이 아마 이런 생각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이 사람의 인생을 아시기 때문에 그를 ‘사랑스럽게’ 보셨습니다. 이 단어를 보니까 사랑하다, 아끼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마음을 이쁘게 보신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족한 한가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의 경우 “가진것을 모두 팔아 나눠주고 오라!’ 였습니다. 즉 소유물이었습니다.

    신앙의 여러가지 면에서 ‘사랑받을만한’ 인물들이 참 많습니다. 진심으로 율법을 넘어서는 경건과 거룩을 살며, 성실하고, 충성을 다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중에도 이렇게 포기하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는 신앙의 장애물들이 있을수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그 사람의 단 한가지 약점을 지적하신것처럼, 우리에게 있는 그 약점을 드러내실때 이 청년처럼 근심스럽게 떠나갈것이 아니라 그것마져도 내려놓을수 있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주님보다 더 소중한것이 있으면 주를 위해 살기 힘듭니다. 주님보다 더 믿는게 있으면 그것은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 내려 놓고 주님을 따를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다 내려놓고 주님을 따라야겠습니다.

    2

    예나 지금이나 가진것에 집착하면 하나님을 믿기 어렵습니다. 돈은 너무 쉽게 사람을 통제합니다. 돈이 주는 평안의 유혹이, 화려함의 유혹이, 편리함의 유혹이, 풍족함의 유혹이 여간 강력한게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돈으로 안되는게 어딨어?”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얼마면 돼! 돈으로 사겠어!” 라는 말을 하는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당연히 돈으로 못삽니다. 오히려 돈이 많아서 돈에 휘둘리면 구원과는 더욱 멀어집니다.

    "돈을 사랑하지 마세요. 돈에 집착하지 마세요!" 말해봐야 거의 소용이 없습니다. "돈을 나누세요. 거룩하고, 이타적으로 쓰세요!" 말한다고 해도 이게 쉽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하물며 “돈 다 놓고 주를 따르세요!” 라고 한다면 대부분 거절합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가진것을 다팔아 성도의 필요를 채우고 그는 주께 헌신합니다. 삭개오도 예수님 만나자 다 갚고, 다 나눠주고 그렇게 주님을 따릅니다. 어제 주일설교 본문에서 보았던 초대교회 성도들도 자신의 소유를 팔아 나누었습니다. 할수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고 건강하게 사용할수 있습니다.

    “누구나 다 돈을 사랑합니다! 누구나 다 돈에 욕심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 돈에 집착합니다. 돈이면 다 할수 있습니다. 돈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너무 흔해서 진리같이 받아들여지는 이 말들 다 거짓말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넘쳐납니다. 돈에 욕심부리지 않고 오히려 나눔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모든 일을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지혜롭고 성숙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돈 없어도 행복하게 자족하며 사는 사람들도 어디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돈에 대한 세상의 거짓말에 속지 맙시다. 내 안에서 만들어 내는 거짓말에 속지 맙시다. 돈에 욕심부리고, 집착하고, 사랑하는것에 대한 합리화를 멈춥시다. 어찌됐든 돈으로는 하나님의 나라 못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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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 이혼이 가능한지에 대해서 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이 얄팍한 수에 넘어가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의 '완악함'을 드러내십니다. 아마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해 많은 이들이 굉장히 뜬금한 상황을 마주했을 것입니다.

    당시 많은 이들이 '모세의 율법'을 명분삼아 안해도 될 이혼을, 하지말아야할 이혼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원론적으로보면 '부부는 하나' 이기 때문에 이혼이 불가한 것이지만 그들은 조그만 빌미가 생기면(없는 빌미도 만들어) "이유가 있으면 모세가 괜찮다고 했어! 율법이 괜찮다고했어!" 라는 명분으로 이혼을 한것입니다. 어쩌면 적법한 이유가 아닌 육체의 욕망을 쫓아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재혼하려고 한 이혼일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이혼'을 중심으로 많은 이들의 마음이 완악했습니다. 이래저래 깨어진 마음들, 육신의 욕망과, 폭력, 음욕으로 가득한 마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시험하는 자들에게 오히려 이런 감춰졌던 죄를 지적하심으로 상황을 역전 시키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실제로는 분명히 죄이고, 하지 말아야하는 일인데, 나름의 명분을 찾아 합리화 하려고 하는 태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하시는데도 세상의 법에서 그 명분을 찾고, 세상의 문화와 유행에서 그 명분을 찾아 자신의 죄를 합리화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합리화 되고, 법의 태두리안에 있고, 사회가 용인해도 예수님은 "너의 마음이 완악해서 그렇다!" 라고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마음을 살펴야합니다. 가장 깊이 있는 동기의 순수성을 확인해야합니다. '완악한' 나의 마음을 회개해야합니다. 나의 죄에 대한 '명분찾기' 습관을 버려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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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된 ‘주인의식’은 자칫 특권의식에 빠지게 합니다. 예수님은 모두를 위해 이땅에 오셨습니다.누군가에게 독점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소위 말하는 ‘오픈소스’라는 것이 있습니다. 누구나 접근해서 사용할수 있는 것입니다. 유튭에 영상을 올리다보면 음악이나 영상의 저작권이 모두에게 자유롭게 사용될수 있게 풀려있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썼다고 남이 쓰지 못하게 하면 저작자는 당황스럽습니다. “그거 제가 쓰도록 허락한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쓰면 쓸수록 곡이 알려지고 제가 알려지니 오히려 더 좋은 일입니다!” 라고 저작자는 말할 것입니다.

    제자들처럼 예수를 사랑하고, 사명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는 좋습니다. 그러나 자칫 신앙의 우월주의, 특권의식, 잘못된 주인의식에 빠져서, 같은 크리스천들끼리 경쟁하고 싸우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은 나만 전해야하는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이 꼭 나를 통해서만 발현되야 하는것도 아닙니다.

    목사들도 (저같은 사람들) 더욱 조심해야합니다. 성도들의 능동적이고,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사역과 동참에 제동을 걸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잘하고 있는데 막을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격려하고, 축복하고, 방향을 잡아주고 동참하는 것이 옳바른 태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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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일'에 대한 강박이 정작 소소하지만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물한잔'이라도 상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은 언제나 '거대한 일'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대하고, 빛나고, 인정받고, 드러나는 일만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일도 있겠지만, 수고하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에게 물한잔 주는 일도 사실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해야하는 일입니다.

    실제 그런 경험을 했던적이있습니다. 저는 태생적으로 기관지가 너무 약합니다. 그러다보니까 목 상태가 항상 안좋습니다. 그래서 설교중에 갑자기 목 상태가 비정상적이 되면 물이 급격하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로 물을 잊지 않고 챙겨가는데 간혹 사람인지라 잊을 때가 있습니다. 또 하필 그런날 중간에 기관지가 말라버리면 정말 난감하게 됩니다. 도무지 말을 이어갈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기도 하는데요, 바로 그때 물을 가져다 주는 영성(?)있는 성도님들이 계십니다. 덕분에 설교를 다시 잘 이어가고 마칠수 있게 됩니다. 설교하는 저도 주님의 일을 하는것이지만, 제 입장에서는 용기내어 물을 가져다 준 그분이 계셔서 주님의 일을 할수 있었던것이니 그분도 주님의 일에 동참하신 것입니다.

    별거 아닌 일이 별거입니다. 중요합니다. 누군가는 해야합니다. 큰일도 중요하지만 작은 일도 중요합니다. 신앙인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때 중요성과 크기를 생각할것이 아니라 해야할일, 눈에 보이는 일부터 놓치지 않고 해나가야 하겠습니다. 조그만 일이라도 잘 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고 상주시니 더욱 힘이 납니다. 무슨 일이든 크기를 논하지 않고 주의 일을 열심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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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을 걸려 넘어지게 하든,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든, 그게 무엇이 되었던지 간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것은 무조건 제거 해야합니다.

    127시간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실제 일어났던 일을 영화화했습니다. 한 형제가 아무에게도 연락없이 여행을 가서 골짜기를 뛰어다니다가 떨어지게 되고, 그 사람 위로 돌이 떨어지면서 계속 사이에 자신의 팔과, 돌이 같이 끼어버리는 사고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127시간이라는 시간동안 살아있지만 팔이 돌에 깔려 골짜기에 끼어버렸기 때문에 옴짝달싹못하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는 이제 결정을 해야합니다. 살기 위해 자신의 팔을 직접 잘라내야 할것인가? 아니면 그 고통과 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죽어야 하는것인가? 그는 결국 직접 자신의 팔을 잘라냅니다. 그렇게 골짜기를 벗어나서 죽기 직전까지 구조를 찾아 헤매던 청년은 결국 발견되어 구조되게 되었습니다.

    죄짓는 팔? 성경은 잘라내라고 합니다. 누군가? 혹은 어떤 것이 나를 죽음으로, 영원한 멸망으로 인도하고 있다면 반드시 끊어내야합니다. 두렵고 아파도 잘라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삶에서 시험들게 하는 모든것들을 과감하게 잘라내야합니다. 단호하게 잘라내야합니다. 유혹도 이겨야하고, 두려움도 이겨야 합니다. 변명도 이겨야합니다. '걸려지게 하는 모든것, 모든이'를 절연하길 도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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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적 ‘영재테스트’ 이런거 한번 받아본거 같습니다. 그런데 처참하게 실패했습니다. 당연한게 저는 ‘영재적 두뇌’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산수도 그닥 잘하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딱 시험 보고 나서 영재학원에서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침묵이 곧 “당신이 아이는 여기와 어울리지 않으니 다른 일반 학원으로 가세요!”라는 말이었습니다.

    캐나다 처음 유학 갔을때도 고등학교에서 영어테스트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가 처참했습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제가 배정된 반을 가서 보니 완전 기초반이었습니다. 참담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쩔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기준에 따른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세상은 이처럼 기준미달, 함량미달에게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를 쉽게 투자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기회를 잘 주지 않습니다. 오늘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영적인 ‘영재교육’을 해주셨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다른 일행들을 따돌리는(?) 느낌으로 제자들만을 위한 특별강좌를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자들이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이러한 차별없으신 부르심과 가르침에 항상 감동이 있습니다.특별할것 없는 제자들도 구분하지 않으시고 부르시고 가르치시고 준비시키는 하나님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일관적이셔서 오늘날도 같은 원칙으로 부르시고 일하십니다. 그 증거가 바로 접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영재’만 불러서 특별히 교육하시고 사용하신다면 저는 절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같은 사람도 부르셔서 계속 가르치시고, 양육하시고, 반복하셔서 부르심의 일을 감당케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을 보면서 한켠에는 답답함도 있었지만 한켠에는 저와 같은 동류들 같아서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결국 제자들은 가룟유다만 빼면 나중에 모두 제 몫을 해냈습니다. 결국 더뎠지만 배웠고, 성장했고, 일했던 것이죠.

    부족한 저를 부르시고, 곁에 두시고, 가르치시고, 반복하시고, 인내하시고, 끝내 만들어 사용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열심을 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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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좋게만 보기에는, 미성숙하다라고만 보기에는 오늘 제자들의 반응이 실망스러운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알아듣지도 못했고, 질문하는 열정도 없었고, 거기다가 ‘누가 큰자가 될것인가?’하는 비본질과 욕망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사역을 하면서도 이런 목회자 선,후배,동기,지인들에 대한 얘기를 듣습니다. 어쩌면 제 마음속 깊이 저도 같은 부류의 사람일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말씀, 가르침, 복음전도, 희생, 용서, 배려, 화평 등 신경쓰고 해야하는 것을 다 헤아리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여 행하기에도 짧은 인생인것입니다. 그런데도 온통 내가 누리게 될 영광에만 관심이 자꾸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은 들어도 귀에도 안들어 옵니다. 이해 안되도 상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거에 별로 무관심하고, 들어도 변화가 없고, 반응이 없는 이유는 그 시간들마다 온통 내 생각만, 내 유익만, 내 욕심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수도 있습니다. 원래 비워야 채워지는 법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볼때마다 내 마음을 철저하게 비워두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큐티도, 설교도, 묵상도, 기도도 비워진 마음으로, 열린 귀와 열린 마음으로 서야 합니다. 귀는 닫고 내 할말만 하는 미성숙한 신앙인으로 사는것을 멈춰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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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돼야하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돼야한다” (35절)

    이 아름다운 말씀을 오해하고 작위적으로 해석해 적용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겸손한 사람이 되는게 아니라, 높은 사람이 되기 위해 겸손을 이용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높아지고 싶으니 일단 낮아져야겠다?” 이렇게 오해하니까 국회위원들이 시장상인 자켓입고, 시장에 가서 상인인척 합니다. 자기가 ‘일반인’ 혹은 ‘낮은자’라는 이미지를 주는것입니다. 진짜 낮아져야 높임받게 되는 것인데, 낮은척으로 높아지려는 것입니다.

    거짓 겸손은 이제 그만해야합니다. 교만의 도구로 겸손을 사용하고 있다면 최악입니다. 그 겸손은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거짓말 겸손은 반드시 들통나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 이 말씀을 하실 때 “높아질수있게 이제 좀 낮은 자로 살아!”라고 말씀하시는게 아닙니다. 그저 낮은자로 진짜 섬기며 살라는 것입니다. 섬기는자, 낮은자는 우리 모두를 향한 부르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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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에게 두가지가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었고 (19절) 기도가 없었습니다. (29절)

    신앙은 방법도 아니고, 흉내도 아닙니다. 논쟁도 당연히 아닙니다. 인생의 답을 얻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것은 믿음과 기도입니다.

    여전히 이런 일들은 요즘 교회 안에서도 많이 일어납니다. 믿음도 기도도 없이 그저 외형적 접근만 합니다. 방법으로 접근하고, 흉내냅니다. 기도의 흉내, 신앙의 흉내인것이죠. 누군가는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가라!"라고 명령하는데 귀신이 나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기도의 마음으로 선포하는게 아니라 '주문'을 외운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성경에 이런 사건도 기록해 놓았습니다.

    [행19:14-16, 우리말성경]

    14 유대 사람 대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런 일을 했습니다.

    15 그러자 그 악한 영이 그들에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알고 바울도 안다. 그런데 너희는 누구냐?"

    16 그러고는 그 악한 영에 빠진 사람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그들 전부를 힘으로 눌러 이겼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발가벗겨진 채 피를 흘리며 집 밖으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유대 사람 스게와의 아들들은 흉내내다가 큰코를 다쳤습니다. 이와같이 많은 목사들도 영성을 키우는게 아니라 영성있는 목사들을 흉내내는데 급급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유명 목사님의 말투와, 억양을 훈련한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개인적으로 반대입니다. 그 시간에 성경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기도하고, 믿음으로 선포하는게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흉내내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믿음과 기도로 걷는 자들이 되야합니다.

    많은 성도들은 믿음의 기도를 흉내내고, 능력을 흉내내지만 본질은 비어있습니다. 예배의 진심을 흉내내지만 실제로는 전혀 예배하지 않고 있기도 합니다. 기도의 언어는 술술나오는데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니 성도가 능력을 발현하지 못하고, 교회가 능력을 발현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는 능력인데 교회가 능력을 발현하지 못하니 세상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조소를 날립니다. 그럼 또 교회는 제자들처럼 그들과 ‘논쟁’합니다.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성도와 교회는 믿음과 기도로 반응하고 움직여야 합니다. 어떤 일을 마주하던지 간에 우선 기도입니다. 간절한 기도, 그리고 무엇보다 진정한 믿음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기도했으면 믿음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저도 과거 선교지에서 두어번 정도 귀신을 내쫓는 기도를 같이 한적이 있습니다. 믿음없이 뒤켠에서서 두려움가운데 기도하는것? 그렇게 해서 절대 될일 아닙니다! 믿음과 기도로 하나님의 능력을 발현하는 통로가 되는 성도요 교회가 되야겠습니다. 우리를 통하여 교회로 나오는, 예수 찾아 신앙의 자리로 나오는 자들이 회복과 치료의 은혜를 누기길 기도합니다.

    믿음과 기도로 삶의 모든 걸음을 마주해야합니다! 믿음으로 기도할때 문제를 넘어서고, 해결하고, 승리하는 자가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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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께서 이 아이에게 들린 귀신을 내 쫓으신후에 잡아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26,27절)

    예수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회복이 참 감격적입니다. 이 아이가 겪었을 인생의 참담함을 다 헤아릴수 없습니다. 내외적으로 경험되어지는 이 심한 '간질증상'의 가시적 발현이 (벙어리라는 증세가) 이 아이를 꽁꽁 묶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망 없어 보이는 이 아이의 인생을 완전 새롭게 해주셨습니다. 아무도 못해주었고, 어쩌면 본인도 그래서 기대할수 없었던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자에게 희망과 소망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영을 새롭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내 안에 더러운 영을 쫓아내주시는 분이십니다. 나를 사로잡고 있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쳐주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일어설수 없을때 내 손을 잡아주시고 일어나 걷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 안에서 건강함을 고백합니다! 주님이 나의 힘이 되어주심을 고백합니다! 주님이 나의 치료이심을 고백합니다. 감사와 찬양을 주님께 올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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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적을 보여주신 예수님이지만 그래도 주로 현실속에서 이러한 모습을 주로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적인 면모 속에서 보여주신 기적들인것입니다. 그런데 소위 말하는 ‘변화산’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은 신비로왔습니다. 영광이 전에 보던 영광과 비교할수 없는 영광이었습니다. 인간의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라뇨! 거기에 더나가 하나님의 음성이 직접 들리기도 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리고는 예수님은 “왜 엘리야가 먼저와야한다고 말한것입니까?” 묻는 제자들에게 “엘리야는 이미 왔다” 라는 신비로운 대답도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에 대한 말씀이셨을 것입니다)

    신앙은 현실적인 부분이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우리의 평상의 삶에 모시고 ‘현실의 뿌리 내린 영성’으로 사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너무 ‘현실적’ 혹은 ‘이성적’ 예수님만 붙들고 살면 그분의 참 모습, 즉 신성을 자꾸 잊게 됩니다. 믿음의 대상으로써의 예수가 아닌, 인자로써의 예수만 인지하게 되는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비의 영역’에서도 역사하실수 있는 하나님을 잊고서 너무 현실에만 적응하는 신앙이 되버리고 맙니다. 결국 이런 신앙은 “하실수 있거든 해주십시오”라는 반쪽(?)짜리 믿음을 갖게 합니다. '힘이 없는', '초월하지 못하는 하나님'을 믿는 촌극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은 초월하시는 하나님 입니다. 세상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능력은 무한하고, 그분의 지혜 또한 무한합니다. 예수님은 시간의 제약에도 매어있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참 신입니다. 현실에 가둬두는 예수 말고, 현실을 초월하시는 예수님을 믿어야합니다. 초라한 예수님 말고 위대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고작 ‘위대하신 분’이 아니고 ‘유일하신 하나님’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막9:23)아멘

    2

    아직 때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께서 메시야임을 모든 이에게 다 드러내시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반복적으로 소문 내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런데 사실 이게 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만약에 알리지 말아야하고, 드러내지 말아야한다면 애초에 말씀하지 않으시고, 안보여주시면 될일 아닌가요? 애초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하느냐?" 묻지도 마시고, 애초에 '변모'한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시면 더 일이 쉬운거 아닌가요? 예수님은 전하지 말라고 하실꺼면서 왜 자꾸 말씀하시고, 자꾸 보여주셨을까요?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찬란한 예수님의 완전한 영광을 보기전에 영광의 파편을 미리미리 보여줌을 통해서 이들의 단단한 마음을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실제로 준비가 없으면 소화가 안되는 일이 많습니다. 듣고도 믿지 못합니다. 보고도 못 믿습니다. 그래서 '거대한일'이 있기 전에는 준비운동도 있고, 예고편이라는것도 있고, 맛보기코너도 있고, 서프라이즈의 힌트도 있는것입니다. 준비되면 수용하기에 한결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실제 그리스도의 복음과 영광이 쉽게 수용되고 소화되지 않는 사람들 많습니다. 주변을 보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많습니다. 십자가 전하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많습니다. 예수님 "신의 아들이야"라고 말하면 절대 못받아 들이는 사람들 있습니다. 느닷없이 마주하는 '영광스런 예수'에 대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복음전도도 이렇게 일종의 '준비운동'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예고편도 필요하고, 맛보기코너도 필요합니다. 전도의 대상이 '딱딱한 마음밭'이면 일수록 더욱 '예고편'을 철저히 준비해야하고, 자주 보여줘야합니다. 예수님의 사랑, 배려, 인내, 용서, 따스함, 공급, 화평, 온유, 영광등을 계속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 전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러한 영광의 편린들이 예수님의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하는데 큰 초석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 구원의 예수를 전하는 우리에게도 이러한 선교적 전략(?)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위대하고 유일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구주로 영접할 수 있도록 '기초작업'을 잘해야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예수님의 영광의 편린을 미리미리 이곳저곳에 흩뿌리듯 계속 잘 보여줘야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자주, 많이, 일상속에서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그들이 완전한 영광의 예수를 마주할 때, 복음속에서 구원의 예수님을 마주할 때, 한결 수월하게 믿음의 자리로 나아오는 일이 일어나게 될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구원의 예고편'을 잘준비하는 신앙인이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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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와 같은 세대라면 ‘농구’ 하면 마이클조던 입니다. 그는 가히 비교대상이 없는 ‘절대농구황제’입니다. (물론 다른 세대들은 동의 안할지도 모르죠)

    마이클조던이 신인이던 시절부터 두각을 조금씩 나타내었고, NBA데뷔 이후 몇년 후부터는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쯤 사람들은 마이클 조던에게 별명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것들이 우리가 잘 아는 ‘에어조던’ 혹은 ‘에어워크’등 입니다. 그러나 그때 (아직 조던이 중견선수일때) “누가 농구의 황제인가?” 라는 오피셜한 질문을 했다면 감히 “마이클조던입니다!” 라고 말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전히 그때 조던과 비견되던, 아니 조던보다 통계적으로 더 훌륭한 스탯을 가진 매직존슨같은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수십년이 지나고 마이클조던이 자신의 커리어를 마무리 했을때 그의 어마어마한 스탯과 농구에 미친 영향력을 기초로 사람들은 주저없이 마이클 조던을 ‘농구의 황제’라고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빛나는 신인시절때 ‘마이클조던이 농구 황제야!” 라고 했다면 다들 “조용히해!! 그런말 하지마 괜히 싸움만 나지!”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이클조던이 농구 황제야!”라고 할때 그다지 싸움이 나지 않습니다. 그가 최종적으로 만들어 놓은 기록과 영향력이 이를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세상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대답에 제자들은 말합니다. “세례요한의 환생, 혹은 엘리야의 재림”이라고 합니다! 그때까지 이미 예수님이 보여주신 놀라운 일이 있으니 충분히 나올만한 이야기였습니다. (이는 마치 마이클조던이 빛나던 초년시절 그 전 세대의 유명 농구선수와 비견되었던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개인적 의견을 묻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성령에 충만하여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메시야입니다!” 라고 선포합니다. (이는 다짜고짜 아직 중견선수인 마이클 조던을 향해 “당신은 농구의 황제입니다!”라고 말한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듣고 베드로는 칭찬하셨을지언정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디가서 그런 소리 하고 다니지 말아라!”

    예수님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당신이 메시야가 맞는데 왜 제자들의 입을 단속하셨을까요? 아직 십자가의 구속 사건을 완성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가 메시야다!”라고 해봐야 싸움밖에 안됩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향한 반감과 적대감을 가지게 되거나, 반감이 더 커질 뿐입니다. (신인시절 마이클 조던이 황제다! 라고 말해봐야 팬들 사이에 싸움밖에 안나는 것이랑 같습니다) 결국 '십자가'로 ‘메시야’는 증명되는 것입니다. (조던이 최종스탯으로 증명한것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자신이 ‘메시야’되심을 결국 증명해 내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니까 승천하시면서는 “가서 전하고 제자 삼아라!” 라고 시원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더이상 감출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에는 이제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에 대한 논쟁의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예수님이 메시야임이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십자가’로 증명하는, ‘신앙의 스탯’으로 증명되는 사명자가 되야합니다. 결국에는 ‘십자가의 삶’으로 최종 증명되야 합니다. 지금 당장 위대한 ‘세례요한’과 비견되는거, “작은 그리스도인이지!”라는 칭찬을 듣는것도 어쩌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처럼 삶으로 끝까지 증명해 내는것이 중요합니다.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는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말하지 않아도 세상이 알아주게 됩니다! (굳이 세상이 몰라도 하나님께서 알아주실 것이니 괜찮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제자들은 전하지 말아야했을지 모르지만 오늘날 우리는 전해야합니다. 십자가 구원이 이미 완성됬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메시야를 전하고 다녀야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우리 자신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완수함으로 ‘사명자’임을 증명해 내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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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도 좀 답답할때가 있습니다. 한 성도님과 한 두시간을 넘게 얘기했는데 그분이 그 긴 시간 대화하고 난 후에 내리는 결론이 제가 말한것과 전혀 상관없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화했으나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경우들입니다.

    어제 주일 저녁 한껏 여유를 부리며 미운오리새끼라는 방송을 보았습니다. 한 연예인이 아버지와 출연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과 하는 대화의 거의 대부분이 비타민얘기였습니다. 아버지 그 얘기 왜하셨을까요? 저는 그 아버지의 그 대화법 속에서 아들을 향한 사랑과 걱정, 관심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반복되는 아버지의 ‘비타민 예찬론’을 진짜 지루해(?) 했습니다. 어쩌면 그 안에 담긴 ‘사랑의 언어’를 해석하지 못해서 였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거짓된 삶을 누룩에 비유하며, 거짓된 신앙을 경고 하십니다. 약간의 상징을 사용하시긴 하셨지만 그토록 못알아들을만한 비유는 아니였습니다. “네 주님! 거짓 신앙을 조심하겠습니다!” 하면 될일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빵 안가지고 와서 저러는구나!’ 생각합니다. 도무지 대화가 안됩니다.

    이처럼 들어도 모르는 신앙인, 오로지 내 생각만 하는 신앙인, 엉뚱한 결론을 내리는 신앙인! 답답한 신앙인입니다. 바리새인같은 외식하는 거짓신앙, 타인을 실족시키는 신앙도 문젠데, 제자들처럼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신앙인들도 참 문제입니다. 21절을 보자니 예수님 그런 제자들이 참 답답하셨던것 같습니다.

    대화는 문맥을 이해해야합니다. 집중해야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문해력이 떨어질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와의 대화법에서 영적 문해력을 기르는 신앙인이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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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사람을 데려와 에수께 만져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갑자기 아침부터 마음이 따듯해집니다. 보지 못하는 자들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그들을 인도하는 이름 모를 사람들, 가족들, 지인들, 친구들을 떠올려봅니다.

    이처럼 인생은 캄캄해서 걸을수 없지만 빛으로 인도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볼수 있기에, 보지못하는 이들도 보는 기쁨을 얻을수 있도록 어떻게든 간절한 마음으로 돕는게 참 가슴 따듯하고 벅찬 감동을 줍니다.

    그 사랑이 모여서 예수님 앞에 당도했을때, 예수님은 그 사랑에 반응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눈을 뜨고 보게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있어서 살만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런 ‘사람들’이 되야겠다 다시 다짐합니다. 그들의 손을 잡고 빛이 되시는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는 사람들이 되야합니다. 예수님이 결국 그들의 인생에 빛을 주실 것입니다. 사랑으로 구원의 통로가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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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렇게 빈들에서 이 사람들을 다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4절)

    여기 우리가 말씀앞에 반복하여 서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일마다 다른 본문이지만 비슷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또 몇년 지나다보면 같은 본문으로 또 비슷한 설교를 다시 듣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목사님들은 똑같은 설교를 몇년마다 반복하기도하시죠 ^^;;) 그런데 문제는 듣는 회중에 태반이 처음듣는것처럼 듣는다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감동도 받았고, 깨달음도 있었고, 변화를 결단하는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몇달후, 몇년후에 반복되어 전해지는 메세지 앞에 전혀 처음 듣는것처럼 감동을 받는것입니다.

    오늘 이 사건은 ‘오병이어’와는 별개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오병이어’를 보고 나서도 또 잊었습니다. 그러니 “빈 들에서 이 사람들을 다 먹일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라고 묻고 있는것입니다.

    왠만하면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는 영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망각하고 반복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길것이 아닙니다. 기억이 신앙의 성장을 돕는 면이 있습니다. 건강하게 기억하는 신앙이 성숙한 신앙의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도, 능력도, 역사도 기억하는 신앙인으로 살고 싶습니다. 제자리걸음하는 신앙인이 아닌 앞으로 전진하는 신앙인이 되고 싶습니다. (“이 빈들, 어디서 빵을 구합니까? 가 아니고 여기 칠병이어가 있으니 주님 시작하시죠!” 라고 말할수있는 신앙인이 되고 싶다는 말입니다 ㅋ)

    모두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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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이방인’을 거절하는 사건이 아니고, 이방인을 구원에 범주에 받아들이는 사건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자식에게 줄 빵을 개에게 주지 않는다!” 이기 때문에 이방인을 향한 적대심, 더 나가 거절하고 모욕을 주는 말씀 같아 보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팽배한 구원론과도 그 결을 같이합니다. 그러나 결론은 믿는 여인에게, 기적과 치료의 구원을 배푸시는 예수님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수 있었을까요?

    이방인이 구원을 얻은 방법은 자격이 아니고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자격의 벽을 허무셨습니다. 선민의식도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녀가 보여준 믿음 때문에 그 모든 벽을 허무셨습니다. 구원의 길을 ‘믿음’으로 세팅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구원을 말하며 자격도 논하고, 배경도 논하고, 전통도 논하고, 율법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게 믿음으로 돌파된다고 선포하십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것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위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자녀 삼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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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여인은 ‘개’로 비견되는 이 수치스러운 말을 믿었던 예수를 통해 들었습니다. 참 비통한 말입니다. 자존심 상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아이가 아프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이가 귀신 때문에 사경을 헤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개라도 상관없습니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

    사랑하니까 수치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성육신’과 ‘십자가’라는 수치를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은 이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상의 힘도 보여줍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희생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진짜 사랑하면 다른게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사랑해야합니다. 이러한 사랑으로 내 가족부터 이웃, 친구를 사랑해야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에 등장한 ‘사랑’도 원어적으로 똑같은 ‘아가파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진짜 가장 위대한 계명이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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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겉은 얼마든지 꾸밀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듯해 보일수있습니다. 표정과 웃음도 연습해서 선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깨끗하고 아름답고 눈부시게 겉을 가꾼다고 한들 내면과 본질을 바꾸지 않으면 그사람은 바뀐게 아닙니다. 세상은 속아도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겉을 보지만 여호와는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삼상16:7)

    그러므로 내면세계에 대한 관심과 정리가 필요합니다. 청소를 많이 해봐서 아는데 아무리 보이는곳을 청소해도 냄새 날때가 있습니다. 어디 저기 차량 깊숙한 곳에 아기 기저귀를 버리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내면을 청소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내면을 정리하지 않은 나는 결국 더러운 사람입니다. “사람안에서 나오는것이 바로 사람을 ‘더럽게’ 하는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의 ‘겉’을 닦는게 아닙니다. 의료조치중에 ‘에크모’라는게 있습니다. 성인 혈액이 보통 5리터인데 그중에 2-3리터를 밖으로 뽑아서 인공적으로 혈액 속에 이산화탄소를 교환후 다시 몸에 넣어주는 치료입니다. 분마다 2-3리터를 치환(?)하는것이기 때문에 느낌적으로는 피 전체를 바꾸는 느낌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감염과 패혈증등 수많은 위기에서 사람들이 회복되기도 하는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의 죄된 보혈을 꺼내 그리스도의 보혈로 채우는것입니다. 내면의 불순물을 빼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내면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의 속을 바꾸지 않으면 치료되지 않습니다.

    당신의 내면은, 생각은, 본질은 괜찮으신가요?! 외형적 건강으로 진짜 건강하다고 오해하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앞에서 ‘건강검진’ 받으시길 도전합니다. (특히 '영적 내시경’하다가 속에 문제가 많아서 깜짝 놀랄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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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럽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요? 간혹 방송에서 보여지는 ‘더러운’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의 집은 형언할수 없이 더러운 집입니다. 곰팡이를 필두로 썩은것 투성입니다. 그런데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은 태연합니다. ‘더럽다’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이정도면 그래도 괜찮은거 아닌가요?”

    아닙니다! 더러운것에 익숙해지면 큰일입니다. 더러움의 허용치를 자꾸 조금씩 늘려가면 결국에는 진짜 더러운데 더러운지 모르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집이 더러운 사람이 집에 새롭게 들어간날 집을 그렇게 더럽게 만들고, 썩은것으로 채워 넣는게 아닙니다. 살다보니 점점 더러워진것입니다. 처음에는 상한것이 나중에는 썩어진 것입니다. 나중에는 그 썩어진것들 때문에 멀쩡하던 집도 곰팡이가 생기고 썩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벽은 침색되고 지워지지 않기 시작합니다. 찌들어 버린 냄새들도 절대 빠지지 않습니다.

    점차적 더러움, 점진적 더러움! 사탄의 무서운 무기입니다. ‘더러움’을 자꾸 용인해서는 안됩니다. ‘더러움’에 익숙해지면 안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더러움'의 기준이 바뀌고, 세상이 경악하는 '더러움' 속에 사는 자가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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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가 타락하는 지름길이 있습니다. 전통만 고수하는 교회, 본질은 버리고 형식만 지키는 교회, 합리화하고 변명하는 교회, 자의적 해석으로 말씀을 난도질 하는 교회, 비판하고 정죄하는 교회, 영적교만에 빠진 교회, 상대적 우월감을 가지거나, 신앙적 망각을 하는 교회, 무엇보다 리더가 ‘사람의 훈계를 교리인 양’ 가르치는 교회, 교회가 이런 모습을 갖게 된다면 반드시 타락하고 쇠퇴하게 되어있습니다.

    전통은 가치가 있습니다. 형식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본질을 모른채 전통과 형식을 따르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의 본질은 모른채 형식과 전통만 따랐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신앙이 순결함과 건강함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형식과 전통의 기준으로 정죄와 비난의 손가락질 한것입니다.

    교회를 섬기면서 가장 고민이 많은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건강한 전통과 형식은 지키면서 본질을 잊지 않는것, 변화가 필요한 전통과 형식을 분별하는것, 그리고 건강을 지키는 선에서 변화를 수용하는것!

    실제로 이런 부분을 고민하기 때문에 세례나 성찬도 딱 정해진 일정에 똑같이 진행하지 않고 있기도 합니다. 똑같이 반복하면 혹 형식으로만 남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멈추는 교회가 되지 않도록, 건강한 수용이 있는 교회가 되도록, 교만과 망각을 버리고 겸손한 교회 되도록, 본질을 분별하는 교회가 되도록, 비난과 정죄를 멈추는 교회가 되도록, 언제나 형식안에 진심을 담는 교회 되도록, 사람의 가르침을 하나님의 가르침이라고 강압하지 않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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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을 보내신 뒤 예수께서는 기도하려고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46절)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 이후에 제자들을 보내시고 홀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같이가자!” 하실수 있는거 아닌가요? 십자가 지시던 날 밤에도 “같이 가자!” 하셨습니다. 이왕이면 같이 기도하러 가면 좋을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렇게 안하시고 제자들을 보내신 뒤 혼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혼자!

    중보의 기도가 절실히 필요했던 ‘십자가의 밤’이 있었다면, 이와같이 철저한 골방의 기도가 필요했던 ‘영광의 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적후 영광의 환호성을 피해 홀로 기도의 산을 오르셨습니다. 환호의 끝에 있을 교만의 유혹을 끝까지 경계하시기 위해 홀로 가신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보일려고 하는것이 아니더라도 보여지는 순간 흔들리는게 인간의 교만이고, 의식입니다. 이러한 인성의 마음조차 경계하신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철저한 혼자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모든 시선이 단절된 그곳에서 하나님과의 독대가 필요합니다. ‘골방’은 모든 신앙인의 필수 요소 입니다.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이 없다면 바로 설수 없습니다!

    아이를 재우고, 가족이 일어나기 전에, 모두가 집을 비운 그 시간에, 비어있는 방으로 들어가서, 홀로된 그 시간, 나와 하나님만 있는것 같은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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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혹 짧은 시간만 있을때 플랭크라는 운동을 합니다. 시간대비 효과가 좋은 운동이라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일정의 시간을 정해놓고 플랭크를 하다보면 마지막 10초 정도는 체감적으로는 영원처럼 느껴집니다. 시간이 멈춰버린것 같습니다. 힘이들면 상대적 시간은 더디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밤에 제자들이 호수 한가운데서 노 젓느라 안간힘 쓰는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른 새벽에 물위를 걸어 그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힘이 들면 상대적 시간은 더디가기 마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느꼈을 그 고난의 밤은 그저 한 밤의 시간정도가 아닙니다. 끝나지 않는것 같은 고된 생사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고단함의 시간에 속지 말아야합니다. 고단함이 주는 ‘영원할것 같다’는 거짓말에 속지 말아야합니다. ‘나는 너무 오래 고생하고 있어!’라는 거짓말에 속지 말아야합니다. ‘이 고난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라는 거짓말에 속지 말아야합니다. 그래봐야 밤부터 새벽입니다. 해는 뜰것입니다. 예수님은 다가 오실 것입니다. 파도는 잔잔해 질것입니다.

    오히려 고단함 중에 보이지 않아도 나를 지켜보고 계신 예수님, 때가 이르면 물 위를 걸어서라도 도우시러 오실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고단함의 초침에 속지 말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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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적을 보아도 문제를 마주하면 또 망각하고 불신합니다. (52절)

    제 얘기 같아서 부끄럽습니다. 신앙의 연수를 돌이켜보면 기적으로 점철되있습니다. 그런데 매번 풍랑을 만나면 의심이 듭니다. 분명히 ‘오병이어’같은 기적을 개인적 삶에 경험했습니다. 일종의 기적같은 공급과 은혜를 경험한것이죠. 그러나 삶이 좀 팍팍해지면 또 다시 의심합니다. 교회개척도 마찬가지 입니다. 불과 일년반 입니다. 그 안에도 얼마나 많은 기적과 은혜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고난을 마주하면 또 잊고 두려워 하고 의심합니다.

    다른 사람들 보세요. 예수님 그 배에서 내리자 마자 사람들이 예수를 즉시 알아보고 기적을 배풀어 달라고 간청하고 난리났습니다. 왜요? 그들도 ‘오병이어’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고, ‘병자가 낫는 기적’의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제자들보다 나은 믿음을 보여주는것 같습니다. 이쯤되면 제자들은 어디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들고 다닐 지경입니다.

    이와같이 성도님들이 더 큰 믿음을 보여줄때도 참 많습니다! “교회 부흥할꺼예요!” “하나님께서 교회를 축복하실꺼예요!” 심지어 일면식도 없는 건물주가 저에게 그랬습니다. “렌트비가 너무 비싸도 걱정하지 마세요! 아마 몇개월 안에 성도들이 늘지 않겠습니까?”

    저만 믿음을 잘 지키면 되겠습니다. 믿음을 망각하지 않고, 능력의 하나님을 잊지 않으면 되겠습니다.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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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곤과 긍휼은 목회와 땔수 없는 개념입니다. 누구나 육신의 피곤함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인간이라면 피곤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나의 피곤과는 상관없이 긍휼이 필요한 상황은 언제든 찾아올수 있습니다. 실제로 목회중에, 소위 말하는 ‘쉬는 월요일’ 많은 성도님들의 병원, 장례 심방요청을 받았습니다.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필요로 하는 것은 이처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쉬려고, 혹은 쉬게 하시려고 외딴곳을 찾으셨지만 결국 먼저 대기하며 ‘긍휼’을 기대하는 자들을 보시고는 쉼없이 이어서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쉽게 피곤하지 않게 건강과 체력을 만드는것도, 그러므로 목회의 정말 중요한 태도임을 다시 한번 상기합니다. 긍휼을 행하는데 있어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사랑과 섬김의 마음이 있어야 함을 다시 한번 상기합니다.

    그러나 또 ‘인간’이 가진 명확한 한계성이 있는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연약한 나의 힘과 체력이 되어주시고, 식어지지 않는 따듯한 긍휼의 마음을 넣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살아있는동안 예수님 닮은 사역자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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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을 보내 가까운 마을이나 동네에 가서 각자 먹을 것을 사먹게 하시지요.” (36절)

    방법론으로 접근할것인가? 믿음으로 접근할것인가?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지혜로운, 효율적인 방법을 선택해야할 때가 있습니다. 두서없이 하는것보다 ‘좋은 방법’을 따라 시도하는게 훨씬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방법론'만으로 접근해서는 안됩니다. 왜냐면 방법론 만으로 접근하면 부정적이되기도 하고, 포기하게 되는 경우들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예컨데 ‘방법’으로 홍해를 건너려면 “배가 몇대 필요한거야?” 라는 말을 하고 포기하게 됩니다. 방법론으로 접근하면 “사람들 다 먹이려면 200데나리온어치의 음식을 사와야해!” 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꾸 결론이 ‘포기’가 됩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고, 믿음으로 공급을 받았습니다. 신앙은 방법론에 메여있지 않습니다. 방법이라는 지혜와 노력은 좋지만 ‘인간의 방법’만으로 사는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게 하는 초석이 됩니다. 예수님 곁에서 믿음으로 사는자가 기적을 봅니다. 은혜를 누립니다.

    ‘방법’이 아닌 ‘믿음’으로 바우교회를 섬깁니다!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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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엉뚱한 생각을 해봅니다. 다 먹고 음식이 많이 남았습니다. 성경의 기록을 보니까 12바구니에 가득찰 정도로 음식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거 왜 수거했을까요?! 그냥 두면 다 먹고 배부른 사람 중에 좀 싸가는 사람도 있을수 있는거 아닌가요? 애초에 ‘오병이어’ 런치박스 였으니까 누군가 남은 음식 그렇게 포장해서 집에 가서 먹을 수있는거 아닐까요? 남은 음식 12바구니 수거해서 제자들이 나중에 먹으려고 한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굳이 거둬 드렸을까요?

    우리는 우리 손에 들린 풍족함을 믿고 사는게 아니라, 풍족하게 먹이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내 손에 잡힌거, 쥐고 있는거 보고 사는거 아니라, 매일 매일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하죠! (참고로 손에 많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간절히 소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손에 남겨두면 썩씁니다. 상합니다. 나중에 먹었다가 탈이 나기도 합니다. 그거 가지고 다닌다고 손발이 분주해지면, 예수님 따르다가 “집에 가서 놓고 올께!” 하고 돌아가버릴수도 있습니다.

    욕심 내지 말아야하고, 싸우지 말아야합니다. 남은 음식 남겨두면 서로 눈치보며 누가 가져간다 만다, 누가 더 가져간다, 덜 가져간다 싸웁니다. 싸움의 빌미를 남겨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날의 은혜는 그날에 족합니다. 어제의 은혜로 오늘을 사는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병이어’는 오병이어고, 나중에 또 ‘칠병이어’라는 비슷한 사건이 또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릴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매일 성실합니다.

    엉뚱하지만 그래서 아마 남은 음식 수거하셨나봅니다!

    기적을 쫓아 살지말고,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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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켠으로는 허망한 죽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도 할수 있는 일이 많은것 같은데 세례요한은 그렇게 죽임 당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도 적법하지 않았습니다. 억울한 죽음입니다. 왜 죽게 되었을까요?

    불의가 의를 압제한 것입니다!

    이상적인 나라라면 불의가 의를 압제하지 않습니다. 불의가 의를 이겨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세상은 원죄 이후로 단 한번도 의가 불의를 언제나 이기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지 못했던것 같습니다. ‘힘의 논리’에 압도되어 그저 권력이 정의가 되는 역사를 만들어 왔던 것입니다.

    우리의 권력이 정의(justtice)로 정의(define)될 때 세상은 심각하게 망가진 것입니다. 교회가 가정이, 회사가, 학교가, 나라가 이와 같을때 시대는 무너진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불의한 죽음, 억울한 죽음, 명백한 폭력과 파괴로 시대가 가득하게 됩니다. 거짓과 불평등 불신과 경쟁, 분열만이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삶에 녹아 스며들어 있는 모든 ‘힘의 논리’를 철저하게 경계해야겠습니다. 정의를 따라 살아야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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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롯은 요한의 말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몹시 괴로웠지만 동시에 그의 말을 달게 듣곤 했습니다. (21절)

    헤롯에게 요한은 그 시대의 ‘유튭채널’ 이었던 것입니다. 삶의 지혜를 얻고, 때로는 질책어린 강의를 통해 마음에 찔림도 받곤 하는 것입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요한의 조언은 헤롯에게만 해당되는 직접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조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듣고, 찔리고, 좋아하고 거기서 멈췄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몹시 괴롭지만 동시에 그 말을 달게 듣곤 합니다. 우리를 향해 쏟아지는 경고와 질책의 말씀들이 소화하기 어렵기는 하지만 그래도 듣고 나면 마음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곤 하기에 말씀 앞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입니다. 말씀이 조금만 더 예리하고, 개인적인 적용이 되려고 하면 바로 방패로 막아 버립니다. 듣고 깨닫고 즐기는것까지는 허락하지만 내 삶을 고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말이 아닌 일반적 말로 치부하고 넘겨버리는 것입니다.

    말씀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신것이기도 하지만 ‘나’에게 오신 것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입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고, 찔렸으면 변해야합니다. 안그러면 결국 ‘말씀’을 죽이게 될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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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신으로 그 사람을 해석하는 버릇’은 그때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탁월한 가르침을 주는 예수를 무시하고 배척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예수를 무시하는데 앞세운 이유는 ‘예수의 출신’이었습니다.

    이는 정말이지 어떤 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완전히 잘못된 태도입니다. 만약에 출신으로 판단한다면 오히려 모두가 다 존경받아야 하는게 맞습니다. 왜냐면 모든 인류는 본질적으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본질적 배경은 부정하고, 오직 그들의 집안, 배경, 부, 지위, 이력등으로 정의 내려 무시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회사에서, 교회에서, 학교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여러가지 형태의 공동체에서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은 12제자 뽑으실때 ‘배경’보고 뽑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죄인'도 뽑고, '매국노'도 뽑았습니다.

    출신과 배경으로 판단하는것 이제 그만 해야합니다. 다르게 대우하거나, 무시하거나, 비굴해지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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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송받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니까 공감이 됩니다. 과거 이 파송이 크게 공감되지 않을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개척한다고, (상징적이지만) ‘지팡이없이’ ‘먹을것’ 없이, ‘전대에 돈’이 없이, ‘신발과 옷도 여벌’이 없이 나와보니, 그들의 막막함이 한결 현실적으로 공감됩니다.

    지난 일년 반을 돌아보니, 가지고 나오지 않아서 하나님만 의지하게 됩니다. 단순하지만 참 좋은방법입니다. 많이 들고, 여유 있으면 전도의 간절함이 사라졌을지 모릅니다. 만약 삶의 여유가 있었다면 교회 개척이 훨씬 더 느려지고, 집중력이 훨씬 더 저하됬을지 모릅니다.

    “둘씩 짝지어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고보니 사역에 필요한것은 ‘삶의 여유’, ‘풍족한 준비물’이 아닙니다. 함께 일할 동역자, 그리고 감당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많은 부분에서 갖춰지지 않고 부족하지만, 허락하신 동역자들과 함께 일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로 맡겨진 일을 감당하겠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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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지금 수많은 군중과 있습니다. 그중에는 자신의 죽어가는 딸 아이를 위해 간절히 예수를 찾는 야이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12년이나 혈류병을 앓고 있어서 간절히 예수를 소망하여 군중을 뚫고 나온 여인도 있습니다.

    예수님 곁에 있다고 모두가 간절한것은 아닙니다! 군중과 이 두사람이 보여주는 간절함의 온도의 차이는 확실합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많은 경우 “간절히 기도하세요!” 라고 말해도 실제 삶에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함으로 인해 그토록 간절히 기도할 내용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조건, 혹은 억지로 간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간절할 필요가 없는 평안한 삶’에 대한 진심 어린 감사, 그리고 간절할것이 없는 와중에도 예수를 따라다니는 삶으로 충분합니다. (믿음은 억지 ‘신파’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 나온 혈류병 여인과 야이로 회당장의 간절함도 배워야하지만, 간절함이 필요없는 평안을 누리는 삶을 사는 가운데도 예수를 따라다니고 예수의 곁을 지키는 자들의 태도도 배워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에서의 동행이라고 할까요?

    그러나 더 나가 이 사건의 기록 속에서 배우는 또 다른 메세지들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내가 간절할지 않을때라도 타인의 간절함을 모른척 해서는 안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간절함으로 군중을 뚫고 예수께 나온 혈류병 여인을 향해 주변 ‘신자’들은 무관심 합니다. 실제 예수님 곁을 지키는,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자신은 평안함 속에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는 간절한 영혼의 아픔을 보지 못하거나 공감하지 못할때가 있습니다. 평안함중에 예수님 곁에 서있다면, 간절한 자들을 돕고, 인도하고, 예수께로 올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통로가 되야할것입니다. 마치 중풍병자 친구를 지붕을 뚫고서라도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나오는 친구들처럼 말입니다.

    평안중에 간절한 자를 보게 하시고,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신앙인이 되게해주세요!

    또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해서도 안됩니다. 혈류병환자와 대면중에 한 사람이 소식을 가지고 뛰어옵니다. 야이로 회당장 딸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하고, 야이로는 눈물이 터져 나왔을것입니다. 소식을 전한 사람은 “딸이 이미 죽었으니 예수님 올 필요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말을 듣지 말아라! 그저 나를 믿고 따라오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수제자 세명만 따라오라고 하시고 죽은 딸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평안함 가운데 있는 성도는 간절한 성도의 기적을 바라는 기도에, 의심을 한스푼 더할것이 아니라, 믿음을 한스푼 더해줘야합니다. 어쩌면 나머지 9명의 제자가 너무 부정적이고, 의심하는 말을 해서 놓고 가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안중에 간절한 자를 보게 하시고, 그들의 간절한 기도에 의심이 아닌 믿음을 더하는 성도가 되게 해주세요! “어서 예수님 따라가봐요! 예수님은 죽은자도 살리실수 있습니다!! 저도 기도할께요!” 이렇게 믿음 한스푼 듬뿍 얹어 주는것입니다.

    예수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있으니 꼭 ‘교회’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는 이처럼 간절함으로 나오는자, 평안함 가운데 주님곁에 서있는 자들이 각양각색으로 서있습니다. 각기 다양한 삶의 모습속에서 감사와 공감, 베려와, 믿음, 축복과 격려, 치료와, 기적이 있는 교회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도가 서로에게 힘이되고 축복의 통로가 되는 교회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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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귀신에게 물으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귀신에게 관심이 있어서 물으시는게 아닙니다. 그 귀신의 정체를 파악해 내쫓으시려는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진짜 관심은 귀신에게 있지 않고 그 사람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간혹 ‘오컬트 장르’의 영화를 봅니다. 꽤나 무서운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귀신 들린 아이나 사람의 모습과 음성은 언제나 소름끼치게 표현됩니다. 극중, 소위 말하는, ‘구마사제’들이 가서 귀신을 내 쫓습니다. 사람들은 그 소름끼치고 강력한 귀신과 신비한 능력을 보여주는 사제의 대결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적 대결의 말미에 청중들이 기억하는 것은 귀신에 들렸던 피해자가 아닌 흥미로운 대결을 보인, 소위말하는 ‘강력한 사제’와 ‘소름끼치는 귀신’인 경우가 많습니다. (보신 오컬트 영화중에 귀신에게서 자유를 얻은 이의 이름을 떠올려보세요! 생각이 잘 나던가요? 아마 사제와 귀신정도가 더 명확하게 기억나는 분들이 꽤 계실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언제나 귀신 따위에게 관심을 두시지 않습니다. 귀신은 죽이고 내쫓는 존재일 뿐이죠! 예수님의 관심은 언제나 잃어버린 영혼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영혼, 구원이 필요한 한 영혼에게 관심을 가지십니다. 감히 귀신 따위가, (혹은 귀신들 따위가) 하나님의 귀한 피조물들을 망가뜨리는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 결과 오늘 본문에서도 보다시피, 예수님은 한 영혼을 위해 2000마리의 돼지도 가차없이 희생 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잃어버린 영혼입니다. 아픈 영혼입니다. 우리도 아픈 영혼에게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그 사람을 살리기위해 나의 자산, ‘돼지’를 희생시켜야 한다면 그마저도 할줄 알아야합니다. 돼지 2000마리는 재산상의 큰 피해가 맞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살릴수 있다면 지불되어야만 하는 가치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살리기 위해 감히 비교할수 없는 예수님의 보혈을 십자가 위에서 흘리셨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잃어버린 영혼, 아픈 영혼, 고난 가운데 있는 영혼을 향해야 합니다. 그 영혼을 살리기 위한 필연적 지불은 망설이지 말아야합니다. ‘지불’이 없이 ‘구원’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이제 우리도 그 ‘십자가의 지불’을 한 영혼을 위해 해야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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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께 떠나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 참 많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선하신 일입니다. 한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아무도 이 사람을 살리지 못했는데 그런 사람을 회복한것이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예수께 떠나달라고 부탁합니다.

    2000마리의 돼지의 죽음이 이렇게 그들의 마음을 닫히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회복시키는 것은 좋아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적어도 ‘내 재산’은 건들지 말아야합니다. ‘나의 유익’은 건들지 말아야합니다. ‘나의 영역’은 침범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의 재산인 '돼지'에 침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은혜는 바라면서 내가 정해놓은 선을 넘으면 “주님 나를 떠나세요!” 라고 말하는 이기적인 신앙인들, 어리석은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돼지’ 좀 데리고 살아보겠다고 예수님 내쫓은 최악의 결정을 내리지 않기를 도전합니다. ‘돼지’ 살리겠다고 ‘귀신’과 동거 하는 삶을 선택하는 최악의 결정은 더더욱 내려서는 안될 일입니다.

    “예수님! 제발 제 인생에서 떠나지 말아주소서!” 이게 정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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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에 꿈에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 한 비행기 탑승객들에게 일어났습니다. 비행기가 활공중에 한쪽 벽이 뜯겨 나가버린 것입니다. 생각만해도 그 공포감에 머리가 아찔해질 지경입니다. (저 같으면 아마 기절했겠지요)

    상황이 이렇게 되었을때 그 비행기에 조종사가 (아마도) 안내 방송을 합니다.“저는 기장입니다! 여러분 상황이 어렵지만 놀라지마세요! 다행히 제가 잘 조종하고 있습니다! 비행기가 다른 모든 부분이 잘 작동하고 있습니다! 원래 스카이 다이빙 할때도 그 높은 곳에서 비행기 한쪽 문 열어 놓잖아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우리 비행기 안전하게 잘 착륙할수 있습니다! 걱정마세요! 저만 믿으세요! 보는것과 같이, 느껴지는것과 같이 큰일은 아닙니다!”

    탑승객은 여전히 불안함을 넘어 극강의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조종사만 믿어야합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공포에 못이겨 뛰어내리면 그거야 말로 100% 죽음입니다. 백번 이해는 가지만 울고불고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것도 아닙니다. 조종실에 가서 조종사를 흔들어 “내가 두려우니 지금 당장 내 옆에 있으세요!” 해서 될일이 아닙니다.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선생님! 저희가 빠져 죽게 됐는데 모른 척 하십니까?” (38절)

    제자들과 함께 길을 나선 사람들은 너무 억울하고, 무섭고, 답답하고, 죽을것 같습니다. 이 저녁에 먼저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신것도 예수님입니다. 그분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배들)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풍랑이 임했습니다. 그냥 풍랑도 아니고 곧 배가 뒤집힐 정도의 절제절명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는데도 이런 일이 일어나니 사람들은 더욱 당황하게 됩니다.

    이쯤되니 제자들이 견디다 못해 예수님께 “왜 모른척 하십니까?”라고 토로하게 되는것입니다.예수를 향한 그들의 울분과 의심을 쏟아냅니다. 그들의 공포의 질린 마음을 토해내는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이 예수님께 자주 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입장에서는 답답하고 안쓰럽기도 할것입니다. 상황을 보면 예수님도 지금 흔들리는 그 배안에 같이 있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을 풍랑속에서 죽일 생각도 없고, 아직 당신이 풍랑속에서 죽을 생각도 없습니다. 또한 그분의 능력은 ‘풍랑’을 통과하거나 심지어 잠재울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예수를 온전히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면 답답하고 안쓰러운 부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무서워 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아마 그래서 이런 말씀도 하셨지 싶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풍랑중에 우리를 모른척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떠나 육지나, 다른 배로 홀로 이동하지 않으십니다. 흔들리는 우리의 인생배에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의 평안으로(잠)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주님을 믿어야합니다. 그분의 능력, 그분의 사랑, 그분의 동행, 그분의 구원을 믿어야합니다.

    신앙인에게도 ‘풍랑’은 얼마든지 찾아올수 있습니다. 예수님이랑 같은 배에 있어도 ‘풍랑’은 얼마든지 찾아올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랬고, 사도들이 그랬고, 선교사들이 그랬고, 목사들이 그랬고, 성도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그 풍랑속에 있는 우리의 인생배에 함께 하고 계십니다.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믿음으로 승리해야합니다. 믿음안에 평안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주께서 안전하게 착륙하게 하실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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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숨길수 없는 세가지’에 대한 얘기를 들어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가난, 사랑, 그리고 재채기 입니다. 뭐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말입니다.

    이처럼 신앙인도 숨길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복음, 그리고 신앙입니다. 그런데 신기합니다. 숨겨집니다. 등불을 등경밑에 두는것은 말도 안되는 일일텐데 그렇게 하고 있는 꼴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영화에서 스파이가 결국에는 어느 시점에 정체가 탄로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잘 숨겨도 결국에는 드러납니다. 진짜 정체성은 원래 이처럼 감춰지는게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복음이 감춰지고, 예수가 감춰지고, 신앙이 감춰진다면 내 안에 없기 때문일수도 있습니다.

    감춰지는 신앙인은 거짓 신앙인입니다. 감추는 신앙인도 옳은 신앙의 모습이 아닙니다. 복음의 등불을, 예수의 등불을, 신앙의 등불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진짜 신앙인이 되어야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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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나라는 자라납니다.

    성장은 필연적입니다. 아이를 둘 키워보면서 깨닫게 됩니다. 정말 언제 컸는지 모르게 컸습니다. 그러나 이런 당연한 일조차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장이 내면에서 멈춰버리기도 하고 외부에서 멈춰버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러면 그 사람은 아픈것이다 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성장은 필연적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도 필연적 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자라지 않으면 아픈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이 확장되지 않으면 ‘아픈 신앙인’입니다. 성장으로 신앙의 건강을 점검해야합니다. 오늘 건강해서 건강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반드시 성장으로 점검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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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로 오래 살다보니까 자꾸 착각합니다. 자꾸 말씀을 전하는 자의 입장에서만 이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 본문으로 묵상하거나 설교할때면 ‘과연 성도들은 어떤 마음 밭으로 설교를 듣고 있을까?’ 하는 정도의 묵상과 생각을 하게 되는것입니다. 그러니 결론을 내려도 “성도님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옥토밭이 되세요!”라는 정도의 적용으로 끝날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 아침, 이 본문 앞에 나 자신을 세우며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고 있는가? 말씀을 받는 나의 마음받은 어떤가?

    목사라고 자동적으로 ‘옥토밭’이 되는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따지면 이스라엘의 모든 제사장과 예언자와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랐어야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경우가 허다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위나 타이틀로 듣는것이 아닙니다. 장로라고 해석과 깨달음이 자동적으로 깊어지는거 아닙니다. 권사라고, 집사라고 언제나 말씀이 다 이해되는것도 아닙니다. 다 삶으로 자동적으로 적용되는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앞에 언제나 겸손하게 서있어야겠습니다. 겸손하게 집중하여 듣고, 깨닫고, 마음에 심어 열매 열매를 맺는 목사로 항상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삶으로 설교하는 목사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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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배, 60배, 100배”

    큰 의미를 두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마태복음에서는 100배, 60배, 30배라고 말하기도 하기때문에) 이 본문에 국한해서 숫자 순서에 묵상의 의미를 담아 봅니다.

    오늘 마가복음의 기록은 숫자를 점진적으로 확장하여 기록합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말씀 묵상으로 얻어지는 열매는 점진적 확장을 의미합니다.

    한번에 변하면 좋습니다. 한번에 최고인 100배를 거두면 좋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 되지 않아서 30배부터 거둬들여도 좋습니다. 그마저도 의미있는 변화입니다. 의미있는 첫 걸음 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원래 처음 땅을 개간하고 첫해 수확은 밑거름이라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이듬해가 되야 진짜 수확량을 조금씩 가늠할수 있게 되는것입니다 . 그런데 첫해 개간하고 그 양으로 실망하고 계속되는 시도를 멈추면 수확은 30배에서 멈춰버립니다.

    말씀을 깨닫고 변화하는 삶을 시작했다면 100배에 이르기까지 계속 말씀으로 살아내면 좋겠습니다. 30배의 열매로 만족할것은 아닙니다! 계속 말씀과 함께 정진하는 신앙인이 되야합니다. 말씀의 열매를 계속 확장하여 맺어가는 신앙인이 되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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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살때부터 벤쿠버에 소재한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꽤나 일찍부터 ‘전도사’라는 소리를 교회에서 듣게 된것이지요. 제가 섬기던 교회에 한국에서 저를 방문한 누님이 다니실때도 있었고, 저희 어머니가 한국에서 방문하셔서 들리신 적도 있습니다. 그때 간헐적이지만 비슷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한참 학생들과 모임중인데 누군가 들어와서 “전도사님, 밖에서 어머니 기다리세요!” 그럼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바로 밖으로 나가서 어머니가 뭐 필요하신것은 없는지 여쭙기 보다는 하던 일을 마저하고 늦게 나가서 어머니께 “저는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으니 혼자 돌아가 계세요!” 라고 말하고 다시 교회 안으로 들어와버리곤 했습니다. 참 불효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의 소식을 듣고,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33절) 라고 묻습니다. 이는 제가 저의 어머니께 보여드린 그런 ‘불효자와 같은 행동’은 아닙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을 무시해서 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가족이 중요하지 않다고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행동하시는 것은 바로 35절에 그 이유가 쓰여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예수님은 이 순간 ‘믿음의 가족’이 어떤 의미인지, 또 얼마나 중요한 공동체인지를 설명합니다. 보통 세상이 가장 중요한 공동체라고 말하는 ‘가족’이라는 범주에 ‘믿음의 공동체’를 담아 버리는 것입니다. 육신의 가족이 중요한것처럼, 어쩌면 그 이상으로 ‘믿음의 가족’도 중요하다는 것을 이 행동을 통해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가족을 부정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가족을 확장하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일원들과 진짜로 가족이 되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가족 공동체 입니다. 믿음으로 묶여진 공동체는 가족입니다. 피를 나눈 형제요 자매입니다. 예수의 보혈은 참으로 우리의 피보다 더 찐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공동체, 바우교회되길 기도합니다. ‘형제 자매’가 호칭이 아닌 진짜 관계의 의미를 갖기 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믿음의 가족 공동체’ 되길 기도합니다. 교회 안에 함께 머문다고만 해서 '믿음의 가족'이 되는것은 아닙니다. 함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형제요 자매요, 어미가 되는것입니다.

    2024년 바우교회는 더욱 끈끈하고,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는 가족 공동체가 될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안에 한가족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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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기가 누구인지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12절)

    왜 전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신학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전하지 말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뿐만은 아니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이 소개하는 예수는 누구일까요? 그들은 주변에 예수에 대해서 말할때 어떻게 말했을까요? 본문의 사건과 행적을 따라가보자면 아마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 말할때 "병을 치료하는 마법사" 정도로 말했거나,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 정도로 말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조금더 집중하고 따라다녔다면 '능력있는 선생'정도로 설명했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다 틀린 얘기입니다. 우리 예수님을 그정도의 인물로 설명하기에는 예수님은 너무나 크신 분이십니다. 치료도 놀랍고, 귀신을 내쫓는것도 놀랍고, 통찰력 넘치는 가르침도 놀랍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그정도(?)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실 유일한 구원자로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오해의 소지가 가득한 내용으로, 비본질적인 내용만 가득 담아서 예수님에 대해서 어설프게 말하고 다니면 안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말을 하고 다니고 있을까요? 과거 교회도 예수님에 대해서 조금 잘못(?)말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 믿으면 다 잘되요! 만사형통합니다. 모든 일에 축복을 받을꺼예요! 무엇을 하든 성공할꺼예요!" 이 말 듣고 예수 찾아 교회 왔다가 실망해서 떠난사람, 시험들어 떠난 사람이 한두명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를 이렇게 소개한 그분들의 신앙이 모두 '기복신앙'이라고 결단코 단정지을수 없습니다. 그저 은혜의 경험과 기쁨에서 나온 순수한 설명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시대때도 그랬듯이 사람들은 그저 들려지는 말로만 해석하기도 하기 때문에 예수를 오해하고, 교회를 오해해서 '기복신앙'을 신앙의 핵심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많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전해야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말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 대속의 예수님, 구원의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전해야합니다. 사랑과 공의의 예수님을 전해야합니다. 그저 '축복과 행복, 성공'으로만 점철되는 예수를 그려서 전하는것은 어떤 의미에서 안 전하는것만 못한 일입니다. 그렇게 왜곡된 예수를 전할꺼라면 차라리 전하지 않는게 낫습니다.

    예수를 바로 알고, 예수를 바로 전하는 신앙인이 되야겠습니다.

    그저 전하는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올바르게 전하는게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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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명을 따로 뽑아"(14절)

    예수님께서 따로 뽑은 사도들의 특징은 1)예수님과의 동거동락 그리고 2)전도의 시작입니다.

    회사에서 기껏 신입을 채용했는데 회사에 나오지 않는다면? 회사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옳지 못한 직원의 태도입니다. 그 누구도 이 직원의 행태를 응원하지 못할것입니다.

    자리를 지키는 영성이 중요합니다. 자리만 지켜서는 안되겠지만, 일단 자리를 지키는 것은 기본입니다. 자리를 지키는 일마저 못한다면 하지 못하는 일이 많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거동락을 시작하게 되는것입니다. 신앙의 자리를 지키는 것을 그러므로 사뭇 더 진지하게 여겨야합니다.

    (얼마나 진지한 의미의 차이를 두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군대에 있을때는 여전히 군인과 상근병을 구분했습니다. 상근은 저녁이 되면 퇴근하고 집에 갔다가 다시 아침에 출근하는 병사들이고, 군인은 매일 내무반에서 상주하는 우리가 잘 아는 일반적 군인입니다. 계속 동거하는, 거기에 머무는 자들은 정체성 자체가 '군인'입니다. 그러나 오가는 사람은 '상근', 즉 출근하는 직장인과 같은것입니다.

    신앙은 사도와 같이 자리를 지키는 중요한 영적 태도가 필요합니다. 진지하게 예배의 자리를 지키고, 믿음의 자리를 지키고, 사명의 자리를 지키고, 예수님 곁을 지키는 예수님의 군인이 되야겠습니다.

    결국 그렇게 예수님 곁에 함께 거하며 전도하는 자가 되야합니다. 무엇보다도 제자는 '전도'로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가서 제자 삼는 사람들 입니다. '사도'라는 뜻 자체가 애초에 '보냄받은 자'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보냄받은 것입니다. 전도는 모든 신앙인을 향한 하나님의 기본적 부르심입니다. 2024년 전도는 필사입니다. (필연적 사명이라는 말이죠) 그러므로 성경 필사도 좋지만 필사 전도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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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일은 살리기 위한 날이지 죽이기 위한 날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을 오해하고, 성경을 오해하고, 예수님을 오해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율법주의’같은것이 이러한 대표적 오해입니다. 할례의 참된 의미도 오해하고, 이혼에 대한 본질적 메세지도 오해합니다. 헌금의 본질적 메세지도 오해하고, 예수님의 사역도 오해했습니다.

    오해하면 의례 그 반응이 실수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율법적으로 지키며 서로 정죄하기에 바빴던 것입니다.

    ‘안식일’, 예수님께 예배하고, 우리의 삶이 오직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이 귀한 날을 통해 예수님은 지친자를 살리고, 죽은자를 살리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참된 회복과, 에너지의 재생산을 기대하셨을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되신 예수님이 만족하시고, 고개를 끄덕이시는 ‘안식일’을 지켜야겠습니다. 냉장고 안열고, 음식좀 안해먹는다고 안식일 지키는것 아닙니다. 이삭 안까먹는다고 안식일 지키는거 아닙니다. 진짜 안식일을 지킬줄 아는 모든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하루를 구분하지 못하는것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위험하고 어리석은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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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결국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료하셨습니다. 이는 강력한 메세지가 되었습니다. 첫째, 그동안 유대교 안에 있던 전통에 대한 강력한 도전입니다. 둘째, 치료가 됐다는 것은 예수가 일종의 능력을 발현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경계해야만 하는 사람입니다.

    기득권은 언제나 전통과 권리가 위협당하면 방어기재를 발휘합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전통이 무엇이 잘못됐기에 바꿔야하는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전통을 지키고 나의 기득을 지킬수 있는가에 집착하게 되는것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나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잔인해지고 무서워집니다. 폭력과 살인도 서슴치 않습니다. 한국에서도 한 정치인에 대한 살인교사가 있었습니다.

    내게 주어진 권한이 크든 작든, 그 권한이 내 눈을 가리지 않도록 조심해야합니다. 그 권력에 취하지 않도록 조심해야합니다. 권력이 나를 다스리게 해서는 안됩니다. ‘권력’은 섬김에 쓰라고 도구로 준 능력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 군림의 권한이 절대 아닙니다. 파괴의 권한도 아닙니다. 또한 권력과 권한은 물과 같아서 반드시 흐르고,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때가 되면 내려 놓을 줄 알아야합니다. 고착되면 썩습니다.

    권리와 권한이 큰 자일수록 그래서 잘 듣고, 잘 분별할 줄 알아야합니다. 정의에 대해서 관심 가져야하고, 건강한 변화와 흐름을 분별할줄 알아야하고, 바꾸고, 수용하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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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면전에 대놓고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왔다!” (17절) 듣던 ‘세리들, 죄인들’도 기분 나빠질수 있는 말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분 좋게 집으로 초대하여 밥먹다가 예수님의 이 대답을 곱씹어보니 조금 불편한 마음이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처음에는 그저 유명한 ‘예수’라는 분이 자신들을 불러주고, 함께 하고 식사도 해주니 좋았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질문 앞에 예수님의 의중이 명확히 밝혀졌습니다. “나는 죄인을 구하기 위해 이 땅에 온것이고, 이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이들과 함께 하는것이다!” 이 말인 즉슨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돌려 말하고 있는 거 아닌가요?

    전도를 할때보면, 과거 사영리 전도법의 시작은 “당신은 죄인입니다!” 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방법으로 시도하다보면 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은 죄인입니다!” 라는 말에 거부반응을 보이곤 했습니다. 자신이 죄인인것을 알아도, 실제 남에게 지적받는것을 상당히 불쾌하게 여겼던 것이죠! 그래서 이런 경우 전도가 아예 시도도 되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다가오신 이유는 내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아니고서는 구원받을수 없는 ‘멸망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임을 겸손히 인정하는 자가 용서받고, 구원받고, 사명자가 될수 있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이 ‘죄인’이라는 지적에 불쾌할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할것입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다가와주신 그분의 사랑과 관심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예수의 보혈 없이는 영락없이 ‘죄인’일수밖에 없는 저에게 찾아오셔서 말씀의 은혜로 먹이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세리 레위’가 ‘제자 마태’가 되는 은혜를 저에게도 배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에 있는 주를 모르는 ‘죄인들’ 모두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고 변화되길 간절히 소망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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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포도주를 담는 ‘새부대’도 시간이 지나면 ‘낡은 가죽 부대’가 되고 맙니다! 언제나 ‘새부대’일수 없습니다. 그래서 ‘새부대’로 여겨졌던 초대교회는 나중에 바리새인들과 같은 ‘낡은 부대’가 되어 ‘종교개혁’을 겪게 되기도 합니다. ‘새부대’가 어느순간 ‘낡은 부대’가 되고 만것입니다.

    조금더 조그만 시각으로 보자면, 신앙인들 개개인도 동일합니다. 초신자가 되어 새가죽부대처럼 건강한 신앙의 부대가 됩니다. 그런데 어느덧 10년, 30년 되면 갑자기 ‘신앙의 낡은 부대’가 되어버립니다. 고착되고, 굳어버리고, 확장하거나, 변화되지 못합니다. 고집스럽고, 심지어 안에 담긴 ‘포도주의 맛을 변질’ 시킬 위험까지 보여주기도 합니다. 터져서 그 목적을 상실하기도 합니다.

    바우교회는 하나님께서 이 시대, 지역에 세우신 ‘새 부대’가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 안에서 함께 사역하는 성도님들 한분 한분도 모두 ‘새부대’가 되길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굳어버리는 ‘낡은 부대’가 아닌 여전히 잘 숙성시키는 더 가치있는 부대가 되길 기도합니다. 시간 속에서 후퇴하는 신앙이 아닌 전진하는 신앙, 변하는 신앙, 성숙해져가는 신앙이 되야겠습니다. 건강한 관리와 점검을 놓치지 않아서 10년 후에도, 30년 후에도 ‘새부대’와 같은 건강한 신앙의 부대가 될수 있어야겠습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고착되고, 굳어지고, 썩어지는 ‘신앙의 부대’가 되어서는 절대 안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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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람이 모이자(2절)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들의 기대가 무엇이든지 간에 일단은 말씀이 선포됩니다. 이로써 말씀이 본질임을 봅니다.

    교회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처럼 ‘하나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동시에 오늘 말씀처럼 주님 곁으로 모인다면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야 합니다.

    사람들은 말씀이 아닌 다른 기대감으로 교회로 오더라도, 다른 기대감을 가지고 예수를 찾아 오더라도 예수님처럼 말씀을 먼저 선포해야합니다.

    바우 교회의 영점을 재조정합니다. ‘말씀’이라는 ‘bull’s eye’를 절대 놓치지 말아야겠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신년을 맞아 성경통독을 시작했습니다. 아마 비슷한 목적과 의미를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 되도록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야겠습니다. 온 교회가 함께 아침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통독하는 한해가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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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사람이 한사람을”(3절)

    전도를 하면서 느끼는건데 한명이 한명을 전도하는게 쉽지 않습니다. 어떤 설문 결과를 보면 한 명을 전도하기 위해서 적어도 7번에서 20번 정도의 의미있는 만남이나 시도가 있어야 한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오늘 실제 육신으로 중풍병으로 누워있는 자를 만약에 한명이 옮기려고 했다면 예수님 계신곳으로 가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4명이나 있으니까 들고 가서 지붕을 뚫는 시도를 하게 된것입니다.

    전도는 혼자 하는게 아닙니다. 한 명의 영혼을 살리는 일은 많은 이들이 반복적으로, 열심으로 감당해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을 전도했는데 잘 안된다고 쉽게 포기할 일이 아닙니다. 주변에 도움을 구하세요! 동역하여 함께 ‘영적 중풍병자’가 된 그를 예수님께 인도할수 있도록 계속 시도하세요. 심지어 지붕을 뚫어야만 하는 수고가 동반되어야 해도, 동역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도해주세요. 한명의 영혼을 회복하고 살리는것은, 이처럼 많은 열정과 에너지와, 끊기와 시도가 필요한 일입니다.

    아무쪼록 네명이든, 일곱명이든, 스무명이든 시도하고 또 시도해서 ‘영적 중풍병자’가 예수 앞에서 치료받게 되는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불신자가 그렇게 많은 신앙인들의 반복적 시도를 통해 예수 앞으로 나와 결국 치료되는, 구원되는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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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풍병자의 믿음으로 치료된게 아니라, 네명의 친구의 믿음으로 중풍병자 죄가 용서받았습니다. 육신이 치료받았습니다. (5절)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회복의 은혜를 베푸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간혹 ‘유명한 의사’를 찾아갑니다. 병자는 이미 많은 시도로 실패했기 때문에 시큰둥 합니다. 그러나 그 병자를 의사에게 데리고 간 부모는 의사를 믿습니다. 병자의 태도를 보자면 치료하고 싶지 않지만 부모의 간곡한 부탁으로 의사는 일정을 잡고 치료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다행히 수술이 성공하는 경우를 봅니다. 병자의 기대와 믿음 때문에 수술이 진행된게 아닙니다. 부모의 사랑과 관심, 눈물과, 믿음 때문에 감동받은 의사가 움직인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움직이십니다. 그들에 예수님을 받아들일수 있도록 마음도 바꿔주십니다. “어차피 타인의 믿음인데 나는 어떻게 할수 없어요!” 할것이 아니고, 그런 불신자라도 충분히 치료하고 회복할수 있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주께 인도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기뻐보시고, 그로 인하여 ‘불신자’를 영적 수술대에 올려주실 것입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읍시다.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 일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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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우 이른 새벽 아직 어둑어둑할 때 예수께서 일어나 외딴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35절)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가까운 이웃 마을들에 가서도 말씀을 전파하도록 하자 내가 이 일을 하러 왔다." (38절)

    바로 여기, 우리의 큐티의 시작이 있고, 새벽기도의 시작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 시각으로 보자면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 새벽부터 일어나 기도하실 필요가 없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건강한 신앙의 하루 일과를 보여주십니다. 마치 우리 모두에게 행동으로 가르쳐주시는듯 합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기점에서 기도없이, 말씀없이 살수 있을까요? 저는 지금 집을 떠나 샌디에고에 있습니다. 2시간밖에 차이가 안나지만 나름의 시차가 있고, 어제 새벽부터 일찍 서둘러 이 지역으로 온탓에 몸 상태는 약간 피곤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아침에도 기도와 말씀을 떠날수 없는 이유는 기도와 말씀이 없는 하루는 피곤함 정도의 문제가 아닌 방황의 문제를 야기 시키기 때문입니다. 피곤해도 하루를 사는데 큰 지장이 없습니다.(적어도 제 경우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방향을 상실하면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새벽부터 시작되는 하나님과의 대면은 필수입니다. 대체불가입니다. 호흡과도 같습니다. 밤바다의 등대와 같습니다. 추락하는자 등에 달린 낙하산과 같고, 사막 여행자에게 있는 나침반과 같고, 산속에서 조난당한자 손에 들린 위성전화기와 같습니다. 타협불가입니다. 무엇을 빗대어 설명하든 좋습니다. 기도와 말씀은 우리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른 새벽, 아직 어둑어둑하더라도, 그 시간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장소가 없으면 외딴곳을 찾아 가더라도 반드시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잊지 말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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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원한다. 자 깨끗이 나아라!" (41절)

    예수님은 우리가 깨끗이 낫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회복을 원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나병환자가 예수께 나와 애원한것처럼 우리 자신이 깨끗해지길 간절히 원해야 하는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간구해야합니다.

    많은 경우 깨끗해지길 원하지만 깨끗하게 살지 않습니다. 우리 둘째딸 하나는 음식을 먹을 때 너무 더럽게(?) 먹습니다. 손으로 먹고, 입에 다 묻힙니다. 그런데 또 묻는건 너무 싫어해서 좀 많이 묻는다 싶으면 닦아달라고 입을 들이밀고, 손을 들이밉니다. 저도 아이가 깨끗해지는걸 원하기 때문에 그럴때마다 닦아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깨끗해지길 원하면서도 둘째딸은 계속 더럽게 먹는다는 것입니다. 묻히고 먹고, 손으로 개걸스럽게 먹는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생각보다 깨끗해지길 원한다면서 깨끗해지길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사는 모순을 보여줍니다. '나병'이 떠나가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여전히 나병을 안고 살아가는 모순을 보여주는것이죠.

    우리를 깨끗하게 하기 원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와 씻김받고 변한 인생을살아야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깨끗게 하셨습니다. 정결과 거룩을 쫓으며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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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19절 예수님은 보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오라!”

    예수님은 남들이 보는 나로 나를 정의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아마 시몬,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어부로 정의했을 것입니다. 본인들 조차도 자신을 어부로 정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부르셨습니다. 그들 안에 있는 제자의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소위 말해서 ‘시몬’ 안에서 ‘베드로’를 보신것이지요.

    ‘하나님이 보시는 나’가 중요합니다. 내가 나를 보고 주변이 나를 보면, 80세의 모세는 민족의 리더가 될수 없습니다. 늙었고, 젊어서 있었던 권력도 사라졌습니다. 이제 광야에 사는 이방인이 거의 다된 목자정도의 인물입니다. 그러니 모세 자신도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다르게 보셨습니다.

    2024년, 나를 향한 세상의 정의에 압도되어 살거나, 주눅들어 살거나, 내가 나자신을 정의 내린 부정적 정의 속에 살거나, 꿈없이, 비전없이, 자신없이 살거나 할것이 아닙니다. 내 자리에서 성실히 일하고 있을때 느닷없이 예수님의 부르심이 있을수 있습니다. 내 안에 가능성을 보시고 하나님이 부르실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2024년에는 주께서 부르시면 “아멘!” 대답하고 따라나가는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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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한 영이 내 삶에 틈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내 삶이, 내 생각이, 내 마음이 하나님의 영역이 된다면 사탄이 틈타지 못할 것입니다. 귀신이 감히 틈타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스치듯 한 공포영화 리뷰 장면을 본적이 있습니다. 젊은 학생들이 앉아서 귀신을 부르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Let me in!”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짓인가요? 귀신속으로 들어가려는, 귀신을 내 속에 초대하는 이러한 장난(?), 이건 있을수도 없는일입니다. 소설 속에서 조차 잔인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귀신을, 사탄, 마귀를, 악한영이 틈타게 한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가장 금지해야하는 행동입니다. 우리는 성령에 충만한 자요, 악한 영이 들어올수 없는 자입니다. 한해동안 성령에 충만함으로 악한영이 틈타지 않는 한해가 되야할줄로 믿습니다.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악의 영의 파편(?)들조차 떠나가고, 틈타지 않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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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께 치료를 받자 열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예수님과 무리를 시중들기 시작했습니다.

    몸이 낫자마자 사역을 시작한것입니다.

    운동선수들을 보면 이런 시도들을 합니다. 수술을 잘하고 꼭 필요한 일정을 쉽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다시 운동에 매진합니다. “이제 수술했으니 좀 천천히 해!”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그러면 회복이 더디고, 결국 완전히 회복되지 않을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회복의 여유는 때로는 이렇듯 최악의 수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운동선수들은 이를 악물고 재활을 합니다. 그렇게 몸을 극한으로 조금씩 몰아붙이며 회복의 속도와 완전성을 높이는 것입니다.

    사역과 신앙도 그렇습니다. 때로는 너무 많은 여유 때문에 회복이 더딥니다. (물론 어느땐가는 잠시 쉬어가는것도 맞습니다.) ‘열이 떨어지면’ 바로 ‘시중’을 드는 이 과정을 통해 오히려 여전히 신앙의 온도를 지키고, 건강을 좀더 수월히 회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회복과 사역의 간극을 너무 띄어놓지는 말아야겠습니다. 서두르지는 않되, 옳은 타이밍을 놓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나았다면, 치료되었다면 이제 사명으로 뛰어들 때 입니다! 바로 지금이 그 때 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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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의 소리가 있다. ‘주를 위해 길을 예비하라. 그분을 위해 길을 곧게 하라”’라고 기록돼있는대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죄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습니다. (3-4절)

    바우교회 목회철학의 근간이 되는 말씀입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의 소리’가 되었습니다. 이름도 남기지 않고 복음만 전하는 목소리 입니다. 그저 예수 오실길을 예비하고 외치는 소리 입니다. 이것이 어릴적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마음 깊이 새긴 말씀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드러나게 하겠다! 예수님만 전하는 소리가 되겠다!’

    또 한가지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이렇게 결단했습니다. ‘소리는 메이지 않고 공간을 뛰어넘는것처럼 어디있든지 복음의 소리를 외치는 자가 되야겠다’

    모든 ‘교회’는 예수님이 오실 길을 예비해야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오직 예수님만 드러나게 해야합니다. 교회이름, 개인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간증, 우리의 이야기도 그닥 중요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중요하고, 예수님이 중요합니다.

    2024년 예수님과 복음을 전하는 교회요 개인이 되기로 다시 한번 결단합니다. 광야에서 외쳐지는 예수님의 복음의 소리가 되야겠습니다!

    2

    성령 세례 받는 2024년 한해가 되야합니다. 내 안에 이미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더욱 성령을 사모하며, 성령충만으로 살아가는 2024년이 되기를 사모합니다. 성령없이 살수 없고, 성령없이 승리하지 못하고, 성령없이 성취하지 못하고, 성령없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성령없이 타오르듯 주를 위해 소멸할수 없습니다. 성령없이 어떻게 교회를 섬기고, 목양을 하고, 설교를 할수 있을까요? 어떻게 사랑하고, 용서하고, 베풀고, 축복할수 있을까요? 성령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수 없습니다.

    성령님과 함께 뜨겁게 살아내는 2024년 될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13절에 기록처럼 예수님은 40일동안 광야에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명확하고, 나를 기뻐하실지라도 ‘시험’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놓여있습니다. 이겨야 합니다. 시험에 져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처럼 말씀으로 승리하고 믿음으로 승리해야합니다.

    말씀이 없으면 승리할수 없고, 믿음이 없으면 현혹앞에 단호할수 없습니다. 2024년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받고 기쁨 받는 자녀로 시작했다가도 일순간에 망할수도 있습니다. 사탄의 시험앞에 넘어지면 찬란한 시작과는 다르게 그 끝이 완전히 무너질수 있습니다. 그러니 말씀과 믿음으로 무장해야겠습니다.

    시험 앞에 필요한 것은 ‘성령의 검, 곧 말씀의 검과 믿음의 방패’입니다. 예수님이 시험에 승리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올려드리는 삶을 시작하셨듯이, 우리도 2024년 말씀과 믿음으로 승리해서 하나님이 맡기신 사역을 감당하는 한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말씀과 믿음으로 사는 2024년이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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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마지막 날의 묵상 나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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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기억합니다. 신학교에서 이 본문을 가지고 강의하시던 교수님이 웃으시며 학생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여자 없습니다! 괜히 이런 아내 되라고 설교하지말고, 이런 아내 찾지 마세요! 이 잠언을 읽고 본인이 현숙한 자가 되길 힘쓰세요! 그게 더 지혜롭고 빠른(?) 길입니다!”

    현숙한 여인도 좋고, 현숙한 여인을 찾는것도 좋지만, 내가 먼저 현숙한 사람이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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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사용된 ‘현숙’이라는 단어는 사실 ‘군인, 군대, 용맹, 힘’등으로 대부분 번역된 단어입니다. 왜 이런 단어를 쓰게 됐을까요? 이후에 잠언 기자의 설명을 들어보면 왜 이런 단어를 썼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현숙한 여인’은 도움이 되고, 부지런하고, 일을하고, 멀리서 양식도 구해오고, 포도원도 짓고, 힘차게 일을 하고, 장사하고, 밤에 잠도 안자고, 손가락으로 물레를 잡고, 한손으로 가난한 이들을 돕고, 따듯하게 옷을 만들어 입히고, 고운 베옷을 지어 팔고, 집안의 대소사의 일을 하고, 잘 먹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특수부대보다 더 독한 사람 아닌가요?

    그래서 그런지 ‘현숙’이라는 이 단어를 보며 한가지 허무맹랑한 묵상과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현숙’하려면 건강하고 힘이 좋아야겠구나!’. 용맹하고, 건강하지 않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부지런한 사람이 되고,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도 일을 할수 없고,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수 없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기본은 ‘힘과 건강이다’ 라는 다소 허무맹랑한 결론을 내려 봅니다! 2024년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일하고, 성실하고,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되려면 건강과 힘 관리를 잘해야겠습니다! 영육의 ‘근육맨’이 되야겠습니다! 운동과 훈련, 규칙적인 삶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기본입니다! 기본을 놓치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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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남편이 그녀를 마음으로 끝까지 믿으니” (11절)

    결국은 믿음이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듭니다. 여인이 정말 ‘현숙’한 여인 이었겠지만 동시에 아내를 향한 남편의 믿음도 무시할수 없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믿어줍니다.

    아무리 아내가 현숙해도 믿어주지 않는 남편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 그런 ‘남편’들 많이 봤습니다. “여자가 집에서 밥이나 할줄 알지!!” 그러나 사실 생각해보면 집에서 밥도 할수 있는 엄청난 엄마들이었습니다. 단지 남편이 아내의 그 훌륭한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믿어주지 않았을 뿐입니다.

    ‘현숙한 아내’는 남편이 믿어줘야 가능합니다. 아무리 현숙해도 남편이 무시하면, 남편이 믿지 않으면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당신이 마주한 ‘현숙한 아내, 현숙한 남편’을 믿어주세요. 인정해주세요. 그러면,

    “부족한 것이 없을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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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가르침이 이렇습니다.

    육신의 쾌락과 욕망에 휘둘리지 말고, 폭력과 힘의 쟁취, 권력의 논리에 빠지지 말고, 분별력이 떨어지는 일을 하지 말고, 중독되지 말고, 판결은 정직하게 하고, 정의를 위해, 연약한 자를 위해 변호하고, 공의로운 재판관이 되고,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의 편이 되어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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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어머니들은 아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줄까요? 너는 다른거 신경쓰지말고 네 공부나 해! 돈이 젤 중요해! 친구는 나중에 사겨도 돼, 지혜롭게 거짓말하고, 눈치보고, 줄 잘서고, 괴롭힘 당하는 애 보면 모른척하고, 투자를 배워, 부자가 되야돼, 반드시 성공해야해,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야돼, 하나님은 나중에 섬겨도돼!, 뭘 하든지 안걸리면 돼! 도움이 될만한 친구를 사겨!

    요즘 교회 권사님들은 자녀들에게 뭘 가르치고, 충고할까요?!

    요즘 교회는 어떤 지혜를 가르치고 있을까요?

    좋은 가르침으로 자녀에게 줄줄 아는 부모가 되야겠습니다. 마땅한 지혜를 가르치는 교회가 되야겠습니다. 자녀된 자들은 바른 훈계에 귀를 기울여야 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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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6절) 부족해서 만족하지 못하는게 아닙니다. 만족하지 못하니까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거머리는 도무지 만족을 모릅니다. 절대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결국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욕심을 버리지 못하면 단언컨데 평생 만족하지 못합니다. 단 한 순간도 ‘충분하다’ 느끼지 못합니다. 이만큼 불행한 인생이 또 있을까요?

    욕심은 인간관계도 망칩니다. 하나님께도 ‘거머리’같은 인생이 되고, 이웃에게도 ‘거머리’같은 인생이됩니다. 맨날 달라고만 합니다. 맨날 달라고만 하는 인생은 사랑받지 못합니다.

    욕심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기억해야합니다. 욕심이 얼마나 인생을 갉아먹는지 알아야합니다.

    그러므로 머리와 마음과 입술로 연습해야합니다. “나는 충분합니다. 나는 만족합니다. 나는 넉넉합니다!” 그리고 더욱 선언해야합니다. “주님으로 인해 충분합니다. 예수로 인해 충분합니다. 예수님 한분만으로 만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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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28절) 피조물에게 배웁니다. 약점을 보완하는 지혜, 미리 준비하는 지혜, 부지런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나를 지킬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누가 있으나 없으나 질서를 지키는 지혜, 서로의 순서를 지킬 줄 아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본인에게 정직하고 규모있는 삶을 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언제나 기민하게 움직여야하고, 내가 해야할 일이라면 위험을 무릎쓰고서라도 고집스럽게 그러나 지혜롭게 해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상 개미와, 오소리와, 메뚜기와, 도마뱀에게 배운 지혜입니다. 오늘 배운것만 잘 실천해도 존경받는 사람이 될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누군가가 ‘동물들’을 보면서 이러한 지혜를 배우는것이 아니라 저를 보면서 이런 지혜를 배울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더 분발해야겠습니다! 동물에게 배우기에는 조금 자존심 상하는(?) 아침입니다 ㅋㅋ (이것도 교만의 일종일까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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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굴의 기도는 이것입니다. “부자도, 가난한자도 되지 않게 하소서! 자칫 부자여서 하나님을 버리거나, 가난해서 죄를 지을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이 기도는 가난과 부에 대한 기도가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도 아닙니다. 그의 기도는 믿음과 거룩을 지키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어떤 삶이 되든 그는 믿음을 지키고 싶은것입니다. 거룩을 지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믿음과 거룩을 방해하는 모든것이 제거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게 설명 부일지라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아굴의 기도는 그러므로 참으로 본받을 만한 기도입니다. 신앙인이 언제 가장 많이 기도하는가 보니까. 힘들때 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기도할때가 바로 연말 연시 입니다. 마무리와 시작에 대한 기대감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우리는 아굴의 기도가 보여주는 ‘건강한 기도의 전형’을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간혹 기도할때 저도 조심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마냥 “하나님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할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교회가 규모적으로 커지면서 본질을 상실하고, 교회의 허울만 남고, 하나님 앞에서 죄짓는 교회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가 너무 힘들어져 낙심만 하는것도 원하는 바는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때 지혜로운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큰교회도 아니요 작은 교회도 아니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되게 해주세요. 규모에 상관없이 본질을 잃지 않는 교회되게 하시고, 거룩을 상실하지 않는, 목적을 상실하지 않는 교회되게 해주세요. 만약 규모가 커지는데 교회가 길을 잃을것 같으면 부흥하지 않게 해주세요!”

    우리의 기도는 성숙하고 신중한 기도가 되야합니다. 개인의 기도도 마찬가지 입니다. 믿음을 지키는 기도를 해야합니다. 경건을 지키는 기도를 빼먹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부자가 안되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거룩안에 사는게 더 복된 일입니다. 기도가 중요한 이때, 아굴의 기도로 따라해야겠습니다. 유아적 기도가 아닌 성숙함의 기도를 드려야겠습니다. 2024년도 오직 하나님께 가장 영광 돌려드리는 삶이 되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죄를 멀리하는 경건의 삶을 살수 있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 몇가지 목회적 잠언을 묵상해 봅니다.

    첫번째 “성급하게”(20절) 입니다. 성급한 언행은 어리석은 사람보다 더 어리석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좀 성급합니다. 그래서 실수가 많고, 성급함에서 파생되는 죄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분노를 쉽게 냅니다. 밖으로 표출되고, 폭발하는 분노는 아니지만 내면적으로 쌓이고, 내면에서 폭발하기 때문에 내 자신을 힘들게 만듭니다. 자칫 이 ‘성급함’이 밖으로 삐져나올라치면 주변 사람까지 다치게 합니다. 일의 완성도도 떨어집니다. 성급한 언행을 길들여야겠습니다.

    두번째는 겸손함 입니다. (23절) 외면적 겸손함 말고 내면적 겸손함을 절대 놓치지 말아야겠습니다. 교만하면 낮아질 일밖에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진짜 입니다. 마음이 겸손해야 합니다. 진심이 겸손해야 합니다. 내외면이 겸손한 목사가 되기로 다시 한번 결심합니다. 뭐가 잘된다 싶을때 항상 교만하지 않은지 체크해야겠습니다.

    세번째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25절) 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덫에 걸립니다. 빠져나오기 힘듭니다. 이런 사람은 할일도 못하고, 방향도 잘 못잡습니다. 결국 위험에 처하는 일이 수두룩 합니다. 사람 두려워하면서 목회하면 끝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며 목회하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목회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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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꾸 혼나는데도, 지적을 받는데도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죠. 일종의 교만이고, 상대를 향한 무시입니다. 혹은 그저 무신경한 사람일수도 있지요. 아니면 본질적으로 악하거나 게으른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책망 앞에서 이와 같이 고집부리는 사람은 ‘회복되지 못하는 멸망’을 당하게 될지 모릅니다.

    10년이 넘는 부부관계를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아내나 남편이 서로에게 잘못된 점을 반복하여 지적할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틀렸음을 인정하고 고쳐야 합니다. 그런데 고집스럽게 안고칠때 결국 인내가 바닥이 나고 누군가 먼저 ‘이혼’이라는 강수를 꺼내들게 되기도 합니다. 상대가 무조건 인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것 자체가 너무 이기적인 처사입니다. 그래서 지적 받으면 진중하게 생각하고 고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결국 이는 모든 ‘관계’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그리고 더 나가 하나님과 우리 안에서 반드시 적용되야 하는 원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책망하거나 지적할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지적하시고 책망하십니다. 그럴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때 교만한 목을 꺽어서, 고집스러운 맘을 망치질로 때려서라도 들어야합니다. 마음에 새기고 삶으로 바꿔야합니다.

    옳지 못함에 대한 지적 앞에서 고집을 피우다가는 반드시 망하게 될것입니다! 정당한 지적 앞에서 귀를 열어 듣고, 마음으로 받고, 삶으로 적용하는 지혜자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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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리 크리스마스 입니다.

    시므온이나 안나같은 ‘영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의 계시도 받고 (26절) 실제 분별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28-30절) 사실 이는 흔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이런 ‘영적인 사람’을 보면 신비한 얘기를 듣기 원합니다. 흡사 점을 보는것과 같은 마음으로 기대하고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시므온과 안나같은 ‘영적인 사람’은 사람들의 궁금증과 불확실한 미래를 알려주기 위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적 분별로 예수 그리스도를 분별하고, 아기 예수에 대해서 설파하기 위해 있는 사람들 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언급하는 ‘예언’이다. ‘통찰’이다. ‘지혜’다 ‘계시’다 하는 것들은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함이고, 예수그리스도에 관함 입니다. 신비로운 얘기를 하는 자들이 아니고 예수님 얘기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워낙에 예수님 얘기가 때로는 신비롭고, 위대하고, 미래적이고, 새롭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영적인 이들’에 대해서 오해하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신비로운 얘기에 현혹되지 마세요. 분별의 은사로 점 보려고 하지 마세요. 예언과, 점궤 같은 이야기들에 속지 마세요. 진짜 ‘영적인 사람’들은 다른 얘기 안합니다. 예수로 시작해서, 예수로 마무리되는 얘기를 할뿐 입니다. 시므온과 안나와 같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알아보고, 알아듣고, 깨닫게 하는 얘기를 하는 자들입니다. 신령한자, 신비로운 얘기를 하는자를 쫓지 말고, 예수님에 대해서 밝히 전하는 자를 쫓아야합니다. 그게 건강한 신앙이고, 건강한 교회고, 건강한 목사고, 건강한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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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산을 얼마 남기지 않고 호적 등록을 위해서 각자 고향으로 가게 됩니다 그렇게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에 머물게됩니다.

    그러나 우연같은 이 일은 사실 미가서 5장 2절의 예언이 성취되는 현장입니다. 세상은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연’같은 상황이 겹치면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당시 갑작스럽게 내려진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칙령도, 굳이 이때 호적 등록 제도가 시작된것도, 그들의 고향이 베들레헴인것도 모두 하나님의 완벽한 섭리입니다. 우연도 아니고, 그냥 생긴 일도 아닙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손수 준비하신 완벽한 선물, 최고의 선물 입니다. 만약 당신이 오늘 이 글을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처음 들었다면, 이 또한 우연이 아닌, 당신을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완벽한 타이밍에, 최고의 선물 입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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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생의 환경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탄생한 인물이 중요합니다. 말구유에 눕혔을지언정 예수님은 왕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구원의 한 길입니다. 영광이요 평화입니다.

    예수님을 출신과 배경으로 판단했다면 그는 그토록 큰 주목을 받을 필요 없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장성하시고 사역하시는 중에 실제로 많은 이들에게 나사렛 출신이라고, 목수출신이라고 무시 당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떤가요? 예수님은 역사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가장 많은 추종자, 혹은 신앙인을 거느리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영향력은 역사 안에서 고스란히 기록되어있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의 인생도 ‘구유에 뉘여있는 인생’ 같습니다. 흔한 표현으로 흙수저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출신과 배경이 '흙수저'일지라도, 다시 말해 우리의 출신과 배경이 '나사렛, 말구유'일지라도 우리 모두는 최소 두가지 면에서 너무 중요합니다. 첫번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두번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대속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나의 출신과 배경 때문에 주눅들 필요 없습니다. 모든 믿음의 자녀는 이미 충분히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각자의 부르심 앞에 보냄받은 사명자 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처한 상황에 의해서 건강한 정체성과 자존감을 버리고 사는게 아니라, 말구유에 있을지라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사명자입니다!” 라는 정체성과 자존감으로 살아야할것입니다. 말구유에 탄생한 예수님이 자신의 인간적 출신에 낙심하지 않고 대속의 십자가를 완성하시자, 별볼일 없던 ‘구유’가 오히려 예수님 때문에 ‘성지’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우리만의 십자가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니 출신과 배경을 훌쩍 뛰어넘어 건강한 사역자가 되야 합니다. 출신에 상관없이 나의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의 정신을 승계하는 성도의 모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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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서로 사랑합시다!” (7절)

    요한은 이 말 이후에 사랑의 기원이 하나님임을 말합니다. 또한 이 사랑의 결과로 독생자 예수가 화목제물로 이땅에 오셨다는 것도 기록합니다. 당장에 이 두가지 사실만 생각해봐도 ‘사랑’이 실천하기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도 요한은 사랑을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요한의 이 권고가 어쩌면 다른 이들의 권고보다 힘이 있는 이유는 그의 가르침이 ‘사랑하는 여러분’이라는 그의 고백으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분명히 사랑의 함의를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7-11) 그런데도 그가 “사랑하는 여러분”이라고 말을 시작한다는 것은 그는 이미 이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진짜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사도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주 ‘사랑의 사도’라 불렸습니다.

    사랑을 가르치는자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자가 되야겠습니다. 사랑을 가르치는 자는 넘쳐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이라고 진심을 다해 말할수 있는 자는 흔하게 찾지 못합니다. 사랑을 가르치는 목사보다 사랑을 실천하는 목사, 사랑을 배우는 성도보다,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되길 도전합니다. 사랑은 이미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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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과 완성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12절) 우리의 사랑의 시작이 언제나 온전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유치하고, 어립니다. 다듬어지지 않았고, 성숙하지도 않습니다. 많은 경우 이기적이고, 나의 본능에 충실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아적이고 초보적인 사랑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장해 갑니다. 이기적인 사랑이 이타적인 사랑으로, 유치했던 사랑이 성숙해지고, 모난부분은 다듬어지는 사랑이 됩니다. 본능을 쫓는 사랑이 아니라 본질을 쫓는 사랑이 됩니다. 시작하지 않으면 온전해질수 없습니다. 사랑의 실천이 반복될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장성하여져서 온전히 완성되게 될것입니다.

    저의 경우, 연애전에, 결혼후에, 첫아이를 낳고, 둘째 아이를 낳으면서 사랑의 성장을 직접 느낍니다. 어린 청년 전도사에서, 교회를 개척한 목회자로써 사랑을 실천함을 통해 성도를 향한, 교회를 향한 사랑의 성장도 느낍니다. 더욱 사랑함으로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랑에 이를 수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더욱 사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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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로몬의 지혜가 가장 강력하게 공격받는 시대가 오늘날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기 땅을 잘 일구는 사람은 풍성한 양식을 얻지만 헛된 것을 좇는 사람은 가난에 찌들 것이다. 성실한 사람은 복을 많이 받지만 벼락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벌을 면치 못한다.” (19-20절)

    오늘날 이 ‘지혜의 원칙’이 잘 적용되지 않아 보일때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오늘날은 ‘성실’의 가치를 의심합니다. ‘열심’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청년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서 평생 돈벌어 봐야 집 하나 사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실히 일해도 평생 가지고 싶은거 갖고, 편안하게 누리며 살 기회를 얻지 못해요!”

    그러다 보니 성실보다는 포기를 선택합니다. 꿈도 포기하고, 결혼도 포기하고, 아이도 포기합니다. 거기다가 일확천금을 꿈꿉니다. 말그대로 ‘벼락부자’를 꿈꾸는 것입니다. 성실과 열심으로 사는것이 아니라 ‘요행’을 바라는 것입니다.

    성실의 가치, 열심의 가치는 그렇게 의심받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가치를 ‘어리석음’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실과 열심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태도입니다. 세상이 완악해서 성실과 열심을 알아봐주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을 지라도 성실과 열심이라는 지혜를 포기하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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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를 의지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롭게 사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 (26절)

    운동을 할때, 무거운 무게를 들어올릴때 주로 도와주는 사람을 세워두고 합니다. 정말 십수년만에 체육관에서 벤치프레스를 했습니다. 잘모르니 함께 간 청년이 달아주는 무게로 시작했습니다. 몇 세트가 반복되니까 처음에 가벼웠던 무게도 더이상 들어올릴수 없는 무게가 되었습니다. 그때 마지막 두번의 프레스를 청년이 도와주었습니다. 청년이 아니었다면 저는 깔렸겠지요.

    제 힘을 의지하는것만큼 무서운게 없습니다. 처음에 된다고 나중에 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나'를 어떻게 믿습니까?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운동할때 보면 팔뚝이 제 머리 만한 사람도 무거운거 들때 주변에 또 다른 근육쟁이를 불러 도움을 미리 요청합니다! 지혜입니다. 그런 사람이 위기의 상황에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내 힘을 의지할것이 아니라 주의 힘을 의지해야합니다. 당연한 소리입니다.

    사실 제 운동 세트가 끝나고 청년의 벤치 프레스를 도와주는데 무게가 저의 두배는 넘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내가 서있긴 서있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될꺼야!!” 맞습니다. ‘나’도 ‘우리’도 절대적 힘은 아닙니다. 나를 의지할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한한 인간만을 의지할것도 아니고 전능자 하나님을 의지해야합니다. 살려면 그길이 가장 안전합니다. 최고의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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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 전도사 생활(?)까지 해서 20년 교회 안에서 ‘교역자’로 섬겼습니다. 이 세월동안 안타깝게도 쫓겨나는 목사님도 보았고, 갈라지는 교회도 몇번 경험했습니다. 이런 일을 경험할 때마다 문제삼고, 문제 일으키는 교회의 ‘중직자’들을 이해하기도 어렵고,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훌륭한 담임 목사를 견제하고, 내쫓는것이 못내 아쉽고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오늘 잠언의 지혜를 묵상하면서 생각해보면 어쩌면 교회의 리더였던 당시 ‘담임목사님들’이 ‘통찰과 지식’이 부족(?)하거나 준비되지 않았던 부분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라에 반역이 일어나면 통치자가 자주 바뀌지만 통찰력과 지식이 있는 사람이 다스리면 그 나라는 오래간다.” (2절)

    리더십에 대한 많은 고찰이 있습니다. 시대와 문화마다 추구하는 리더십의 모습은 조금씩 그 모습을 달리하기도 했습니다. 카리스마 넘치고 몰아붙이는 강력한 리더가 인정받던 때가 있던 반면에, 언젠가는 먼저 솔선수범해서 섬기고, 후원하고, 인정하고, 응원하는 ‘섬기는 리더십’이 사랑받은 세대와 문화도 있습니다. 지식과 정보로 가르치는 리더가 있는 반면에 귀를 열고 잘 들어주고 배우고 수렴해주는 리더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와 세대, 문화와 상관없이 ‘리더’는 말그대로 ‘좋은 인도자’가 되야합니다. 그것이 섬김의 형식이든, 끌어가는 형식이든, 부드럽든, 강단있든 결국 리더는 바르게 이끌어야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와 통찰'이 필요합니다. 지혜와 통찰이 없다면 분별하지 못하고, 지식이 부족하고, 갈팡질팡하고, 휩쓸려 쫓겨나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따라 가던 팔로워들까지 생각지 못한 어려움을 경험 할수 있습니다.

    지금 바우 교회를 섬기는 담임 목회자로써 ‘통찰과 지식’이 있는 건강한 리더가 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또한 부지런히 필요한 지식과 통찰을 습득하는, 책임감 있는 리더가 되야겠습니다! 흔들리는 리더는 매력 없습니다! 분별하고, 인도하고, 섬기고, 함께하는 리더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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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부터 A.I.는 현 시대의 커다란 이슈가 되었습니다. ChatGPT로 시작되더니 이제는 로봇싸움(?)도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며칠전에 테슬라에서 로봇2기(?)를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이 떠들석 합니다. 계란을 옮기는 퍼포먼스에 대한 엄청난 평가들이 주류를 이룹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공학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무하기 때문에 무엇이 이토록 놀라운 일인지 도무지 알수가 없습니다. 설명을 찾아보는데도 쉽게 이해하는데 무리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해를 잘 못하고 있습니다.

    ‘악한 사람은 공의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여호와를 찾는 사람은 모든 것을 깨닫는다.” (5절)

    영적인 통찰도 마찬가지 입니다. ‘악인’은 하나님의 공의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완벽성과 절대성을 이해하지못합니다. 제가 로봇공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것처럼 악인은 절대 하나님의 공의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제가 만약 진짜로 로봇공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말도 안되게 힘들겠지만 처음부터 공부를 시작해야합니다. 본질적이고, 기초적인것부터 시작하면 어쩌면 10년후, 20년후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할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이해하는것도 케이스마다 알고 싶어서 뛰어들기 보다는 ‘여호와를 찾는 것’ 부터 시작해야합니다. 그러면 본질이 보이기 시작하고 모든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본질을 깨달으면 하나씩 일일이 물어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시선 속에서 공의를 비로서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말씀을 알아야 죄와 공의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여호와를 찾는 사람”은 비로서 모든것을 깨닫게 될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추구하며 살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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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일찍 큰 소리로 그 이웃을 축복하면 그것은 오히려 저주로 여겨질 것이다.” (14절)

    어제 아침에 운동을 갔습니다. 저는 지난 3년간 꾸준히 홈트로 몸의 건강을 지켜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게를 들어올리는 일을 하거나, 아주 어려운 운동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 운동은 달랐습니다. 잠시 방문한 처남과 함께 gym을 가게 되었습니다. 거의 15년만에 방문한 gym이었습니다. 체육관에 도착하자 힘도 좋고, 더욱 건강한 처남은 자리를 잡기 무섭게 저에게 뭘 할지 물었습니다. 사실 저는 혼자만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홈트로 맞춰진 몸이기에 천천히 몸을 풀며 한번 스윽 기구들을 살펴보고 제 페이스에 맞게 운동 계획을 짜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몸이 유독 건강한 처남이 바로 저를 불러 벤치프레스를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연약한(?) 저를 건강하게 만들어주고 싶었겠지요. 좋은 의도로 그렇게 한것입니다. 마치 ‘이른 아침부터 큰 소리로 이웃을 축복하는 이웃’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14절) 그러나 아직 준비 안된 저에게는 아침 공복에 가자마자 벤치 프레스는 무리였나 봅니다. 운동 시작하고 한 50분이 채 안됬을때 저혈당쇼크로 쓰러지기 일보직전까지 경험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자칫 기절할뻔 했던 상황이 생긴것입니다. 겨우 겨우 정신을 차린 저는 그날의 운동을 거기서 멈췄습니다. 아쉬운 순간이었습니다. (*운동을 하려면 사전에 꼭 뭐라도 챙겨먹어야겠습니다 ㅋ)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내 딴에는 축복하겠다고, 좋은 일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남에게는 ‘저주’ 같이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축복’도 좋은거고, ‘벤치프레스도’도 좋은것이죠. 그러나 언제나 좋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새벽부터 시끄러운 소리로 축복하는데, 불면증에 시달리다 겨우 잠든 이웃이 그 소리에 깨면서 행복할리 만무합니다. 축복은 커녕 귀 따가운 소음일 뿐입니다.

    실제로 무작정 공부가 답인줄 알고 공부하라고 강압적으로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공부가 아닌예술성을 발휘해서 인정받는 자녀들을 봅니다. 성공하는 인생을 위해 아침을 깨우라고 그렇게 강요했는데, 이후에 자신의 바이오리듬에 맞춰 밤에 공부하고, 일하고, 연구하며 승승장구 하는 사람들도 보게 됩니다.

    이웃을 축복하고자 하는 마음이야 참 좋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축복도 지혜롭게 해야 축복이 됩니다. 사랑의 말과 행동, 축복의 말과 행동을 지혜롭게 행하는 자가 될때 비로서 받는 자들이 그 충고와 사랑을 온전히 누리게 될것입니다. 축복마져도 독단적이지 않도록, 사랑마져도 독단적이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같이 gym 에서 운동하실 생각이 있으신 성도님은 연락주세요 ^^ (강압 아닙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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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듯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 (17절)

    날카로운 칼이 필요합니다. 집에 있는 칼들은 써는 느낌이라기 보다는 뜯어내는 느낌입니다. 간혹 너무 칼이 안들때면 칼을 가는 기구를 꺼내서 칼을 갈기 시작합니다. 뭉뚝해진 칼을 갈아 날카롭게 만들려면 그 도구는 더욱 튼튼해야합니다. 뭉뚝한 칼에 갈려버린다면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듯 사람이 사람을 날카롭게 합니다. 이런 사람이 되려면,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려면, 더욱 빛나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 되려면, 내가 먼저 단단해야합니다. 튼튼해야합니다. 영향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야합니다. 자칫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는게 아니라, 나도 같이 뭉뚝해져 빛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나 자신이 녹슬지 않도록, 무르지 않도록, 나의 주변의 사람들을 날카롭게, 빛나게 만들어주는게 아니라, 내가 물들어 버리고, 망가지지 않도록 ‘강력한 철’이 되야겠습니다. 모세의 형 아론은 백성들을 빛나게 하지 못하고, 자신의 빛마저 잃어버리는 ‘뭉뚝한 철’이었습니다. 조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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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은 도가니에서, 금은 풀무에서 단련되듯 사람도 칭찬으로 사람됨을 시험해 볼 수 있다.” (21절)

    사람은 보통 ‘풀무’를 통해 단련되고 시험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만 시험받고 단련된다고 생각하는것이죠. 그러나 사실 사람이 시험당하고 성장하는 것은 ‘고난’만 있는것이 아닙니다. ‘칭찬’으로도 얼마든지 그 사람을 시험하고 단련할수있습니다. 고난이 많은 사람을 무너지고 시험들게 하듯이, 칭찬도 많은 사람을 무너뜨리고 시험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칭찬받으면 교만해지는 사람 있습니다. 들뜨는 사람들 있습니다. 영광을 홀로 취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높아지면 변하고, 인정받으면 건방져집니다. ‘칭찬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종의 ‘스타병’은 많은 이들을 쓰러뜨리는 시험이 됩니다. 그러므로 ‘칭찬의 시험’을 만나면 더욱 마음을 지켜야합니다. 쉽게 교만해지지 않도록, 들뜨지 않도록, 착각하지 않도록, 건방져 지지 않도록 경계해야합니다. 당신이 이 ‘칭찬의 시험’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또 다른 성장의 걸음을 절대 걸을 수 없을 것입니다. ‘고난’ 이상으로 많은 이들을 넘어뜨린것이 바로 이 ‘칭찬의 시험’입니다. 칭찬의 시험 앞에 조심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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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말이 되면 정신없이 한해를 마무리하는 모임을 갖습니다. 그러다보면 서로에게 여지없이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내년 계획은 어떻게 돼?”

    사실 자랑까지는 아니여도 우리는 긍정회로를 돌리며 내년의 계획들을 조심스럽게 나누곤 합니다. 올 한해가 좋았다면 더 긍정적인 내년을 꿈꾸고, 올해가 힘들었다면 내년에는 회복될 꿈을 꾸며 나눕니다. 그러나 “네가 하루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1절) 라는 지혜자의 충고처럼 사실 우리는 바로 다음 순간조차 자랑할수 없고, 확신할수 없습니다.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알수 없기 때문입니다.

    20년전쯤 벤쿠버 한 아파트에서 살때 학교가 끝나고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옷을 갈아있고 친구들과 농구를 하기 위해서 나갔습니다. 한참 놀고 저녁에 집에 들어오는데 집 앞에 경찰차 수십대와 방송국 차들과 기자들, 그 외에 구경꾼들이 가득했습니다. 내막을 알고 보니 15층에서 조직간에 살인 사건이 일어났고, 계단으로 내려오던 범죄자는 14층에서 집에 들어가려던 목격자를 잡아 올라가서 다시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대가 3시 전후 입니다. 저는 13층에 살았고, 제가 들어가고 나온 시간이 3시 전후입니다. 만약 그 범죄자가 계단으로 내려오다가 14층을 지나 13층에 집에 들어가는, 혹은 나오는 저를 만났다면 저의 오늘은 없었을 것입니다. 진짜 바로 다음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일을 자랑할수 없고, 다음을 자랑할수 없고, 지금 당장의 영광도 자랑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랑할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과거를 감사하고, 오늘을 감사하고, 내일이 허락된다면 감사한다고 말하며 살아야합니다. 그러므로 자랑하려면 이 모든게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자랑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공급, 인도, 보호, 역사를 자랑해야 합니다. 2024년 내 삶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자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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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혜자가 의도한 메세지는 아니겠지만 “배부른 사람은 꿀도 싫어하지만 배고픈 사람에게는 쓴것도 달다”(7절) 이 말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배부르면 꿀을 먹을것이 아니라 나눠줘야겠습니다. 어차피 배불러서 꿀 먹어봐야 감사도 없고, 맛도 없습니다. 이미 배부른데 굳이 그걸 또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배부르면 나눠주는것이고, 그정도 배부르기 전에 적당히 배가찰 때 나눠주는것은 더 큰 지혜입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배고픈 사람’없게 시작부터 나눠주면 그건 더 좋겠습니다.

    한편 배고픈 사람은 쓴것도 달게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배고플때는 오히려 조심스럽게 먹어야합니다. 배고프다고 달려들면 ‘쓴것’도 먹습니다. 그냥 쓰면 다행인데 독일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배고픈 사람이 독버섯 먹고 죽었다는 뉴스를 접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배고파도 정신 바짝 차려야합니다! 분별해야하고, 절제해야합니다. 간절할 수록 조심해야합니다. 무조건 달려들고, 무조건 집어 먹으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배고픈것도 서러운데 먹고 죽으면 더욱 슬픈 일입니다. 배고플 때, 분별이 흐려질 때 더욱 조심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배고파지기 전에 도움을 청하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혹은 배고파지기 전에 부지런을 내야할 수도 있습니다.

    *이상 문맥에 대한 곁가지(?) 묵상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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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으름은 습관입니다. 그래서 습관을 바꿔야합니다. “사람이 좀 쉬는거지 뭘 그렇게 항상 부지런하고 바쁘게 지냅니까?”라고 말할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항상 달린다고, 열심을 낸다고 건강한 인생이 되는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안식’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삶에 ‘안식’밖에 없으면 그것은 더이상 ‘안식’이 아닌 게으름 입니다.

    게으름의 습관을 잘라내야합니다. 경첩처럼 침대에 붙어 뒹구는 자신의 모습을 냉정하게 인정해야합니다. 침대가 꺼져있거나, 소파가 한곳만 꺼져있다면 게으름의 회개를 시작해야할지도 모릅니다 또한 ‘잠시 쉬자’로 시작해서 두세시간을 훌쩍 의미없게 보내는것이 습관이 되어있다면 게으름을 인정해야합니다. 완성됬어야 하는 일이 나의 안일함 때문에 한두주를 지나 한두달 미뤄지고 있다면 게으름을 인정해야합니다. 모든 일에 “여유를 갖어!”라는 말로 합리화 하고 있다면 게으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설것이가 쌓이고, 빨래도 쌓이고, 청소도 안되고, 식사도 불규칙 적이고, 삶에 규모가 사라지면 게을러졌다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입은 바쁜데 행동은 느리다면 게으름을 인정해야합니다. 길어봐야 100년입니다. 짧은 인생입니다. 허송으로 보내기에는 너무 아까운 시간들입니다. 부지런히 살아도 짧은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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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웃을 속이고 나서 “농담이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횃불을 던지고 화살을 쏴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과 같다.” (18-19)

    지혜자의 분노가 느껴지는 표현입니다. 당사자는 ‘의도없이 내 뱉은 말’이라고 합니다. 농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농담 때문에 결국에는 사람이 죽기도 합니다. 실제 ‘아니면 말고’ 식의 화법 때문에 오해받고 자살에 이르는 일들도 있습니다. ‘농담’은 웃을수 있을때 농담이지, 상처입히고, 죽이는 순간 더이상 농담이 아닌 ‘독’이 됩니다. 농담이 사람들의 표정을 굳게 만드는 순간 정신차리고 입 다물어야합니다. ‘농담’이 관계의 균열을 만들어내는 순간 용서를 구하고 멈춰야합니다. ‘농담’이 누구를 울게 만드는 순간 실수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해야합니다. 또한 당신의 말이 돌아 돌아 나중에 눈덩이처럼 불어나 한 사람을 죽일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합니다. 오늘 당신의 농담이 당장은 괜찮은데 일년이 지나 폭탄이 되어 수많은 이들을 죽일수도 있는 일입니다.

    농담의 선(line)을 지켜야합니다. 농담은 선(good)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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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다리를 절던 사람이 수술후 두다리를 못쓰게되었습니다. 무슨 일일까요?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한 청년이 다리가 잘못되어서 수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수술이 끝나고 나니 아픈 다리가 아닌 멀쩡한 다리의 뼈를 잘라내고 철심 3개를 밖아 놓은 것입니다. 그마저도 수술이 잘 안된건지, 결국에는 원래 아픈 다리, 그리고 새롭게 수술한 다리,두 다리를 다 제대로 못쓰게되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나요? 의사가 변명하길 수술하러 들어갔는데 준비되어있는 다리였기 때문에 의심없이 수술했다는 것입니다. 의사가 더 무섭습니다. 의사라서 믿고 맡겼다가 평생 불구되게 된것입니다. 의사도, 자신이 의사이기 때문에 자신있게 수술 칼을 휘둘렀겠지만, 이는 오히려 환자를 더욱 아프게 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고 만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잠언이 이와 같습니다. 술취한 사람의 손에 들린 가시나무 같습니다. ‘잠언’이라고 말하는데 주변에 다 상처주고, 찌르고, 베고, 아프게 할것입니다. 의사가 칼로 치료한답시고 건강한 다리를 장애로 만들어 버린것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잠언을 준다고 말하면서 정작 그것이 '가시나무'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가시나무’로 모든 이들을 상처줍니다. '술에취한자'처럼 대상을 가리지도 않습니다. 10절에도 동일한 말을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결국 아무에게나 활을 쏘아대는 궁수같다는 것입니다.

    ‘잠언’이라고 다 좋은거 아니고, 무조건 치료하는거 아닙니다. 당신이 어리석다면, 부주의한 의사같은 사람이라면, 제대로 준비되고, 잘 알지못한다면, 당신은 오히려 피해를 주고, 상처를 주고, 아프게 하고, 문제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되고 말것입니다. 멀쩡하던 사람도 오히려 아프게 만들지도 모를 일입니다.

    내가 혹 ‘지혜있는척 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아닌지 점검해야겠습니다. 나의 입술을 통해 쏟아지는 ‘잠언’이 ‘가시나무’ 혹은 ‘방향없이 쏘아대는 화살’인지 잘 살펴야겠습니다. (애초에 어리석으면 이마저도 구분이 힘드니, 그냥 겸손하게 잠언을 배우는자가 되는게 낫겠습니다) 말을 줄이고, 잘 듣는 지혜자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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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찔리는(?) 지혜가 너무 많습니다.

    14절 말로만 ‘선물’한다고 하고 지나간 적들이 많습니다. ‘선물’은 아니여도 “밥사줄께”하고 지나간적도 너무 많습니다. 이러한 거짓말들로 상대에게신경쓰고, 사랑하고, 베푸는 이미지를 주고 싶었던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하지 않은적이 너무 많습니다. ‘비없는 구름과 바람같은’ 행동을 한적이 너무 많습니다. 회개 합니다. 거짓말하는 목사 되지 않겠습니다. 거짓말하지 않는 이웃이 되야겠습니다.

    16절 ‘꿀’을 찾고 절제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많습니다. 지혜자의 충고같이 어릴적 돌이켜보면, 맛난 음식 앞에서 절제 못해서 양껏 먹고 체해서 토한적도 있습니다. 아마 저는 몰라도 주식 욕심내고, 주량 욕심 내다가 오히려 인생(?)으로 전부 뱉어내야 했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것도 과하면 안됩니다. 절제하지 못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애써 먹은것도, 취한것도 다시 뱉어내야 합니다. 오히려 아프게 되는 경우도 생깁니다. 좋은것이라도 절제할줄 아는 삶의 성숙을 실천하겠습니다. 아무리 입에 달고, 삶에 달아도 ‘과식’하지 않겠습니다.

    17절 인간관계에 있어서 배려를 실천하고, 선을 지켜야합니다. 정재승 교수의 말처럼 사람은 나랑 가깝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무례해집니다. 나 자신과 동일시 하는 착각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이웃이 너무 편해지면 자주 드나들고,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지켜야할 선을 지키지 못합니다. 친하다고 무례해서는 안됩니다. 가까워졌다고 선을 쉽게 넘어서면 안됩니다. 친할수록 배려하고, 존중하고, 선을 지킬줄 아는 ‘인간관계의 지혜’를 명심해야겠습니다.

    20절 간혹 엄한짓(?) 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상대가 아픈데, 노래 불러 줍니다. 위로한답시고 웃겨줍니다. 같이 울어주거나, 침묵하거나, 혹은 자리를 피해줘야할때도 있습니다. 내 생각에 위로가 될것같다고 해서 그 행동이 반드시 이웃의 아픔을 위로하는것이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위로한답시고 이렇게 말합니다. “힘내! 너만 힘든거 아니야. 나도 다 겪어봤어, 주변 사람들도 다 겪는 일이야! 별거 아니야!! 그러니 힘내자!” 이건 위로가 아닙니다! 울고 있는 사람 옆에서 댄스노래 부르는 격입니다. 불난집에 부채질 하지 말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으면 말은 아끼고 더욱 힘써 기도해야할것입니다. 그저 자리를 묵묵히 지켜줘야할것입니다. 함께 울고, 함께 울어주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28절 제가 요즘에 너무 운동을 못합니다. 일주일에 많이 해야 두번입니다. 그런데 간헐적 폭식은 점점 늘어갑니다. 자제력 상실입니다. 간헐적 폭식보다 위험한것이 단것을 섭취하는것입니다. 단음식이 너무 좋습니다. 도넛이 너무 좋고, 빵이 너무 맛있고, 과자도 너무 좋습니다. 자제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그러면서 느끼는게 도넛과 빵을 먹으면 먹을수록 만들어진 건강과 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 성벽이 무너져 내린 성과 같다!” 라는 이 말이 확 와닫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 입니다. 삶에서 하나님의 가치를 지키지 못하고 죄에 대한 자제력을 상실하면 반드시 무너지게 됩니다. 방어하지 못하게 됩니다. 세상의 유혹에 대한 자제력이 있어야합니다. 자제 해야합니다. 한번에 무너지는 수가 있습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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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든지 대충은 쉬운데 디테일은 어려운 법입니다. 세차를 할때도 깨끗게 하는건 쉬운데, 새차처럼 만드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두배의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10배의 노력을 더 들여도 힘든게 세차해서 정말 새차같이 만드는 일입니다.

    “은의 찌꺼기를 없애라” (4절)

    순금이 어렵고, 순은이 그래서 어렵습니다. 99.9는 만들수 있는데 100%는 불가능하다고 말할 지경입니다. 남은 불순물 찌꺼기를 완벽하게 제거 하려면 제련하고 또 제련하기를 반복해야합니다. 그래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알기로 ‘순금’ 이라고 할때 99.9%를 얘기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에 찌꺼기는 0.1%도 남기면 안됩니다. 깨끗하게 씻어야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예수의 보혈로 가능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씻고 또 씻어도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찌꺼기’를 완전히 제거할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참으로 정금과 같이 나오게 하실 것입니다. 흰눈보다 더 깨끗게 하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예수의 보혈로 칭의 받아 온전하고 깨끗한 자가 되어 성화의 삶을 더욱 살아내고 싶습니다. ‘쓸만한 그릇’의 인생으로 주님을 위해 사용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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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경우 일을 키우는것은 당사자 입니다. 분명히 일을 키우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 문제를 당사자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말합니다. “너만 알고 있어야돼!! 넌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결국 당사자가 아닌 타인들의 입에서 ‘나의 문제’가 오르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비밀은 드러나고, 일은 커지고, 상처는 더욱 커집니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그마저도 해결이 쉬울일도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어쩔때는 개인 대 개인의 문제가 결국 팀 대 팀의 대결로 확장대기도 합니다. 더큰 분열과 혼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원래 제3자들은 말이 많기 마련이고, 말이 많으면 왜곡되기 마련이고, 왜곡되면 감정이 흐트러지게 마련이고, 감정이 흐트러지면 진흙탕 싸움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당사자와 직접’ 해결하는게 지혜입니다. 이것만 잘 지켜도 오늘날 경험하는 ‘공동체 안에서의 문제’의 반 정도는 해결될지 모릅니다.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상처와 오해, 시기와 다툼이 한결 잠잠해 질지 모릅니다. 덕분에 공동체 안에 밥먹듯 일어나는 파당짓는 일과 분열도 설 자리를 잃을 것입니다.

    ‘당사자와 직접’ 해결하는것이 지혜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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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 (26절 개역개정)

    정직하고 바른 말을 들으면 표정이 안좋은 경우가 많습니다. 당연히 좋아야하고 감사해야하는데 오히려 기분 나빠하고 불편해 하는 것이죠. 심지어 간혹 누군가는 팔을 걷어붙이고 싸우려고 하기도 합니다. 잘못된 반응입니다.

    오늘 본문에 '적당한 말'은 번역하자면, 바른말, 정직한 말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항상 바른말 정직한 말을 해야합니다. 상황이나 사람을 가리지 않고 바른 말을 해야합니다. 또한 바른말, 정직한 말을 들었다면 성숙하게 수용해야합니다. 본문의 지혜자의 말을 빌리자면, 마치 “입맞춤”을 하듯 바른 말을 받아들여야 하는것입니다. (여기서의 '입맞춤'은 기쁨과 행복의 감정을 의미합니다) 기쁨으로 바른말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죠.

    이 말씀을 붙들고 두가지 적용을 합니다.

    사람과 상황을 가리지 않고 바른 말을 하겠습니다.

    바른 말을 듣게 되면 기쁘게 수용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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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네 집을 짓기에 앞서 먼저 생활 기반부터 마련하여라!” (27절, 개역개정)

    모든것에는 순서가 있고, 질서가 있고, 더 나은 방법이 있습니다. 무턱대고, 서두르고, 마음 가는데로 진행하고 달려드는 것은 그러므로 지혜롭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이러한 태도를 보며 '강력한 추친력'이라고 말할수도 있고, '믿음의 걸음'이라고 말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몇 안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사실에 기반해서 보자면) 대부분 이러한 무질서한 시도는 무계획에, 준비도 안된 실수일때가 많습니다.

    준비도 하나도 안하고, 생각도, 계획도, 기도도 없으면서 ‘집 짓기’에만 달려들고 있는것은 아닌지 그러므로 점검해봐야합니다. 오스틴에 살다보면 멈춰버린 ‘공사장’을 간혹 보게 됩니다. 어쩌면 '집짓기'에 혈안이되서 준비없이, 두서없이, 계획도 없이 서둘러 뛰어들어서 생긴 결과인지 모릅니다.

    신앙도, 비전도, 사명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준비, 생각, 계획, 그리고 가장 중요한 기도가 없이 '집짓기'에 혈안이 되어 두서없이 뛰어든다면 분명히 어려움을 겪게 될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 순서, 계획 그리고 기도를 통해 잘 준비되어 '집짓기'에 뛰어드는 신앙인이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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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고난의 때에 비틀거리면 네 힘이 약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10절)

    언제나 강해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육신과 정신이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평생에 “건강해보여, 힘 좋아 보여!” 이런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그런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항상 ‘강한 사람’이 부러웠습니다. 저는 심신이 그다지 강한 사람은 아닙니다.

    얼마전에 성도님들과 함께 요리하다가, 우리 성도님 한분이 손가락을 깊게 베었는데요, 그거보고 머리가 어질어질 할 지경이었습니다. (제가 원래 피를 무서워해요 ㅋ) 그런데 그분은 태연했습니다. 그리고 지혈하고 얼마 안지나 또 다시 장갑을 끼고 태연하게 요리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내면과 외면의 강함이 항상 부럽습니다. 생각해보면 목회자로 살고 있음에도 낙심의 상황을 마주하면 내면적으로 휘청거리는 것을 느낄때도 많습니다. 사탄이 공격하기 얼마나 좋은 대상일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육신도 그닥 건강하지 않은지 10년사이 쓰러져서 병원간것만 세번입니다. 그래서 저는 강함이 항상 부럽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켜보면 ‘낙심’의 상황도 돌파하고, 어려운 상황도 넘어섰습니다. 저는 약한데, 저는 힘이 없는데 “약할때 강함되시는 하나님” 항상 제 곁에 계셔주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 되십니다. 나의 강함 되십니다. 나의 방패요, 나의 용기 되십니다. 나의 자신감이 되어주시고, 나의 무기가 되어주십니다. 그분 아니었다면 저는 진작에 ‘나의 약함’에 함몰되어 패배하거나 쓰러졌을 것입니다.

    여호와로 인해 강합니다. 낙심의 상황중에 주로 인해 강합니다. 주님이 나의 힘되시니 언제나 승리할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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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아들아, 꿀이 좋으니 먹어라. 꿀송이를 먹으면 입에 달것이다. (13절)

    시편 119장 103절을 보자니 "주의 말씀이 내 입에 어쩌면 이렇게 달콤한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답니다" 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결국 꿀과 같은 말씀을 먹어야합니다.

    가끔 식사를 조절하지 못할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일을하다보면 소위 말하는 '당 떨어지는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갑자기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찔해 집니다. 울렁거리기도하고, 몸도 차가워집니다. 이런 상태까지 되면 아무일도 하지 못합니다. 한번은 기도원에서 금식중에 산책한다고 산의 입구부분을 돌아다니다가 급작스럽게 찾아온 저혈당증으로 길에서 쓰러진적이 있습니다. 정신이 아찔하고, 토를하고, 식은땀을 흘리다가, 산의 초입에 있는 슈퍼로 겨우겨우 들어가 초코파이 한 상자를 사서 바닥에 주저앉은채 초코파이를 정신없이 입속에 밀어넣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얼마간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더니 초코파이와 함께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일단 입에다가 '당'을 밀어 넣어야합니다. 탄수화물과 당을 밀어넣듯 입안에 넣고, 일정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몸이 기능을 되찾기 시작합니다. 필요한 당을 섭취하지 못하면 몸은 이와 같이 쇼크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 사는 신앙인은 충분히 영적 저혈당쇼크에 빠질수 있습니다. 그러니 '꿀과 같은 말씀'을 계속 섭취해야합니다.이는 그저 '입의 즐거움' 정도를 위해 섭취하는게 아닙니다. 생명을 위해, 건강을 위해, 기능을 위해 섭취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드셔야합니다! 읽고, 묵상하고, 배워 소화하는것을 반드시 해야합니다.

    입술에 꿀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세요. 하나님의 말씀 금식 그만해야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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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에 띄는 본능적 욕구들이 있습니다. 술, 식탐, 수면욕(나태), 성욕(쾌락주의)등입니다. 결국 이들의 마지막은 35절과 같습니다. 아무리 깨닫게 하려고 해도 이제 깨달을수 없습니다. 무감각해지는 인생, 그리고 계속 ‘욕구’만을 쫓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35절을 보니 온몸이 마비되어 허리도 못피고, 몸도 못가누면서 자신의 팔에 마약주사를 꼽거나, 마약을 찾는 자들과 떠오릅니다.

    “술에 찌든 사람들, 섞은 술을 찾아다니는 사람들” (30절) 조심해야합니다. 절제해야합니다. 금주해야합니다. 방송 플랫폼이 유튜브로 넘어가면서 ‘음주 방송’이 기본값이 되는 경우가 요즘 많이 생겼습니다. 이 상황의 위험성을 인지했는지 국가가 뒤늦게 ‘유튜브 방송심위’에 관련한 기준을 만들어 보려고 한다는 기사를 보기도 했습니다. 약간 늦은감이 없지 않지만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 내면 좋겠다는 바램도 있습니다. 미성년자들이 너무 제약 없이 이런 영상들을 소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처럼 평생 술을 안마시고 관심없는 성인도 유명 연예인들이 나와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계속 술먹으며 맛있다고 말하면, ‘술이 맛있나?’ 하는 생각이 들정도니, 미성년들이나, 비음주자들중에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런 방송을 통해 술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갖게 될것은 불보듯 뻔한 일입니다. 결국 애초에 마음이 없었던 자들도 음주에 관심을 가지고 시도하게 되는 영향력들이 생기게 될것입니다.

    그의 반해 술의 위험성에 대해 알리는 영상이나 정보는 상대적으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마치 오늘 솔로몬이 하고 있는 '술에대한 경고'가 유튜브 술영상처럼 많은 이들에게 노출되지 않는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실수하고, 질병에 걸리기도 하고, 중독되기도 하고, 음주 운전, 음주로 파생되는 사고등으로 만들어지는 비극적 결과, 심각한 범죄들에 대한 이야기들에 진중하게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솔로몬의 강경한 음성을 유의하여 마음에 새겨야 할것입니다. 음주를 조심해야합니다. 절제하기 힘든 음주문화와 습관이 있다면 끊어 버려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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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일 설교중에도 나눴지만 ‘음란’의 문제가 시대를 괴롭힌지 오래됐습니다. 아니 모든 시대의 인류를 따라다니며 항상 괴롭혀 왔습니다.

    현재가 과거의 인류와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면, 과거 어떤 시대보다도 오늘날의 성적 유혹이 범람하고 쉬워졌다라는 사실입니다. 예를들면 오늘날은 성의 유혹이 그 영역을 '온라인'과 '가상의 세계'로 확장하여 노출빈도와 허용의 편이성을 극대화 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많은 성적 죄는 앉은 자리에서, 커다란 죄의식 없이 행해지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기사도 보았습니다. AI라는 인류의 기술과 과학의 발전을 선한데 써도 모자란데, 이 기술을 통해서 누군가 음란한 콘텐츠를 만들수 있는 어플리케이션을 만들었고, 이에 며칠만에 2000만명이 넘는 가입자가 생겼다는 기사였습니다. 며칠만에 성경앱을 다운 받는 사람이 2000만명이 넘어야 될일인데, 이게 도대체 무슨 안타까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큰일입니다! 경계 깃발을 높이 들어야 합니다. 진짜 치열하게 싸워야합니다. 거룩을 지키기 위해서 싸워야합니다. 나를 지키고, 가정을 지키고, 자녀를 지키고, 교회를 지키고, 일터를 지키고, 나라를 지키고, 시대를 지켜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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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탐을 절제하고, 식사예절을 갖추는 것이 지혜입니다. 과거 언젠가 교회에서 치킨을 시켜먹는데 양손에 닭다리를 들고 먹던 자매를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참 교회를 열심히 섬기던 자매인데 다른건 기억이 안나고 그 장면하고 월남국수를 먹으며 침을 흘리던(?) 모습만 기억이 납니다.

    간혹 어른들은 자녀들의 결혼 대상자를 만날때 “운전은 시켜보았니? 술은 마셔보았니?”등의 얘기를 한다는 것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그런 상황을 통해서 자녀의 배우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려는 의도 같습니다.

    사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본능’이 작동하는 현장에서 우리는 우리의 미성숙함을 쉽게 드러내곤 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데 식욕 때문에 절제 하지 못하는 사람, 피곤하면 나의 편함을 위해 이기적이길 선택하는 사람, 나누기 보다는 취하는 사람, 본능적 욕구에 굴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제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본능을 이기는 성숙함도 필요합니다. 인내하고, 배려하는 성숙함도 필요합니다. 항상 주님께서 내 앞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면 한층 성숙하고, 질서정연한 삶의 태도를 견지하게 될것입니다.

    “네 앞에 누가 앉아 있는지 잘보라!”(1절) 하나님이 항상 내 앞에 계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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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아이일 때 부모님께 많이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따끔하게 혼나기도 하고, 정말 잘못했을때는 정해놓은 숫자대로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기억하는게 어린 시절 어머니 시장을 같이 따라갔다가 포도송이에서 떨어진 포도알을 보고 먹고 싶은 생각에 집어 들어 숨겼다가 어머니께 심하게 혼난 경험입니다. 어머니께 가장 호되게 맞았던 기억입니다. 그때 어떠한 형태라도 나의 것이 아닌 것을 탐하는 것은 큰 죄라는 것을 뼛속 깊이 새겼습니다. ‘포도송이에서 떨어진 누구의 것도 아닌것 같은 그 포도알 한개’ 조차도 내것이 아니니 탐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에 기반한, 필요한 교육이 있습니다. 부드러우면 좋지만 훈육은 때로는 필연적으로 따끔할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뼛속까지 각인됩니다. 그리고 그 배움이 나를 살리고 실족하지 않게 하는것입니다.

    두 아이의 아비로써, 예수님의 사랑안에서 자녀를 성경가치에 따라 건강하게 훈육해야하는 책임을 가벼이 여기지 않아야겠음을 다짐해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써 하나님께서 저를 향해 따끔하게 훈육하실때, 나를 향해 사랑의 매를 드실때 반성하고, 정신차리고 돌이켜야겠다고 다짐합니다.

    훈육하는 자로의 책임과, 훈육받는 자로써의 태도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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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023 오늘도 주님 생각

    골 4:10-18

    연말이면 언제나 한해를 마무리 하는 시상식이 진행되곤 합니다. 그러면 수상자가 나와서 소감을 말하면서 (과장하자면) 가족부터 시작해서 사돈의 팔촌, 스탭들, 심지어 동내 사람들 이름까지 거론하며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전합니다. 혹시 한 사람이라도 빼먹을까봐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간혹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감사의 말을 전하다보면, 계속 감사해야할 사람이 떠오르고,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떠오르는 것이겠지요.

    바울은 감옥에서 이 편지를 마무리 하면서 고마운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오직 이들만”(11절) 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말과는 다르게 이후에도 계속 이름들이 나옵니다. 칭찬도 하고, 부탁도 하고, 동역자라고 인정하고, 사랑과 안부도 전합니다.

    저도 이렇게 벌써 한해를 마무리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생각하면 감사할 사람이 참 많습니다. 함께 개척 교회를 세워가고 있는 바우 교회 모든 성도님들부터, 몸은 멀리 떨어져있지만 기도와, 응원, 간헐적 동역과, 후원을 통해 여전히 함께 해주신 많은 동역자분들이 계십니다. 이 모든 ‘사랑의 가족’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 부르심 앞에 모른척 하지 않으시고, 개척되는 교회를 향해 아낌없는 동역으로 함께 하시는 모든 믿음의 가족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바울처럼 물리적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나 사명에 메여있다보니 직접 찾아가서 한분 한분께 감사와 사랑을 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송한 마음이 큽니다. 바울은 이와같이 찾아가지는 못할지언정 “친필”로 안부를 전하며 그의 진심을 표현했습니다. 그가 그의 진심을 그렇게라도 담은 것이라면, 저도 그를 본받아서 이번 묵상만큼은 AI의 목소리가 아닌 친(?)목소리로 감사의 말과 안부를 전해드립니다. 모든 분들 다만 행복하고, 풍족하고, 건강하고, 감사한 2023년 마지막 한달을 보내시길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다시 한번 저와 함께 동역해주고 계신 모든 믿음의 가족분들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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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나는 이 일 때문에 매여 있습니다.” (3절)

    목회자로써 기도부탁을 많이 받습니다. 건강을 위해, 자녀를 위해, 부를 위해, 문제해결을 위해, 관계회복을 위해, 축복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는것이죠. 그러나 이러한 기도제목을 부탁받는것 만큼 선교와 전도를 위한 기도부탁을 받지는 않습니다. “제가 복음을 위해 매여 있으니까 제가 복음을 잘 전할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라는 기도부탁은 상당히 드문 경우라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부탁이 없는것은 아닙니다)

    생각해보니 저도 ‘개척’하면서 교회를 위한 기도를 참 많이 부탁했습니다. 저를 위해, 가족을 위해, 교회와 사역을 위해, 성장과 부흥을 위해, 재정을 위해, 문제 해결을 위해, 동역자와 후원자를 위해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바우교회가 선교를 잘 할수 있도록 해주세요!”라는 기도제목은 차일피일 미뤘던것 같습니다. ‘먼저 교회 좀 세우고 나서!’ 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것 같습니다. 생각을 고칩니다. 방향을 다시 잡습니다. 바우교회가 전도 잘하는 교회되도록, 복음을 잘 말하는 교회 되도록, 제가 그런 사명자 되도록 기도해주세요! 우리는 이 일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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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땅히 해야할 말”, “은혜롭게 말하십시오” (4,6절) 복음을 전달하는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 힘입니다! 진리입니다. 생명력이 있고, 빛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가치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가장 최선으로 전하는가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세상에서 기업이든, 사업이든, 행사든 가장 기본이면서 중요한것이 바로 ‘마케팅’입니다. 어떻게 소개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같은 내용물을 가지고서도 어떻게 광고 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완전 판이합니다.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과학입니다!” “수고한 당신 떠나라!” “Just do it!” “여보, 아버님 댁에 보일러 하나 놔드려야겠어요!” “고향의 맛! 바로 이맛이야!”

    생각해보면 이 회사들만 이러한 제품을 판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셀수 없을정도로 많은 기업과 사업체가 같은 물품을 팔았지만, 위에서 논한 유명한 광고 카피를 중심으로 기업가치와, 물품의 세일즈량이 가장 성공적이 된것입니다. 결국 어떤 말을 해야할까? 어떻게 말해야 할까?는 상당히 중요한 주제임을 다시 한번 알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실때, 뜨겁게, 차갑게, 사랑으로, 지성으로, 쉽게, 그 무엇보다도 어렵게, 예언으로, 가르침으로, 때마다 변화무쌍하게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야말로 TPO를 완벽하게 적용한 전도였습니다.

    또한 베드로같이 언어에 능통하지 않았던, 지식에도 능통하지 않았던 사람도 성령에 충만하여 복음을 전하니, 언어를 관통하기도 했고, 지식의 수준을 뛰어넘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3000명이 세례받는 일들도 일어났습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입술, 지혜, 지식, 전략도 참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복음은 성실하게 준비해야합니다. 부지런히 전략을 짜고, 지혜롭게 준비해야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준비된 상태에서 기도함으로 성령의 힘을 얻어 담대히, 막힘없이 전해야합니다.

    기도하기는 하나님께서 제 입술에 지혜의 말, 최고의 말을 심어주시길 기도합니다. 바우 교회의선포에 하나님의 언어의 지혜를 부어주시길 기도합니다. 듣는 자들의 영,혼,관절,골수를 찔러 쪼개는 복음의 말로 전하는 입술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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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남편이니까 철저히 남편 입장에서 묵상합니다.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 않겠습니다. (19절)

    아내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면 제 잘못입니다. 아내가 괴롭다고 느끼면 제 잘못입니다. “나는 충분히 사랑하고 있어요! 나는 괴롭힌 적은 없어요!” 이는 다 제 입장일 뿐입니다. 제 생각일 뿐입니다. 제 기준일 뿐입니다.

    아내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수 있도록, 아내가 괴로운게 아니고 행복하다고 느낄수 있도록 좋은 남편이 되겠습니다! 말해 놓고 보니까 2023년 묵상하고 결단한 내용중에 ‘가장 쉽지 않은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내도 이 묵상 나눔을 보겠지요 ㅠ) 그래도 할껀 해야지요! 아내가 행복하면 좋겠습니다! 남편들이여 힘내십시다! 정신 차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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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아들이니까, 아들 입장에서 묵상을 이어갑니다. 모든 일에 부모님께 순종하는 존중의 자세를 갖겠습니다. (20절)

    사실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대화하는 경우도 많이 없고, 또 어느덧 나이 40을 넘어 부모님께 방향성을 확인받고 움직이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사실 젊어서부터 대부분의 결정을 혼자 해왔던것 같습니다. 그러나 항상 이 마음은 있습니다. 부모를 향한 존중의 마음입니다. 그분들의 생각에 대한 존중입니다.

    부모님을 향해 교만하고, 거절하고, 무시하고, 귀를 닫는 무례한 태도를 내려 놓습니다. 부모님을 향해 존중의 귀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3

    저는 아버지니까 아버지 입장에서 묵상을 이어 갑니다. 자녀를 화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을 낙심시키지 않겠습니다. (21절)

    하나는 아직 너무 어려서 잘 분간하지 못하지만 첫째딸은 간혹 저의 잔소리 때문에 화를 내기도 합니다. 필요한 잔소리가 아닌, 정말 말도 안되는 잔소리를 하기도 하고, 아비답지 못하게 감정적인 말들을 쏟아내기도 합니다. 그러면 아직 8살밖에 안된 딸이지만 감정이 상한것이 느껴집니다. 아이를 노엽게 하고, 저의 말로 인해 낙심되게 하는 일을 조심해야겠습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니까요! 너무 소중한 생명이니까요!

    4

    마지막으로 저는 하나님의 종이니까, 종의 입장에서 묵상을 이어 갑니다.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겠습니다. (23절)

    성실, 사랑, 정의, 정직

    개인적으로 어떤 일을 하든 하나님 앞에서 중요하다 여기는 가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일할때 언제나 성실의 태도를 점검하고, 사랑의 마음인지 점검하고, 불의하지는 않은지 점검하고, 정직한 언행인지 점검하려고 합니다. ‘교회 일’이든 ‘세상 일’이든 구분함 없이 주께 하듯 일하는 하나님의 종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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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평거리가 있더라도” (13절)

    교회속에 흔한 현실입니다. 불평거리가 있습니다. 맘에 안드는게 있습니다. 서로를 향한 비난이 있습니다. 이때 바울의 권고는 “용납하라!” 입니다. 해결하면 좋겠지만 때로는 해결이 안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너무 다르기 때문에 해결이 안되기도하고, 틀림의 문제가 아니고 다름의 문제기 때문에 해결이 더욱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결국 이러한 상황속에서 불평이 쌓이니 서로 비난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상황에서도 서로 용납하라고 말합니다. 인내하라고 말합니다. 더 나가 용서하라고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 해결도 좋지만, 때로는 수용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비난과 불평을 감수하는 성숙한 자세도 필요합니다. 결국 이 과정을 통해 용서에 이르게 될것입니다. 교회는 더욱 단단해지고, 사랑의 공동체가 될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가족은 불평거리가 있어도 용납하고 용서합니다. 가족은 그런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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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무서운(?)일을 하러 갈때 꼭 누구랑 같이 갑니다. 하다못해 어린 제 딸들이라도 같이 가야 마음에 좀 안정이 있습니다. 최근에도 어려운 결정을 하거나 마음에 평강이 없는 일을 할때, 아내와 동행하기도 하고, 교회 청년들과 동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혼자일때 보다 얼마나 마음에 큰 평강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을때 제자들은 진짜 무서워 했습니다. 그래서 두가지 행동을 했습니다. 일단 모였습니다. 그리고 숨어 들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렇게 모여 두려움에 떨고있는자들을 찾아가셔서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임하여 집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것처럼 함께한다면 평안은 더욱 명확해 집니다.

    “이 평강을 위해 여러분은 한 몸으로 부르심을받았습니다.” (15절)

    그리스도 안에 하나됨으로 서로에게 평강의 힘이 되는 교회가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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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번 상류층을 경험한 사람들은 도통 밑을 내려다 보지 않습니다.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강조하지 않아도 그들은 계속 위를 바라봅니다. 더 좋은것, 더 화려한것, 더 빛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더 좋은것’을 계속 꿈꾸고 소망하게 되는것입니다.

    일례로 마케팅 차원에서 비지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가 된적 있습니다. 벤쿠버에서 한국을 가는 비행기에서 일본경유까지 비지니스를 탔는데 아직도 그때의 그 편함을 기억합니다. 정말 할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비지니스를 타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한거 같습니다. 그전에는 사실 비지니스 자리는 과도하게 비싼 상술정도로 생각했지만 한번 경험해보니 (그것도 공짜로 경험해보니) 너무 좋은것을 알아버린 것이죠.

    우리는 자동적으로 더 좋은것을 생각합니다. 경험되었거나, 배워서 알게 되었다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더 나은 삶을 추종하고 꿈꾸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것들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2절)

    하나님이 좋으면, 예수님이 더 좋은것을 경험하고 알았다면 이 땅의것이 아닌,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노력이 아닌 영적본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기뻐하고, 그리스도로 인해 행복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힘을얻고, 자유하며, 그분을 온전히 믿는다면 반드시 이땅의 삶과 가치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영광, 그리고 하늘나라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게 될것입니다. 아직도 이 땅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리스도보다 이 땅을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가장 좋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영광스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큰 행복이며, 만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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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3절)

    부활은 그렇게 믿기 힘들어 합니다. 마치 불가능한것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 부활한것처럼 삽니다. 과거의 나, 죄악의 나는 분명히 죽었는데,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매일, 자주 부활시키는지 모르겠습니다. 샤워할려고 벗어놓은 땀에 쩔은 옷을 굳이 다시 주워입는 형국입니다. 이를 다 닦고 잘려고 누웠다가 목마르다고 콜라 마시는 꼴입니다. 석방된날 다시 죄짓고 잡히는것과 같습니다.

    죄로 물든 내 모습으로는 다시 부활하지 않습니다. 이미 죽었습니다. 굳이 완악했던, 불신자였던, 욕망과 탐심과 불순종의 사람이었던 그때의 나에게 심폐소생술 할 필요 없습니다. 미련을 둘필요가 없습니다. 죄는 죽었습니다. 죄인은 죽었습니다.

    예수와 다시 살아나는 인생이 되야합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하는것이지, 썩은 몸으로 다시 사는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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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을 믿는데 있어서 틀리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이유도 다양합니다. 자기가 본것들에 집착해서 경험주의적 신앙에 빠지는 사람, 그 경험이 신령한것이기에, 신령주의에 빠지는 사람, 세상의 규정에 매여 율법주의자가 되는 사람, 태생적 배경에 따라 ‘선민사상’에 빠지는 사람, 종교적 외식으로 자기 자신조차도 믿는다고 속는 사람 등 복음을 믿는데 있어서 틀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능력입니다. 다른 자격을 요구하지 않고 오직 믿음을 요구합니다. 선한 행동과, 신령한 경험, 더욱 의로운 삶의 기준, 성숙한 종교적 형식, 경건의 모양등,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복음의 핵심은 아닙니다. 복음의 근간은 아닙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비틀고, 복음의 핵심을 속이고, 변질시키고 오해를 만들어 내는 수많은 이단과, 잘못된 가르침들을 경계해야합니다. 비본질에 현혹되고, 비본질에 메여 부지불식간에 복음의 은혜를 본인이 직접 차버리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골로새 교인들이 살았던 당시도 그랬지만, 오늘을 살아내는 우리도 항상 깨어있어야합니다. 자칫 거짓에 실족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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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는 결국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모시는 하나의 유기체입니다. 그리스도가 머리되시고 그분이 공급하시는 영양을 통해 ‘마디와 힘줄’이 결합하여 자라게 되는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이끄시는 교회, 그리스도로부터 능력과 지혜와 힘과 은사를 얻는 교회, 그 안에서 서로의 다름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는 교회, 결국 연합하여 성장하는 교회! 이것이 바로 참된 교회의 모습이고, 건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생각해보니 이 모든것이 ‘머리되신 그리스도’ 없이는 절대 이뤄질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오늘날 많은 교회가 중구난방으로 날뛰고, 서로 잘났다고 주장하고, 필요한 ‘영양’은 공급받지 못하고, 연합과 동역이 없고, 결과적으로 성장은 커녕 퇴보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바우교회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인정합니다. 그분의 인도하심을 쫓습니다. 그분께 영양을 공급받습니다. 그분 안에서 연합 합니다. 그분 안에서 함께 성장합니다. 교회가 갖춰야할 이러한 핵심 태도를 놓치지 않길 기도합니다. 모든 성도님도 함께 이 말씀을 붙드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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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춰져 있습니다.” (3절)

    진짜 자주 느끼는 사실입니다. 설교를 쓰다가, 삶의 난제를 마주했을때, 선배랍시고, 목사랍시고, 주변 사람들의 어려운 일을 들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방법과 지혜가 떠올라 대답할때, 성경의 난제가 때로는 지식을 뛰어넘어 맘속 깊이 이해의 소용돌이로 몰려올때 ‘아! 예수그리스도야 말로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인생의 지혜입니다. 깨닫게 하십니다. 해답을 보게 하십니다. 통찰로 임하십니다. 가장 최선의 말로 입술에 담아 주십니다. . 베드로 사도가 들으면 서운할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잘 배우지 못했던 베드로 조차도 예수님의 지혜와 말씀의 능력으로 모든 지혜자들을 통찰을 상회하는 지식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구원’이라는 모든 인생들의 최대의 난제도 그래서 결국 예수님으로 풀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해답입니다!

    그리스도의 생각, 그리스도의 통찰, 그리스도의 말씀의 기준과 지혜, 그리스도의 구원의 진리를 행하고, 말하고, 믿는 지혜자의 삶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나의 지식이요 지혜요, 구원되신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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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영접한 것처럼 주 안에서 사십시오.”(6절)

    바울의 권고처럼 예수님을 ‘주로 영접’ 해야합니다. 주인입니다. 그리스도는 내 인생의 권한을 쥐고 계신분입니다. 이는 구속(拘束:restriction)이 아니고 구속(救贖:salvation) 입니다.

    예수께 갇힌 인생이 가장 복된 인생입니다. 가장 안전한 인생입니다. 가장 자유한 인생입니다. 마치 우리에 머무는 양이 가장 안전하고, 가장 자유하며, 가장 복된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떠나 도망가는것이 가장 어리석은 삶입니다. 주님을 떠나는 것은 가장 위험한 행동입니다. 자유 아닙니다. 자살행위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영원히 살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께 갇혀 살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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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전함’은 무엇일까요? ‘텔레이오스’ 완성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더이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를 알아야, 그리스도를 만나야 이룰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추구하고, 쫓는것들을 왜 쫓고 있는것일까요? 돈이 좀더 많으면 내가 온전해질것 같고, 권력이 쎄지면 내가 온전해 질것 같고, 명예로운 인생이 되면 내가 온전해 질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괄목할 만한 결과물을 만든 사람들을 만나면 “끝판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인용해보자면 ‘온전한자’가 된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끝을 모릅니다. 왜냐면 무엇으로 채워도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끝났다’ 여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은 계속 찾아 헤메일수밖에 없습니다. 만족을 모릅니다. 행복을 누리기 힘듭니다. 고되고, 지칩니다. 순간같은 행복을 마주하기도 하고, 계절같은 만족을 누리기도 하지만 결국은 ‘온전함의 끝’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 찾아 헤멥니다.

    ‘온전함’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임하여 집니다. ‘끝’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임하여 집니다.

    예수님은 모순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목숨을 잃는 그 순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을때 “온전하다!” 라고 말씀하신것입니다.

    십자가야 말로 온전함의 정수 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완성하신것 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되었든 간에 예수님으로만 완성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죽을때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십자가 없이 온전해 질수 없습니다. 다른 가치가 아닌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의 소망을 떠나지 말아야합니다.(23절) 그리고 온전함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 그리스도를 바울과 같이 모든 이에게 전해야합니다.

    “이 일을 위해 나도 내 안에서 능력으로 활동하시는 분의 역사를 따라 열심히 수고하고 있습니다.” (29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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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가, 혹은 누군가들이 저를 위해서 정말 열심히 기도해주고 있는것 같습니다.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그들이 모든 영적 지혜와 통찰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게 되고, 주께 합당히 행해서 모든 일에 주를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고 하나님의 영광의 권능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힘 있게 돼 기쁨으로 모든것을 참고 견딜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9-11절)

    덕분에 골로새 교인들은 아마 하나님을 더욱 알고, 그분의 뜻을 알고 분별하며, 지혜와 통찰로 하나님의 권능을 따라 행하고, 모든것을 참고 견디게 되었을 것입니다.

    성도들의 뜨거운 중보기도를 통해 저 또한 골로새 교인들이 통과했을법한 시기를 통과 하고 있습니다. 더욱 주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게 되는 시간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는 시간들, 모든것을 기쁨가운데 참고 견딜수있는 힘을 얻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것입니다. 무엇하나 쉽지 않고, 분별하기는 고되고, 견디기에는 버겁지만 중보기도의 힘으로 잘 걸어나가고 있습니다.

    목회의 매 걸음을 성장가운데 걷도록 도와주는 모든 중보기도의 가족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있어서 오늘 정용환이라는 목회자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바우라는 교회가 여전히 비전의 걸음을 걷고 있습니다. 그냥 걷는것이 아니라, 돌파하고, 분별하고, 인내하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타인을 위해 쏟아내는 당신의 중보기도를 절대 멈추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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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물이 아들로 인해 창조됐고 아들을 위해 창조됐습니다.” (16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주를 위해 살아야합니다. 주를 위해 사는것은 비단 목회자들의 몫이 아닙니다. 선교사들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합니다.

    너무 주님을 위해 살지 않는 시대가 된것 같습니다. “그냥 내가 처한 상황에서 할수 있는 일을 하고, 거룩을 지키는것이 주를 위해 사는것이지!” 라고 말하고 위로를 받습니다. 한켠으로는 맞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를 이러한 말과 자세로 접근하다보니 예수를 위해 살고, 예수를 위해 올인된 인생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예수를 사용하는 사람은 많은데 예수에게 사용되는 사람은 이제 찾기가 힘듭니다.

    신앙의 주객이 그렇게 전도되었습니다.

    주님으로 인해 창조되었고, 주를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합니다. 더욱 드리세요. 다 드리세요. 제 말이 아니라 창조의 목적이 외치는 소리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을 위해 살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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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4절

    저는 소문난(?) 목사가 아닙니다. 만약에 소문이 난다면 어떻게 소문이 나게 될까요? 바우교회는 어떤 소문이 나고 있을까요? 간혹 만나는 바우교회 성도가 아닌 분들이 “바우 교회 들어서 알고있어요!” 라고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속으로 궁금합니다. ‘바우 교회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들이 돌고 있는것일까?’

    교회는 소문이 나야합니다. 건강하고, 거룩하고, 공의롭고, 사랑하고, 예배하고, 겸손하고, 정직하다고 소문이 나야합니다. 듣는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도록, 존중받을만한 소문이 나야합니다. 교회끼리 서로 소문을 들을때도 감사가 넘칠만한 소문이 나야합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드릴만한 소문이 나야합니다.

    어디서 전해듣더라도 건강한 소문이 전해지고, 칭찬이 자자한 성도가 되고 싶습니다. 어디서 전해 듣더라도 예배와 말씀, 거룩과 사랑으로 가득한 교회라는 소리를 듣는 바우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뒷말’의 대상이 되거나, ‘심심풀이 땅콩’같은 구설수의 대상이 되는 교회가 되는것은 너무 슬픈 일입니다. 지적과 질타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서도 안되겠습니다.

    소문나는 ‘좋은 교회’되길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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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3절)

    기도는 곧 힘입니다. 감옥에 앉아서도 기도를 놓치지 않는 바울입니다. 그의 기도는 골로새 교인을 향해 있습니다. 덕분에 골로새 교인은 바울의 편지도 받고, 중보의 축복과 은혜도 누립니다.

    겨울은 추위에 떠는 이웃을 살펴보는 시즌으로 잘 알려져있지요. 유독 ‘구제사역’이 활발한 시즌이기도 합니다. 그런것도 중요하지만 기도가 필요합니다. 따듯한 옷도 당연히 필요하고, 배고픈 배를 채울 음식도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아니 더 중요한 본질적 필요는 예수 그리스도요 그분의 복음입니다. 그러니 기도가 필요합니다. 바울의 골로새 교인을 향한 중보를 보며, 중보기도가 풍성한 시즌이 되길 더욱 도전합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십시다. 내 상황 핑계되지 말고 기도해야겠습니다. 기도가 힘입니다. 기도가 축복입니다. 기도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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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여기저기서 지불할때 '애플페이'를 씁니다.(아마 삼성페이나 구글페이를 쓰시는 분도 많겠죠) 이 기술이 상용화된지 굉장히 오래됐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기능을 쓴게 최근 두세달이 안됩니다. 그럼 그전에는 어떻게 했느냐? 당연히 지갑과 신용카드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과거 신용카드와 지갑을 쓸때도 이미 애플페이를 알고 있었습니다. 훨씬 새로운, 편리한 테크놀로지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잘 안쓰게 되더라구요. 다른데 이유가 있었던것은 아닙니다. 항상 제 손에, 제 주머니에, 여전히 잘쓰던 지갑과 신용카드가 있었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애플페이를 잘 안쓰게 되더라구요. 진짜 써보고는 싶었는데 자연스럽게 잘 안되더라구요. 그러다보기 최근까지도 계속 주머니가 두툼하게 다녔습니다. 손에 거추장스럽게 들고 다녔습니다.

    이 이야기를 생각해보면서 이런 묵상을 하게 되더라구요. 버려야할 과거를 여전히 내가 지니고 있으면 새롭게 되고 싶어도 새롭게 되기가 어렵습니다. 영적으로 보자니, 죄를 완벽히 내려 놓지 않는다면, 거룩을 알고 사모하지만, 온전한 거룩에 이르기가 굉장히 어렵다라는 사실이죠.

    우리가 지난 며칠간 스바냐서에서 보았던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보시며, 그들의 과거와 주변을 청산하시려고 하는 예언의 이야기였습니다. 유다가 회복해야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그들의 잘못된 과거와 주변을 말끔히 정리해야만했던 것이죠. 앞서 예를 들었던 것처럼, 이러한 과정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은 며칠 못가고 다시 '지갑과 카드'를 꺼내들게 되는일이 일어나는 것이예요. 다시 말하면, 우상을 꺼내드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죠. 혹은 주변에 있는 '바벨론'이든 다른 국가를 꺼내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스바냐의 입술을 통해 그들의 과거와 죄 뿐만 아니라, 주변까지도 말끔히 청산하고자 하는 예언의 메세지를 주셨던것이죠.

    이와같이 완벽한 개조(?)를 위해 선행되야 하는것은 '완벽한 심판', 즉 철저한 청소 입니다. 놓아야 할 악을 놓아야 비로소 새로운 내가 될수 있습니다. 내안에 죄도 놓고, 우상도 놔야합니다. 내 주변에, 내 '주머니'에 찔러 넣은 '블레셋, 바벨론'도 다 치워버려야합니다. 그래야 다시 주섬주섬 '지갑', 다시 주섬주섬 '카드' 꺼내들지 않게 되는것이죠. 싸그리, 모조리, 깡그리 악을 제거 해야합니다. 철저한 악의 제거가 바로 회복의 시작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회복, 결국엔 하나님께서 이 회복을 완성해 주실 것입니다.

    "그때 내가 너희를 다시 데려오겠다. 그때 내가 너희를 모으겠다. 내가 너희 눈앞에서 포로 된 너희를 회복시킬 때 이 땅의 모든 백성들 가운데서 너희가 명성과 칭찬을 얻을 것이다."(20절)

    하나님께서 이와같이 내 안에 '죄'는 모조리 때려 부숴주시고, 소망없는 내 인생을 영광스럽게 회복해주실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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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사실 정치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 나라의 치리자가 되느냐에 따라 한 나라의 운명이, 그 나라에 속한 백성이 어려운일을 겪게 될수 있다는 것에는 공감합니다. 실제로 정책 하나만 잘못세워도 휘청댑니다. 거기에 독재자라도 나올라치면 인류의 역사에 기록될만한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결국 리더들이 문제입니다. 예언자쯤 되면, 제사장쯤 되면 리더로써의 책임의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분별력을 상실하고, 믿을수 없는, 죄인들이 되었습니다. (3-4절)

    리더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합니다. 리더가 되는 순간 개인의 방종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개인의 멸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아비가 무너지면, 어미가 무너지면 집안 전체가 휘청댑니다. 회사에서 사장, 임원등이 무너지면 회사가 휘청댑니다. 그러면 사원들도 길바닥에 나앉게 됩니다. 교회에서 목사, 장로, 임직자들이 흔들리면 교회가 깨지기도 하고 무너져서 사라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 안에서 분별하는 리더가 되겠습니다. 욕심은 경계하고, 어리석음은 부지런히 지혜를 사모함으로 보완하고, 쾌락은 절제로, 죄는 거룩으로 치환하겠습니다. 교회를 지키고, 가정을 지키는 리더가 되야겠습니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가까이 하는 리더가 되야겠습니다.

    사실 무서운 마음이 큽니다. 자칫 본문에 나오는 ‘예언자’처럼, ‘제사장’처럼 최악의 리더가 되지는 않을까 두렵습니다. 나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할까봐 두렵습니다. 그러나 ‘목자’라는 리더의 자리를 내려 놓을수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굳건히 서서 이 땅을 위해 바르고 온전하게 계속 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섭다고 피하면 결국은 모두 망가지는것은 똑같습니다. 두렵지만, 책임이 무겁지만 이 땅에서의 사명을 다할때까지 깨어있는 리더 되길 힘쓰겠습니다.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 해주실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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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은 전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전쟁에 모두 개입하여 막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과장된 부분이 있겠지만, 한켠으로는 전세계가 인정(?)하는 소문이기도 합니다. 미국이 가진 항공모함의 전쟁 억제력은 이미 전세계가 인정하는 바입니다. 한국은 미국을 ‘천조국’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미국이 한해 국방비로 쓰는 예산이 천조에 가깝다고 알려져있기 때문입니다.

    강력함! 그게 오늘날 미국을 상징하는 대표적 단어 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심판을 얘기하시는데 처음에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하던것이 이제는 열방으로 확장됨을 보게됩니다. 당시 유다의 주변국가, 당시 강대국과 민족들의 이름이 나열됩니다. 이 예언대로라면 하나님은 열국을 적대국으로 돌려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왠지 유리한쪽이 하나님편 같습니다. 분명 대결구도가 하나님 대 열강인데, 하나님이 유리해보입니다. 하나님의 강력함은 절대적입니다. 미국이 보여주는 천조국 클래스와는 격이 다릅니다. 그래서 이는 싸움이 아니고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싸우지 않습니다. 심판하실 뿐입니다.

    강력한 국가인 미국의 존재 때문에, 견제 때문에 현재 열방이 항상 조심하는 것처럼, 눈치 살피는것처럼, 더 나가 동맹을 맺으려고 하는것처럼 우리도 ‘강력함’으로 다 설명할수 없는, 절대적 심판자인 하나님의 눈밖에 나지 않는 인생이 되길 힘써야 할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눈치를 살피고, 조심하고, 그분과 동맹(?)맺은 자로 살아야할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이런 말을 했던 것이죠.

    그 누구도 하나님의 강력한 심판을 피할수 없고, 대적할수 없습니다. 그 어떤것도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줄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혹 싫어하실만한 일을 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언행과 생각까지 다시 한번 세심히 살피는 하루가 되야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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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서운 영화를 잘 못봅니다. 그 긴장감, 그리고 그 낭자한 피들, 폭력을 상상하게 만드는 모든 장면들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공포영화의 화법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안봅니다.

    오늘 본문이 너무 무섭습니다. 딱 공포영화 같습니다. “진노의 날, 절망과 고통의 날, 파멸과 황폐의 날, 어둡고 우울한 날, 구름과 두꺼운 먹구름이 뒤덮인 날이다.(15절) 딱 공포 영화 세팅입니다.

    이런 공포 영화에서 보통 누가 죽나 보니까 나름의 공식이 있습니다. 꼭 군중속에 있다가 홀로 되는 사람, 있어야 할 곳을 떠나는 사람, 가지 말아야하는 곳을 가는 사람, 심한 장난을 치는 사람, 하지 말아야할 행동을 하는 사람, 경고를 무시하는 사람등이 꼭 먼저 죽습니다. 가장 극단적 공포와 고통을 마주하고 죽임당하는것입니다.

    하나님께서 15절에 말씀하시는 ‘공포의 가까운 심판의 날’은 누구에게 임하는가? 공포영화 얘기로 적용해보자면, 하나님을 떠나 혼자되고, 신앙을 떠나고, 믿음의 자리를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가지 말아야할 곳을 가고, 하지 말아야할 일을 하는 사람들 입니다. 딱 스바냐 선지자 시대에 당시 유다 백성들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의의 심판의 기를 드시는 날, 죄지은 자들은 피할수 없는 공포의 심판을 마주하게 될것입니다. (15절) 그러므로 애초부터 가지말아야할곳,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말아야합니다. 혼자되지 않고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머물러 안전하고 건강한 신앙의 삶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우상을 따라 사는것'은 마치 공포영화속에서 피해자가 범인인지도 모르고 그 사람이 안전한줄 알고 뒤따라 나가는 공포영화의 화법과 비슷합니다. 암울하고, 참담한것이죠. 이러한 어리석은 결정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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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포의 심판의 날,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면 역시 하나님 한분밖에 없습니다. (2:3절)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 기댈수밖에 없다라는 것이죠.

    모세도 결국 하나님의 성품에 대고 호소했던거 아닌가요? 하나님의 영광, 이름, 사랑, 용서에 호소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죽을 위기에서 몇번이나 살수 있었던것 아닌가요?

    결국 최후에 마주하게 되는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오직 예수 뿐입니다. 오직 예수의 보혈이 우리의 '문설주'에 발라져 있어야 죽음의 영, 곧 심판의 영이 유월하게 될것입니다.

    오늘 스바냐 선지자의 선포처럼 동일한 선포를 하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께만 있습니다” 선포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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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절묵상 (2절)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완전히 쓸어버릴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아내가 바람을 피웠습니다!?! 그러면 저는 분명히 전에 없는 분노를 경험, 아니 폭발시킬 것입니다. 참는것에 익숙하고, 왠만하면 넘어갈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바람을 핀다면? (간혹 한국 드라마들 때문에 그런 망상을 순간적으로 하게됩니다) 분노를 참을수 없을것 같습니다. 맹렬한 분노가 예상됩니다! 용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용서가 안됩니다. ㅋ

    하나님께서는 왜 이토록 분노하셨을까요? 바로 이스라엘의 ‘바람’ 때문입니다. 요시야 왕 이전에 있었던 므낫세 왕을 필두로 그들은 온통 우상숭배에 빠져있었습니다. 영적인 바람에 빠지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더욱 죄악으로 만연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분노는 타당합니다.

    성실한 신랑되시는 하나님 앞에 바람을 피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여지가 없는 죄 입니다. 용서받지 못해도 할말이 없는 죄 입니다. 그러므로 절대 우상숭배를 하지 말아야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쉽게 생각합니다. “가끔 돈도 믿고, 권력도 믿고, 쾌락도 믿고하는거지요 뭐! 우리는 완벽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다가 다시 돌아오고 하는거지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니까요!” ‘우상숭배’를 이처럼 쉽고 가벼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별일 아니고, 원할때 돌아올수 있을것으로 생각합니다. 영적인 안일함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 용납할수 없는 죄, 분노와 정죄를 정당하게 만들수 있는 죄입니다!

    인생에 있는 모든 종류의 우상숭배를 절대적으로 멈춰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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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상들이 세운 경곗돌을 올기지 마라.”(28절)

    시대에 따라 변하는 기준과 가치가 있다지만 옮기지 말아야 하는 ‘경곗돌’은 있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에 대한 공경과 효도는 시대와 상관없이 지켜져야 하는 경곗돌 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당연히 지켜져야 하는 경곗돌 입니다.

    그런데 간혹 보면 기본적이고, 시대불변적인 기준과 가치의 경곗돌을 무너뜨리는 사람들을 봅니다. 결과는 참담합니다. 그렇게 인간관계가 무너지고, 가족의 개념이 무너지고, 사회의 윤리와 질서가 깨지고, 거룩의 개념이 무너지고, 진리는 상대적이되고, 구원의 길은 모호해졌습니다.

    ‘경곗돌’ 몇개 옮긴것 뿐인데 결과는 돌이킬수 없을 지경인 경우들이 꽤 많은 것입니다. 늦었다 할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경곗돌’을 다시 제자리로 가져다 놔야합니다. 교회가, 성도가 앞장서야 합니다. 무너지고, 무색해진 경곗돌을 집어 올려서 다시 쌓아 올려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의 기준과 가르침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일꾼이 되야겠습니다. 내 삶에서도 은근슬쩍 옮겨 두었던 ‘경곗돌’이 있다면 다시 제자리로 가져다 놓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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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일에 솜씨가 부지런한 사람을 보았느냐? 그런 사람은 왕들 앞에 설것이며 낮고 천한 사람들 앞에 서지는 않을 것이다.” (29절)

    ‘솜씨의 부지런함’ 이라는 표현에 도전을 받습니다. 어릴적 “기술 하나만 제대로 배우면 벌어먹고 살수있어!" 라는 말을 많이 듣곤 했습니다. 딸들을 나아서 키우고 있는데 딸들에게도 간혹 그런 말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성인이 되면서 가진 기술로 돈 벌고 살았던 때가 있어서 이 말이 더욱 와닿았던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술의 완숙도는 ‘먹고 살기’위함의 목적이 아닌 만왕의 왕 되신 하나님 앞에 서서 그 은사를 발현하기 위함이 되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기술을 왜 배우는가? 기술을 왜 부지런히 발전시켜야 하는가? 돈벌어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왕되신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명령 앞에 서서 유용한(?) 하나님의 도구요, 종이 되기 위함입니다.

    생각해보니 어릴적 어떠한 자격증이든 기술을 습득하고 발전시킬때 ‘주님을 위해 이 일을 합니다!’ 라는 마음이 확실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태권도나, 악기를 배울때 참 열심히 배워서 선교나, 예배때 부지런히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잊고 있었던 이 부분을 다시 한번 상기 하며 은사와 기술에 대한 부지런함을 정비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잘 발전시키는 의무를 다하고, 그렇게 주님 앞에 서서 사용하는 의무도 잘 감당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실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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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와 가난은 이런 공통점이 있는데 둘 다 여호와께서 만드신 것이다.” (2절)

    와우! 강력한 발언입니다. 가난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완전히 새롭게 할수 있는 메세지라고 느껴집니다. ‘가난’을 보는 보통의 시선은 부정적입니다. 잘못, 불의, 불공평, 심판, 불행, 저주, 불편 등의 시선으로 봅니다. 긍정의 시선은 잘 없습니다. 그래서 가난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부정하고, 비난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가난’은 그저 피조된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무형의 피조물 중에 하나의 개념입니다. 부자가 되면 “왜 나를 부자 만드셨습니까?” 묻지 않고 받아들이는것처럼 가난도 동일하게 수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태생적 가난에 대해서도 마냥 부모세대의 죄, 게으름, 유산적 환경, 주변 환경을 향해 비난하고 원망만 할것은 아닙니다. 가난의 원인은 다양하고, 앞서 말한것처럼 가난이 무조건 저주와 불행을 위한 결과물로 주어진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잘못된 ‘가난’이라는 개념으로 하나님을 해석하면 계속 시험에 들게 되어있습니다. 어류, 양서류, 조류, 파충류, 포유류 둥이 지어진 그대로를 수용하고, 각자에 맞는 최적의 삶을 살아내듯, 수용하는 용기와 성숙함이 필요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수용할줄 아는 믿음과 용기가 있을때 비로서 우리는 행복하게 살아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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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으름뱅이는 “밖에 사자가 있으니 내가 거리에서 죽임 당할 것 같다!” 라고 한다.”(13절)

    변명이야 만들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만들수 있습니다. 일을 안해도 되는 명분, 내가 오늘 쉬어도 되는 명분, 나의 나태함을 합리화 시킬수 있는 명분은 얼마든지 만들어 낼수 있습니다. 자신에게는 명분이요, 남이 들으면 변명입니다. 혹 남들도 명분으로 들어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들으실때 변명이라 하실일이 참 많습니다.

    가장 강력하고, 도전적이고, 어쩌면 과도한 예수님의 명령을 기억합니다. 한 사람이 부친의 장례를 지키고 나서 따른다고 하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는 죽은자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마8:22)

    예수님이 부모 공경을 무시하거나, 폐륜적인 행동을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를 따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본질적인 의미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다만 그 언어가 상당히 강렬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듣고 놀랐던 것입니다.

    여기서 이 메세지를 통해 또 한가지 느끼는것은 ‘주를 따르는데 있어서는 그 어떤 것도 명분이 아닌 변명이 될뿐이다!’ 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지 않으시고 싶었다면 얼마든지 명분으로 내밀만한 이유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모조리 변명이 됨을 알기에 그저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

    게으르고자 하여, 나태하고자 하여, 나의 방탕함을 합리화하고자 하여 내미는 모든 명분이 많은 경우 꾀병, 엄살, 거짓말, 자기합리화, 핑계임을 겸손히 인정해야 합니다. 게으름에는 이유는 없고 변명만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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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인의 집에는 값진 보물과 기름이 있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다 없애 버린다.” (20절)

    여기서 ‘의인’은 ‘지혜있는자’라는 뜻입니다. 지혜자는 자신의 집에 ‘값진 보물과 기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말 그대로 값진 보물과 기름으로 해석할수 있지만 동시에 확장해서 해석할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얘기하는 ‘지혜자’가 정말 문자그대로 보물이 많고, 기름이 많은 부자정도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이때까지 잠언을 통해서 배운것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물리적 가치’는 그 무엇도 보장할수 없습니다. 그러니 지혜자가 단지 자신의 집에 ‘보석과 기름’을 가졌다! 그는 부자다! 라고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는것은 어쩌면 너무 가볍고 깊이 없는 해석일 것입니다.

    진짜 지혜자는 무엇이 가치있는지를 분별합니다. ‘보석’ 정도가 아닌 진짜 보물을 구분할줄 아는 것입니다. 또한 진짜 지혜자는 필요할때 사용할수 있는 기름을 자신의 집에 항상 미리 마련해 두려고 합니다. 유비무환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입니다.

    진짜 지혜자는 그냥 단순히 부자가 아닙니다. 돈많다고, 가진게 많다고, 가치있는게 집에 있다고 지혜자가 아닙니다. 구분하고, 분별하고, 항상 준비되어있는자가 지혜있는 자 입니다.

    반면 어리석은 사람은 가진것도 팔아버립니다. 분별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준비도 안합니다. 무엇이 필요한지도 예상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랑을 기다리는 열명의 신부 중에 다섯 신부는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것입니다.

    분별과 준비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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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지혜나 깨달음, 계획도 여호와께 대항할 수 없다.” (30절)

    ‘대항’이라는 단어를 쓰자니 너무 거창하긴 합니다. 누가 감히 여호와께 대항할까요? 그러나 대항까지는 아닌데 대척점에 서는 경우들이 있다는 생각은 듭니다. 나의 고집, 나의 경험, 나의 생각, 나의 계획, 나의 지혜, 통찰, 대세, 흐름, 문화등을 인해서 하나님과 대척점에 서있는것이죠. 대항하면 맞을 것 같으니까 들고 일어(?)서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않고 뻣대는 것이죠.

    딸 하나가 요즘에 부쩍 “노!” 라는 말을 잘합니다. 어쩌다 가르친 단어인데, 엄마, 아빠 다음으로 잘하는단어입니다. 자기 맘에 안들면 무조건 큰 소리로 “노!”를 외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부모인 저와 아내가 항상 하나의 말을 들어주는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지혜나, 깨달음, 계획과 경험이 맞지 않을 때가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그렇게 차차 배워가고 있습니다. 대항하고 부딛혀 배우는것이 있다지만, 하나님께는 예외입니다. 그분 앞에 꺾으면 꺾을수록 수월합니다.

    경험이 아닌 경외, 대항이 아닌 항복이 지혜입니다. 이렇게 살때 승리(31절)하게 될것입니다.

    모두모두 Happy Thanksgiving 입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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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다투는 아내와 넓은 집에서 사는 것보다 지붕 한 모퉁이에 혼자 사는것이 낫다.’ (9절)

    좋은 아내를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생각해보면 참 치열하게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쉽게 다툼으로 달려들지 않고, 인내와 사랑, 용납과 이해로 함께해주고 있습니다. 덕분에 ‘지붕 한 모퉁이’에 외롭게 살고있지 않고, ‘넓은 집’에서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자칫 잘 다투는 아내를 만났으면 ‘모퉁이 집에서, 잘 다투는 여인’과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될뻔했습니다. 선한 아내를 만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선한 아내가 되어준 우리 아내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제가 ‘잘 다투는 남편’이 된다면 아내도 참 곤욕스럽겠구나 싶습니다. 그러니 저도 동일하게 다툼을 조장하는 남편이 아닌 더욱 사랑하고, 존중하고, 표현하고, 성실한 남편이자 아비가 되야겠습니다.

    다시 한번 건강한 가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2

    "가난한 사람의 부르짖음에 귀를 막으면 자기도 부르짖게 될 때 아무에게도 응답받지 못할 것이다." (13절)

    세상의 주고받음의 계산이 나름 명확합니다. 누군가의 “도와주세요!”라는 소리를 무시하면, 나중에 나의 도와달라는 소리도 무시당하게 됩니다. 준적이 없으니 받기도 어려워지는것입니다. 그러니 듣고, 반응하고, 도와주고, 사랑하라! 이렇게 적용해볼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나는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계산으로 반응하지 않고 사랑으로 반응 하시더라는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잘 못듣는척할 때가 있습니다. 그분이 “도와줘!”라고는 안하시지만, “함께할래? 해줄래?” 라고 말씀하시는 경우들이 종종있습니다. 하나님의 비전과, 사명, 사역을 위해 우리를 부르시는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분의 이런 음성을 자주 무시하곤 합니다. 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가 간구할때 들어주시고 결국 반응해주시곤 합니다. 계산이 아니고 사랑으로 반응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 ‘사랑’을 배워야합니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의 부르짖음에 일단 귀를 막지 않게 될것이고, 혹여 나의 부르짖음을 무시하고 귀를 막으며 듣지 않았던 자가, 나중에 도와달라고 부르짖으면 귀를 막지 않고 그 말 조차도 듣고 가서 그를 위해 도와주게 될것입니다.

    이와같이 세상의 기준을 훌쩍 뛰어넘어, 사랑의 마음으로 반응하기를 선택하는 크리스천이 되야겠습니다. 귀를 막지 않는 크리스천, 무시당했다고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으로 반응하는 크리스천이 되야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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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요즘도(?) 온통 교회 생각뿐입니다. 당연하죠. 일단 새로운 교회 장소를 계약하는데 참 간증이 많습니다. (나중에 차차 풀어낼때가 오겠죠 ㅋ) 일단 그걸 떠나서, 최종 계약을 하려고 하는데 느닷없이 전에 전혀 나오지 않았던 ‘보증인’에 대한 얘기가 나왔었습니다. 계약을 위해서 누군가 제 3자의 보증이 필요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한참 전에 크레딧 체크를 끝냈고, 그간에 별 얘기가 없었기 때문에 저로서는 난감했습니다. 보증이라니! 이 어려운 일을 누구에게 물어봐야할까요? 이런 저런 과정이 있었지만 결국 보증서는 사람 없이 계약이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타인을 위해 보증이 된 사람은 옷을 잡히며 외인의 보증이 된 사람은 자기의 몸을 잡힌다.” (16절)

    다행입니다. 보증인 얘기가 나왔을 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걸 누가 보증합니까? 하나님이 보증하시는거 아니였나요? 사람이 보증해야한다고 하면 계약 안하는게 맞지 않나요? 저도 보증 못하고, 누가 이 장소 재정을 보장합니까? 하나님 그런거면 안하고 싶습니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람이라는게 쉽게 포기가 안되니 ‘보증인’을 찾긴 찾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연약한 제 마음을 아시고, 보증 없이 계약 할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증인 되어 주셨습니다. 만약에 누군가, 혹은 어떤 단체를 보증인으로 세웠다면 저도 사람인지라 그 사람, 혹은 그 단체 때문에 마음이 좀 편해(?)졌을것 같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던 갈망의 순수성이 그러므로 저하됐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보증서준 사람은 두려움(?)에 떨었겠죠. 아무쪼록 보증인되시는 하나님 한분으로 충분하게 일이 해결되서 너무 감사합니다. 나의 보증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보증하시는 하나님만 간절히 의지합니다. 주님 저를 위해, 바우 교회를 위해 친히 보증인 되셨으니 이제 주님은 "옷을 잡히신 분" 이시고 "자기의 몸을 잡힌 분" 이십니다. 제 입장(?)에서는 할렐루야입니다. 마음이 편해집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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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이들이 개척 초기부터 지금까지 계속 계획이 뭐냐고 묻습니다. 일년동안 얼만큼 성장하는게 목표고, 계획이었는지 묻고, 일년이 지난 지금 얼마나 계획이 성취되고 목적이 달성됬는지를 궁금해 합니다. 그러면 저는 특별한 계획이 없었노라고 대답합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데로 수용하고 감사하겠노라고 다짐했었다고 대답합니다. 어떤 계획과 목표를 세우면 그에 이르지 못했을때 하나님께 실망하고, 나 자신이 낙심할까봐, 또 크신 하나님을 저의 조그만 비전에 담을까봐 비전없이 달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계획이 있어야 목표를 달성한다. 전쟁은 전략을 세워 놓고 하여라!” (18절)

    이제는 어느정도 계획이 필요하다 싶습니다. 왜냐면 이제는 더욱 ‘영적전쟁터’로 깊숙히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우교회도, UT Austin 캠퍼스에서 하는 이그나잇도 영적 전쟁임을 더욱 선명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더 담대하게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달려가기 시작해야겠습니다. 물론 처음과 같은 마음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내 계획과, 내 뜻대로 움직이겠다는 어설픈 생각은 당연히 절대 아닙니다. 그저 조금더 내 자신을 정리하고, 사역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일정의 목표를 상정하여, 주님을 위해 더욱 열심히 내 달려야겠다는 것이죠. 계획을 세우고 전진할때 ,이 영적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고 승리하고 성취하게 해주실것임을 믿습니다.

    바우교회도, 이그나잇도 이 영적 전쟁에서 종국에는 승리하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부탁드리는 것은 많은 성도님들이 함께 기도해주시고, 세워 놓은, 또 앞으로 세울 계획들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성도님들의 동역과, 참여, 기도와 후원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함께 해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다가올 하루하루를위해 더욱 기도하며 성실하게 계획하며 순전하게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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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포도주는 다른 사람을 조롱하게 하고 독주는 떠들게 한다. 이런 것들에 빠지는 것은 지혜롭지 않다. (1절)

    여기서 “빠지는것”으로 해석된 단어는 영어로는 ‘astray’라는 단어인데요, 이 단어가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포도주면 어떻고 독주면 어떤가요? 뭐가 됐던지 간에 ‘astray’ 즉, ‘길을 잃게’ 만드는것이라면 무조건 지혜롭지 않은것입니다.

    지혜자가 술을 예로 들었으니 술로 예를 이어 가봅니다. 자주 이런 질문을 듣곤 했는덷요. “목사님 과일주는 괜찮지 않아요? 막걸리 조금? 스테이크 먹을때 와인 조금 괜찮지 않아요? 주종에 따라 좀 다르지 않나요? 폭탄주만 안먹으면 되지! 술 취하지만 않으면 되지!” 이런 질문들을 쏟아내는 것이죠. 사실 질문이 아닙니다. 그냥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돌려서 동의를 요구하는 목소리일 뿐입니다.

    저는 사실 소주, 맥주, 막걸리, 와인등 다 잘 모릅니다. 뭘 먹고 즐겨봤어야 알죠. 그래서 이 모든게 저에게는 그저 혹 '길을 잃게 만들지 모르는 음료' 정도입니다. 조심해야하고, 경계해야하는 음료 말입니다.

    나로 하여금 빠져서 길을 잃게 만드는 모든것은 다 조심해야합니다. 그게 포도주던, 독주던 다 조심해야합니다. 만약에 누군가 친구, 책, 영화, 이단종교등에 빠져 길을 잃는다면 그것들도 당연히 버려야합니다.

    방향이 아주 조금만 어긋나도 결과는 판이해집니다. 그저 10도정도 방향을 틀었을 뿐인데 초반과 다르게 100km 후에는 전혀 다른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는것이죠. 길을 잃게 만드는 모든것을 다 끊어 버려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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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들은건데요, 한 어른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즘 젊은 목사들은 인간을 잘 몰라요. 그들의 마음, 본성, 인생, 생각등에 깊은 통찰과 이해가 없지요. 그래서 간혹 젊은 목회자들의 설교가 가볍고, 전혀 실제적이지 않아요. 또한 사람의 인생과 내면을 진중하게 건들지 못하죠!”

    아직 젊은 저 같은 목회자가 이 노년의 목사님의 충고를 온전히 이해하긴 힘들겠지만, 저도 대략 이 목사님의 조언이 어떤 부분을 걱정하시는지 조금씩 느끼고 있습니다. 삶을 조금씩 더 이해하면 할수록 지난 날의 저의 설교가 한없이 가볍거나, 사람의 심연을 관통하지 못했다라는 깨달음을 얻을때가 있습니다. 제가 했던 설교에 제 자신의 삶을 투영해보아도 도무지 와닿지 않는데 어떻게 많은 이들의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릴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오늘 잠언 기자는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러내느니라.”(개정개역5절)

    '명철한 사람'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을 아는, 그들의 마음 깊은 곳을 길러내는, 이러한 지혜를 얻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때로는 꾸짖고, 도전하고, 가르치고, 회복되게 하고 싶습니다.

    ‘사람’을 조금더 부지런히, 진정성 있게 공부해야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더 따듯한 눈으로, 더 세심한 눈으로, 그들의 필요와, 간구, 마음과, 고민, 생각과 감정등을 깊이 살피고 마음에 담아야겠습니다. 양을 치는데 양을 잘 모르는 목자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겠죠! 하나님께서 제게 맡기신 사람들의 심연을 알수 있도록, 더욱 진정성 있는 목회자가 될수 있도록, 한편의 설교에도 그들의 마음 깊은 곳까지 울림을 줄수 있는 그런 목회자가 될수 있도록 명철한 사람을 꿈꾸며 훈련해야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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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절묵상 (21절)

    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으나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이뤄진다.”

    왜 이렇게 계획이 많은 걸까요? 욕심일까요? 열심일까요? 결국 하나님의 뜻만 이뤄진다고 하는거 보니 무작정 계획이 많은것만이 좋은것은 확실히 아닙니다. 그도 그럴것이 매년 첫날 한해의 계획을 세우며 계획이 많은 사람일수록 실천의 확률이 급격히 낮아지는 것을 봅니다.

    ‘많은 계획’보다 필요한 계획, 실천 가능한 계획,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계획하는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교회는 그렇습니다. 자꾸 뭘 해야할것 같습니다. 일년 교회력을 짤때마다 그런 부담을 느낍니다. 한 달이라도 행사(?)가 없이 지나가면 뭔가 잘못하고 있는것 같이 느껴져서 없던 계획도 만들곤 합니다. 그렇게 1년 교회력을 다 쓰고 보면 얼마나 많은 계획이 있는지 모릅니다. 당연하게도 걔중에 상당히 많은 계획들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계획으로 딱 몇개만(?) 잘해도 정말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교회 되길 기도합니다.

    2 “하나님의 뜻만이 이뤄진다” 이 말을 들으면 좀 서운한 감도 사실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럴거면 계획을 왜 세우고, 왜 열심을 내고, 열심히 생각은 왜 하나?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 생각은 바로 버립니다. 생각을 고쳐 먹는것이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진다고 하니까 행복한것이죠. 아무것도 안 이뤄질수도 있는데, 하나님의 뜻이 이뤄집니다. 성취됩니다. 성공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데 성공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세상 살다보니 10개 시도해서 한개만 성공하는것조차도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나에게만 맡겨놓으면 많은 계획이 있어도 다 실패하고 망할까봐 사랑과 인자의 하나님은 당신의 뜻으로 임하시고 인도하셔서 이뤄주시는것이죠. 말그대로 "할렐루야!" 입니다. 그러므로 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여호와의 뜻이 바우 교회 안에 이뤄질것입니다. 아멘! 다른거 다 실패하고 안되도 하나님의 뜻이 이뤄질것이니 이미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Happy Thanksgiving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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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람이 자기가 어리석어 자기 길을 망치고는 속으로 여호와를 원망한다.’ (3절)

    정곡을 찔리면 유구무언입니다. 자초한 어려움일 때가 참 많습니다. 인생에 살면서 큰 결정을 할때가 몇번 있습니다. 학교, 일자리 등이 큰 결정이고, 결혼같은것은 정말 큰 결정 입니다. 생각해보면 이때까지 곧 잘 결정해 온것 같습니다. 특히나 사명과 결혼은 참 두고두고 결정을 잘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옳은 결정만을 하는것은 아닙니다. 경거망동하는 결정으로 쓸데없는 고난을 자초한 적도 꽤나 많습니다. 삼손같은 사람이 하나님을 원망한다거나, 가룟유다 같은 사람이 예수님을 원망한다면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입니다. 내 자신이 어리석어 고난을 자초하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비난받고, 실소를 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개척 1년 가장 어려운것이 바로 결정의 영역 입니다. 내 자신이 어리석어 잘못된 결정을 할까봐 그게 항상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결정을 한다음에 하나님을 원망할까봐 그게 두렵습니다. 그래서 속도를 정하는데 있어서, 방향을 정하는데 있어서 항상 두려움이 가장 앞섭니다. 나의 어리석음으로 길을 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자초해서 고단한 길을 가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쫓아 새로운 교회 장소를 계약했습니다. 계약서에 싸인하기 전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것이 나의 뜻, 나의 속도, 나의 방향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쫓는 결정이 되게 해주세요!” 기도중에 하나님께서 더욱 마음에 평안과 담대함을 주셨습니다.앞으로도 계속 기도, 또 기도하며 나의 어리석음이 아닌 하나님의 지혜와 방법을 쫓는 자녀되길 기도합니다. 고난중에 하나님을 원망하는것이 아니요, 내 삶을 점검하고, 결정을 점검하고, 마음을 돌아보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2

    게으르면 깊은 잠에 빠지고 나태한 사람은 굶주리게 된다. (15절)

    요즘 잠이 많이 늘었습니다. 알람을 들어도 예전처럼 일어나지 못합니다. 예전에는 알람이 울릴려고 준비할때(?) 깨는 느낌이었다면 요즘은 알람이 목청껏(?) 소리를 질러도 전혀 듣지 못하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제 자신에게 실망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나 많이 게을러졌나?’ 아침에 일어나 아내를 보면서 그래서 가끔 눈치를 보게됩니다. 예전에는 아내보다 늦게 일어나는 일은 없었으니까요 ㅋ

    혹 삶의 습관에 게으름이 묻었을까봐 걱정됩니다. 영혼도 더욱 잠을 사모하고 있는건 아닐까 걱정 됩니다. 육신을 위해서는 딱 필요한 만큼 자고, 영혼은 자지 않고 깨어서 영육이 부지러한 삶의 태도를 계속 유지해야겠습니다.

    아내도 알지만 하루종일 부단히 일하려고 노력합니다. 왠만하면 앉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설교 쓸때도 심지어 반은 일어서는 책상에 서서 씁니다. 계속 움직여야 졸지 않고, 계속 생각하고 일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게으름을 싫어합니다. 가만 있으면 게으름은 계속 공격해옵니다. 누군들 쉬고 싶지 않고, 앉고 싶지 않고, 눞고 싶지 않을까요?

    게으름과 나태함을 철저히 경계합니다. 나의 원수 입니다. 언제까지고 부지런의 방패를 들고 쳐들어오는 게으름과 나태를 막아서겠습니다! 주님, 제게 힘과 체력과 건강을 주세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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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목회를 하다가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일이 다 끝나고 나서 동역자들의 분위기와, 일의 결과를 보면서 그제서야 비로서 깨닫는것이죠. ‘아! 내 방법이 틀렸구나!’

    “어리석은 사람은 깨닫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자기 의견을 내세우기만 한다.” (2절)

    딱 이런 실수를 할때가 꽤 빈번합니다. 가르치고, 고쳐주려는 음성에는 강하게 반발하고, 끝까지 내 방법을 고집하는것이죠. 결과는 참담할때가 많습니다. 최악은 아닐지라도 명확하게 최선이 아닐때도 참 많습니다.

    모두가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저는 지적받고, 수정되는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의 의견이 수렴되지 않고 반대되는것은 달갑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닌척 하려고 노력하지만 반대의견들이 나오거나, 지적하는 얘기를 듣게 되면 얼굴이 굳거나, 불편해하는것을 감추지 못할때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인것이죠.

    ‘나의 방법’이 최선이 아니고, ‘최선의 방법’이 최선입니다. 더 나은 방법은 언제든 있을 수 있고, 나는 언제든 틀릴수 있습니다. 필요하면 그게 누가 되었든지 간에 지적받고 수정해야합니다. 아닌것이 맞다고 우긴다고 정답이 되는것이 아닙니다. 틀린것을 내가 맞다고 우긴다고 맞는것이 아닙니다.

    조금더 겸손한 사역, 수용하는 사역, 배우는 사역, 성장하는 사역을 놓치지 않아야겠습니다. 독불장군이 되어 고집스럽게 달리는 목사가 되는 것을 경계해야겠습니다.

    2

    “남의 말을 하는 것은 맛있는 음식과 같아서 사람의 뱃속 깊이 내려간다.” (8절)

    맛있는 음식은 몸에 안좋습니다. 보통은 그렇습니다. 결국 맛있는 음식은 지방이 되어 우리 몸에 차곡 차곡 쌓입니다. 콜레스테롤도 쌓이고, 지방간으로도 축척 됩니다. 소문과도 같은 근거없어보이는 얘기지만 맛있는 콜라를 많이 먹으면 이가 삯고 뼈가 삯는다는 얘기들도 합니다. 몸에 안좋은 이런 ‘맛있는 음식’들은 몸속 깊이 파고들어 우리의 몸을 좀 먹습니다. 망가뜨립니다. 입만 즐겁지 사실 좋은게 별로 없습니다.

    남 말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뱃속 깊이까지 들어가 결국 우리의 영혼을 망가뜨립니다. 타인을 향해서 좋은 말도 아닌 나쁜말을 한다면 내면이 건강할수 없습니다. ‘맛있는 음식’이 우리의 몸을 슬금슬금 망가뜨리는것처럼 ‘남의말’도 결국 우리를 야금야금 좀먹어 무너뜨릴 것입니다. 남의 말 하면 관계도 깨지고, 신뢰도 깨지고, 존중과 존경도 깨집니다. 사랑받기도 힘듭니다. “저 사람은 꼭 뒷말하더라! 상종 못할 사람이야! 믿지 못할 사람이야!” 주변이 이렇게 평가하며 떠날 것입니다.

    당장 입이 즐겁고, 귀가 즐겁다고 해서 남에 대한 말을 쉽게 하면 망하게 될것입니다. 남에 대한 경솔한 말, 근거없는 소문, 정죄와 판단, 미워하는 말, 조롱하는 말, 거짓말 다 멈춰야합니다. 걱정을 가장한 폭로를 멈춰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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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툼을 시작하는 것은 댐에 구멍 내는것과 같으니 다툼이 일어나기 전에 말다툼을 그치라 (14절)

    가족이 깨지고, 우정이 깨지고, 부부가 깨지고 하는 것은 꼭 엄청난 사건 때문에만 생기는 일이 아닙니다. 가랑비에 옷젖는다고 말하는것처럼 잦은 다툼이 결국은 조그만 금을 점점더 벌어지게 만들고, 보이지도 않을 점과 같은 균열을 큰 구멍으로 만들어 결국에는 깨지게 하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분명히 말합니다. 다툼을 시작하는 것은 댐을 무너뜨리는게 아니라 구멍을 내는 것입니다. 사실 이게 무언가를 무너뜨린다고 하면 사태의 심각성이 인지가 됩니다. 그래서 쉽게 다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냥 조그만 ‘구멍’이면 심각성을 쉽게 느끼지 못합니다. ‘이 큰 댐에 구멍하나 생긴다고 무슨 큰 일이나겠는가?’ 하고 가볍게 여기게 되는것이죠. 그래서 잦은 다툼을 별것 아닌것처럼 여기고 계속 반복하여 싸우는것입니다.

    반복되는 다툼의 위험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별다른 상흔을 안만드는것 같다고 해서 반복하다가는 결국 모든 관계가 깨어지는 슬픈 일을 경험하게 될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부부나 친구들이 별것 아닌것으로 여기는 소소한 다툼의 반복 때문에 관계의 깨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툼을 멈춰야합니다! 다툼의 언어, 감정의 폭력, 육체적, 물리적 다툼은 당연히 하지 말아야합니다. 힘겹게 쌓아 올린 ‘댐’이라는 관계의 가치를 다툼이 아닌 사랑으로 더욱 견고히 세워야겠습니다.

    2

    즐거운 마음은 병을 낫게 하지만 근심하는 마음은 뼈를 말린다 (22절)

    현대인의 병은 다 마음에서 시작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온몸 안아픈데가 없어서 병원을 갑니다. 검사후 결과를 보는데 모든 수치가 정상입니다. 이때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스트레스가 심하셔서 그래요!” 마음은 우리의 육신을 휘어잡습니다. 저도 심할때는 설교전에 얼마나 울렁증에 시달렸는지 모릅니다. 올라가기 전에도, 올라가서도 중간 중간 머리가 하얘지는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분명히 아플 상황이 아닌데도 육신이 맥을 못추기도 합니다. 정신과 마음, 생각을 건강하게 다잡는것이 참 중요합니다.

    정신건강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울, 공황, 조울등 많은 정신병의 원인이 실제 병에 이르기 전에 가졌던 두려운 마음과, 불안한 마음과, 걱정하는 마음에서부터 온 경우들도 참 많습니다. 결국 정신도, 육신도 마음의 연약함에서 큰 해를 입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가진 울렁증을 극복할수 있었던 힘은 오직 성령님 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의지 입니다. 믿음의 선포로 내 영혼에 소리칩니다. “내 영혼아! 담대하라! 괜찮다! 이겼다! 문제 없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그렇게 참 많은 마음의 문제를 그때 그때 해결했습니다. 마음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내면에서 퍼지는 우울함의 소리, 의심의 소리, 두려운 소리, 낙심의 소리, 거절의 소리등에 마음의 문을 열어주면 안됩니다! 주와 함께 기뻐하며, 주님과 함께 승리하는 하루가 될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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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절묵상

    “뇌물은 그 뇌물을 쓰는 사람에게는 요술방망이 같아서 어디에 쓰든지 안 되는 일이 없다.” (8절)

    사역을 정치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끔 주변에서 들리는 소식들을 듣다보면 목사가 목양은 안하고 정치만 하고 있는 것을 듣게 됩니다. 여기저기 힘있는 자들에게가서 아부하고, 더 나가 선물공세를 퍼붓습니다. 명분은 좋습니다. 좋은거 드리고, 좋은 말 해드리고, 잘해드리고, 공경하는것이니 더할나위 없이 좋은 명분 입니다. 그러니 가는 곳마다 초대가 되었던, 초대받지 않았던 두 손에 선물 한가득 들고, 입에 선물같은 말 한아름 담아 누비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받는이들이 압니다. 보는 이들이 압니다. 그게 선물이 아니고, 아부고 뇌물인줄 아는것입니다. 철저히 계산된 행동인것을 압니다. 기대하는 바가 있어서 하는 언행이라는 것을 아는것입니다.

    정직한 목회, 순수한 목회, 사람전에 하나님을 두려워할줄 아는 목회를 해야합니다. 계산해서 잘해주고, 좋은 말 하고, 선물주는것은 ‘뇌물’입니다. 사람보고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것도 결국 ‘뇌물’입니다. 무슨 일이든 세치혀를 놀려 사람을 현혹하는데 혈안이 되는것도 ‘말의 뇌물’입니다. ‘뇌물’의 목회를 철저히 경계해야겠습니다.

    ‘선물’이라는 포장을 쓴 ‘아부와 뇌물’로 목회가 성장하기 시작하면 목회는 타락하고, 심지어 그때문에 교회도 흔들릴지 모를 일입니다. ‘뇌물’ 먹인 사람들이 흔들리면 같이 흔들리게 될것입니다. ‘뇌물’이 떨어지면 사람도 떠나고 교회도 흔들리게 될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선물’인지 ‘뇌물’인지 구분해야합니다. ‘계산’인지 ‘사랑’인지 구분해야합니다. ‘진심’인지 ‘위선’인지 구분해야합니다. ‘축복’인지 ‘투자’인지 구분해야합니다. 목회의 순수함을 반드시 지켜야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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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울증이 있는걸까요? 아니요. 그건 아닐겁니다. 그러나 요즘 기분이 좋았다가 안좋았다가 하는 주기가 과거보다 상당히 잦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더 감정의 변화의 무던해져야할텐데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상황에 영향을 좀 받는듯 합니다. 그러나 상황에 의해서 조금 의기소침 해지다가도 누군가 격려의 말을 해주면 또 금방 힘이 납니다. 요즘은 특히 격려의 말이 참 좋습니다.

    과거에는 누군가에 말에 그렇게 큰 힘을 얻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잘 지치지도 않았고, 빠르게 내 달리느라 앞만보고 달린것 같습니다. 주변의 좋은 말이든, 안좋은 말이든 그다지 신경쓰지 않으며 달려 나가기만 한것이죠. 그런데 요즘에는 잘들립니다. 귀기울여 들으니 격려의 말에서 참 큰 힘을 얻습니다. 심지어 말하는 사람이 반쯤은 격식차린 말로 던지는 격려조차도 힘이 됩니다. 원래 음식도 메인디쉬만 맛있고 배채우는게 아닙니다. 사이드디쉬도 얼마든지 맛있고 배를 채울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격려’라는 형식의 모든 말이 다 힘이 됩니다.

    “기분 좋은 말은 꿀송이 같아서 영혼을 즐겁게 하고 아픈 뼈를 고치는 힘이 된다.” (24절)

    개인적으로 이 말씀을 경험하고 있자니 주변 사람들에게도 더욱 ‘기분 좋은 말’을 많이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됩니다. 격려의 말, 기분 좋은 말, 칭찬의 말, 인정하는 말, 따듯한 말, 소망을 주는 말을 더욱 많이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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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내는데 더딘 사람은 용서바도 낫고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성을 빼앗는 사람보다 낫다.” (32절)

    그 유명한 ‘손자병법’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는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이삭 같은 사람은 우물 팠다가 다툼이 일어날것 같으면 그냥 우물을 넘겨 버렸습니다. 만약 쟁취를 위해 싸웠다면 결국 우물을 차지 했다 할지라도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게 됬을 것입니다. 어쩌면 희생자는 많고 우물도 못 얻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물을 넘기다 보니 은혜를 누리는 부족도 늘어나고, 이삭도 끝내는 좋은 우물을 차지하게 됩니다. 과정이 힘들었던것은 사실이나, 과정에 있었을수도 있는 희생자와 비극은 덕분에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가장 위대한 승리 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이든, 하마스던 그들이 원하는 바를 차지하고 땅을 차지한다고 한들, 세상 그 누구가 ‘승리자’라고 말할까요? 파괴자라고 말할것입니다.

    화를 내고, 싸우고, 빼앗는 용사는 하류용사 입니다. 진짜 용사는 싸우지 않고 승리합니다. 분노를 폭발하지 않고도 승리합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분노를 앞세워 시작한 전쟁과 파괴의 승리가 아니고 평화와 인내를 앞세운 십자가 임을 항상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십자가로 승리해야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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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계획은 사람에게 있어도 결정은 여호와께 있다. (1절)

    지난 한해 개척교회를 섬기며 가장 뼈져리게 경험한 지혜입니다. 계획은 참 많습니다. 개척이라는 것을 생각한 순간부터 수많은 계획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결정은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내 계획대로 되기보다는 하나님의 섭리로 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게 가장 안전하고, 최선의 길이었음을 지나고 나서 깨닫곤 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계획을 안할것은 아닙니다. 저의 어떤 계획을 하나님께서 결정하셔서 진행하실지 모르기 때문에 저는 열심히 계획을 짭니다. 다만 계획을 짜면서 무조건 내 계획대로 하려는 교만만 철저하게 배제합니다. 그러면 문제가 없습니다. 원래 회사도 보니까 기획서는 사원이 쓰고, 결정은 상사들이 하더라구요. 상사가 결정하기 때문에 기획서를 안쓰는 사원은 짤립니다!

    열심히 계획하되, 하나님의 결정에 순종하겠습니다. 내 교만과, 내 고집을 버리겠습니다. 내 경험과 지혜도 복종시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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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행위가 자기 눈에는 다 깨끗해 보여도 여호와께서는 그 마음을 꿰뚫어 보신다. (2절)

    기준이 다릅니다. 내가 가진 기준으로 나 자신이 아무리 깨끗해 보여도 하나님의 내면을 관통하시는 눈과 기준으로 보았을때 아니라면 깨끗한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천은 기준이 다른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법, 윤리, 도덕의 기준을 훌쩍 뛰어넘어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기준을 따르려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사랑받고 사랑주라고 한다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다면,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는 격입니다. 세상이 음란과 간음의 죄를 짓지 말라고 말한다면 성경은 눈으로 보고 음욕을 품는것만으로 음란죄다 라고 말하는 격입니다. 기준이 다릅니다.

    세상이 제시하는 ‘깨끗함’의 기준이 점점 낮아지고, 방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제각각입니다. 거친 표현을 빌려 사용하자면 ‘기준이 미쳐 날뛰고 있는 형국’ 입니다. 그러다 보니 “내 눈에 나는 깨끗해보여!”라고 생각하는 죄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태연자약한 죄인들이 너무 많은것이죠.

    그래서 성령의 전신갑주는 이렇게 말합니다. “의의 호심경”을 입으라. 가장 중요한 마음이있는 그곳을 정의로 지켜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의 기준으로 마음을 지켜야 한다는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의라는 기준으로 지켜내지 못하면, 이 시대가 제안하는 상대적 의로움에 빠져 기준없이 방황하고, 악을 용인하여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음으로 내모는 신앙인이 되고 말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깨끗한 사람이 될것이 아닙니다. 나의 기준으로 깨끗한 사람이 될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관통하여 보시는 하나님의 시선 아래서 깨끗한 사람이 되길 힘써야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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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하는 일을 여호와께 맡겨라. 그러면 네가 생각하는것이 이루어질 것이다. (3절)

    저는 완벽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약간 그런 성향이 있는것 같다고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말해주곤 합니다. 이유인즉슨, 제가 일을 잘 맡기지 않기때문입니다. 맡겼다가도 다음에는 안맡기고 제가 하는것이죠. 왜냐면 제가 돌려받은 일에 만족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해다주신 분의 성의가 있으니 거절은 못하지만 다음에 다시 일을 부탁하지 않고 제가 직접 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본이 아니게 고달플때가 많습니다. 사실 영상을 편집하는 일도 그래서 시작하게 된것입니다. 초단위로 편집하는게 아니라 나중에 보니까 제가 몇 프레임 단위로까지 편집하는 집착성을 보이고 있더라구요. 지금은 다행히 많이 내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도 편하게 맡길때가 있습니다. 저보다 비교도 안되게 잘하는 프로에게 맡길때입니다. 제가 노력해서 감히 쫓아갈수 없는 지경에 있는 기술자, 실력자들에게는 맘 편하게 맡깁니다. 그러면 제가 생각하는것보다 훨씬 좋은 결과물을 마주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께 맡길줄 알아야합니다. 그분이 인도하시게 해야합니다. 그분이 주관하시도록 해야합니다. 바울이 선교 잘해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데로 지역을 옮겨야 합니다. 베드로가 선교를 잘해도 이방인 선교하라고 하면 고넬료에게 가야합니다. 그분께 맡겨야 더 나은 결과물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 떠넘기라는게 아닙니다. 그분의 능력과 인도하심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너무 자주 들으셨을분도 계시지만, 그래서 저는 교회 개척할때 ‘담임목사’라고 불리기 보다 ‘개척도구’라 불리기를 원했습니다. 교회를 세워가는 이 중대한 사역을 하나님께 맡겨드리고, 저는 그분의 도구로써 참여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제가 하면 기껏 일정의 수준(?)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맡기면 제가 생각(?)하는 수준 이상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나는 오직 꿈만 꿀수 있는 것을 하나님은 쉽게 이루실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맡겨드리고 그분의 도구로 일하는 지혜를 발현할 때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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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절묵상(17절)

    어릴적 못살았습니다. 부모님이 참 많이 고생하셨지요. 단칸방에서 다섯명, 창호지 여닫이 문, 아궁이에 연탄불을 때고, 음식도 아궁이 위에다가 했었지요. 집에는 화장실이 없어서 밖으로 나가서, 소위 말하는 주인집 뜰에 딸려있는 재래식(?) 화장실에서 조명도 없이 일을 봐야했습니다.(TMI지만, 흰색 고무신모양의 재래식변기조차 없이 구멍만 뚤려있는, 구더기가 득실대는 그런 극악의 화장실이었습니다 ) 그래서 저는 어릴적 요강을 썼습니다. 그러기를 몇년, 그 이후로 형편이 좀 나아지기 위해 아버지가 조그만 사업을 시작하고, 먼저 저만 데리고 상계동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지하철 바로 밑에 있는 (영화에나 나올법한) 판자집에서 얼마간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그때 고기를 맘껏 먹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치킨은 거의 일년에 한번 먹었던것 같습니다. 그마저도 부자 친척네 가야 먹곤 했습니다. 가끔 같이 살던 삼촌이랑 사촌형이 해주던 햄이 있었는데 그게 어린 저의 삶의 가장 큰 낙이였습니다. 지금도 기억하는데 그때 먹었던 햄의 맛은 절대 잊을수 없는 천상의 맛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그런 맛이 나는 햄구이를 먹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기억입니다.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따듯한 기억입니다. 없어서 불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가족의 사랑을 가까이 느꼈던 시절들 입니다. 사랑은 고난마저 아름다운 추억으로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서 풀을 먹으며 사는 것이 서로 미워하면서 살진 송아지를 먹는것보다 낫다.” (17절)

    인생의 참 가치는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돈?! 사랑이 없다면 의미 없습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 혼자 돈쓰면서 다니는 사람 없습니다. 돈으로 주변 사람이라도 사는(?)것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돈으로라도 주변 사람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풍성하면 가난해도 가난하지 않습니다. 힘들지만 행복합니다. 못먹지만, 고달플지라도 웃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조그만것에도 감사가 넘칩니다. 때로는 삶에 지쳐 치열하겠지요. 왜아니겠습니까?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원망이나 씁쓸함도 있겠지요. 그러나 사랑으로 이겨집니다. 돈으로는 결코 사랑을 이길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이겨지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돈을 선택하기보다는 날 사랑하시는 하나님 곁을 선택합니다. 돈을 선택하기 보다는 날 사랑하는 가족을 선택합니다. 돈을 선택하기보다는 나를 아껴주는 친구들과 동료를 선택합니다. 무조건 돈보다 사랑입니다. 사랑이 진정으로 날 풍요롭게 합니다! 아멘!

  • 한절묵상(15절)

    목사가 하기엔 뜬금없는 말이라고 느껴질수 있으나 불교의 대표 경전인 ‘화엄경’에 핵심사상을 이루는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 불교만이 유일하게 가르치고 있는 중요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경의 지혜안에서도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지혜입니다.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모든 날이 다 불행하지만 마음이 기쁜 사람에게는 매일이 잔칫날이다” (15절)

    매일이 잔칫날이여서 기쁜게 아닙니다. 마음이 기쁘니 매일이 잔칫날인것입니다. 마음이 기쁘지 않으면 실제로 매일 잔치같은 날이 이어져도 불행하다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는 군중속에서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도 만나고, 풍요속에서 가장 빈곤자같은 마음으로 사는 사람도 만납니다.

    그래서 잠언기자는 잠 4:23절에 이미 이 말을 했던 것입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이는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을 지켜야합니다. 그러면 어려운 상황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불행중에도 다행을 찾는 사람이 될수 있습니다. 고난중에도 감히 기쁨을 느끼는 이가 될 수 있습니다.

    나의 결단과 노력으로 나의 마음을 온전히 지킬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빌4:7, 우리말성경] 그리하면 모든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주의 능력으로 마음을 지켜 매일 기쁨의 잔치를 누리는 신앙인의 삶이 되길 기대합니다!

  • 한절묵상 (20-21절)

    ‘빈익빈 부익부’라는 말이 있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됩니다. 이는 인간 관계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납니다.

    부자 주변으로는 사람이 꼬입니다. 뭔가 얻을것이 많다는 생각과 기대가 있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그들이 뭘해도 멋져 보이고, 여유가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부자’라고 듣는 순간 그 사람이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 옆에는 사람이 많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얻을것이 별로 없고, 오히려 내 것을 나눠야 할지 모른다는 부담이 있기 때문인듯 합니다.

    잠언 기자는 이 현실적 fact를 가감없이 기록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이웃들에게도 따돌림 당하지만 부자는 친구가 많다!” 그러나 여기서 지혜의 기록을 멈추지는 않습니다. 더 나은 인간관계의 지혜를 나열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멸시하는 사람은 죄짓는 자요, 가난한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은 복이있다!” (21절)

    학교도, 회사도, 친구들도, 심지어 교회도 ‘현실적 fact’에 매여서 가난한 사람에게는 미지근 하고, 부자에게는 뜨겁게 반응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현실적 반응에 우리까지 놀아나면 안됩니다. 오히려 이웃과 가난한 자들에게 다가가 친절하게 베풀고, 존중해주는 자가 되야합니다.

    특별히 교회가 부자에게는 잘해주고 가난한 자를 멸시한다면 최악입니다. 다른 말로 좋게 포장할수 없습니다. 최악입니다. 예수님은 부자와 가난으로 성도를 나누지 않았고, 부자 곁에 머물기 보다는 가난한 자들의 곁에 있기를 오히려 힘쓰셨습니다.

    어쩌면 세상은 가난한 사람을 따돌리고, 부자와 친하게 지내는것이 지혜라고 20절에서 마침표를 찍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럴수 없습니다. 한걸음 더 나가서 가난한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고, 사랑하고, 존중하는, 그들과 함께하는 21절까지 나가야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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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절묵상(4절)

    필연적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마치 소를 키우려면 소 구유가 더러워지는것과 같습니다. 소를 키우면서 구유가 깨끗할 수가 없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능력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한가지 이상의 일을 하는것이 항상 벅찹니다. 그런데 삶은 언제나 복합적입니다. 사역도 그렇습니다. 공을 한개만 돌리고있는게 아니라 다섯개, 열개를 공중에 던져서 돌리고있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당장이라도 떨어질것 같습니다. 공중에 떠있는 공들을 어떻게든 계속 유지하려고 하다보니 필연적으로 땀흘리고, 부담되고, 긴장되고, 힘들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돌리고 있는 공을 무작정 다 내려 놓을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을 하는데 있어서 땀을 흘리고, 긴장하고, 부담을 느끼고, 에너지가 소비되고, 통전적인 내가 소모 되는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이게 싫어서 내려 놓으면 맘은 편하고, 몸은 편할지언정 아무것도 할수 없습니다.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지만 풍성한 수확은 소의 힘에서 나오는 법이다!” (4절)

    아닌게 아니라, 이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까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습니다. 11월16일날, 가을 집회를 준비하기 위해 기획하고 있습니다. 실제 예배를 인도해야하기 때문에 찬양인도도 준비하고 있고, 설교를 해야하기 때문에 설교문을 써내려 가고있죠. 그 와중에 당연히 주일 설교를 준비해야하고, 주일 찬양인도도 준비해야합니다. 거기에 다음주에 시작되는 성경공부가 있어요. 그걸 또 준비해야하구요. 매일 아침 새로운 큐티를 하는데, 그것을 다시 영상으로 제작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목회는 책상에 앉아서 하는것이 아니니 새로 방문해주신 귀한 성도님들을 매주 심방하고, 또 유티를 찾아가서 큐티 나눔을 하고, 때로는 성도님들과 다른 특별한 목적없이, 캐쥬얼하게 만나 교제를 하기도 합니다. 거기다 교회는 성장해야하니 새로운 장소를 알아보고 찾아가서 중계사들도 만나고 조율하는 일들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끝이 아닙니다. 가족도 하나님께서 제게 맡기신 공동체이니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아이들을 돌보고, 동네 이웃들과도, 성도가 아니지만, 교제하는것까지 숨이 차오르는 복합적 삶을 살고있습니다. 그래서 눈앞이 깜깜한거예요. 제가 알기론 모든 성도님들이 각기 이정도의 복합적인 삶을 살고있습니다. 세부적인 내용이 다를 뿐이지 다들 공 10개쯤은 굴리고 있는것이죠.

    그러나 그렇다고 ‘소’로 상징되어지는, 이 일들을 치워버리면 ‘수확’은 없습니다. 맡겨진 일, 해야할 일, 그것들이 필연적으로 나의 ‘구유’를 더럽힐 지라도, 즉, 나로 힘들게 하고, 고단하게 하고, 바쁘게 만들지라도 포기할수 없습니다. 그러면 '풍성한 수확'은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외양간'에 ‘소’를 두고 ‘구유’가 더러워질지언정, ‘풍성한 수확’을 위해 열심과 성실로 포기하지 않고 달리겠습니다! 주여! 그러므로 건강을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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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절묵상 (20절)

    제 꿈을 초등학생때부터 목사였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태어나서 기억나는 순간부터 언제나 기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어릴적부터 다녔던 태권도장은 관장님 이하 사범님들까지도 모두 ‘태권도 선교회 소속’되어있는 일종의 선교사들 이었습니다. 캐나다로 유학을 가서 처음 홈스테이 한 집도 선교사님 댁이었고, 두번째로 홈스테이 한 집도 전도사님 집이었습니다. 그 집에 사는 또 다른 형님 한분은 악기를 이것저것 연주하면서 찬양인도도 하는 분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목사라는 꿈을꾸고, 악기를 다루며 찬양으로 하고, 교회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된것은 이러한 주변 환경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부인 할수 없습니다.

    잠언기자는 말합니다. “지혜로운 사람들과 동행하는 사람은 더욱 지혜로워지지만 어리석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람은 망하게 된다!” (20절)

    누구와 어울리는가, 어떤 환경에 둘러싸이는가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것처럼 집에서 부모가 매번 책을 읽고 있으면 아이들도 책을 읽고, 부모의 언어가 상냥하고 거룩하면 아이의 언어도 그렇게 된다고 말합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소위 말하는 ‘좋은 친구’들과의 유대감을 통해서 그들은 서로 ‘좋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는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를 시작부터 구분해서 만나지 않는게 쉽지는 않습니다. 만약 이런 일을 자행한다면 사람을 판단하는 자라는 오해를 받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또한 일 때문에도 만나고, 상호적관계로 만나기도 하기 때문에 마냥 피하기 어려운 순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더 중요한 단어를 기억해야합니다. 바로 ‘동행’이라는 단어입니다. ‘어울리다’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오며 가며 ‘지혜로운 자, 어리석은 자’를 만날수 있습니다. 이때 정말 중요한것은 그들과 함께 동행하는가 아닌가 하는 사실입니다.

    일때문에 만났는데 소위 말하는 ‘어리석은/악한’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함께하거나, 어울리거나, 동행하지 않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남을 동행으로까지 이어가는것은 문제가 됩니다.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지혜로운 분들과는 더 가까이, 동행하고, 어울리고, 배우며 성장하고, 만남 가운데 어리석음과 악함이 드러날때 그들과 어울리거나 동행하기를 멈추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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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절묵상(4절)

    “게으름뱅이의 영혼은 아무리 원하는 것이 있어도 얻는 것이 없지만 부지런한 사람의 영혼은 원하는 것을 넉넉하게 얻는다.” (4절)

    부지런 떤다고 다 넉넉하게 얻는것은 아닙니다!

    열심과 부지런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25년 전에 캐나다로 유학 갈때 빠른 시일 안에 서류를 준비하고 비자 인터뷰를 받았어야 했습니다. 처음 해보는 일인데 막상 유학을 신청하려고 하니 준비해야하는 서류가 굉장히 많았고, 캐나다 현지 학교에서 받아야 하는 서류, 번역해서 공증해야 하는 서류, 또 건강검진도 해야하고, 자세히 기억은 안나지만 굉장히 복잡한 절차들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부지런히 준비해서 서류를 접수 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서류는 작은 누님이 도와서 정말 부지런히 움직였던것 같습니다) 그렇게 서류가 접수가 되고 나자 제가 할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서류 준비는 제가 부지런히 해야하는것이지만, 허가 도장은 서류 감독관이 찍는것입니다. 제가 부지런을 낸다고 할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저 부지런히(?) 기다리는것 정도가 제가 할수 있는 일입니다. 나의 부지런이 성취의 전부가 아닙니다.

    기억해야합니다. 부지런해야 하는 영역이 있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이를 헷갈리면 우스운 일이 일어납니다. 자기가 부지런히 준비해야하는 ‘서류’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접수해서 얌전히 기도해야할때는 ‘부지런’히 전화해서 담당자를 괴롭혀 될일도 안되게 망칩니다.

    지혜롭게 부지런하고, 믿음으로 맡겨드리는 분별과 슬기로운 적용이 필요합니다.

    교회를 섬기다보면 이런 일들로 가득합니다. 부지런히 제가 해야할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완성이나 성취가 나의 부지런의 영역 밖에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교회 청소 정도야 제가 열심히 닦고 쓸면 교회가 깨끗해지지만, 교회 예배 장소가 새롭게 결정되는건 하나님의 결정의 영역이 있습니다. 물론 열심히 알아보고 기도하는 건 저의 몫이겠지요.

    그러므로 부지런히 살겠으나 오해하지 않겠습니다. 부지런으로 모든것을 얻을수 있다는 자만이나 착각에는 빠지지 않겠습니다. 제가 부지런히 뛰어야하는 영역에서는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부지런히 뛰겠습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부분에서는 믿음으로 기다릴줄 아는 자가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부지런함에 넉넉함으로 채워주시길 기도하고 소망합니다.

    게으름은 두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꿈은 원대하나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는 게으름, 또 하나는 꿈을 꾸기 조차 귀찮아 하는 게으름 입니다.

    4절의 기록처럼 그나마 원하는것이라도 있으면 상대적으로 조금 나은(?) 게으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생각마저도, 꿈마져도 귀찮아하는 게으름이라면 그것은 참 무서운 게으름 입니다.

    집에서 혼자 시간이 날때 항상 무언가 새로운 생각들로 머리를 채웁니다. 가만히 있으면 생산적이지 않다는 강박이 좀 있는 편입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은 “좀 편하게 살아!” 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저도 때로는 그런 필요를 느낍니다. 그런데 생각까지 게을러지면, 몸은 너무 쉽게 게을러 집니다. 그러면 덩달아 사역도 게으름에 빠집니다. 그래서 생각을 부지런히 만들어야합니다. 그러면 생각중에 반 정도를 시도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중에 한두개가 실현되기 시작합니다.

    생각의 게으름을 끊어내고, 행동의 게으름도 경계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게으름’은 설자리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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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절묵상(18절)

    간혹 느닷없이 이명이 들립니다. 별다른 의미가 없는 ‘삐’ 소리인데 얼마나 귀가 아프고 머리가 아픈지 모릅니다. 심하면 몇분간은 아무것도 못하고 고통을 참는데 오롯이 시간을 보내야할때도 있습니다. 다른 소리도 있습니다. 때로는 빗소리나, 잔잔하게 반복되는 백색소음을 듣게 됩니다. 그러면 이러한 백색소음으로 인해 머리와 마음이 청명해 지고, 상쾌해지고, 편안해 지는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이 반복되는 소리의 능력이 이정도 입니다. 그러니 의미를 담은 말의 능력이 만들어 내는 결과는 얼마나 위대할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18절 지혜자는 말합니다. 칼로 찌르는 듯 아픔을 주는 말이 있으나 지혜로운 사람의 혀는 병을 고친다.

    말에다가 독을 잔뜩 발라서 스치기만 해도 위독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날카로운지, 그들의 언어는 듣는 것만으로 마음이 무너지게 만듭니다. 누군가는 이런 ‘독의 언어’를 의도적으로 내뱉고, 또 누군가는 의도적이지 않지만 습관적으로 내뱉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알면서 내뱉는 ‘독을 담은 말’은 멈춰야합니다. 혹 부지간에 습관적으로 독을 담은 말을 내뱉고 있다면 주변의 충고를 곧이 듣고, 이러한 말을 멈춰야합니다. 날카로운 말을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혹 누군가가, “이런 말이 뭐 대수라고! 나는 이런 말 들어도 전혀 상처 안받는데?” 라고 반론하며 계속 ‘독을 담은 언어’를 내 뱉을 수도 있습니다. 전갈은 자신의 독으로 자신을 찔러도 멀쩡하다고 하죠! 그렇다고 ‘나는 괜찮으니까 남도 찌를꺼야!’ 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남은 면역이 없고, 그들은 결국 독에 죽게 될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이 상처받으면 그건 명백히 독을 담은 언어 입니다. 내가 괜찮다고 상대도 괜찮은게 절대 아닙니다. 칼로 찌를때 생각해보세요. 나는 멀쩡한데 상대는 치명적인 상처를 받는것입니다.

    말조심 해야겠습니다. 외모를 평가하는 말 (심지어 칭찬이여도 때로는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습니다), 남의 개인사에 대한 말, 누군가를 평가하는 말, 대 놓고 무시하거나, 상처주는 말등 이런 말을 멈춰야겠습니다.

    또 다른 말이 있습니다. 살리는 말입니다. 치료의 말입니다. 한마디의 칭찬, 격려, 위로, 확신, 사랑의 말입니다. 이 말들에 진심을 담는다면 듣는 사람들은 ‘병이 고쳐지는’ 기적을 경험합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정도가 아닙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도 살립니다. 자살 하려고 하다가 안하는 사람들 중에는 꽤 많은 이들이 한 사람의 진심을 담은 위로의 말때문에 멈추곤 합니다.

    살리는 말, 치료의 말, 격려와 위로의 말을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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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절묵상

    “어리석은 사람의 분노는 당장에 드러나지만 현명한 사람은 수치를 덮는다.” 16절

    얼굴에 드러나는 분노, 행동에 드러나는 분노, 말로 드러나는 분노, 기운으로 드러나는 분노, 우리는 이처럼 분노를 즉각 쏟아내는 누군가를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누군가가 바로 내 자신일수도 있습니다.

    원어를 찾아보니 이 말씀이 더욱 선명하게 와닿습니다. ‘드러난다’ 라는 단어를, 맥락을 떠나 그 의미를 보니 ‘동침하다’라는 단어더라구요. 결국 어리석은 사람은 분노와 함께 동침하는, 동거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끊임없이 분노하고, 분노와 함께 거하고 있으니 무슨 일이 발생했을때 분노를 참을 수 있을리 만무합니다.

    화를 참을 수 있어야합니다. 상징적으로 설명해보자면 ‘화’하고 동침할것이 아니라 이혼해야합니다. 아예 결별해야합니다. 그래서 다시 보기 민망해져야 합니다. 어색해져야 합니다. 화가 어색한 사람이 되야합니다. 우리 주변에 욕이 어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 사용하다 보니까 어색한 것입니다. 화가 올라오는데 그런 사람은 기껏 한다는 욕이 “저 녀석!” 정도 입니다! “나쁜자식!” 정도 입니다.

    분노랑 서먹해지면, 분노와 멀어지면, 분노를 곁에끼고 돌지 않으면 분노가 어색해지고, 쉽사리 분노가 표출되지 않습니다. 분노의 감정, 폭발하는 감정, 싸우는 감정들을 내 주변에 두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분노가 나에게서 멀리 있으면 그 분노 끌어오다가 중간에 식어 버릴 것입니다. 분노랑은 멀리 살면 살수록 좋습니다!

    이어서 보니 “덮는다!” 라는 단어도 귀한 단어 입니다. 감추다 라는 뜻도 있지만 용서하다 라는 뜻이 눈에 더 들어옵니다. 사실 애초에 나에게 수치를 준 사람을 용서 할수 없어서 분노로 수치의 감정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은 것인데, 지혜자는 용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용서가 지혜입니다.

    딱히 제 인생에 용서해야할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데 요즘 자꾸 ‘용서하라!’라는 메세지가 반복해서 들립니다. 주일 설교를 준비하고 들으면서 요셉이 보여준 용서를 묵상하기도 했고, 오늘 잠언의 기록처럼 의롭고 지혜로운 자의 ‘수치를 덮는’ 용서의 마음도 다시 한번 듣게 됩니다.

    생각해보니 이게 맞습니다. 평소에 ‘용서의 마음’을 잘 준비해야합니다. 이런 마음이 준비됨 없이 ‘분노의 대상’을 만나면 즉각 분노를 폭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화평의 때에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더욱 머리와 가슴에 새겨 놔야합니다. 용서의 마음을 성실히 준비하는 하루하루를 살겠습니다. 준비의 일환으로,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문제없습니다. 별일 아닙니다. 용서합니다. 사랑합니다!” 이런 말을 더욱 자주 해야겠습니다.

    부록(?): 오늘도 누군가 제가 모르는 사이에 저를 용서하는 하루가 될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니 누군가의 분노를 자극하고 미움을 자극하는 언행이 되지 않도록 그부분도 조심하는 하루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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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절묵상

    “덕이 있는 여자는 명예를 얻고 힘센 남자들은 재물을 얻는다!” (16절)

    이게 지혜로운 말인가 싶습니다! 명예를 얻기 위해 덕을 갖추라는 말은 그런데로 의미가 있어보입니다. 지혜로운 말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힘센 사람이 재물을 얻는다!’ 라는 이 말은 약간의 의문(?)이 드는 표현이기도합니다. 실제로 그래서 개역개정은 이 ‘힘’이라는 단어를 ‘근면함’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근면한 자는 재물을 얻는다" 이렇게 번역한 것이죠. 그러나 이는 '힘있는 자는 재물을 얻는다!" 라는 이 말이 뉘앙스적으로 약간의 어색함(?)이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일어난 일종의 의역입니다. 사실 원어적으로 담백하게 해석하고 보자면 '힘'이라는 단어로 해석하는것이 더 타당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성경 번역본에서 '힘'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결국 앞서 말한것처럼 "힘센 남자들은 재물을 얻는다!" 라는 말인데 이게 정말 지혜로운 말씀인가요? 권력자가 가진 힘 때문에 재물을 얻게 된다! 이게 정말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지혜의 메세지 일까요?

    이는 지혜의 말씀이 맞다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추가적 해석과 적용을 붙이면 좋겠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지혜를 따르자면 이렇습니다. 유덕하면 명예를 얻습니다. 그러면 끝인가요? 아닙니다. 이제 그 명예를 사용할수 있게되었죠. 특히나 그 명예를 선을 위해 사용할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볼수 있는데요, 만약 명예를 선을 위해 사용하고 싶은데 사용할 명예가 없다면? 유명하지 않고, 좋은 평판이 없어서 영향력이 없다면? 선의 영향력을 마음껏 넓게 확장할수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저도 개인적으로는 선한 영향력을 광범위하게 발휘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진 명예(?)가 부족해서 선한 영향력을 발산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나도 명예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지혜자는 말합니다. "덕이 있는 자는 명예를 얻게 될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먼저 삶의 덕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첫번째 지혜가 되는것이죠. 그렇게 덕을 세워 명예를 얻었다면, 그 명예를 이제 선한 영향력을 발산하는데 사용해야합니다. 이것이 두번째 지혜입니다. 성경에서 찾아보자면 신약에 나오는 바나바가 딱 이런 사람입니다. 덕을 끼침으로 명예를 얻어, 그 명예를 선하게 발현했던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그 다음을 보자면 이렇습니다. 힘센자, 권력자는 재물을 얻습니다. 솔로몬만 보아도 당시에 사방에서 금이며, 은을 갔다가 바쳤습니다. 그러니 그의 권력에 따라 재물이 모여들었던 것이죠. 그리고 솔로몬은 이 재물을 주께 드리는 제물로 참 많이도 사용했습니다. 이 재물을 모르긴 몰라도 선한 목적으로 충분히 사용했을 것입니다. 사실 재물을 가지고 선한 일을 하고 싶은데, 많이 하고 싶은데, 콩한쪽을 나눠 반쪽씩 먹는게 아니라, '수백알의 콩'이라도 주고 싶은데 없어서 못줄때가 많습니다.

    그때 지혜자가 말합니다. "세상을 보니 권력자나, 힘이 있는 자에게 재물이 모입니다. 그러니 힘을 키우세요. 정직하고, 성실하게 노력하여, 수고함으로, 최선을 다하여 힘을 얻으세요. 권력자가 되세요. 그럼 재물이 모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재물로 주를 위해 사용하시고, 선을 위해 사용하시고, 넉넉하게 사용하세요." 결국 성실과 최선, 정직과, 수고함으로 힘을 얻는것이 세번째 지혜이고, 그렇게 힘을 얻어서 얻은 재정으로 주를 위해, 선을 위해 맘껏 사용하는게 마지막 지혜입니다. 성경에서 찾아보자면 앞서 말한 솔로몬의 아버지인 다윗이 딱 그런 사람입니다.

    솔직히 덕이 나쁜가요? 명예가 나쁜가요? 권력이 나쁜가요? 재정이 나쁜가요? 나열해보면 나쁜것 하나도 없습니다. 다 좋은 것들입니다. 그러니 이것들을 얻어, 선하게 사용하는것만큼 좋은 지혜도 없습니다. 남녀 구분할것 없습니다. 모두가 덕이 있고, 명예를 얻고, 힘을 얻고, 재정을 얻어 주를 위해, 선을 위해 사용하는 지혜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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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은 남의 비밀을 드러내고 믿을 만한 사람은 그 일을 감춰 둔다.” (13절)

    아내에게 참 고마운것은 아내가 제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제 ‘비밀’이 알고 싶으시죠? 왜 알고 싶으신건가요? 알아서 뭐하시려구요? 혹시 다른 사람한테 얘기하고 싶으신 건가요? 그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왜 알고 싶은걸까요?

    비밀을 누설하는것은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있는 나쁜 욕망(?)인지 모릅니다. 그냥 ‘알고 싶은것이다’ 말하지만 사실은 퍼트리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절제 없이 누설하여 타인의 비밀을 만천하에 공개시키는 것이죠. 정작 이 누설에서 오는 결과에는 큰 신경을 안쓰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냥 누설하고 싶은것이죠.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비밀들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비밀이 있으셨죠. “너희는 아무에게도 이 얘기를 하지말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메시야 됨을 말하지 말라고 하신적도 있습니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병자를 고쳐주시고도 자주 얘기하셨습니다. “어디가서 말하고 다니지마!”

    이처럼 필요에 따라, 때에 따라 감춰야 하는 비밀들이 얼마나 많나요? 그 사람의 치부가 되서 그렇기도하고, 아직 때가 안되어서이기도 하고, 너무나 개인적이여서 이기도 하고, 드러나면 큰 혼란을 만들어 낼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라고 말했는데, 그 비밀을 깃발 꼽고 적군, 아군에게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셨다!” 말하는 순간 난장판 되는것입니다.

    ‘비밀’은 지켜줘야합니다. 죄를 감춰주는거 말고, 비밀을 지켜주는 것을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깨지는 이유중 많은 부분이 서로의 나눔을 통해 알게된 ‘비밀’을 지켜주지 않고 누설해서 입니다. 교회 뿐 아니라 수많은 인간관계가 그렇습니다.

    가족, 이웃, 친구, 성도, 누가 되었던 그들이 조심스럽게 나눈 비밀들을 누설하지 말아야합니다. 허락도 없이 떠벌리지 말아야합니다!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되는 일인 것이죠.

    목회자로서 실수가 없다 말할수 없지만 그래서 항상 조심 또 조심합니다. 성도님께 들은 ‘기도제목’을 다른 성도님들에게 전하려 할때도 그냥 전하지 않습니다. 당사자에게 연락해서 “저에게 말씀해주신 기도제목을 모두에게 나눠도 되나요?” 문의하고 허락이 되면 그때서야 나눕니다. 왜냐면 혹 그분에게는 아직 이 기도제목이 나눌 준비가 안된 ‘비밀’일수도 있기 때문이죠.

    타인의 비밀을 함구해주는것은 배려고, 사랑이고, 경솔하지 않은 마음이고, 신뢰를 주는 행동이고, 성숙함 입니다. 나의 비밀을 누가 다른 곳에서 떠들고 다닌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분노가 되고 불편한 일인가요? 그런 일을 우리가 해서는 당연히 안됩니다.

    ‘비밀을 함부로 떠들어대는 입’이 없는 교회되길 기도하고, 저도 다시 한번 입 단속을 잘하는 목회자가 되야겠다 결단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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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요하게 하시지만 그 복에 다른 근심을 함께 주지 않으신다.” (22절)

    돈 많이 버는 사람중에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멀리서 보면 풍족한데 실제로는 그 풍족을 누리기는 커녕 전전긍긍하며 사는 것이죠. 잃을까봐 두렵고, 더 벌지 못해서 불만족스럽고, 사용할 시간이 없어서 공허하기도 합니다. 많이 써도 점점 시시해서 마음이 시큰둥 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의 축복은, 오늘 이 말씀의 기록처럼 근심과 함께 오지 않습니다. (22절) 진정한 부요는 근심이 없는 부요입니다. 돈이 많은데 불행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부요한데 그것 때문에 지옥가면 그건 더더욱 의미 없습니다. ‘근심없는 부요’가 진짜 축복입니다. 그래서 “부자되게 해주세요!” 라는 기도보다 “자족하게 해주세요!” 라는 기도가 더 건강한 기도라고 생각됩니다. 자족, 즉 내게 주어진 것이 풍족하다고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가진것의 절대수량에 상관없이 근심이 없고, 가진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래서 충분히 부요하다 느낍니다.

    돈이 많은게 복이 아닙니다. ‘근심에서 자유한 돈’이 복입니다. 근심과 함께 온 돈은 하나님의 ‘복’이 아닙니다.(22절) 그런 부요는 오히려 서둘러 정리해야될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그 ‘부요’ 때문에 근심에 휩싸이고 망하게 될지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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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코패스가 무서운 이유는 살인의 이유가 딱히 없는것이기도 하고, 살인을 즐기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데 그것을 기뻐할수 있을까요? 어쩜 그렇게 악행을 기뻐할수 있을까요? (23절)

    악인은 악을 기뻐합니다. 그러니 악한 행동을 보면서, 악한 행동을 하면서 마음에 쾌감이 있고, 기쁘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악행에 대해 민감해야하고, 확실한 거부반응이 있어야합니다. TV나 미디어를 통해 빈번하게 노출되는 ‘악행’은 그것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악행’에 대해서 둔감해지게 만듭니다. 처음에 들을때는 충격적인데 계속 반복적으로 접하다 보니까 둔감해지는 것입니다. 둔감은 어느덧 흥미로 발전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흥미의 감정은 곧 재미로 바뀌기도하죠. 그러면 사람들은 이제 ‘자극적인 악행’의 뉴스나, 콘텐츠들을 소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그 악행을 실현하는 일까지 발생하게 됩니다.

    악행을 마주할때 기쁘지 않을 뿐더러 역겨울 수 있어야합니다. 언젠가 ‘악행’을 간접적으로 보고, 들으면서 영혼이 불편하지 않다면 서둘러 골방으로 가서 기도하고, 회개하고 마음을 재정비 해야합니다.

    악행은 역겹고, 거룩은 기뻐하는 하나님의 분별하는 자녀가 되야할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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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으른 사람은 가난하게 되고 부지런한 사람은 부요하게 된다.(4절)

    얼마전에 막을 내린 아시안게임에서 ‘스트리트파이터’라는 오락 게임이 정식 종목이 되어 금메달을 딴 첫 한국 선수가 방송에 연이어 출연을 했습니다. 그 사람의 출연을 보면서 굉장히 신기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왜냐면 저 때만 해도 오락 혹은 게임이라고 하면 등짝 맞을 일이고, 한심하게 여겨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오락’이 이제는 ‘e-sports’가 되어서 금메달을 받을 수 있는 종목이 된것입니다 그렇다면 첫 금메달을 딴 주인공은 어떻게 금메달을 딸수 있었을까요? 그냥 놀다보니까 금메달을 얻게 된것이 아닙니다. 게임 인구가, 수천만, 혹은 수억의 인구가 될수도 있습니다. 그중에서 아시아 일등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이는 남들 눈에는 노는것으로 보였을 그 수많은 시간동안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손에 물집잡혀가면서 연습한 덕분입니다. (물론 이렇게 쓰면서도 저는 이해할수 없는 세상임은 맞습니다! ㅋㅋ) 그 선수는 적어도 누군가 ‘오락’이라고 부르는 이 부분에 있어서 진심으로 성실했던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 분의 성실한 연습을 부정할수 없습니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그리고 끈기 있는 그 선수의 노력이 그 사람에게 ‘부요’라는 축복을 마주하게 한것입니다. 결국 부지런한 사람의 인생이 ‘부요’ 하게 되는것입니다.

    한가지 당부해야할 것은 이것입니다. '부지런함'을 ‘재정의 부요’ 측면에서만 이해하면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이 말씀으로 삶을 해석할수 없습니다. 왜냐면 부지런한데 돈을 못버는 사람도 있거든요. 애초부터 돈이 목적이 아닌 사람은 부지런히 봉사기구에서 일해도 재정적으로 부요해지지 않습니다. 또 누군가는 세상이 악하고 속이기 때문에, 본인은 굉장히 부지런 했는데도 불구하고 부요해지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부지런 하면 무조건 재정적으로 부요해진다!” 라고 해석하면 오류이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현실에서 시험들기 딱 좋습니다.

    그러므로 부지런과 부요의 관계는 훨씬 더 넓은 시각으로 바라봐야합니다. 부지런하면 부요해지는 영역이 꼭 돈이 아닌, 칭찬, 인정, 관계, 지위등의 영역으로까지 적용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저의 경우를 봐도 그렇습니다. 저는 부지런(?)할때 여러면에서 부요하게되는 경험을 합니다. 예를들어 부지런히 목회할 때 많은 성도님들의 풍족한 사랑과 칭찬을 얻곤 합니다. 그분들의 인정의 언어와 덕담의 언어도 부요하게, 충만하게 얻곤 하는것이죠. 부지런할때 그렇게 제 삶에 많은 유무형의 영역에서 이와 같이 부요함, 충분함을 경험하는 것이죠. 만약 제가 게으른 목회자라면 삶의 모든 영역에서 부요가 아닌 빈곤한 삶을 살게 될것입니다.

    부지런함은 삶의 중요한 덕목임이 확실합니다. 부지런히 목회 해야겠습니다. 부지런히 살아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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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만 많은 바보는 망할것이다” 반복되어 기록되어있습니다.

    저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일까요? 저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또 친한 사람은 더욱 잘 알지만 저는 원래는 말이 별로 없습니다. 집에서나, 친한 친구들하고 있을때는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안할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밖에 나가고 목회적 사명을 감당할때는 그 누구보다 말이 많습니다. 설교, 교사, 나눔, 권면, 상담등 생각해보면 말해야 할 순간들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너무 많은 말을 합니다. 그게 무섭습니다.

    어느덧 그럴듯하게 말하는 제 자신을 발견할때가 많습니다. 말이 너무 그럴듯합니다. 말로만 보면 참 멋있습니다. 훌륭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더 두렵습니다. 내가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질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들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요즘은 영상 속에 저의 모든 언어가 기록되어 남겨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전처럼 말 바꾸지 못합니다. 어딘가 찾아보면 아마 제가 10년전에 했던 주일 설교 영상도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하는것보다 말에 책임을 지는게 중요합니다. 말의 양보다 말의 질이 중요합니다. 살리는 말, 사랑의 말, 따듯한 말, 권면의 말, 축복의 말, 겸손한 말, 정직한 말,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말이 필요합니다.

    해야할 말을 하고, 말하면 책임지고, 거짓이 아닌 진심으로, 절제하고, 점검하고, 살리는 말을 주로 하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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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는 사실 기독교만의 것이 아닙니다. 타종교 사람들도 기도합니다. 불교든, 이슬람이든, 힌두이든, 무신론자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기도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어쩌면 무신론자도 인생의 위기 앞에서는 알지도 못하는 신에게 기도할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대부분의 사람이 기도를 하게 되는걸까요? 두가지 대표적 이유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1) 인간은 삶의 어느 한 순간에 유한함을 느끼고 경험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혼자서는 감당할수 없고, 같이 해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마주하게 되는것이죠.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어떤 무한한 존재에 기대어 간구하는 '기도'를 하게 되는것입니다. 2) '영혼의 구멍' 때문 입니다. 간구의 목적이 없을때라도 기도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신을 찾는 행위를 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 채워진것 같아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영혼들에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호흡'으로만 채워지는 영적 빈터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도 기록하지만, 하나님의 '숨'이 없이 인간은 그저 움직이지 못하고, 의미없는 생명인 것이죠. 소위 말해 '생령'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기도'의 형식을 쫓아 신을 쫓는 것입니다. 영적 빈터를 어떻게든 채우기 위한 노력을 하는것이죠.

    결국 앞서 논한것처럼,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모든 이가 기도를 한다'라는 사실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이 사실이 중요하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아주 간단하고 선명한 메세지입니다. 기도가 그만큼 중요하다 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그리스도인들이 놓친다는 것은, 그러므로 너무나 안타깝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모두가 기도를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약속위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절) 하나님은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고, 들으시고, 응답하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게 세상 다른 종교인의 기도와,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하는 기도와의 결정적 차이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실 기도가 '특권'입니다. 그래서 이런 기도를 놓친다는 것은 다시 말하지만 너무 안타깝고 어리석은 일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남을 위해, 부지런히 기도해야합니다. 늘 깨어, 언제나, 무시로 기도해야합니다. 나를 위한 기도만큼 중보도 뜨겁게, 성실하게 해야합니다.

    2

    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19절) 부탁드립니다!

    말씀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복음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입술의 권세가 필요합니다. 탁월한 영성과, 깊은 통찰이 필요합니다. 성실함과 부지런함이 필요하고, 인내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지식과 지혜의 능력도 필요하고, 말씀을 잘 전하는 달변의 능력도 필요합니다. 표현의 창의성도 필요합니다. 목회를 위해서 굳은 심지와, 겸손의 마음이 필요하고, 담대함과 유연함이 필요합니다. 사랑해야하고 진심의 사람이 되야하는것 또한 당연합니다.

    성도님들의 간절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앞서 나열한 이러한 기도제목들 외에도, 차마 다 나열하지 못하는 수많은 기도의 제목들이 있습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기도가 간절히 필요한데 저같은 사람은 더더욱 필요합니다. 물론 이 에베소서를 쓸 당시 바울은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성도들의 간절한 중보가 절실 했을 것입니다. 저는 현재 감옥에 갇힌 목사는 아닙니다. 그러나 여전히 '현실'이라는 감옥에서 자유하지 못한 목회자 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의 간절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저를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바우교회를 위해 기도해주시기를 성도님들께 부탁드립니다.

    3

    "여러분의 마음을 위로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22절)

    위로를 받고 싶지 위로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다. 나이 서른에 군대 들어가서 몸과 마음이 상심에 쩔어있었을때 할수 있는 일중에 하나는 '밖에 사람'들에게 전화하는것 입니다. 그마저도 '콜렉트콜'로, 받는 사람이 돈을 지불해야 통화할수있는 그런 상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렇게 통화를 시작하는데, 전화 받은 친구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합니다. 그러면 군대에 앉아있는 제가 뭐라고 할까요? "그래 힘내!!" 맞습니다. 사실 이렇게 말할수있고, 말해야하는데 그렇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군대에 있는건 그 친구가 아니라 제 자신이니까요. 그 사람 걱정할 처지가 아니라고 생각이 되는것이죠. 그래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친구한테는 다시 전화를 하지 않습니다. 위로를 받고 싶었지 위로를 하고 싶었던것은 아닙니다. 제 상황이 더 안좋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바울은 말합니다. "여러분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위로는 감옥에서 쓰여진 것입니다. 바울은 위로 받을만한 상황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인사'라는 형식에 진심을 담아, 오히려 그들에게 위로의 말을 던집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힘듭니다. 내가 힘들때, 나만 힘든건 아니죠. 그도/그녀도 힘들수 있습니다. 나도 많이 힘든데, 그 사람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 수준으로 힘들수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있을때 사람은 가장 쉽게 이기적이 됩니다. 이기적이 되어도 되는 가장 좋은 명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제일 힘들어!' 그러나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내가 고난 가운데 있을때도 누군가를 위로할수 있는 영적 거인이 되길 도전합니다.

    간혹 코미디언들이 그런말 하더라구요. 부친상을 보낸지 얼마 안되서 아직 마음 한켠이 아린데 방송 녹화를 들어가서 타인들을 위로하고 웃기는 것이죠. 자신의 마음은 아직 상처투성이고, 눈물이 나는데, 또 눈물흘리고 있을, 웃음과 행복을 상실한 타인들을 위해 자신들의 입장을 잠시 뒤로 미뤄두고 위로의 꽁트를 시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때는 그들의 웃음이 숭고합니다. 마치 찰리채플린의 얼굴에 그 떨어지는 눈물 한방울 분장처럼 말입니다.

    목회자로 살다보니까 딱 그렇습니다. 나의 일상의 고난 속에서 이기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위로도 받지만, 위로도 해야합니다. 위로 받을때는 위로 안해도 되는게 아닙니다. 위로 받는건 받는거고, 위로하는건 또 따로 해야할 일입니다. 어디 목사만 그럴까요? 모든 성도가 부름받은 사명이 바로 위로의 사명인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위로하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쁠때나, 슬플때나, 어려울 때나, 풍족할때나 위로받고, 또 위로하는 성도가 되야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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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텍사스로 이주해서 과도하게 하는게 한가지 생겼습니다. 꾸준하게 해오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과도하게 하지 않았었고, 과도하게 하는 사람들을 보면 오히려 ‘왜저래!’ 하는 마음이 들곤 했던 일입니다.

    바로 ‘선크림 바르기’입니다.

    원래 저는 언제나 선크림을 바르는 사람입니다. 20년 정도된 생활 습관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모르게(?) 바릅니다. 거의 티가 안나게 바르기 때문에 바르고 나서 얼굴이 하얗게 되거나 하지 않습니다. 얇게 그 정도만 발라도 충분히 햇살에서 제 피부를 보호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런데 오스틴 와서 달라졌습니다. 외부활동, 특히나 수영을 간다거나 하게 되면 거의 가부키 화장(?)처럼 얼굴을 하얗게 칠합니다. 뿐만 아니라 목이며, 팔이며 보이는 곳은 모두 하얗게 덮어 버립니다. 딸이 그런 저의 모습을 보며 질색팔색 합니다. 괴물이라며 놀립니다. 그 옆에 제 아내도 저의 그런 모습을 보며 “아저씨 다 됐네!” 하며 놀리듯 말합니다. 그런데 수영이 다 끝나고 승자는 언제나 저입니다. 제 딸이나, 아내는 이미 등이며 다리며 명확하게 구분되는 선탠라인이 있습니다. 저는 없습니다. 승리자(?)입니다.

    영적인 전신갑주도 같은 개념입니다. 습관처럼 매일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대충 입으면 안됩니다. 진리의 허리띠, 믿음의 방패 이렇게 두개로 충분한것도 아니고, 구원의 투구, 복음의 신발 이렇게 두개로 충분한것도 아닙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이 하나님의 갑주로 덮여 있어야 보호도 받고, 승리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허리띠’가 ‘상대적 진리의 허리띠’니까 진리를 모르고 방황하고 헤매게 됩니다. 말씀의 검이 있는데 의의 흉배가 없으니 말씀의 검을 의롭지 않게 휘둘러 대면서 많은 이들을 정죄하고 상처 줍니다. 바로 잡는게 아니라 오히려 파괴만 합니다. 구원의 투구를 써서 나는 구원 받는데 복음의 신을 신지 않아서 타인이 구원 받을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나만 사는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빠짐없이 온전한 전신갑주를 입어야합니다.

    선크림 하나도 과도하게 발라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촘촘히 발라야 그 효과를 극대화 해서 보는것처럼,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꼼꼼하게, 뭐 하나 빠지는것 없이 챙겨 입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이것입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평화의복음의 신, 구원의 투구, 믿음의 방패, 성령의 검 곧 말씀의 검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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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권력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12절)

    영적 전쟁을 아주 선명하게 느낍니다. 초등학교 6학년때 러시아로 한달정도 단기 선교를 간적이 있습니다. 그때 마귀의 방해를 얼마나 선명하게 보았는지 모릅니다. 날씨, 상황, 사고, 귀신들리는 일 등 어린 나이였지만 아직도 그때의 생생한 영적 충돌을 잊지 못합니다.

    요즘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 지금까지도, 심할때는 토요일 밤에서 주일 아침까지 잠자는 시간도 영적으로 충돌이 일어납니다. 마귀는 계속 제 마음을 흔들려고 합니다. 걱정과 의심, 포기와 도피, 끊임없이 부정의 마음을 일으킵니다. 말씀을 읽고 준비를 하면서, 성도님을 만나고 기도하면서, 사역을 감당하고 실행하면서, 자주 ‘하늘에 있는 악한 영’과의 싸움을 느낍니다.

    결국 영적 싸움을 지면 인생 전체가 휘청댑니다. 영의 주권을 빼앗기면 ‘혈과 육’의 자아 절제도 빼앗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영적으로 민감해야합니다. 무슨 일이든 영적인 측면을 점검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마주한 일이 악한 영의 세력에서 파생된것은 아닌지, 하나님께서 이 일 안에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계신지등 영적 민감함이 필요합니다. 영적 둔감은 결국 영적 전쟁에서 우리를 패배하게 만드는 도구가 될것입니다. 깨어 있으세요. 그래서 전신갑주도 입는 것입니다.

    물리적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동시에 ‘영적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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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지고 있는것 중에 가장 비싼게 뭘까요? 제가 가지고 있는것 중에 가장 비싼게 지금 이 묵상을 써내려 가고 있는 맥북 입니다. 조금 없어(?)보일수도 있지만 그래서 저는 이 맥북을 굉장히 소중히 다룹니다. 아이에게 핸드폰도 넘기고, 제가 가지고 있는거 다 만지고, 가지고 놀게 합니다. 그런데 이 맥북은 건들지도 못하게 합니다. 계속 닦고, 책상에 놓을때도 책상이 더러우면 그냥 놓지 않습니다. 누가 보면 “닳아 없어지겠다!” 라고 한소리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가지고 있는것 중에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니 누가 뭐래도 소중하게 다룹니다.

    사람들이 우스갯 소리로 얘기합니다. 명품과 가품을 구분하는 방법은 비내리는 날 그들의 가방위치를 보면 안다는 것이죠. 명품은 가숨팍에 안고 뛰고, 가품은 머리를 가리고 뛰는 법이죠.

    오늘 2절에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에서 쓰인 ‘공경’이라는 단어는 원어적으로는 ‘가치있게 여기다’ 라는 뜻입니다. 부모님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길때 우리는 부모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달라질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뇌과학자가 이런 말을 하는걸 들었습니다. 우리가 부모에게 막 대하는 이유는 머리속에서 부모를 나자신과 가장 일치된 존재로 인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나와 같다!” 생각하니까 막 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뇌 과학적 정보가 사실이라고 하여도, 그래서 우리의 뇌가 부모를 나 자신과 가장 일치한 존재라고 인식한다고 하여도, 그러므로 우리가 부모님을 가치없이 대해도 된다는 명분이 되는것은 아닙니다. 생각해보세요. 대부분의 사람은 나 자신을 가치있게 여깁니다. 그러면 내 부모를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여긴다면 그분들도 가장 가치있는 분들로 여기고 소중히 대해야합니다.

    부모님을 내 인생에 가장 가치있는 분들로, 하나님 아버지를 내 인생에 최고의 가치로 정립한다면 그에 맞는 태도로 우리의 영육의 부모를 대하게 될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공경’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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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께 하듯 하십시오.’ (5절)

    제출하는 대상에 따라 결과물이 다릅니다. 그냥 혼자보는거면 대충(?) 합니다. 친구들이 본다고 하면 좀 더 준비 합니다. 그런데 면접관이 본다고 하면 준비부터, 태도, 그리고 발표자체가 다릅니다.

    어릴적 태권도를 곧잘했습니다. 체육관에서 할때나, 시범 보일때 열심히 했는데 아무래도 가장 열심히 할때가 승단시험 보기 위해서 국기원 가거나, 시합에 나가서 무언가를 할때였습니다. 같은 동작을 해도 숨결부터가 다릅니다.

    어떤 자리, 어떤 위치, 어떤 일을 맡는지도 굉장히 중요하겠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대상의 인지’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인지 할수 있다면 결과물은 달라질수밖에 없습니다.

    표면적으로는‘평등한 사회’가 된지 오래지만, 살다보면 언젠가는 ‘종’같은 인생, 언젠가는 ‘주인’같은 인생의 시즌들을 마주합니다. 요즘 같아서는 동시에 종도 되고 주인도 됩니다. 장소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뿐입니다. 그러니 그런 ‘위치와 권세’에 연연하기 보다는 대상에 대한 인지가 일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나의 청중은 하나님 한분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주님께 하듯 하겠습니다. 최고의 하나님께 최선의 것을 드리는 인생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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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은 어제의 본문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21절에 “서로 피차 복종하십시오” 라고 ‘복종의 본질적 대상’을 정확하게 명시 합니다. 서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관계인 부부 관계로 그 시각을 좁혀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여 남편에게 복종하십시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는것처럼 복종하십시오.”

    이 말이 여자가 듣기에 불편하고, 남자가 듣기에 오해소지가 있게 들린다면, 그건 본문의 이 가르침이 시대착오적이거나, 차별적 가르침이여서가 아니라 해석하는 자들이 잘못 해석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종’은 일단 우월과 열등을 구분하는 명령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월하고, 예수님이 열등하셔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이 말씀을 불편하게 느끼는 이유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몸된 교회’라는 표현이 자꾸 우월과 열등을 표현하는것만 같이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연히 교회보다 높으신 분이시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이 말하는 ‘복종’은 절대 우월과 열등을 설명하고자 기록된 말씀이 아닙니다. 그저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 순종하라는 ‘순종의 본질적 태도/자세’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교회’로 예를 든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우월과 열등, 차별 혹은 불평등이 아니라 ‘온전한 순종의 자세’에 대한 명령이며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자꾸 이 말씀 가지고 오해하는 부부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복종과 사랑이라는 지극히 일반적이고 중요한 개념을 가족에게 도전하시는 하나님의 이 메세지에 귀 기울여서, 더욱 사랑하고, 더욱 존중하고, 더욱 질서를 세우고, 더욱 훌륭하게 협력하는 부부가 되길 도전합니다. 저와 아내도 이런 건강한 가정을 세워가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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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 전이나, 심지어 결혼 후에도 “내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 라는 말을 가슴 깊이 절절하게 느꼈던 적이 없었던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이 말이 폐부로, 진심으로 와 닿는 순간들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진짜 말 그대로 대신 아팠으면 좋을것 같은 순간들이 있습니다. 차라리 내가 고생하면 좋겠다 싶은 순간들이 있습니다. 아이를 위해 나를 대신 내어 줄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저는 정말 겁이 많은 사람이고, 아픈것도 싫어하고, 엄살도 많은 사람입니다. 어려움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머리가 하얘지고 숨이 가빠질 정도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느닷없이 아이를 대입하면 그런 제가 용감해집니다. 겨우 상상속이긴 하지만 언제나 겁쟁이였던 제가 아이가 결부되면, 그 상상속에서 용감해집니다. “제가 대신 고통 받겠습니다!”

    나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이런 마음입니다.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이런 마음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 마음으로 아내를, 부모를, 자녀를, 형제 자매를, 친구를, 교회를 사랑해야합니다. 무엇보다 오늘 본문은 부부관계로 이 문제를 좀더 명시적으로 도전하고 있으니 적용도 그렇게 해야겠습니다. 아내를 향한 사랑이 더욱 전인격적인 사람이 되야겠습니다. 내어주는 사랑이 되야겠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 오해해서 “내게 복종해! 그럼 사랑할께!” 라고 말하는 어리석은 남편이 될것이 아니라, 목숨을 다해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 되야겠습니다.

    그 시작으로 가볍게(?) 마음, 시간, 지갑! 우선 이 세가지를 아내를 위해 열면 좋은 적용이 될것 같습니다! 거기에 ‘내 입장, 내 생각, 분노의 침묵’으로 결사 항전하는 세가지 싸움의 자세를 내려 놓으면 더더욱 좋은 적용이 될것 같습니다. 모든 남편들 화이팅 입니다!

    그렇게 “각자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사랑하듯 하고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는 부부되길 기도합니다. (3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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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16절)

    조금 과장된 표현일수 있지만 누군가의 10년을 1년에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예수님은 목회자가 사역할 30년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3년으로 살아내셨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밀도 있는 시간을 살아내셨다라는 것이죠. 이와같이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낭비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은 지혜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기록하는 "세월을 아끼라"라는 말이 꼭 바쁘게 살라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바쁘게 산다고 세월을 아끼는것은 아닙니다. 바쁘게 살다가 가족도, 자녀도, 사랑도, 기쁨도, 건강도 다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세월을 아끼는 사람의 지혜로운 모습이 아닙니다. 일례로 남들 10년사는거 1년으로 밀도있게 할려고 하다가 과로로 10년 살거 1년안에 과로사하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사실 이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기 때문이다” 라는것을 원어로보면, ‘아끼라’라는 단어는 ‘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악하다’라는 말은 ‘무가치’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세월을 사라! 때가 가치를 잃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로 오늘의 이 말씀을 다시 해석해 볼수 있습니다.

    결국 "세월을 아끼라!"라는 말은 사는동안 가치있는것을 위해 너의 시간을 지불해야한다 라는 말입니다. 사는 동안 무가치한것을 위해 시간을 쓰지 말고, 가치 있는 것들을 위해 너의 시간을 쓰라!, 너의 시간을 지불하라! 라고 도전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장 가치있는것일까요? 결국 세월을 아끼려면 인생의 가치체계부터 정립을 해야합니다!

    저로 예를 들자면, 그래서 저는 주님을 위해 저의 세월을 아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위해, 주의 일을 위해 저의 세월을 지불하고 있는것이죠.

    주안에서 건강하게 가치를 정립하고, 이를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간을, 이 세월을 아낌없이 지불하는 지혜로운 신앙인이되길 도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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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잘못하면 방탕에 빠지기 쉽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십시오.” (18절)

    이 말씀 붙들고 많은 이들이, “저는 술에 취하지 않으니까 괜찮습니다!” 혹은 “술 취하기 전에 멈추니까 술 마셔도 되죠!” 이런 얘기들 하는데요, 이런 애기할 필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술 얘기 같지만 술 얘기가 아닙니다. ‘술’로 얘기를 쉽게 풀어냈을 뿐입니다.

    ‘술취하지 말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이는 ‘인생주권’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술은 내 인생의 주권을 빼앗습니다. 별것 아닌거 같은데 판단도 못하게 합니다. 좌우도 구분 못하게 합니다. 말도 제대로 못하게 합니다. 내가 술을 먹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술이 술을 먹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게 바로 술의 두드러진 특성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술로 명확하게 예를 든것입니다. (그러고보니 술의 특성은 예나 지금이나 같네요!)

    본질적 메세지는 이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나의 인생의 주권을 위협하는것은 다 취하지 말아야합니다. 술도 하나의 예이고, 더 나가서 보자면, 마약, 쾌락, 욕심등도 다 취하지 말아야할것들입니다. 당연히 우상도 버리고, 우상화된 나의 자아와 나를 너무나 사랑해서 나만을 위해서 살아가고자 하는 이기도, 그런 의미에서 버려야합니다. 인생의 주권은 오직 성령님께 맡겨드려야합니다. 가만보면 음주운전 하는 사람들이 맨날 우깁니다. “나 재정신이야!!! 나 한잔밖에 안했어!! 나 안취했어!” 그런데 경찰은 그들의 말과 상관없이 검사하고, 그들을 잡아가기도 하고, 운전을 반드시 멈추게 하죠. 나의 주권을 빼앗아 가는 모든것은 ‘조금, 잠깐, 한번’이러한 변명이 중요한것이 아닙니다. 인생 주권을 내어줄만한것은 아예 건들지도 말아야합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해야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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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생각만 하면 입가에 미소가 생기는 그런 사람입니다. 때로는 저를 섭섭하게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이 마냥 좋습니다. 일상에 무게가 가득할 때도, 생각하면 좋고, 얼굴을 보면 더 좋습니다. 그냥 계속 사랑스럽습니다. 바로 저의 딸들 이야기 입니다. 특히나 막내 딸은 아직 애기여서 그런지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가만히 곁애 두자면 얼마나 사고를 치는지 모릅니다. 사람 귀찮게 하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어 보입니다. 제 멋대로이기도하고, 얼마나 지저분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요즘에는 어디서 배웠는지 입술을 “푸후” 하면서 침을 튀겨 댑니다. 온갖 음식을 묻힌 손으로 저에게 느닷없이 달려와 안기기도 하고, 얼굴을 만지기도 합니다. 재미있는건 백번을 넘게 반복해야하니 체력적으로도 당해내기도 힘듭니다. 그런데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제가 하고 있는 사랑이지만 참 '가슴벅찬 사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비로소 이 사랑을 좀 더 명확하게 깨달은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사랑을 받은 자녀답게” (1절)

    그래서 이 말씀이 더욱 마음에 와답니다. 부모에게 이렇게 사랑을 받고 자랐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이런 ‘가슴벅찬’ 사랑을 받고 살아왔습니다. 이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이 오늘 성경의 도전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꼭 ‘자녀’에 한정된것은 아닙니다.

    ‘내리사랑’을 실천해야합니다. 쏟아붓는 사랑을 실천해야합니다. 받으려 하는 사랑이 아니고, 이미 받았기 때문에 받은만큼, 혹은 받은 이상으로 흘려보내는 사랑을 실천해야합니다.

    개념이 아닌 현실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꾸준한 사랑의 실천으로, 계산하지 않는 사랑의 실천으로, 진심의 사랑의 실천으로, 희생하는 사랑의 실천으로 아낌없이 사랑을 실천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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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이 특정적으로 ‘음행, 탐욕, 더러운 언행’에 대해서 경고하는 걸 보면서 자동적으로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완악한 사건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한국은 마약 때문에 난리입니다. 유명 연예인들이 마약에 연류되어 수많은 구설에 오르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더 심각한 사건이 어제 있었습니다. Maine주 한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인데요, 22명이 죽고 50-60명 이상이 부상을 당한 총기난사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완악한 일들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일어날 때마다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얼마나 완악한 일인지 온 미디어가 앞다투어 기사를 쏟아 냅니다. 그런데 그걸 듣고서도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납니다. 가슴이 답답합니다. 반복되는 ‘완악함의 역사’가 너무 답답합니다.

    오늘 본문에 이렇게 도전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의 행위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되지 마십시오.” (7절)

    악행에는 절대 동참해선 안됩니다. 그런 개념에 조차 동참해서는 안됩니다. 상대적으로 조그만 악행이든, 큰 악행이든 상관없습니다. 악행에는 동참해서는 안됩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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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의 열매는 모든 선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습니다.” (9절)

    논밭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는 식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잘 자라고 있는데 어떤것은 가차없이 뽑아 버리고, 어떤 것은 귀하게 다룹니다. 이 차이는 오직 열매에서 오는 것입니다. 결국 열매가 중요합니다. 심기고, 싹이 트고 자랐으나 잡초면, 가라지면 뽑아냅니다. 가라지건 나름의 열매(?)를 맺는지 모릅니다. 다만 그 열매 자체가 여전히 모양만 그럴듯한 '쓰레기' 일것입니다.

    빛의 열매는 선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입니다. 믿음으로 의인이 된 자들의 삶은 선, 의로움, 진실을 열매로 맺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열매는 하루만에 맺히지 않습니다. 열매는 한해만 거두면 되는것이 아닙니다. 열매라고 다 같은 열매도 아닙니다. 레벨(?) 다릅니다. 열매는 결국 타인에게 기쁨이 됩니다. 이와 같이 신앙인의 선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는 하루 아침에 맺히지 않습니다. 한 시즌 반짝 빛났다고 다음해에는 신앙의 열매가 없어도 되는것도 아닙니다. 꾸준해야합니다. 선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도 그 수준의 깊이와, 넓이와, 길이와, 높이가 다른 법입니다. 그러니 어설픈 선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만족하지는 말아야합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빛의 열매가 타인에게 까지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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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짓말 하지 마세요! 느닷없이 내 삶에 얼마나 거짓이 있는가, 이 말씀을 보며 생각해보게 됩니다. 목사로 살다보니 감정을 절제하고, 언행도 절제하게 됩니다. 그래서 보는 저를 보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절제된 감정과, 거룩해보이는 언행을 통해서 저를 이해하고 평가하곤 합니다. 그런데 사실 저의 언행중에는, 간혹 목사라는 타이틀 때문에 꾸며진 언행, 혹은 꾸며진 절제들이 있습니다. 딱히 거짓말을 하려고 하는것은 아닌데요, 이 ‘목사’라는 타이틀 때문에 감추고 절제하는 것이죠. 나쁜 목적을 가진 거짓이야 아니겠지만은 그래도 감춰야하고, 민낯이 아닌 경우들이 있다는 것이 새삼 도전이 되는 부분입니다.

    거짓이 없고 정직한 사람이 된다는것은 솔직한 말을 하라는것이 아니고, 사람 자체가 감출것이 없는, 진실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것 같습니다. 거짓말을 안하려고 한두번 생각하는 그런 인생말고, 그냥 무슨 말을 해도 거짓이 없을만한 사람이 되는게 더 본질적 도전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괜히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고 행동했다가 많은 사람들 상처주고, 어려운 상황들을 만들어 낼수 있으니 적당하게 꾸며서 말할줄도 알고, 선의의 거짓말도 할줄 알아야합니다!” 라고 말할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선의의 거짓말’만 딱 분별해서 하는 사람 잘 못봤습니다.

    거짓말은 습관이고, 거짓인생은 습관을 넘어 한 사람이 성향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더 나가 정체성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진실된 사람이 되도록 더더욱 힘써야겠습니다.

    2

    화를 내도 죄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화를 품지 마세요! (26절)

    분노가 오래가면 썩습니다. 냄새가 납니다. 미간이 항상 찌끄러져 있습니다. 그렇게 쌓인 분노는 결국 터져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분노는 버려야합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쓰레기 차가 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집에 있는 쓰레기 봉투를 일주일에 한번 맞춰 내어 놓지 않습니다. 집에 두면 계속 썩고, 냄새나고, 부패해 썩어지고, 날파리 같은 벌레들이 생길수도 있기 때문에, 바로 바로 집 밖에 있는 쓰레기통에 미리 버립니다.

    그날의 '쓰레기'는 그날 처리해야합니다. '쓰레기'를 안고 사는것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없습니다. '쓰레기'를 터트리지도 말고, '쓰레기'를 보관하지도 마세요! 그날 그날 버리는게 최선입니다!

    3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틈’을 보이는 순간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틈이 그렇게 무섭습니다. 모든지 깨지고, 부서지고, 열리는 것은, 이 작은 틈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마귀는 그 틈을 파고들수 있는 도구들로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멀쩡해보이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것도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그만 틈이라도 없게 해야합니다. 저는 봉투에 쌓아 놨는데도 오랜 시간 지나 그 봉투마져도 뚫고 나온 쓰레기의 부산물들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번, 세번 중복하여 싸는경우가 많습니다.

    죄에는 여지를 두지 말아야합니다. 인생에 어느 영역에 ‘틈’이 생겼는지 본인이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미루지 말고, 서둘러 말씀으로 틈을 메워야합니다. 틈을 내버려두는 순간, 결국 도둑질도 하고, 더러운 말도 하고, 성령을 슬프게도 하고, 모든 악독과 분노와 고함과 비방을 행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것입니다. (28-32절)

    마귀에게 이와같이 틈을 주는 대신에 그리스도로 단단히 포장하여, 선한 일에 매진하고, 수고하고 땀흘리며, 은혜를 끼치고, 성도를 세워주며,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자로, 친절과 인자를 행하고 용서하며 사는(28-32절), 거룩으로 단단히 포장된 그리스도인이 되길 도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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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러분은 이방 사람들이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사는것 같이 더 이상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17절)

    온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그렇게 쫓아 사는 걸까요? 돈이 없어도 돈을 쫓고, 돈이 있어도 돈을 쫓습니다. 꽤나 풍족해 보이는데 뭘 또 얻으려고 마약 같은 것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세상에 내놓을만한 부자인데 왜 횡령을 하고, 왜 주가조작을 하는 걸까요? 이미 있는 평화를 깨고, 도대체 무슨 평화를 얻겠다고 전쟁은 하는 걸까요? 어린자는 소년의 아름다움으로, 노년은 노년의 아름다움이 있을진데 미에 대한 집착은 왜 그리도 끝나지 않는 걸까요? 오늘 산 새 차는 내일이면 헌 차가되고, 아무리 이 시대가 ‘레트로’ ‘빈티지’가 유행이라지만, 결국 이 또한 지나가는데 뭘 그렇게 원하고, 바라고, 소망하는 것일까요? 언젠가 스러질 인생이, 스러질것들에 집착하여 사는 모습이 안타깝고 어리석어 보이기도 합니다.

    허망한 것으로 살것이 아닙니다! 민호기 목사님의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라는 찬양의 가사처럼 허망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하는 그러한 인생이 복된 인생임을 믿습니다.

    다시 한번 기도하는 것은 허망한 것으로 사는것, 더이상 그렇게 살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과, 그분의 사명을 쫓아 살아내는, 의미있는 인생되길 기도하고 소망합니다.

    2

    “옛습성, 옛사람을 버리고, 심령으로 새롭게 돼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24절)

    ‘버리고’, ‘새롭게’ 이 두 단어가 모두 중요합니다. 변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잘못된 습관들을 버려야합니다. 과오로 가득한 나의 옛 사람을 버려야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변화의 완성이 아닙니다. 잘못된 과거를 버리고, 삶의 불의한 습관을 버린다고 해서 변화가 완성되는것이 아닙니다. ‘버림’은 겨우 변화의 시작일 뿐입니다. 새로움을 덧입어야 합니다.

    옷을 갈아 입기 위해서는 원래 입고 있던 옷을 벗어야 합니다. 그러나 입고 있었던 옷을 벗었다고 새로운 착장이 완성된것이 당연히 아닙니다. 깨끗한 옷, 새 옷을 입어야 비로소 갈아 입은 것입니다. 죄를 버리는 인생은 예수로 채우는 인생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거짓된 사상을 버린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으로 그 빈곳간을 채우는 자리까지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변화의 완성이죠.

    어쩌면 많은 이들이 변화의 첫걸음에서 멈춰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컨대 “과거를 후회 합니다. 내려 놓습니다. 버립니다!”라고 말하고 거기서 멈춰 버리는 것이죠. 새롭고 온전한 삶의 습관을 입는, 즉 적용하는 이 삶이 생략되어 있는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다보면 구원의 역사가 이방인을 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시작에 베드로가 서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시고 “내가 깨끗하다 한것을 네가 더럽다 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시며 이방인 고넬료와 그 가정을 구원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식사하다가 유대인들이 온다라는 소식을 듣고 모른척 일어나는 실수를 범합니다. 과거의 유대인들만 구원하려고 했던, 그 복음의 메세지를 오해했던, 그 과오를 버렸다고 했지만 여전히 마음과 생각과 행동에서 선교의 새로운 확장을 온전히 적용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후배격인 바울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 인은 변해야합니다. 변화는 옛 습성과 옛 사람을 버리는데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따라 새롭게 될때 비로서 완성됩니다. 버리고, 반드시 새로움을 취해야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하나님의 선포이십니다.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라 선언해주신 예수님의 은혜와 도전을 기억하여, 과거의 옛 습성과, 옛 사람, 잘못된 삶의 모습들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닮은 새로운 삶을 취하는, 변화된 신앙인의 삶이 되야 될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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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로, 어떤 사람은 교사로 삼으셨으니” (11절)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이와같이 사명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게 더욱 감사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떤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은 특별한 사람을 특정한 일로 부르시는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든, 그가 누구이든 하나님은 사도로, 예언자로, 전도자로, 목사로, 교사로 삼으십니다. 세상은 이력서부터 보는데 하나님은 먼저 부르시고 봅니다. 구원도 은혜인데, 차별없이 사명으로 부르시는것 또한 은혜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주님을 위해 일할수 있고, 주님을 위해 중용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을 미리 한계를 두면 안됩니다. 혹 세상의 기준이 찍어버린 ‘낙인’이라는 도장 때문에 미리 한계짓고 낙심하고 있다면 그러한 자세를 내려 놓아야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든 당신의 일을 위해 부르시고 사용하십니다. 어떤 식으로든 쓰임받을 준비를 해야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이 부르실때 그 일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할것입니다.

    2

    “우리는 더 이상 사람들의 속임수, 곧 거짓된 간계로 인한 술책에 넘어가 온갖 교훈의 풍조에 떠밀리고 휩쓸리는 어린 아이가 되지 말고”(14절)

    ‘사람들의 속임수’, ‘거짓간계, 술책, 온갖 교훈과 풍조’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트렌드, 문화, 유행, 대세등의 단어로 포장되어 요즘에도 많은 이들을 휩쓸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는 그렇게 길을 잃었고, 많은 교회도 길을 잃었습니다. 정의의 의미가 퇴색되거나, 불의가 지혜가 되는 웃지못할 일들도 일어납니다. 진짜 중요한 가치는 사라지고, 돈, 쾌락등에 완전히 함몰되 버린 인생들이 넘쳐납니다. 말도 안되는 사상과 철학들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현혹하는지 모릅니다.

    결국 답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지각으로 살아간다면 이 세상의 거짓에 속을수밖에 없습니다. 범사에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또 그리스도의 지혜로 분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분별하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교회를 어지럽히는 ‘세상의 술책과 풍조’를 조심 또 조심해야겠습니다. 교회를 건강하게 지켜내는 건강한 리더, 또 건강한 성도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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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십시오.” (1절) 여기서 ‘부르심’은 궁극적으로는 구원이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그러니 다시 정리해보면 “여러분은 구원 받았으니 그 구원에 합당하게 하십시오.” 라는 메세지입니다. 그러면서 나열하는 ‘구원의 합당한 삶’의 리스트는 이러합니다.

    온전히 겸손하고, 온유하게 행동하고, 인내함으로 행동하고, 사랑으로 용납하고, 연합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리스트를 보고 있자니 소명은 사명과 느낌적인 면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생각됩니다. 사명은 직분에 맡게, 책임에 맡게 일해야하는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르심, 즉 소명은 존재적으로 접근해야할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겸손을 행한다! 라고 말하기 보다는 겸손한 사람이 되야하는것이고, 온유하게 행동하다! 라는 메세지 속에 온유한 사람이 되라! 라고 하는 메세지가 담겨 있는것입니다. 누구든 사명에 따라 목사의 일을 하고, 선교사의 일을 하고, 직장인의 일을 할수 있습니다. 이들의 일은 각자 맡겨진 사명에 따라 다릅니다. 예컨대 직장인이 목사가 하는 일까지 할 필요는 없는 것이죠. 그러나 목사든, 선교사든, 직장인이든, 각자의 사명의 다름에 상관없이 모두 겸손하고, 온유해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뉘앙스에서는 오는 사명과 소명의 차이입니다. 사명은 맡겨진 일이 강조되어 있고, 소명은 존재에 대한 도전이 강조되어있습니다.

    구원 받은 자에게 있어 ‘사명’도 중요하지만, 그래서 ‘소명’이 본질적으로 더 중요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될것인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하는가?’ 가 더 본질적 문제인 것입니다. 사명으로, 성취로, 일로 ‘구원의 삶’을 증명하는것도 중요하지만 본질적으로 나는 어떤 사람인가? 로 ‘구원의 삶’이 증명되어야 할것입니다. 아무리 일을 잘하고, 교회를 세우고, 선교를 하고, 선행을 한다 한들, 존재론적으로 보면 겸손하지 않고, 온유하지 않고, 인내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화평케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르심’에 합한 삶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 닮은 존재로, 작은 예수로, 말 그대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내는 신앙인이 되야겠습니다.

    2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한분 하나님 이십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수많은 신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말하면서 교묘하게 다른 신도 인정합니다.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며 이것이 현대 문명인의 '종교를 대하는 성숙한 자세'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한분 하나님, 구원의 한길, 한분 성령님과, 유일한 세례를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이름으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알라가, 야훼고, 부처가 예수님이 아닙니다. 삼위의 하나님은 한분 뿐입니다!

    그러므로 창조하신 유일하신 하나님, 구원하신 유일하신 예수님만을 믿어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제가 믿고 있고,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참된 모습입니다. 다른 신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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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이 사랑 안에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짐으로 모든 성도들과 함께 능히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떤지를 깨닫고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의 정도에까지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7-19)

    사랑은 입체적입니다. 결국 한면을 사랑하고 다른 한 면은 사랑하지 못하는 단면적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인격의 한 영역을 사랑하되, 다른 영역은 미워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되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면적이 겨우 한 면 이여서 모든 것을 감싸안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전인격을, 더 나아가 전 인류를 품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사랑의 깊이요, 너비요, 길이요, 높이 입니다. 나의 사랑은 그러므로 ‘입체적 사랑’이여야 합니다.

    사랑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라 하셨듯이,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듯이 사랑은 대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언제나 함께 하는 것입니다. 나만을 사랑하는 것은 그래서 ‘사랑’이 아닌 ‘이기심’이라 불립니다. 함께 사랑해야합니다. 함께 사랑하는 가족, 함께 사랑하는 교회, 함께 사랑하는 사회, 함께 사랑하는 신앙을 만들어 가야합니다. 이것이 첫번째, 두번째 계명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지식을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자주 비이성적이고, 비효율적이고, 비계산적입니다. 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성적 선택, 효율적 선택, 계산적 선택이라 말할까요? 단언컨데 예수의 사랑은 한계와 정의에 메이지 않습니다. 예수의 충만한 사랑에까지 이르는 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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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울은 겸손합니다. 그는 ‘가장 작은 사람’ 아닙니다. 배경적으로 그럴수 없습니다. 지식이나, 지위나, 배경이나, 재정이나 바울은 가장 작은자 일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가장 작은자’로 선포합니다.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서보았기 때문입니다. 영광이 육신이 되신 예수그리스도 앞에 서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세상적 배경에 상관없이 가장 작은자라고 선포합니다. 진짜 겸손을 배운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가장 작은 사람’입니다. 언제나 겸손해야합니다.

    2 바울은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옥안에서 이 편지를 썼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의심이 없습니다. 부르심에 대한 의심도 없습니다. 사명에 대한 일말의 의심이 없고, 복음의 메세지에 대해서도 전혀 의심이 없습니다. 의심했다면 그는 계속 복음의 길을 고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의심은 일을 못하게 합니다. 멈추게 합니다.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하나님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3 바울은 담대합니다. 감옥에 갇힌것도 사실 복음 때문입니다. 바울을 향한 세상의 협박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바울은 복음을 외치는 목소리를 높이는 것 같습니다. 이렇듯 편지로도 복음을 전하고, 주변 죄수들에게도 가능할 때마다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환난은 그를 위축되게 하지 못했습니다. 강압과 협박도 그를 멈추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하나님의 손붙들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야합니다.

    4 바울은 비난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내가 당한 환난 때문에 여러분이 낙심하지 않기를 당부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투옥을 두고 “당신들 때문이야!”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오르면서 “너네 때문이야!! 너네만 없었어도!”라고 죄인된 우리를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는 비난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전도하다가 고난 당하면, 하나님을 비난할것도 아니고, 타인을 비난할 것도 아닙니다.

    5 바울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갇혀 있으나 낙심하여 멈추지 않습니다. 이 일을 보며 낙심하지 말라고 오히려 에베소 교인들에게도 당부합니다. 낙심하면 멈추게 됩니다. 포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낙심이 무섭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마음을 다잡을수 있다면 회복의 걸음을 땔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마음을 놓치면 상황이 상대적으로 나쁘지 않아도 완전히 멈춰버릴수도 있습니다. ‘공황’이 왜 무섭나요? 실제 상황이 최악이여서가 아니라 마음이 최악이 되어서 무서운것입니다. 그러니 ‘공황’이 되면 정신과 육신이 굳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안에서 낙심하면 안됩니다. 상황에 져서는 안됩니다. 주님 없이는 낙심이지만, 주안에서는 언제나 안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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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작금의 중동 전쟁 사태를 보며 슬프고 아픕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상황, 전쟁에 참여할 의지가 전혀 없는, 총칼을 들지 않는 사람들, 남녀노소, 병원에 있는 이들까지 무차별하게 죽임당하는 상황을 보면서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시는 분이십니다.(14절) 유대인과 이방인은 서로의 기준으로, 배경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며 나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사랑과 보혈로 그들을 화평케 하는 목적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한 민족에 국한된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팔레스타인도, 오늘날 이스라엘도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Prince of Peace’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이웃간에 화목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는 오셔서 먼 데 있는 여러분에게 화평을 전하셨을뿐 아니라 가까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도 화평을 전하셨습니다.” (17절)

    화평을 놓고 기도합니다. 화해와 화목을 놓고 기도합니다. 수많은 정치적 충돌과, 신념의 충돌과, 이해의 충돌, 혹은 더나가 역사를 통해 쌓인 모든 증오와 반목의 감정들이 사라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인간의 욕심과 욕망, 각각의 진영의 이기에서 비롯된 분열하고 죽이는 전쟁이 멈추고, 사라진 화평이 다시 임하여 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

    혹 본인이 ‘성골 그리스도인’이다 자부 하면서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새가족들을 향한 경계와, 판단, 정죄와,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면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점검해봐야 할것입니다.

    ‘이방사람’을 향한 끊임없는 정죄가 교회 안에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예수님이 바라신 것이라면 예수님은 삭개오도 만나시면 안되고, 창녀 마리아도 만나시면 안됩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만나시면 안됩니다. 세리 마태를 제자로 들이시는것은 절대 있을수도 없는 일입니다.

    환영과 협력, 사랑과, 인내, 격려와 도전, 가르침과, 인도로 서로를 마주해야합니다. 정죄와 판단이 아닙니다. 당짓고, 분열하는 것 아닙니다. 출신으로 내가 그보다 더 나은것 아니고, 배경으로 내가 그와는 다른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저 함께 거룩하게 세워져가고 있는 자들일 뿐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건강하고, 사랑하고, 하나되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본문을 정리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들 입니다. 사탄을 따라 살던 사람들 입니다. 진노의 자녀이며, 육체의 욕망대로 살던 사람들 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았습니다.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 받은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죽을수 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것은 복잡한게 아닙니다. ‘선한일들을 행하며 사는것’ 입니다. (10절)

    온갖종류의 선한 일들이 있습니다. 나에게 선하며, 이웃에게 선하며, 사회에 선하며, 하나님을 위하는 선한 행동들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자는 ‘선행’에 빚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마음과 생각에 선함을 가득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시간으로 선행하고, 지식으로 선행하며, 은사로 선행하고, 지위로 선행하고, 물질로 선행하고, 부지런히 선행하고, 끝까지 선행하는 신앙인이 되야합니다.

    구원은 가격을 매길수 없습니다. 예수의 보혈은 그 가격을 매길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기 때문에 무언가라도 하고 싶다면, 오늘 바울이 제시하는 이 ‘구원의 가격표’에 귀기울이며 되겠습니다. 구원의 가격표는 선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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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입니다” (23절)

    여기서 교회란 우리가 가장 대표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공교회’의 의미도 담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한 성도, 성도의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는 유기적 관계입니다. 생명으로 묶여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회사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보스와 직원은 서로 끊어질수 있습니다. 언제든 바뀔수 있습니다. 그래도 회사는 돌아가고, 이윤은 만들어 집니다. 그러나 몸은 그렇지 않습니다. 의학이 이정도로 발달한 시대를 살아도, 여전히 장기이식 하나 맘 편하게 하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유기체가 그렇습니다. 서로 생명으로 묶여있습니다.

    기능으로 묶인 관계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언제든지 더 나은 기능자가 나오거나, 하드웨어적으로 업그레이드 된 버전이 나오면 바꿀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기체는 더 나은 눈이 나왔다고, 지금의 눈을 빼고 갈아끼우지 않습니다. 또한 유기체는 서로가 서로를 온전하게 만들어주는 의미도 있습니다. 예컨데 그리스도가 머리이고, 우리는 몸 인것입니다. 몸만 있다고 온전한 생명체가 아니고, 머리만 있다고 온전한 생명체도 아닙니다. 이것이 유기적 관계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교회'로써의 가치와 책임에 대한 엄중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교회’된 우리가 썩어진다면, 유기체인 교회 전체는 아프게 되는것이죠.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조차 썩어진 교회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수치스러운 시선을 받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교회로써 바로 살지 못하고 만약 신앙을 떠나버린다면, 나로 인해, 혹은 우리로 인해 교회는 큰 상처를 입을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유기적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공교회도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책임감 있게, 그리스도와 한 몸이라는, 이 유기적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실로 무거운 책임감 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도전합니다. 건강한 교회가 되야겠습니다. 건강한 교회를 세워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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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입니다” (23절)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조차도, ‘교회의 머리’이기 때문에 몸(?)이 필요합니다. 표현이 모순적이지만,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가 충만해(?) 지기 위해서는 ‘몸’이 되는 교회가 필요한것입니다. (몸이 없는 머리는 ‘충만’ 즉, 완성된것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바울은 기록합니다.

    “교회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충만하게 하는 충만입니다!” (23절)

    말이 어렵지만, 몸된 교회가,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충만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우리 없이는 예수님이 충만하시지 않다!' 라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이 말은 결국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동역으로의 초청입니다.

    (설명을 덧붙여보자면) 사실 말씀의 기록대로 예수님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교회니, 성도니 사실 필요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이 굳이 ‘교회’를 ‘몸’이라 부르시며, 만물을 충만하게 만드시는 자리로 초청해 주시는것입니다. 한자리 크게(?)내주신 것입니다. “너 이제부터 내 오른팔 역할 해라!”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동역자로 초청해주시는것이죠)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큰 특권이며 은혜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예수님의 도구가 되야합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되야합니다. 사명자가 되야합니다. 충만케 하시는 예수님께서 ‘몸’이 된 교회를 사용하여 만물을 충만케 만들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나름 열심히 사용(?)되고 있는것 같습니다. 여전히 부족한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해 ‘몸된 교회’로서의 역할, 이 사명을 감당하려고 노력중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쓰신다고 하면 최대한 사용 되려고 하는것 같습니다. 모든 성도가 이와 같은 노력을 해야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분의 ‘충만의 도구’로서의 삶을 살아내야 할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한 순종과 열심이 필요합니다! '머리'는 지시하고 '몸'은 열심히 움직여야 합니다!

    바우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충만의 도구요 몸이 되기를 자처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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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한 단어는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계속 모든 은혜의 근거를 그리스도에서 찾습니다. 인생의 모든 기원과, 은혜, 죄사함과 구원의 근거를 그리스도안에서 찾습니다.

    그리스도!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죄사함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는 소망없는 인생입니다. 이땅에서 그 어떤 것을 누린다 한들 그리스도가 없으면 구원의 은혜와 영광은 없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모든것 되시는 그리스도안에 머물고 있는가? 그리스도가 상실된 교회는 없는가? 물어보게 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교회는 화려하고, 예배는 세대를 담기 위해 노력하고, 규모는 커지고, 목회자의 가르침은 세상 사람들을 포함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이에 무엇보다 중요한 그리스도는 놓치고 있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른 가치들을 추종하다가 정작 그리스도를 놓치는 교회와 성도들이 생기고 있는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것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목사로써 이 질문 앞에 아찔합니다. 바우 교회가 ‘그리스도’를 잊을까봐 두렵습니다. 세대, 규모, 화려함, 인기등을 쫓다가 그리스도를 잊을까봐 두렵습니다. 그리스도를 잊은 교회는 구원을 잃어버립니다. 은혜를 잃어버립니다.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사명도 잃어버립니다.

    그리스도를 잊지 않는 성도 되겠습니다. 그리스도위에 서는 건강한 바우교회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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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 시선을 잡는 단어는 ‘은혜’입니다. 구원도 은혜이고, 예정도 은혜입니다. 양자로 삼는것도 은혜이고,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는 것도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은혜, ‘구원’으로 이미 받은 은혜가 충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매일 나의 삶에 가득합니다. 매 순간이 은혜입니다.

    남들이 보면 교회가 이제 점점 안정되어간다고 말합니다. 잘돼고 있다고 말합니다. “좋겠다!” 라고 말해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매일 힘듭니다. 매일 피가 마르는 마음입니다. 믿음이 없어선지, 심약해서인지 스트레스가 심합니다.. 머리는 계속 하얗게 변해가니까 계속 염색샴푸(?)같은거 써야합니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간다!’ 라는 시간들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매일 마무리 하는 저녁이 되면 절로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오늘도 은혜였습니다!” 그렇게 한 숨을 몰아쉬고 나면 주 앞에서 한결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그마저도 안되는 밤이면 아침이 되서야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은혜를 부어주세요!”

    하나님의 은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가장 명확한 소망의 근거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나를 살리는 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나를 치료하는 명의의 손이고, 나로 숨쉬게 하는 산소 호흡기 입니다.

    구원하시는 최고의 은혜를 배푸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으시고 매일의 삶에 필요한 은혜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덕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을 살아내는 모든 성도님들의 삶과 마음속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위로와 격려와 새 힘을 경험하는 하루 되길 기도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습니다"(7절) 이 은혜를 기억하며 삶의 고단함과 도전을 뛰어넘는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모두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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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교 학부 시작과 함께 벤쿠버에 소재한 한 조그만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3년이 채 안되었을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벤쿠버 온누리교회로 사역지를 옮겨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얼마나 혼났는지 모릅니다. 매일 불려가고, 지적 받기 일수였습니다. 문서 하나를 작성해도 수정 사항이 넘쳐났고, 찬양인도 한번을 해도 고쳐야할 부분이 넘쳐났고, 설교를 하자니 자세부터, 이런 저런 조언들이 넘쳐났습니다. 교회 종이 한장을 낭비하면 “교회 돈을 그렇게 함부로 쓰는거 아니야!” 라는 불호령을 듣기도 했습니다. 서울 온누리 대청에서 사역할때는 새벽예배 찬양인도가 끝나고 난후 항상 피드백을 받았는데요, 그마저도 시간이 안되면 문자나 전화로 피드백을 받기도했습니다.

    선배 목사님들의, 멘토 목사님의 이러한 조언들과 가르침을 통해서 저의 목회는 조금씩 더 성장할수 있었습니다. 물론 들을때 기분이 유쾌하거나, 모든 조언이 다 지혜같이 들린것은 아닙니다. 내 자신을 변명하고 싶은적도 많고,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고 싶을때도 많았고, 내 방법을 고집하고 싶을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분들의 목회 조언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일때, 제 목회에 있는 불필요한것들을 제거하고, 조금 더 나은 목회적 기술(?)들을 배우기도 했고, 목회자의 참된 마음과 태도에 대해서도 잘 배울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배우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던 동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얼마 못견디고 사역을 떠나기도했고, 한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니 전혀 변화가 없어 짤리기도(?) 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꾸짖음과 훈계를 듣고 배웁니다. 충고자를 사랑합니다.(8-9절) 진심으로 충고해주고, 삶의 지혜를 나눠주는 부모, 형제, 자매, 친구, 지인, 선배, 이웃, 동료, 후배, 동생의 말에 겸손히 귀 기울이는 자가 되야합니다. 그들을 존중하고, 존경하고, 사랑할줄 알아야합니다. 이러한 자세를 잊지 않을때에, 계속 성장하고, 지혜롭게 행동할수 있게 될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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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혜는 자신의 기원을 ‘창세전’으로 표현합니다. (물론 솔로몬의 표현이긴 합니다만)

    이렇게 본문을 읽다보니 (뜬금없지만) 지혜가 구식이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위 말하는 ‘젊은이’로 지금을 살아내다보니 간혹 부모님 세대가 말하는 지혜를 ‘구식’이라는 프레임에 가둬 무시하는 일들이 생깁니다. “그건 너무 옛날 방식이예요!” 라고 말하는것입니다.

    사실 지혜는 원래가 인류의 기원전부터 있던것입니다. 지혜가 오래 전(?)것이라고 해서 의미 없거나, 무시해도되는 구식이라고 말할수 없습니다. 결국 ‘온고지신’ 입니다. 과거의 지혜속에서 오늘을 살아낼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간혹 성경의 가르침을 얘기하면 청년들이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목사님! 그건 너무 예전 사고 방식입니다! 목사님! 그 가르침은 오늘날의 시대에 적용하기는 너무 낡은 사고 방식이예요!” 그러면 저는 청년들에게 이렇게 대답하곤 했습니다. “저는 지금 ‘낡은 지혜’를 말하는것이 아닙니다. “옛날 얘기”를 하고 있는게 아닙니다. 저는 지금 ‘성경얘기’를 하고 있는거예요. ‘낡은 지혜’가 아닌 ‘성경의 가르침’을 나누고 있는거에요!”

    태초부터, 아니 그 전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지혜는 오늘도 우리의 삶에 가장 강력하고, 밝은 빛이 됩니다. 답이 됩니다. 말씀의 지혜를 쫓아 살아야합니다. 이 시대를 대변하는 지혜, 업데이트(?)된 지혜보다 더 위대한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또한 여기에 덧붙여, 부모세대, 선배세대의 지혜들에도 진심으로 귀기울일줄 아는 지혜자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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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혜’는 기록된대로 창조에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 그렇습니다. 지혜는 무질서의 세계에 질서를 창조하는 귀한 도구였습니다. 어둠도 몰아냈고, 혼돈도 몰아냈고, 생명이 없는 그곳에 찬란한 생명을 창조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지혜는 그렇게 내 삶의 혼돈을 깨부시고, 새롭게 만들어 냅니다. 무질서를 몰아내고 질서를 창조합니다. 나의 삶이 무질서하고, 혼돈 가운데 있는 이유는 지혜가 만들어내고자 하는 질서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삶이 무질서 하다면, 혼란하다면 지혜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 삶에 규모도 없고, 질서도 없고, 아름다움도 없고, 혼돈으로 가득차있다면, 아무리 돈이 많고, 건강하고, 지위가 놓고, 누리는게 많아도 지혜가 없을 수 있습니다.

    지혜가 내 안에 하나님의 세계를 창조하게 하세요. 지혜가 내 안에 혼돈을 몰아내고 질서를 창조하게 하세요. 지혜가 내안에 새 생명을 창조하게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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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을 미워해야합니다. (13절)

    죄를 저지르지 않는것에서 한걸음 더 나가서 악을 미워해야합니다. 그래야 죄의 유혹을 좀더 멀리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악도 사랑할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죄에 대해서, 죄의 유혹에 대해서 관대할수 없습니다. ‘악’이 괜찮으면 안됩니다. 언제나 불편해야합니다.

    여기서 ‘미워하다'라고 하는 이 단어는 '증오하다'라는 뜻입니다. 단순한 미움, 불편함이 아닌, 극단의 미움을 뜻하는것입니다. 함께 공존할수 없는 마음, 용인할수 없는 마음입니다.

    악에 대한 입장정리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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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만한과 거만함을 버립니다. (13절)

    비교에서 오는 우월감이 있습니다. 가진것에서부터 오는 과도한 자신감이 있습니다. 가진 권력에서부터 오는, 무언가에서 초월한 것 같은 초월감이 있습니다. 강력한 배경에서부터 오는, '나는 이들과 달라!'라고 하는, 차별의식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잘 믿지!' 라고 하는 이 종교적 신념에서부터 오는 선민의식, '선택받은 백성이야!' 라고 하는 의식도 있습니다. 형식적인 선행에서 오는 내적인 만족등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어찌보면 교만함과 거만함과 그 근거를 같이 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내려 놓습니다.

    언제나 내 자신이 최선이라는 생각에, 나 자신을 기준삼아 타인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그들의 삶을 결론 내리고, 비판하는 행동도 버리겠습니다.

    유무형의 모든것,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유무형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니 우리는 교만할 수 없습니다. 교만해서도 안됩니다. 교만과 거만함을 버리고 겸손한 하나님의 자녀로의 삶을 다시 한번 다짐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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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로몬의 잠언에 왜 이렇게 음란과 음녀에 대한 경고가 많은가 생각해보니까 이유를 두가지 정도로 정리해볼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솔로몬 자신이 1000명의 처와 첩을 둔 (왕상11:3)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쾌락과 음란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개인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그것이 얼마나 허무하고 위험한것인지 경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번째는 솔로몬 말고도 당시 시대에 음란과 쾌락의 문제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사회적 이슈’에 대한 경고 격으로 솔로몬이 힘주어 기록했던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생각해보면 오늘날도 크게 다른 상황은 아닙니다. 음란의 유혹은 여전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이들의 주변에 놓여있고, 과도하리만큼 많이 노출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해보면 “음란을 조심하세요!” 라는 말의 반복이 전혀 과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아무리 반복하고, 또 반복해도 부족한것이 바로 이 음란에 대한 경고 입니다.

    한두번 경고하는것으로 충분한 경고가되는 이슈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음란은 그런(?) 죄가 아닙니다. 내 자신에게 계속 상기 시켜야합니다. 아침마다, 저녁마다, 밤마다 상기 시켜야합니다. 자주 보이는곳에 써서 붙여놓으면 좋겠습니다! 컴퓨터에, 책상에, 핸드폰 배경에, “거룩합시다! 음란을 멀리합시다! 경건합시다! 정결합시다!” 조심해서 나쁠게 없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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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남편이 있습니다!” 라는 말로 어떤 여인이 유혹하기 시작한다면, 그걸 듣고서도 그 여인과 가서 동침하는 음란의 죄를 범할까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잠언에 소개되는 ‘음녀’는 그래서 다르게 접근합니다. 온간 달콤한 말, 유혹의 말을 쏟아 부어 먼저 대상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달콤한 말에 스윽 이 말을 섞어 넣습니다. “남편은 멀리 여행을 떠나서 집에 없고.”(19절) 마치 별일이 아니라는것처럼, 혹은 더 나가 ‘좋은 기회’라는 것처럼 스윽 이 말을 끼어 넣습니다. 만약 듣는 사람이 깨어있다면, 이 말을 들었을때 간담이 서늘해 지겠죠. 정신이 바짝 들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죄의 유혹에 마음이 동하면 ‘남편있는 여자’라는 말을 들어도 그냥 넘어가게 되는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방법입니다. 교묘하고, 무섭습니다.

    신천지 전도방법을 보세요! “우리 신천지 입니다!”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우리 이만희 교주를 믿습니다!”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계속 좋은 얘기, 선한 도움, 전문적 지식들을 나누면서 접근하다가 “우리 신천지예요!” 라고 나중에 스윽 말합니다. 그럼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서 그렇게 '신천지인'이 되는것입니다.

    항상 잘 들어야합니다. 깨어서 들어야합니다. 처음부터 끝가지 잘 들으면서 계속 점검과 분별을 해야합니다. 한국에 요즘 전세사기가 기승이라는데, 그게 조금만 틈을 보여도 바로 속아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매순간이 치열한 점검과 반복되는 확인등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중간에 스윽 이상한게 끼어들어오면 깨달을수 있습니다. 귀를 간지럽히는 말에 귀 기울일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팩트를 분별할줄 알아야하고, 정의를 분별할줄 알아야합니다. 저도 과거 그렇게 교회 안에서 ‘이단 목사’를 발견해 낸적도 있습니다. 듣다보면 ‘구렁이 담넘는것 같은 말’이 스윽 나옵니다. 그러면 “이놈 잡았다!” 하면서 분별할줄 알아야 합니다. 그거 못하면 “소가 도살장으로 가는것 같이, 새가 덫으로 날아드는것 같이”(22,23절) 죽음으로 달려가는 것이 될수도 있습니다.

    계속 깨어 있어야합니다. 지혜는 ‘언제나 경계하는 삶’입니다. 지혜는 ‘언제나 분별하는 삶’ 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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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을 품었는데 그 옷이 타지 않겠느냐? 뜨거운 숯불 위를 걷는데 발이 데지 않겠느냐?” (27,28절) 이는 마치 “까마귀 노는 곳에 백노야 가지 마라!” 혹은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라는 근묵자흑이라는, 한국사람들이라면 자주 들었던 말과 비슷합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 입니다. 더러운 것을 만지며 깨끗할수 없고, 뜨거운 불을 만지면서 화상을 입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음란을 곁에 두고, 죄악을 곁에 두고 깨끗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겉옷을 벗어버리고서라도 죄의 유혹 앞에서 도망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쯤되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애초에 뜨거운데 왜 불을 품는가? 뜨거운데 왜 숯불위를 걷는가? 더러운데 왜 가까이하는가? 더러운데 왜 안는가?하는 의문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모를리 없는 일입니다. 뜨거운거 조심하고, 더러운거 조심해야하는거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도 아닙니다. 그런데 애초에 왜 이런것들을 만지거나, 곁으로 가거나, 떠나지 않는것일까요?

    아마도 죄에 대한 안전불감증, 죄에 대한 절제 안되는 호기심, 주변과 어울리고 싶은 군중심리, 뭐든지 경험해보면 좋다는 경험제일주의, 쾌락중독, 안일한 경계심, 능동적 불순종, 죄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 허세 같은 동기가 작동한것 아닌가 싶습니다. 충동적이고, 어리석은 동기에 속아 불속으로 뛰어드는, 더러운것을 껴안는 실수를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어려운 지혜가 아닙니다. 당연한 상식이고 쉬운 지혜입니다. 죄와 유혹은 애초에 멀리 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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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가 만들어 내는 문제중에 ‘보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35절) 세상은 어떻게든 보상으로 합의 보려고 합니다. 합의가 안될것 같아 보이는 일들도 천문학적 액수로 합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돈으로 합의를 했다고 한들 완벽한 보상이 이뤄진것은 아닙니다. 어쩔수 없는 결정일 뿐입니다. 누군가 상해를 입었고, 혹 누군가 생명을 잃었다면, 그에 합한 보상을 한다고 한들 그게 진정한 의미의 보상은 되지 못합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무겁습니다. 죄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그 어떤 보상으로도 매꿀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라고 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죄의 무게를 알고 죄를 절대적으로 끊어내야합니다. 특히 어제본문에서부터 쭈욱 이어져오고 있는 성의 문란에 대한 일들은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합니다. ‘보상’으로 해결할수 없는 수많은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억하는게 가장 좋을듯합니다. ‘죄로 인한 결과는 절대 보상하지 못한다!’ 이런 생각으로 내 마음과 생각을 절제한다면, 죄를 조금더 능동적으로 멀리하게 될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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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증에 대한 성경의 입장은 ‘불가’ 입니다. 그러면 친구를 위해서 담보를 세우고, 남을 위해 보증을 서는 것을 하지 말라는것인가요? (1절) 친구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친구를 위해 목숨까지도 내 놓으라고 가르친것이 성경이 아닌가요? 그런데 그깟 담보를 잡히지 말고, 보증을 서지 말라니 너무 모순적인 말씀 아닌가요?

    친구를 위해서는 보증을 서는게 아니고, 담보를 잡는게 아니고 그냥 주는겁니다. 물론 내가 아예 줄것이 없다면 어쩔수 없는 영역이지만, 줄수있다면, 담보 잡혀줄것이 있고, 보증서 줄 능력이 된다면 그냥 주는것입니다. 내가 줄수있는만큼, 내가 도와줄수 있는 만큼, 이게 바로 성경이 제시하는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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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아이 두명이 서로 보증자가 되겠다고 10억 빌린다고 하면 누가 10억을 빌려줄것이며, 누가 보증자의 보증이 효력이 있다고 인정할까요? 가당치도 않은 우스운 일입니다.

    보증을 서지 말라는 이유는, 이와같이 우리가 보증을 설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보장할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내일을 모르는게 아니고, 다음 초를 모르는게 사람입니다. 그런데 보증이라뇨? 오늘의 부자가 내일의 빚쟁이가 되기도 하고, 오늘의 권력자가 내일의 죄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누굴 믿고, 누굴 기대어서 보증을 받을 것이며, 내가 누구관대 타인의 보증을 서줄수 있는가 말입니다.

    보증을 서는것은 책임지지 못할 일을 하는것이고, 책임지지 못할일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모습이고, 우스운 꼴입니다.

    저도 교회 관련 이런 저런 일을 하다보면 ‘보증자’가 필요하다고 연락을 받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규칙이 그렇습니다. 그러면 저도 교단이나, 공동체, 단체들의 이름과 신용을 빌려 보증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내면 저편에서 이 ‘보장’이 한시적이며, 유한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보험회사들도 보험을 드는거 아니겠습니까?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나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야합니다. 보증을 구하는것은 그 다음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보증하실수 있는 유일하신 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의 태도를 놓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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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지런’은 성경이 좋아하는 개념입니다. 권고하는 태도입니다. 잠은 필요하지만 과도한 잠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게으르고, 미루고, 쉬기만을 좋아하는 것 또한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안식일’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해보면, 안식일은 7일중에 하루입니다. 6일이 안식일이고 하루 일하는게 아닙니다. 결국 ‘부지런’이 디폴트 값입니다.

    부지런 하지 않다면 정신 차려야합니다. 게으르다면 심지어 회개해야합니다. 다섯달란트 받은 열심쟁이와, 한달란트 받은 게으름쟁이를 향한 예수님의 결론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모든 인생은 ‘달란트’를 받았고, 우리는 그 달란트를 부지런히 사용해야할 책임을 같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부지런 해야합니다. ‘주관적 부지런’ 말고, ‘객관적 부지런’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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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싫어하시는것 예닐곱가지:

    교만, 거짓, 폭력, 음모, 악행, 중상모략, 분열, 볼화 등입니다.

    아내가 싫어하는것이 예닐곱가지가 아니라 예순일곱가지는 있는것 같습니다.ㅋㅋ 싫어하는건 안하는게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는건 하나라도 안하는게 정답입니다! 지혜 별거 아닙니다. 하지 말라는거, 싫다는거 안하는게 최고의 지혜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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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녀’로 기록된 이 음란한 여인, 타락한 여인을 극도로 경계하라는 이 지혜는 남에게 하는 말씀이 아닌 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음란을 쫓거나, 간통하거나, 쾌락에 중독되거나, 창기에게 간다거나 하는 일을 전혀 하지 않고, 생각도 없기 때문에 이런 잠언을 접할때면 ‘아~남들에게 하는 얘기지’ 라고 생각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며,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경고 입니다.

    가만 보면 ‘음란의 죄’는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어제까지도 명망이 높던 사람도 다음날 ‘음란’으로 무너졌다는 소식을 자주 듣습니다. 주변 이웃들, ‘누구아빠’ ‘누구엄마’에게서 들리는 소리기도 하고, 사회적 공인격인 교사, 정치인, 경제인, 그리고 영적인 기준을 제공한다는 종교지도자들도, 거기에는 안타깝게 많은 목사들도 회자됩니다. 요즘에는 그 나이도 더욱 어려지고있습니다. 쉽게 말해 모든 이들이 ‘음란의 죄’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음란의 죄는 절대 남의 일이 아닙니다. 나랑은 상관 없는 일이 아닙니다. ‘마약청청국’이라고 했다가 지금은 마약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다는 한국을 보면서 깨달아야합니다. “아! 그 문제는 나와 상관없어!!” 라고 하다가 어느덧 음란에 죄에 발목이 걸려 넘어질지 모를 일입니다.

    저도 조심하고 또 경계합니다.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자리라고 생각되면 아예 피하려고 생각합니다. 목회 20년 섬기는 동안 성도라도 이성이면 어디서든 일대일로 만나지 않으려고 노력 했습니다. 일대일로 만나야하면 대낮 많은 이들이 모여있는 카페나, 교회에서 단체 모임할 때 그 뒷자리에 조금 떨어져 만나곤 했습니다. 때로는 이런 태도 때문에 성도님들께 오해를 받은적도 있습니다. ‘정목사는 사람들을 안만나! 상담도 안해줘!’ 그런 오해가 때로는 맘을 아프게 하기도하고, 이 덕분에(?) 제 목회에 힘을 받기 어려울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혹시 있을지 모를,(이것이 과도한 생각일 지라도) 유혹과 위기에서 내 자신을, 또 성도님들을 보호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시대가 음란합니다! 음란이 시대를 지배했다고 느껴질만한 시대입니다. 진짜 경계해야합니다. 모두가 조심해야합니다. 음란을 멈추고 끊어내야합니다.

    각자가 삶에 있을법한 음란의 유혹의 자리를 이제 정리해야합니다. 결혼했는데 그 외의 상대에게 호감이 생기고 있다면 그 사람 보지 말아야합니다. 성을 쾌락의 도구로 이용해서 자유롭게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나의 여가 시간이 음란한 영상과, 생각들로 가득차 있다면 완전히 끊어내고 건강한 방향으로 변경해야합니다. 생각과, 태도, 상황, 만나는 사람등 항상 깨어있는 마음으로, 조심하는 마음으로 만나야합니다. 음란을 버리고, 거룩하게 성을 누려야합니다.

    오직 성의 쾌락은 부부안에서 건강하게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올바른 ‘성 사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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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로 오래 사는 사람은 어떻게 오래 살게 되었을까요? (사건, 사고, 유전병등의 특이한 상황을 제외하고, 어디까지나 일반적이고, 상식적인선에서 하는 질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누군가 건강하게 오래 산다고 했을때, 일반상식은 그 사람이 건강을 위해서 주로 옳은 선택을 해온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여기서 ‘옳은 선택’이란? 규칙적인 생활, 건강한 식습관, 꾸준한 운동, 긍정적인 사고등을 말하는 것이죠. 이러한 지혜는 건강을 지키는 중요한 요소들이 됩니다.

    솔로몬은 지혜가 있는 사람은 장수한다고 말합니다.(10절) 그렇다면 지혜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 장수하게 되는걸까요? “너는 지혜가 있으니까 오래살아!” 라고 하나님께서 선물로 ‘장수’를 주시나요? 아닙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 장수 하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지혜자’들은 보통 지혜를 쫓아 ‘옳은 선택’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불규칙한 , 무질서한 인생보다는 질서있고, 규모있는 인생을 선택할것입니다. 과식과, 불규칙 식사를 선택하기 보다는 당연히 건강한 식단을 선택할것이고, 정량을 먹기를 힘쓸 것입니다. 매일 침대와 혼연일치 되어 있기 보다는 꾸준히 운동하기를 선택할 것입니다. 이처럼 '지혜자'들은 죄보다는 거룩을, 거짓보다는 정직을, 미움보다 평화를, 폭력보다 용서를, 불의보다는 공의를 선택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상보다 예수님을 선택할 것입니다.

    영의 일이든, 육의 일이든, 삶의 매순간 이와 같이 ‘지혜자’들은 ‘옳은 선택’을 하고, 그들이 한 이 옳은 선택은, 그들이 혹 만나게 될 위기와 위험에서 그들을 보호하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자주 위기를 피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주 위기를 맞습니다.

    이쯤되면 왜 지혜로운 사람이 장수(?)하는지 알것도 같습니다.

    매 순간, 매 선택의 기로에서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할 것입니다. 자칫 분별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결정을 하면 죽음의 길로 내달리는 꼴이 될지도 모릅니다. 장수는 커녕 비명횡사 할수 있는것입니다. ‘지혜’를 쫓아 살면 결국 우리는 수많은 위기와 위험에서 건짐받고 보호받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장수’(?)도 하게 되는것이겠지요.

    매순간, 매 선택의 순간, 바르고, 정직하고, 건강하고, 거룩하고, 순결하고, 성실하고, 존경받을만하고, 공의롭고, 선한 선택을 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야겠습니다. ‘매 순간’이 없는 ‘장수’는 없습니다. ‘지혜로 사는 오늘’이 없이는 장수는 꿈도 못꿉니다. 오늘 하루도 지혜를 쫓아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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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절 한절이 너무 주옥같습니다! 무엇하나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14-15절)악인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멀리하고, 피하겠습니다. 끊어내겠습니다. 함께하지 않겠습니다.

    23절)마음과 생각을 지키기에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마음과 생각이 행동으로 적용되는것을 경계하는게 아니라 마음과 생각부터 경계하겠습니다.

    24절)더러운 말, 욕, 분노, 거짓, 중상모략, 루머등 모든 나쁜 말은 입에서 다 철저하게 제거합니다.

    ‘감정의 언어’들에 아직 더러운 언어가 묻어있습니다. 흥분과 분노는 ‘욕지거리’의 명분이 되지 못합니다.

    ‘시대적 언어’들에 상당히 자비로운 편입니다. 시대와 문화라는 이름으로 발설되는 더러운 말들을 조금더 경계해야겠습니다.

    ‘내면의 언어’에 여전히 더러운 언어가 묻어있습니다. 생각 속 언어들 말입니다. 다 정리하겠습니다. 고상한(?)내외면의 언어생활을 회복하기로 결정합니다.

    25-27)믿음, 사명을 보고 걷겠습니다. 흔들리지 않겠습니다. 성실하고, 확실하게 사명을 감당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거룩하고 정직하게 감당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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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개월간 미국에서 함께 생활하셨던 아버지께서 어제 새벽 한국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함께있는 시간동안에 대화를 많이 나누지 못하다가 가시기 전날저녁 함께 대화하는 시간을 잠시 가졌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향한 축복의 이야기들, 손녀들을 향한 바램들, 가정과 사역을 향한 바램들을 간소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어느덧 여든을 바라보시면서 나눌수 있는 인생의 지혜도 짧게 나눠주셨습니다.

    이런 말씀하시며 아버지께서는 제 눈치를 살피시곤 하는것 같았습니다. 아들이 어느덧 불혹을 넘었다고 생각해서 그러신건지, 목회자라는 타이틀을 달고있어서인지, 혹은 너무 젊어 전혀 다른 세대적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신의 지혜를 나누시면서 눈치를 살피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마음 한켠에서 회개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아버지께서 삶의 지혜를 나누실 때마다 내가 참 불편한 마음이 들게 해드렸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혜를 ‘잔소리’로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가 있습니다. 나도 이제 알만큼 알고, 경험할만큼 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버지께 부지간에 보여드렸던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요즘 저의 첫째 딸이 저와 아내에게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제 8살 밖에 안된 딸인데 벌써부터 아빠, 엄마가 전하는 지혜를 잔소리로만 여깁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지혜를 잔소리로 여기는 최악의 교만과 착각을 버립니다. 삶의 선배되시는 아버지, 어머니의 지혜를 소중히 간직하고, 순종하는 아들이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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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에서 대를 잇는 지혜! 사실 솔로몬의 잠언은 다윗의 잠언이기도 합니다. 솔로몬 혼자만 경험하고, 배우고, 알아차린것도 아닙니다. 아버지부터 켜켜이 쌓인 지혜가 솔로몬에게까지 이어지고, 솔로몬은 또 그 다음 세대로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를 통해 보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으로 넘어가면서는 이 지혜가 잘 대를 잇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나라에도 비극이 시작되고, 르호보암의 삶에도 비극이 시작됩니다.

    지혜를 보존하고, 그 지혜를 전하는데 있어서 조금더 진정성있는 책임감을 지녀야합니다. 우리의 자녀에게, 더 젊은 세대에게 꼭 필요한 지혜를 전하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사실 요즘에는 ‘지혜’를 다음 세대에게 전하기가 너무 어려운 시대입니다. 무슨 말만 하면 “꼰대”라고 하고, 싫어하고,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축될것이 아닙니다. 젊은이(?)들에게 사랑 받겠다고 지혜 전하기를 포기하고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것을 지양해야합니다. 꼭 전해야하는 지혜를 전하지 않으면 솔로몬 같은 아빠 다음일지라도 르호보암 같은 아들이 나오게 됩니다. 지혜를 잘 보존하고, 지혜를 반드시 전하는 두가지의 책임을 소홀히해서는 안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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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을 베풀어라!” (27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참 많죠. 돌이켜보면 저는 타인들의 ‘선행’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도움이 필요할때가 많았거든요. 말그대로 머물곳이 없던적도 있고, 식사를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때도 간헐적이지만 있었던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심각하게 굶거나, 홈리스가 되어본적은 없는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선행이 저에게 큰 선물이며 은혜가 된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명령을 성실하게 지켜주신 신앙의 선후배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이 드는 아침입니다.

    ‘선행’처럼 일반적이고 표준적인 윤리 강령이 또 있을까요?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 조차도 이미 알고 성실하게 실행하는 것이 바로 도움이 필요한 자를 돕는 선행입니다.

    저는 선행이 부족합니다! 부끄럽지만 겸손히 인정합니다. 선행이 없지 않지만, 선행이 풍족하다거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을 볼때마다 행하고 있지 않습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능력이 없다고 변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많은 다른 변명을 만들어 선행을 최소화(?)하고 있는듯 보입니다.

    지혜 묵상하다가 느닷없이 한대 맞은 느낌입니다. 선행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겠습니다. 선행의 기회들 앞에 변명하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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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게 아무 해도 입히지 않은 사람에게 괜히 시비를 걸지 마라!” (30절)

    당해봐서 압니다. 진짜 기분 나쁘고 힘이 빠집니다. 제가 올린 영상이 누군가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은것 같은데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댓글이 달릴때가 있습니다. 제가 말한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논지로 인신 공격을 당할때가 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척 넘어가려고 하는데 그게 잘 안됩니다. 그런 댓글을 읽으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머리에, 마음에, 영혼에 각인됩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유튜브 영상에 댓글 기능을 차단하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의미로 열어두기에는 ‘무지성, 무논리, 무자비, 무차별’하게 남겨지는 간헐적 댓글을 이겨낼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댓들은 안달지만)그래서 저도 말을 더욱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누군가의 대화에 붙이는 나의 답변들이, 나의 대답이, 나의 설명이 그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또한 내게 해를 입히지도 않은 사람에게 말그대로 괜히 시비를 거는 악독한 사람은 더더욱 되서는 안되겠습니다.

    괜히 시비 걸지 마세요! (저한테도 하는 말이고,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입니다) 까닭없이 언행의 폭력을 휘두르지 마세요. 그냥 이유없이 나쁘게 행동하지 마세요. 파괴력이 생각보다 큽니다. 별 생각없이 했다고, 별 영향력이 없는게 절대 아닙니다. 서로 해를 입히지 않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것이 지혜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괜히 시비’거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길 도전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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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주전인가 이찬수 목사님 설교듣는데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나정도면 겸손하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교만한 사람이다!

    겸손은 자타가 공인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내가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교만입니다. 내 주변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는지 겸허하게 받아들여야합니다. 내가 정말로 겸손하다면 타인들이 그렇게 인정해줄 것입니다. 그들의 판단 속에서 ‘겸손’을 찾을수 없다면 회개하고 더욱 낮아져야겠습니다.

    무엇보다 나의 이웃과, 주변 모두를 속여 ‘겸손’이라는 칭호를 얻는다 하여도 우리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겸손한 종’이라고 인정할법한 목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모세가 들었던 칭찬을 저도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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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혜를 찾고 깨달음을 얻는 사람은 행복하다!”(13절)

    행복을 어디서 찾고 있나요? 어디서 찾아야하나요? ‘행복’이라는 단어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마법같은 단어입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한명도 빠짐없이 모두가 행복하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일생을 행복을 찾아 헤맵니다.

    그런데 행복을 찾는 사람이 많은것 만큼 행복을 찾았다고 선언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습니다. 성취하고 행복을 얻었다 하는 사람도 얼마 안가서 보면 찾았던 행복마져 잃어버린 경우를 봅니다. 돈을 많이 벌고 행복을 얻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언젠가 보면 여전히 돈이 많은데도 더 많은 돈을 쫓느라 행복하지 않고, 누군가는 많은 돈을 잃어서 행복을 잃기도 하고, 누군가는 잃은까봐 전전긍긍하며 행복을 잃은것도 봅니다. 건강, 꿈, 성공, 인기, 권력등이 행복의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같은 근거들이 불행의 근거가 되는것도 너무 흔하게 볼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 헤매는 행복은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는걸까요? 세상에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저는 상대적으로 행복의 이유가 적을지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직장, 연봉, 건강, 지혜, 학력, 배경, 성취, 능력, 인기, 권력, 유명세를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러한 것들을 가진 자들과 상관없이 저는 저 대로의 행복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혜를 찾고 깨달음을 얻은 사람’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을 찾고, 구원의 깨달음을 얻은 자”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비록 가진것 없고, 누리는것 없지만 하늘의 지혜와 구원의 통찰이 있으니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불현듯 행복하게 느끼지 않을때, 나도 모르게 행복을 찾아 헤매고 있을때, 삶의 다른 것들에 집착하여 가졌던 행복마져 놓칠때 오늘 이 잠언을 기억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구원의 깨달음으로 이미 충분히 행복한 사람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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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아들아, 온전한 지혜와 분별력을 지켜 그것들이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여라!” (21절)

    여기서 ‘분별’로 번역된 단어는 신중함 혹은 계획, 의논, 조언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요즘 제가 가장 필요한것입니다. (물론 언제나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최근 1,2년은 특별히 한걸음, 한걸음이 분별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신중해야하고, 의논과 조언을 종합해 계획하고 실천해야하는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결정해야하는 일마다 무게가 무겁다 보니 스트레스를 받는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결정의 순간마다 간절히 기도했던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분별하기 위해서 고군분투 하는 마음이었던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분별케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분별력을 지켜 그것들이 내게서 떠나지 않게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움직이고, 용기있게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지혜가 내게서 떠나지 않기를, 하나님의 분별력으로 사리를 판단할수 있기를,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지혜를 절대 잃어버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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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잊지 말아야하는것은 잘 잊어 버리면서 쓸데없는것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의 아내, 나의 자녀들 생일은 기억도 못하면서 옆집 아내, 옆집 자녀들 생일을 기억한다면 그 가족이 오래 살고, 잘살게 될까요?! 아마 아내의 성화에 못이겨 짧게 살다가 끝날지 모르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대하는 태도가 이럴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잊지 말아야하는데 금방 잊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도 잊고, 말씀의 지혜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대신에 머리에, 생각에, 마음에, 삶에 쓸데 없는 지식들로 가득채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가르침은 쉽게 잊고, 사탄의 가르침은 마음에 잘 간직하다가 우상숭배하고, 죄짓고, 방종하여 심판받곤 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게 이스라엘 백성이 직접 자초한 어려움들 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잊지 말아야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잊어버리면 예수의 사랑도 잊고, 구원의 은혜도 잊으니, 감사와 사명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공의의 지혜를 잊어버리면 불의를 쫓아 행하기 시작합니다. 삶의 경건과 거룩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지혜를 잊어버리면 깊이 있는 사랑의 의미와 실천을 상실하게 됩니다. 사랑이 인내해야하고, 용서해야하고, 믿어줘야하고, 겸손해야하는등 사랑의 지혜와 실천을 잊어버리게됩니다. 자칫 그러다가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도 잃어버리게 되기도 합니다.

    지혜는 잊지 말고, 그 명령을 마음에 잘 간직해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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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를 믿고 네 지식을 의지하지 마라” (5절)

    저는 숫자와 계산에 약합니다. 그래도 열심히 산수(?)하려고 합니다. 산수할 정도의 지식은 있습니다! ㅋ 예를 들면 교회가 장소를 옮기는데 얼마정도의 예산이 드는지 계산합니다. 복잡한 수학은 못해도 이런 산수는 꼼꼼히 해보는 편입니다.

    생각해보면 거의 대부분 그래왔습니다. 한국에서 캐나다 갈때, 그곳에서 일하면서 살때, 미국에 가게 될때, 또 오스틴 가게 될때, 계산 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물론 계산해도 답이 안나온 경우가 많긴 했지만 계산 자체를 안했던 적이 없습니다. 한줌밖에 안되는 지식으로 예상하고, 계산해서 나의 선택이 옳은지를 파악하고 싶었던 것이죠.

    그러나 항상 느낍니다. 지식으로 판단하려고 하면 힘듭니다. 계산하면 힘듭니다. 계산해서 속이 시원하고, 뭔가 준비된것 같이 느껴질때가 없습니다. 나의 지식에 의존해서 재정의 흐름을 계산하고, 앞으로를 예상하고, 수입과 지출을 산정하고 예산을 짜보면 답이 안나옵니다. 만약 그동안 그렇게 나의 별것 아닌 지식으로 계산하고 움직였다면 제 인생에는 캐나다도 없고, 미국도 없고, 오스틴은 더 더욱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기도하고 있는 ‘교회장소이전’도, 저의 인간적 지식과 경험, 계산에 기인하고 있다면 사실 시도도 못할 일입니다.

    지식을 의지하고 움직이는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믿고 움직여야겠습니다. 지식은 도움의 도구이지 결정의 도구가 아니고, 의지할 기둥은 더더욱 아닙니다. '지식의 결론'으로 보자면 불가능 같이 보였던 캐나다 유학, 미국 사역, 교회 개척등이 믿음의 걸음을 때었을때 선한 결과들로 이어져왔듯이 앞으로도 지식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움직일수 있는 사람이 되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방법을 의지합니다!

    믿음으로 사는것이 가장 위대한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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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경험들을 자주 합니다. 제가 할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준비하려고 합니다. 많은 정보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쏟고, ‘은이나 숨은 보물을 찾듯’ 하나님의 지혜를 찾기위해 말씀 속을 해맵니다. 그렇게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지혜찾기는 하루 하루가 지날수록 더 깊은 묵상과 깨달음들로 확장되어 갑니다. 그러나 주말에 가까워 올수록 만족과 자신감 보다는, 점점 부족함과 초조함을 느낍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그렇게 주일 아침까지도 설교 노트를 붙들고 씨름을 할때가 허다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며 여호와의 입에서 지식과 깨달음이 나오는” (6절)것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이 경험을 하지 못하면 설교준비가 끝났다 느껴지지 않습니다!! 나의 지혜만으로 무언가가 준비되었다고 느껴질때처럼 불안할때가 없습니다. 초조하고, 두통이오고, 울렁증이 일어납니다. 저의 지식의 수준을 뛰어넘고, 저의 지혜의 수준을 뛰어넘고, 저의 통찰의 수준을 뛰어넘는 지혜와 깨달음이 언제나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하나님의 지혜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주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지혜를 찾아 씨름하는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지혜없이 살수 없고, 지혜 없이 돌파할수 없습니다. 매일의 삶이 지혜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찾아야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 아닌 하나님의 지혜와 통찰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지혜는 부족하고 불안하나, 하나님의 지혜는 언제나 온전한 해답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지혜를 사모함으로 성실히 배우고, 찾을때, 비단 지식적 지혜만을 배우고 깨닫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통찰을 깨닫게 되는 은혜와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놀고먹고, 불성실하며, 지혜를 사모하지 않는 자에게 꽁(?)으로 임하여 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지혜의 은혜는 그렇게 값싸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 지혜를 사모하는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반짝이는 선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지혜를 성실하게 사모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선물을 누리는 축복된 삶이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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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혜가 주는 유익이 너무 많습니다. 이는 마치 사람들이 ‘슈퍼푸드’라 부르며 몇몇 음식들을 모두에게 권장하는것과 같습니다. (귀리, 블루베리, 녹차, 마늘, 토마토, 등입니다) 백해무익한 음식이 있는 반면에 이처럼 무해백익한 음식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음식은 당연히 잘 챙겨먹어야합니다.

    지혜는 길을 보하고, 공평을 깨닫게 하고, 선한길을 알게 하고, 지식으로 영혼이 기쁘게 하고, 분별력으로 보호하고, 깨달음으로 지키고, 악인과 거짓자들에게서 구원합니다. (8-12)

    모르면 몰랐지 지혜가 이렇게 좋은 음식(?)인거 알았으면 챙겨 먹어야합니다.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비타민과 영양제를 언제 챙겨 먹나요? 보통 중년에 나이에 접어 들면서 입니다. 나이가 젊을때는 그렇게 챙겨 먹으라고 해도 10명중에 1명 챙겨 먹으면 많이 먹는것입니다. 안먹는 사람들이 몰라서 안먹는게 아닙니다. 귀찮다고 하고, 나한테는 필요없다고 하고, 나한테는 소용없이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나는 아직 건강하다고 말하기도하고, 그런거 다 소용없는 사기상술이라고 말하며 안챙겨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중년에 왜 갑자기 안먹던 약을 챙겨 먹기 시작하나요? 몸이 안좋아지는걸 느낍니다. 효과가 있는걸 느낍니다. 안먹으면 아픕니다. 비타민과 영양제의 필요성을 본인들이 가장 크게 느끼니까 말안해도 챙겨먹습니다.

    지혜도 비슷한거 같습니다. 지혜 좋은거 모르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말해도 도무지 지혜를 추구하고, 쫓지 않아요. 본인이 건강하다고 믿고, 지혜롭다고 믿고, 지혜가 필요없다고 믿고, 의미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다보면 지혜 없이 살수 없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게 되는 순간들을 반드시 마주하게 됩니다. 지혜의 비타민을 무시하지 맙시다. 지혜의 영양제를 무시하지 맙시다. '지혜'라는 슈퍼푸드를 무시하지 맙시다! 지혜는 무해다익입니다! 지혜는 챙겨 먹으면 먹을수록 좋습니다! 빨리 챙겨먹을수록 좋습니다!

    결국 같은 묵상이고 적용이지만 다시 한번 내 자신과 우리 모두에게 선포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하고, 챙겨드시고, 놓치지 마세요. 말씀의 지혜, 신앙의 삶에서 경험되는 지혜를 사모하세요! 인생에 유익한 변화를 경험하게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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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적은 별것 아닌것도 참 어렵게 느껴집니다.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면 인간관계를 배워가며 점점더 복잡한 문제들을 마주하게 되고, 문제 해결을 위한 지혜가 점점더 심오해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후 대학을 가고, 졸업하고, 일을 시작하고,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사회적으로 정착이 되고 나면 우리가 마주하는 문제는 점점더 복잡해지고, 그러므로 문제 해결을 위한 지혜는 더 더욱 심오해집니다.

    나이를 먹고, 삶이 성장하면 할수록, 인간관계의 문제, 재정의 문제, 삶의 목적의 문제, 가정의 문제, 건강의 문제, 자녀의 문제 무엇하나 쉬운것이 없기 때문에 ‘지혜가 필요하다!’ 라는 강렬한 열망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지혜에 관심이 없는게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잠언 기자는 지혜를 의인화 하며 이렇게 경고(?)합니다. 본문의 경고에 따르면 지혜가 없는게 아닙니다. 지혜가 부족한게 아닙니다. 지혜는 어디나, 언제나 있다고 기록합니다. 길거리에도 있고, 광장에도 있고, 복잡한 길목에도 있고, 성문 어귀에도 있다고 말합니다. 더 나가 소리치고 있다고 말합니다. (20-21절)

    그렇다면 문제는 지혜의 소리가 없는게 아니라 안듣는 나 자신입니다. 그렇습니다. 안들은 내가 잘못입니다. 제대로 된 지혜가 아닌 다른 어리석음을 선택하여 들은 내가 잘못입니다. 조언을 무시하고,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은 나의 잘못입니다.(25절) 지혜가 만연한 시대, 하나님의 말씀안에도 이미 충분한 지혜가 기록된 시대! 옳은 지혜, 바른 지혜에 귀 기울여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지혜로 삶에 마주하는 ‘복잡한 문제’들을 잘 해결해봐야겠습니다! 지혜 없이 살기에는 너무나 힘든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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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것은 때가 있습니다. 지혜도 그렇습니다. “재앙이 폭풍처럼 덮치고 재난이 회오리바람처럼 휩쓸때”(27절) 그리고 나서 지혜를 찾아봐야 소용이 없을때가 많습니다.

    대한민국은 여름마다 장마때문에 피해가 많습니다. 또 미국 전역에 여름마다 산불로 피해가 많습니다. 그런데 아주 자주 폭풍이 덮치고, 회오리 바람이 닥친다음에야 문제 해결을 위한 지혜를 찾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때 지혜를 찾아봐야 이미 당한 피해를 되돌리수는 없습니다.

    지혜도 때를 놓치지 말아야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부지런히 지혜를 사모해야합니다. 지혜를 축척해가야합니다. 지혜가 필요한 때가 언제 도래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세대는 같이 공유하는 추억이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내게 말씀하셨지!” 혹시 기억하시나요? 바로 '맥가이버 시리즈' 입니다. 맥가이버는 어릴적부터 온갖 지혜를 할아버지를 통해 들었고, 배웠습니다. 그것이 그의 인생에 사건과 위기들마다 빛을 발했습니다.

    늦은 지혜를 구하는것이 최악의 어리석음입니다. 매순간 부지런히, 성실히 지혜에 귀 기울이고, 삶의 지혜, 말씀의 지혜를 쌓아가야겠습니다. 나중에 배우지 말고 지금 배우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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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섬기기로 선택하지 않았으며” (29절)

    지혜에 무관심하면 무관심했지 미워할것까지는 또 뭔가요? 하나님께 무관심하면 무관심했지 경외하지 않기로 결정할것은 또 뭔가요?

    이렇게까지 능동적으로 지혜와 경외를 밀어낸 이유는 알면 변명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르면 “몰라서 그랬어요!” 라고 변명이라도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혜를 들어서 알고 있으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의 근본을 알고 있으면 방종하며 살수 없습니다. 그러니 지혜도 미워하고, 경외도 미워하는것입니다. 의지적으로 배척합니다. ‘나는 나 살고 싶은 대로 살겠어!!! 이것이 내가 선택한 인생의 지혜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 ‘지혜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자기가 뿌린 씨의 열매를 먹고 자기 꾀에 배가 부를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하다가 죽을 것이고, 잘난체 하다가 망할 것이다.” (31-32)

    그들은 맘껏 살고, 잘살아보겠다고 지혜와 경외를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방종의 씨앗을 거두고, 패망을 거두고, 죽음을 거두게 될것입니다. 지혜와 경외를 버리고 방종을 선택하는 최악의 어리석음은 절대 행해서는 안될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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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혜의 책 잠언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도 필요합니다. 어린 사람도 필요합니다. (4절) 지혜로운 사람도 필요하고, 슬기로운 사람도 필요합니다. (5절)

    사실 지식과 지혜에 대해서 논할때 어리석은 사람이나 연소한 사람에게 필요하다는 것은 이견이 달리기 어렵습니다. 매우 타당한 말 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이미 지혜롭거나 슬기롭게 여겨지는 ‘사회적 지식인’들이 배워야 한다고 말하면, 이 말자체는 타당하게 여겨질지언정, 이 말이 쉽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원래 교수, 목사, 선생, 학자들이 제일 안배웁니다! 역설적인 모습입니다. ‘이미 다 배웠다!’ 혹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 라는 생각들을 가질때가 많습니다. 특히나 목사들이 자칫 오해하면 인생의 지혜나, 가르침 앞에서 교만하게 귀를 막는것을 보게 됩니다. 교수들중에 많은 이들은 학생에게 배울수 있다, 혹은 배워야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경우들도 있는것 같습니다. 가르치는 자리에 자주 있다보니까 자신도 배워야 하는 사람임을 잊을때가 많은것입니다.

    지혜와 교훈 앞에서 귀를 막는 자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나 어리석은 사람입니다!”라고 선언하는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누구든 배워야합니다. 누구든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배우는 자세를 절대 놓쳐서는 안됩니다.

    잠언이 그 위대한 솔로몬이 많은 경험 이후 노년에 썼기 때문에 가치있는게 아닙니다. 위대한 사람, 위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중요하고 가치있는게 아니라, 그저 ‘가르침’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아이의 잠언도 가치있고, 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이의 경험일지라도 가치있고, 위대한 인생이 아닐 지라도 평범한 그들의 가르침도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세를 절대 놓쳐서는 안되겠습니다! 배우는 자는 성장하고, 바른길을 선택하며, 빠르게 돌파하고, 성취하고, 제자를 만들게 됩니다. 배우는 목사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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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지혜로운 사람인가? 생각해봅니다. 나름 공부도 열심히 하고, 지식의 축적에 힘썻던 사람입니다. 그럴듯한 박사 학위는 없지만 소소한 배움과 지식의 성장을 꾸준히 지향해왔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아직 상대적으로 젊은 인생이지만 이런 저런 사역의 경험들을 통해, 또 제 3자가 쓴 책들을 통한 간접경험을 통해 인생에 필요한 지혜들은 나름 갖추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면 나는 지혜로운 사람일까요?

    지혜는 지식의 축적과 많은 경험, 다양한 학위들을 통해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지식이 중요하고 가치있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지식의 충만함이 지혜를 증명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삶의 지혜가 충만하고, 통찰이 넘쳐나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우리는 지혜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세상은 이 말에 동의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성경은 이를 명확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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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로몬은 삶의 지혜의 첫번째 나눔에서 ‘강력범죄’를 멀리하라고 말합니다. “죄인들이 너를 꾀더라도 거기에 넘어가지 마라!” (10절) 이렇게 말하며 예를 드는데 이게 모두 ‘강력범죄’입니다. 도둑질, 폭력, 살인등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실 우리는 ‘강력범죄’하고는 좀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경범죄’정도는 짓고, ‘실수’ 정도는 하는데 ‘강력범죄’라 일컬어지는 도둑질, 폭력, 살인등에 쉽게 발을 담구지 않습니다. 누군들 이런 ‘강력범죄’에 쉽게 발을 담구겠습니까?! 그러니 솔로몬의 이 잠언은 우리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말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적용안되는 잠언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 범죄 관련 다큐를 보다가 알게된 사실이 있습니다. ‘강력범죄의’ 8할, 어쩌면 그 이상이 기존의 ‘범죄자’ 혹은 ‘악인’을 통해서 일어나는게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이웃이, 우리의 가족이, 우리의 친구가 이런 강력범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죄를 짓더라는 것입니다. 돈때문에, 치정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이익 때문에 때리고, 속이고, 죽이더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살면서 보고 경험했을 것입니다. ‘강력범죄’는 강력범죄자를 위해 따로 구분되어 있는 죄가 아닙니다. 누구나 쉽게, 자기도 모르고, 아차하는 순간에 현혹되어 발을 들이게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잠언의 서두부터 이런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범죄의 유혹 앞에서 자만해서는 안됩니다. 남의 일이라고, 나는 아니라고 안일해서도 안됩니다. 죄를 다스려야합니다. 죄의 유혹을 끊어내야합니다. 악한 충동과, 상황에 속으면 안됩니다. 죄의 유혹앞에서 자신하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할법하지 않은 죄일지라도 경계 또 경계해야합니다. 거부하고 끊어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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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혹 영화에서 악인을 잡기 위한 많은 종류의 ‘공조’를 봅니다. 그러면 공조의 최고 책임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일을 성공시키는데 있어서 필요한것은 무엇이든 다 가져다 써! 내가 모든 면에서 지원할테니까!”

    이는 마치 오늘 본문의 기록같습니다. “그분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모든 선한것으로 여러분을 온전케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21절)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수 있도록 모든 선한것으로 지원하시고, 부족한 우리를 온전케 하십니다. 그러고 보니까 모세는 출애굽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발현했고,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말씀의 지혜와, 기적의 능력을 받아 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시고, 사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사명에 순종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가능한자로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모든 선한 것으로 내 삶을 온전케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내 안에서 행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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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브리서를 읽는 편지의 수신자들도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핍박이기도 했고, 유혹이기도 했고, 거짓가르침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만 그런것은 아닙니다. 23절을 보니까 디모데도 이제 석방된것을 알게 됩니다.

    신앙의 길을 걷다가 불현듯 이런 생각을 할때가 있습니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 왜 나만 이렇게 고생해! 다들 행복하게 신앙생활 하는것 같은데 왜 나만 천로역정이야?!” 이런 생각에 점점 사로잡히면 건강한 믿음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불평과 불만, 세상을 향한 갈망과 욕심이 커질 뿐입니다.

    신앙인들은 각기 다르지만 나름 각자의 ‘천로역정’을 걷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 그 길을 걷기도 하셨습니다.

    물론 모두가 행복한 꽃길만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신앙의 길은 잘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않아야합니다. 오해하지도 말아야합니다. 나혼자 힘들다는 영적 피해망상에 빠져서도 안됩니다. 사탄의 이러한 거짓말에 속으면 안됩니다.

    서로 권면하고, 축복하고, 위로하고, 도전하면서 천로역정을 끝까지 함께 걸어내길 기도하고 도전합니다.

    은혜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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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위해 사는가 생각해봅니다. “이 땅위의 영원한 도시”를 위해 사는것은 아닙니다. 그랬다면 오늘같이 살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욱 화려하고, 그럴듯한 '이 땅의 도시'를 찾아 헤매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제 우리 성도님 한분을 심방하면서 애플회사에 들어가 점심 식사를 할 수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특별할것 없는 한 회사다’ 라는 자기최면(?)을 걸어보았지만 애플제품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써 자연스레 일어나는 기대와 설레임(?)의 감정을 자제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들뜨는 마음이 있었던것도 사실입니다 ㅋ) 건물 내부의 훌륭한 디자인, 깨끗한 환경, 무언가 특별하고, 있어(?)보이는 사람들, 그들에 목에 걸린 회사 아이디카드! 우리 성도님도 반짝 반짝 빛나 보이더라구요! ㅋ 어쩌면 세상이 보고 부러워할 만한 모든 외형들을 갖춘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성도님 얘기를 들어보면 회사 내부의 삶은 보이는것처럼 평화롭고, 아름답지만은 않으며, 자주 투쟁적이며, 때로는 목적의식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되는 반복적 일상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여타 ‘이 땅의 도시들’과 다를 것이 없는 현장인것이죠.

    애플 회사 밖에 있는 취준생들은 어쩌면 ‘애플’이라는 이땅에 발을 담그고 싶어서 굉장히 노력 중일수 있습니다. 그 땅에 자신만의 ‘영원한 도시’를 세우고 싶어하는 중일수 있습니다. 저같이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보아도 이 회사에 다니고 싶더라구요 ㅋ 그러나 그것이 ‘애플회사’가 되었던 더 위대하고 화려한 그 무언가가 되었든지간에, 이땅의 것들은 화려함의 이면에 본질을 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의 존재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제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있다면 어릴 적부터 믿음의 자리로 부르시고, 목회의 뜻을 두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목회외에 다른 꿈을 그래서 꿔본적이 딱히 없습니다. 자연스레 ‘이 땅위의 영원한 도시’가 아닌 ‘장차 올 도시를 갈망’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지금 “예수의 치욕을 짊어지고 진 밖으로 그분에게 나아갑니다!” (13절) 예수님이 보이신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분의 발 자취를 따르고 싶습니다!

    이 땅이 그럴듯해 보이는것은 사실입니다. 이 땅의 영광과 기쁨과 쾌락과 행복을 보면 여기에 영원한 도시 짓고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갈망은 ‘이 땅’이 아니라 ‘장차 올 도시’에 있어야합니다. 이것이 나의 갈망입니다.

    천국을 보며 오늘을 삽니다. 하나님과 다시 조우할 그 날을 꿈꾸며 오늘 하루를 주를 위해 삽니다. 주님을 선택합니다. 주님의 사명을 고민하고, 예수님이 하셨을법한 일을 하기로 결단합니다. 십자가를 피하고 이 땅의 영광을 쫓기보다는 십자가의 ‘치욕’을 선택하기로 결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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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6절을 묵상하는데 결국 또 같은 생각이 듭니다. “네 하나님을 마음과 생명과 뜻을 다해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교회 섬긴다고 모든것이 뒷전이 되고 있는거 아닌가 마음이 따끔합니다. 결국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이요,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를 세운답시고 하나님도 볼시간(?)이 없고, 이웃을 돌아보는 시간도 없다면 무언가 잘못된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듭니다.

    휘둘리면 본질을 상실하겠지요.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명분이 좋아도 원래의 목적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진심어린 예배, 골방의 예배, 개인의 예배, 예배의 뜨거움을 놓치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랑하고, 베풀고, 나누고, 들어주고, 공감하고, 도전하고, 가르치고, 위로하고, 권면하고, 함께하는 이웃사랑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외형적으로 성공한 교회와, 규모로 확장된 교회와 건물, 화려한 종교적 이벤트와 그럴듯한 결과물이기 이전에 주를 향한 진실된 찬양과 예배, 그리고 이웃을 향한 선행과 사랑의 실천 일것입니다.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 절대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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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히브리기자가 기록하는 마지막 장의 권고는 다양한 기록처럼 보이지만 결국 이웃을 사랑하라는 권고입니다.(1-4절) 그랫 5-10번까지의 십계명이 떠오르게도 합니다.

    누가 이웃일까요? 이웃에는 형제도 있고, 나그네도 있고, 어려움에 처한 타인도 있고, 아내와 남편도 있습니다.(1-4절) 물론 그 외에도 이웃은 많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기자는 이러한 대표적 이웃들을 나열하고 세부적인 행동의 가르침을 주면서 모든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라고 권면하고 있는것입니다.

    어쩌면 어려울것 전혀 없는거 같은 이 권면은 오늘날 큰 어려움을 직면하고있습니다. 저 어릴적만 해도 ‘이웃사촌’이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먼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마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처럼 정말로 음식을 하면 이웃집 가져다 줄 음식도 생각하며 했던 때가 있습니다. 저도 음식 심부름, 과일전달 심부름등 많이 했습니다. 또 많이 받았습니다. 부모님 안계시면 옆집 가서 얻어먹기도 했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부탁하기도 하고, 또 부탁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고 질문합니다. “나는 이웃이 필요없어요!”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서로 으르렁대고, 싸우고, 경계하기에 바쁩니다. 가까운 이웃에게도 그러고, 친척에게도 그러고, 심지어 가족에게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하물며 모르는 타인이나, 형식적 지인들에게는 더 말할것도 없습니다.

    ‘이웃사랑’은, 이런 의미에서, 어쩌면 인류사를 통틀어 지금이 가장 부정적인 도전을 받고 있는 시즌인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에 계셨던 부모님이 지금 미국에 방문하셔서 두달간 계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1년 있던 저와 아내보다 더 많은 동네 한국 친구분들을 만드셨습니다. 저희는 이웃을 살갑게 대하지 못했는데 부모님은 산책하시며 만나는 사람마다 살갑게 대해주셨는가 봅니다. 심지어 저희 부모님이 한 가정을 저에게 소개하시며 식사라도 함께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색해하는 저를 보며 그 이웃분들이 오히려 더 어색해하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미안한 일입니다.

    나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부모님 그리고 아내, 가족, 성도, 주변이웃들에게 각각의 필요를 따라 사랑하고 존중하고, 배려하고, 배풀고, 축복하는 건강한 이웃이 되야겠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건강한 신앙인이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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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어제 새로운 교회 장소를 알아보러 다녔습니다. 앞으로 언제까지 알아봐야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하신 바대로 좋은 장소가 생기길 기도하며 장소를 보다보니 마음이 기쁘고 설레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꼭 그런 감정만 있었던것은 아닙니다. 알아보는 장소의 예상 가격들을 알게될때마다 마음 한켠에 ‘돈’이라는 돌이 마음을 무겁게 만들곤 했습니다. 용기를 냈다가도 이내 불확실함에서 오는 두려움에 마음이 식어지는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매초마다 마음이 바뀌는것 같았습니다!

    “돈을 사랑하며 살지 말고 지금 갖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5절) 사실 저는 돈을 욕심 내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돈에 여전히 매여있습니다. 믿음으로 돈에 대한 걱정을 내려 놓습니다. 왜냐면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않겠고 또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다!”(5절) 말씀해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는 나를 돕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6절) 믿음의 선포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한결같으신 분입니다! 아멘 (8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열어가실 새로운 시즌을 꿈꾸며 담대히 나가야겠습니다. 동역자분들의 기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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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계의 개선!

    원래 율법을 매개로 서있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다가가지도 못했고, 하나님이 너무 두려웠습니다. 말그대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를 개선했습니다. 십자가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브릿지가 되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관계를 할때도 이런 경험을 합니다. 어떤 높은 지위의 사람,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재력가 일수있고, 정치인일수 있고, 연예인일수도 있습니다.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접점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다가서기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순간에 그들과 같이 만나 식사를 하게 되거나 교제하게 되는 경우들이 생깁니다. 바로 '다리'가 되어주는 주선자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만남의 매개체 가 되어준 그 사람에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전혀 없을 기회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로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는 그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피해야할 존재에 불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시내산’이 아닌 ‘시온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연결해주신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닮은 매개체가 되야겠습니다.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 가운데 있는 불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신앙을 떠난 배교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나올수 있도록, 시온산으로 나올수 있도록 복음의 통로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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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들거리는 것을 제거하다!’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에서 ‘흔들거리는 피조물’을 소멸 시키십니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28절)에, 흔들리지 않는 당신의 백성을 담으시기 원하십니다!

    무언가를 만들어 놓고 튼튼한지 보려면 어떻게 하나요? 일부러 흔들어 봅니다. 멀쩡해보이는것을 흔들면 흔들수록 약한 부분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떨어져버립니다. 그러면 만든 사람은 흐뭇해 합니다. 떨어져버린것을 버리고 보수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겪어야 진짜 튼튼한것만 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와 같이 때로는 우리를 흔들어 보십니다. 바람에 곡식을 나부껴서 알곡만 남기는것과 같습니다. 흔들리지 말아야합니다! 신앙도, 사명도 흔들리지 말아야합니다. 생각도 행동도 흔들리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나를 흔들려고 하는 것들을 제거해야겠습니다. 이가 흔들리고 아프면 제거합니다. 가만히 뒀다가 멀쩡한 이도 흔들립니다. 내 안에 신앙을 흔드는 생각들, 삶의 습관들, 습관적으로 일어나는 부정적 생각과 의심들을 소멸시켜야합니다. 복원되지 못하도록 완전히 태워 없애야겠습니다. 그게 영적 건강을 지키는 지혜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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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한팔, 약한 무릎, 절뚝거리는다리를 어떻게 치료할까요? “약하니까 그냥 쉬어!” 라고 하지 않습니다.

    재활훈련이라고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사고로 인해서, 혹은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서 팔, 무릎, 다리들이 약해져 있을때 다시 회복을 돕는 운동이 바로 재활 운동입니다.

    예를 들어 다리를 절뚝거리게 되었다면 의사들은 그들에게 마냥 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강력하게 걸으라고 도전합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할까요? 그들이 걷는 길을 마련해 줍니다. 걸을수 있도록 좋은 트레드밀을 준비하기도하고, 그 옆으로는 디딤봉을 준비해 놓습니다. 그가 걷는 ‘길’에는 다른 이물질이 하나도 없게 합니다. 이마져도 힘들면 하반신을 물에 담궈서라도 수중으로 걷게 하며 훈련합니다.

    그렇게 의사가 마련한 ‘곧은 길’을 걸으며 훈련을 하면 절뚝거리며 걷던 자가 점차 다리에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끝내 치유를 받게 됩니다. 다시 건강하게 걷게 되는 것입니다.

    피곤하고, 연약하고, 다쳤다고 안걸으면, 쉬면 회복되는게 아닙니다. 그건 쉼이 아닌 포기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사명의 길을 걷다가, 신앙의 길을 고집하다가 피곤하고, 지치고, 다치고, 위험하고, 곤비해질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냥 쉬어버리면, 포기해버리면 회복되는게 아닙니다. 영원히 주저 앉아 다시는 못걷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곧게 해주십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후배들이 우리의 길을 곧게 해줄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곧은 길을 만들어 줄것입니다. 그러므로 걸어야합니다. 절뚝거리며 걷다보면 다시 발목에 힘이 생기고, 종아리에 힘이생기고, 허벅지와 엉덩이에 힘이 생기고, 걷고, 뛰고, 점프하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치료 될것입니다.

    피곤하고, 지치고, 연약하고, 절뚝거리게 될때 주저 앉는 신앙이 아니라, 곧은 길을 걸어 회복하는 신앙인이 되겠습니다. 주저 앉히는 신앙인이 아니라, 절뚝거리는 신앙인을 위해 곧은 길을 예비해주는 신앙의 동역자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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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도에게 필요한것은 더불어 화평과 거룩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인생에 쓴뿌리와 분열의 영을 버려야합니다. 음행이나, 어리석음, 세속을 쫓는 욕망등을 버려야합니다. (14-16절)

    나열된 이 모든 죄들은 교회 밖에서만 일어나던 일이 아니요 교회 안에서 일어나던 일입니다. 믿는 자들 안에서도 여전히 분열과 더러움, 욕망과, 음행, 세속과 어리석음의 문제가 만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15절 말씀처럼 더럽혀지지 않도록 조심해야하고, 16절 말씀처럼 세속적이지 않도록 살펴야합니다. 자칫 에서처럼 “회개와 회복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비극을 경험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 본능에 휘둘리며 사는 삶을 조심해야겠습니다. 생각해보니까 에서는 ‘식욕’이라는 인간적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장자권을 파는 방종을 범했습니다. 먹고사는거에 집착하면 실수가 많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음행이라는 성욕의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쾌락에 집착하면 돌이킬수 없는 실수를 많이 하게 됩니다. 고전6:18절에 보면 음행을 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한다고 경고하고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의 이 경고를 엄중히 받아야합니다.

    또한 많은 이들이 권력욕,인정욕구를 이기지 못하고 분열과 싸움을 조장했습니다. ‘힘의 논리’에 집착하면 결국 더 큰 힘에 압살당하는 비극을 경험하게 됩니다. 힘의 논리 좋아하다가 힘의 논리에 당하는것이죠.

    본능에 충실한 인생 말고,

    권능에 충성을 다한 인생 되야겠습니다.

    권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 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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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리기 경주를 할때는 소매가 없는 가벼운 상의와, 수영복과도 같은 짧은 하의를 입고 뜁니다. 최대한 가볍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잘나보이고, 화려하게 보이게 하는 모든 악세사리도 다 빼고 나옵니다. 거추장스러울 뿐이기 때문입니다. 멋지게 보이게 하는 신발도 의미 없습니다. 속도를 늦출 뿐입니다. 요즘 그렇게 손에서 놓지 못하는, 아니 인간의 새로운 손(?)처럼 여겨지는 핸드폰도 락커에 고이 모셔두고 나갑니다. 집중력이 흐트러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경주를 제대로 하려면 이처럼 다 벗어버리고, 다 놓아버리고 인내함으로 철저히 준비하여 경주에 임해야합니다. 평소같으면 내려 놓고 싶지 않겠지요. 그것들이 나를 더 빛나게 만들어 주는것 같겠지요. 그러나 경주에서는 아닙니다! 다 내려 놓아야합니다!!

    이처럼 경주는 장난이 아닙니다. 이런 마음으로 경주에 임하지 않으면 메달은 둘째치고 제대로 뛰지도 못합니다. 내려 놓아야합니다. 그리고 인내함으로 철저히 준비해야합니다.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대하는 태도는 이와 같아야합니다. 내려 놓고, 버리고, 집중하고, 준비하고, 인내함으로 훈련해서 뛰어야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이 경주의 신성함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지켜, 경주를 완주하는 신앙인이 되길 기도합니다.

    당장 가서 거추장스러운데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것들부터 정리해야겠습니다! 몸과 정신과 마음과 영혼을 가볍게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인내로 훈련하여 영적 근육을 키워야겠습니다!! 이제 경주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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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잘 준비하고 경주에 참여해도 또 다른 어려움이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내외부의 요소들 때문에 경주가 어려워 질때가 있는것이죠. 길이 험하기도 하고, 신발이 터지기도 하고, 반칙하는 사람도 생기고, 경기에 난입하는 사람들도 생기고, 날씨가 험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때 경기를 멈추지 않고 계속 뛰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니 바로 옆에 서, 앞에서 뛰고 있는 멈추지 않는 경주자들입니다. 비가 많이 옵니다. 관중이 난입 합니다. 그래서 ‘이정도 되면 경기 취소인가?’ 하는생각이 드는데 멈출수가 없습니다. 앞에서, 옆에서, 뒤에서 계속 뛰는 것입니다. 계속 뛰고 있는 자를 보면 멈출수 없습니다.

    경주는 그래서 멈추지 않고 뛰는 사람을 봐야합니다. 완주한 사람을 봐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할때 예수님을 봐야합니다. 그분은 완주했고, 계속 뛰고 계십니다. ‘이쯤이면 멈춰야하는거 아니야?’ 싶은데 예수님은 죄인을 참으시면서 계속 뛰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지쳐 낙심하지 않고 계속 뛰어야합니다.

    인생의 경주에서 힘들거나, 멈추고 싶거나, 시험들거나, 여러가지 생각이 들때 이마 완주하신 예수님, 참고 뛰신 예수님, 멈추지 않으신 예수님을 보며 멈추지 않는 우리가 되길 도전합니다! 다 뛰는데 나만 멈추면 나만 바보(?)되는것입니다. 계속 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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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단을 견뎌 내십시오.” (7절)

    연단이 곧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유명한 아버지들이 있습니다. 과거 박세리 선수의 아버지가 자기 딸을 후원하고 훈련시키는 방법이 화제가 되기도 했고, 최근 몇년간은 ‘대한민국의 자랑'으로 여겨지는 손흥민 선수 아버지의 아들 훈련 방법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들은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는 아버지의 진심을 알기 때문에 아버지가 하는 혹독한 훈련과 가르침에 순종합니다. 그리고 그 연단을 견뎌낸 결과는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만한 전설적 선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연단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 연단을 이겨내면 비로소 우리는 거룩의 유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의로운 평화의 열매를 맺게 될것입니다. (11절)

    하늘 나라의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라갈수 있도록 아버지 하나님의 연단을 성실히 받고 훌륭한 영적 선수가 되야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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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32절) 이렇게 말해 놓구서는 히브리 기자는 쏟아내듯 ‘믿음의 인물’들과 내용을 쏟아냅니다. 훈화말씀하시는 ‘교장선생님’ 같습니다! "에~ 마지막으로!"

    이게 참 감사합니다. 할말이 없고, 소개할 인물이 없으면 오히려 그게 슬픕니다. 할말이 많고, 소개할 인물이 많아서 지면이 길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믿음의 사람’들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개척 교회 1년! 간혹 외부에 나가서 교회를 소개할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말이 길어집니다. 이 성도님도 설명해주고 싶고, 저 성도님도 설명해주고 싶습니다. 서두에 “개척교회라 사람도 많이 없고 그래서 할 얘기도 별로 없어요!” 라고 시작하지만 혼자 몇시간을 그렇게 자랑하듯 교회와 온 성도님에 대해서 칭찬을 쏟아냅니다.

    이럴수 있어서 참 감사합니다. 오늘 지면에 지분이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넘치는것처럼, 바우 교회안에도, 각자의 섬김과 강점이 다르지만, 누구 한분도 빠짐없이 열심과 성실, 겸손과 동역의 성도님들로 가득차서 참 감사합니다.

    본문 말씀을 인용해보자면, “제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마는 우리 성도님 모두가 참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처럼 열거할 '믿음의 사람'이 주변에 많아서 감사하고,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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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브리서 기자가 나열하는 이름 중에는 삼손, 입다, 다윗등도 나옵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이름인데 어찌보면 참 실수가 많은 인물들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사람”을 열거하는것이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위대한 사람들이 나열될거 같지만 ‘믿음의 조상’의 면면을 보면 딱히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의 조상’은 믿음의 사람들이지만 때로는 조그만 실수를 한 사람들, 충격적인 실수와 죄를 지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이라는 영적 타이틀은 너무 쉽게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자격이 없다고 너무 쉽게 무관심해져도 안됩니다. 물론 실수도 없고, 큰 죄도 없는 ‘믿음의 조상’이 되면 더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하고, 실수하고, 죄인이라고 해서 ‘믿음의 사람’으로 불리지 못하게 이미 결론 내려진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이라는 영광스러운 부르심 앞에 포기할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변하면 됩니다. 조금더 조심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살고, 말씀으로 매일의 삶을 점검하면 됩니다. 충분히 믿음의 사람 될수 있습니다. 다시 방향을 돌이켜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 받을 수 있습니다.

    실수를 변명으로, 연약함을 변명으로, 죄를 변명으로 하나님의 ‘믿음의 부르심’을 나몰라라 하는 일이 없기를 도전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나의 과거와 실수와 죄를 씻으시는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을 믿습니다. 예수 안에서 회개할때, 변할때, 우리도 믿음의 사람이 될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믿음의 사람이 되야합니다. 히브리서 11장 '믿음장'의 목적은 믿음의 인물과 사건을 소개하는데 있지 않고, "그러므로 당신도 믿음의 사람이 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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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의 사업이 전세계로 퍼져나가게 할것이다. 확장되고 부흥되게 할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단 초기 사업 시작 비용을 다 헌금으로 바치라!”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돈이 당신이 가진 전부이고, 이 돈 없으면 사업 시작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사업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돈을 헌금으로 다 내라고 하십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삭을 통해 네 자손이 바다의 모래같이, 하늘의 별과같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어 말씀하십니다. “그 아들을 내게 제물로 바치라!”

    이게 보통일이 아닙니다. 그냥 눈 딱 감고 할수있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꿈을 이룰수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아들의 생명이 걸린 일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려고 했습니다.

    그가 이 말도 안되는 일을 할수있었던 이유가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도 살리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9절)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개념과 상식, 법칙과 지식의 벽 마져도 뛰어넘습니다. ‘믿음’에는 불가능의 영역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는 해를 멈춰달라는 허무맹랑해 보이는 기도를 하고, 다윗은 돌 들고 골리앗을 향해 뛰어 나가고, 백부장은 그냥 말씀만 하셔도 낫는다고 믿는것입니다.

    결국 믿는 사람이 순종합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기적도 경험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나의 믿음이 ‘가능’의 영역에 머물고 있는것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나의 믿음이 ‘상식’의 영역에 머물고 있는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될만한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의 하나님을 믿는것 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약속을 성취하실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건강하고 단단한 믿음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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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지치는(?)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약간의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히브리 기자가 나열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기록이 너무 위대합니다. 단순하고 쉽지 않습니다. 거대한 일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야곱, 요셉, 특히 모세 등의 인생이 보여주는 믿음의 선택은 그 누구도 쉽게 하지 못할 선택이고, 행동입니다. 그러니 ‘나’라는 사람과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이 느껴지기도 하는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야곱, 요셉, 모세와 같이 위대한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보여주는 ‘믿음의 결정’이 오늘 나의 삶에서 보여줘야 하는 믿음과 쉽게 동기화 되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좀더 연관성 있게 묵상하고 적용하기 위해서 기록된 인물과 사건보다 본질적 내용에 조금더 집중해 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이들이 보여주는 믿음은 위대한 사건이 아닙니다. 이들이 보여주는 믿음의 공통점은 ‘위대함’에 있는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조금더 쉽게 얘기하면, 이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방향성,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마음을 선택했다는 것이죠. 믿음으로 위대한 일을 선택한게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을 선택한것입니다. 그게 결과적으로 엄청나게 큰 일이 되기도 하고, 엄청난 역사와 순종으로 드러나기도 했던것입니다. 그러나 애초에 본질적으로 이들이 한것은 ‘위대한 사건’을 선택한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선택한것 뿐입니다.

    믿는 자는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매사에 하나님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삶의 모든 걸음과 선택에서 하나님의 뜻, 방향, 생각, 마음, 명령, 의지, 가치, 기준, 선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 안에서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나고, 소소하거나 때로는 위대한 일도 일어나게 되는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로,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을 선택하기로 결단합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인생의 고난이나, 역경, 어려움, 난관을 의미할지라도 하나님을 선택하겠습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하나님의 크고 작은 일을 성취하는 도구요 통로가 되고 싶습니다. 위대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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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심을 받았을때 순종해 장차 유업으로 받을 곳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 (8절)

    사실 제가 딱 이런 마음입니다. 부르심을 받아서 움직였는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도시’를 기대했는데 ‘장막’을 마주한것같은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거주지'인줄 알았는데 ‘이방인’인가? 하는 생각이 들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런 땅에서 ‘임신할수 있는 능력’을 얻은 사라와 함께 ‘바닷가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수많은 자손’을 얻는 시작을 그려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믿음을 따라 약속의 땅에서 인내했고, 약속의 성취의 첫걸음을 잘 완성했던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아 순종해서 마주한 유업은 언제나 완벽하게 준비된 땅은 아닙니다. 수많은 선교사들이, 목사들이, 성도들이 일생을 살면서 경험합니다. 그래서 ‘약속’을 붙드는 믿음이 필요하고, 아직 성취되지 않았을때 이미 성취됬다고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1절)

    저에게 지금 필요한것도 다른게 아니라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해도, 도시가 아니고 장막이여도, 거주가 아닌 이방인이여도, 완성이 아닌 과정이여도 견딜수 있습니다!

    제게 필요한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굳건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승리할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결국 누리게 될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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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땅에서의 삶은 결국 “외국 사람이며, 나그네’입니다. (13절)

    언젠가는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합니다. 집이 가장 좋습니다. 집으로 돌아갈때 가장 행복합니다. 우리가 쉬려고 여행을 가도 집에 돌아오면 “이제 좀 쉬자!” 라고 말합니다. 여행의 쉼이, 집에서의 쉼과는 비교되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이 땅'을 나의 영원히 거할곳으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이 땅에 집착하거나, 이 땅에 나의 모든 소망을 둬서는 안됩니다.

    제가 캐나다 유학부터, 다시 한국, 그리고 미국, 그리고 미국 내에서 이주를 해봐서 압니다. 캐나다 갈때 분명히 이민 가방 두개 가지고 갔는데, 캐나다에서 몇년후 이사할때 1톤트럭을 빌려 이사 해야했습니다. 미국 처음 갈때도 가족이니까 이민 가방 4개 가지고 갔는데, 뉴저지에서 오스틴 이사올때 1톤트럭으로 택도 없어서 짐을 얼마나 버렸는지 모릅니다. 여기가 ‘최종 거주지’다 생각하고 짐을 만들기 시작하면 옮길때 너무 힘듭니다. 너무 힘들어서 심지어 ‘가지 말까?’ 하는 생각까지 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쌓아두고, 나의 최종의 거주지로 여기면 하나님의 부르심이 달갑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대한 집착, 욕심, 착각들을 내려 놓아야합니다. ‘땅’을 위해 살것이 아니라, ‘천국’을 위해 살아야할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해서 맡겨진 일을 열심히 감당하고, 시간이 되었을때 기쁘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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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세계’는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창조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수많은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다. 문자적 창조론을 믿기도하고, 천문학을 중심으로한 창조론을 믿기도하고, 진화적 창조론을 믿기도하고, 아예 창조를 부정하고 진화론을 믿기도 합니다.

    이렇게 창조론이 교회 안팎에서 세분화 되는 이유는 우리의 지식과 과학으로 정확하게 그 시작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상당히 우주의 발현과 인류의 성장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발현’의 부분은 언제나 ‘미세한 확률’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창조의 증거’ 라기 보다는 ‘믿음의 근거’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이를 명확하게 합니다. “창조론은 증거에 기인하는것이 아닌 믿음에 기인하는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서술하여 주신 ‘창조론’을 믿습니다. 물론 그 안에서 세부를 설명하고 이해하는데 나름의 다름이 있을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창조는 믿음의 영역’이다 라는 대전제를 부인할수 없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창조의 신비를 다 설명하고 이해할수 없습니다. 유물의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는데 있어서 인류의 과학은 근처도(?)가지 못했음을 겸허히 인정해야합니다.

    믿음을 논하면서 창조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 못하면 그 이후에 따라오는 모든 것을 믿을 근거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무한한 능력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자신 혼자의 영역에 계시는 것이듯, 창조의 영역도 하나님의 능력의 영역임을 인정하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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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인물이 나열되는 책으로 유명합니다. 한 절, 한절, 한 인물, 한 인물에 머물러서 설명해도 각각 한편의 설교가 나올 정도입니다. 그래서 한분 한분을 깊이 살펴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인물과 사건에 집중하기 보다는 한 문장에 집중해 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있다는 착각을 하곤 합니다. 무언가를 해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잘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바리세인들이 그토록 ‘가시적 신앙생활’에 목을 맺던거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믿음의 삶’으로 인해서 이미 기뻐하십니다.

    요즘 교회를 통해서 이런 저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캠퍼스를 가서도 큐티나눔과 예배를 세워보고 있고, 교회에서 지역사회를 섬기는 프로그램도 진행해봅니다. 그런데 이런것들을 진행하면서 제 안에 이런 질문을 계속 하게 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나의 모든 이 섬김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가? 나는 잘하고 있는가?’

    사실 수치적으로 보면 캠퍼스의 사역이든, 지역사회를 섬기는 사역이든 그다지 ‘성공적’(?)이 아닌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만약 하나님이 '일'로 기뻐하시는 분이라면, 결과로 기뻐하시는 분이시라면 저는 망(?)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위로인지 모르겠지만) 일의 가짓수와 상관없이, 일의 결과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일하고 있는 저를 하나님은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걸음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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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법소년소녀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죄를 짓고 거기에 합당한 형벌을 받지 않습니다. 일종의 은혜를 누립니다. 사회가 정한 은혜입니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촉법소년법’에 보호를 받는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에 있는줄 알고 극악한 죄를 지었다가 법정 판결중에 예외의 형벌을 받게 되기도 합니다. 어느덧 자신이 촉법 나이를 지나 형사 처벌을 받게 되는 일도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때 받는 형벌의 수준은 과거 그가 ‘촉법소년법’에서 받던 형벌과는 비교할수 없는 수준의 형벌이 됩니다.

    은혜의 때에 정신을 차려야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는 우리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구분하라고 말합니다.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때 만약에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예수의 피를 부정하게 여기고, 성령을 모독한다면 (29절) 그 형벌이 얼마나 심해질까요?

    죄를 지으면서 자꾸 은혜를 들먹이는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죄를 지으며 '촉법소년법' 운운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밉게 보이던가요?) 예수님 우리가 죄를 더욱 짓게 하기 위해서, 더욱 편하게 죄짓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도 하지만, 십자가의 예수님은 우리를 언젠가 완전하게 심판하시기도 하실 것입니다.

    앞뒤좌우를 분간 못하고 미쳐(?)날뛰는 ‘촉법소년’같이 살지 말아야겠습니다.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최후 형벌은 소름끼치도록 강력하고 무섭습니다! 죄에 대한 경각을 놓치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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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브리서 기자는 권고합니다. “과거 당신들이 비방과 환난가운데도 믿음을 잘 지켜낸것처럼, 기쁨으로 감당한것처럼 (33-34절) 당신의 담대함을 버리지 마세요. 인내를 버리지 마세요!”

    당시에도 배교는 문제였습니다. 힘드니까 참다가 결국은 예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힘들어서도 버리고, 현혹되서도 버립니다.

    오늘날도 배교는 끊임 없습니다. 힘들어서, 어려워서, 답답해서 버리기도 하지만, 쾌락을 찾아, 유흥을 찾아,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찾아 배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의인이 될수 없고, 믿음으로 의인이 되지 않는다면 구원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이 사람도 떠나고, 이 지역도 떠나고, 이 회사도 떠나고, 이 지위도 떠날수 있는데요. 다 떠날수 있어도, 다 등돌릴수 있어도 예수님께 등돌려서는 안됩니다. 믿음을 저버려서는 안됩니다. 다른것과는 다르게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배신은 곧 영원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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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17절)

    더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그냥 죄짓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다시 기억하지 않아 버리는 것입니다. 죄인들 자꾸 봐야 기분만 나쁩니다. 분노만 일어납니다. 가슴만 답답합니다. 안좋은 기억들만 떠오릅니다. 그러니 그들의 죄를 잊을 것이 아니라 그냥 그들 자체를 잊어버리면 쉽습니다. 다시 볼일없고, 포기하면 그만 입니다.

    경험해 봐서 알겠지만 죄인, 가해자, 원수들의 행태를 용서해도 잊어버리는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안보는것을 선택하는 경우들이 더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회개하는 죄를 모두 용서하시고 완전히 잊어주시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크기이고, 사랑의 크기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녀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를 믿는 자녀를 모른척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의 죄를 모른다 해주십니다.

    크신 은혜, 크신 사랑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포기하지 않아주셔서 감사하고, 완전한 심판으로 멸망시키지 않으셔서 감사하고, 더 나가 독생자를 주셔서 감사하고, 그분을 통해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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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 자들에게 명확한 to do list가 기록됩니다.

    죄악된 양심을 깨끗이 씻어야합니다.

    확신에 찬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야합니다.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야합니다.

    사랑과 선한 일로 서로를 돌아봅시다.

    스스로 모이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고 권면합시다.

    숨겨진 내용도 없고, 해석을 추가할 필요도 없이 있는 그대로 명확한 명령입니다. 거룩한 자로 살겠습니다. 의심없이 살겠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대하겠습니다. 사랑과 선행으로 주변을 돌보겠습니다. 예배와 모이는일에 힘쓰겠습니다. 거룩한 권면과 도전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요즘 개인적으로 to do list가 많습니다. 교회 일이 켜켜이 쌓이다 보니 체력적 소비가 더욱 중첩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힘주시고, 동역자도 보내주실줄 믿습니다. 마땅히 감당해야할 일을 감당케 하실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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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마다 끊이지 않고 똑같이 제사를 드릴때마다(1절)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어느순간익숙해졌을까요? 진심이 아닌 형식으로 끝나진 않았을까요?

    ‘똑같이 반복되는 것’에 항상 진심을 담는것이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익숙해지면 진심이 결여되는 경우들이 생깁니다. 어릴적 생일 파티가 그렇게 기대되고 설레는데 지금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나의 생일 뿐만 아니라, 남의 생일을 대할때도 그렇습니다. 반복되면 아무래도 무뎌지는 부분이 있는것이죠.

    이스라엘 백성은 속죄제나 그 밖에 제사를 반복해서 드립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반복되는 제사에 언제나 진심을 담아야합니다. 그런데 매번 동일한 제사가 반복되니 많은 이들이 제사 안에 진심을 담지 못했을 것입니다. 율법이 두려워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게 된것입니다.

    오늘날의 예배도 같은 흐름에 있습니다. 매번 같은 시간, 같은 방법, 같은 형식의 예배를 똑같은 사람들이 모여 드립니다. 기도도 비슷하고, 찬송도 비슷하고, 때로는 메세지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이 ‘비슷한’ 때로는 ‘똑같은’ 예배 속에 진심을 담고 있는걸까요? 매번 진심일수는 없는걸까요?

    매번 진심이여야합니다. 매번 ‘단한번의 제사’ 같은 마음으로 드려야합니다. 다시 없을 예배처럼 드리면 됩니다. 다시 없을 제사처럼 드리면 됩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인것처럼 드려야합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단한번의 제사 같은 마음으로 드리면 됩니다. 진심이 담겨야 의미가 퇴색되지 않습니다. 진심이 담겨야 제사고, 진심이 담겨야 예배고, 진심이 담겨야 회개입니다.

    ‘매번’이 진심을 증명하는게 아니라, ‘전심’이 진심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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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반복되는 제사로도 우리는 결코 온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1절)

    매일 아침 저녁으로 씻습니다. 집안에 그 누구보다 씻는 시간이 깁니다. 열심히 씻습니다. 제가 세수하는거 보고 아내가 “피부 다 벗겨지겠다!” 라고 말할 정도 입니다. 그런데 씻고 나와도 더럽습니다. 때로는 샤워에 쓴 물이 생각보다 더럽습니다. 그래서 씻어도 계속 녹물 냄새가 나곤 합니다. 언젠가는 다 씻고 수건으로 몸을 닦았는데 걸레냄새가 나기도 합니다. 수건이 더러웠던 것입니다. 물도 깨끗하고 수건도 깨끗하지만 수건으로 닦고 옷을 입는 과정중에 이미 땀이 흘러 다시 몸이 더러워지고 있는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또 씻고, 또 씻습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샤워로도 우리는 결코 온전하게 깨끗해 질수 없습니다. 마치 반복되는 제사로 결코 온전하게 되지 못하는것과 같습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노력으로 되는것도 아니고, 성실로 되는것도 아니고, 반복한다고 되는것도 아니고, 안 더러워지려고 숨어 든다고 되는것도 아닙니다. 아무리해도 안됩니다. 결코 온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깨끗함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요 선물입니다. 나의 깨끗함은 나의 노력이 아니요 예수님의 수고하심 입니다. 다른 종교는 온전해 지기 위해서 심지어 다시 태어나고, 또 태어난다고 해요! 그렇게라도 반복하면 온전해 진다고 믿는것이죠. 아무리 해도 안됩니다. 결코 온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깨끗함은 오직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요 선물입니다. 이게 모든 인생이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예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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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께서는 번제와 속죄제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6절) 왜요? 왜 제사를 안기뻐하셨을까요? 번제와 속죄제를 드린다고 해서 죄가 영원히 씻김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는 임시방편입니다. 그러니 당장에 눈앞에 문제는 해결하는것 같아도 본질의 문제를 해결하는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순간을 모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번제와 속죄제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뭔가 더욱 본질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 인생에 필요한 것은 임기응변이 아닌, 임시방편이 아닌 보다 본질적인 해결 방법입니다. 지금 당장 위기를 모면해봤자 그 위기는 다시 돌아 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해결해야합니다.

    내 인생에 있는 풀수 없는 공허의 문제, 죄의 문제, 목적의 문제, 구원의 문제는 본질적인 해결책을 필요로 합니다. 지금 당장 임시방편으로 위기를 모면한다고 해서 기쁠것이 아닙니다.

    40대가 되면서 20,30대는 몰랐던 인생에 또다른 무게를 경험합니다. 이쯤되니 50-60이 넘어가면 또 다른 차원의 무게를 경험하게 될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예상할수 있습니다. 그러니 보다 본질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느낍니다. 오늘하루, 다가오는 10년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인생의 본질적 공허와 목적의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는 생각이 더욱 강렬해지는 것입니다.

    제가 가진 답은 신앙입니다.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길이며 사명입니다. 계속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의 태도로 당장 앞에 놓인 챗바퀴살 하나 넘는것에 집중하며 사는 소비되는 인생을 멈춰야합니다. 그 바큇살을 넘어봐야 다음 바큇살이 순식간에 다가올것입니다. 그럼 평생 반복하는 삶, 다람쥐 쳇바퀴 삶 사는것입니다. 쳇바퀴 잘 굴려봐야 구속된 삶입니다!

    거기서 나와야죠!!! 예수님을 믿어야 영원한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사명을 향해 뛰어다니기 시작합니다. 인생의 캔버스를 자유롭게 뛰어다니게 됩니다.

    임기응변의 인생이 아니라, 임시방편의 인생이 아니라, 본질을 돌파하는 인생이 되야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본질로 돌파하는 삶이 되야합니다.

    교회도, 인생도 예수님과 함께 본질로 돌파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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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우리나라 역사에서 단죄 시스템을 보다보면, 가장 치욕적이고, 극단적인 단죄가 바로 무덤이라도 다시 파혜쳐 그 시체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일명 ‘부관참시’입니다. 그 사람의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 죄의 값으로 죽임 당했으나,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시 그 무덤을 열어 시체를 꺼내 수치와 모욕을 줌을 통해서 단죄 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나라의 법 판결 시스템을 보다보면 극악무도한 죄인에게 징역 200-300년이 선언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인생이 길어야 100년인데 그정도로는 이 사람의 죄값을 치를 수 없다고 판단하고 2-300년이라는 긴 시간을 단죄의 시간으로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죄를 ‘율법의 단죄 시스템’으로 해결하려고 했다면 오늘 말씀의 기록처럼 “세상이 창조된 이후 여러번 고난을 당하셔야 했을 것입니다.” (26절) 앞선 예화로 비유하자면 예수님의 무덤이 수없이 파헤쳐 져야하고, 수백넘도 넘는 시간을 옥살이를 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번으로 영원한 속죄를 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 역사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요, 부활입니다. 은혜이면서 동시의 구원의 절대적 능력입니다.

    ‘극악과 반복’이라는 죄의 굴레에 갇힌 자격없는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신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주께서 단번에 구원을 완성하셨으니, 나도 단번에 죄를 끊어버려야겠다! 다시 한번 단호하게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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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일이며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27절)

    사람이 죽는것은 정해져있습니다. 그거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 '죽음'을 믿는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확실한 '죽음' 뒤에 한가지를 이어서 말합니다.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만 확실한게 아닙니다. 심판도 확실합니다. 그 어떤 이도 죽음을 부인할수 없듯이, 그 이후에 있는 심판도 부인할수 없습니다. 죽음이 무조건, 확실히, 예외 없이 있는것처럼, 심판도 무조건, 확실히, 예외없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심판’을 어떻게 통과할수 있는가? 당연히 고민을 해야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그 답을 제시합니다. 예수그리스도 입니다. 그분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거룩을 사모하고 실천하는 삶입니다.

    '죽음'을 묵상하기 때문에 삶이 바뀌는게 아닙니다. 그 이후에 있을 '심판' 때문에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심판을 믿으세요. 잊지 마세요. 삶이 몰라보게 달라질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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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년만에 뉴저지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식을 참석하다 보니 그동안 못뵈었던 분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너무 반가워해주셨습니다. 결혼식 참석차 들렸을 뿐인데 얼마나 기뻐하고 환대해주셨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도 참 많이들 해주셨습니다. "다음에 또 오세요! 또봐요!" 참 감사합니다. 너무 행복합니다.

    저 같은 사람이 다시 방문해줬다고 해서 이렇게 기뻐하고 환대하는데, 꼭 다시 보자고, 꼭 다시 오라고 말씀해주시는데, 우리의 예수님의 재림은 어떨까 상상해봅니다.

    예수님 다시 오신다고 하니까 설레고, 기쁘고, 기대되고, 준비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확실한것은 에수님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28절) 예수님 다시 오시는 그날이 가장 축복된 날입니다. 행복한 날입니다. 완벽한 날입니다. 재림 예수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삶이 되야합니다. 진심, 그분이 다시 오시는 날이 믿음의 모든 자녀들에게 다시 없을 가장 기쁜 날이 될것입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내일일지, 1000년후일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도래할 '심판의 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설레이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주를 섬기겠습니다! 마라나타 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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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좋고, 더 완전한것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명품을 찾고, 명품 위에 명품을 찾습니다. 어떻게 보면 열정입니다. 이렇게까지 더 좋은것을 얻고 싶은것입니다. 완전한 가치에 대한 욕심이죠!

    에수님의 구원이 이와 같습니다. 세상이 논하는 다른 구원과 격이 다릅니다. 세상이 지어낸 구원의 이야기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위대함을 쫓지 않습니다. 세상의 더 좋은 가치는 그렇게 쫓으면서 완벽한 구원이 되시는 예수그리스를 추구하지 않는것이죠. '완성된 구원'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입니다. 인간적 속죄도 아니고, 율법주의도 아닙니다. 타종교도 아니고, 다른 신도 아닙니다. 그 어떠한 '구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구원'과는 비교될수 없습니다. 참되고 영원한 구원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보혈, 그리고 부활로 완성되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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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의 피가 더욱 우리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겠습니까?" (14절)

    저는 구원은 곧 섬김으로 이어진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것'이란 허락된 이땅에서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듯 구원은 섬김으로 이어져야합니다. 모습이야 다양하겠지요. 저에게 맡겨진 섬김은 '목사'입니다. 목양과 성경교사가 주된 섬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깁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치열한 섬김입니다. 즐겁고 행복하지만, 쉽지 않을때도 많습니다. 그래도 구원 받았으니 이 섬김을 놓을 수 없습니다. 영적 책임을 모른척하며 방임자로 살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에게 맡긴 하나님의 섬김을 실천해아 할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 UT Austin campus에서 처음으로 개강예배를 인도하면서 많은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한번 절실히 느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캠퍼스로 들어갔으나 인간적으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체력이나, 시간이나, 사역이나, 모든 면에서 쏟아부어야 하는 섬김입니다. 그래도 더욱 기쁨과 감사로 섬기겠습니다. 열심으로 섬기겠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섬기겠습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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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비행기 안에 있습니다. 비행기는 들어올수 있었는데 조종실로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조종사 자격증이 없습니다. 이 비행기를 조종하도록 허가를 받지 않았습니다. 비행기에 들어오는건 허락됬는데 조종실에 들어가는건 자격미달(?) 입니다. 오직 파일럿만 들어갈수 있습니다.

    비행기의 ’지성소‘(?) 마져도 이렇게 아무나 못들어갑니다.

    오늘 본문은 성소와 지성소를 보여줍니다. 무엇이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기준이 되었나 생각해봅니다. 거룩의 수준(?)입니다. 성소 안에서도 화제, 번제, 속죄제, 속건제 등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지성소는 일년에 한번 대제사장만 들어가고 자칫 죽어 나올수 있습니다. 말그대로 지성소는 ‘Holy of Holies’이기 때문입니다.

    명확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전한 거룩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의 ‘거룩의 수준’으로 하나님을 마주하러 갈수 없습니다. 오직 피흘림, 오직 하나님께서 허락하실때, 그리고 완벽한 거룩을 이루었을때만 가능합니다. 그러니 지성소는 1년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때만 속죄에 속죄를 거쳐 들어가게 되는것입니다.

    거룩에는 수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완성하시는 거룩의 수준이 있습니다. 우리를 ‘의인’으로 불러주시는 거룩의 수준이 있습니다. 우리의 거룩은 바로 이 지점이 목표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칭의 받았기 때문에 ‘성화’의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정도로 덧붙일수 있습니다.

    ‘대략적 거룩’은 우리의 지향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실때 ‘대락적 의인’으로 칭하신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적 거룩’은 우리의 목표점이 아닙니다. 불빛으로 비유하자면 우리의 목적은 ‘촛불’이 되는게 아니라 ‘해’가 되는것입니다.

    ‘거룩의 수준’이라는 묵상이 유독 가슴을 후벼팝니다. 더욱 거룩한 인생! 더욱 정갈한 인생! 더욱 경건한 인생! 의로움에 있어서 쉽게 만족하지 않는 인생이 되야겠습니다. 물론 답은 정해져있습니다. 나의 노력으로는 ‘지성소’를 들어갈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피흘림과, 은혜, 칭의가 아니고서는 절대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지성소 장막을 열어주신 예수님 앞에서 ‘거룩의 수준’을 한껏 고양 시켜야겠습니다.

    2

    하나님께서 지성소에 담아두신 것은 ‘언약궤’입니다. 그 안에는 만나, 싹난 지팡이, 십계명돌판이 있습니다. (4절)

    가장 귀한곳,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그곳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공급(만나), 하나님의 부활과 구원(싹난지팡이),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인생의 길과 기준이(십계명)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은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막대기’ 같은 우리 인생을 은혜로 선택하시고, 다시 살아나게 하십니다. 부활의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은 공급하십니다. 매일의 삶에 ‘만나’를 공급하십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삶의 기준, 가치, 길이 되어주십니다.

    그리고 결국은 이 모든 언약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지성소 문을 여시고 믿는 모두가 이 ‘언약궤’의 약속을 온전히 누리게 하시죠.

    오늘 내가 사는것, 오늘 내가 먹는것, 오늘 내가 바른 인생길에 서있는것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실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잘먹고, 바른 언행으로 살아야겠습니다! 단순하다 할수있지만 매일 이렇게 살아야겠습니다! 피곤하고 무리되는 일정중에 뉴저지로 향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간동안 주시는 음식도 잘 먹고, 많은 사랑과 축복을 나누고 돌아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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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브리인들에게 예수에 대한 변증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모세, 율법, 대제사장, 예언자 등 설명해야할 개념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모세보다 위대한지, 어떻게 율법을 완성하시는지, 어떻게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는지, 어떻게 가장 위대한, 마지막 예언자인지 설명이 되야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보고 있는 히브리서 입니다.

    사실 히브리인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것이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유대인들이 부정하거나, 바꾸거나, 지워야할 개념이 애초에 이방인들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입니다!” 그러면 이방인은 이 사실만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그럼 율법은 어떻게 되는거예요? 그럼 유대인을 선택하셨다는 하나님의 선택은 어떻게 되는거예요? 하나님은 한분이시라는데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건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거예요?” 라는 질문이 나올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비워야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빈잔에 물이 차는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울때, 예수님을 배울때 우리의 자세가 이래야합니다. 비워야합니다. 내것을 가득채우고, 내 생각을 가득 채우고 배울수가 없습니다. 내 경험, 내 지식, 내 생각, 세상의 지식으로 가득차서 판단하면서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나의 삶에 부어주시는 메세지를 들을때도 원칙은 같습니다. 비워야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원래 어설프게 아는 사람들이 잘 안듣습니다. 병원가서 맨날 구글, 유튭, 네이버지식 얘기합니다. 의사 10년 넘는 공부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리는것입니다.

    비워야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으려면 비워야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방향을 따르려면 나를 비워야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을 부인하고 네 십자가를 지라!”

    주님을 온전히 받아들이는것은, 믿는것은 나를 비우는 것입니다.

    2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다.” (10절)

    소속감은 곧 정체성입니다. 유니폼을 괜히 입히는게 아닙니다. 조금은 특별한(?) 케이스 이지만 한국 해병대를 보세요. ‘해병’이라는 소속감은 가장 우선적 정체성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였는데 물어보는게 나이, 지위, 권력, 재정이 아닙니다. “너 몇기야!” 해병 기수입니다. 그러면 나이가 많아도, 세상 지위가 높아도, 권력이 높아도, 재정이 많아도 순간 서열이(?)정리됩니다. 소속감은 정체성이 되고, 정체성은 우리의 삶의 방식이 됩니다. 태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소속감이고, 이것이 정체성입니다. 그냥 정체성이 아니라 최우선적 정체성입니다. 세상의 지위와 소속을 넘어 ‘크리스천’으로써의 삶의 방식과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가? 자문과 점검이 필요합니다.

    엊그제 우리 성도님 헤어샵(?)을 가서 머리를 자르는데 옆에 다른 헤어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님께서 머리를 한참 자르시다가 “우리 목사님” 이러면서 말을 꺼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그 다른 헤어선생님이, “아~ 목사님이세요!” 라고 말씀하시며 말을 이어가셨습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더욱 조심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원래 조심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지만(ㅋ) 그래도 나의 정체성이 발각(?)된 이상 더욱 온전한 모습으로 보여지고 싶었습니다. 나 자신 때문이 아닌 기독교, 크리스천, 예수님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어디서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써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나의 최우선의 정체성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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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도 젊지만 ‘젊은세대’에대한 고민이 많습니다. 아마 UTAustin 대학 캠퍼스를 자주 밟고 있어서 그런거 같습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낡고 오래된 것은 곧 사라지게 됩니다!” (13절)

    저 때의 신앙과 오늘날 2005년 대학생의 신앙이 다릅니다. 교회에 물건을 ‘성물’이라 하여 만지지도 못하던 시절, 교회에는 정장같은 옷을 미리 챙겨 입고가야했던 시절, 헌금은 새돈으로 뽑아 성경에 넣어두었다가 냈어야하는 시절, 주일은 빠지면 죽는줄 알고 아파도 기어서라도 교회를 가야했던 시절, 예배때 주여 삼창은 물론이거니와 금식이건, 뭐건 가리지 않아야했던 시절, 그러나 ‘요즘세대’는 조금은(?)다릅니다.

    다름에 대한 지적과 정죄는 많은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이라는 절대 바꿀수 없는 것이라 여겨졌던 가치 앞에서 예수님을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변화를 인정해야했습니다.

    한때 온누리교회 슬로건이 ‘예수님 빼고 다 바꿔도 된다!” 였습니다. 교회 개척 뿐만 아니라 청년 사역을 다시 시작하면서 ‘변화가 가능한 낡고 오래된 것’을 분별하고 내려 놓을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말그대로 예수님 빼고 다 바꿀수있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물론 다 내려놓을수 없고 ,무조건 다 양보하고 바꾸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진심으로 낡고 오래되서 사라지게 둬야하는게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젊은 세대와 함께 영적 호흡을 할때 이러한 분별과 지혜를 통해 젊은 세대가 주님께로 나오는데 ‘highway’가 되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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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25절)

    예수께서 자신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구원의 길 되셨도다

    영원하신 제사장 예수

    하나님께 나아 오는자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구원의 길 되셨도다

    구원의 길 되셨도다

    그분은 거룩하고 순결하고 흠이없고

    죄인들과 구별되시며

    하늘보다 높은곳으로 오르신 분

    (27절) 그분은 거룩하고 순결하고 흠이없고

    죄인들과 구별되시며

    하늘보다 높은곳으로 오르신 분

    주께서 자신을 드려 단번에 이 일을 이루셨도다

    주께서 자신을 드려 단번에 이 일을 이루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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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라서, 선을 행한다고 해서, 구원을 보장 받을 수 없습니다!

    율법이나 직분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런것이라면 예수님은 레위 지파에서 오셔야하고, 그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키라고 얘기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레위지파가 아닙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완성하신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종교인’이 구원을 만들어 낼수 없는 이유입니다. 특정 지위가 구원을 만들어 낼수 없는 이유입니다. ‘율법적 접근’이 구원을 보장할수 없는 이유입니다. 성경은 그런 구원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목숨이 경각에 걸린 사건 사고의 현장에서 구원을 만들어 내는 것은 나의 노력이 아닐때가 많습니다. 나의 지위가 아닐때가 많습니다. 사고 현장으로 구조대원이 들어갑니다. 그들의 판단과, 그들의 도움의 손길로 소망없는 자들이 구원 받아 나옵니다. 현장에서 “여기 누구없나요!?” 라고 묻는 구조대의 목소리를 듣고 반응하고, 그들이 하라는대로 하는 사람이 구조를 받는 것입니다.

    다짜고짜 “나 사장이야! 국회의원이야!” 라고 해서 무조건 구원받는것도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이 얼마나 공평하지 않고, 공의롭지 않은 처사인가요?”)

    하나님의 구원은 정말이지 지위, 출신, 직분도 아니고 율법적 행위도 아닙니다. 나의 잘남이 아닙니다. 그분의 은혜이며, 그분의 능력입니다. 듣고, 믿고, 순종하는 자가 구원받아 나옵니다! 구원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공평한 사랑입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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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사장직이 변하면 율법도 반드시 변하게 됩니다” (12절)

    여기서 합법이 다른곳에서는 불법이고, 여기서 불법이 다른 곳에서는 합법인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구원의 근거가 된다고 한다면 항상 이 문제가 걸립니다. 제사장이 변하면 율법도 반드시 변하기 때문입니다. (12절)

    시간에 따라, 지역에 따라, 사람에 따라 율법은 변합니다. 인간이 만든 기준은 변하는것입니다. 오늘날은 이미 ‘포스트모던’의 시대로 들어선지 오래입니다. 그러니 기준이 더욱 모호해졌습니다. 모든 기준이 상대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누구나 구원을 논할수 있습니다. “나는 나름의 기준 안에서 선행을 했습니다!” 라고 선언할수 있는 시대가 되어버린것이죠. 그러므로 선행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 입니다.

    생각해보니까 그래서 권력자들은 자꾸 자신의 편의를 따라 법을 바꾸려고 합니다. 기준을 바꾸지 않으면 죄가 되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기준을 바꿔버려서 자신을 구원/보호 하려고 하는것이죠. 역사는 그렇게 법위에 있던 독재자들을 많이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데로 법이되고, 불법이 되는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변화무쌍한 기준을 쫓아 구원을 논한다?! 어불성설입니다!

    선행의 기준은 예수님 한분 입니다. 의의 기준은 예수님 한분이십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의인이 된것이 아니라, 그분의 희생으로 의인이라 칭함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기위해 선행의 삶을 사는게 아니라, 구원을 받았으니 감사함으로 선행의 삶을 사는것입니다.

    예수의 보혈로 구원받았으니 오늘 하루 율법의 기준을 훌쩍 상회하는 선행의 삶을 실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겠습니다. '구원의 은혜와 사랑'을 갚는 삶을 게을리하지 않는 하루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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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일조’를 통해 예속의 관계를 정립합니다. 레위의 자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일조를 받습니다.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의 리더입니다. 그런데 그런 레위 조차도 조상 아브라함의 손을 빌려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낸 형국입니다. 결국 이 기록을 통해 멜기세덱의 위치가(?) 정립됩니다. 그는 영원한 대제사장 입니다.

    사실 오늘 이 본문은 이처럼 멜기세덱의 영적 위치를 설명하기 위한 기록입니다. 이 멜기세덱이 예수님과 어떤 의미로 연결되어 있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기록입니다. 그러나 이 목적을 잠시 떠나서, 오늘 본문의 기록을 문자적으로, 직관적으로 살펴보다 보면 빈번하게 기록된 ‘십일조’에 대해서 묵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십일조는 예속된 자가 자신의 주인에게 보이는 순종과 믿음, 의무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당신은 나의 주인입니다! 당신은 나의 ‘윗사람’ 입니다! 당신은 나의 제사장 입니다!”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나의 주님께, 그러므로 ‘인생의 십일조’를 빼먹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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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말할 필요없이 축복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역시나 멜기세덱의 위치(?)를 설명하기 위해 기록된 말이지만, 이 말 자체로 의미가 깊습니다. 윗사람은 축복하는 사람입니다. 군림하고, 누리고, 빼앗는 자가 아닙니다. 윗사람은 사랑을 실천하라고 주신 자리입니다. 책임은 지되, 격려와 축복으로 아랫사람의 본이되라고 주어진 자리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윗사람’의 개념을 오해한것 같습니다.

    윗사람인데 아랫사람을 축복하고 있지 않다면 회개해야합니다. 나보다 어린 그 친구, 나보다 후배인 그 친구, 나보다 직무적 지위가 낮은 자들, 사회적 권위가 나보다 낮은 자들에게 축복이 아닌 권위와, 저주와, 군림으로 행하고 있다면 회개해야합니다.

    어릴적 캐나다 유학할때 저를 거의 먹여 살렸던 현지에서 만난 전도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거의 항상 저의 끼니나, 숙소의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제가 정말 돈없고 도움이 필요할때 그분은 흔쾌히 자신의 집의 문을 열어주셨고, 얼마나 많이 베푸셨는지 모릅니다. 저에게는 캐나다에서 만난 가장 큰 축복중에 한분입니다. 그분이 항상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갚을 생각말고, 나중에 너도 이런 상황이 되면 후배나, 너와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갚아줘! 그럼 그걸로 충분해!”

    윗사람이라고 으시대지 말고, 권위 놀이 하지 말고, 빼앗지 말고, 군림하지 말고, 무시하지 말고, 축복하는 ‘윗사람’이 되야겠습니다. ‘라때’ 그만 찾고 라떼라도 한잔 사주는 윗사람이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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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반드시 네게 복을 주고 또한 너를 번성케 할 것이다!” (14절) 이는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도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이 있습니다. 사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마치 베드로에게 주신 “너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될것이다!” 같은 약속의 말씀이며 축복의 말씀입니다.

    13년전에 새벽 기도중에 주신 말씀입니다. 저로 기도중에 신앙고백을 하게 하시더니 (마16:16) 이어 말씀을 보게 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니 지옥의 문들이 이것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마16:18)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건강한 교회를 세워가실줄 믿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복이며, 저를 번성케하실 하나님의 약속인줄 믿습니다.

    하나님, 제가 건강한 ‘교회’가 되게 해주세요! 건강한 교회를 세워주옵소서! 교회가 부흥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는 도구가 되게 해주세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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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참고 견딘 후에 그 약속을 받았습니다!” (15절)

    개척 교회를 섬기는 목사의 입장에서, 이제 막 캠퍼스에 사역을 열어가는 목사의 입장에서 이 말씀은 무섭(?)습니다. ‘오래 참고 견딘 후 ‘라는 기록이 목구멍에 걸립니다. 마음을 한층 더 무겁게 합니다. 실제 아브라함은 ‘자손’에 대한 약속을 받고 적어도 25년의 시간을 기다려야했습니다. 그래서 사래와 그도 기다리지 못하고 이스마엘을 낳기도 했던것입니다.

    ‘오래’가 얼마나 오래인지모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나름의 ‘오랜’시간들을 기다리는 과정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기다림과 성취는 필연적 관계입니다.

    바우 교회도, 이그나잇 사역도 결국에는 ‘오래 참고 견딘후’에 그 약속을 받게 될것이라 믿습니다. 기다렸는데 못받는거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적어도 우리 하나님 약속받고 기다리는 우리를 잊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약속 받고 기다리던 우리를 모른척하시는 분 아니십니다. 부르심의 자리에서 오래참고 견디다가 약속의 성취를 보는 축복된 인생 되길 기도합니다!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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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초를 튼튼하게 하는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계속 기초만 쌓으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기초를 튼튼히하는 이유가 애초에 건강한 성장을 목표로 하고 있는것입니다. 기초를 다지는것은 건강한 다음 단계를 위한 포석의 과정입니다. 그런데 계속 기본만 하고 있으면 결국 성장을 포기한것과 다를바 없는것입니다. 과도한 기초의 다짐은, 그러므로 지혜가 아니라 지연일 뿐입니다.

    다음 단계로 나가야할 때가오면 다음으로 나가야합니다. 성장으로 발을 내 딛어야합니다.

    신앙의 기초를 다지는 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건강한 예배, 하나님의 말씀 안에 깨닫고, 변하고, 성장하고, 도전받는 과정은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거기에만 있을 수 없습니다(1-2절).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 하나님의 영광을 마주하는 것은 참 좋습니다. 그분을 예배하며 마음속에 뜨거운 신앙의 불을 지피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여기 초막 셋을 짓고 계속 사시지요!” 는 아닙니다. 내려가야합니다.

    신앙의 초석을 다지고, 그 위에 건강한 신앙의 집을 짓고, 그리고 사명의 자리로 나가는 역동하는 건강하고 성숙한 ‘성인 신앙인’이 되야 할 것입니다.

    기초만 반복한다고 칭찬받는 시절은 이제 지나갔습니다! 온전한데로 나가야할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것입니다. (2-3절)

    2

    비는 똑같이 내립니다. 7절의 땅과 8절의 땅이 다를리 없습니다. 비가 다를 리도 없습니다. 비가 똑같이 내리는데 ‘흡수’가 다릅니다. 그러니 곧 ‘생산’도 다릅니다.

    우리의 인생에 ‘비’의 은혜는 동일해도 흡수와, 경작, 생산이 다른경우가 이처럼 참 많습니다. ‘땅’도 은혜고, ‘비’도 은혜입니다. 동일하게 주어졌는데 그 모든 은혜를 가지고 ‘유익한 작물’을 생산하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가시와 엉겅퀴’만을 생산하는 인생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허락하시는 ‘비’를 굳이 구질구질한 엉겅퀴 같은것을 경작하는데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답답합니다!

    ‘비’는 동일하게 부어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경작의 책임은 나의 태도입니다. 나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를 온전히 누리며 ‘유익한 작물’을 생산해내는 인생되길 도전합니다.

    나의 인생에 ‘비’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나에게 ‘땅’이라는 경작할 인생을 주신것도 감사합니다. ‘유익한 결실’을 맺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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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속받은 사람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12절) 우리보다 앞서 훌륭하게 살아낸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본이 있다는 것이 후발주자(?)인 우리를 어렵게 만듭니다. 만약 그들이 못했다면 변명하기가 쉽습니다. 우리 보다 앞선 자들이 믿음과 인내로 약속을 상속받지 못했다면 우리도 실패가운데 큰 소리 칠수 있습니다. “이것보세요! 아무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수 없습니다. ‘본’이 있습니다. 이미 이렇게 산 조상들이 있습니다. 조금더 가까이 보자면,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나의 형, 나의 누나, 언니, 동네형, 선배가 있습니다.

    본받지 못할만한 인생 찾아 못한다고 변명할것이 아니라, 본받을만한 사람을 찾아서 집중해서 보고 따라하는 삶이 되야겠습니다. 그들도 해냈으니 나도 해낼수 있습니다. 그들이 해냈으니, 나도 해내야합니다! 그렇게 나의 후배들에게, 나의 다음세대에게 본이되는 크리스천이 되고 싶습니다.

    본받을만한 사람 되고 싶습니다!! 오늘 나의 믿음의 선배를 본받아, 나의 후배에게 본이되는 신앙의 하루를 살아내겠습니다! 벌써 흥분됩니다! 누군가 언젠가 나를 본받을 생각하니 기대가 넘칩니다! 본이 될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봐야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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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제사장은 아무나 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되는것입니다. (4절) 이것이 ‘대제사장’이 임명되는 유대의 전통적 과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인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과정을 생략치 않으시고 통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대제사장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위해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입니다. 속죄의 희생제사와 번제를 드리는 사람들 입니다. 자신을 위해, 백성을 위해 제사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1-3절) 과거 대제사장들은 반복되는 제사를 통해 이 역할을 감당했고, 예수님은 단 한번의 십자가 제사로 이 역할을 영원토록 감당하셨습니다.

    이쯤되면 이 말씀은 우리와 상관없는가? 이런 생각이 드는것도 사실입니다. ‘대제사장’은 부름이 있어야 할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베드로의 기록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벧전2:9, 우리말성경]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분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분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의 덕을 선포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이든, 이걸 읽고 묵상하는 오늘의 신앙인이든 결국 모두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사람들을 위해 주 앞에 서서 속죄하고, 희생제사를 드리고, 화목제로, 번제로 드려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대제사장들이 부름받고 자신들의 일을 했고, 예수님께서 부름받고 십자가를 감당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부르심 받은바 이 ‘왕같은 제사장’ 직분을 잘 감당해야할것입니다.

    2 “듣는 일에 둔하므로” (11절)

    여기서 둔하다는것은 게으르다는 뜻입니다. 설교를 해보고, 집회를 해보면 오는 사람들이 자주 앉아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열심히 있습니다. 듣기 위해서 쫓아다니는 느낌이 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시면서 강론하실때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 다녔던것과 비슷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원했습니다. 듣기 위해, 말 그대로, 부지런히 움직였던 것입니다. 육신도, 마음도 부지런히 가르침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습니다. 듣는데 게으른 사람들이 많습니다. 열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아무리 반복적으로 들려줘도 이해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적용과 성장도 없습니다.

    정말 좋은(?) 사람인데 설교할때, 성경공부할때, 지혜를 나누기만 하면 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들 중에서도, 전할때는 눈이 반짝 거리는데, 다른 설교자를 통해 들을 때마다 조는 목사도 있습니다! 놀때는 절대 자리에서 빠지지 않는데, 공부한다고 하면, 배운다고 하면, 듣는 자리라고 하면 절대 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육신이든, 정신이든 듣는데 부지런한 사람이 되야합니다. 이해할때까지 찾아듣고, 또 들으려는 자세가 있어야합니다.

    들음에 열심이 없다면 신앙의 성장도 불가능하고, 관계의 성장도 어렵고, 지식의 성장도 어렵습니다. 듣지 않으면, 오늘 본문 말씀처럼 딱딱한 음식은 먹지도 못하는 ‘신앙의 유아’로 평생을 살게 되는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열심을 내십시다. 내외면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영적 옥토밭’같은 신앙인이 되야할 것입니다. 열심히 들어야 ‘듣는 수준’이 올라가고, ‘듣는수준’이 올라가야 더 많이, 깊이, 심오하게 듣고, 더 성숙한 삶의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3

    상황상 13-14절이 잘 이해가 됩니다. 요즘 우리 늦둥이 둘째딸이 우유를 끊어야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유식도 안먹고 성인이 먹는거 고스란히 다 잘 먹는데 우유도 여전히 너무 잘 먹습니다. 우유가 좋은것이지만 의사는 이제 우유의 섭취량을 줄여야 한다고 조언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둘째딸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우유를 찾습니다. 밥은 안먹으려고 하고 우유를 자꾸 찾습니다. 그냥 누워서 꿀떡꿀떡하는게 얼마나 쉽겠어요? 앉아서 흘려가며 밥을 먹는게 아이에게는 나름 싫은(?) 일인가 봅니다. 쓸데 없이 아빠를 닮아서 옷에 뭐 묻으면 바로 짜증내며 울어버립니다. 지저분해지는게 너무 싫은가 봅니다. 그러니 우유에 대한 집착이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우유에서 건강한 식단으로 잘 넘어가야합니다. 우유의 의존도를 줄여야합니다. 계속 둘째딸이 살이 안 붙다못해 빠지고 있습니다. 식단을 바꿔야합니다. 이는 훈련입니다.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결국은 건강하게 성장하게 될것입니다.

    딱딱한 말씀을 사랑하고, 자주 먹어야합니다. 원래 몸에 좋은게 입에 씁니다. 원래 약도 꿀떡 삼키는거보다 씹어먹는게 효과도 좋다고 하더라구요! 하나님의 신약, 구약을 잘 씹어 먹어야겠습니다. 건강해 질것입니다. 성장할 것입니다. 선악을 분별하게 될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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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뚫어보는것 같은 사람 앞에 서본적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이제 막 네살, 다섯살 된 아이들, 아니 초등학교 1,2학년만 되도 잘못하고 나서 부모님 앞에 서고, 선생님 앞에 서면 움츠러듭니다. 마치 그분들이 모든것을 다 알것만 같습니다.

    “빨리 말해! 아빠는 다 알고 있어!” 라고 말하면 정말 아빠는 다 알고 있을것만 같습니다.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말씀 되신 예수님 앞에서는 모든것이 훤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바리세인들을 보며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 속에 있는 온갖 썩어 냄새나는 것들을 예수님은 꽤뚫어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의도를 분별해 내십니다. (12절)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내심 모른척하지만, 성경을 읽다보면 내 마음속에 온전하지 못한 동기와 생각과 의도가 모조리 들통난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오히려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죠!

    그러므로, ‘거울’로 보는 인생이 아니라, ‘X-Ray’로 보는 인생이 아니라, ‘CT’로 보는 인생이 아니라, 말씀으로 비춰보고, 예수님으로 비춰보는 삶이 되야합니다. 그래야 분별하고, 그래야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거울로는 몸속 질병을 못보고, 엑스레이로는 바이러스를 못보고, CT로는 영혼을 못봅니다.

    아침마다 말씀의 묵상으로, 하나님의 생각으로, 예수님의 삶의 본으로, 기도함으로 내 속을 헤아리고 분별하는 습관을 반드시 빌딩해야합니다. 그것이 건강하게 사는 유일한 길입니다.

    2

    “고백한 신앙을 굳게 지킵시다.” (14절)

    신앙을 굳게 지킨다는 것은 ‘신앙에 갇히다’ 라는 뜻입니다. 감옥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들락날락 할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오늘날 신앙을 지킨다고 하지만 신앙의 온도가 변화무쌍하고, 삶의 태도도 변화무쌍합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의 자녀 같은데, 언젠가는 사탄의 자녀같고, 언젠가는 예수님의 제자 같은데, 언젠가는 악인의 제자 같아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믿는 사람입니다!” 라고 자처합니다.

    ‘신앙을 굳게 지키는것’은 엄밀히 따지면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변화가 없는, 흔들림이라고는 아예 없는, 메인것과 같은, 묶인것과 같은, 어쩌면 자유를 상실한것과 같이 고정된 신앙을 의미합니다.

    신앙을 굳게 지켜야합니다!

    3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 의도, 마음을 분별해 내십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정죄하고, 파괴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로 깨닫게 하시고, 가르치시고, 용서하시고, 회복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15절) 그분은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도우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16절)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라 이것 모든것이 가능합니다(17절)

    결국 예수님의 생각은 우리를 살리는데 있습니다. 나를 회복시키는데 있습니다. 나를 깨끗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은혜를 붙들고 주님 앞에 나와야합니다. 모두 자백하고 회개해야햡니다. 어차피 숨기지 못합니다. 숨을수 없습니다. 숨기면 썩고 악취가 납니다. 곪고 더 아프게 됩니다. 잠깐 아프고 말것을 죽을 아픔까지 격어야 하는 일이 될수도 있습니다. 회복이 안되는 지경에 이를지 모릅니다.

    물론 잘못을 드러내는것, 솔직하게 고백하는것은 누구나 어렵습니다.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혼날것 같고, 미움 받을것 같고, 정죄받을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식의 자백을 듣고 자식을 파괴하는 부모가 없듯이, 우리 하나님, 모든 것을 이미 분별하고 알고 계신 우리 주님은, 우리가 그분께 담대히 나와 은혜를 간구하며 매달리고 자백할때, 우리를 회복하시고 구원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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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과 믿음을 연합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절)

    종교와 생활의 이분법적인 접근은 이 시대에 ‘바리세인과 서기관’을 만들어 냅니다. 말씀에 대한 해박한 지식, 깊이 있는 연구, 통찰이 있는 깨달음들이 풍성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 ‘학위’로 공적증명을 받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소위 말하는 ‘신학박사, 석사’가 넘쳐 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아는 말씀이 믿음으로, 삶으로 적용되고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많다는 것을 부인 할수 없습니다. 실제로 ‘신학과 교수’인데 신앙이 없는 사람도 있고, ‘목사’ 인데도 믿음없이 가르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씀과 믿음은 함께 가야합니다. 배운대로, 들은대로, 깨달은대로 믿고 살아낼줄 알아야합니다. 말씀 중에 믿어지는것만 믿고, 해석되는것만 믿고, 소화되는것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위험합니다. 또한 말씀을 오직 지식의 영역으로만 해석하고 수용하려는 자세도 위험합니다.

    말씀과 믿음이 함께 가는 건강한 신앙인이 되어야합니다. 이런 건강한 신앙은 삶으로 확실히 드러나게 될것입니다.

    ‘지식의 요람’이라는 대학 캠퍼스를 요즘 자주 갑니다. 오전 10시부터 가서 동아리 홍보 부스를 만들고 학생들을 보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학생들이 분주하게 이동합니다. 클래스에서 또 다른 클래스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배움도 결국 삶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면 큰 의미가 없습니다. 수천명이 그렇게 클래스를 전전하며 배워도 삶에 적용되지 않으면 의미는 축소될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4년을 공부하고 졸업해도 그 학위가 세상에서 별 의미가 없을수도 있습니다.

    말씀과 신앙, 삶은 같이 가야합니다.

    2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안식이 남아 있습니다.” (9절)

    오늘 본문에 기록된 ‘안식’을 저는 영원한 안식으로 묵상해 봅니다. 우리는 ‘출애굽’ 해서 ‘가나안’의 안식을 취하지 못한 이들처럼, 어쩌면 ‘안식’을 놓칠 위험한 삶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습니다. 여전히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하시는 은혜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다시 오실 그 날을 꿈꾸며, 그때까지 우리는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합니다” (11절) 믿음안에 거해야합니다.

    자고로 ‘천로역정’이라고 했습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이 쉽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라고 했다고 해서 구원을 쉽게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 이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구원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출애굽’하여 ‘광야길’을 걸으며 ‘가나안의 안식’을 향해 가고 있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선포합니다.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씁시다!” ‘가나안’을 들어갈때까지 쉼없이, 깨어 기도함으로, 주를 위해 성실하게 살아야할 것입니다.

    단순히 쉬는게 안식의 전부가 아닙니다. 참된 안식은 ‘영원한 구원’ 입니다. 참된 안식을 얻기까지 힘써(11절)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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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믿음을 지키고, 남의 믿음을 지키는 두가지의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12-13절) 실제로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면 생명을 상실할 위기를 탈출하는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다니엘 그리고 다니엘의 세친구들은 아마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이 되어주었을 것입니다. 혼자 있었다면 그들의 결단은 조금더 어려웠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드락이 고민할때 그 옆에 있던 메삭이 “고민하지마! 우리 신앙지키자!” 라고 말해줬을지 모를 일입니다. 혹은 그 반대의 경우였을수도 있습니다. 혹은 세 친구가 고민중인데 다니엘이 “고민 하지마!” 라고 격려와 권고의 메세지를 주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내 신앙도 지키고, 남 신앙도 지키는 이러한 책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진중하게 생각해야겠습니다.

    2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출애굽 1세대는 그들이 자초한 일입니다. 그들의 불순종, 그리고 그들의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예비된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나의 불신과 불순종 때문일 수 있습니다. 교회를 섬기면서도 계속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무신경이나, 무능력이 아닌 나의 불순종과 나의 불신앙 때문일 것이다!

    출애굽을 했고 ,광야의 만나와, 구름기둥, 불기둥의 기적 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실패했던 ‘출애굽 1세대’ 처럼, 저도 어쩌면 하나님의 기적 한가운데 있으면서 반복하여 불순종과 불신앙을 보이고 있는지 모릅니다.

    온전히 믿고, 믿음으로 선포하고, 의심없이 행하고, 감사로 먼저 선포하고, 결국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는 하나님의 종 되길 기도 합니다.

    바우교회도, UT Austin 이그나잇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의 땅인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땅이 될것입니다. 부흥이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내일 오전에는 UT Austin 캠퍼스를 들어가서 동아리 광고를 하는 날입니다. 이 묵상을 올리고 이제 바로 캠퍼스로 바삐 이동해야합니다. 이 시간과 노력들이 그저 ‘동아리 광고’가 아니라 이 땅을 변화시킬 영적 ‘출애굽’의 첫 걸음이 되길 기도합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첫걸음이 되길 기도합니다. 함께 기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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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1절)

    여기서 ‘깊이 생각하라’ 라는 단어는 ‘바라보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경외하라’ 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해하라’라는 뜻도 있습니다. ‘주목하다’ 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알라’, ‘꿈꾸라’, ‘조사하라’등등의 뜻도 있습니다.

    이쯤되고 보니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할때 왜 이 단어를 썼는지 알것 같습니다. 우리는 정말 예수님을 떠올릴때, 바라보고, 경외하고, 조사하고, 이해하고, 알고, 주목하고, 꿈꾸고, 생각하는 등의 다양한 태도로 접근(?)해야합니다. 우리의 ‘지정의 (지성, 감정, 의지)’를 다 사용하여 예수님을 생각해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단순하고, 추상적이고, 나태하게 접근(?)하게 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바로 알수 없고, 바로 배울수 없습니다. 그러면 바른 삶의걸음을 걷기 어려울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할수 없게 됩니다. 사명에 대한 이해와 적용도 가벼울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분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삶은 더욱 질서 있어지고, 사명은 더욱 확실해지는 일을 경험하게 될것입니다.

    2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4절)

    하나님께서 모든것을 지으셨습니다. 이 말인즉슨, 나를 지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당연한 이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있자니 가슴 한켠에 새로운 감동과 감사가 피어오릅니다.

    나는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그분의 손길, 그분의 사랑, 그분의 계획, 그분의 목적이 ‘나’라는 피조물에 담겨 있습니다. 은혜가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됩니다. 세상은 나를 작게 보고, 나도 때로는 나 자신을 너무나 초라하게 보기에 힘들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이 사실이 다시 한번 내 안에 사라진 자신감을 회복시킵니다. 상처받은 자존감에 치유연고가 되어줍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감사합니다. 자신감 있게, 건강하게, 가치있는 인생으로 하루를 살아내겠습니다.

    3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하여 그 광야길에서 하나님을 향한 불신과 완고한 마음으로 보냈습니다. 그게 장장 40년입니다. 이쯤되면 정말 고집스러운 불신입니다. 말그대로 고집불통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진짜 거의 평생을 고집불통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내내 고단한 시험의 연속입니다. 바람잘날이 없습니다. 진작에 ‘가나안’ 갈수도 있는데 그걸 못하고 광야를 해맵니다.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가 “하나님 도대체 내게 왜이러십니까?” 입니다. 비난이고, 원망입니다.

    ‘광야’는 이스라엘이 자초한 고난이지, 하나님이 예비하신 고난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나안’을 마련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고집불통의 신앙은 반드시, 빨리 버려야합니다. 의심과 불신도 단호하게 버려야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비난과 원망도 자복과 회개로 바꿔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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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한 형제 자매가 된것은 그리스도라는 한 아버지를 모시는 믿음의 가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을까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는 믿음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법적 단어를 사용하자면, 우리는 그렇게 예수로 인해 하나님께 입양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형제요 자매입니다. 가족은 사랑하고, 이해하고, 인내하고, 배려하고, 수용하고, 가르치고, 보호하고, 공급하고, 함께 행복하고, 함께 울고, 끊어지지 않고, 부정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향해서도, 예수로 인해 내 형제자매된 믿음의 가족들을 향해서도 이러한 태도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마음과 생명과 힘을 다해 네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아멘

    2

    인간은 죽음과 생명을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질병 중에서도 아직 정복하지 못한것들이 수두룩합니다. 인간이 이토록 똑똑해졌고, 세상은 눈부시다는 단어로 부족할 만큼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생명과 죽음을 정복하는 영역 근처에도 다다르지 못했습니다.

    무언가 하나를 발견할때마다 호들갑을 떱니다. 금방 인간도 복제할것 같이 말하고, 모든 질병을 정복할것처럼 말하고, 죽은자도 살리고, 영생을 성취할것처럼 대단한 긍정회로를 돌리기도합니다. 그러나 결국 인간은 절대 ‘생명과 죽음’을 정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저의 이 선언을 듣고 대노할수도 있고, 비웃을수도 있고, 철저하게 무시할수도 있고, 관심도 없을수 있습니다. 특히나 저처럼 ‘과학지식’의 배경이 전무한 사람의 말이니 얼마나 우습게 들릴까요? 그러나 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간은 생명과 죽음을 정복할수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 보자면 생명과 죽음은 하나님의 영역이며, 예수님의 영역입니다. 그분은 없는 존재를 창조하시고, 그 생명이 살게 하시며, 죽은자도 다시 살게 하시기도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생명과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서 머리 빠지게 연구 하기 전에 먼저 죽음을 정복하시고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을 믿어야합니다. (14-16절) 죽음의 권세는 믿음으로 뛰어넘는것이지 의학과, 과학, 지식으로 뛰어넘는것이 아닙니다.

    3

    “몸소 시험을 받으시고 고난 당하셨기에 시험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18절)

    예수님은 몸소 시험을 받으시고 고난을 받으셨죠. 공감의 힘은 놀랍습니다. 예수님의 공감은 ‘성육신’과 ‘십자가’라는 극단의 시도로 적용되었습니다. 꼭 이처럼 극단적인 적용이 아닐지라도 우리도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려고 할때 ‘공감’이 참 중요하고 기본적인 태도가 됩니다.

    복음을 전할때도 먼저 대상을 향한 공감을 보여주어야합니다. 긍휼사역을 할때도 대상을 향한 공감을 보여주어야합니다. 공감은 닫힌 마음을 열어주고, 관계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회복과 기적을 일으키는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진심으로 공감하고, 삶으로 공감하여 기적을 일으키는 통로가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공감하는 척이 아닌 진심어린 공감능력을 키워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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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이라고 해석된 이 말은 ‘휩쓸려 가지 않도록’ 이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간혹 해일이 오고, 태풍이 불고, 홍수가 나서 사람들이 물에 휩쓸려갈 위험에 처할때, 그들은 어떻게든 떠내려 가지 않기 위해서 흔들리지 않을 그 무언가를 붙잡습니다. 그렇게 건물 기둥도 붙잡고, 신호등도 붙잡고, 아무것도 없으면 힘쎈 사람이라도 붙잡습니다. 그리고 절대 놓지 않습니다. 평소같으면 놓고도 남을 사람인데, 어떤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절대 그 손을 놓치 않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 손을 놓치는 순간 물에, 바람에 휩쓸려가고,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죄에 휩쓸려 가는것은 ‘죽음의 문턱으로 휩쓸려 가는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좀 노력해보고 안되면 휩쓸려가도 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쉽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죄’에 휩쓸려 가서는 안됩니다. 목숨걸고 지켜야합니다. 하나님이라는 기둥, 말씀이라는 기둥, 예수님이라는 기둥을 절대 놓아서는 안됩니다.

    2

    과거 우리 나라는 ‘암행어사’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또보다 높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모르게 마을로 들어옵니다. 높은사람처럼 등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평민속에 녹아듭니다. 그리고 관찰하기 시작합니다. 그 마을에 치리자들의 비리를 찾기도 하고, 마을의 죄인들을 찾기도 합니다. 그렇게 한참동안을 세심하게 사람들을 감찰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는 “암행어사 출두요!” 라고 외치며 영광 가운데 마을로 다시 입장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자신이 자신을 낮추고 들어와 그간 감찰하며 보았던 죄인들을 찾아서 소환하고 재판합니다. 드디어 정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 날이 오면 죄인들과, 탐관오리들 속에서도 정직과 거룩을 지키며 산 백성들은 쾌재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리고 온통 죄를 지으며 살았던 자들은 정의의 심판을 받으며 후회의 시간들을 보내게 됩니다.

    ‘그날’이 옵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잘해야합니다.

    예수님도 암행어사 같이 낮아진 모습으로 우리가운데 임하셨습니다. 천사보다 낮아진 모습으로 임하셨습니다. 하늘의 영광과 존귀함을 잠시 벗어두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막살아서는 안됩니다. 성육신한 예수님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라는 암행어사가 어느날 “암행어사 출두요!” 를 외칠지 모릅니다. 매일 ‘하나님의 눈’ 앞에 산다는 생각으로 거룩한 신앙인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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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브리서는 시작과 함께 예수님이 비교불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합니다. 천사보다 높으신 예수님을 설명하고, 이후에도 차근 차근 ‘그 누구보다 높으신 예수님’을 설명하게 됩니다.

    저는 이러한 ‘비교불가 예수님’이 좋습니다. 이러면 선택의 여지가 없고,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저것 비교의 대상이 많으면 선택의 여지가 생기고 머리가 아픕니다. 헷갈리고, 고민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비교불가이시니 명확해서 좋습니다. 헷갈리지 않아서 좋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예수님을 놓고 선택할지 말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비교불가’하신 예수님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산하고, 망설이고,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비교불가 예수님’을 본인의 의지에 따라 세상의 가치들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천사에 비교하고, 전통에 비교하고, 가치에 비교하고, 돈에 비교하고, 쾌락에 비교하고, 자유에 비교하고, 다른 우상들에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것들에 예수님을 비교하고 혼자 고민하는 것입니다. 혼자 헷갈리는 것입니다.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예수님은 세상 그 어떤것과도, 세상 그 어떤 사람과도 비교되지 않습니다. 비교할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이며, 하나님의 본채 이십니다. 그분은 구원의 한 이름이며, 하나님의 우편에서 중보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이에게 경배받고, 천사에게도 경배받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다른것과 비교하지 맙시다. 예수님 기분 나쁩니다! 예수님을 선택하기를 망설이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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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사보다 높으신 예수님’은 의의 기준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불법을 역겨워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았고, 세상 그 어떤 ‘사명자’보다 높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을 통해 창조되지 않은것이 없고, 그분은 영원히 계실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분이십니다. (8-13절)

    “나는 주의 친구~” 라는 찬양도 좋지만 그래서 “위대하신 예수님”이라는 찬양이 필요합니다. ‘친밀한 예수님’ 너무 좋은데 ‘위대한 예수님’을 기억해야 경외하는 삶, 헌신되는 삶, 도전받고, 결단하고, 성실한 삶을 사는데 한결 수월합니다. 조금 어려워(?)야 긴장하고 잘하게 되어있습니다 ㅎㅎ

    위대한 예수님을 찬양하고, 높여 드립니다. 위대하고 영화로운 예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겠습니다. 너무 무례하게 ‘친구먹는’(?) 신앙의 경솔함을 조심해야겠습니다!

    선(line)은 지켜야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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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11절)

    “옷이 낡는다!” 진짜 옷이 낡는것이면 사실 문제도 아닙니다. 그냥 새 옷하나 사면되죠 뭐! 그러나 ‘옷이 낡는다’는 그저 옷이낡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인생이 영원하지 않다는 명확한 메세지입니다.

    요즘 집에 부모님이 잠시 와 계십니다. 어릴적 기억하는 부모님의 모습은 이제 노년의 부모의 모습으로 바뀐지 오래입니다. 제 자신도 어느덧 40이 되어 간헐적으로라도 운동하고, 식사도 절제하지 않으면 몸이 삐그덕거리는것을 느끼는 나이입니다. 머리색도 유전인지 벌써부터 염색 안하면 바로 온통 하얀 머리가 되버리기 쉽습니다.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눈에 너무 선명하게 보입니다. 모두 모두 낡아가고 있습니다. 내 육신도, 내가 가진 ‘새로운것’들도 어느새 낡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영원한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영원한 것은 오직 성삼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지 않으면 ‘영원’은 절대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습니다.

    ‘영원하지 않을것’을 향한 우리의 무분별한 투자(?)와 집착은 유한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 입니다!

    영원하지 않을 이 땅의 삶을 위해 살것이 아니요. 영원하시고, 영생을 주실 하나님을 위해 사는것이 가장 최고의 지혜라 생각합니다. 늙어가면서도 소멸과 죽음을 걱정하지 않는 방법은 단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영생을 주시는 주님의 믿고, 그분의 뜻을 행하며 사는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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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튜브에는 ‘설교관련영상’들이 참 많습니다. 찾아서 보다보면 정말 넘쳐납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조회수’가 높은 것들에 눈이 갑니다. 그렇게 높은 조회수를 쫓아 들어가다보면 간혹 이상한(?) 설교가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위험한 설교 입니다. 더 나가서 틀린 설교도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사기꾼들도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이단/사이비지요. 영의 세계를 흉내내고,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가 자신에게만 특별한척 하기도 합니다. 마지막 날에 대한 자신만의 음모론들을 짜집기 하여 쏟아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주 위험합니다.

    생각이 이쯤이르면 더욱 아찔합니다. 왜냐면 조회수가 무시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만 단위가 아니고 수심만 단위입니다. 심지어 백만 단위가 넘기도 합니다.

    바울은 복음의 정수를 전합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들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합니다” (26절) 마치 이 세상에 수많은 이들이 ‘복음의 정수’에는 반응하지 않고 ‘이단 사설과 자극과 신비’에만 반응하는것과 비슷해 보입니다.

    부족하지만 한명의 목회자로, 가슴이 아릴정도의 답답함과 고민이 있습니다. ‘어떻게 (나를 포함하여) 세상이 건강한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듣게 할것인가?!’, ‘어떻게 하면 더욱 잘 전 할수 있을까?’ 생각이 이쯤이르면, 듣지 않는 자들을 향한 바울의 이같은 일갈의 마음이(25-28절) 공감됩니다. 오죽하면 이렇게 쎄게(?) 말했을까요!!

    주님 어찌 해야합니까!!! 도와주세요! 말씀의 능력을 주세요! 입술의 권세를 주세요! 듣는 자들의 마음을 준비시켜 주세요!! 귀를 들여주세요! 눈을 뜨게 해주세요! 주님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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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담대하게” (31절)

    바울에게 이런 시간들이 있었던가요? 쭈욱 바울의 인생을 반추해보면 그는 ‘방해없이’ 복음을 전한 일이 거의 없습니다. 항상 반대와 죽음의 위협을 눈앞에 두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전할때마다 ‘담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어떠한 방해도 없는데” 바울이 “담대히” 복음을 전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담대함’이라는 단어는 ‘숨김없이, 모조리, 확신을가지고’라는 뜻입니다.

    때로는 복음 전도를 방해하는것이 나 자신입니다. 내가 미리 복음에서 이것저것 때는것입니다. 모조리 말하기 보다는, 숨김없이 말하기 보다는, 여기 저기 도려내서 사람들이 듣기 좋게 말하는것입니다. '복음의 각색자'라고 들어보셨나요? 내 맘대로 짜집기 하는 것입니다. 혹은 내가 덜 위험(?)하게 말하는것입니다. 내가 미움 받지 않을 정도로만 말하는것입니다.

    그에 더해서 언젠가는 확신이 없이 전하는 내 모습도 있습니다.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전하나요?” 라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전하다 보면 상대가 반문하게 마련이고 그러면 “글쎄? 그렇네, 듣고 보니 니 말이 맞네!” 라고 대답하는 웃지못할 촌극(?)도 벌어지곤 하는것이죠.

    복음을 전할때는 언제나 ‘담대’해야합니다. 단호하고 확고해야합니다. 정확하고, 도려내지 말아야합니다. 반쪽짜리 복음이 아닌 온전한 예수님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감출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잘라낼것이 없습니다.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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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일날 한참 밤중 시간에 한국에 있는 한 목사님께 문자가 왔습니다. “목사님 오늘도 최선을 다해 섬기셨을텐데 수고 많으셨습니다. 늘 힘내시기를 바래요!” 라는 문자였습니다.

    큰 힘이 되었습니다. 목사가 목사의 마음을 아는걸까요? 주일 하루 모든것을 쏟아내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그 밤에 머리속에 들어오는 많은 생각들이 있습니다. ‘나는 오늘 잘한걸까? 교회는 건강한가? 성도님들은 기쁘게 예배하셨을까? 설교가 너무 엉망은 아니었나?’ 자책과 반성, 의심과 지침들이 오고가는 시간입니다. 그때 받은 이 격려의 문자가 참 큰 힘이 되었습니다.

    모든것에 초연해 보이는 바울, 그렇게 긴시간을 고생끝에 로마에 도착합니다. 그때 믿음의 형제들이 바울을 마중나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을 보자 하나님께 감사하며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도 초연해보이는것과는 달리 그 마음에서 참 많은 생각들에 나름의 고된 시간들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로마에 도착했기 때문에, 바울같이 단단한 사람도 속으로는 조금 걱정됬을지 모를 일이죠. 그러나 성도로 인해 격려와 힘을 얻습니다.

    믿음의 형제자매는 서로 격려하고, 축복하고, 위로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 오늘 하루도 힘내세요! 승리하세요! 담대하세요! 성공하세요! ‘로마’에 잘 도착하세요! 화이팅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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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은 지체함 없이 3일간 여독을 푼 후에 바로 유대 지도자들을 부릅니다. 격려받고 힘났으니 이제 일해야죠!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는 주저 앉으라고 주는게 아니고, 이제 힘내서 일하라고 주는 ‘당근’과도 같습니다.

    일해야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합니다. 회사에서도 좀 지쳐보이는 사람 위로합니다. 그런데 위로했는데도 계속 앉아만 있으면 계속 직원으로 두지 못합니다.

    매일 제가 일하는 이유입니다. 그날의 격려가 족하고, 그렇게 그날의 일을 감당해야합니다.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면 내일은 두배를 해야하는데 그게 저를 더 지치게 하더라구요! 일의 능률과 성취도 떨어뜨리더라구요! 휴식이 필요한 ‘3일’이 있다면 쉬며 재정비 해야겠지만, 해야할 일은 미루지 않고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분들을 더욱 많이 보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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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견없이 전할수 있는 상황’ (21절) 바울이 로마에서 마주한 상황입니다. 이게 참 힘듭니다. 요즘 ‘기독교’에 대해서 편견 없이 전할수 있는 곳이 교회 말고 잘 없습니다.

    UT Austin 캠퍼스에서 말씀을 나누고, 믿음의 교제를 하는데 있어서 그래서 기도가 많이 됩니다. 세대가 가진 편견 없이 복음이 잘 전해질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듣는 자들이 받아들일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바울처럼 ‘전할수있는 기회’가 동아리라는 이름으로 주어졌으니 허락된 시간들 속에 바울처럼 아무런 방해없이 잘 전할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며 꿈꿉니다.

    캠퍼스에 복음이 확장되길 기도합니다. 학생들이 복음을 듣고 믿음에 이르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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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는 거대합니다. 그러나 몰타는 로마에 비해서는 보잘것 없는 작은 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을 그곳에도 보내셨고, 3개월 이상 체류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이 오랫동안 체류한 지역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본다면, 몰타에 머문 3개월이 절대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바울의 선교 여정이 일관되게 이렇습니다. 계획이 있지만,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바울을 움직이십니다. 전도의 시간도, 대상도, 지역도 하나님의 주권대로 운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선교 여정을 보면 그렇게 아시아가 유럽이 되기도하고, 어떤 곳에서는 아예 2-3년 머물며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언제나 회당에서 유대인을 전도함으로 시작하지만 그의 선교는 언제나 결국 이방인을 품는 선교였습니다.

    선교는 하나님께서 하시는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도구일 뿐입니다. 그분의 손에 휘둘리고 사용되는 철저한 도구입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선교하는 사람이 선교를 잘(?) 합니다. 내가 정하고, 내가 주체가 되기 시작하면 ‘선교’라는 귀한 사역을 하면서도 실수하기 일수 입니다. 선교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선교의 도구 입니다. 나를 통하여 ‘몰타’든 ‘로마’든 복음이 잘 전해지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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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의 이 자세는 정말 본받을만 합니다. 그는 태풍가운데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독사에게 물립니다. 이해도 안되고, 저주스러운(?) 상황입니다. 자칫 정신적으로 흔들릴수 있는 상황입니다. 의심될수 있는 상황입니다. ‘독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환상 가운데 없는 ‘딜’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독사가 물고 나서, 사람들이 지적해줄때 비로소 자신이 독사에게 물린걸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대수롭지 않은듯 그 뱀을 잡아 때 불길속으로 던져버렸습니다. 그 이후도 대단합니다. 호들갑을 떨지 않습니다. ‘나 이제 곧 줄을꺼야!’ 하지 않습니다.

    진짜 본받을만합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돌발상황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좀 쎄게(?)얘기하자면) 인생에서 마주한 ‘독사’에게 흔들리면 하나님을 안믿는 것입니다.

    의심하지 않는 믿음!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살아야겠다고 결단합니다! 예견된 상황이든, 돌발상황이든 의심없이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습니다.

    자꾸 예배 장소사용과 시간에 있어서 우리가 빌려쓰고 있는 교회와 사소한 마찰들이 있습니다. 오늘 그 문제(?)에 대해서 그 교회 목사님과 상의하기로 했습니다. 마음 한켠에 부정적인 생각도 들어옵니다. '혹 나가라고 하면? 혹 예배시간을 더 늦추라고 하면 어쩌지?' 하는 등의 불안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붙들고 마음을 담대하고 초연하게 다듬습니다. 이때까지 하나님께서 세워 오신 바우교회 하나님께서 여전히 최선으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의심없이 믿음으로 나가길 기도합니다.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장소를 만나게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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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명이 나으면 이내 소문이 나고, 동내에 아프다는 사람은 죄다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그들도 치료받고 그들도 삽니다.

    우리도 우리의 구원을 이처럼 소문내야합니다. 그래야 믿지 않는, 상처받은 영혼들이 주님 앞으로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역사하신 간증, 나를 구원하신 간증, 배푸신 은혜, 사랑, 회복등의 이야기를 주변에 소문 내야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사랑과, 능력과, 은혜 베푸심을 전해야합니다. 그러면 몰려들게 되어있습니다!

    더 많이 몰려들면 몰려들수록, 더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 듣고, 믿음에 이르러 구원받는 축복된 인생이 될수 있을 것입니다.

    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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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람들이 배 안에 같이 있지 않으면 당신들도 구조되지 못할 것이오” (31절) “여러분 가운데 어느 누구도 머리카락 하나라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34절)

    이 말씀을 보며 이것이 곧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만 구원받는것’ 말고 ‘다 같이 구원받는것’ 을 원하시는 것이죠.

    선원들도 살고 싶고, 배에 있는 군인들도 살고 싶습니다. 나름의 살길을 도모합니다. ‘거룻배’ 같은 것에 목메는 이유입니다. 나름의 발버둥입니다. 그러나 ‘거룻배’는 모두를 살릴수 없습니다.

    한편 하나님은 모두를 살리고 싶어 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바울을 시켜 군인들에게 말해 모든 ‘거룻배’를 끊어버리게 만듭니다. 인생들이 꿈꾸는 나름의 구원의 방법을 끊어버리게 하는것입니다. 모두를 구원할수 없는 ‘거룻배’같은 거짓 소망을 끊어버리게 하는것입니다.

    우리도 모든 영혼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받는 ‘영혼 구원의 길’을 도모 해야겠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연대의식’이 좀 있어야겠습니다. “그가 구원받지 못하면 나도 구원받지 못한다!” 라는 연대 의식 말입니다. 그러면 남을 쉽게 포기하지 않고, 나혼자 즐겁게 구원받는 일을 지양하게 될것입니다. 나, 우리 가족, 나의 지인, 나의 공동체, 나의 교회 뿐만 아니라 모두가 다 ‘예수님’이라는 구원에 배위에 있어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바우 교회가 ‘모두’를 구원하려고 하는 교회요 성도되길 원합니다. 바울과 군인들이 함께 협력했다면, 목사와 성도가 함께 협력해 ‘배위에 모든 이’를 구원하는 도구로써의 역할을 감당하기 원합니다. 나 혼자만 사는 성도 아니라, 다 같이 사는 성도요 교회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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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에는 선원들과 군인들이 있습니다. 선원들은 자기들이 배를 잘 알기 때문에 거룻배를 타고 몰래 도망가려고 했습니다. 이 사실을 바울을 통해 알게된 군인들은 자신들의 무력을 사용해 선원들을 죽이고 거룻배를 탈취하지 않고, 거룻배를 끊어버립니다.

    사실 선원들이 거룻배를 몰래 타려고 했다면 이는 매우 이기적인 행동입니다. 욕을 먹어 마땅한 행동입니다. 책무를 저버린 악한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군인들은 그들의 우월한 무력을 사용해 선원들을 감금하던, 죽이든 할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줄어든 인원을 거룻배에 실어 남은 인원만 살리면 실리적이고, 정의로운 일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확실한것은 이렇게 하면 모두 사는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분명히 모두 살길을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무력으로 선원을 죽이거나 가두면 모두가 구원받는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수 없습니다. 결국 선원들처럼 자신들에게 유리하고, 이기적인 선택을 피하고, 다 사는 길을 선택합니다.

    이기적이면 나는 살아도 남은 죽을 수 있습니다. 내 능력을 내가 사는데만 발휘하면, 두명 살것, 세명 살것 한명밖에 못살게 됩니다. 우리는 수많은 영웅들이 불길 속에서, 사고 속에서, 재난 속에서 수많은 잠재 피해자들을 구해낸것을 압니다. 그들의 이타심과, 정의감이 더 많은 이들을 살린 것입니다. 그들이 산소통을 나눠 맺기 때문에 불길과 연기를 뚫고 두명이 살아나오는것입니다.

    나에게만 유리한것, 이기적인 행동과 결정은 끊어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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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살길이 열렸을때 군인들은 죄수들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은 말그대로 ‘죄인’입니다. 그러니 헤엄쳐 도망가면 그것은 ‘정의’가 아닙니다. 그래서 뭍에 올라오기 전에 죽여버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백부장은 바울을 살리기 위해 군인들의 이러한 뜻을 막습니다.

    이게 딱 예수님께서 하신 일 같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딱 죽어 마땅합니다. 우리가 헤엄치고 도망치는것? 정의가 원하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를 긍휼히 보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십니다.

    물론 백부장은 십자가를 지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하려는 그의 이 시도는 예수님을 떠오르게 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죄인된 우리를 위해 중재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인해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주님 때문에 살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구원 받았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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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풍’은 태풍이 되었습니다. 인생에 마주한 '역풍'이 '태풍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합니다. 제가 경험한 일도 아닌데, 역풍이 태풍이 될때 얼마나 마음이 어려울지 예상이 됩니다.

    제가 그렇습니다. 역풍을 꾸역 꾸역 넘어가고 있는데 해결되는것 같다가 태풍을 만나면 거기서 쉽게 무너집니다. 태풍이 너무 싫습니다. 태풍이 너무 무섭습니다. 왜 이렇게 태풍이 무서울까요?

    역풍은 돌파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태풍은 오늘 본문의 기록처럼 “휘말려 방향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태풍을 무서워하는 이유가 딱 이것입니다. 저는 늦춰지는것은 무섭지 않습니다. 그러나 태풍 때문에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것이 무섭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자신이 내 인생의 주도권을 잃어버릴때 저는 가장 무서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차에 타면 운전할때가 가장 맘이 편하고, 비행기는 제가 운전을 못하고, 상황에 주도권을 쥘수 없으니 항상 두렵습니다.

    결국 제가 인생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제가 인생에 운전대를 잡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강박은 자칫 성령님께서 내 인생에 운전대를 쥐실때도 발현됩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운행하려고 하시는데 내가 내 맘대로 움직이려고 성령을 거스를려고 할때가 있습니다. 어떻게든 내 인생 내가 운전대 쥐고 주도해야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진짜 두려워 해야하는것은 태풍이 아닙니다. 방향을 상실하는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인생에 선장이 되어 내 방향대로 항해하는것을 가장 두려워해야합니다. 내가 내 인생에 주인되려고 하는 ‘태풍’이 가장 무서운 태풍입니다. 방향을 잃은것 같아도 성령님께 주도권을 맡겨 놓으면 바울처럼 결국 ‘로마’에 도착하게 될것입니다.

    성령님께 나의 주도권을 맡겨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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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 내게 말씀하신 대로 이뤄질 것입니다” (25절)

    사실 바울이 천사를 통해 안전할것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23-24절) 그것도 엄밀히 따지면 아직 이뤄지지 않은, 확인되지 않은 말(?)일 뿐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바울의 확신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오는것입니다. 아직 그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믿으니까 그분의 말대로 이뤄질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저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내게 말씀하신대로 이뤄질것입니다.

    돌이켜보면 1년동안 교회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성장해왔습니다. 성도의 숫자도, 사역도, 예배도, 섬김도 꾸준히 성장해왔습니다. 그결과 오늘 1년만에 ‘새가족 만남의 잔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아주신 ‘새가족’은 , 우리가족을 빼고, 1년동안 성인 25명, 아이 7명입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신대로 이뤄주고 계신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신대로 이뤄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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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로마행 입니다! 잡혀 있는지 삼년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저는 그런 설교도 많이 했고, 성경 속에서 그런 이야기들을 자주 접하지만 아직도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고, 수용하는게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시계는 나의 시계와 다릅니다. 효율적으로 생각하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전했으니 이제 바로 로마로 이송되면 좋을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서 3년이나 구류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로마로 이동하는데 그 마저도 오늘 본문에 보니까, ‘역풍’이 불어서 도무지 속도가 안나는 것입니다.

    ‘시간’에 대해서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시간에 있어서 우리가 할수있는 영역은 성실과 최선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수많은 ‘시간 여행’ 영화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영화들조차 ‘시간여행’을 하고나서 이야기 마무리를 잘못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야기 속에서 조차 ‘시간여행’이 만들어내는 역사와 인생의 혼란을 정리하지 못하는것입니다. ‘시간의 섭리가 역행’ 할때 일어나는 수만가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콘트롤 하고 싶기는 한데, 시간을 만지기 시작하면 모든 만사가 흐트러지는 것입니다!

    '시간'은 이와같이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는 시간 속에서 순응하고, 최선과 성실로 임할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시간을 초월해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법, 인정하는 법, 준비하는 법, 하나님의 때에 맞춰 일하는 법을 배우면 됩니다.

    모든것에 하나님의 때가 있음을 다시 한번 인정합니다! 때를 쫓아 순종하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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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풍이 불어옵니다. 로마로 가는것이 하나님의 뜻이긴 하나 그렇다고 ‘순풍’만 부는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환경’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곤 합니다. 잘 모르겠을때는 ‘순풍’이 불면 하나님의 뜻이고, ‘역풍’이 불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이렇게 결론 내리는 것이죠. 그러나 이와 같이 때로는 하나님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역풍’을 만날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모든 이유를 다 알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앞서 말한것처럼 ‘하나님의 때’를 위해서 늦추시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 항해길에서 누군가를 만나야해서 그럴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이 ‘호송과정’을 통해서 율리오백부장을 구원해야 해서 여행과정의 시간을 늘리는것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이유인지 모르지만 ‘역풍’이 불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역풍’만 불었다 하면 겁먹고, 멈추고, 포기하고, 부정하는, 이렇게 섣부른 결론에 다다르는 것을 조심해야 될것입니다. 오히려 기도하고, 분별하고, 점검하는 과정이 꼭 필요할 것입니다.

    ‘역풍’ 속에도 여전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습니다. ‘역풍’ 속에서도 분별하는 지혜를 주실 하나님을 믿습니다. 제가 지금 교회개척을 계속 하고 있는데요. 이 교회 개척이라는 항해길에서 역풍과 순풍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흔들리지 않고, 분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이 길을, 이 뜻을 성취하는 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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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도 아니고, 역풍도 아닌데 환경 때문에 흔들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겨울을 나기에 적당하지 않으니" 이동하자!

    우리는 자주 ‘환경’ 때문에 결정합니다. 다른 이야기들도 있고, 중요한 사실들도 있지만 그중에서도 ‘환경’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기는것입니다.

    신앙인이 이처럼 ‘환경’ 때문에 결정하기 시작하면 할수 있는 일이 너무 줄어듭니다. 예를 들면 고3은 전도하기 적당하지 않은 때입니다. 신인사원은 선교가기 적당하지 않은 때입니다. 휴가를 많이 써야되기도 하고, 회사가 추천하는 일정이 아닌 교회의 일정에 맞춰 휴가를 써야하잖아요?! 또 젊은이의 때는 신앙생활 하기가 적합하지 않은 때입니다. 이력도 개발해야하고, 놀기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환경과 상황’은 결정에 중요한 근거가 될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러한 환경에 지배되면 온전한 결정을 하지 못합니다. 다시 한번 예를 들면 ‘더 좋은 환경’을 위해서 태풍시즌에 바다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겠다는, 오늘분문에 나오는, 위험천만한 일을 하는것입니다. ‘더 좋은 환경’을 위해 ‘최악의 환경’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입니다. ‘환경’에 대한 무한 신뢰를 버리고, 하나님을 향한 무한 신뢰를 가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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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 보기에, 세상이 듣기에 ‘미쳐보이는 사람’ 이 바울입니다. 그러나 그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크리스천일 뿐입니다.

    세상은 크리스천을 감당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르고, 예수를 말하고, 예수를 행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크리스천이 되고 싶습니다. “너 미친거 아니야?” 라는 칭찬을(?) 듣는 크리스천이 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 미치지 못하면 그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 미치지 않으면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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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이 짧은 시간에 나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28절)

    바울은 ‘생각’ 한게 아닙니다. 시도 한것입니다. 될까? 안될까? 생각하면 시도가 늦어집니다. 시도가 힘들어 집니다. 망설이게 됩니다. 계산하게 됩니다. 바울은 ‘될수도 있지않을까?’ 생각한게 아니라 전하고 기도합니다.

    이런 시각으로 생각해보면 전도는 생각이 아니라 기도와 실천입니다. 생각하다보면 ‘경우의 수’가 떠오르기 마련인데, 경우의 수는 우리가 망설이게 하는 많은 이유를 만들낼 뿐입니다. 전도는 생각해서 ‘될만한 방법’을 찾아서 하는게 아닙니다. 믿음으로 전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도하며 기대하는 것입니다.

    생각에 머무는 전도가 아닌, 기도와 시도의 전도가 되길 도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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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은 빛되신 예수님께 둘러 쌓인후 인생이 바꼈습니다. 가장 찬란한 빛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는 ‘정오’ 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더 밝은 빛’으로 바울을 감싸시면서, 그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상대적 어둠’가운데 있다는 것을 우리로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면, 세상의 ‘정오’같은 순간을 살때라도 우리는 어둠 가운데 거하는 인생일 뿐입니다.

    더 밝은 빛, 가장 밝은 빛 가운데 둘러쌓일때 우리는 인생의 방향을 찾습니다. 잘못된 부분도 바로 잡습니다. 밝으니까 그때부터는 자신감 있게 걸어 갈수 있습니다.

    ‘촛불’을 들은 인생이든, ‘랜턴’을 들은 인생이든, ‘대낮’을 걷는 인생이든, 해가 가장 밝은 ‘정오’를 걷는 인생이든, 그 빛에 만족할 것이 아닙니다. 비교할 수 없는 빛 되시는 예수님을 삶에 모시고, 그분이 조명하시는 길을 걸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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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빛’은 나를 보호하는 빛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간혹 전투 현장에서 일어나는 전투전략을 보게 됩니다. 아군이 적군에 포위되거나, 어려운 상황에 노출될때 하는 여러가지 전략중에 ‘섬광탄’ 전략이 있습니다. 아군이 눈을 보호하는 안경을 쓰고 나서 ‘섬광탄’을 쏩니다. 그러면 엄청난 광량으로 인해 적군이 아예 우리를 보지 못합니다. 너무 밝으니까 못봅니다. 공격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총격전에도 ‘섬광탄’이 없어도 랜턴 하나만 눈에 비춰도 상대가 나를 확인하지 못합니다.

    빛이 우리를 보호합니다. 거룩의 빛이 우리를 사탄의 손길에서 보호합니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거하는 인생, 흠이 없는 인생, 거룩과 경건을 사모하는 인생이 악에서 보호되는 인생입니다.

    빛을 사모하십시다. 빛에 둘러쌓여 사십시다. 경건과 거룩의 빛을 발하십시다! '세상의 빛'이 되어 어둠에서, 악에서 세상을 보호(?)하는 귀한 촛불같은 인생이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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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행’은 어떻게 되었는가? 바울이 여기서 말한 ‘일행’은 유대인기독교인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같이 가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들도 바울처럼 변화받아야하는 사람들 입니다. 같이 빛을 보았지만 직접적으로 만나고, 대화하고, 부르심 가운데로 들어가지 않으면 어쩌면 변하지 못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알고, 예수에 대해서 듣습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 살아 계시던 그때도 그랬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보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경험하고 또한 믿음으로 결단하는 자리에 나오지 않고서는 ‘빛’을 보았으나 다시 어둠으로 돌아가기 일수였습니다.

    ‘빛’ 속에 계신 예수님을 만날수 있도록, 우리의 주변과, 나의 ‘일행’이 주님을 만날수 있도록 하는것도 나의 몫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부름을 받았으니까 그걸로 충분하지! 남들은 모르겠다!” 할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빛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백성과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17절) 그러니 그가 함께 가고 있던 ‘일행’도 전도의 대상이 확실합니다.

    ‘일행’을 신경 써야겠습니다. 내 주변을 더욱 신경써야겠습니다. 빛은 알지만, 들었지만, 보았지만 여전히 바울과 같은 믿음의 변화로 나오지 않은 ‘일행’을 전도하는 실천을 해야겠습니다.

    ‘일행’(company)이 그저 나와 동행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일행’ (company)이 말그대로 나와 함께 사역을 하는 사람들이 될수 있도록 내가 열심을 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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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소망은 무엇인가? 바울도 소망되시는 메시야를 보고 있고, 유대인들도 소망되시는 메시야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론이 다릅니다.

    바울에게 예수님은 메시야입니다. 즉 그가 꿈꾸는 구원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물론 바울도 초반에는 자신에 기대와는 다른 예수님 때문에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국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이 인생에 단 하나뿐인 참 소망임을 인정한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에게 예수님은 메시야를 사칭하는 사기꾼 입니다.

    이러한 극명한 해석의 다름은 어디서 왔을까 생각해 봅니다. ‘소망’에 대한 기대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셔서 자신들을 칭찬하고 구원을 확증해주길 기대했을 것입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정치적, 군사적 구원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일은 그런 일이 아니었습니다. 먼저는 바리새인을 대표격으로 해서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고, 돌이키라고 얘기 하셨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죄인된 자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너무 다른 모습의 '메시야'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그들이 기다리던 '소망'으로 받아들이지 못한것입니다. 더 나가서 유대교의 전통과, 특권의식, 종교리더십을 무너뜨리는 질병과도 같은 존재라고 판단하고 예수를 핍박하여 죽이기에 이른 것입니다.

    내가 기대하던 ‘소망’과 하나님이 드러내신 모습은 다를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을 배척할것이 아니라, 바울처럼 결국에는 하나님을 온전히 수용할줄 알아야합니다.

    나의 소망에 하나님을 끼워맞추는것이 아니라, 나의 소망 되시는 그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소망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성육신 하신 소망을 나의 삶의 유일한 삶의 소망으로 인정하고, 믿으며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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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은 왜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신다는 것을 믿지 못할 일로 생각합니까?” (8절) 바울은 이 사실을 답답해 합니다.

    사실 사람이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것은 절대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생물학적으로, 자연현상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믿지 못합니다. 저도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신다는것”

    그렇습니다. 사람이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믿지 못할 일입니다. 저도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정확하게 얘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살리시는것을 왜 못믿냐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체가 하나님인데 왜 못믿느냐? 당황한듯 반문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떤 질병을 고친다고 하면 안믿깁니다. 못믿습니다. 제가 어디가서 “제가 암 고칩니다. 제가 침 놓으면 허리가 났습니다!” 라고 하면 아무도 안믿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암 권위자 의사가 “이거 초기라 제가 수술하면 낫습니다!” 라고 하면 믿을수 있습니다. 유능한 한의사가 와서 “제가 침 놓으면 허리 움직이실수 있습니다!” 라고 하면 믿습니다. 그들이 그런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말을 믿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못살립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영생을 못줍니다. 사람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활을 논할때 이는 가능한 일이됩니다. 마치 암 권위자 의사처럼, 한의사 처럼, 하나님께 ‘죽음과 생명’은 당신의 능력 안에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살리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니 불가능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 우리를 씻으시고, 부활시키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으세요. 사람을 믿는것도 아니요, 물리적인 그 어떤 것을 믿는것도 아니요, 우상을 믿을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되시는 분이시며,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는 분이십니다. 살리시는 하나님,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합니다.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될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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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로 따지면 바울의 재판은 점점 판이 커지는 재판입니다. 처음에는 지방법원에서 해결할려고 하다가, 고등법원으로, 거기서 해결할려고 시도했으나, 재판이 무기한 연기되고, 다시 재판이 열렸는데 이제 심의를 거쳐 대법원으로 가게 된 상황입니다.

    이렇게 일이 진행되면서 처음에는 ‘지역’에서 집중되었던 일이 이제 한명의 총독을 넘어서 당시 분봉왕이던 아그립바와 버니게까지 출동하는 일로 확장된것입니다.

    모든 이의 눈과 귀가 쏠리는 재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재판에서 바울은 다시 한번 간증을 하는 기회를 얻게 될것입니다.

    그들은 몰랐지만 하나님은 복음에 최대한 많은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계셨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한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메여있는 신세입니다. 그가 원한다고 이렇게 많은 나라의 치리자와 권력자 그리고 관련된 사람들이 모일수가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판’에서 확실하게 활약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곳 UT Austin 캠퍼스와 오스틴지역에서 ‘선교의 판’을 준비하실때, 바울과 같이 확실하게 활약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수 있도록 더욱 날카롭게 날을 갈며 준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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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식 밖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27절)

    상식을 그렇게 좋아하는 베스도는 이 모든 과정에서 빚어지고 있는 ‘비상식적인 일’에 대해서는 선택적으로 모른척 하는 듯합니다. 분명히 베스도가 말하는 일의 진행 과정은 상당히 ‘상식적’입니다. 그러나 애초에 죄 없는 자를 이렇게 오래 붙잡아 놓고 있는것 자체부터가 비상식적인 일입니다. 죄가 없으면 구류해놓는것 자체가 불법입니다.

    선택적으로 상식밖의 일을 하는 이런 상황이 자주 생깁니다. 어떤 영역에 있어서는 상당히 상식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러나 나의 유익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라면 비상식적 접근을 허용하기도 합니다. 남의 일, 남의 자녀일에는 '상식' 찾다가, 내 일, 내 자녀 일에는 비상식이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 것입니다.

    이와같이 일관적이고, 정의로운 가치를 실현하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도해야합니다. 어렵다고 자주 예외의 경우를 만들거나, 이해타산적으로 불의한 일에 눈을 감는다면 그 어떤 정의도 건강하게 실현 할수 없을 것입니다.

    규칙과, 질서, 상식과 정의를 꾸준하게 지킬때 더 영향력이 생기게 됩니다. 아마 베스도의 정치가 이후에 더 힘을 받으려면 그 또한 일관적이고, 정의롭게 법을 집행하는 자가 되야했을 것입니다.

    훌륭한 목회, 혹은 훌륭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는것도 다르지 않을것 같습니다. 꾸준하고 성실하게 규칙과 질서, 상식과, 정의를 실천해야 진정한 인정을 받을수 있을 것이며, 매사를 최대한 공의롭게 실행할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가서 성경의 기준을 따른 상식을 실천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공의에 한걸음 더 다가가는 삶을 살수 있을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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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아하니 벨릭스는 바울을 통해 두가지를 얻고자 했습니다. ‘돈’과 ‘유대인의 마음’입니다. 이 두가지 모두 자신의 입지에 이익이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벨릭스가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바울이 줄수 있는 가장 큰 유익은 돈도 아니고, ‘백성의 마음’도 아닌 영원한 구원의 메세지를 담은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과 벨릭스의 첫번째 일대일 만남에서 바울은 이미 이 복음과 심판을 얘기했습니다. 다 준것입니다. 그러나 벨릭스는 그 이후에도 돈과 백성의 환심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하는가? 바울이 줄수있는 최고를 주었는데 벨릭스는 왜 이렇게 하는가? 인생의 소망이 ‘천국’에 있는것이 아니라 ‘이땅의 삶’에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에 대한 얘기가 혹하기는 하지만 지금 당장 이 땅에서 누리는 화려한 삶에 대한 욕심이 더 큰것입니다.

    우리가 예배와, 사명, 선교와, 거룩등에 더 집중하지 않으며 ‘돈’과 ‘환심’에 더욱 집중하고, 기대하고, 귀 기울이는 이유이이 땅에서의 삶을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영원에 대한 믿음과 소망 대신에, 이 땅에 대한 사랑과 집착이 강하면, ‘복음의 메세지’는 내 삶에 큰 의미가 되지 못합니다. 이 땅을 향한 사랑과 집착이 결국 하나님과, 영원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소멸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하늘의 소망을 가져야합니다. 영생을 믿어야합니다. 천국의 삶에 대한 기대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말씀도, 사명도, 예배도, 선교도 모두 중요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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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스도도 ‘사람들의 환심’에는 관심이 있습니다. 정치 세력이니 당연히 ‘사람들의 환심’을 얻는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환심에만 휩쓸려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베스도는 바울을 유대인들에게 바로 내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하는 행동들이 있습니다. 아니 그것에 목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시선, 그들의 인정, 그들이 주는 권력에 목을 맵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전정긍긍합니다. 언제나 마음에 바람 잘날이 없습니다. 불안하고, 두렵고,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결국 무엇을 하든, 모든 이의 마음을 살수 없고, 환심을 얻더라도 이내 쉽게 변해버리는 사람들로 인해 상처와 배신을 경험할 뿐입니다.

    목회도 해보니까 ‘환심’ 사려고 하면 망합니다. 사람보고, 사람의 만족을 위해서, 그들의 인정과, 환호를 위해서 일하면 흔들리게 되어있습니다. ‘환호’에 대한 욕구를 완전히 사그러뜨리긴 힘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환호’가 그 어떤 가치와 충돌한다면, 당연히 내려 놓아야 하는 가치가 되야할것입니다.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일하는것도 아니고,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신앙생활 하는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한분을, 오직 한 청중으로 여기고, 그분의 환심을 사기 위한 인생! 그것으로 족한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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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팩트체크, 바울은 벨릭스에게 ‘팩트체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부각시킵니다. 그리고 더 나가 증거를 찾을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카더라’가 참 많습니다. 다수가 목소리를 높이고 없는 소리를 해버리면 너무나 많은 이들이 선동됩니다. 그 결과는 참혹하죠. 피해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중에 ‘무죄, 무혐의’가 되어도 이미 사회적으로 매장이 끝난 상황입니다. 혹은 불의하게 감옥살이를 한 후입니다. 팩트체크가 무색해져버리는 것이죠.

    공격하는 이들이 더 악질인 이유는 그들도 이미 이 사실을 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들어 낸 루머가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먼저 상대를 무너뜨릴 것을 아는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지르고 봅니다. 나중에 아닌게 판명되면 “몰라서 그랬어요. 그런줄 알았죠 뭐. 나쁜 의도는 없었어요!” 라는 말도 안되는 변명으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너는 네 이웃에 대해 거짓증거를 하지 말라!” 하나님의 명확한 메세지가 시대를 향해 일갈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팩트가 체크될때까지 판단을 기다려도 늦지 않습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세상의 시스템도 같은 맥락에서 만들어진 규칙입니다. 루머를 만드는 악한 행위, 섣부르게 판단하고 매장하는 악한 행위,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한 언행, 의도적인 언어폭력, 비난, 정죄등은 모두 멈춰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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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은 묵비권을 행사하지 않습니다. 원래 불리하면 묵비권 행사해도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일단 “팩트체크 하면 저에 대한 고발이 거짓인것을 알게 되실것입니다!” 말하고 나서 거기다가 추가적인 말을 덧붙입니다. 만약 여기서 바울을 대변하는 변호사가 있었다면 가만히 듣고 있다가 바로 이 지점에서(14절) 바울을 저지하고 귓속말을 했을 것입니다. “이건 불리할수있는 증언이니 하지 마시죠!”

    그렇다면 불리할수 있는 증언은 무엇이었을까요?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에 대한 기록과, 그 예수님의 도를 믿습니다. 또한 예수님 안에서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고 심판이 있을 것을 믿습니다”(14-15절)

    바울은 자신을 살리는데, 위기를 넘어서는데만 급급한게 아닙니다. 오늘 그의 변론은 (언제나처럼)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만 하는 변론이 아니고, 누가 될지 모르지만, 주변에 귀를 열고 있는 사람들도 복음으로 살리기 위해 하는 변론입니다.

    그는 복음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이기를 힘쓰는 자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할 기회를 만들어 전하는 자가 아니라 인생의 모든 순간이 복음을 전한 기회라고 생각하는 인생입니다. 복음에 대한 그의 태도는 언제나처럼 가장 명확한 본이 됩니다. 다시 한번 복음에 대한 태도를 정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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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의 기다리는 5일이 어떤 시간들이었을지는 오직 추측만 가능합니다. 심적으로 힘든 시간이었을지, 믿음으로 수월하게 넘어가던 시간이었을지, 전혀 신경안쓰고 간수들과 죄수들에게 복음을 기쁨으로 전하고 있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아는것이 있습니다. 그가 보낸 5일의 시간은 다른 사람들이 보낸 5일의 시간과 물리적으로는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어떻게 5일을 보냈을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것은 나는 나의 하루를, 나의 시간을 어떤 의미, 어떤 마음으로 사는가? 일것입니다.

    하루가 가진 의미의 최대가치를 살아내는 삶, 어떤 환경이라도 시간이 가진 의미의 최대가치를 살아내는 삶! 그러한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반복되는 삶을 살다보니까 시간이 너무 빨리 갑니다. 뭐했는지 모르게 지나갑니다. 주일 설교 끝나고 나면 “벌써 금요일이야?” 하는 생각이 듭니다. 5일이 날라가듯 간것입니다. 가치있고, 의미있는 시간들을 보냈던가?!

    하루의 소중함, 한 시간의 소중함, 그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 내는 하루, 일주일, 한달, 일년, 수년, 일생을 가치있는 시간들로 만들어야겠습니다. 기록에서 생략됐다고 내 삶에 없어지는 시간들은 아니니까요! 갇혀있든, 묵여있든, 자유하든, 풍요하든, 바쁘든, 여유있든, 힘들든, 가난하든 시간을 흩뿌리지 않는 가치있는 시간들을 살아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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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대형로펌(?)에서 더둘로라는 사람을 변호사로 고용했습니다.

    더둘로는 말의 시작을 밑도끝도 없는 아부로 시작합니다. “다스림, 태평성대, 선견지명, 개혁’등의 엄청난 단어들을 사용하여 아부한 다음에 “관용을 베푸셔서”라는 부탁조의 말을 합니다. 정의를 논하는 재판장에서 말입니다. 벨릭스가 지각이 있다면 이 말은 그냥 재판에서 이겨보고자 쓰는 가장 유치하고, 얄팍한 수라는 것이 보였을 것입니다.

    한편 (내일 본문을 잠깐 빌려오자면 ㅋ) 바울은 자기 변론의 시작을 이렇게 합니다. “몇년 동안 이 나라의 재판관이셨던것을 알고 기쁨으로 내 자신을 위한 변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이 말은 벨릭스의 마음에 조금더 의미있게 다가갔을 것입니다. 바울의 이 칭찬을 곱씹어보자면, “벨릭스 총독님은 적어도 정의롭게 심판할줄 아는 자라고 제가 알고 있으니, 그 앞에 변론할수 있게 된것이 제게는 기쁜일이고 안도할만한 일입니다!”, 결국 바울의 이 말은, 그러므로 벨릭스에게 더 의미있는 칭찬처럼 들렸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사람의 말은 힘이 있습니다. 상황을 충분히 변화시킬수 있습니다. 그냥 좋은 말을 뱉어낸다고 다 좋은것이 아닙니다. 의미있는 말을, 진정성 있게, 거짓없이 뱉는것이 중요합니다. 거짓말로 힘을 발현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로 힘을 발현하는 것이 건강합니다. 입발린 소리 말고, 진심의 소리를 해야합니다. 하나님께도, 이웃에도, 내 말이 전달되는 이들에게 진심과 정직의 말을 영혼의 무개를 담아 전하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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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염병같은 사람"(5절)

    수치를 주고, 모욕을 주려고 하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유해한 인간임을 표현하려고 한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전염병 같은 사람' 이라고 하는데 수치, 모욕, 유해함을 느끼기보다는 '바울의 파괴력'(?)이 더 강하게 와 닿습니다. 얼마나 강력했으면 '전염병'이라는 표현을 했을까요?

    막을 수 없는 사람! 그런 바울을 더욱 강력하고 날카롭게 만들어 준것이 바로 복음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양날이 선 검과 같아서 우리의 영, 혼, 관절, 골수를 찔러 쪼개기 때문입니다. 복음들고 영향력과 파괴력으로 침투하는 agent가 되야겠습니다.

  • 1

    비장감이 흐릅니다! “죽이기 전까지는 나는 밥도 먹지 않을 것이야!!!” 그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나도 당신과 뜻을 함께 하겠소!!” “나도 그렇게 하겠소!” “나도 하겠소!” 여기 저기서 동조의 목소리가 퍼저나갔습니다. 결연한 의지, 아마 나라의 식민에 앞장섰던 일본의 리더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려고 모인 ‘독립투사’들은 거사 전날밤 이런 결단들을 했을 것입니다. 역사는 이들의 결단과 헌신, 이들의 연합과 시도에 대해 박수를 쳐 줍니다. “멋지다! 안중근! 멋지다 33인의 독립투사!”라고 말해줍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40명도 이런 결단(?)을 했습니다. 어쩌면 독립투사들의 그날밤(?)과 분위기가 거의 비슷했을것입니다. 비장함과 결연함 말입니다!

    “내가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밥도 먹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겠소!!!” 여기저기서 “나도 함께하겠소!” 라는 결연한 의지의 소리들이 울렸습니다. 그러나 이건 멋지지 않습니다. 앞선 상황과 너무 비슷한데 이들은 위대하다 평가 받지 못합니다.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들이 도모하는것은 애국과 정의가 아닌 불의와 살인이기 때문입니다.

    결단보다 중요한것이 방향입니다. 똑같이 돈을 벌어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합니다. 똑같은 회사에서, 똑같이 돈 벌어서 누군가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 누군가는 큰 사기판을 벌이기도 합니다. 똑같이 법을 배워도 누군가는 법을 수호하는데 쓰고, 누군가는 그 법을 피하는데 씁니다. 아마 그들이 법고시를 보기 바로 전날밤 열공하던 그들의 모습은 동일했을 것입니다.

    결단보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위해 결단하고 있는가? 결단의 방향이 맞는가 말씀에 비추어 살펴야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40명처럼, 쓸데없이 결연할 필요 없습니다! 죄를 위해 결연할 필요없습니다. 불의를 위해 결연할 필요 없습니다. 옳은 일을 위해 결연해야하고, 선한 일을 위해 결연해야하고, 주를 위해 결연해야합니다.

    2

    바울을 향한 암살 계획은 조카의 귀에 들어갑니다. 이는 조카를 통해 천부장에게 들어갑니다. 그리고 바울은 보호 속에서 이동수감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조카가 암살계획을 듣게 된것도 은혜입니다. 백부장이 바울의 부탁을 들어주게 된것도 은혜입니다. 천부장이 조카를 만나주고 이 일을 위해 군대를 동원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물론 바울이 ‘로마시민’이니까 백부장이나, 천부장이 이런식의 반응을 한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그뿐만은 아닙니다. 이런 모든 진행에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보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설명되지 않습니다.

    ‘충첩되는 우연’를 세상은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라고 말합니다.

    우연으로 사는게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우연으로 구원받는게 아니고, 하나님의 손길로 구원 받는 것입니다. 애초에 바울이 감옥에 안갇혔으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것처럼 군대의 호위속에 로마로 가는 첫걸음을 때지 못합니다. 그전에 ‘40인의 암살자’ 같은 무리들에게 죽임 당했을 것입니다. 잡히고, 감옥에 갇히고, 40인의 암살자가 음모를 세우고, 조카가 듣고, 천부장이 전해듣고, 군대가 움직이고, 죄인 호송이 명령되고 이 모든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입니다. 과정중에는 이해가 잘 안될때가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버림받은것 같이 느껴질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조각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예비하심이고 인도하심입니다. 축복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세심한 발걸음 입니다.

    오늘 누리는 축복을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오늘 문제의 해결을 그냥 기적이다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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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회자’도 틀리면 지적받고 혼나는게 맞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지키는 척 하면서 오히려 까닭없이 바울을 치라고 명하는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모순적 태도를 지적합니다. (3절) 그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디 감히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모욕하느냐?” (4절)

    한국 교회가 가진 고질적 문제중에 하나가 바로 이와 같은 ‘제왕적 목사’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을 혼돈 가운데로 빠지게 한 주범들이 대부분 제사장들이었고, 리더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백성을 우상숭배하도록 했고, 내버려두었고, 바르지 않은 길로 인도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무너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만약 ‘제왕적 대제사장’을 견제하고, 점검하고, 지적할수 있었다면 많은 역사적 비극들을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왕 같이, 당시 지존(?)의 권력을 가진것 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보내신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통해서 잃어버렸던 길을 다시 회복할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라서 무조건 옳은게 아닙니다. '목사'라서 무조건 옳은게 아닙니다. 저도 ‘목사’라는 직분(?)을 가지고 살다보니 부지불식간에 지적에 되게 익숙하지 않고, 불편해 하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끔찍한 태도입니다. 이런 자세는 절대 지양해야합니다. 누군들 지적받을수 있고, 누군들 혼날 수 있습니다. 아닌 것은 아닌것이고, 건강한 견제와 점검이 필요합니다. 무지성적, 무분별한 지적을 해도된다는것은 아닙니다. 건강한 지적을 해야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건강한 지적을 성숙하게 받아들일줄 알아야한다는 얘기를 하는것입니다.

    제왕적 목회는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 건강한 지적을 성숙하게 수용하고 변화를 시도하는 목사가 되겠습니다.

    2

    전략적 제휴를 맺고 바울을 옳아 매려고 했던 베리새파와 사두개파는 오히려 바울의 계략에 빠져서 서로 싸우기 시작합니다. (7절)

    잠시 오늘의 문맥을 벗어나 ‘분열과 연합’이라는 개념에만 집중에 묵상해 보면 귀한 지혜를 다시 한번 상기 하게 됩니다.

    분열은 일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애초에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연합한 이유도 바울을 제거하자는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와같이 (오늘 본문의 문맥을 떠나) '분열과 연합'이라는 개념만을 보자면, 연합은 일의 성취를 돕지만 분열은 일의 실패를 조장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연합해야합니다. 서로에 대한 지체 의식과, 수용, 그리고 사랑에 기반하여 함께 할때 사명을 성취하기가 수월해집니다. 만약 서로 분열하기 시작한다면 되던 일도 실패할수있습니다. ‘분열을 조장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거나 현혹되지 않아야겠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이런 ‘허점’을 공격했고, 그들은 바울이 던지는 ‘분열의 메세지’ 앞에 휘청대 싸우고 말았던 것입니다. 분열이 아님 연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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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회를 하다보면 어려운 여러가지 영역들이있습니다. ‘목양’이 어렵기도 하고, ‘행정’이 어렵기도 합니다.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저는 ‘설교준비’가 가장 어려운 부분중에 하나입니다. 매주 주일 설교 뿐만 아니라, 말씀 묵상 나눔과 그 외의 영적 메세지들을 적다보면 영혼과 생각까지 다 소진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한 교회에 상주하며 사역하기 때문에 매번 메세지가 새로워야한다는 강박도 한결 저를 더욱 힘들게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힘든 부분은 무엇이었을까요? (단편적으로 본다면) 그는 저처럼 매번 ‘새로운 메세지’를 준비하는 어려움보다는, 매번 새로운 장소에서, 적대적인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이 상대적으로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아도 “담대하여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에 대해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나에 대해 증언해야 할 것이다!” (11절) 즉 내용이 바뀌는게 아닙니다. 사람과 환경과, 대적이 바뀔뿐입니다.

    누구든 ,그게 목사든, 평신도든, 선교사든, 각자에게 맡겨진 사역의 어려움은 각기 다릅니다. 처한 환경과 상황에 따라 다 다릅니다. 누군가는 사역이 (일 자체) 힘들고, 누군가는 환경이 힘들고, 누군가는 사람이 힘듭니다. 가장 힘들게 하는 영역들이 다 다릅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것은 모두 ‘나름의 어려움’이 있다 라는 사실입니다!

    이게 나름 위안(?)이 됩니다. 원래 그렇게 “자기 십자가”지고 예수를 따라야하는 법이지요. 바울이 불평없이 로마로 가서 또 다시 복음을 전하는것처럼 저도 불평없이 또 다시 말씀을 써내려가고 맡겨진 사역을 성실히 해내야겠습니다. ㅋ

    그러고보면 오늘 이 말씀이 마치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는것 같습니다.

    “힘을 내라! 네가 지난주에 성경 말씀을 준비해서 전한것같이 다음주에도 또 성경말씀을 준비해 전해야할 것이다!”(11절) 아멘입니다! ^^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각자의 부름받은 자리에서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실히 사역을 감당하길 응원하고 도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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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다행입니다! 바울이 또 맞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정말 지겹게 맞았습니다. 죽을고비도 너무 많이 넘겼습니다. 많이 맞았다고 더이상 안아픈것은 아니겠지요. 맞을때마다 얼마나 아팠을지 감히 상상이 안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채찍질하고 신문하라” 라고 할때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는 자신이 로마시민임을 밝혔고 덕분에 채찍질을 피할수 있었습니다.

    너무 다행입니다. 이와 같이 안맞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왠만하면 안 맞고 싶습니다. 이게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 어떻게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고난의 위기’를 피하고 싶습니다.

    고난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고난이 있다고 해서 사명을 도망갈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맞는 것을 즐기지는 않습니다. 고난을 마냥 즐기지는 않습니다. 어쩔수 없이 고난 가운데 있다면야, 이왕 일이 이렇게 된거, 기쁨으로 마주하고, 용감하게 넘어서겠지만 할수만 있다면 안겪고 싶습니다.

    오늘 바울을 채찍질에서 보호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도 이러한 보호들로 항상 함께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필연적인 ‘십자가’야 어쩔수 없겠지만은, 불필요한 채찍질은 좀 피하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2

    “그러자 주께서 내게 ‘가거라. 내가 너를 저 멀리 이방 사람들에게 보낼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1절)

    아는 선후배, 동료 목회자들 중에도 선교사로 해외로 나가계신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고 젊어서부터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분들은 그렇게, 소위 말하는, 본토를 떠나 해외 각지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교사역이 그런거 아닌가 싶습니다. 누군가는 여기서, 누군가는 저기서 선교합니다. 누군가는 이 민족에게, 누군가는 저 민족에게 선교를 합니다. 이 또한 시절을 따라 변화무쌍하기도 합니다. 실제 우리는 누구나 유한하기 때문에 모두에게 복음을 전할수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선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쫓는게 가장 정확합니다. 바울도 자신의 생각과 계산을 쫓았다면 ‘이방인의 빛’이 아닌 ‘유대인의 빛’이 되기를 시도했을 것입니다.

    선교는 나 자신을 믿는 자신감에서 비롯되는것도 아니고, 나의 계획으로 방향을 정하는 것도 아니고, 경험으로 판단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필요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모든 사안들이 중요하겠지만 먼저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중요합니다. 그분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시간, 방향, 뜻을 쫓아 부르신 곳에서 선교를 감당하는 사역자가 되야겠습니다. 지금 저에게 주신 ‘오스틴이라는 선교지’를 마음에 더욱 품고 이 땅에 빛이 되기 위해 성실과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3

    “바울이 로마 시민 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를 결박한 일로 두려워했습니다.” (29절)

    당시 세상은 ‘로마시민권자’의 권리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의 권세를 두려워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국력의 증거입니다.

    우리는 ‘천국 시민’입니다. 우리가 두려워 할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세상이 두려워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지않고,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다른 그 어떤 ‘나라’와 ‘권세’와 비교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결박하면 그들이 두려워해야합니다.

    천국 시민으로 세상안에서 주눅들고, 겁내고, 숨어지내기 보다는 담대하고, 자신있게, 크게 목소리 내며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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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울은 출신도, 배경도, 학력도, 커리어도 크리스천이 되기에는 상당히 거리감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과거 그는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핍박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거부할때 이러한 명분을 내세웁니다. “나는 불교집안에서 태어났어요. 나는 이슬람 국가에서 태어났지요. 나는 원래 학구적인 사람입니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지 않으면 받아들일수 없지요. 나의 직장은 기독교인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나의 부모는 내가 기독교 종교를 갖는것을 허락하지 않아요!”

    바울은 예수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배경과 명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것은 예수님을 만날때 한번에 깨졌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나의 출신, 배경, 지식등 모든 명분을 뛰어넘습니다. 누구든 주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 주님께 나와야합니다. 바울같은 사람도 예수님 만나고, 믿고, 회개했다면, 누구나 그렇게 될수 있습니다. 누구나 사명자가 될수 있습니다.

    2

    “바울이 히브리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는 이내 조용해 졌습니다.” (2절)

    익숙한 언어가 귓가에 들리면 집중하게 됩니다. 캐나다 처음 유학 갔을때 주변에서 하는 영어소리 하나도 안들리는데요, 멀리서 한국말이 들리면 그건 그렇게 또렷하게 들립니다. 조용한 목소리 인데도 익숙한 소리, 내가 아는 언어이기 때문에 또렷이 들립니다.

    히브리인들은 바울이 헬라어가 아닌 히브리 말로 말하기 시작하자 자신들도 모르게 귀가 쫑긋합니다.

    익숙한 언어는 또렷이 들립니다. 집중하게 됩니다. 영적인 원칙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언어가 익숙해야 하나님의 언어가 선포될때 들립니다. 반대로 말하면, 하나님의 언어가 안들리는 이유는 그게 ‘나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인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어가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읽어도 잘 안들리고, 기도를 해도 잘 안들립니다. 마치 이제 막 유학길에 오른 제 귀에 들리는 영어 같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언어에 익숙해져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해져야합니다. 원래 영어 배울때도 최선의 방법은 잘 몰라도 주구장창 영어책을 읽는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잘 없습니다. 자꾸 읽으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들리고 , 이해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히브리 인은 아니지만 ‘천국시민’입니다. 하늘의 언어에 익숙한 사람, 하나님의 언어에 익숙한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한 사람이 되야겠습니다.익숙한 만큼 들리게 되어있습니다!

    3

     바울의 회심은 너무 특별합니다. 갑작스럽게 예수님께서 환상으로 나타나셔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을 적대하던 그가 오히려 이방인을 위한 전도자로 선택되었습니다. 특별한 케이스(?)입니다. 당시에도 이런 개종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인 일은 공감하고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신기하고 드문 일은 오해하고 의심하고 딱 좋습니다. 바울의 간증은 그런 의미에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듣다보면 황당할 만한 내용입니다. '환상', '빛', '장님' 그리고 다시 '개안' 이런게 흔한 일은 아니니까요. 그러니 바울의 입장에서 조금더 효과적(?)으로 간증을 하려고 한다면, 확인이 불가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말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적들 말고, 증인이 될수 있는, 존경 받는 아나니아의 얘기를 좀더 상세히 하면 될것입니다. 그렇게 할때 자신의 간증이 더욱 일반적이고, 공감하기 쉬운 얘기가 될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간혹 '지성인'을 자처하는 신앙인들이 자신의 신앙의 간증을 하면서 '기적과 신비'에 대한 부분을 생략하는 것들을 봅니다. 개인적으로 10대 후반부터 20대초반까지 제 자신이 이런 성향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생략한 이유는 '비신앙인'은 기적과 신비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우니 그 부분을 빼고, 그들이 이해할수있는 정도의 선에서 간증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실 말도 안되는 생각입니다. 복음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기적인데 말입니다!

    이런 작위적인 생각이 확장되면 성경의 말씀과 사건을 전할때도 자꾸 일반적이고, 사실적인 부분만을 가르치고, 기적의 영역은 생략하거나, 간소화 하는 경우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증명되지 않는 성경의 사건은 '신화'나 '소설'로 여기는 일까지도 발생합니다.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이런 형태의 접근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일례로 '출애굽사건'을 얘기할 때, 하나님의주권적 역사와 수많은 기적들을 생략하거나 간소할수 없는데도, 그부분은 최소화하거나심지어 부정하고, 모세의 역할, 역사적 사실만 나열하기도 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은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 입니다. 하나님은 이해의 저변에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차원밖에 계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을 전하면 신비와 기적을 선포할수밖에 없습니다. 내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전할때 축소된 하나님이 아니라 무한하신 하나님을 전함으로 세상이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과 영광을 바로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역사 속에 속하신 하나님이 아니고,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주권적이고 강력한 하나님을 알게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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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령님의 감동’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바울이 어디를 가든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당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때 ‘성령님의 감동’이 현실이 됩니다. 바울과 동역자들은 어떻게든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막히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일어나야할 일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준비하고, 막으려고 해도 이와같이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나는 법이죠. 여름에 장마를 준비해도 장마를 피할수는 없습니다. 학생이 시험을 준비해도 시험을 피할수는 없습니다. 성도가 복음을 위한 고난을 준비하여도 고난을 피할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일어나야할 일을 마주할 때, 걱정이 현실이 되고, 준비가 빛을 발해야하는 그 순간을 마주할때, 우리는 돌파해야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두들겨 맞고, 잡힌 바로 이때 천부장에게 말합니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37절) 그렇게 그의 간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그때가 오면 (일어나야할 일을 결국 마주할때) 담담하게, 자신감 있게, 포기하지 않고, 놀라지 않고, 실망하지 않고 해야할 일을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그동안 한 준비가 무색하지 않도록, 문제의 그 때를 만나면 담담히 돌파하겠습니다!

    2

    천부장은 바울의 말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진위여부를 먼저 확인하려고 하는것이죠. 그러나 유대기독교인들은 그저 선동당했고 바로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간혹 뉴스를 보면 ‘악질 범죄자’도 최후변론의 기회를 얻더라구요. 그들도 자신의 입장을 대변할 기회를 얻습니다. 자신을 보호할 권리를 보장받는 것이죠. 그런데 교회는 자주 듣지 않습니다. 그들의 생각과 배경, 진위여부를 확인하지 않습니다. 먼저 정죄부터하고, 비난하고, 폭력을 행사합니다. 그렇게 한 명의 인생에 치명타를 날리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들어봐야합니다! 들어봐야죠! 그리고 나서 판단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무작정 달려들어서 때리는 것은 정의 실현이 아니고 폭력 행사일 뿐입니다.

    듣는 교회, 듣는 성도가 되야겠습니다.

    3

    “전할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39절)

    바울 자신이 위기 가운데서 만들어낸 기회 입니다. 누가 대신 만들어준 기회가 아닙니다. 그 급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바울 자신이 요구해서 만들어낸 기회입니다.

    천금같은 기회입니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는 사람들,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 몰아부치는 선수들! 그런 자들에게 이런 기회가 찾아오곤 합니다.

    너무 쉽게 포기해 버리고, 너무 쉽게 수긍해버리면 아직 더 할수 있는 기회를 내가 차버리는 것입니다. 상황을 역전 시킬수 있는 기회를 내가 버리는 꼴입니다. 입을 열어 한마디라도 더 해봐야합니다. 한 걸음이라도 더 걸어봐야합니다. 요구하고, 시도하고, 노력하기를 멈추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렇게 할때 하나님께서 기회주실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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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준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15절)

    뭘 준비했는지는 모르지만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필요한 준비를 빠짐없이 했습니다. 가방도 싸고, 일정도 다시 한번 확정하며 준비했을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쫓아 행하는 것이지만, 바울이 해야할 일은 바울이 준비해야합니다. ‘유비무환’이라고 했던가요? 준비를 한만큼 우리는 많은 것들을 대비하고, 상대적으로 피해는 줄이고, 일은 효율적으로 하고, 순적하고 빠르게 할수 있습니다.

    일례로 태풍이나, 산불등에 대처하여 준비해 놓으면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적은 피해로 위기를 넘어서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도 열심히 준비해야합니다. 예배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지만 예배를 섬기는 목회자와 동역자들은 열심히 예배를 준비해야합니다.

    요즘 토요일날 다시 모여서 찬양팀이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2-3시간 이상을 사용하면서 연습한다는 것이 어찌보면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수있는 준비가 이런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며 성실하게 연습합니다. 그리고 예배가 되면 성도들은 덕분에 함께 자유하고 기쁘게, 최소한의 방해 속에서 예배에 집중하게 될것입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맡기신 일을 할때는 항상 ‘최선의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은혜’타령 할것이 아니라, “최고의 하나님께 최선의 것을 드리는” 자녀가 되야겠습니다. 앞으로 더욱 즐겁게, 더욱 성실하게, 더욱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2

    “우리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형제들이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17절)

    얼마전에 한국을 갔을때 저를 따뜻하게 환영해주었던 동료 목사님이 있습니다. 저는 원래 (부끄러운 얘기지만) 한국에 친구나 지인이 거의 없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유학을 하기도 했고, 또 생각 보다 넓게 대인관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기도 합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성적인 성향 때문인지 동료 목사님들과 4-5년을 지내도 깊이 교제하는게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미국에서 떠나보냈던 한 목사님이 한국을 방문한 저를 따뜻하게 맞아 주신것입니다. 내심 얼마나 반갑고, 기쁘고, 감사하고,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누군가를 ‘따뜻하게 맞아주는것’은 참 복된 행실 입니다. 이런 환영을 통하여 지친 마음도 위로가 되고, 낮은 자존감도 회복이 되고, 외로움도 치료가 되고, 혼자라는 두려운 마음도 돌파하게 됩니다.

    그냥 그렇게(?), 성의 없이, 마음 없이 맞아주기보다는 따뜻하게 맞아주는 믿음의 형제자매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

    “우리가 일러 주는 대로 하십시오.” (23절)

    예루살렘에는 ‘유대기독교’인들이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배경 때문에 ‘율법’에 대한 적용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바울은 대외적으로 ‘할례와 율법을 폐하는자’로 알려져있었습니다. 그러니 여기 예루살렘에서 ‘유대기독교인’들을 만난다면 입장이 난처해지고, 사역에 어려움을 겪게 될 일이었습니다.

    이때 예루살렘에 있는 바울의 제자들과 동역자들은 바울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가 말해주는데로 가서 ‘정결의식에 참여하고 그들의 머리깍는 비용을 대시면 그들이 가진 오해도 풀릴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안내해주는데로 다음날 하라는데로 행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이와같이 ‘본질’만 빼고는 임기응변에 탁월해야합니다. 복음의 걸림돌은 미연에 제거 해야합니다. 내 고집을 피울것이 아닙니다. 내 체면을 생각할 것도 아닙니다. 내가 좀 양보해도 됩니다. 사람에 맞게 복음의 전략을 정하되, 본질만 고집스럽게 붙들면 되겠습니다.

    바우교회의 예배는 본질을 지키고, 예배의 방식을 지혜롭게 실행하겠습니다. 바우교회의 선교는 본질은 유지하고, 선교의 방식은 지혜롭게 취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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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은 가는곳마다 ‘제자’가 있고 ‘지인’이 있습니다. 이는 다 복음으로 연결된 자들입니다. 믿음의 형제 자매들 입니다. 이를 통해 알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어딜가나 복음을 전했고, 제자를 삼았고, 믿음안에 교제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딜가나!

    우리는 목적이 명확합니다. 놀러가면 그곳에서는 전도하지 않습니다. 과거 선교의 목적으로 방문했던 곳을 가면 ‘제자’들을 만날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러 갔던 ‘칸쿤’을 가면 거기에는 제자들은 없습니다. 믿음의 형제 자매는 없습니다. 바울은 좀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가는곳마다 전도의 목적성을 띠었을뿐 아니라, 설령 다른 목적이여도 그는 언제나 복음을 전하고, 믿음의 형제 자매를 만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오늘 본문 내내, 가는 곳곳에서 지인과 제자를 만나기에 급합니다.

    어딜가나 예수의 복음의 발자취를 남기고,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가는 바울같은 삶을 살아야겠다 도전 받습니다. 미국 어디를 가든, 세상 어디를 가든 방문한 그곳에서, 땅을 밟은 그곳에서 복음이 나눠지고, 예수가 드러나며, 믿음의 형제 자매를 만들어 내야겠습니다.

    큐티는 나 자신에게 적용하는것이라고 하지만 이 묵상을 하면서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을 어쩔수는 없네요. 출장이 많으신 분들, 이동이 많으신 분들, 방문이 많으신 분들, 휴가 자주 가시는 분들! 이동 목적에 상관없이, 바울처럼 가는곳마다 복음을 전하고, 제자삼고, 믿음의 공동체를 만드시면 어떨까 도전해봅니다! 우리 모두 화이팅입니다!

    2

    “성령의 감동”(4절)은 뭘까요? 이는 이미 바울이 말한 바 입니다.

    [행20:23, 우리말성경] 오직 내가 아는 것은 어떤 도시에 가든지 감옥과 고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을 성령께서 내게 증언해 주실 뿐입니다.

    바울은 성령님을 통해 이 '감동'을 받았을때, ‘그러므로 더욱 마음을 굳세게 함으로 예루살렘으로 꼭 올라가야겠다!’ 라고 결심했습니다. 성령의 경고에 감사하며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전진하기로 마음을 다잡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감동' 즉, ‘고난’에 대해 듣게 되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바울을 어떻게든 못가게 하려고 결심 한것입니다. 이들의 바울을 향한 사랑과 아끼는 마음은 아름답지만 그게 성령님의 뜻은 아니었습니다.

    이와같이 똑같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도 이렇게 대처법이 다르고, 결단이 다릅니다. 자칫 사람의 마음이 많이 들어가면 같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도 엉뚱한 해석과 적용을 하게됩니다.

    성령의 감동을 분별하고 적용하려면 내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봐야합니다. 내 마음과 욕망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해석해야합니다. 기도로 분별해야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바르게 분별하여 온전하게 적용하는 바울과 같은 신앙인이 되야겠습니다.

    3

    “바울이 설득당하지 않자!” (14절)

    하나님의 사람은 설득(?) 당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마세요! 안 져도 됩니다!” 제자들도 말하고, 주변 인들도 말하고, 기록 안됐어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소리쳤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말에 설득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났을지 모를 타협의 목소리에도 설득되지 않았습니다.

    바울도 설득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의 말에도, 예언자들의 말에도, 부탁이여도 설득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타협의 목소리가 들렸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설득당하지 않았습니다.

    이와같이 사명은 설득당하지 않습니다! 이게 참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상대적으로 힘들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마음을 정했다고 선언합니다. 이미 죽을 각오를 했다고 말합니다.(13절)

    어쩌면 우리가 마음을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설득당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마음을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설득을 피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바울처럼 마음을 정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놓고 설득당하지 않겠습니다. 내면과 외면에서 들리는 소리들에 설득당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의 사랑과, 관심은 감사히 받고 기억하되, 사명을 내려 놓는 선택을 하지 않겠습니다. 신경써주시고, 관심 가져주시고, 충언해주시고, 아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사명을 향해 달려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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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압니다.” (25절)

    다시 보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짓말입니다. 그들은 결국 다시 보게 됩니다. 이땅에서는 아닐지언정 천국에서 다시 조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가지만 확실하면 됩니다. 바울도 믿고, 그들도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 안에 믿음을 잃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됩니다. 부활의 그날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러니 마지막이지만 마지막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참 많은 종류의 이별을 하게 됩니다. 부모, 자녀, 형제자매, 친구, 이웃, 동료등 아끼고 사랑하는데 이 땅에서 더이상 보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바울처럼 사명을 위해 떠났다가 못보게 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일상의 사고 때문에 목숨을 잃어 못보게 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그저 이별했지만 이 땅에서의 인연이 다해 못보게 되기도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지킨다면, 예수님을 붙잡는다면 우리는 결국 다시 만나게 될것입니다. 마지막이지만 마지막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수많은 이별이 우리의 삶을 흔들려고 할때 이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믿는 자는 부활의 때에 반드시 다시 만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믿음을 지킬때, 언젠가 그 믿음으로 인하여 나의 사랑하는 이들을 다시 만나게 될것입니다. 그날을 꿈꾸며 믿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그날을 꿈꾸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겠습니다.

    2

    “여러분 가운데 들어와 양 떼를 해치려 할 것을 압니다.” (29절)

    이걸 알면서도 바울은 떠나야합니다. 언제까지나 옆에 서서 대신 막아주고, 견뎌줄수 없습니다. 그렇게는 성장할수 없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보호합니다. 그러나 언젠가, 어떤 순간에 아이가 오롯이 문제를 마주하게 하고 돌파하게 합니다. 그 기회 없이는 성장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튼튼해 질수 없고, 온전히 배울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이 고난을 만날것을 알면서도 급하게 떠나는 이유는, 눈앞에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사실 에베소 교인이 믿음의 성장을 할 타이밍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옆에 계시지만) 계시지 않은것 같은때, 그분이 나를 떠난것 같은 때, 기회입니다. 내가 돌파하고, 배우고, 성장할 기회입니다.

    세상은 내 안에 들어와 나를 헤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을 똑바로 차려 깨어 있으면 됩니다. 말씀으로 분별하고 싸워 이기면 될것입니다. (31절) 지난 수년간 배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겨 낼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성장하게 될것입니다.

    리더로써,

    언제나 무리하고 과도하게 나서는 것이 지혜가 아님을 기억하는 리더가 되야겠습니다. 떠날때를 바로 알아 떠남으로 성도의 성장을 막지 않는 리더가 되야겠습니다. 항상 정신을 똑바로 차려 깨어 있고, 말씀으로 분별하는 리더가 되야겠습니다.

    팔로워로써,

    리더가 곁에 없을때 무작정 낙망하고 포기하고 보는 팔로워가 되지 않겠습니다. 리더가 부재할때 성장할 기회임을 인식하고 더욱 열심을 내는 팔로워가 되야겠습니다. 리더의 유무에 상관없이 항상 정신을 똑바로 차려 깨어있고, 말씀으로 분별하는 팔로워가 되야겠습니다.

    3

    “바울은 이 말을 마치고 나서 그들 모두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36절)

    결국은 기도 입니다. 기도의 힘은 위대합니다. 하나님은 중보하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바울은 결국 이 ‘성도의 기도’로 이겨내게 될것입니다.

    오늘 나의 나됨이, 오늘 바우 교회의 바우교회됨이, 기도하는 자들의 기도를 통해 이뤄진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선명한 증거입니다.

    결국 기도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사역들 앞에서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하는것이 기도입니다.

    Would you please pray wit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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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나 다행입니까? 예정대로, 약속대로 그들은 앗소에서 바울을 만나 그를 태우고 미둘레네로 갈수있었습니다. 예정했고, 약속했으니 당연한 일 아니냐고 누가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바울은 항상 위협에 노출된 상태였고, 적대하는 세력도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약속된 날에, 약속된 장소에 나타나지 못할수도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약속된 날, 약속된 장소에 온다고 한들 지금처럼 핸드폰도 없으니 당연히 만나는 것이 지금보다는 어려울수도 있는것입니다. 저와 같이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기 전 약속 시간을 정하고 공중전화를 찾던 세대만 되도 ‘예정’과 ‘약속’이 언제나 순리되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예정과 약속은 하나님의 섭리와 도우심이 없다면 성취될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정은 하되 확정할수 없으며, 약속은 하되 보장할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MBTI 성향중 'J'가 아무리 계획을 세우면 뭐합니까? 하나님께서 도우시지 않으면 'J'의 탁월한 예정과 약속도 다 깨지게 될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J'의 완벽한 계획이 아닌, Jesus의 성실한 인도입니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서로 예정대로, 약속대로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인도하심을 찬양합니다. 또한 이와 같이 제 삶에 예정과 약속들이 가능하게끔 만들어 주시고, 허락해주시고,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정과 약속 속에서 동역자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일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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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체하지 않으려고” (16절)

    지체하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에게 에베소는 특별하고, 그 교인들은 더욱 특별합니다. 2년이 넘도록 말씀으로 가르치고 교제한 성도요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차후에 말씀의 기록에도 나오지만 바울은 지금 가는 여정들이 마지막이 될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다시 올지 모르는 이 기회에 에베소에 멈춰서 시간을 좀 보내고 지체해도 될것 같습니다. 누가 뭐라고 할까요? 사실 사람들은 바울이 에베소에 머문다고 그것을 ‘지체한다’라고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체하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오순절에 맞춰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합니다.

    지체하다보면 처음에 결심이 바뀝니다. 생각이 바뀝니다. 상황이 바뀝니다. 이는 더욱 지체할 이유가 되곤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체는 생각보다 위험합니다. 원래의 계획을 무너뜨리기도하고, 수정을 불가피 하게 만들어 버리기도합니다. 그럼 결과는 판이해질수 있습니다.

    중요한 일에는 지체함이 없어야합니다. 해야할 일에는 지체함이 없어야합니다. 돌다리를 한번, 두번, 세번 두들기면 됐지 천번 두들기고 있다면 그것은 더이상 ‘확인절차’가 아닌 ‘명확한 지체’입니다.

    변명과 핑계를 과감하게 끊어 내야합니다. 지체하지 않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에베소 가서 머물지 않지만 에베소에서 자신을 보기 원하는 장로들을 불러들입니다. 지체하지 않는 선에서 중요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지체하지 않는 삶이 중요합니다. 지체하지 않는 사명자가 되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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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상 가운데 자꾸 ‘개척교회’ 얘기를 하는게 민망하지만 어쩔수 없나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면서 “오직 내가 아는 것은 어떤 도시에 가든지 감옥과 고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을 성령께서 내게 증언해 주실 뿐 입니다.” (23절) 라고 말합니다.

    제가 ‘개척교회’를 결심할때 성령님께서 내게 깨닫게 해주시는 마음이 바로 이런것이었습니다. “쉽지 않을것이다. 고단할 것이다. 너의 생각대로 모든 것이 순탄하지 않을 것이다. 외로울 것이다.” 등등입니다. 기도 가운데 주시는 확신도 있지만 동시에 어려움에 대한 명확한 공지(?)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도 누군가는 격려와 위로와, 응원으로 함께 했고 누군가는 고난과 어려움에 대한 걱정의 말들로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서 내게 주신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사명을 다 완성하기 위해서라면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24절)

    이 말씀을 인용하기에는 너무 거창하지만, 이런 비슷한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바울처럼 죽으러 가는게 아니니까 “바울과 같이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확실히 과도한 표현이며, 비교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이런 비슷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주께서 주신 사명이니 고단하고 어려울지라도 반드시 이 일을 위해 뛰어들어야겠다!’

    주님의 일을 막을것은 없습니다. 성령님과 함께 예견된 고난도 넘어서야합니다. 예견된 어려움도 기꺼이 감수해야합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내 인생 조금도 귀한것으로 여기지 않고 뛰어들어야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예견된 고난도 뛰어넘어 사명을 실행하고 성취하는 자가 되야합니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다 이렇게 살아야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28:19-20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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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려를 받아보니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것 같습니다. 개척 1년, 그동안 많은 분들이 바우교회에 오셔서 격려해주셨습니다. 아마 바울의 제자들은 바울이 다시 온다고 했을때 그 사실 하나만으로 큰 힘이 됬을 것입니다. 제 멘토 목사님이 오신다고 했을때 저도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셔서 교회 로고가 있는 티셔츠 입고 사진 찍어주시고 기도해주시는데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격려와 위로가 됐는지 모릅니다. 그 외에도 최근까지 이어진 방문과 기도, 기억해주시고 관심가져주시는 것으로 인해 말할수 없는 격려를 받았습니다. 힘을 얻었습니다.

    격려 해야합니다. 바울의 격려의 발자취, 격려의 말한마디가 참 중요한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격려하는 그러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서로의 사업장도 방문해주고, 칭찬도 해주고, 잘한다고 격려하고 응원도 해줘야합니다. 그러면 그게 얼머나 큰 힘이되는지 모릅니다.

    바울은 그렇게 격려하고 떠나지만 그 시간들을 통해 바울의 제자들은 이후에도 큰 힘을 내서 열심히 사역 했을 것입니다. 격려의 사람이 되야겠습니다. 서로 격려하는 성도들, 그러한 교회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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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려는 바울이 하는데 오히려 격려가 가장 필요해 보이는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가 가장 큰 위험 가운데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곳곳에 바울을 죽이려고 혈안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를 해치려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실제 배로 이동하지 못하고 육로로 이동해야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속에서도 바울과 함께 다니던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어려움에 동참하는 동역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려운지 알면서 함께 동행해주는 동역자들이 고맙습니다. 바울도 혼자였으면 조금더 어렵고, 조금더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 함께 하는 자들이 있었기에 용기를 내서 이동하고, 지혜롭고, 안전하게 사역을 감당할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려운것을 알면서도 도와주는 동역자! 몰라서 뛰어든게 아니라 알면서도 뛰어들어온 동역자! 감사할 따름입니다. 바우교회 성도님들을 뵈면서 이런 생각을 안할수 없습니다. ‘어려움을 알면서도 개척교회에 뛰어든 감사한 동역자!’

    이런 동역자들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성도님들이 계셔서 참 다행입니다. 이래저래 갈길은 아직 험하고, 쉬운 ‘뱃길’이 아닌 ‘육로’로 갈지라도 옆에 동행해주는 동역자들이 있어서 힘이 납니다. 나의 동역자들에게 나도 든든한 동역자가 되어주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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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은자가 사는것을 보았는데 반응이 ‘감탄’ ‘신기’, ‘놀라움’등이 아니고 ‘위로입니다. 그들은 부활 사건으로 위로를 받았습니다.

    부활은 감탄, 놀라움등을 위해 행하시는 기적이 아닙니다. 부활 망할수 밖에 없는 영혼에게 영원한 소망이 있음을 알리는 역사입니다. 생명이 끊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생명의 소망이 있다고 하니 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죽는 줄 알았는데 구조대가 온다고 하면 "살았다!" 하면서 얼마나 안도가 되고 위안이 되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의 하나님’은 소망이 없는 우리에게는 가장 큰 소망이 되어주십니다. 가장 확실한 위로 입니다. 부활 예수님은 우리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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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그렇게 밖에 생각이 안됩니다. 결국은 돈입니다. 이들은 돈 때문에 움직이고 있습니다.

    복음 때문에 소동이 났고, 덕분에 아데미 여신은 명예가 실추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여신’이라고 불리는 신(?)은 바울이라는 사람이 하는 모욕을 막지 못해서 계속 수치를 당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마저도 자신을 따른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움직여줘야면 겨우 자신의 체면을 지킬수 있는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위대한 ‘아데미 여신’입니다.

    오늘 바울을 적대하는 사람은 아데미 여신을 추종한다는 은세공업자 입니다. 그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데미 여신이 위대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외치면서도 어쩌면 그들도 자신들의 말들 속에서 엄청난 모순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아 우리 신은 한낱 인간이 모욕을 주는데도 아무것도 못하는구나’

    그러나 이런 깨달음이 있어도 더욱 목소리를 높여 “아데미 여신은 위대하다!”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소동을 일으킵니다. 왜요? 돈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돈을 못벌게 되기 때문입니다.

    돈 때문에 종교를 믿는 사람들, 돈 때문이라면 종교도 바꾸는 사람들, 돈이라면 거짓말도 하고, 사람들도 속이는 사람들,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속이는 사람들! 옳지 않습니다.

    돈과 하나님을 같이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 돈은 사용의 도구! 이것이 진리입니다. 돈 때문에 하나님께 대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배신하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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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지어 자기들이 왜 그곳에 모였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대부분 이었습니다.” (32절)

    이것이 바로 군중심리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혼란스러운 목소리들 사이에 무엇 때문에 있는지 조차 파악 안되고 그냥 소리지르고 보는것입니다. 때로는 화를 내고, 때로는 환호합니다. 이 편이 됐다가, 다시 저 편이 됩니다. 말그대로 “이기는편 우리편!” 입니다.

    무지한 군중심리는 남도 죽이고, 나도 죽입니다. 따라가다보면 누굴 죽인꼴이되고, 따라가다보면 죽임 당하는 꼴이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따를것은 ‘군중’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따를것은 ‘심리’가 아니라 ‘진리’입니다.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다수를 쫓아, 무지간에 행하는 어리석음을 지양해야합니다. 특히나 신앙에 있어서 교회 안에서든, 밖에서는 무작정 다수를 쫓거나, 목소리 큰 쪽을 쫓거나, 이편 저편 철새가 되거나 하는 어리석음도 지양해야겠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만 분명하게 붙들고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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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베소 시청 서기관” (35절)

    결국 공무원(?)이 일을 해냈습니다. 집회를 해산 시켰습니다. 혼란한 군중을 잠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토록 흥분해 있는 사람들을 정신차리게 만들었습니다. 공무원의 힘은 ‘기준’에서 왔습니다. 공무원이 흥분한 사람들에게 ‘법’을 얘기하자, ‘총독’이라는 권세자를 얘기하자 사람들의 흥분이 가라앉고 해산한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권세와 기준 앞에 혹 혼란하고, 무질서하고, 방종한 인생이 있다면 해산(?)되어야합니다. 즉 정리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서기관’, 즉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하나님의 기준과 하나님의 권세로 조명하실때 우리 내면과 인생에 일어나는 ‘혼란한 집회’를 해산 시켜야할 것입니다. 무질서한 흥분과 혼란을 멈춰야할것입니다.

    그토록 흥분하고, 정신없는 사람들도 공무원이 ‘기준과 권세’를 들먹이자 말을 들었는데,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의 기준과 권세 앞에서 이와 같이 질서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창피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과 권세 아래 순종하고 질서를 지키는 ‘신앙의 문명인’이 되야 할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 별거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과 권세 앞에 삶의 질서를 회복할줄 아는 신앙인 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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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바울을 특별한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게 얼마나 대단했는지 바울의 몸에 닿은 손수건이나 앞치마에 닿기만 해도 병이 낫고 악한 영이 떠나갔습니다.(12절) 이건 거의 뭐 유대인들에게도 엘리야, 엘리사 급의 역사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역사입니다. 이 일을 행하는 도구가 된 바울은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오늘날에도 소위 말해 ‘능력있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언, 치유, 퇴마 등등의 신비한 은사들을 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것은 이러한 ‘신비한 능력’,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인용하자면 ‘특별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건강하게, 오랫동안 목회를 못하는 경우가 많더라는 것입니다.

    능력이 크면 사람들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추종하게 시작합니다. 인기가 높아지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돈과 권력이 모이기도 합니다. 아마 그래서 ‘특별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쉽게 실족(?)하곤 했던것 같습니다.

    바울은 전혀 그런 모습이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는 ‘특별한 기적’을 행하는 통로였지만 착각하지 않고, 욕심과 인기, 돈과, 명예에 휘둘리지 않습니다.그는 이 '특별한 능력'을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합니다. 이 능력으로 으스대거나 본인의 영광을 구축하는데 사용하지 않습니다.

    바울뿐일까요? 하나님은 창조자 이시고,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바울 전에는 모세 같은 사람도 있었고, 앞서 말한것처럼 엘리야, 엘리사 같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힘과, 지혜, 능력과, 은사를 부어주십니다. 그래서인지 세대마다 대표하는 천재들도 끊이지 않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있고,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천재는 아니여도 '탁월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넘치도록 많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은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기 위함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탁월한 능력들이 나타날때, 은사가 드러날때, 건강하게 발현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힘써야겠습니다. 목사는 당연히 그래야하고,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것입니다. 만약 이 사실을 잊는다면 '특별한 능력'을 발현하는 자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실족하고 넘어지는 일들을 경험하게 될지 모릅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바울과 같은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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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히 하나님의 역사를 흉내내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게와의 일곱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기 행각은 악한 영에게도 들통납니다.

    오늘날에도 ‘거짓 사역자’들이 많습니다. 흉내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것은 귀신도 구분하는 이런 일을 사람들이 구분하지 못합니다. 영적 사기쑈에 놀아납니다.

    영적 분별이 그 어느때보다도 필요한 시기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충만하지 않으면 절대 분별하지 못합니다. 깨닫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분별하지 못합니다.

    많이 들어서 알겠지만 원래 ‘가짜’를 구별하는 방법은 ‘진짜’를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품 가품들을 걸러낼때 물건의 잘못된것을 찾기 보다는 그 물건에서 진짜의 특징을 찾는게 빠른것입니다.

    우리가 진짜 예수님을 알면, 말씀을 바로 알면, 기도로 하나님의 뜻에 가까우면 이런 수많은 ‘거짓 사역자’들 그리고 ‘거짓목소리’들을 구분할수 있습니다.그들이 아무리 신기한 일을 시도해도, 그럴듯한 일들로 현혹하고 속여도 분별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알기에 더욱 힘써야합니다. 기도에 더욱 힘써야합니다. 말씀을 더욱 더 잘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귀신도 안당하는 이런 일에 우리가 당하는 창피한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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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게된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회개합니다. 거의 온 마을의 회개입니다. 모든 마술책도 다 태워 버립니다. 자그마치 5만 드라크마 입니다. 자료를 찾아보면 1드라크마가 당시 하루 노동값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137년 일해야하는 돈이기도 합니다. 엄청난 가치입니다. 그러나 변해야 한다면 과감하게 버려야합니다. 믿음은 이와같은 결단을 필요로 합니다. 끊어내야 합니다.

    “보는 앞에서 태워”(19절) 앞서 언급한것처럼 그들의 회개는 이와 같이 공개적이었습니다. '공개적 회개'가 좋은 점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자신의 변화를 위한 결단이 공론화 되기 때문에 쉽게 다시 옛날의 죄로 돌아갈수 없다는 것입니다. 소위 말해서 '보는 눈'이 많아진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연약한 나 자신을 위해 이와 같이 '건강한 증인'을 만드는 것도 지혜입니다. 혼자 작심 하기보다는 대중 앞에서 작심 하는것입니다. "내가 다시 담배피면, 술마시면, 욕하면, 화내면 꼭 니가 말려줘! 지적해줘!"

    철저한 회개, 죄로 돌아갈 여지를 다 없애버리는 단호함, 건강한 증인을 만드는 용기가 우리를 죄의 유혹에 다시 걸려 넘어지지 않게 도와줄것이라 믿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성령이 나를 거룩과 경건의 삶으로 인도해주실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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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이 있다는 사실도 듣지 못했습니다!” (2절) ‘듣지 못했다’ 라는 그들의 말에 주목하게 됩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마음이 없어서 성령을 안받은것이라기 보다는 듣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는게 더 정확합니다. 아예 그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곧 ‘전하는 자’의 필수성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전하는 자가 없다면 절대 들을수 없습니다. 그리고 듣지 못한다면, 오늘본문의 기로처럼, 마음이 있어도 놓칠수 있습니다.

    결국 오늘 전혀 몰랐던 이 ‘제자’들은 바울이 예수님의 존재와 메세지를 전달해주자 믿음의 세례, 성령 세례를 받게 됩니다.

    “전하는 자가 없이 어떻게 듣겠습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롬10:14,17)

    '에베소의 사람들'처럼 이미 준비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시켜놓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전하는 자가 되야합니다.

    [마9:37, 우리말성경]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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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을 받아야합니다.

    이 ‘제자’들 보니까 믿음으로 세례받고 성령 세례를 경험하자 방언하고 예언하며 소동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방언’과 ‘예언’이라 함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뜻을 밝히 전하고 외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성령이 임해야 우리는 밝히 하나님의 뜻을 알기 시작합니다. 기도가 더이상 나의 간구로 가득차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위한 간구로 가득차기 시작합니다. 또한 입술을 열때마다 ‘예언’ 즉 하나님의 뜻과 가르침을 선포하는 입술이 될 것입니다.

    믿는자는 모두 하나님의 성령에 충만하여,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행하고 살아내야합니다. 우리의 힘과 지혜로 안됩니다. 우리의 경험과 지식도 아닙니다. 우리의 논리와 지성도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이 우리안에 내주하지 않으실때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야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쫓아 말하고 행동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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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공부가 필요합니다. 바울은 그렇게 제자들을 데려다가 2년동안 구분하여 성경을 가르쳐 줍니다. 말씀을 선포하게 됩니다. 이에 유대 사람 뿐 아니라 이방 그리스 사람들까지도 주의 말씀을 듣게 된것입니다.

    성경 지식만 있는 신앙인도 위험하지만 성경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신앙인은 더 위험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앙인!’

    덮어 놓고 믿는게 건강하다라고 생각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덮어 놓고 믿는게 아니라 이해하고 노력하고 공부하고 분별하여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해를 저만치 넘어선 영역은 명확히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에 인정하고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락된 선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을 붙들고 성실하게 듣고, 배우고, 공부하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분별해야합니다. 말씀을 듣는데, 배우는데 열심을 내야합니다. 말씀안에 성장해야합니다. 그리고 말씀 안에 담긴 하나님의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영역’에 대해서는 겸손의 마음으로 온전히 믿고 수용하면 됩니다.

    본문을 읽다보니 '2년동안 진행되는 성경공부 클래스(?)를 열어봐야하나? ㅋ' 하는 생각이 드는 아침입니다! 함께 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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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동행했습니다.” (18절) 이 동행이 참 아름답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어쩌면 고린도에서 ‘천막짓는 일’로 자리를 어느정도 잡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이 선교를 위해 움직일때 그것들을 내려 놓고 바울과 함께 동행합니다.

    처음에 그들은 그저 ‘천막을 짓는 일’ 때문에 동역하게 됬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동역하는 자들로 관계가 확장 됐습니다. 일로 만난 사이인데, 사명의 동역자가 된것입니다.

    간혹 일로 만났는데 일정의 시간이 지나고 보면 이와같이 함께 하나님을 섬기고, 사역하고, 선교하고, 교회를 섬기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동역의 시작은 단순히 ‘먹고 사는 일’이었는데 나중에는 영적 동역자가 되어 함께 동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한 동업도 좋겠지만 하나님의 일을 위해 동역하는 동역자들로 그 관계가 확장되면 좋겠습니다. 주의 일을 위해 함께 하는 동역자들이 더욱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사역의 동행이 고생을 의미하고, 커리어의 변화나 위기를 의미할수도 있지만 그래도 사역을 위한 동역으로 우리의 관계가 확장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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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나 지금이나 ‘머리를 깎는 것’은 나름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특별히 ‘나실인의 서약’을 한 바울 같은 경우에 ‘머리를 깎는 행위’는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의 해석처럼 바울이 머리를 깎는 이 행위는 크게 두가지의 의미가 있었을 가능성이있습니다 첫째는 나실인의 서약을 잘 마무리했다! 라는 종결의 의미. 둘째로는 나실인의 서약을 다시 한번 재 점화시키는 재시작의 의미 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바울의 머리를 깎는 행위가 전자의 의미를 가졌던, 후자의 의미를 가졌던 그는 이 행위 이후에 멈추지 않고 예루살렘, 안디옥, 그리고 지체없이 제 3차 전도여행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가 만약의 전자의 의미로 머리를 깎은것이라면 마무리를 찍고 다시 시작한것이 되는것이고, 후자의 의미로 깎은것이라면 마무리 없이 쉼표찍고 다시 시작한 것이 됩니다. 어찌됐던 바울의 '머리깎는 행위'는 이와 같이 사역을 멈추려고 했던 행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저 쉼표 혹은 갈무리를 한것 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드린 서원에 책임을 다 하는자,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의 부르심 앞에 최선을 다 하는자 입니다. 끝끝내 그는 마침표를 찍지 않고 쉼표와 갈무리로 선교의 생을 반복하다가 순교하고 하나님을 뵙습니다!

    주님 앞에 부름 받아 가기전가지 제 인생에 ‘쉼표’밖에 없습니다. 숨은 고르되 마침표를 찍지는 않겠습니다. 사역의 갈무리는 할찌언정 섣불리 안주하지 않겠습니다. 사역의 성취앞에 만족하지 않겠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작년 8월에 오스틴 왔는데 생각과는 다르게 쉼이 없이 9월 첫째주에 바로 집에서 바우 교회 첫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인생과 사명의 마침표는 과감하게 하나님 만날때 찍겠습니다. 숨한번 고르고, 다시 한번 마음 다잡고 다음으로 뛰어가겠습니다!

    3

    “좀 더 머물러 달라는 그들의 요청을 바울은 뿌리쳤습니다.” (20절)

    사람은 사랑받는 곳에 더 머물고 싶어 합니다. 이왕이면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고, 기대해주는 사람들 곁에 있는 일이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쫓아 망설임없이 가야할 곳을 향합니다.

    목회와 사명이 그렇습니다. 내가 사랑받고, 내게 좋고, 내가 편하고, 내가 인정받고, 나를 필요로하는 곳에 머무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으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사랑받고, 필요로한 곳과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이 같을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바울처럼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쫓아 이동해야합니다.

    뉴저지는 제가 사랑받은 곳이고, 인정받은 곳이고, 편한곳이고,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했고, 요구했던 곳입니다. 그러나 오스틴은 상대적으로 나를 사랑해줄 사람도 없고, 편하지 않고, 인정해줄 사람도 없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르시니 지체하지 않고 여기로 와야했습니다.

    언젠가 주일 설교중 그런 선포를 했습니다. “내가 있고 싶은 곳 말고, 내가 있어야 하는 곳에 있어야한다” 주님의 뜻이 있는 곳에 항상 있게 되길 다시 한번 결단하며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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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려워 마라. 잠잠히 있지 말고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9-10절)

    바울도 두려웠던걸까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바울의 이미지는 강한 이미지 입니다.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을것 같습니다. 그 어떤것에도 상처 받지 않을것 같습니다. 흔들리지 않을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것을 다 아시고 꽤 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환상으로까지 나타나 해주신 말씀이 바로 "두려워 말라!"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바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향해 명령하신 것입니다.

    두렵습니다. 요즘 다시 두려울때가 있습니다. 바울같이 강성한 사람도 때로는 두려움을 느끼는 법인데, 원래 멘탈이 두부같은 저같은 사람이야 얼마나 두려움을 느끼겠어요!? 교회가 혹은 사역이 성장하지 않아도 두렵고, 성장하는것 같아도 두렵습니다. 교회 개척 1년이면 '개척' 딱지 때야되는거 같은데 아직도 자꾸 '개척교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언제 때내야할지 모르겠으니 '개척'이라는 단어가 무겁습니다. 물론 핍박 받으면서 복음을 전했던 바울의 짐보다야 개척교회 섬기는 저의 짐이 훨씬 가벼운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평강과 위로를 얻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라고 선언해주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큰 힘이 됩니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 라고 말씀해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더욱 기대하게 됩니다. 다시 힘을 얻었으니 하나님의 도전처럼 '잠잠히' 있지만 않으면 될것 같습니다.

    이 묵상을 읽은 누군가가 이런 묵상 나눔에 혹 저를 걱정(?)하실까봐 말을 덧붙인다면 저는 완전히 괜찮습니다! ㅋㅋ 두려움의 감정이 순간 저를 흔들지라도 매일 하나님과 함께 기쁨으로 섬기고 있어서 두려움의 감정에 압도되지 않습니다!! 기도로 이겨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역에 집중하며 넘어가고 있습니다! 걱정해주신 분들이 혹시 계시다면 감사드립니다! ^^ 걱정대신 기도로 동역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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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바울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대적들에게 고난받는 것입니다. (12-13절)

    사실 이게 바울의 인생에 디폴트 값입니다. 그는 선교 사역을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대적과 고난을 마주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확신의 말씀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는곳마다 이런 어려움들을 겪었습니다. 스포일러를 하자면 이 본문 이후의 바울의 삶도 여전히 고난당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한번도 이러한 고난에 압도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같이)환상으로 위로를 받든 그렇지 않든 그는 '의를 위해 핍박받는 삶'을 자신의 삶의 디폴트 값으로 여기고 살아냈습니다.

    우리 성도님 한분과 대화중에 평생을 편두통에 시달리며 사시는 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병원에서 검사도 받고 인증(?)된 편두통입니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꾸준히 일어났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이 고통을 그냥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멀쩡해 보이는데 멀쩡한게 아니라 지금 느끼는 편두통을 '아픔의 디폴트 값'으로 여기고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더 쉽게 얘기하면 고통에 자신을 익숙하게 단련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머리 아파서 못합니다!" 하지 않고 직장도 다니고, 일도하고, 지내는 것입니다. 고통에 져서 삶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어쩌면 현실에 대한 기대값이 너무 높은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소망하는 인생의 '디폴트값'이 너무 '행복값'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불행해도 삶이 멈춰버리고, 조금만 어려워도 사명을 멈춰 버리는 것이죠! 하나님의 직접적인 위로가 없으면 금방 지치고, 의심하고, 쓰러져버리는것이죠.

    '의를 위해 핍박받는 삶'을 인생의 기본값으로 설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를 위해서 고난당하는 삶이 인생의 기본값으로 설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고난가운데 기뻐하고, 감사하고, 하나님께 찬양드릴수 있는 신앙인이 되야겠습니다. 고난 가운데 멈추지 않고 사명을 감당하는 신앙인이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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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발 그러지 마세요!! 누군가를 마구 때리는 사람들, 그걸 보면서도 이 일에 전혀 상관하지 않는 사람들! (17절)

    바울을 잡아 넣고 싶었고, 멈추게 하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그들의 분노는 회당장 소스데네를 향합니다. 사실 어찌보면 그가 그렇게 마구 두들겨 맞을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안타깝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소스데네를 때렸습니다. 말리는 사람이 좀 있었어야할텐데요. "이 사람은 바울이 아닙니다!! 이 사람의 잘못이 아닙니다!" 라고 말리는 사람이 있었어야할텐데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때릴려면 차라리 갈리오를 때려야지요.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 그가 그 현장에서 '최고의 권력자'이기 때문입니다. 강자는 두고 상대적 약자를 찾아 폭력을 휘두르는 악질적 행위를 멈춰야됩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분노와 폭력도 멈춰야합니다. 불의한 폭력을 보면서 전혀 상관하지 않는 것도 문제 입니다. 특히나 말릴수 있는 권세가 있는데도 가만히 있다면 더 큰 문제 입니다.

    생각해보면 평생 이러한 종류의 폭력을 누군가에게 행사해본적이 없습니다. 가장 화났을때가 군대에서 집단의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욕을 먹었을때인데 그때 조차도 10살이나 그 어린 청년들이 쏟아내는 욕을 그냥 받아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 안에 '폭력'에 대한 갈망이 없는것이 아닙니다. 분노가 있고, 쏟아내고 싶어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내 뜻대로 일이 안될때 터져나오는 분노들이 있습니다. 조심 또 조심해야겠습니다.

    대중에게 휩쓸려서 나의 분노와 폭력을 표출하면 안되겠습니다. 상황에 휩쓸려서 분노와 폭력을 휘두르면 안되겠습니다. 불의한 폭력과 분노는 더더욱 경계해야겠습니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마음으로 불의한 폭력앞에 상관하지 않는 무심한 태도 또한 회개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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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은 선교를 위해서 이동하고있습니다. 그는 어떤 재정으로 움직이고 있는 걸까요?

    그러고보니 제가 처음으로 개척 얘기를 꺼냈을때 여러가지 가능성 있는 문제들이 제기 되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재정문제’였습니다. 그때 이 문제를 어렵게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랑은 이렇게 매듭지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이다. 기적적(?)으로 주시든, 우리가 일을 하게 하시든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하자!”

    저와 아내는-오늘 본문 속에 바울처럼-‘천막짓는일’을 해야하면 그렇게라도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아직까지 큰 어려움 없이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필요하다면 바로 일자리에 뛰어들 준비를 항상 하고 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사역을 위해서 ‘천막짓는 일’에 뛰어들 준비를 항상 하고 있는것입니다.

    바울도 오해하면 안됩니다. 그가 원래부터 재정이 넘쳐서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한게 아닙니다. 많은 후원도 있었지만 오늘 본문처럼 필요에 의해서 그는 자신의 능력을 발현해 천막을 지으며 ‘선교의 재정’을 충당할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아굴라와 디모데와 실라 같이 주변 동역자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보니까 재정에 묶이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재정은 삶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에도 귀중하게 사용되는 도구 입니다. 그러므로 필요에 따라 바울처럼 후원, 지원, 동역, 그리고 노동으로 채워가면 될것입니다.

    재정에 있어서, 거짓, 집착, 욕심, 낭비, 강탈, 안주, 우상의 마음은 버리고 삶과 사명의 도구로써 잘 벌고, 잘 간수하고, 건강하게 사용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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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절에‘전하는 책임’이라는 표현이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가르쳤지만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됩니다. 이때 바울이 말합니다. “나는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이제 책임이 없습니다. 이제 나는 이방 사람들에게 가겠습니다!”

    복음에 있어서 우리에게 있는 책임은 ‘전하는 책임’입니다. 물론 그들이 변할때까지,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때까지 전하고 또 전하는 것은 존경받을만한 태도입니다. 하지만 ‘변화’는 우리가 만들어 낼수 있는것은 아닙니다. ‘복음의 수용’도 우리가 만들어 낼수 있는 영역은 아닙니다.

    우리가 ‘전하는 책임’을 다할때 믿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것입니다.(8절) 전하는 책임을 다하지도 않는 사람이 바울처럼 말할수 없습니다.‘전하는 책임’에 더 열심을 내야합니다. 마음에 ‘혹 내가 부족함이 없었는가?’하는 의심이 들지 않도록!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전하는 책임’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도록 열심을 내야겠습니다. 오스틴이라는 도시와, UT Austin 캠퍼스에 복음을 전하는 책임을 성실히 감당하는 사명자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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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억지이긴한데, (아니 사실 많이 억지인데), 회당 바로 옆에 집이 있는 유스도를 칭찬하고 싶습니다. 혹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기 때문에 일부러 ‘교회근처’로 집을 구한거 아닐까요? 어디까지나 진짜 주관적인 상상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건 주님 곁을 사모하는 자가, 예배를 사모하는자가, 그 곁을 지키는 자가 신앙을 지키는데 한결 유리한것은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맹모삼천지교’라고 했던가요?! 물리적인 거리, 심적인 거리, 영적인 거리, 모든 거리가 ‘하나님의 바로 옆’에 있는 인생이 영적으로 건강해지는 지름길 입니다.

    성막을 지키는 여호수아 같은자! 예배를 사모하는 다윗과 같은자! 예수님의 곁을 지키는 요한과 같은 자로 살아야합니다. 당장 교회 옆으로 이사 갈것은 아닐지라도, 내 마음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신앙인이 되야겠습니다. 내가 곧 '성전'임을 잊지 않는 신앙인이 되야겠습니다.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고전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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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절 “날마다 우연히 만나는 사람”(?) 이건 뭘까요? ‘날마다’와 ‘우연’이라는 단어가 참 잘 안어울립니다. 우연은 가끔 보는거 아닌가요? 날마다 보는거는 우연이 아니지 않나요?

    찾아보면 사실 날마다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같은 출근 버스에 타는 사람, 가는 식당마다 만나는 웨이터도 있었습니다. 부지런히 여러개 식당에서 일을 하시는 분이었어요. 아침 커피를 사기 위해 드라이브 스루에서 만나는 캐시어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길을 가는데 누가 저를 보고 인사를 하더라구요. 어색하게 인사를 받는데 그분도 굉장히 당황한 얼굴로 말씀하셨어요 “저 모르시죠?! 우리가 어디서 봤죠?!” 제가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맞습니다. 어디서 분명히 자주 봤는데, 거의 맨날 봤는데 어디서 봤는지 딱히 기억 안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날마다 우연히 보게되는 사람들은 우연일까요? 왜 자꾸 보게 되는걸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고 나서 보니까, 날마다 우연히 보게 되는 이분들, 복음을 전하라고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는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날마다 본다면, 자주 본다면 고민할 필요 없이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기회인 이상 놓치지 말아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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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우리 귀에 생소한 것들을 전하니 우리가 그 뜻을 좀 알고 싶습니다.” (20절)

    오히려 세상이 알고 싶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한번도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고, 기독교의 구원론에 관심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들어보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귀동냥’으로 듣는 수준 말고 진짜 예수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알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기록처럼 “와서 좀 알려주세요!”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전하지 않는 것은 신앙인들인지 모릅니다. “그들은 ‘지성인’들이니까, 그들은 ‘타종교’ 인들이니까, 그들에게는 ‘생소한 교리’니까”라는 변명으로 오히려 우리가 시도조차 안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복음을 알고 싶어하지 않을까요? 그들도 구원을 얻고 싶을테니까요. 어쩌면 ‘그들은 복음을 듣는것을 싫어해. 예수님에 대해서 듣는것을 싫어해, 교회 얘기하는걸 싫어해!’ 라는 것은 우리의 착각이고, 우리만의 생각일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전도를 시도도 안해보는게 우리의 잘못입니다.

    주변을 주의 깊게 살펴야겠습니다. 교회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좀더 알고 싶어하는 사람을 열심히 찾아봐야겠습니다. 찾아서 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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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황이 엉망진창 입니다. 누구는 믿고, 누구는 안믿고, 누구는 적대하고, 누구는 환영합니다. 누구는 방관하고, 누군가는 이익을 얻는데 혈안이 되어있고, 누군가는 당황해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이 세상에 일으키는 반응이 이렇습니다. 누구나 다 믿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그중 누구는 믿고, 나머지는 믿지 않고, 반대하고, 이익에만 관심이 있고, 당황해하고, 누군가는 무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혼란스러운 반응 가운데서 계속 똑같이 반복되는 상황이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 그리고 디모데는 계속 복음을 전하고 가르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어떤 반응’, ‘어떤 사람’과 상관없이 계속 전도의 일을 해 나갑니다. 계속 그렇게 말씀 가르치는 일을 해 나갑니다. 필요에 따라 지역만 옮길 뿐입니다.

    전도/선교를 위한 필수 자세중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간혹 ‘전도대상자의 반응’ 때문에 전도를 멈추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말씀을 배우는 자들의 태도’ 때문에 가르침을 멈추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실망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분노하거나, 만족하거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것이 아닙니다. 전도와 선교, 말씀 가르침은 대상과 반응에 휘둘리면 안됩니다. 그저 다양한 인간의, 다양한 반응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성실하게 전도하고 가르칠 뿐입니다. 반응에 반응하여 일희일비 하거나 방해받는 사명자가 아니라 흔들림없이 맡겨진 일을 하는 사명자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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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손은 ‘보석금’으로 풀려납니다. 생각해보면 바울이나 베드로는 천사가 와서 감옥문도 열어주고 그랬습니다. 기적같이 탈출한 경험들이 있습니다. 기적같이 보호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야손은 보석금 내고 풀려납니다.

    실망해야할까요? 하나님은 사도정도 되야 기적으로 도우시는것일까요? 야손은 그정도 중요한 사람이 아니니까 알아서 보석금으로 풀려나게 하신 것일까요?

    사람들은 하나님을 오해합니다. ‘보석금’으로 풀려 나면 하나님께 삐집니다. “하나님 제게 어떻게 이럴수 있습니까?!!! 저는 왜 바울처럼 안 살려주십니까?”

    우리는 ‘극단적이고,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가늠하는경우들이 있습니다. 더 큰 기적이 더 큰 은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산술적인 믿음은 너무 미성숙한 믿음이며, 신앙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믿음입니다.

    믿는자는 모두 ‘구원’이라는 설명할수 없는 구원의 은혜를 누렸습니다. 이는 감옥에서 천사의 능력으로 탈출하는것 따위의 은혜와는 비교도 할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은 이 영광스러운 은혜는 바울만 누린것이 아니고 야손도 누린 것입니다. 그러니 기적으로 감옥을 나왔든, 보석금으로 풀려났든 그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가늠하는것은 절대 아님을 알아야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형언할 수 없는 ‘구원의 은혜’를 누린 자들입니다.

    인생에서 소소한 기적의 경험과, 은혜의 경험들 속에서 그러므로 하나님을 오해하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께 실망하지 말아야합니다. 기적으로 풀려나면 어떻고 보석금으로 풀려나면 어떻습니까? 풀려나는 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면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영원히 구원하신 예수님께 감사하면 됩니다.

    이미 충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미 형언할수 없는 구원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저 주께 감사하며 사랑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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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어서” (11절) 참 현실적인 기록입니다. 차별이 아니고, 당시에 있던 그대로의 사실을 성경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배경이 달랐고, 학군이 달랐고, 출신과 지위가 달랐습니다. 그래서 ‘학구열’에 대한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지성욕구의 수준이 아예 달랐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부모들은 그래서 소위 말하는 ‘학군’을 찾아 철새처럼 헤매고 있습니다. 왜냐면 ‘지성욕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학교 분위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소위 말하는 ‘좋은학군’의 학생들은 간혹 하는 질문들도 굉장히 집요하고, 날카롭고, 진도를 앞서 나가있기도 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보여준 말씀에 대한 열기가 이와 같았던것 같습니다. 세상의 ‘학군’이야 쉽게 머리 들이밀지 못한다고 하더라구요. 까다롭게 자격조건부터 체크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말씀에 대한 학구열로 나오는 자들을 향해 다행히도 하나님은 자격을 물으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열정’ 하나만 가지고 말씀 앞으로 돌진하면 됩니다. 진심과 집중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인다면 성령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 말씀 안에 성장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말씀에 있어서 ‘가장 좋은 학군’은 어디 유명한 교회, 어디 유명한 목사님께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경 말씀에 있습니다. 누구나 다 ‘입학’ 가능합니다. ‘베뢰아 성도’ 같은 마음으로 말씀을 사모하고, 상고하고, 깨닫고, 성장하는 '교양있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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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들의 돈 벌 소망이 사리진것을 알고 바울과 실라를 분잡아 시장에 있는 관리들에게 끌고 갔습니다.” (19절)

    사람을 돈을 버는 도구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때도 있었습니다. 분명히 이 ‘아이’는 ‘귀신’에 들린것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지금으로 따지면 무당 같은 것이겠지요. 그런데 어린 아이가 귀신에 들려 무당 짓을 하고 있는것인데 돈을 벌고 있으니까 오히려 좋아하고 그 아이를 사용하고 있는것입니다.

    어쩔때보면 사람이 참 잔인합니다. 사람만큼 무서운게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제일 아프게 하고, 악랄하게 사용합니다.

    오늘날도 어떤 사람들은 아이들을 이용해서 ‘앵벌이’를 합니다. 온갖 나쁜짓을 다하다가 입에 담기 어려운 ‘장기밀매’까지 한다고 합니다. 내게 돈이 되는 일이라면 ‘사람’하나 도구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경찰이든, 누구든 이 ‘아이’를 구하면 그 범죄단체는 어떻게든 그 아이를 구한 사람을 잡아서 죽이려고 합니다. 자신들의 돈벌이를 빼앗아 갔다는 이유입니다. 최악이라는 단어로도 다 설명할수 없습니다. 수많은 구호 단체가, 정의 실현 단체가, 공적/사적 단체가 유괴되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고, Human Trafficking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돈에 미치면 사람은 어디까지 타락할수 있을까요? 너무 무서울 지경입니다. 돈에 미치면 안됩니다. 돈에 미치면 인격을 상실합니다. 돈에 미치면 최소한의 인간성을 상실합니다. 돈에 눈이 멀면 최악의 인간이 될지도 모릅니다. 돈에 함몰되지 않는 인생이 되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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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로마 사람들이 받아들이거나 실천할 수 없는 풍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21절)

    고발 내용이 이상합니다. 어린 노예 아이 때문에 돈을 벌다가 못벌게 되서 화난거 아닌가요? 그거에 대해서 고발하는거 아닌가요? 그런데 막상 고발 내용을 들어보니 전혀 다른 내용으로 고발했습니다. 자기들도 아는거죠! 고발 자체가 성립이 안됩니다!! 그러니 그럴듯한 얘기를 만들어내 고소하고 있는것입니다.

    내 화를 풀기 위해 타인에게 쏟아붙는 행위는 옳은 행동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노가 일어날때 해소의 대상을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늘 흘기는 격입니다!” 회사에서 그래서 ‘내리갈굼’이 많습니다. 밖에서 일이 안되면 집에와서 부모님께, 자녀들에게 화를 풀어버립니다. 탈탈(?) 털어서 없는 내용까지 만들어 혼내기도 합니다.

    어릴적 중3 학교 종례시간에 담임선생님이 3월에 폐품 안 낸 사람 나오라고 해서 매질한적이 있습니다. 그때가 자그마치 6월이었습니다. 어디서 화가 났는지 모르지만 그 화를 식히기 위해 매질을 해야하는데 그날따라 딱히 매질할 명분이 없었는지 담임선생님은 “3월에 폐품 안낸사람나와!” 해놓구서는 아이들을 줄지어 놓고 때린 것입니다. 이후 4월, 5월도 줄줄이 매를 맞았죠!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것입니다. (젊은이(?)들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폐품’이란걸 가져다 내곤 했답니다 ㅋ)

    화를 풀기로 작정하면 없는 말도 만들어내고, 사실에 더욱 부정적인 살을 붙이기도 합니다. 더할수있는 모든 말들을 더해서 한 사람을 매장 시켜 버립니다. 나의 분노가 공의롭거나, 정의로울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말로 토해내듯 쏟아내는 분노는 그저 더러울 뿐입니다.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 불의한 일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 불의한 분노는 멈춰야합니다. 거짓 고발을 멈춰야합니다. 분노 해소의 대상화를 멈춰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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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30절)

    세상이 던진 질문입니다. 세대를 막론하고 던진 질문입니다. 지역에 상관없이 던진 질문입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때 성경이 제시한 답은 이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31절)

    수많은 이들이, 수많은 종교가 구원의 방법을 묻는 질문앞에 ‘선행’이라고 답했습니다. 다른 신들의 이름을 말했지만 결론은 “선하게 살아야합니다!” 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은 이 질문에 “믿음”이라고 답하셨습니다.

    우리는 ‘선행’으로 우리 자신을 구원할수 없습니다. 완벽하게 선의 기준을 만족시킬 사람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완벽한 선의 기준’ 또한 사람이 세울수 없습니다. 이리보나, 저리보나 선행은 구원의 답이 아닙니다. 구원의 답이 절대 될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믿는 믿음이 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으면 칭의를 얻고, 칭의를 얻었으니 의인처럼 선을 행하며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선행이 의인을 만드는게 아니라, 믿음의 의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의인이라 칭함 받은 사람이 의인에 걸맞는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구원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됩니다. 그러면 믿는 모든 자가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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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2절의 대략적 일정의 기록을 통해 바울과 디모데, 동역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선교여정을 감당했는지 예상할수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바울 이하 팀은 안식일이 되고 기도 할곳을 찾습니다! (13절)

    바빠도 잊지 못하는것, 놓치지 못하는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다른 이들은 기도해야하는거 몰라서 기도 안하는거 아닙니다. 알아도 바빠서 안하고, 나름의 변명때문에 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도를 놓치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기도는 ‘영적 형식’이 아닙니다. ‘영적 양식'입니다. '필수요소’ 입니다. 그러니까 빌하이빌스 목사님이 17년전에 쓴 책 제목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 라는 말처럼 바울은 바빠서 기도를 못하는게 아니라 바빠서 더욱 기도에 힘쓴 것입니다.

    반면 기도 안하는데 있어서 가장 많이 하는 변명중 하나가 바로 “너무 바쁘다!” 입니다. 또 다른 변명은 “어차피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으니 딱히 기도가 필요없다!” 입니다.

    건강하지 않은 신앙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합니다. 무엇을 하든 기도해야하고, 언제나 기도해야합니다. 예수님도 기도를 쉬지 않으셨습니다. 기도를 생략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도를 미루지 않으셨습니다. 언젠가는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수 없다!” (막9:29)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기도와 믿음을 거의 동의이음어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교회의 능력은, 신앙인의 능력은 단언컨데 기도로부터 시작됩니다. 기도를 놓치지 말아야합니다. 없으면 바울처럼 기도의 자리라도 찾아 나서야합니다. 기도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것입니다. 상황이 안되서 기도를 포기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기도할수있는 상황을 만들어야 하는것입니다. 예수님도 기도하기 위해 한적한 곳을 찾으셨고, 사람들을 떠나서 어떻게든 혼자 있는 시간을 마련하셨습니다. 기도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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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남이 의미있는 만남이 되다! (14절)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바울은 루디아라는 여인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에게 가장 능동적인 동역자가 되어줍니다. 후원자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과거 오스틴으로 교회 개척을 준비하며 기도할때 정말 많이 했던 기도입니다. “하나님 오스틴에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루디아’를 만나게 해주세요!”

    바울이 생각지도 못했지만 루디아를 만나게 됐던것처럼 저도 오스틴에서 ‘루디아’ 같은 성도님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성도님들의 동역과 기도, 응원, 후원과 등록(?)등을 통해서 바우 교회가 느리지만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성도님들도 바우 교회 안에서 더욱 믿음안에 굳건히 세워져 가는 경험을 하셨다는 간증들도 해주시곤 했습니다.

    우리의 만남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새로운 만남들을 통하여 서로에게 축복이 되는 일들이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이 성취되는 ‘영적 시너지’가 일어나길 기대합니다. 새로운 만남 속에 담아놓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뤄지도록 진심을 다해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

    주변에서 내가 만난 사람이 나를 위해 예비된 ‘루디아’일 수 있습니다. 혹은 내가 그 사람를 위해 준비된 ‘루디가’가 일 수도 있습니다. ‘루디아’를 만나거나 ‘루디아’가 되어주는 축복된 삶을 살수 있게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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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신이 구원을 얘기합니다. 절대 좋은거 아닙니다. 가끔 소설 속에서 이런 설정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한참 전에 드라마로 방영되었던 ‘수리남’이라는 드라마입니다. 주인공이 진짜 나쁜 사람인데 그런데 그 마약왕이 말끝마다 하나님 얘기하고, 성경 얘기하고, “할렐루야!” 라고 합니다!! 차라리 하지 말아야합니다! 이 악인이 하나님을 찾을때마다 화가 납니다. 악인이 하나님을 입에 담는다고 그가 선하게 인식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먹칠을 당하게 되는것입니다. 백노가 까마귀 노는것에 함께 어울리면 까마귀가 백노의 이미지를 얻게 되는게 아니라 백노가 까마귀의 이미지를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악이면서 입에만 선을 올리는 이중적인 삶이 최악입니다. 맨날 나쁜 일 하면서 전도하는 사람들한테 가끔 전도 대상자가 뼈때리는 말을 합니다. “야! 너 처럼 살면 차라리 교회 안다니는척 해야 전도에 도움되는거 아니야?!”

    귀신(?)처럼 살면서 입에 예수님을 올린다고 살수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다 천국가는게 아닙니다. 결국은 쫓겨날 뿐입니다. 바울처럼 살면서 예수님을 선포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행동에 악을 담고, 입술에만 예수를 담는 ‘종교가식’을 버려야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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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에게 할례를 주었습니다.” (3절)

    디모데는 이미 삶으로는 칭찬이 자자한 청년입니다. 어린 나이지만 많은 이들이 눈여겨 볼만한 미래가 밝은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 기독교인들이 보았을때 여전히 한가지 논쟁이 될만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아버지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 문제는 당시 초대 교회안에서 공식적으로는 해결된 문제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변화의 과정이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변화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이 현실을 간파하고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합니다. (3절)

    복음을 전하기 위해 ‘비본질’의 이슈는 유연하게 적용할수있는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디모데 또한 이 일을 유연하게 받아들입니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의 이 행동은 ‘이방인 전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고, 또 유대인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디모데의 사역에 이질감을 줄이는 일이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비본질 적인 것이라면- 내가 좀 희생하고, 내가 좀 더 유연하게 반응하고, 내가 좀 더 양보하고, 내가 좀 더 수용하면 됩니다. 괜히 또 다시 논쟁의 소용돌이로 들어가면 쓸데없이 시간과 힘을 낭비하고 복음 선포는 묘연해 질수도 있는 일입니다. 복음 선포를 위하여 변화무쌍하게 옷을 갈아입는 복음의 기술자(?)가 되야 합니다! 본질은 지키고 비본질은 도구로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2

    “이렇게 해서 교회들은 믿음 안에서 더욱 굳건해지고 그 수가 날마다 늘어났습니다.” (5절)

    제가 지금 다니는 곳이라고는 우리 교회와 그 주변, 유티 오스틴 캠퍼스, 그리고 성도님들의 가정 정도 입니다. 가서 주로 하는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것입니다. 어딜 가나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고 있는 바를 직간접적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4절)

    오늘 말씀을 읽으며 기도하게 됩니다. 바울과 디메도, 그리고 동역자들이 ‘여러 도시를 다니며 교리와 전통, 복음을 가르치고 이로 인해 그들이 방문했던 교회들이 굳건해지고 부흥한것처럼’ (5절) 바우교회도, UT Austin Ignite도, 각 성도님들과 가정들도, 그리고 앞으로 만날 새신자들과, 공동체들도 모두 선포되는 말씀 안에서 굳건하고 부흥하는 일이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진정으로, 간절히 부흥을 보고 싶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말씀으로 인한 부흥을 보고 싶습니다!

    3

    “결정한 규정을 신자들에게 전하며 지키게 했습니다.” (4절)

    규정은 지켜야합니다. 함께 결정한 규율을 지켜야 질서가 생깁니다. 질서가 생겨야 성장이 건강합니다. 아무리 성장해도 두서가 없으면 어느 순간 무너집니다. 초대교회도 분명히 성장했습니다. 그 수가 날마다 늘어났습니다. (5절) 그러나 만약에 이런 ‘규정을 지키는’ 질서가 없었다면 아마 생각보다 쉽고 빠르게 무너졌을 것입니다.

    교회도 규칙을 지켜야합니다. 함께 질서있는 교회를 세워가야합니다. 이러한 규정을 어기고, 예외를 만들고, 규정위에 선 초월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반드시 부패하고, 무질서해지고, 무너지게 될것입니다.

    교회의 성장보다 중요한것은 적법하고, 건강한 성장입니다. 무작정, 두서없는, 질서없는 성장은 지양하겠습니다.

    4

    하나님의 일이라도 하나님의 방법과 방향과 때를 분별해야할것입니다. (6-10절)

    선교는 의심할것 없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시아로 향하는 바울을 멈추시고 유럽으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아시아를 선교하면 안되서 그런걸까요? 아닙니다. 나중에 아시아도 전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은 바울이 아시아가 아닌 유럽으로 선교하러 움직이기를 원하셨습니다.

    간혹 이런 일이 있죠 ‘좋은일’이라고 하면 덮어놓고 그냥 하려고 하는것입니다. 방법이나 때를 따지지 않고 ‘좋은일’이니까 당연히 좋아하겠지 하고 별 다른 생각 없이 진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일’도 더 올바른 때와 방법이 있기 마련입니다. 맞는 일도 맞는 때에, 맞는 방법으로 해야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렇게 해야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일이라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는게 가장 좋습니다! ‘교회개척’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때나, 아무곳에서나 할 일은(?) 아닌것이죠!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때에 방법에 맞게, 주님의 인도하심을 쫓아 앞서지도 않고, 미루지도 않으며 순종하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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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려의 말씀’(31절)에 기쁨을 얻었고, ‘여러가지 말’(32절)로 격려받고 힘을 얻었고, ‘주의 말씀’(35절)으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말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은 이와같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시간들 속에서 ‘가치있는 말’을 하기보다는 버려지는 말, 쓸데 없는 말, 혹은 악한 말들을 하는데 시간을 보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유다와 실라는 안디옥에 머물면서 예루살렘 사도들에 대해 뒷담화 하고, 그들에게 여전한 ‘유대인의 전통’을 가르치는데 시간을 쓰지 않습니다. 허투루 말하지 않습니다. 악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주어진 시간과 기회 동안에 그들은 격려하는 말을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더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말을 합니다. 가치있는말, 너무 중요한 말, 마땅히 해야하는 말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사용한 것입니다.

    가치 있는 말은 기쁨도 주고, 격려도 주고, 위로도 주고, 힘도 주고, 지식도 주고, 지혜도 줍니다. ‘머물러 있는 동안’ 좋은 말, 필요한 말, 중요한 말, 전해야하는 말,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말해야겠습니다!

    2

    바울에게 있어서 바나바는 같이 하고 싶은 사람이었고, 마가(요한)은 같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 나름의 정확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가 요한은 전에 밤빌리아에서 그들을 떠나 그 사역에 끝까지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38절)

    그러나 바나바에게는 마가요한은 실수는 했을지언정 그렇게까지 싫어하거나, 미워하거나, 같이 동행하지 못할정도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이와 같이 같은 인물에 대해서 우리는 각기 다른 생각을 할수 있습니다. 다른 판단을 내리기도 합니다. 성향에 따라 친밀하게 느끼기도하고 반대로 대면대면 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고, 정의 내려버리는 것은 성숙한 처사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바울도 누군가에게는 그만큼 ‘같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아니 애초에 바울은 바나바에게는 함께하기에 위험천만한 사람 아니었나요? 그런데 바나바는 그런 바울과 동행해줬던 사람입니다. 바울이 이런 자신의 과거를 기억했다면 마가 요한에 대해서 섣불리 결단내리고 판단하면 안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바울은 너무 성급했고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러니 바나바 같은 온유한 사람도 결국 이 일로 바울과 싸우고 갈라져 버립니다.

    왠만하면 바울 편 들고 싶은데 이건 아닙니다!!! 쉽게, 성급하게 사람을 판단하고, 한번으로 정죄하고, 상종못할 사람으로 평가하고, 용서하지 않는 이런 모습은 분명히 미성숙한 모습입니다. 너무 편협한 모습입니다. 내가 마주하는 사람들,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생각과 태도가 성숙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인내하고, 도와주는 자세가 되야겠습니다.

    3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르브로 가고" (39절)

    바울은 이미 교회에서 엄청난 선교적 역사를 써내려 가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교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강력한 리더가 됐습니다. 그런 바울이 마가요한을 낙인 찍어 버렸습니다. “나 쟤랑은 절대 선교 못해!! 그가 바나바의 조카여도 안돼!” 온교회가 다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가요한은 멈추지 않습니다.

    교회 안의 권위자가 젊은이를 향해 이와 같이 낙인을 찍어버리면 그 젊은이(?)는 어떻게 합니까? 교회에서 목회자가 어떤 청년을 향해 대중 앞에서 평가를 합니다. “쟤는 선교할 그릇이 못돼! 쟤는 이탈자야!! 중도하차하는 사람이야! 저런애는 기회줘봤자 또 하차할꺼야!! 그러니까 안돼! 못해!”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그런 평가를 받은 청년은 울며 교회를 떠나거나, 아니면 우울증과 낮은 자존감의 문제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억울하다고 분노하고 싸우고, 교회를 향해 적대감을 갖게 될지도 모르죠!

    오늘 마가가 당한 일이 바로 이런 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가는 바나바와 함께 선교에 오릅니다! 이게 바로 마가가 가능성이 있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마가의 중도하차가 실수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모습입니다.

    사람이 한번은 실수 할수 있습니다. 다시 안하면 됩니다. 한번의 실수로 배우고 성장하면 됩니다. 마가는 바울의 이런 지적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소화합니다. 그리고 나서 멈추지 않고, 주눅들지 않고, 자신을 삶으로 증명하듯 바나바와 선교지를 향합니다!

    세상이 간혹 나를 심하게 평가할때가 있습니다. 주눅들게 할때가 있고, 나의 실수를 ‘나 자신’으로 치환해 오해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때 억울해만 하거나 포기하지 않아야겠습니다. 주눅들고, 우울과 낮은 자존감으로 포기하지 않아야겠습니다. 겸허히 받아들이고, 배우고, 삶으로 증명하는 가치있는 삶을 선택해야겠습니다.

    한번의 실수로 멈춰버리기엔 너무 할일이 많은 인생입니다. 누군가의 오해로 낙심하기엔 너무나 할일이 많은 인생입니다! 세상과 타인은 기대를 멈췄을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기대하고 계십니다! 나의 실수로 나를 폐기처분 하시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삶으로 증명하는 신앙인이요 사명자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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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안에 화두는 바울과 바나바가 던졌지만 이 일에 중요한 주석을 다는 사람들은 1차적으로 베드로, 그리고 마무리격으로 야고보입니다. 두 사람 다 교회의 리더입니다. 당시 야고보는 초대교회의 기둥과도 같은 사람으로 정평이 나있었습니다.

    권세자들은 분별과 권력을 이렇게 써야합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애초에 바울이 교회 안으로 들어올수 있었던것도 리더였고, 나름의 권세가 있던 바나바의 보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입김이 작용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도 초대 교회 안에서 가장 권위있는 두사람이 주석을 붙이지 않았다면 어쩌면 분별이 아닌 싸움과 정죄로 끝났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리더는 이와같이 분별해야하고, 권력을 바르게 행사해야하고, 해야할 말을 제때 해야합니다. 이것이 리더의 책임입니다. 그러니 리더는 민감하고 깨어있어야합니다.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야합니다. 일상의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발견할줄 알아야합니다.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줄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깨달은 사실을 정확하게 전해야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교회 안에서 일종의 ‘리더’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합니다. 권위를 바르게 행사하고, 하나님의 뜻을 지혜롭게 깨닫고 분별해야겠습니다. 잘 가르치고, 바른 소리를 해야겠습니다. 정도로 이끄는 리더가 되야겠습니다! 책임감으로 한결 어깨가 무거워지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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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야고보의 ‘판단’(19절)은 말씀에서 온 판단입니다. 그는 “내 판단”이라고 했지만 이미 말씀에 기록된 얘기를(암9:11-12) 재 선언 한것뿐입니다.

    판단의 지혜는 어디서 올까? 분별의 통찰은 어디서 오는가? 하는 질문을 할때가 참 많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기준은 다양하고, 정보도 너무 많습니다. 차라리 정보가 한정되어있을때가 어떤 의미에서는 분별이 더 쉽습니다. 요즘은 정말 ‘정보의 홍수’ 시대입니다. 그마저도 정보가 다 같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분별이 어느때보다도 어렵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가 되면서 '절대기준'은 이미 수십년 이상동안 유명무실 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상대적진리’는 모든 것의 분별을 더욱 어렵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때즈음에 야고보의 판단이 성경말씀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오늘 이 본문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메세지를 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분별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 기준을 둬야합니다.

    분별의 기준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기준입니다. 말씀이 없이 함부로 판단할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개인이든, 교회든 내려야할 판단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분별하겠습니다. 나의 경험, 지식, 지혜, 정보, 전통, 문화, 흐름, 대세, 눈치(?)로 판단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기록, 가치, 가르침을 쫓아 분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분별의 지혜를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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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켜야할 선'이 있습니다. (20,29절)

    신앙은 선을 지키는게 중요합니다. 교회 안에서 일종의 타협이 있을수 있습니다. 논의하여 타협점을 찾고 더욱 건강하고 바른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가는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선을 지키는게 중요합니다. 타협이 선을 지키지 못하면 오히려 망가지고 퇴색되게 됩니다.

    율법주의자가 될 필요가 없다고 했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것이 아닙니다.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는것이지, 구분된 삶도 살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켜야할 선이 있습니다.

    신앙의 지켜야할 선을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예배, 성경, 기도, 교제, 사랑, 거룩, 구원, 뿐 아니라 기독교 윤리: 생명, 성, 재정, 가정 등 타협 시 지켜야할 수많은 '마지노선’이 있습니다. 시대가 변할수록 얼마나 많은 '타협의 도전'들이 달려드는지 모릅니다. 그때마다 지혜롭고 단호해야 할것입니다.

    예수님은 절대 타협할수 없습니다. 예배도 타협할수 없습니다. 성경도 타협할수 없습니다. 경건과 거룩도 타협할수 없습니다. 선교도 타협할수 없습니다. 교회와 주 안에서의 교제도 타협할수 없습니다. 복음도 타협할수 없습니다.

    선을 지키는 크리스천이 됩시다. '종교대통합'이라는 세상이 내민 일종의 '화평이라는 대의 명분' 앞에 부담을 느껴 구원의 복음을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베타적인 종교'가 될지언정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진리를 타협할 수는 없습니다.

    '인권'이라는 시대의 흐름 앞에 성경의 가르침을 지키지 못하고 모두 타협해 버리면 안됩니다. 모든 것을 허락해 버릴수는 없습니다. '인권'은 인간의 모든 성향과 행위에 적법한 혹은 사회적 명분을 주는 마법의 단어가 절대 아닙니다.

    '자유'라는 시대적 슬로건 앞에 결국 방종을 방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면 안되겠습니다. 교회는, 신앙인은 선을 지켜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선(goodness)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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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은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복음은 자격이 되야 들을수 있는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때로는 부자를 경계하셨고, 바리세인도 경계하셨고, 죄인도 경계하셨고, 이방인도 경계하셨으나 결과적으로 놓고보면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동안에 ‘경계’했던 모든 자들에게 결국 이모저모 다른 모양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대상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전도는 복음 대상의 자격을 논할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지은 죄가 너무 악독해서 복음을 들을 자격이 없어! 용서 받을 자격이 없어!”

    복음은 자격을 따져 전하는게 아니라 사랑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이방인 전도’가 얼마나 파격적이고, 논란적인 전도인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뛰어넘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의심의 여지없이 모든 이를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모두에게 전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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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절과 6절을 통해 당시 ‘이방인 전도’라는 사안이 얼마나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었는지를 보게 됩니다.

    중요한 사안들은 진중하게 논의 될 필요가 있습니다. 혼자 독단적으로 결정하거나, 주장함으로 모든 결정을 내리는 것은 건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일이라도 함께 나누며 논의 할수 있다면 각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확신을 통해 더욱 방향이 명확해 질수 있습니다. 오늘 ‘이방인 전도’ 사건도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교회 사도와 장로, 그리고 베드로와 함께 논의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이 분별되기 시작합니다.

    교회가 하나되는 마음으로 중요한 사안들을 함께 논의하는 성숙함을 기대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나열하며 함께 분별해보는 영적 분별의 과정이 건강하게 실천되는 교회되길 기대합니다. 개인의 주장과 의견이 아닌 ‘하나님의 역사’에 기인한 분별이 먼저 이뤄지길 기대합니다.서로의 의견에 성숙하게 귀 기울일줄 아는 성도요 교회되길 기대합니다.

    그러나 모든 과정을 통과하고 나서는 결과적으로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내는 영적으로 깨어있는 교회되길 기도합니다! 우리의 논의의 결과가 우리의 의중이 아닌 하나님의 의중을 깨닫고 실현하는 귀한 통로가 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실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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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여러분은 어째서 우리 조상이나 우리가 질 수 없었던 무거운 짐을” (10절)

    성경에 보면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본인은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신에게 100 데나리온 빌린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가둬버립니다! “(나는 갚지 않고 탕감받았으나) 너는 용서 받으려면 무조건 100데나리온을 갚아야지!!”

    자신은 질수 없었던 무거운 짐을 탕감받았으면서 다른 이에게는 굳이 지게 하려고 하는것입니다. 자신은 은혜를 받았으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기준’을 들먹이는게 타당하지 않습니다. 이중적이고, 어떤 의미로는 폭력적입니다. 정의롭지도 않고, 사랑도 없습니다.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보자면 베드로의 지적처럼 자신들도 못하는 것을 이방인들에게 요구하는 몇몇 ‘유대인’들의 행태가 참 정의롭지 못하고, 사랑이 없습니다. 정작 자신들은 은혜를 받았으면서 ‘이방신자’들에게는 율법 들먹이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초신자들/ 새신자들을 향하여 가끔 이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교회 왔다가 오히려 시험에 듭니다. 교회 안에서 조차도 서로 이러한 문제로 싸웁니다. 교회로 처음 발걸음을 옮겨 다가오는 자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를 잘 점검해야겠습니다. 정죄와 판단, 이중잣대, 텃세 등을 다 멈춰야겠습니다. 예수님께 받은 은혜를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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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이제 끝났어!! 다 됐어!” 바울을 보고 딱 그렇게 생각했던것 같습니다. (19절) 그러나 바울은 다시 일어나 성으로 돌아왔고 그 다음날 더베로 떠났습니다. 세상은 그가 죽은줄 알고, 끝난줄 알고 내다 버렸지만 그의 선교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마저도 바울은 말없이 떠나지 않고 성으로 돌아왔다가 다음날 떠났기 때문에 바울이 죽지 않았다는 것은 충분히 많은 이들에게 소문이 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보여주시는듯 합니다. 마치 나에게 선언하시는것과도 같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은 꺼지지 않는 불과 같습니다. 범람하여 막을 수 없는 물과 같습니다. 아무리 막은것 같아도 결국에는 죽지 않고 돌파하는 것입니다.

    가만보니 성경에 이런 이야기들이 참 많습니다. 오늘 본문처럼 돌맞아 죽은것 같은 바울은 그렇게 살아 돌아옵니다. 감옥에 갇혀 끝난것 같은 베드로는 천사의 도움으로 풀려 납니다. 광야로 쫓겨나서 40년간 조용히 살았던 모세는 어느날 갑자기 강력한 라더의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죽임 당하신 예수님은 부활의 영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이 “끝났다” 하시기 전에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무리 하시기 전에 끝나지 않습니다. 죽은것 같은 현장에서도 다시 돌아올수있습니다. 다시 시작할수 있습니다. 세상이 "끝났다!" 라고 선언해도 하나님이 끝이라고 하지 않으시면 끝나지 않습니다.

    누군가 나의 인생을 향해 저주하듯 “이제 끝났네” 말하며 버릴려고 할때 아직 끝이 아님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바울처럼 '두들겨 맞아' 이제 끝난것 같은 순간을 만나더라도, 모두가 나를 '실패자' 라고 낙인 찍을때라도 주님과 함께라면 일어나서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일어납시다! 일어날수 있습니다! 다시 시작할수 있습니다! 내가 '돌맞아 쓰러진 그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할수 있습니다! 새로운 길이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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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들이 바울 주위에 모여들자” (20절)

    만약 그때 한명의 '크리스천'으로 핍박 받은 바울 곁에 서있었다면 나는, 우리는 어떻게 했을까요?

    주변에 사람들이 바울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것은 '돌질'(?)로 명확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주변으로 모여드는 ‘제자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날 밤에 다 도망가버렸던 예수님의 열한제자와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주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상황이 안좋아져도 주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모른척 하지 않습니다. 상황과 상관없이 함께 모여 기도하면 또 다시 일어날 힘이 생길것입니다. 핍박과 어려움을 돌파할수 있게될것입니다.

    믿음의 동역자와 교회를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 입니다. 믿음의 동역자가 ‘맞고’있으면 가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의 곁을 지켜줘야합니다. 어려움에 처해있으면 가서 힘이 되줘야합니다. 교회가 처한 상황이 어렵다고 떠나지 않아야합니다. 기독교인이 오해받고, 예수님이 오해받는다고 도망가지 말고 모른척 하지 않아야합니다. 세상이 기독교인을 적대하고, 조롱한다고 우리 마저 모른척 해서는 안됩니다.

    요즘 많은 '기독교인'들이 사회적으로 교회를 향한 시선이, 목회자와 성도를 향한 시선이 곱지 못하니까 교회를 떠난다고 합니다. 미디어가 교회를 향하여 '돌질'을 시작한지는 꽤 됐습니다. 상황이 이쯤 되다보니 많은 교회와, 목사와, 성도가 그로기 상태가 되었고, 그러한 이유로 꽤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인이 아닌척 한다고 합니다. 모이기 보다는 흩어져버리는 것입니다. '바울 주변으로 모여드는 제자들'이 다시 한번 필요한 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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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전도여행이 이렇게 막을 내립니다.(27절) 감회가 새로울 것입니다. 바나바와 같이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함께 한 동역자가 있습니다. 선교 중에 보았던 수많은 열매와 기쁨, 새로운 만남의 축복들도 있었을 것이고, 한켠에는 갇히고, 매맞고, 욕먹고, 죽을 위기에 처하는 고난도 있었습니다. 함께 했던 요한이 중도에 떠나는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 수많은 복잡다난한 여정을 이제 마무리 한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마침표가 아닌 쉼표를 찍습니다.

    아직은 이른 감이 없지 않지만 요즘은 ‘교회개척1년’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느덧 하나님께서 바우교회에 행하신 1년간에 은혜와 역사를 보게 됩니다. 처음부터 함께 해준 귀한 성도님들도 계시고, 때로는 중간에 떠나야했던 성도님들도 계셨습니다. 열매를 보는 축복된 시간들, 기쁨으로 점철된 순간도 있었고, 여러면에서 고난과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복잡다난한 교회개척 1년의 여정이 이렇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마침표가 아닌 1년쉼표를 잘 준비하고 싶습니다.

    이 '쉼표' 즉 보고를 통해 (27절)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고스란히 선포되고, 많은 이들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 자신에게 그동안 역사하신 하나님의 선명한 기적이 다시 한번 상기되어 힘을 얻는 귀한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힘을 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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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의 사역의 한켠에서는 놀라운 결실이 있습니다. 소위 말해 ‘성공하는 선교’ 입니다. ‘성공하는 목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한켠에서는 여전히 치열하고, 위협적입니다. 실패가 있고, 난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쫓아 산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언젠가는 성공하고, 언젠가는 위험한것이 아닙니다. 동시다발 적입니다. 한 켠에서는 힘들고, 한켠에서는 성공적입니다. 그게 바로 인생의 복잡성이고, 사역의 현실성입니다.

    참 다행인것은 그런 위험스러운 상황 가운데서도 복음은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과 상황으로 분별하고 판단하되 무조건적으로 포기하거나 멈추면 안됩니다. 수긍하고, 낙심하면 안됩니다. 때로는 고단함이 그저 필연적 수순임을 인지해야합니다. 일상의 복잡성을 이해하면 성공중에 실패를 볼때 쉽게 좌절하지 않습니다. 실패 속에서 성공을 볼때 쉽게 들뜨지 않습니다.

    요즘 바우 교회 주일 예배는 성장하고 있습니다. 분위기도, 공동체도, 숫자도 성장중에 있습니다. 소위 말해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들뜨지 않는 것은 여전히 다른 한켠에서는 필연적 고난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실망하지 않고, 들뜨지 않고, 멈춤없이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 사명을 감당해야겠습니다. 그것만이 해야할 일입니다! 인생의 고저에서 동일하게 사명을 감당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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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 (5절)

    저는 복음을 전하면서 ‘죽음’을 목전에 둔적이 없습니다. 죽음을 상상하곤 하지만 진정한 죽음의 위협앞에 놓인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실제 죽음의 위기를 참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신은 할지언정 복음선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7절)

    바울의 수준이 다릅니다. 내공이 다릅니다. 바울은 어떻게 이정도의 영성을 가질수 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는 바울이 실제적으로 계속 선교의 현장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고, 복음으로 인해 고난을 받는 현장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바울도 첫 고난에는 적잖이 당황했을 수 있습니다. 흔들렸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경험을 돌파하면서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던 것입니다.

    내공은 절대 그냥 생기지 않습니다. 강력함은 그냥 생기지 않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바울이 원래가 쎈(?) 사람이여서 이렇게 할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건 내 맘 편하자고 하는 변명에 불과합니다!

    오늘 내 믿음이 그때의 바울의 믿음과 같지 못한것은 ‘영적 온실’속에서 자란 ‘화초같은 믿음’이여서 인지 모릅니다. 일단 피하고 보는 믿음이여서 인지 모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믿음은 실제적 경험과 고난의 돌파를 통해서 성장하고 단단해 집니다. 그러니 성장을 위해서는 내 자신을 사명의 고단한 자리로 자꾸 밀어넣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픈 만큼 성장한다!” 일까요? 힘든 사명의 현장을 피할 것이 아니라 마주하고, 반기고, 경험하면서 내공을 차곡 차곡 쌓아가는 사명자 되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라도 초연할수 있는 믿음의 사명자 되길 소망합니다. 어차피 ‘죽음’은 영원의 시작이라 믿습니다! 고난을 뛰어넘어, 위협을 뛰어넘어 복음을 전하는 사람! 이 시대에 바울이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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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이 기적을 대하는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신유를 일으키고 기적을 일으키면, 그 사람들을 신격화 시켜버립니다.

    기적의 주체는 하나님 입니다. 바울은 이 부분을 명확하게 합니다. “사람들이여 왜 이런 행동을 합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15절)

    그 누구도 하나님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숭배할수 없습니다. 사람을 신봉할 수 없습니다. 숭배되어지는 사람은 모두 이단입니다. 죄를 짓는 사람들입니다. 기적은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통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15절)

    능력 자체에 현혹되지 않아야겠습니다. 능력을 일으키는 사람에게 현혹되지 말아야겠습니다. 내 필요를 채우는 그것, 혹은 그 사람을 숭배하면 안되겠습니다. 오늘 경험하게 된 기적과, 은혜, 축복과, 회복, 해결은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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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좀 더 해달라며 부탁 했습니다.” (42절)

    말씀에 대한 사모가 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사모하고 있나요? 저는 무엇을 사모 하고 있을까요? 누군가는 오늘 끝나서 일주일을 기다려야 하는 ‘드라마’를 사모합니다. 누군가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멈춰버려서 또 다시 일주일을 기다려야 하는 ‘웹툰’을 사모합니다. 누군가는 다음주에 나올 발표를 기다리며 사모합니다.

    좋아하는것, 기대하는것, 즐거운것등을 우리는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오늘 끝났다고 만족하는것이 아니라 더 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한국 드라마도 ‘시즌제’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재미있는 드라마는 끝났는데 끝내지 못하고 다음 시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는 어디쯤에 있을까요? “일독하세요!” 라고 강조하고 말해도 잘 안됩니다. 이번주 주일예배 이후에 다음주 주일예배를 향한 사모하는 마음이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거나, 듣고 있나요?” 라고 묻는다면 바빠서 잘 안된다고 말하거나, 다른 영상이나 콘텐츠를 소비하느라 들을 시간이 부족했다고 말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정직하게 얘기하면 드라마보다도, 만화보다도, 게임이나 영화, 상이나, 월급, 택배보다도 더 기대하지 않는게 ‘말씀’인지 모릅니다.

    일단은 다른 것들을 너무 많이 사모하고 있음을 깨닫고 회개하게 됩니다. 말씀 말고 사모하고 있는게 너무 많고, 말씀이 아닌 다른 것들로 채워넣는게 너무 많습니다! 회개합니다. 이에 덧붙여 말씀에 대한 간절함과 사모하는 마음을 회복해야 함을 다시 한번 깨닫고 결단합니다. 말씀에 대해 사모하는 마음이 있을 때 변하고 성장하는 건강한 신앙인이 될것입니다. 말씀을 사모하여 기대하며 자주 들을때 비로소 예수님 닮는 성숙하고 바른 신앙인이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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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대와 모욕” (45절)

    그들은 모욕합니다. 인신공격에 가까운 일을 합니다. 도무지 진리를 당해낼 재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진리를 이겨내는 거짓은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 앞에 선 거짓은 막무가내 입니다. 고집불통입니다. 목소리만 높입니다. 감정으로 호소합니다. 어떻게든 혼돈을 주려고 하고, 두려움을 주려고 합니다. 거짓의 가치를 증멸할 수 없으니 진리의 가치를 깍아내리려고 어떻게든 노력 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지지 않습니다. 복음은 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계속 담대하게 전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46절)

    그러므로 복음을 들고 자꾸 지면 안되겠습니다. 이는 총 들고 있는 경찰이 신문지 말아쥔 범인에게 항복하는 꼴입니다. 다윗처럼 말해야합니다. “너는 칼, 방패, 단창으로 나오지만 나는 만군의 하나님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간다!”

    복음을 들고 있으니 지지 않겠습니다. 세상에 막무가내식 방해와, 모욕과, 괴롭힘 앞에서 지지 않겠습니다. 방해 앞에 항복하지 않겠습니다. 더욱 담대하게, 더욱 용감하게 복음으로 승리하겠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말씀 붙들고 반드시 승리하는 삶을 살아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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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은 ‘유대인’들은 먼저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입니다. 주목받았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기록된것처럼 그들은 바울의 입술을 통해 선포되는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결국 말씀대로 먼저되었었으나 나중된 자가 되고 만것입니다.

    바울의 사역을 보면 언제나 ‘유대인 회당’이 먼저입니다. 그는 ‘이방인의 빛’으로 부름 받았지만 여전히 방문하는 지역마다 가능하면 ‘유대인 회당’에서 먼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에게 보여진 favor 이고 특권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 축복을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먼저 된자는 얼마든지 나중 될 수 있습니다. 앞선자가 언제까지 앞선자가 아니라는 것은 기독교 인이 아니여도 이미 경험하고, 듣고, 보아서 아는 일입니다. 그러니 신앙의 모든 영역에서 항상 깨어있어야 하고, 분별해야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먼저된 자’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스타트’가 빠르면 무슨 상관인가요? 결승점에 가장 빨리 도착하는 사람이 우승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오만함을 버리겠습니다. 신앙의 안주함을 버리겠습니다. 신앙의 착각을, 신앙의 특권의식도 버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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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속’ 이라는 단어가 계속 눈에 들어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성실히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두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때에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결 수월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아직 약속이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의미가 아니라 그저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기다림이 길어진다고 성취를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제 삶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들이 있습니다. 언제 이뤄진지도 모른체 성취된것도 있습니다. 지금도 성취 과정 가운데 있는 약속들도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성취될 약속도 있습니다. 저 개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 될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우 교회에 주신 약속이 성취될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UT Ignite에 주신 약속이 성취될줄로 믿습니다. 당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줄로 믿습니다. 이 땅을 향하여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성취될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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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를 통해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이 여러분에게 선포되고 있음을 알기 바랍니다.” (38절)

    죄 용서는 결국 예수를 통해서만 받을 수있는것입니다. 사법체계를 보다보면 이런 일이 있습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빕니다. 피해자는 그 마음이 형언할수 없을정도로 힘들지만 인애의 마음으로 가해자를 용서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는 판결된 형량을 살아야합니다. 사회의 사법체계가 판결한 ‘죄의 교도기간'을 거쳐야만 ‘용서’가 공인 되는것입니다.

    서로 용서하는 것은 아름답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죄없다' 공인 받을 수 있는 용서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을수 있는 긍국의 사면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그분의 용서로만 얻어집니다.

    내가 나를 용서하는것으로 충분치 않고, 내가 남을 용서하는것으로 충분치 않고, 남이 나를 용서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고,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는것으로도 충분치 않습니다. 예수님이 용서 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용서하실때 구원이 완성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깨끗게 씻어주셨습니다. 나를 의인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거룩하게 되는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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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를 통해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이 여러분에게 선포되고 있음을 알기 바랍니다.” (38절)

    세상의 용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의 용서는 생각보다 포용력이 좁습니다. 경범죄는 용서하는데, 중범죄는 용서하기 어려워 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죄도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용서는 한계가 없을 지경입니다. 그분의 사랑이 놀랍고, 죄를 씻는 은혜가 놀랍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용서는 위대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통해 죄 용서를 받을수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참 다행 같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용서'가 아닌 ‘사람의 용서’가 구원을 얻는 방법이었다면 구원받는 사람은 더욱 없었을 것입니다. 앞서 말한것처럼 사람은 쉽게 용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용서의 한계는 생각보다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진실되게 회개하는 자의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간혹 “저는 죄인이라 주님 앞에 못나갑니다!” 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아무도 나를 용서해주지 않을꺼예요! 하나님도 나를 용서하시지는 못할꺼예요!"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당신을 받아줄 것입니다. 나를 받아주시고, 깨끗게 하신것처럼 당신도 그렇게 받아주시고 깨끗게 용서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용서하지 못할 죄가 없다 믿습니다!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는 위대한 용서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용서의 하나님께로 돌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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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당신도 당했을지 모를 일입니다!

    작년에 미주 몇몇 온누리 교회가 연합해서 함께 터키 및 몇 나라로 단기선교여행을 간적이 있습니다. 다 같이 이스탄불에 모여서 3일정도 뜨겁게 예배 집회를 한 후에 각자 가야하는 나라로 흩어지는 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3일 집회를 하고 생각지 못한 문제가 터졌습니다. 팀원들 중에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코로나에 걸린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선교를 같이 떠나지 못하고 이스탄불 숙소에서 격리하며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일주일 정도의 시간동안 선교가 진행되고 다시 모였을때 함께 선교를 다녀온 팀원들은 더욱 막역해지고, 같이 나눌 간증들이 켜켜이 쌓여있었습니다. 그런데 숙소에 일주일간 혼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꼈습니다. 그들이 같이 선교를 안가고 싶어서 안간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코로나’라는 장애물 때문에 함께 하지 못하게 된것입니다.

    요한은 바울과 바나바와 끝까지 선교여행을 함께 하지 못하고 중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분명한 중도하차 입니다. 마치 코로나 걸린 선교팀원과도 같습니다. 요한은 어쩌면 ‘코로나’ 처럼 하차 할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것이 외부적 요인이든, 내부적 요인이든, 감정적이든, 육체적이든 어떠한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나중에 드러나지만 이 ‘중도하차’를 바울은 너무나 싫어했습니다. 요한을 참아주지 못했고, 정죄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런 상황일찌라도 우리는 요한을 마구 욕할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것처럼 ‘피치못할 사정’ 이 있을수도 있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바울이 그 ‘사정’을 공감하지 못했을 뿐이지, 어쩌면 요한은 정말 선교를 중도에 하차해야만 할 합리적 이유가 있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한 선교사가 교회에 강사로 왔다가 저를 보고서 이렇게 말한적도 있습니다. “목사님, 이렇게 평온한 곳에서 목회하면서 어디 가서 주를 위해 올인한 인생을 산다고 말하지 마세요!! 여기서 이렇게 목회하면서 올인했다고 말하는거는 경솔한 말입니다!” 왜 인지 모르지만 그분 눈에 저는 굉장히 ‘세속적인 목사’ 혹은 ‘먹사’ 쯤으로 보였나봅니다.

    타인의 신앙의 걸음과, 시즌, 방향과, 사명을 쉽게 판단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들의 인생의 많은 사정들을 나의 기준으로 정죄하지도 말아야합니다. 물론 요한이 그저 약해서 그런것이라면 조금 꾸지람도 듣을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전혀 없이 “나만 맞다!” 라고 말할것이 아닙니다. 나의 방법만이 ‘올인’이다 라고 정의 내릴 것이 아닙니다. 상대를 조금더 이해하고, 용서하고, 포용하는 훈련도 필요합니다. 조금더 넓게 포용하고, 위로와 격려로 함께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믿어주며 동역하면 좋을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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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주로 어떤 일을 하셨을까요?

    바울은 한마디 하면서 자꾸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에 대해서 얘기합니다.사사, 사무엘, 사울, 다윗 등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얘기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구원을 위해서 참 많은 이들을 보내주셨습니다. 모세도 그렇고, 사사와 사무엘도 그렇습니다. 사울도, 다윗도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고, 사도들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보내셔서 구원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보냄받은 자 입니다. 보냄받은 자는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가 되야 합니다. ‘광야’ 가운데 있는 자에게 구원의 통로가 되야합니다. ‘길 잃은 자’에게 구원의 통로가 되야합니다. ‘적의 위험에 노출’된 자에게 구읜의 통로가 되야합니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바울도 보내받은 사도로써 잃어버린 영혼들이 주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구원의 통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구원의 통로’ 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통로’ 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통로’ 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보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구 입니다.

    어제 UT Ignite 모임을 가지면서 이런 기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저를 이 땅에 보내주셨으니 이 동아리가 예수를 알지 못하는 청년들이 주 앞으로 나오는 도구가 되게 해주세요. 예수를 떠난 자들이 다시 돌아오게 되는 통로가 되게해주세요!”

    우리를/나를 통하여 참으로 오랜 시간 주를 알지 못하고, 광야같은 인생을, 방황의 인생을 사는 자들이 참된 구원을 경험하는 축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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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와 금식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2절) 주님을 향한 예배와 집중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좋은 통로가 됩니다.

    나의 일로 분주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앞에 두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의 뜻’을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의 것’으로 마음이 분주하니 하나님의 뜻이 들릴리 없습니다.

    간혹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 혹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법’ 이래서 세미나도 하고, 집회도 합니다. 얼마나 간절하면 이런 집회에 참여하겠습니까? 그러나 꼭 그런 집회 안찾아가도 됩니다. 말씀 붙들고 예배하며, 금식하며 기도하면 됩니다. 그러면 음성도 들리고, 깨닫게 되고, 분별하게 되고, 확신하게 됩니다.

    나의 생각, 나의 욕심, 나의 계획, 나의 방법, 나의 소망으로 가득찬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헤메는 답정녀/남 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예배자로 설때, 금식하며 마음을 정하여 분주함을 끊어내고 주님께 집중할때 하나님의 뜻을 듣고 알게 되는 일을 경험하게 될것입니다.

    오늘도 나를 향해 말씀하고 계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예배의 자리로 나가고, 금식하며 기도하는 자리로 나가야겠습니다.

    2

    방해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려고 할때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엘루마는 상당히 악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기득권이 피해를 입을까봐 총독이 믿음을 갖지 못하도록 애를 씁니다.

    교회 하나를 세우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방해의 손길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 할때 받은것 같은 강력한 방해는 아닙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때 엘루마를 통해 받은 방해정도도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순적한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이 일어날때 사탄도 같이 일어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탄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막으려고 하고 방해합니다.

    그러나 결국 바울처럼 담대하게 싸우고 선포해야합니다. “이 마귀의 자식아! 너는 모든 의의 원수로다! 너는 갖은 속임수와 거짓으로 가득 차 있구나. 주의 바른길을 어지럽게 하는 일을 그치지 못하겠느냐?” (10절)

    방해를 받을 때 뛰어넘는 자가 있습니다. 싸워 이기는 자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포기하고, 두려워 떨고, 돌아서고, 멈춰버립니다. 그러나 복음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싸워야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승리를 주시고, 기적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바울은 결국 승리했습니다. “총독이 믿게 됐고” (12절) 라고 기록했습니다. 할렐루야! 믿음으로 대적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하길 원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하신바가 성취될것입니다! 아멘

    3

    총독은 ‘지성적’이었던 사람이라고 기록합니다.(7절) 논리와 이성적 접근에 호소되는 사람인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총독을 만난다고 할 때 은근 ‘잘됐다’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바울만큼 지성적인 사도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참 이상합니다. 결과적으로 지성적인 총독이 하나님을 믿게된것은 기적을 보고서 입니다.(11절) 엘루마가 바울 말처럼 눈이 멀자 이 일을 보고 총독이 믿게 된것입니다. (이러한 기적은 원래 ‘지성적, 논리적, 이성적’으로 설명되는 경험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성적’인 사람은 ‘지성적 접근’으로 복음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방법으로는 그게 타당합니다. 감성적이고 체험적인 사람은 경험과 기적을 통해 하나님을 믿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지성적인 총독’은 ‘초월적 경험’을 목도함으로 믿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게 복음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지성과, 감성, 우리의 성향과 배경, 방법과, 이성을 뛰어넘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돌파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모든 것을 압도 합니다.

    지성적인 자에게 지성적으로 접근하고, 어린 세대에게 문화친화적으로 접근하고, 고상한 자에게는 고상하게, 가난한 자에게는 위로와 베품으로, 각 나라의 문화와, 민족의 전통에는 그에 맞게 전도하라! 라는 선교적 방법론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귀한 연구이며, 적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은 이 모든것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복음은 모든 다름을 뛰어넘고, 성향을 뛰어넘고 본질로 승부해서 그들을 변화시키고 믿음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복음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믿습니다! 어떻게든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가벼이 여기지 않겠습니다. 복음을 보완하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복음을 감히 돕는다(?)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복음의 도구로 성실히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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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꿈인지 생시인지 알수 없었습니다. 그저 환상인 것만 같았습니다.” (9절)

    돌이켜 보면 이런 순간이 있습니다. 어려움을 기적적으로 돌파하고 있는데 이게 꿈인지, 환상인지, 진짜인지, 무슨 일인지 구분을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살면서 몇번 기절하며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간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노로바이러스’ 때문에 새벽 예배 이후에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구요, 뉴저지에서는 섬기는 기간 동안 세번이나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기절해서 실려간 것이기 때문에 전체를 다 기억하지 못하고 간헐적 기억들만 있습니다. 나를 돕는 손길, 잡아주는 손길, 걱정하는 손길, 같이 움직이는 사람들, 분주하게 뛰어가며 소리치는 사람들, 운전하는 사람들 등입니다. 그렇게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정신이 들고 나면 비로서 누가 저를 도와줬는지 깨닫게 됩니다. 어디까지가 환상이고 어디까지가 진짜 도움인지 구분이 되는 순간이 오는것이죠. 바로 그때 저를 도와준 사람에게 정확한 감사를 표시할 수 있습니다.

    나의 인생의 기적은 하나님으로부터 온것입니다.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도움은 하나님으로부터 온것입니다. 우리가 잘 모르고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도우신 것입니다. 절대 혼자 일어난것도 아니고, 혼자 병원간것도 아니고, 혼자 회복된것도 아닙니다. 베드로 혼자 감옥문 열고 나온것 아닙니다! 이는 우연도 아니고 꿈도 아닙니다. 확실한 도움의 손길이 있어서 회복된것입니다. 구원 받은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여전히 기적과 은혜로 도우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매순간 그분께 진정한 감사와 찬양을 절대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2

    인생에 '구심점' 이라는 것이 있는데요. 이 구심점을 상실하면 휘청거리기 마련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상실하던 날 밤이 그랬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의 인생의 구심점 이었는데요. 그 예수 그리스도를 상실하자 그들은 두려움에 가득차고, 흩어져 숨어 들기에 바빴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초대교회에 바로 그러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가진 상징성은 당시 교회에 가장 큰 버팀목 같은 것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가 같혔으니, 그리고 이제 죽게 되었으니 교회가 얼마나 위축됐을지 안봐도 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교회는 어떻게 했는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오늘 본문의 그들의 반응을 보면 그들조차도 베드로가 죽었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이 아닌 모여 기도하기를 힘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의지가 되는 리더들이 있습니다. 여전히 그들의 존재가 강력하고, 건강한 영향력들이 있습니다. 일례로 온누리교회 고하용조 목사님은 많은 후배 목회자들에게 그런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소천 이후 교회가 무너지거나, 목회자들이 흔들리거나 하지 않습니다. 고 하용조 목사님이 영향력이 없으셔서가 아닙니다. 영향력이 사라져서도 아닙니다. 그분보다 더 중요한 단하나의 구심점!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여전히 곁에 계시기 때문에 교회와 목회자들이 건강하게 설 수 있었던 것이죠.

    예수님은 절대 사라지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힘입니다. 인생에 ‘구심점’처럼 여기던 것은 변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 없어지고, 사라지고, 변해도 구심점 되시는 예수님은 언제나 거기에 동일하게 계십니다. 그러므로, 삶의 구심점이라 여기는 굉장히 중요한 가치들과 사람들이 때로는 상실되어도, 그런 순간을 마주할 때라도,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거기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기도하며 평안히 살아낼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 되야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휘청거리지 않으며, 주와 함께 담대하고, 건강하게 살아내는 하루가 되기로 결단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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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치에 희생되는 종교가 있습니다. 헤롯이 행한 기독교를 향한 핍박은 비단 종교를 탄압하겠다는 목적만 가지고 있는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곤고히 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핍박’을 통하여서 자신을 후원하는 유대인들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확장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를 잡아 죽이기 시작한 일이 베드로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년 혹은 십수년이 넘는 시간동안에 정치인들이 이와 같이 교회를 가져다(?)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기독교를 후원하기도하고, 반대로 탄압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게 '정치인'에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수많은 이들이 이렇게 기독교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곤 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자들(?)은‘기독교의 진리’를 모릅니다. 아니 관심도 없습니다. 전혀 모르니까, 관심도 없으니까 이런 망나니 같은 일을 하고 있는것입니다. 기독교를 종교로 오해해서 생기는 일입니다. 많은 종교중에 하나로 오해하거나, 권력을 위한 하나의 집단으로 이해해서 생기는 일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를 믿지 않으면 아주 쉽게 기독교를 사용합니다. 나 자신을 위해, 나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익은 얻을지언정, 구원은 얻을수 없습니다. 기독교를 나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악함을 멈춰야겠습니다. 기독교를 나의 사업을 위해 이용하고, 나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악함을 버려야겠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이익을 위해 함부로 하려는 악함을 버려야겠습니다.

    2

    내 손을 벗어났을때 하나님은 개입하십니다. 감옥에 갇혔다고 해서 언제나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과 같이 행하신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왜 이런 특별한 일이 베드로에게 일어났을까요? 베드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예 없었기 때문입니다. 헤롯의 의지는 명확합니다. 즉 이제 베드로는 죽임당하는거 말고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어쩌면 (상상이긴 하지만) 베드로도 그런 마음으로 편히 깊은 잠에 빠졌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 나의 사명을 다하고 주님을 마주하겠구나. 고단했지만 갚진 인생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개입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아무것도 할수 없는 그곳에서, 사람들이 기도 말고는 아무것도 할수 없는 그곳에서 하나님 강력하게 개입하신것입니다. 이와 같이 일이 내 손을 벗어 났을 때, 하나님은 수많은 이들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강력하게 개입하시곤 하십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저주 받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기력 할때 우울하고, 슬프고, 좌절되고, 낙망하고, 너무 힘듭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수 없을 때 하나님은 개입하십니다. 우리가 손쓸 여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력감을 느끼는 그 순간, 어떤 일이 내 손을 벗어났다 느끼는 순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평안하고, 담대하며, 초월하는 신앙을 가져야겠습니다.

    내가 할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은 개입하시고, 내가 약할때 하나님은 강함이 되어주시고, 내가 지혜롭지 못할때 하나님은 지혜로 개입하십니다. 이 믿음을 소유함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로 그곳에서 가장 평안하고 담대하게 되는 기적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

    “허리띠를 매고 신을 신어라” (8절) 사실 그냥 옷입으라는 말일수도 있는데 자꾸 이 말씀이 떠오르는것은 어쩔수 없습니다. “진리의 허리띠와, 복음의 신발” 입니다. (엡6:14-15절 성령의 전신갑주중)

    성령의 전신갑주는 이와 같이 진리의 허리띠와, 복음의 신을 말씀합니다. 감옥에 갇혀있는 베드로지만 풀려나는 그에게 천사를 통해 하나님은다시 한번 상기 시키십니다. 하나님이라는 진리, 말씀이라는 진리로 다시 자신을 붙들어 매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던데로 복음의 신을 신고 뛰어 나가라는 것입니다. 살리기 위해 베드로에게 기적을 베푸시는게 아니라, 사명을 위해 베드로에게 기적을 베푸시고 계신것입니다.

    삶의 위기를 가까스로 넘어서면 위기의 기억 때문에 거기서 그만 포기하고, 멈춰버릴수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PTSD입니다. 어떻게든 살아서 한 고비를 넘기면 다시 그 위기를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와중에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 선포를 잊지 말라고 각인 시키고 있는것 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이 진리되심과, 말씀이 진리인것과,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기적을 경험하고, 위기를 넘어, 생명을 지켰다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다시 동일한 자리로 뛰어 나가야합니다. 포기하거나, 두려워함으로 멈출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진리의 허리띠’와 ‘복음의 신’을 신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아멘

  • 1

    “몇사람은” (20절) 중요합니다. 흩어진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할때 (19절) 몇 사람이 먼저 이방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하는 사람들은 대단한 용기와, 결단, 그리고 실천력이 필요합니다. 이미 교회 안에 ‘이방인 전도’가 실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겠지만 이를 쉽사리 실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몇사람의 용단과 실천을 통해 이제 ‘이방인 전도’에 가속도가 붙고 확장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내가 바로 ‘몇사람’ 중에 한 사람이 되야할 것 같은 영적 책임감을 느끼는 아침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관심같고 먼저 실천하는 신앙의 용기와 결단을 지닌 자인가?’ 하는 자문을 하는 아침입니다!

    저는 지금 일종의 ‘디아스포라’가 되어서 이곳 오스틴까지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상징적으로 보자면 저는 ‘유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할 책임이 있습니다. 주님을 믿다가 떠난 사람, 알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 종교인으로 머물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것이죠. 그러나 더 나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책임도 있습니다. 아예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과 세대들에게 다가가는 ‘몇 사람’중에 한 사람이 되야할것입니다. UT Austin 캠퍼스에 있는 ‘젊은세대’에게 들어가는 몇사람중에 한 사람이 되야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놓쳐버린 ‘젊은 세대’에게 복음을 전하는 ‘몇사람’이 되야겠습니다.

    2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불리게 됐습니다.” (26절) 내가 나를 인식하는 것과 남이 나를 인식하는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정을 받으려면 보통 ‘자타가 공인’해야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불린것은 디아스포라 초대교인들입니다. 타인들의 시선에 그들은 예수를 추종하는 선한 영향력의 사람들 이었던 것입니다. 타인의 눈에 ‘초대교인’들은 달라보였고 결국 ‘그리스도인’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달라 보이는 사람들 입니다. 예수를 닮아서 세상에서 구분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감춰지지 못하고 드러나는 사람들입니다.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 입니다. 세상에 인정받을수 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어쩌면 숨겨야 하는 이름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혹은 자랑스럽지 않은 이름으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생겨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누군가에게 조롱이 되고, 위선적인 사람이라는 인식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원래 영광스러운 이름이며, 책임이 있는 이름입니다. 선한 다름으로 세상에 빛과 같이 드러나야 하는 이름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원래의 의미대로 ‘그리스도인’이라 부름받는 성도가 되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원래의 의미를 회복시키는 성도가 되야겠습니다.

    오늘날 어쩌면 교회 스스로만 인정하는 ‘그리스도인’들로 넘쳐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세상이 본받을 만한 그리스도인들이 다시금 일어나야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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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교회는 대화를 해야합니다. 베드로가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고 오자 유대 기독교인들이 크게 반발하고 나섭니다. “어떻게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을 행하고 올수있습니까?”

    이때 베드로는 권위로 이들을 무마하지 않습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4절) 그렇게 성도들은 베드로의 설명을 듣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분노해있지만 베드로의 말을 경청합니다. 베드로의 모든 말이 끝났을때 성도들은 베드로의 이야기를 받아들입니다. (18절)

    한 목회자가 이민 가정 하나를 만나서 식사하고 복음을 전하고 그 가족을 교회로 초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전도를 마치고 교회로 돌아왔는데 갑자기 교회에 영향이 있는 성도가 하나 찾아와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합니다. “목사님 어떻게 그 가정을 받아주실수 있어요? 목사님 제가 들어보니까 그분들하고 같이 시간 보내시고 대화하셨다면서요? 교회 오라고 하셨다면서요? 어떻게 그러실수 있어요? 제가 그들에 대해서 미리 말씀드리고 경고드렸잖아요!!”

    베드로가 겪은것과 약간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도 목회자를 향한 비판과 원망, 분노의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각기 다른 성도들이, 교회의 전통과 나름의 믿음의 방향성/기준을 가지고 나와 목회자에게 앞다투어 성토하는 것입니다.

    이런 목회의 현장에서 때로는 목회자는 권위로 성도들을 억누르려고 합니다. “제가 결정한 일입니다! 그냥 받아들이세요!” 혹은 더 나가서 성도들의 성토를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교회는 분열의 소용돌이에 휘말립니다. 편이 갈리고, 파괴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숙한 대화가 필요합니다. 분노에 대한 화평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진행한 일에 대한 영적 명분, 즉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설명할줄 알아야합니다. 상호간에 대화하되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말하는 자나 듣는 자나 다 성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분노에 휘둘리고, 대화가 사라지고,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해 분열되고 파괴되는 비극을 격지 않게 되길 기도합니다. 성숙하게 대화하고, 겸손하게 수용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교회되길 기도합니다.

    2

    깨닫는 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베드로의 말을 다 듣고 나서 그들이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이방 사람들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허락하신것이로군요.” (18절)

    예루살렘 교인들은 이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이 깨달음은 그들로 하여금 직/간접적으로 ‘이방인 전도’에 뛰어들게 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수동적으로 또한 누군가는 능동적으로 ‘이방인 전도’를 위해서 움직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깨달았기 때문에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더욱 빠르게, 넓게, 강력하게 성취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면 그때 비로서 유의미한 도구로써의 행적을 그려갑니다. 성도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서 기도중에, 혹은 말씀 묵상과 배움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더욱 세밀하게 깨닫게 될때 사역으로 뛰어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궁금해야합니다. “하나님!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요?” 참고로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셨습니다.

    두 가지 사실을 놓고 간절히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 라는 개인을 향해 가지신 뜻이 무엇입니까?” 이와같이 거시적 관점, 그리고 개인적 관점, 이 두가지 측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때 우리는 분주히 주를 위해 살아가는 ‘교회’로의 사명을 다하게 될것입니다.

    3

    “내가 누구라고 감히 하나님을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17절)

    베드로가 한거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사람들은 베드로에게 따졌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수 있소?”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이 이방인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오늘 아침도 침대맡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이런 기로도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주님 제가 한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교회를 세워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실제로 제가 한국 가있는 일주일이 넘는 시간 속에서 교회는 함께 모여 섬겨주신 목사님과 건강하게 예배 드렸고, 그 와중에 새로운 성도들이 교회를 찾아왔고 교제했습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일처럼 새로오신 분들을 환영하고 주인과 같은 마음으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제가 있고 없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 교회는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세워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능력도 아니고, 성도의 탁월함도 아닙니다. 다른 어떤 환경적 요소도 아니고, 우연은 더더욱 아닙니다. 모든 구원과, 성장과 변화와 부흥과 은혜는 다 하나님의 행적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반대할 마음이 없고, (17절)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챌 마음은 더더욱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셨고,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영혼 구원의 역사가, 믿음의 성장의 역사가 계속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같이 일 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가 되길 계속 자처 하겠습니다. 아멘

  • 1

    이제야 내가 깨달았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겉모양으로 차별하지 않으시고 (34절)

    이제 깨달았다고 하니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운것도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의 면면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사역이었습니다. 유대인을 우선하긴 했으나 죄인도, 이방인도, 당시 무시당했던 여인도 품으셨던 사역입니다. 이미 세상 모든 지위와 태생과 배경과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경험했죠. 자기 자신만 보아도 예수님께서 겉모습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분을 확실히 알수 있습니다. 12제자의 면면을 보면 볼수록 이 사실은 더욱 명확합니다.

    그런데 “이제 깨달았습니다.” 여전히 ‘한계 선‘ 이 있었던것이죠. 구원에 대해서 ‘나는 되고 너는 안된다’는 일종의 선(boundary)이 있는것이죠. 교회가 이 선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성도 개인이 이 선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과 부르심은 지위,배경,태생,능력,부등 그 어떤것도 가리지 않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나의 오만함을 버리지 않으면 베드로처럼 자꾸 잊어버리고 깨달음이 늦습니다! 늦으면 적용이 그만큼 늦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메세지를 그때 그때 겸손히 수용하고 적용해야겠습니다. 또한 복음과 예수님 사랑의 대상을 가리지 않겠습니다.

    2

    말씀을 듣고 있던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려왔습니다.(44절)

    말씀의 능력, 복음의 능력은 이미 체험한 바 입니다. 결국 이러한 체험을 통해 인생이 바뀌고 비전이 바뀌었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적은 모든 교회에 필요합니다! 바우 교회의 성장은 이렇게 일어나야합니다. 성도의 성장과 변화는 이렇게 일어나야합니다. 말씀을 읽을때, 들을때 하나님의 성령을 충만히 경험하고, 믿어지고, 변회되며 성장하는 교회요 성도되길 기도합니다

    결국 말씀입니다. 보고 듣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고넬료와 측근들처럼 함께 모여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더욱 말씀을 사모해야합니다. 말씀으로 가득한 바우교회, 바우교회 성도 되게해주세요! 말씀으로 가득한 목자 되게 해주세요. 말씀을 읽을 때 믿어지고 깨달아지는 은혜를 허락해주세요. 아멘

    3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47절)

    말씀의 충만과 깨달음에서 멈추지 않고 베드로는 세례까지 달려갑니다. 신앙의 여정이 그렇습니다. 만족하지 않고 머물지 않습니다. 정진하고 또 달려 갑니다. 은혜의 풍성함에서 한걸음 더 나가는 것입니다. 말씀 듣고 믿음에

    이르면 세례받고 전하는 사명까지 달려가는 것입니다.

    때론 성도들이 초신자, 기신자, 리더를 가릅니다. 그렇게 시즌을 구별하고, 사역을 구분하고 교회 안에 지위를 구분합니다. 특히나 ‘때’를 정하여 이런 일들을 구분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오늘 이쯤 했으니 세례는 나중에 6개월 등록교인 한 다음에 정식으로 하십시다!”

    어쩌면 이러한 우리가 만들어 내는 교회내의 구분들이 우리로 더 느려지고, 다시 세상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불편한 팩트가 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변하게 하셨으면 멈추면 안됩니다. 사울이 바울되고 바로 목사(?)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한다고 하면 모두 막을테죠. 맞습니다! 시스템도 필요하고 과정도 필요합니다. 깡그리 무시할수 없고,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믿음과 사명으로 한 개인을 부르실때 우리의 마음은 적어도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그분의 방법과 때가 몰아 붙인다면 시스템 마져 뛰어넘을수 있다는 순종의 마음과 분별의 지혜가 필요한 것이죠. (이런 의미에서 묵상 하면 할수록 목회가 참 쉽자 않네요 ㅋㅋ)

    변화의 길목에서 멈추지 않고 내달리는 성도되길 도전합니다. 믿음에 이르고 세례받는 교인이 넘쳐나는 바우 교회되길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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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찾아와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17절) 때마침 고넬료가 보낸 자들이 베드로가 있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타이밍이 참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타이밍’을 만드시는 분은 하나님 이십니다.

    어제 미국에서 사용할 ‘우리말성경’을 구매하기 위해서 양재온누리교회에 있는 두란노 서적을 방문했습니다. 과거에 온누리교회를 섬길때야 ‘교역자 할인’이라는 것을 받을수있었지만 저는 이제 외부인(?)이라 그런것을 기대할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보다 3분의1 가격으로 성경을 구매할 수 있어서 적당한 것을 찾아 계산하려고 할때였습니다. 바로 그때, 하필 그때, 때마침 한분이 바로 서점 위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내려와서 서점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저를 알아보시며 반갑게 인사해주셨습니다. “아이고 목사님! 어쩐일이세요?!” 뉴저지에서 함께 있어던 자매님 한분이 대학청년부 간사가 되어 섬기고 있다가 서점에서 돈을 내려는 바로 그때 발견하게 된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간사님이 설명해주셔서 성경구매를 할인된 가격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마저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습니다.

    별것 아닌것 같은 순간 순간도 하나님께서 만들어가시는 완벽한 때일 때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크로노스’ 밖에 계시며 우리의 때를 만들어 내시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될법한 일도 때가 틀어지면 안되는 법입니다. 나를 위해 때를 만들어 내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가시는 때를 놓치지 않도록 깨어있어야겠습니다. 때가 이르면 미루지 않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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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는 성령의 음성을 듣습니다. “주저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거라. 내가 그들을 보냈기 때문이다.” (20절)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내려가서 만난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21절)

    이는 의심하기 때문에 한 질문은 아닐 것입니다. 확인차 한 질문일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베드로는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순종은 베드로와 같이 철저한 자세로 해야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도 가나안을 약속 받았지만 여리고 성을 앞두고 정탐하는 철저함을 잊지 않았습니다.

    일년전 교회 개척을 시작하면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정확한 분별을 위해서 철저하게 한걸음씩 기도하고, 되묻고, 검증하는 시간들을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지금도 이 마음은 모든 사역 앞에서 동일합니다. 저는 지금도 베드로처럼 묻고 또 묻습니다!

    철저하고, 확인하고, 부지런한 순종이 필요합니다. 순종하기로 결정했다면 순종이 어긋난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철저하게 검증하며 옳은 걸음을 걸어야할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덮어 놓고 순종’하라는 것은 어리석게 순종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지혜롭고, 철저한 순종을 해야할 것입니다.

    3

    “들어가 보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27절) 고넬료는 참 귀한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온다는 것을 기대하며 집안에 많은 사람들을 모아 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얘기가 기대되는 자리로 ‘많은 사람들’을 모아두는 고넬료 같은 이런 행동은 칭찬받아 마땅한 행동입니다. 과거 교회들은 ‘집회’가 많았습니다. 사람들을 모아서 성경강해를 듣는 그런 시간입니다. 요즘도 물론 집회는 부족함 없이 많이 합니다. 그런데 ‘기신자’들을 초청하는 집회가 더 많은것 같습니다. 혹은 기신자들만 관심가지고 하는 집회가 된것이죠!

    복음의 집회들에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대에 ‘고넬료’들이 진짜 고넬료를 본받아서 예배의 자리마다, 복음이 선포되는 자리마다, 영적 집회마다 많은 이들을 모아두는 부지런함을 보여줘야겠습니다. 영적 기대감을 가지고 부푼 마음으로 많은 이들을 초청해야겠습니다.

    어쩌면 예배에 대한, 복음에 대한, 말씀에 대한 기대감이 부족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부르기보다는 혼자 조용히 와서 앉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안에 ‘복음, 예배, 말씀’에 대한 넘치는 기대감을 회복한다면 우리도 고넬료처럼 많은 사람을 초대하게 될것입니다.

    영적 기대감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을 초대하는 영적 부지런함이 필요합니다.

    바우교회에, UT Austin Ignite동아리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 복음을 들을수 있도록 고넬료처럼 전도해야겠습니다.

  • 1

    “고넬료와 그 집안사람들은 모두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절)

    온 집안이 모두 좋은 신앙을 가지는것은 축복된 일입니다. 과거 제가 어릴적만해도 ‘모태신앙’ 이라고 해서 태어날때부터 부모의 신앙의 우산 아래서 함께 성장하며 가족 전체가 ‘믿음의 가족’이 되는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가족이 함께 가정예배도 드리고, 여러가지 교회 사역에도 동참하는 등의 일들이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개인’과 ‘선택’이 강조되면서 한 가족이 같은 신앙으로 성장하고 교제하는 일이 점점 드문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부모는 열심이 있는 성실한 신앙인이나 자녀들은 전혀 신앙이 없거나, 타 종교의 집안도 많습니다.

    오늘 고넬료가 보여주는 “그 집안 사람들 모두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했다” 라는 것은 그래서 이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미국에서는 자기 자녀에게 종교를 전하는것도 마치 불법처럼, 인권을 침해하는것처럼 여기는 실정입니다.

    그러면 집안 사람 모두가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포기해야하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집안사람들 모두가 건강한 신앙인이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집 안에있는 신앙인이 본이되고,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 되면 되는것입니다. 흠모하고, 추종할 만큼의 구분된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진실된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경건이란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아마 고넬료가 바로 이러한 모습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잔잔한 도전과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2절)

    우리 가족 모두가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나의 자녀가 자라감에 따라 주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나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서, 더욱 본이 되는, 신앙인의 건강한 매력이 철철 넘쳐 흐르는, 크리스천이 되야겠습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본받지 않고는 안될만한 아빠, 목사, 남편, 이웃, 친구가 되야겠습니다. 나의 집안 뿐만 아니라 내 주변 모든 이들이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될수 있도록 믿음 안에서 분발해야겠습니다.

    2

    “고넬료는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욥바로 보냈습니다.”(8절)

    고넬료는 ‘영적인’일에 대해서 가감없이 말합니다. 그냥 하인과 경건한 병사에게 “가서 시몬을 모셔 오라!” 할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보다는 자초지종을 설명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역사와 메세지, 환상같은 영적인 이야기 입니다.

    한국에서 오랜만에 30년이 넘게 알아온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신앙인들은 아니지만 친구가 교회 개척을 했다니까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그렇게 하게 됐어?” 그들의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어. 하나님이 부르셨어. 하나님의 섭리야!”라는 말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믿음이 없는 친구들이니 제가 이렇게 말한들 그들이 이해하기는 커녕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단하게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 라고 대답했습니다.

    영적인 일은 그들이 이해할수있기 때문에 설명하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돌려말하거나 설명을 포기할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선포하고, 교회 밖에서는 “너는 잘 몰라. 설명해도 잘 모를꺼야!” 라고 말할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적인 역사를 있는 그대로 선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듣는 사람이 궁금합니다. 못알아 들으니 더 궁금합니다. ‘영적 세계’에 대한 궁금증들이 생깁니다. 궁금증이 관심으로, 관심이 믿음으로 변화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내 인생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 받은 메세지, 경험과, 기억들을 만나는 이들에게 상세히 나눌수 있는 영적 수다쟁이가 되야겠습니다.

    3

    하나님의 메세지를 거부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전통 때문입니다. 기조 때문입니다. 나의 삶의 습관 때문입니다. 내 개인의 철학 때문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메세지가 너무 급진적이기 때문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남들 눈치보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다 한 것을 불결하다 하지말라!” (15절)

    하나님의 메세지가 우리의 관념을 무너뜨릴때, 나의 전통과 철학을 도전할때도, 나의 이해의 한계를 도전할때도, 세상의 통념을 도전할때도 우리는 하나님의 메세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메세지를 온전히 수용하고 순종할때 한계를 뛰어넘는 결과를 보게 됩니다.

    4

    “하나님께서 깨끗하다 한 것을 불결하다 하지 말라!” (15절)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깨끗한 자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칭의의 핵심입니다. 긜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의 보혈을 믿음으로 깨끗하다 칭함을 얻은 자들을 불결하다 하지 말라!”

    칭의는 하나님의 선포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아닌것 같을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부정한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보혈의 능력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안에서 구원을 의심하지 마세요! 칭의를 의심하지 마세요! 예수의 보혈이 우리 모두를 의롭게 만들어주셨음을 부인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예수님 안에 믿음의 확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사는 신앙인이 되야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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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어나 자리를 정돈 하시오” (34절)

    치료의 기적은 ‘일어나는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정돈되는 삶’으로 이어져야합니다. 다시 드러 누울 자리를 치워버리는 것입니다. 상실된 삶의 규모를 되찾는 것입니다. 과거 내가 떠나버린, 내가 주저앉아 있던 자리를 치우지 않으면 자꾸 돌아보게 됩니다. 돌아가려는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만나면 오늘 본문에 나온 중풍병자처럼 치료를 받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예수님으로 인해 ‘일종의 치료’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여기서 멈출것이 아니라 과거의 삶을 청산해야합니다. 철저하게 정돈해야합니다. 기적의 가치가 무색해지지 않도록 새로운 인생으로 완전히 재정비 되야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기적을 경험한 모든이들이 삶을 정돈하는 시간들을 꾸준히 가져야할것입니다. ‘구원의 기적’으로 만족하며 매일의 삶을 정돈 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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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께로 돌아온지라!” (35절)

    표면적으로 기적은 베드로가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께로 돌아옵니다. 누가 무엇을 하던지 간에 우리의 삶은 이와 같이 주변인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통로의 삶이 되어야 할것입니다.

    능력과 영광을 행하는 자나,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를 경험한 자나, 예수께 돌아오게 하는 통로의 삶임을 잊지 말고 모든 영광과 집중을 주님께로 돌려야 할것입니다.

    바우교회를 개척하면서 이 마음이 가장 컸습니다. ‘사람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목회자, 교회 되자!’ 나를 통하여 어떤 일이 일어나든 모두 주께로 돌아오게 되길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통해서 주변인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일들이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일이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이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통로의 삶을 살아야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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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가 사람들을 모두 방에서 내보낸뒤”(40절)

    베드로는 죽은 아이를 살리기전에 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내 쫓습니다. 베드로는 두가지 측면에서 혼자 있어야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첫째로는 집중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오롯한 집중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아닌, 분산되는 생각들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집중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니까 자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쓰는 내 자신을 발견할때가 있습니다. 온전히 하나님만 본다고 생각하는데 자꾸 눈앞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과 생각이 신경쓰입니다. 그래서 ‘골방의 기도나 묵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그런 마음에서 사람들을 모두 내 보냈을 수 있습니다. 확실히 하나님의 일은 이와같이 하나님께로의 온전한 집중을 필요로 합니다.

    또 다른 이유는 ‘부정과 의심의 가능성의 제거’입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살리려 할때 주변에 의심과 부정의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무언가를 시도하면 옆에서 “안돼요 안돼!! 내가 안될줄 알았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수 있는것이죠. 그래서 베드로는 이런 일을 미연에 방지 합니다.

    사역을 하다보면 이런 주변인(?)을 만나곤 합니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 시도하려고 할때마다 “안된다! 못한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될일도 안되고, 해야할 일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의심하고, 부정하고, 거절하는 말, 생각, 행동들을 경계해야합니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이 교회 사역을 감당하면서 온전히 하나님께 집중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실천하는 목회자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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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사람들은 사울이 이제 변했다는 것을 느끼고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은 오히려 그런 사울의 변화를 믿지 못하고 두려워합니다. ‘그가 변했을리 없어!’

    어쩌면 이런 비슷한 일들이 요즘에도 일어납니다. 나의 변화를 세상은 쉽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교회안에서는 계속 의심합니다. “그 사람이 변했다고? 그럴리 없어!! 무슨 꿍꿍이가 있는게 틀림없어!!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지!”

    '세상'을 등졌기 때문에 기존 친구들도 그를 멀리하고, 회사에서도 어색하고, 심지어 가정안에서도 핍박이 있는데, 받아줘야할 교회마져 더더욱 거리를 두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물론 초대교회의 기독인들의 상황도 이해가 되고, 그들의 의심과 두려움도 100%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나바처럼 믿어주는 사람도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보여주는 ‘변화된 죄인’을 향한 의심과 적대감, 두려움과, 반감등을 조심해야겠습니다. 급진적 변화와 함께 사역을 하는 사람들을 볼때 덮어놓고 의심하고 배척하는 행동도 조심해야겠습니다. 지혜로운 분별이야 필요하겠지만 밀어내고, 정죄하는 행동은 조심해야겠습니다.

    2

    누가 누군가를 죽인다고 하는것은 굉장한 긴장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꾸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바울이 마주했을 ‘긴장감’은 여느 긴장감과는 그 수준이 달랐을 것입니다. 논쟁을 할때마다 자신을 향해 쏟아 부어지는 분노를 느낄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그 분노가 커지고 있는것 또한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선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결국 ‘죽여야겠다!’ 라는 결론까지 다다르게 된것입니다.

    매일 고조되는 상황들이 있습니다. 나의 신앙에 대한 불편한 기색들이 내 주변에 조성되기도 합니다. 나의 신앙을 드러내거나, 복음을 전할때 나를 향한 적대감이 감지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적대감이 어떤 수위를 넘어서서 위협적이게 느껴지는 일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할 수 있는때까지 계속 복음을 전했고, 때가 되면 지역을 이동해 또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떠한 상황을 마주해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복음 선포를 멈추지 않아야합니다. 때로는 이동해야하고, 때로는 피할지언정 신앙을 버리거나, 복음 전도를 멈출수 없습니다. 지혜로운 분별과, 신앙의 고집, 전도의 끈기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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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는 주를 두려워하고!” (31절)

    맞습니다. 결국 교회는 주를 두려워해야합니다. 세상을 두려워하면 교회는 멈춥니다. 사도도 멈춥니다. 그런데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에 교회와 사도가 멈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상을 두려워함으로 멈추기 보다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달려가는 교회가 되야겠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살아갈때 교회는 위로를 받고 부흥하고 성장하는 축복을 누리게 될것입니다. (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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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사울에게 기적적인 만남으로 임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마무리까지 해주시면 됩니다. 불가능한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굳이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환상 가운데 부르셔서 사울을 위해 기도하라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사울이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사울이 느닷없이 변해서 나타난다고 해서 그가 교회 안에서 함께 동역할수있는게 아닙니다. 실제로 아나니아도 환상가운데 명령을 들었을때 그 일을 하기를 꺼려했습니다. 사울에 대한 악명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 사울에게 안수하게 됩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 어렵사리 첫 인정이 시작되는것입니다.

    순탄하지 않을 바울의 첫 사역에 단추를 세심하게 베려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물론 아나니아를 통해서 안수를 받고 눈을 떴다고 해서 사람들의 모든 의심이 사라지고, 갑자기 믿음의 한 동역자로 받아들여지는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아나니아라는 상징적 인물의 안수가 있었기에 그나마라도 첫 단추를 시작할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역을 하면서 매일 명확하게 느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러한 세심한 배려입니다. 하나님은 조그만것 하나까지도 신경써주십니다. 필요한 부분을 미리 챙겨주십니다.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시고, 조금더 수월하게, 가능하게 길을 열어가주십니다. 돌이켜보면 바우교회 성도님 한분 한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아나니아’ 같은 사람들입니다. 한 주일을 비운다고 걱정하고, 사람을 못찾아 헤맬 때도 하나님은 생각지도 못했떤 목사님 한분을 보내주셔서 주일 예배를 섬기도록 도와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는 이와 같이 명확합니다.

    모든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임을 다시 한번 선포하며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2

    “내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한 내 도구다. 내 이름을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해야 할지 내가 그에게 보여 줄것이다!” (15-16절)

    사명과 고난은 분리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사명을 감당하면서 고난이 없던 사람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소위 말하는 개척 목회를 하면서 경험되어지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고난’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필연적인 어려움 입니다. 필수적 희생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참 좋습니다! 여전히 행복하고 뿌듯합니다! 아마 바울도 그랬을것입니다.

    의미있는 고난은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녀를 위해, 가족을 위해, 사랑하는 이를 위해 고난을 자처합니다. 어릴적 아버지는 그렇게 ‘사우디 행’을 자처했습니다. 자신을 희생시켜 가족을 먹여살리겠다는것입니다. 아빠로써의 사명의식 때문에 고난을 자처한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나라를 위해 고난을 자쳐했습니다. 그렇게 독립투사가 되고, 나라 발전에 이바지하는 역군이 되었습니다. 사명을 위해 과정에서 통과하는 고난은 가장 가치있는 일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위해 일하며 받는 고난은 가장 가치있는 일입니다. 사명을 위해 고난당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기쁘고, 감사함으로 자처할 수 있습니다. 고난은 사명을 피할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확실히 고난은 사명의 면류관 입니다.

    3

    바울의 변화는 가장 급진적인 변화중에 하나입니다. 그는 주저함이 없이 전도 사역에 뛰어듭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을 핍박했던 그 열심히 한치도 낭비됨 없이 그리스도를 전하는대로 치환된것입니다.

    삶의 변화의 변곡점에서 필요한것은 지체함 없이 뛰어드는 실행력입니다. 물론 언제나 급하게 뛰어든다고 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때로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계산하다가, 돌다리만 두들겨 보다가 아무것도 못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어제도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 얘기를 하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수많은 생각들, 수많은 기회들, 수많은 꿈을 꾸지만 실제 실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더라…”

    하나님을 만나서도 변화된 인생에 있어서 주저함으로 가득한 사람이 있습니다. 인생의 변곡점으로 내 몰렸는데도 여전히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선교지 한복판에 떨궈놔도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지?’만 되내이며 하루 온종일 혼자 거리를 누비는 사람도 있습니다.

    거침없는 실행력이 필요할때입니다. 계산이 아닌 믿음의 행동이 필요한 때입니다. 주저함보다는 신속함과 맹렬함이 필요한 때인지도 모릅니다. 막상 실행해야 따라오는 문제들을 발견하게 되고, 문제를 발견해야 보완, 수정이 가능합니다.

    주를 위해서 급진적인 변화와 적용을 실천해보면 어떨까? 하는 도전을 해봅니다. 저도 매번 그렇게 했던것은 아니지만, 나름 그런 변화에 서슴없이 뛰어들면서 참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계속 이런 삶의 태도로 주를 위해 뛰어들고 배우고, 성장하고, 성취하는 제자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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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는 이단입니다!! 유대인의 역사와 전승 그리고 믿음으로 보면 예수는 이단자이고 그의 가르침은 교회의 전통을 깡그리 무시하는것 같고, 신성모독자 같습니다. 그러니 유대교 신앙인 사울은 화가 납니다.

    오늘날 교회가 JMS를 대하는 자세를 보세요. 신천지를 대하는 자세를 보세요. 우리도 분노해있고 답답해하며 어떻게든 막으려고합니다. 정명석 같은 사람은 어떻게든 잡아넣고 그 일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죄값을 치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울은 이런 마음 인것입니다! 예수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사이비 이단자라고 오해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사울의 이러한 분노를 무턱대고 욕할것이 아닙니다. 그는 누구보다 열심이 있는 행동파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분노하여 움직이고 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보셨습니다. 그의 진심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정한 마음과 열성적인 행동을 보셨습니다! ‘방향만 맞다면 그는 누구보다 빠르고 강력하게 복음을 전할 적합자이다! 눈치보지 않고 꾸물거리지 않으며 멈추지 않을 자다!’ 그의 진정성과 열성적 태도에서 가능성을 보신것입니다.

    자세와 태도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진정성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한가지를 보면 열을 안다!” 이런 말도 괜히 있는게 아닙니다.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이제 큰일을 네게 맡기리라” 하는 말씀이 괜히 있는게 아닙니다. 한달란트를 뺐어 다섯달란트 사람에게 주는게 괜히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앙의 태도! “교회에서 나를 왜 중요한 일에 쓰지 않는가?” 그 탓을 남에게서 찾으면 안됩니다. 미온적인 나의 신앙의 태도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쉽게 포기하는 내 태도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열정이라고는 찾을수 없는 내 태도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반대로 부름을 권고하는 입장에서는 ‘적대자’ 니까 덮어놓고 생략하면 안됩니다! 그의 태도와 진심을 안다면 방향을 잘 잡아주면 됩니다. 그도 빛나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받을수 있습니다.

    평소 나의 태도에 진심과 열심을 갖추고, 부르고 권면할때는 그 사람의 진심과 열심을 살펴 진행하는 목회자가 되야겠습니다.

    2

    하나님의 빛이 비추었습니다3절

    볼수 없었습니다 8절

    하나님의 빛으로 세상에 대한 눈이 멀어야 비로서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이 보입니다. 온통 나의 시각에 세상의 것으로 가득 찼는데 하나님의 것이 보일리 없습니다.

    며칠전 아내와 부산 해리단길을 걷다가 우연히 흑백사진관을 발견했습니다. “한번찍어볼까?”둘은 그렇게 즉흥적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다찍은 후에 사진사가 말했습니다. “아내분이 뽑고 싶은 사진을 골라주세요! 그리고 사진 고르실때 부탁드리는데 꼭 남편 얼굴도 한번쯤은 확인해 주세요!” 이 말이 흥미로웠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장님이 이렇게 말힌 이유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사진사님 말로는 아내들이 사진을 뽑을때 너무 자기 얼굴만 확인하다보니 남편이 눈을 감고 있거나 반쯤 웃고있는 이상한(?) 사진을 뽑는 경우들도 흔하다는 것입니다. 아내들의 눈에 예쁘게 나온 자신을 찾느라 남편 얼굴까지 볼 여력이 없는것이죠. 일명 ‘나만예쁘면돼’ 혹은 ‘나만 볼꺼야!’족 입니다. ㅋ (물론 제 아내는 같이 예쁘게 나온 사진을 잘 골라주었습니다!)

    내 눈에 보고싶은 세상의 것이 가득하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것이 보이니 장님이 아닌것 같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장님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이 지점을 바꾸셨습니다. 세상을 향해 장님 만드시고 하나님을 향해 눈뜨게 하신 것입니다! 잠시지만 이 경험을 통해 바울은 전혀 다른 인생의 시각을 얻게 된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 모두는 성령의개안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볼줄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생기면 그때 그때 사명 달라고 하지 않아도 해야할일이 마구 보입니다. 가슴은 뜨겁고 할일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눈을 뜨세요! 영적 개안의 기쁨을 만끽하세요!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순간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게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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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다게의 재정관리는 그렇게 예배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길에 무료한 시간을 달래려했는지 이사야의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때 느닷없이 한 사람이 달려오더니 간섭을 시작합니다. 빌립 입장에서는 순종해서 하는 일이지만 관직에 있는 그 사람에 입장에서는 느닷없는 간섭입니다.

    빌립은 말합니다. “지금 읽고 있는 것을 이해하십니까?” 그러자 ‘고위관리’는 빌립이 누군지 묻지 않고 그를 자기 마차로 올라와 앉으라고 초청합니다.

    사실 ‘목회자의 교만’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이해가 좀 되십니까?” 라고 묻는다면 먼저 그 사람이 누군지 살핍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나도 모르는 ‘빌립’같은 사람이면, 나의 위용보다 못한 것 같은 모습이면, 그의 행색이 별거 없어 보이면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잘은 몰라도 당신보다는 더 잘아는것 같습니다!” 혹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모르긴요! 잘 알고 있습니다!” 라고 말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위관직’에 있는 이 높은 사람은 태도가 참 좋습니다! 바로 마음을 열고 배우는 자세로 빌립을 초청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누구나 배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모르면 배워야하고, 관심을 가져야하고, 함께 하나님의 말씀앞에 머리를 맞대고 기도하고 연구해야합니다. ‘사회적 지위’나 ‘지식의 학위’로 성경의 이해도가 만들어 지는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겸솜히 배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마치 성경을 읽으며 ‘주석’을 참고하듯, 말씀의 지혜와 통찰로 다가오는 성도들과 함께 깊은 말씀의 배움과 나눔을 가져야겠습니다.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싶습니다.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읽고, 배우고, 묵상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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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 이 내시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버렸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마차에서 이사야의 책을 펼때만 해도 이런 일이 일어날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읽고 빌립이 해석해주자, 거기서 복음의 에수님을 만나고 세례를 받기에 이릅니다.

    매일 아침마다 펼치는 말씀 묵상의 시간이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매일이 기대됩니다. 어떻게 내 인생이 바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우리를 완전히 변화시킬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매일 변하길 기대합니다. 놀라운 말씀의 기적들을 경험하길 기대합니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인생이 되길 기대합니다. 말씀의 능력이 내게도 기쁨으로 임할줄로 믿습니다. (3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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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눈으로 볼때 빌립도, 베드로도, 요한도 엄청난 능력의 사람들입니다. 능력이 있으면 사람들은 몰려듭니다. 영향력은 점점 커져가며 할수있는 일도 상대적으로 많아집니다. 그러니 '능력'은 곧 부러움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마법사 시몬'은 베드로에게 그 능력을 팔라고 말합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목사들 중에 탁월한 은사와 능력을 가진 분들이 계십니다. 드러나는 은사와 능력 때문인지 그분들의 교회의 교세는 엄청나고, 그분들은 수많은 다양한 일들과, 거대한 일들과, 중요한 일들을 상대적으로 많이 감당하십니다. 존경받을 만한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간혹 이런 목사님들을 보면서 부러워하고, 그들의 능력을 얻고 싶어서 '마법사 시몬'같은 실수를 하는 어리석은 목사들이 있습니다. 가시적 능력에 목을 매고, 목회에서 얻을 이익에만 정신이 팔리는것이죠.

    '능력있는 목사'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능력있는 하나님만 계실 뿐입니다. 제가 만약에 목회하면서 마법사 시몬처럼 능력에 눈이 멀고, 사람들의 능력을 오해하기 시작하면 저도 '마법사 시몬'처럼 온갖 실수로 점철된 장사꾼 목사가 되고 말것입니다. 능력이 가져다 주는 이익에만 눈이 먼다면 마법사 시몬처럼 하나님의 능력의 진정성을 훼손시키는 목회자가 될것입니다.

    목회자에게 필요한것은 '신령한 능력'이기 이전에 '순수한 신앙'입니다. 사명에 대한 진정성 있는 마음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확실한 선포입니다. '화려한 은사'를 향한 갈망이 아닌 받은 은사를 향한 성실입니다. 내 안에 혹 있을지 모를 '마법사 시몬'의 마음을 제거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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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안이 않좋은 일들로 시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이렇게 거룩한 말씀이 선포되고, 기쁨과 자유의 찬양이 울려퍼지고, 성도의 거룩한 교제가 일어나는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이렇게 안좋은 일들이 일어나는가?

    오늘 본문도 보면 위대한 사도들이 있고, 성령을 받는 가장 거룩하고도 영광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입니다. 그런데 그 현장 속에서 '마법사 시몬' 같은 사람이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는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 있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바로 듣고 보지 못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나의 이익에만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거룩한 공교와 성도의 교제와 아름다운 예배'의 자리도 무너뜨리고, '장사의 굴혈'로 만드는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다 신앙인이 아닙니다. 자리는 지키는데 듣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을 만나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께 관심이 없다면 수많은 문제를 야기 시키는 '악동'이 될수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그리고 예배 안에서 내 생각만으로 가득할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을 가득 가지고 갔다가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합니다. 예배후에 나의 이익에 대한 답을 얻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혜를 얻고 나와야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 도전을 받고 나와야합니다.

    신앙의 목적이 나자신에게 있는것은 아닌지 점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기적인 신앙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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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학자들이 짐작하는 것은 '마법사 시몬'은 회개하지 않았다! 입니다. 베드로는 회개를 종용했으나 마법사 시몬은 그저 중보기도만을 요구했습니다. 이후에 어떤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야 정확하게 알수 없지만 확실한것 하나는 있습니다. 회개는 나의 입술로, 내 자신이 직접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면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회개고백을 위해 중보하시는 분은 예수그리스도 한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마법사 시몬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당신들이 기도해주세요!" 라고 할것이 아니라, "예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주세요.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해주세요. 하나님 앞에서 저를 위한 중재자가 되어주세요!"라고 기도했어야합니다.

    회개에 대한 안일한 생각을 버려야합니다. 잘못한 아이가 학교에 부모님을 모셔오고 피해자 가족을 대면할때, 옆에 교장,교감 선생님이 사죄하고 중재한다고 될일이 아닙니다. 담임 교사가 중재한다고 될일 아닙니다. 가해자학생 부모가 사죄한다고 될일도 아닙니다. 먼저는 가해자 학생에 진정한 회개와 사죄가 필요합니다.

    만약 가해자 학생이 "교장 선생님이 이제 괜찮다고 하셨어요! 중재위원회가 다 해결할꺼라고 하셨어요!" 라고 말한다면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중재는 그들이 할수있는게 아닙니다. 마법사 시몬의 죄를 베드로, 요한이 중재할수있는게 아닙니다. 죄의 중재는 예수님만 가능하십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능력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 붙들고 진심으로 회개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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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데반이 이 장황한 이야기를 끄집어 낸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스라엘 역사가 ‘위대한 예언자’를 언제나 괴롭힌것처럼 ‘위대한 메시야’를 부정하고 괴롭혔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상황이 이쯤되니 듣던 사람들은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라 스데반을 보며 이를 갈았습니다.” (54절)

    정확하고 날카로운 지적을 받으면 쉽게 소화가 안되는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적 받았으면 회개하는게 옳은 행동입니다. 다윗은 간음과 살인교사의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나단 선지자를 통해 많은 이들 앞에서 드러났습니다. 다윗은 이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오를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화내기 보다는 인정과 회개를 선택했습니다.

    스데반을 통해서 날카로운 지적을 받았다면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매일 날카로운 지적을 받습니다. 말씀을 묵상할때마다, 설교를 들을 때마다 ‘양날이 선 말씀’의 강력한 지적을 받게 됩니다. 안들은척, 못들은척, 아닌척, 해서는 안됩니다. 적반하장격으로 화를 내서도 안될 것입니다. 나의 죄를 덮기 위해서 또 다른 죄를 저질러서도 안되겠습니다.

    오늘 스데반 앞에 서있던 자들이 들은것처럼, 듣기는 들어도 내 삶을 찌르는 예수님을 부정하고 지우려고했던 거절의 마음들을 철저히 회개해야할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적은 또 다른 말로는 기회이며,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에 ‘스데반’을 보내주실때 진심으로 깨닫고 회개해야겠습니다.

    2

    “주여,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소서” (60절

    스데반은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실때 로마 군사를 위해 기도하던 그 기도소리가 떠오릅니다. 스데반은 도전적이고 날카롭습니다. 두려움이 없고, 말씀 안에 담대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중보하는 애뜻한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전하는 이유는 그들을 정죄하기 위함이 아닌 구원의 자리로 부르기 위함입니다. 그들을 죽이기 위함이 아닌 살리기 위함입니다. 목적 의식이 정확해야합니다. 교회가 이 목적 의식을 상실하면 온통 정죄만 합니다. 세상 사람 더럽다고, 죄인이라고 핀잔만 늘어 놓습니다. 다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을 위해 중보하는게 신앙인들의 몫입니다. 그들의 용서를 함께 구하는 것이 신앙인들의 몫입니다. 심지어 그런 나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라도 중보하는게 신앙인의 몫입니다. 우리는 중보하는자들이며, 살리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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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심하게 됐습니다” (23절)

    무언가 대단한 일에 결심하고 움직이는게 쉽지 않습니다. 모세는 그전부터 이미 탁월한 지혜와 능력들이 발현되었습니다 (22절) 그러나 그의 나이 40살이 되어서야 결심하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스데반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도 어느순간 주님을 향해 살고자 하는 결심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집사가 됐고, 또 선교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저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시가 있고, 사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가 이르매 그때마다 결심이 필요했습니다. 용기를 내고, 결단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과 은사를 사명을 위해 발현하는게 느려집니다. 어쩌면 못하고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결단해야합니다. 선교지로 향하고, 교회로 돌아오고, 사랑을 실천하고, 지역을 섬기고, 목회자가 되고, 교회를 세워야합니다. 결심할때 하나님은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더욱 큰 힘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물론 결심하고 나서 모세처럼 실수 할수 있습니다.(24절) 40년간의 ‘광야수업’으로 이어질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했기 때문에 광야에서 배웠고 그의 나이 80살에 출애굽의 선지자가 될수있었던 것입니다. 저의 결심도 돌아보면 언제나 실수 투성이였고, ‘광야수업’으로 가는 통로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결심하고, 실수하고 배웠기 때문에 그 다음 일들에 조금더 준비된 자로 섬길 수 있었습니다.

    결심이 필요합니다! 첫걸음이 필요합니다!

    2

    “그러나 우리 조상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를 거절하며 그 마음으로 이집트로 돌아갈 생각을 했습니다.” (39절)

    어릴적 집이 많이 가난했습니다. 방이 하나밖에 없는 아궁이 있는 집, 연탄을 때고, 화장실은 옆집으로 가서 그집 밖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을 써야했습니다. 방문은 창호지 문이었고, 밤중 화장실은 당연히 요강을 써야했던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참 좋았습니다. 뭔가 추억이 새록새록하고, 향수와 감수성을 자극합니다. 아버지가 포장마차를 하셨는데 맛있는 떡복이와 튀김이 끊이지 않았고, 어머니는 냉차와 아이스크림 카트를 끌고 다니셨는데 그것 또한 부족함 없는 군것질 거리가 되었습니다. 참 좋았던 기억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좋은 김에 그때의 그 삶을 돌아가려고 한다면 좋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포장마차와 냉차로 집에 계시지 않았고, 포장마차 떡복이는 질렸고, 어린 나이에 집에서 얼어붙은 떡을 때며 밤 시간을 보냈던 것도 쉽지 않았고, 튀김은 항상 기름냄새로 가득한 남은 음식들이었습니다. 아이스크림 한번 먹겠다고 카트 끌고 동네를 돌아다니시는 어머니를 찾아다니다가 지치기가 더 일수였습니다. 그때로 돌아가면 좋을것 하나도 없습니다.

    과거를 회상하면 미화됩니다.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과거인데 괜히 아름다운 추억같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돌아가봐야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과거와 다른게 하나도 없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갑자기 과거 애굽의 삶이 더 좋았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그때가 좋았지!!” 웃기는 소리입니다. 그들은 지금 단단히 착각에 빠졌습니다. 막상 돌아가면 최악입니다. 노예이고, 매 맞아야합니다. 맨날 일만 해야합니다. 우리의 자녀들 조차도 목숨을 한순간에 빼앗길수 있는 그런 환경입니다.

    신앙인은 그러므로 절대 과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못하던 그때, 하나님을 믿지 않던 그때로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던 그 과거가 좋았다고 기억된다면 정신차리세요. 단언컨데 돌아가면 절대 좋지 않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면 망합니다.

    무조건 하나님 곁을 지켜야합니다. 믿음을 지켜야합니다. 거룩을 지켜야합니다. 신앙과 사명, 천국 여정을 떠나지 말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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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데반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충만해 사람들 가운데 큰 기사와 표적을 행했습니다.” (8절)

    원래 초대 교회 집사는 “음식 분배하는 일”(2절)을 위해 부름받은거 아닌가요?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사도들이 “기도하고 말씀 가르치는 일’에 전심을 다하려고 했던거 아닌가요? (4절) 그런데 오늘 8절을 보니까 스데반은 사도들이 한것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일은 나눠 할수 있지만 ‘복음 전파’는 누구나 해야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사는것은 모든 신앙인이 해야하는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 ‘사역’ 한다고 해서 복음 전도를 안해도 된다거나, 세상속에서 빛과 소금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되는법은 성경에 기록된바가 없습니다.

    신앙인에게 디폴트 사명은 ‘복음 전도’ 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는 할수 있는 모든 능력을 발현합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직분, 어떤 사역을 하고 있던지간에 상관없이 신앙인의 기본값을 잊지 말고 실천해야겠습니다.

    2

    “돈을 주고 몇몇 사람을 시켜” (11절)

    공의가 무너진 세상! 돈주면 뭐든 되는 세상! 돈주면 뭐든 하는 세상! 우리가 사는 세상만 그런줄 알았다면 큰 착각입니다. 이미 2000년 전 그곳도 썩을대로 썩은 곳이었습니다. 가장 신성하고, 공정해야할 재판소가 정의를 잃었으니 말 다했지요. 그마저도 다른 이유가 아닌 돈 때문에 정의를 포기했다니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돈’

    도대체 돈에 왜 그렇게 휘둘릴까요? 저도 돈 좋아합니다.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압니다. 돈이 편리함을 제공한다는 것도 알고, 돈이 힘이 될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돈 때문에 뭐든지 타협하고, 뭐든지 내다 팔수는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돈돈돈" 하다가 돈 사람 많이 봤습니다! 지금 내가 가진 돈, 내가 벌고 있는돈, 내가 사용하고 있는 돈에 어떤 가치를 적용하고 있는지 철저히 살펴봐야겠습니다.

    그렇게 돈에 대한 가치를 단호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여지를 두면 안됩니다. 자칫 돈 때문에 팔려가는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만들려고만 하면 뭐든지 이유가 될수 있습니다. 제가 만약에 돈의 가치를 잘못 정립한다면 저는 돈에 의해 팔려다니는 목회자가 될것입니다. 돈에 의해 휘둘리는 목회자가 될것입니다. 삯군이 될 뿐입니다. 돈의 논리에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돈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돈에 욕심 부려서는 안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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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이렇게 백성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을 선동해 스데반을 붙잡아 공회 앞으로 끌고 갔습니다.” (12절)

    선동하는 사람도 싫지만 선동되는 사람들도 싫습니다. 아니, 답답하고, 안쓰럽기도 합니다. 선동하는 자가 거짓말에 탁월하기도 하고, 선동 당하는 자가 전혀 분별의식이 없이 따르기도 합니다.

    가끔 영화를 보면 양쪽 진영에서 총을 들고 대치합니다. 그때 경찰 한명이 소리지릅니다. “쏘지마!! 아무도 쏘지마!” 다들 초긴장 상태입니다. 경찰은 피흘림 없이 이 일을 끝내려고 합니다. 그때 입니다. 나쁜 악질 범인이 총을 쏩니다. 총질을 선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느닷없이 너나 할것 없이 총을 쏘기 시작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흥분해서, 살고 싶어서, 남들 쏘니까, 때는 이때다 싶어서 첫 발포를 따라 총을 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피흘림 없이 끝날 수 있는 현장도 결국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됩니다. 결국 누군가를 죽이게 되거나 죽임 당하게됩니다.

    ‘선동하는 악’을 조심해야합니다. 그들은 분명히 나의 약점을 알고 공격해 들어올 것입니다. 그렇게 내 마음을 충동하고 그들을 따르게 만들것입니다. 선동되지 않는다면 문제는 커지지 않을수 있습니다. 따라 나서지 않는 다면 악은 소멸 될수 있습니다. 선동되지 않는다면 죄를 지을 위기에서 나 자신을 구해 낼수도 있습니다. 나의 귓가에 울리는, 나의 마음을 현혹하는 선동의 소리에 귀를 막고 분별하며 거절해야겠습니다.

    예수께만 선동당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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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이 고소한 이 내용들이 사실이냐?” (1절)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서셨을때도 빌라도가 자꾸 물었습니다. “그들이 고소하고 있는데 너는 대답할 말이 없느냐?” (막15:4) 분명히 막15:2절에 “그렇다. 네가 말한 대로다.” 라고 사실을 말씀하신후였습니다.

    ‘사실’에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사실을 말해주었는데도 결국 십자가에 넘겨 주었습니다. 오늘 스데반에게 “사실이냐?” 묻는 대제사장도 사실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사실’이 우리를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생각하는것은 착각입니다. ‘사실’이 중요하지 않은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닫혀있다면 ‘사실’을 쏟아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 부활한것을 제자들이 보았습니다. 그렇게 도마에게 놀라운 사실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도마는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나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내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사실찾기의 자세’로 접근하는게 아니라 ‘믿음의 자세’로 접근해야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실찾기’에 혈안이 되어서, 그렇게 성경을 열심히 보는데도 ‘자유주의적 신학’에 빠져들고야 마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한계의 저변에 계시는 하나님은 믿는것이지 판단하는것이 아닙니다. 신은 믿는것이지 ‘사실’로 증명하는것이 아닙니다. 주를 향해, 그분의 말씀을 향해, 그분의 섭리와 행하심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열고 믿는 신앙인의 삶을 절대 놓치지 않겠습니다.

    2

    “형제들이여, 그리고, 어르신들, 내 말을 들어보십시오.” (2절)

    스데반이 설명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들 속에서 일하신 하나님은 선명합니다. 참 일관성이 있습니다. ‘구원의 하나님’이 보이고, ‘축복의 하나님’도 보입니다. “예언과 성취’의 하나님도 선명하게 보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 섭리가 가득합니다. 각자의 삶에 ‘아브라함의 도전’과 같은 인생도 있었고, ‘손바닥만한 유산’도 얻지 못한 서글픔도 있었습니다. ‘400년동안’의 혹사와 같은 고난도 있었고, ‘열두조상’을 낳은 것 같은 기쁨의 일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나와 함께 걷고 계십니다. 나와 함께 호흡하고 계십니다. 나의 희노애락 속에 그분은 함께 하십니다. 돌아보니 모든것이 은혜입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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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곱은 이집트로 내려가게 됐으며 그와 우리 조상들은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15절)

    과거의 이야기를 보다보니까. 죽음으로 귀결됩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다 죽습니다. 누군가는 가나안에서, 누군가는 애굽에서 죽습니다. 수많은 인생의 우여곡절의 끝에서 결국 모두 죽었습니다. 살아생전 찬란함이나, 부나, 영광에 상관없이 다 죽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것은 죽음보다는 죽음 이후의 삶입니다! 죽음 이후의 삶은 끝이 아닙니다. 그 이후가 있습니다. 영원한 영생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의 삶을 보장하시는 분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 독생자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구원하심을 믿습니다. 혹 아직도 믿지 않고 계신분이 이 묵상을 듣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초청하시는 믿음의 자리로 나오시길 강력하게 도전합니다. 인생 길어봐야 100년 입니다. 그 이후의 삶은 영원합니다! 영원한 삶을 위해 오늘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하세요! 주님만이 구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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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황상 분명히 ‘히브리파 유대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이런 나쁜일을 한것 같습니다. ‘매일’ ‘그리스파 유대 사람과 유대 과부들’만 빠지는 우연은 없습니다. 한번, 두번은 가능할지 모릅니다. 어제는 과부, 오늘은 히브리파 유대인 일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확한 실수가 꾸준히 반복되면 실수가 아닌 의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마도 '그리스파'는 이방인이여서, '과부'는 말그대로 여자이며, 과부여서, 과거의 습관을 따라 무의식적으로 차별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교회안에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범인을 색출해 정죄하기 보다는 집사를 뽑아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기로 결정합니다. 범인색출이 아닌 집사선출입니다. 왜 이렇게 했을까요?

    ‘히브리파 유대 사람들’이 저지른 일은 죄라기 보다는 실수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습관과 마음에 굴복했기 때문에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일어난 실수였습니다. 그래서 정죄의 칼을 뽑아들지 않습니다. ‘실수’를 죄로 몰아 붙이면 성처가 커지고, 불신이 커지고, 분열이 커지고, 분노가 커집니다. 문제가 해결되는게 아닌 문제가 더 커지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죠.

    정죄가 언제나 답이 아닙니다. 실수가 일어날때 하나님의 지혜로 보완할수 있다면 더 선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쉽게 정죄하기 보다는 함께 기도하며 ‘최선의 길’을 찾아 준행하는 지혜와 사랑을 실천해야겠습니다. 젊은 사도 바울이 어린 마가(요한)를 '선교에서 도망친 녀석'이라고 내몰고 핀잔줄때, 그 ‘정죄’가 최선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혜롭게 처사하고, 교회가 더욱 성장하고 칭찬 받을 수있는 선택을 해야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기록처럼 결과적으로 '일곱 집사'가 별현되는 최선의 결과를 마주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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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큐티에 할말은 아니지만 이왕 이 나눔을 우리 성도님들이 (혹은 타교회 성도님들도) 보시니까 보시는 김에 부탁드립니다.

    “저는 기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겠습니다!” (4절) (물론 다른 일들도 열심히 할께요! ㅋ) 그러니 우리 성도님들은 교회의 필요한 섬김의 영역들을 함께 섬겨주세요!

    하나님의 교회는 혼자 세울 수 없습니다. 사도들의 탁월함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우리는 이미 사도행전이 시작하면서 시작된 사도들의 위대한 일을 듣고 또 들었습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사도들은 위대합니다. 오죽하면 그림자에만 닿아도 낫겠다 싶었을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도들만 가지고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질수 없습니다. 사람들이야 몰려들수 있지만 사도들만으로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한 교회가 될수밖에 없는것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함께 할 때 성장합니다. 어제 이사하는데도 혼자서는 절대 못할 일을 한결 수월하게 했습니다. 이틀전 4시간 걸려서 그렇게 조금밖에 못헸는데, 어제는 오전부터 여섯분이나 오시니까 오전중에 일이 끝날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우리 모두가 각자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할때 교회가 건강하게 유지되고, 성장하고, 칭찬받는 교회 될줄로 믿습니다.

    큐티는 어디까지나 제 자신을 향한 묵상이니 저는 목회자로써의 섬김을 결단하고 더욱 매진하겠습니다. 그러니 우리 성도님들은 교회를 위해서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바우 교회 화이팅 입니다! 모든 교회, 화이팅입니다!

    3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널리 퍼져 나갔으며” (7절)

    결국 예루살렘 교회 좋자고 한 일 일지 모르지만 이 일로 인해 복음은 점차 더 멀리,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나갔습니다.

    한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면 한교회만 건강해 지는게 아닙니다. 다르게 말하면 한 교회가 성장했는데 주변 다른 교회들이나, 범교회적 성장이 없다면 그 교회의 부흥의 진정성이 의심될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부흥은 교회를 뛰어넘습니다. 영혼 구원은 교회 안에 머물지 않고, 세상으로 흘러 넘칩니다. 우리 교회가 부흥하고 잘되야 하는 이유는 우리 교회 때문이 아닙니다. 말씀의 무한한 확장을 위함입니다. 복음의 전도를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각 교회마다 부흥해야합니다. 말씀 안에 성장해야합니다. 건강한 부흥을 이뤄내야합니다. 그때 이 부흥으로 인해 복음이 계속 널리 퍼져나가고, 제자들이 늘어나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믿음에 순종하게 될것입니다 (7절) 교회의 건강한 부흥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이 계속 널리 퍼저나가게 될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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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18절) 잡혔다가 풀려난지 얼마 안됐습니다. 방해를 받은지 얼마 안됐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사도들은 또 잡혀서 감옥에 들어갑니다.

    어려움이 반복되면 굳건하던 마음도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방해가 연속되면 자칫 위축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전혀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성령님께서도 이번에는 강력하게 개입하셔서 감옥문을 열고 나오게 해주십니다.

    어제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실제 바쁘기는 했지만 ㅠ) 대학 동아리 모임을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두명의 청년이 참여중이지만 그 마저도 한번씩 참석하지 않곤 했기 때문에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조금 실망(?)되는 느낌을 경험하기도 했던 차입니다. 그런와중에 일정이 너무 바쁘게 휘몰아 치고, 두명중 한명이 못온다고 연락을 해오니 모임을 캔슬하기에 딱 좋은 명분이 되었습니다

    캔슬로 확보한 시간에 차분히 앉아서 주일 설교를 정리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원래 전화를 거의 받지 않는 편인데 ‘스팸’이라는 메세지가 없어서 전화를 받게됐습니다. 그런데 수화기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안녕하세요! 혹시 오늘 동아리 모임 없나요?”

    순간 심장이 쿵 했습니다. 아찔했습니다. 짧은 찰나에 얼마나 깊은 회개의 마음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그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진심을 다해 사과했습니다. 그렇게 전화를 끊는데 하나님께 정말 죄송했고, 상황 때문에 변명했던 제 자신을 다시 한번 채찍질(?)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사도들은 반복되는 낙담의 상황에도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그런 그들을 도와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저도 다시 한번 베드로와 요한의 태도를 본받아 하나님을 섬기고, 사역을 감당하기로 결단합니다. ‘낙담의 상황’이 반복될때도 위축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성실히 섬기기로 마음을 정합니다.

    2

    “그때 누군가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감옥에 가둔 그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5절)

    사도들은 그들이 경험한 기적으로 자신을 포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복음을 전할 뿐입니다. 말씀을 가르칩니다. 사실 감옥문이 닫혀있고, 간수들이 있는데도 사도들이 빠져나온것과 같은 기적은 흔한 기적이 아닙니다. 절대 쉽게 일어나지 않고, 설명할래야 할 수 도 없는 일입니다. 위대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나와서 복음 전합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위대하며, 위대한 일을 겪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시는가? 자랑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뿌려지는 수많은 ‘간증’은 ‘나잘났다!”라는 내용을 보여줄때가 많습니다. “내가 이만큼 중요한 사람이야!! 하나님이 나를 이만큼 사랑해!”라는 메세지로 귀결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그 부분은 도려내고 복음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많은 기적의 목적은 ‘나’를 위함이 아닌 ‘복음’을 위함입니다. 치료하신것도, 성공하게 하신것도, 지혜를 주신것도, 돈을 주신 것도, 문제를 해결하신 것도 하나님의 구원의 메세지를 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기적을 ‘나’라는 좁은 시각으로 해석하지 말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해석해야합니다. 그래야 이 기적을 통해 무엇을 해야하는지가 보입니다. 지체없이 기적의 목적을 이룰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의 의미를 축소시키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멋적게 만들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기적은 복음의 도구입니다!

    3

    41,42절의 기록이 버겁습니다. 최근에 자주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너무 빨리 달려가나?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하나? 너무 무리하는거 아닌가?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저에게 하나님은 사도행전을 묵상하라고 주셨습니다. 가만히 묵상하면서 보니까 저는 별것도 아닙니다.

    채찍질당하고 기뻐하며 선포하기를 쉬지 않은 (40-42)베드로와 요한을 보며 나 자신을 향해 도전합니다. 그만 버거워해야겠습니다. 사실 버거울것도 없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저보다 일도 더 많이 했는데, 방해자도 많았습니다. 저는 베드로와 요한보다 일도 적은데 방해자 대신 동역자들만 많습니다!

    이 말씀보면서 확실해 졌습니다. 저는 지금 신앙의 엄살, 사명의 엄살에 빠졌습니다. 내 안에 싹을 틔우고 있는 신앙의 엄살, 사명의 엄살을 척살합니다! 더 열심을 내야겠습니다! 아멘

    오늘 이사합니다! 안다치게 기도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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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니아라는 사람은 그의 아내 삽비라와 함께 재산을 팔았습니다.” (1절)

    부부는 함께 선한 결정을 내립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이 되어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그리 오래 가지 않습니다. 남편은 2절에 보니까 돈을 숨겨둡니다. 아내는 또 이것을 알면서도 모른척 합니다. 그 이후는 부부가 아예 따로 따로 움직입니다. 서로의 악함에 간접적으로 동조한것입니다. 그 결과는 둘다 죽임 당하는 것입니다. 세상 슬픈 결론입니다.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칠때가 가장 좋습니다. 그마저도 안되면 한명이 또 다른 한명에게라도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합니다. 그런데 결국은 서로 나몰라라 해버리고, 악한 길을 선택하면 이런 비극을 마주하게 되는것입니다.

    부부든, 가족이든, 교회든, 회사든, 지인이든, 누구와 함께하든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해야겠습니다. 그들중 누구라도 홀로 잘못된 길을 선택한다면 선한 길로 올수 있도록 도와줘야겠습니다. 나 몰라라 하고 나도 나쁜길을 가는 최악의 일은 절대 저지르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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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다.” (4절)

    결국 들통났습니다.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바리세인들은 당시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독사의 자식들아! 회칠한 무덤아!” 라고 부르셨습니다.

    사울왕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고 좋은 전리품은 남겨두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를 책망하시고 심판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를 예언하신 예수님께 “주님 절대 그렇게 하실수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위해서인것처럼, 보호하는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의 영광을 지키려는 욕심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우리는 그분을 속이려 하지만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내가 온세상을 다 속여도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나의 내면을 보십니다. 심연의 깊은 생각을 꽤뚫어 보십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 속였다는 어리석은 착각을 버려야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정말 다 죽는수가 있습니다. 정신 차려야합니다. 하나님을 속이려는 시도를 멈추세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죄 입니다.

    3

    "사도들은 사람들 가운데 많은 기적들과 표적들을 일으켰습니다." (12절)

    사도들은 이와같이 위대(?)한 일들을 해냅니다. 사람들은 감히 그런 사도들에게 범접할수 없는 '카리스마'를 느꼈습니다.(13절) '그들은 우리와 다르다!' 일이 이쯤되자, 베드로의 그림자에라도 한번 덮혀볼까 해서 쫓아다니는 일까지 발생했습니다. 소문이 펴져 옆동네에서 찾아오는 일도 흔해졌습니다.

    그러나 말은 바로 해야합니다. 사도들이 위대한게 아니라 하나님이 위대하신것입니다. 사도들은 '칭찬' 받는것으로 충분합니다! (13절)

    이 시대에도 수많은 '위대한 목사'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언행이 다른 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설교가 '다른 차원'에 있는듯 느껴지는 탁월한 목사가 있습니다. 은사의 발현이 기적과 표적에 가까워 보이는 목사도 있습니다. 목회적 역량과 리더십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목사도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쫓아다니고, 소위 말하는 '팬덤'이 형성되는 목사들도 있습니다. 그들중 많은 목사들이 칭찬 받아 마땅한 삶을 살아내는 베드로와 요한과 같은 목사입니다. 이 시대에도 이러한 목사님들이 계시다는 사실에 참 감사하고 기쁩니다.

    그러나 그러므로 교회는 조심해야합니다. '위대한 목사'는 자신이 위대한게 아니라 하나님이 위대하시다라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됩니다. '위대한 목사'를 바라보는 성도는 목사가 위대한게 아니라 일하시는 하나님이 위대하시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됩니다.

    '위대함'에 현혹되 그 일을 행하시는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을 잃어버린다면 신앙은 이내 흔들리게 되고, 목사는 교주로 둔갑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위대함'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이 망함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온 교회가 함께 깨어있어야 할것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바우 교회를 위해 위대한 일을 이루실때 모든 영광을 오직 주님께만 올려 드릴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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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저지에서 사역할때 이런 말 많이 들었습니다. “목사님, 우리 회사에서 이제 예수님 얘기할수 없게 됐어요. 전도하지 말래요. “메리크리스마스”도 못하게됐어요. 교회 다는것도 얘기하지 말래요!”

    이는 마치 베드로와 요한이 자기 동료들에게 돌아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한 말을 모두 전해준것과 같습니다 (23절)

    이때 초대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반응 했을까요? 초대교회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담대함을 간구했습니다. 전도에 대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는 이런 소리를 들으면 서로 싸웁니다. “거봐!! 요즘은 그렇게 전도하는 시대가 아니야!! 교회가 좀 인격적이여야지! 괜히 전도한다고 사람들에게 교회 이미지만 않좋아져! 그러니까 전도 하지 맙시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한켠에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 이렇게 대응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 더욱 선포해야지, 이럴 때일수록 더 쎄게 전해야지?!”

    결국 교회는 전도는 커녕, 시작도 전에 분열하기에 바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전도를 방해하는 사탄의 전략 앞에 분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자주 사탄의 이 전략 앞에서 분열됩니다. 결국 사탄은 1타2피를 성공합니다. 전도도 막고 교회의 분열도 일으키는 것입니다. 어쩌면 1타3피입니다. 교회가 복음에 대한 자신감과 열정마저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합니다. 깨어있어서 사탄의 공격 앞에서 하나가 되야합니다. 분열되어서는 쉬운 공격조차도 막지 못하는 법이니까요. 더 나가 한마음으로 기도해야합니다. 기도없이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떤 시대를 살아내더라도 복음 선포를 멈춰서는 안될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상 최대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2

    “가진 것을 모두 공동으로 사용했습니다.” (32절)

    바우교회는 한 공간에 모여서 공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공동의 재산으로 여기고 우리의 월급을 서로에게 공유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다른 성도에게 나눠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동체가 맞습니다.

    지난 1-2주만 돌이켜보더라도, 아내가 출타중이라서 그런지 성도님들이 저의 식사에 관심을 가져주셨습니다. 성도님들이 구매한 음식 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해서 가져다주시기도 하고, 어떤 분은 식당으로 저를 초대해주셔서 식사를 대접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결국 그분들의 시간, 노력, 재정이 저와 함께 공유(?)된것이죠. 또 자동차를 정비하는데 필요한 도구를 빌려 쓰기도 했고, 한 성도님은 아이가 입던 좋은 옷들을 저의 딸 입히라고 챙겨서 보내주시기도 했습니다. 물론 성도님들이 저만 챙기는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들로 빌려주고, 나눠주고, 베풀어주고, 대접한다고 전해들었습니다. 이와같이 바우교회는 이미 서로 공동으로 생활하고, 나누고, 베풀고, 채워주고, 희생하는 그런 교회가 되어있습니다.

    받는데만 익숙한것이 아니라 주는데도 익숙한 사람이 되야겠습니다. 원래 계획보다 조금 더 나누는 사람이 되야겠습니다. 받으면 감사하다고 진심으로 표현 할줄 아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항상 성도를 살피며 그들의 필요를 세심하게 챙길줄 아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다른이가 '바나바'가 되길 기대하기 전에 내가 먼저 '바나바'가 되야겠습니다. 결국엔 바나바'가 넘치는 바우교회가 될줄로 믿습니다.

    3

    “그 사람이 자기의 밭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놓았습니다.” (37절)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한 헌신으로 큰 재정을 교회에 내기도 하고, 목사님께 가져오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도 보면 바나바는 가진걸 다 팔아서 사도들 앞으로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들 발 앞에 가져다 놓았다고 사도들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목사는, 교회는 성도의 이와 같은 헌신을 욕심으로 취해서는 안됩니다. 불의하게 사용해서도 안됩니다. '사도 앞으로' 가지고 나왔어도 이는 하나님을 위하고, 교회를 위한 재정입니다. 이 영적 원칙을 절대 잊어서는 안됩니다.

    저도 바우교회를 개척하다보니까 많은 분들이 이런 저런 모양으로 헌금을 보내주십니다. 그러면 교회 회계장부에 잘 기입하고 정리합니다. 사용처도 잘 정리합니다. 집사님 한분이 꼼꼼히 내역을 정리하면서 감수합니다. 연초의 교회 예산을 정하고 예산에 따라 집행하면서 정직한 관리를 위해 노력합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돈은 함부로 하면 안됩니다. ‘사도’든 ‘목사’든 예외가 없고, 성도도 예외가 없습니다. 주께 드릴것을 주께 드리고, 함께 나누고 베풀것을 풍족하게 나누며, 하나님 앞에서 재정을 정직하고 건강하게 사용하는 삶의 재정원칙을 놓치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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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이 서로 물었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부인할수 없습니다. 어쨌든 이 일이 백성들 사이에 더 이상 퍼져 나가지 않도록 하려면..” (16-17절)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상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내린 결론이 고작 “방해하자!” 입니다. 머리를 맞대고 서로에게 물었다면 더 좋은 결론이 나오면 좋았을텐데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결정을 내립니다. 자신들의 입으로 분명히 “부인 할수 없습니다!” 말해 놓구서는 아무도 불의한 이 처리안 앞에서 반대 의견을 내놓지 않습니다.

    ‘집단지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명보다 집단의 지성이 더 훌륭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는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것 같습니다. 분명히 서로에게 물었는데/집단지성인데 엉뚱한 결론을 내려버린것이죠.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집단지성’보다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더 중요합니다. ‘집단지성’은 더 지혜로울수 있습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절대 기준이 되는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성은 ‘단독지성’이여도 우리가 가진 ‘집단의 지성’과는 비교할수 없이 완벽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죠

    [고전1:25, 우리말성경]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집단지성’의 오류에 빠져, 이들과 같이 예수님을 부정하고, 그분의 구원을 부정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부정하고, 인정하지 않는 신앙의 부정과 오해에 빠지지 말아야겠습니다. 언젠가 집단지성에 근거해서 사람들이 공격해 올지라도 우리는 명백한 말씀의 진리/사실위에 서서 우리의 신앙을 지켜내야겠습니다.

    2

    “그러고 나서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다시 불러들여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18절)

    베드로와 요한에게 한것처럼, 오늘날도 세상은 기독교인의 입을 막으려고 합니다. “너희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18절)라고 말합니다. 이와같이 세상이 우리를 막는 근거는 ‘종교의 자유’입니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요? 종교의 자유가 있다면 종교를 전할수 있어야하는거 아닐까요? 우리가 종교를 전할때 그것을 듣는 사람들이 다 믿는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그들이 예수를 듣고 선택할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은것이죠.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 어떤 종교가 있는지는 알아야하는거 아닙니까?

    사실 세상은 기독교를 두려워합니다. 복음이 선포되면 사람들이 바뀔것을 압니다. 사탄은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복음은 죽어있는 이야기가 아닌 살아있는 이야기, 살리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가 전도하면 뭐라고 안합니다. 그런데 유독 기독교가 전도하면 결사 항전의 마음으로 방해하며 나서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으로 이 시대를 살아내는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 같아야 할것입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와 요한의 자세이지요. 세상에 위협앞에 굴복하지 않는 복음의 전사가 되야겠습니다.

    3

    “이 기적으로 병이 나은 그 사람은 마흔 살이 넘은 사람이었습니다.” (22절)

    저는 개인적으로 마흔살병(?)을 좀 심각하게 겪었습니다. 인생에 대한 깊은 고민과 기도의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그 과정을 돌이켜보면 짦은 인생에 대한 자각과 고민이 가장 많았던것 같습니다. ‘벌써 40이라니? 이제 대략 살아온만큼만 더 살면 얼추 이 땅에서의 내 삶은 끝이구나. 진짜 금방이구나.” 주로 이런 생각을 많이 한것이죠.

    오늘 본문보니까 기적으로 병이 나은 사람이 40살이 넘은 사람입니다. 당시는 인간 수명이 더 짧았으니 어쩌면 할아버지처럼 여겨졌을 나이였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때 젊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이왕이면 좀더 빨리 불러주시고, 회복시켜주셨으면 어땠을까? 하는 진한 아쉬움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10살이든, 40살이든 상관 없습니다. 주어진 시간, 하나님을 만난 그 시간부터가 중요할 뿐입니다. 40이면 어떻고 50이면 어떻습니까? 심지어 8-90이면 어떻습니까? '40살’이라도 만나서 치료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죠. 주님을 만났으니 그것만으로 가장 큰 축복이며, 아직 살아서 주를 위해 일할수 있고, 영광 돌릴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축복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인생을 돌아보며 후회하고 아까워하는게 신앙이 아닙니다. 언제가됐든 예수님 만났으면 그 순간부터는 내일을 보며 달리는 것입니다. 하루가 아깝다는 마음으로 매일을 주를 위해 사는것 입니다. 앞을 보고 달리는 삶의 태도를 가져야겠습니다. 어제의 후회와 안타까움은 던져버리고, 당장 내 앞에 놓여진 사명과 소망을 붙들고 매순간을 성실히 살아야겠습니다. 온전히 누리고, 최고로 성취해내며 살아야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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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부활을 전파하는것 때문에 심기가 몹시 불편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습니다.”(2-3절)

    복음 선포는 그렇게 방해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그리하여 믿게 된 남자의 수가 5000명쯤으로 늘어났습니다.”

    복음은 막을 수 없습니다. 복음이 막혔다면 오늘날 믿고 있는 십수억의 신앙인들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물론 막으려는 시도는 항상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을 가둬버리고 복음 선포를 막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선포된 복음은 멈출줄 모르고 영혼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어쩌면 복음을 유일하게 막는 것은 다른 이가 아닌 내 입술인지 모릅니다. 내 주변에 ‘심기가 몹시 불편한’ 그들을 보면서 미리부터 복음을 말하기를 포기한 나때문에 복음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일단 복음을 내 입밖으로 내 뱉으면 복음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수많은 이들의 영과 혼, 관절, 골수를 찌르고 들어가 변화시키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나만 막지 않으면 됩니다! 능력의 복음을 내 입술 밖으로 꺼내 세상가운데 던져 놓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믿고 선포 해아합니다.

    2

    오늘 5000명으로 늘어난 초대교회의 부흥은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생긴게 아닙니다. 초대 교회의 부흥은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믿게됐기”(4절)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건강합니다.

    교회는 말씀 위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건강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먹는다고 다 좋은게 아닙니다. 흰 쌀밥을 많이 먹으면 배야 부르겠지만 영양가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장은 하는데 뭔가 튼튼하지 않습니다. 배는 부른데 힘이 없습니다. 금방 에너지가 사라집니다. 심지어는 많이 먹으면 아프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먹을 때 먹더라도 필수 비타민을 챙겨 먹고, 꼭 먹어야 하는 ‘탄단지’도 생각하며 잘 챙겨 먹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성장은 튼튼하지 않습니다. 힘이 없습니다. 에너지가 금방 사라집니다. 이내 무너질 수 있는 성장입니다. 기적과 체험에만 기반하여 성장하는 신앙인은 영적 영양실조를 경험 할수 있습니다. 말씀 안에서 성장하는 건강한 개인, 건강한 교회가 되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기로 노력해야겠습니다.

    3

    베드로와 요한은 다음날 권세자들 앞에 서서 신문을 당합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했느냐?”(7절)

    굉장히 강압적인 분위기 입니다. 여차하면 계속 잡혀 있게 되고, 자칫 목숨을 잃을만한 위기가 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수 외에 다른 어느 누구에게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아래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12절)

    과거 아침에 카페를 빌려서 새벽기도를 하던 시절이 있습니다. 어느날인가 한창 새벽예배 설교중에 있는데 경찰이 들어온적이 있습니다. 저는 설교중에 경찰이 들어오자 순간 설교를 멈췄습니다. '종교행위를 허가받지 않은 이런 카페에서 해도되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몸이 굳어 버린것입니다. 짧은 찰나지만 아찔했습니다. 얼굴이 온통 빨개지는 것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설교를 이어가는데 눈은 계속 경찰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 했습니다. 경찰은 뒤에 누군가와 수근대더니 이내 조용히 나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냥 카페가 열려있어서 음료를 주문하러 들어왔다가 아직 안열었다는 소리를 듣고 나간것입니다. 저는 이때 제가 얼마나 두려움 앞에서 나약한 존재인지 깨달았습니다. 목숨걸고 복음을 전하라고 가르쳤는데 경찰 들어왔다고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이 상황은 제가 경험한것과는 차원이 다른 상황입니다. 누구나 두려워 할만한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엄청난 용기와 확고한 자세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복음을 든 우리가 위축될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이 복음을 듣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경외감을 느끼는게 정상입니다. 위축되야 한다면 우리가 아니라 세상이 그래야한다는 것이죠.

    "두려움을 이기는 힘은 두려움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앞에 있는 으르렁 거리는 강아지가(?) 두려워도 내 뒤에 있는 우는 사자가 더 두려우면 앞에 있는 두려움을 이기고 전진하는 이치지요. 이와 같이 세상이 주는 두려움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겨내서 결국 주의 뜻을 따라 행하는 자가 되기로 결단합니다. 우리 인생의 최종 동기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되어야만 합니다. 오늘 하루도 주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선택하고 이겨내며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 또 사명자가 되야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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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들에게 몰려 들었습니다.” (11절)

    베드로와 요한은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자 그 기회를 복음을 나누는 기회로 만듭니다.

    어릴적 첫 해외 선교가 기억납니다. 세계태권도선교회라는 팀을 통해서 6학년때 처음으로 러시아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했던것은 태권도 시범과 차력입니다. 길거리에서 태권도 시범을 보이고 차력을 선보이면 사람들이 구름때같이 모여들곤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좀 모여들었다 싶으면 우리는 준비해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연극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멋지고 신기한 구경을 하러 왔다가 십자가 연극까지 속절없이 보게 되곤 했습니다. 그렇게 모든 시범이 끝나고 나면 ‘altar call’을 했습니다. 참 감사하게도 이러한 믿음의 부름 앞에 반응하여 나오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계획하든, 계획하지 않든 우리가 하는 일 전후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마다 그 기회를 ‘복음 전도’의 기회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특히나 영광스러운 성취나 업적앞에 많은 이들이 모여 든다면 더더욱 그 기회를 복음 전도의 기회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복음전도에 힘쓰는 성도가 되야겠습니다.

    2

    “여러분에게 먼저 그를 보내셨습니다.”(26절)

    ‘먼저’ 만나게 됬다는 것은 책임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먼저 위기를 안 사람들은 으레 다음 사람에게 말해주곤 합니다. 그들도 덩달아 위험해지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는데도 그들이 그냥 위험에 처하게 둘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먼저된 신앙인으로써 아직 믿지 않는 영혼들에 대한 책임 의식이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알고, 믿고 있는 이것을 그들에게 전해야합니다. 열심히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복음의 책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다가올 세대를 향한 전도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3

    “이스라엘 사람들이여, 왜 이 일을 이상하게 생각합니까?” (12절)

    여기서 ‘이상하게’로 번역된 단어는 ‘amazed’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눈이 돌아가게 할만한, 어떤 의미에서는 화려한 퍼포먼스 입니다. 날때부터 앉아있던 자를 일으켜세웠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강한 어조로 사람들의 시선을 ‘기적’에서 ‘예수’로 옮겨 놓습니다.

    기적과 현상이 중요한게 아니라 예수님이 중요한것입니다. 화려한 퍼포먼스(?)가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이 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을때 기적과 현상으로 믿으면 모여 들었다가 쉽게 흩어집니다. 기복신앙은 필연적으로 흔들리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시선을 기적과 현상에 두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십자가의 구원의 메세지에 집중합니다. 우리는 현상 넘머에 계시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현상과 비본질을 향해 있는 성도의 시선을 온전히 예수께로 돌릴수 있도록 돕는 바우 교회되길 기도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처럼 기복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만날때 예수님께로 온전히 시선을 돌릴 수 있도록 선포하는 목사, 그리고 바우 교회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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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리를 보시오”(4절)

    한국 지하철 역등에 가보면 구걸 하시는 분들중에 간혹 고개를 아예 바닥에 붙이듯 바짝 숙이고 엎드려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 앞에는 짧은 메세지와 함께 돈통이 놓여있습니다. 그러면 지나가는 사람들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동전을 꺼내거나 작은 지폐를 꺼내 그 돈통에 넣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있는 그 분은 동전 소리가 들릴때마다 고개도 들지 않고 말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니 그 분들은 자신을 누가 도왔는지 전혀 알길이 없습니다. 누구에게 감사해야하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성전 미문에 이 앉은뱅이가 이러고 있었던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고개를 땅에 박고 그렇게 소망없이 습관을 쫓아 구걸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때 평소와는 다르게 요한과 베드로는 성전에 들어가면서 그에게 말합니다. “우리를 보시오!”

    그렇게 주목 시킨후에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치료를 선물로 선사합니다. 그냥 불특정 다수의 누군가가 지나가면서 동전을 던지는 도움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명확한 도움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찬미”(8절) 합니다.

    눈을 들어 보면 도우심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도움은 “옛다 여기 동전 몇푼” 하며 던지는 도움이 아닙니다. 주님은 자신을 주목하여 나오는 자들을 도와주셨습니다. 그들의 문제의 인생을 해결하고 치료도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힘들때 엎드려 있을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던져주는 ‘동전 몇푼’을 기대하며 살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봐야합니다. 그러면 ‘동전몇푼’이 아닌 인생 전체가 변할수 있습니다. 차원이 다른 구원의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 오늘 말씀하십니다. “고개 숙이고 엎드려 좌절하고 있지 말라! 소망 없이 살지 말라. 돈 통에 떨어지는 동전 몇개로 위로받으며 살지 말라! 매일 이러한 삶을 반복하는데 만족하지 말라. 이제 눈을 들어 나를 주목하라! 나를 보라! 내가 어떻게 너를 치료하고 축복하는지 보라!”

    하나님을 주목하는자! 기적을 경험하게 될것입니다. 은혜를 누리게 될것입니다. 회복을 경험하게 될것입니다.

    2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6절)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줄게 없는것이 아닙니다.

    “내게 있는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6절)

    이걸 보는데 굉장한 기시감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나의 이웃 아무개가 다리를 다쳤습니다. 치료해주셔서 다시 일어나 걷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나 자신을 생각하면 ‘은과 금’이 없고 풍족하지 못한 인생이고, 능력과 권세가 없는 인생이여서 이웃을 위해, 도움이 필요한 자를 위해 아무것도 할게 없고, 줄수 있는게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렇게 수많은 ‘필요의 이웃’들을 매일 보면서도 못본척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도 그들에게 줄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들고 베드로와 요한처럼 중보기도해줄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들의 치료를 위해, 문제 해결을 위해, 회복을 위해, 구원을 위해 얼마든지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은과 금은 없어도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니 그분의 이름의 능력을 믿고 이웃을 위해 중보합시다. 이웃을 주목시키며 말해주세요 “저를 보세요!! 제가 형제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자매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니 힘을 내세요! 치료될줄로 믿습니다. 회복할줄로 믿습니다! 마음의 참 자유가 임할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능력 있습니다! 아멘

    3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8절)

    날때부터 걷지 못하는 자가 걸었으니 그 기쁨의 희열은 이루 말할수가 없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아볼 지경입니다. 아마 며칠은 족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을 ‘핫이슈’입니다.

    그러나 길어야 며칠, 혹은 한두달 입니다. 기쁨은 이내 일상이 되곤 하니까요. 이제 걷게된 앉은뱅이가 현실을 마주할시간입니다. 이제 곧 사람들의 관심은 줄어들꺼예요. 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먹고 살수 있었던 이 앉은뱅이는 이제 일을 해야할것입니다. 평생 일은 해본적이 없었을 이 앉은뱅이는 먹고 살기 위해 뭘 할수 있을까요? 그는 어떤 기술과 어떤 지식을 가지고 먹고 살수 있을까요? 그는 현실을 자각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걸어다녀도 벌어먹고 사는것은 쉽지 않구나…’

    이때 하나님을 찬양해야합니다. 치료됐을때, 그 짧은 순간, 영광스러운 순간에만 감사하고 기뻐할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다시 흥분을 가라 앉히고 현실로 돌아(?)왔을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해야합니다. “당신이 내 다리를 고쳐놔서 나는 이제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어졌어요!” 하나님께 불평할것이 아닙니다. 이제 걸을 수 있게 됐으니 힘들지만 새롭게 배우고, 가능한 일도 많아졌으니 찾아서 하면 될 것입니다.

    만약에 이 앉은뱅이가 “치료되서 살기가 더 어려워졌습니다! 이럴줄 알았으면 안일어났지요!” 라고 말한다면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 출애굽하면서 하나님 찬양하는데, 물 없어서 하나님 원망하며 차라리 애굽이 낫다고 하는것과 같습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 입니다. 공분을 일으킬 만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만약 “개척의 비전을 주시고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기뻐하며 찬양 해놓구서는 몇달후에 생각같이 되지 않는다고, “아니 왜 개척하게 하셔서 제가 더욱 힘든 삶을살게 하십니까?” 라고 하나님께 불평한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황당해 하실까요?

    각자의 자리에서 혹 이런 말도 안되는 태도로 하나님께 불평하고 있는것은 아닌가 자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역할(?)을 다 하신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축복을 살아내는 나에게 맡겨진 역할에 충실해야합니다. 축복앞에 느닷없는 불평이 아닌 충실과 꾸준한 감사로 살기로 결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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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사악한 세대로부터 구원을 받으십시오.” (40절)

    ‘세대의 악함’은 인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세대가 악하다고 표현한다는 것은 이미 대다수가 하고 있다는 의미이고, 대다수가 하고 있다는 의미는 이미 그것이 ‘표준’이 된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표준이 된것을 악하다! 라고 말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이와같이 다수가 하면 괜찮다라고 하는 인식이 있습니다. ‘세대’가 다 할 정도인데 그게 악하다뇨? 질문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세대가 악하다’라고 명확하게 지적합니다. 이런 깨달음과 맞대응이 필요합니다. 무엇이든 대세라면 싸워보려고도 하지 않는 마음 말고, 대세 일지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분별하고 지적 할수 있는 용기와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2

    “사악한 세대” (40절)

    그렇다면 세대는 왜 사악해졌을까요? 사악에 대한 관대함? 사악에 대한 방심? 사악에 대한 늦장 대응? 사악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 우리는 이미 '코로나'를 가볍게 여겼다가 큰코다치는 경험을 해보아서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한 지역의 발병으로 끝날 일이 팬데믹이 되었고 그렇게 인류는 계산할 수 없는 희생을 치뤄야했습니다. 엔데믹이라고 말하지만 여전히 많은 나라들이 경제적 측면만 봐도 이 후폭풍에서 다 회복되었다 말할수 없습니다.

    ‘사악’은 바이러스 입니다. 처음부터 철저히 막아야합니다. 초장부터 승부를 봐야합니다. 경계하고 격리해야합니다. 어떻게든 막아야합니다. 사악의 전염성과 치명성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됩니다. 사악은 에볼라의 치명성을 뛰어넘고, 코로나의 전염성을 뛰어넘습니다!

    나의 인생, 우리 집안, 우리 회사, 우리 교회, 학교, 동아리, 친구들, 친척들, 누가 됐던 사악이 들어오려는 그 시점에서부터 철저하게 막아서 ‘사악한 세대’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속한 세대가 ‘사악의 세대’라는 오명을 쓰는것을 모른척 할수 없습니다. 모른척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막아야 할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할 때 '하나님의 공권력'이 개입해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3

    “그날 믿는 사람이 숫자가 약3,000명이나 더 늘었습니다!” (41절)

    성경은 “그날 3000명의 교인이 늘었습니다!”라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교인숫자’에 관심이 있는게 아니고 ‘믿는 사람’에 관심이 있습니다.

    어쩌면 많은 교회들이 ‘교인’ 성장에만 혈안이 되어있는지 모릅니다. 신앙의 진정성은 점점 간과되고 외형적 신앙과 숫자적 부흥에만 관심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결과적으로 매일 교세는 커지는데 권세는 점점 더 쪼그라드는 교회가 되고 있습니다. 교세의 확장과 상관없이 교회가 교회로써의 건강한 의무를 감당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영적인 권세마져 상실하고있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교세마저도 줄어들고 있는지 오래입니다. 진짜 중요한건 교인의 숫자가 아닌 ‘믿는 사람의 숫자’ 입니다. 믿는 사람이 늘어가야합니다!

    바우 교회에 ‘믿음의 사람’들이 채워져 가길 소망합니다. 이 교회를 통하여 믿지 않는 자들이 믿게 되길 소망합니다. 교회를 떠난 자들이 돌아오길 원합니다. 예수를 오해하는 자들이 오해를 버리고 믿음의 자리로 나아오길 원합니다. 구원을 얻지 못한 자들이 구원의 예수께로 나아오길 원합니다. 교인숫자에 관심을 꺼야겠습니다! '숫자'로 가득한 교회 말고 '성도'로 가득한 교회가 되길 기도합니다.

    교회는 전략의 공동체가 아닌 복음의 공동체 입니다! 과시의 공동체가 아닌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 입니다. 초대교회가 보여준것과 같은 유의미한 성장을 경험하는 교회가 되길 기도합니다.

    4

    “믿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모여 모든 물건을 함께 쓰며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 각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눠주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전에서 한마음으로 모이기를 힘쓰고 집집마다 빵을 떼면서 기쁨과 순수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눠 먹었습니다.” (44-46절)

    다른거 없습니다! 말씀 그대로입니다. 해석을 덧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바우교회가 이런 교회 되길 원하고, 모든 하나님의 교회가 이러한 교회 되길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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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스라엘 사람들이여, 이 말들을 들어 보십시오.” (22절)

    썸네일이 중요합니다. 제가 영상을 올려보니까 어떻게 썸네일의 제목을 올리느냐에 따라서 영상의 조회수가 아예 달라집니다. 그도 그럴것이 저만해도 유튭에 올라와 있는 썸네일의 제목을 보고 클릭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관심이 갈만한 이야가, 내가 듣고 싶은 주제의 것들이 제목으로 쓰여졌을때 그것을 클릭해서 보고 듣게 됩니다.

    그러나 가끔은 이런 일이 있습니다. 실수로 내가 관심없는 영상을 클릭하는 것입니다. 썸네일이 전혀 흥미롭지 않은데 클릭하게 되는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연찮게 보게된 영상에서 놀라운 통찰과 도전, 그리고 배움을 얻기도 합니다. 그럴때마다 안타깝습니다. 나는 또 얼마나 많은 귀한 가르침을 놓친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마도 본의아니게 어리석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선택해서 듣는 지혜 속에서 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선택해서 듣는 어리석음 속에 살고 있는 것이죠. 들어야할 지혜가 너무 많습니다. 나의 흥미를 넘어서서 필요한 가르침과 정보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나의 흥미’만 골라듣는 가장 어리석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더이상 피해서 살수 없는 '알고리즘'은 더욱더 이런 형태의 삶을 부추깁니다. 그러다 보니 그 어느때보다도 편협하고 구부러진 세대가 사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베드로가 오늘 마주한 시대도 그런듯합니다. 자신들이 듣고 싶은 것만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외치는 ‘썸네일’을 들어보고 관심 갈때만 참여했습니다. '기적'은 클릭해 보았는데, '십자가'는 클릭하지 않았습니다. 어떤이는 '십자가'는 클릭했는데 '부활'은 클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배운게 없습니다. 다 듣지 않고 선택적으로 듣다보니 이는 실수로 이어졌습니다. 오늘 그런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드로가 말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우리에게도 말합니다.

    “사람들이여, 이 말을 들어 보십시오." (22절)

    일종의 썸네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썸네일’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베드로의 이 ‘썸네일’은 사실 사람들의 흥미를 잡아두기에 특별해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들어야합니다. 더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려들으면 안됩니다. 복음을 가려 들으면 안됩니다. 듣고 싶은것만 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것처럼 우리도 실수합니다. 결국 예수를 우리 삶에서 죽여 버릴지도 모릅니다.

    오늘을 살아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선포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꼭 들어보세요!!! 가리지 말고 들어보세요. 선택하지 말고 들어보세요.선택이 아닌 전부를 들을때 비로서 건강한 신앙을 만들어 가게 될것입니다. 아멘

    2

    저는 개인적으로 대중설교를 하는 베드로를 볼때마다 신기합니다. 그가 인용하는 요엘도 그렇지만 그가 인용하고 해석하는 다윗의 이야기는 더 신기합니다. 그는 정말 탁월한 설교가 처럼 보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가장 힘든게 뭐냐고 묻는다면 수많은 답이 떠오르지만 그 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어려움이 바로 ‘설교준비’입니다. 너무 어렵습니다. 힘듭니다. 진토하는 느낌이 납니다. 쓰면서도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느낌을 받을때도 있고, 다 썻다고 덥었는데 마음에 안정이 없어 두통 가운데 시달릴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기도하고 매달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명철로 이해합니다. 통찰은 나의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것입니다. 이 책은 그분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이러한 위대한 설교를 보면서 성령님을 더욱 찾고 의지하게 됩니다. 말씀을 읽을 때마다, 공부하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적용할때마다 하나님의 통찰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어떤 성도이던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때는 같은 태도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성령님 제게 말씀하소서! 저로 깨닫게 하소서!” 말씀은 그렇게 읽고 묵상하며 적용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묵상이 더욱 깊어지길 원합니다. 말씀이 정말 말씀으로 우리에게 깨달아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밝히시고, 마음에 정직한 깨달음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성령님과 함께 큐티하세요!

    3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36절)

    이 말을 듣고 누군가는 억울해 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저랑은 상관 없는 일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라는 말은 틀린게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우리는 예수님을 못 박았습니다.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우리 자신이 가장 잘 압니다.

    예수님은 진정 모든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라는 고발 앞에, '당신 한 일입니다!" 라는 고발 앞에 너무 질색팔색 하며 억울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겸허히 받아들이며 깊은 회개의 자리로 들어가야 할것입니다.

    “나 때문입니다!” “내 죄때문입니다!” 라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죄의 인정은 죽음이 아니라 구원의 시작입니다. 회복의 시작입니다. 나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께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이제는 다르게 살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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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베드로에게서 두가지 특별한 모습을 보게됩니다.(14-16절)

    한가지는 대표성입니다. 그는 이제 두려움이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두려웠고, 조심스러웠고, 숨어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거리낌이 없습니다. 모인 모든 제자들의 리더가 된것처럼 목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만약 소동을 일으킨 주동자를 찾아 잡아간다면 이렇게 앞장선 베드로가 잡히기 딱 좋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상황을 아랑곳 않고 그 누구보다도 확실하고 자신감 있게 사태를 설명하고 복음을 선포합니다.

    확실히 성령은 두려움을 이기게 합니다.

    두번째는 그가 요엘의 말씀을 인용하며 상황을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서기관이나 바리세인이 아닙니다. 탁월한 성경 학자도 아닙니다. 원래 지식인으로(?) 분류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느닷없이 구약의 기록을 그들이 마주한 새로운 현상과 함께 묶어 해석할수 있는 영적 통찰력을 보여주게 됩니다.

    확실히 성령은 지식과 능력으로 임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두려움’에 져서 옴짝 달싹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와같이 두려움을 없애주시는 성령님을 의지하십시다. 지식과 지혜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복음을 함구 하고 있다면 지식과 지혜로 임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십시다.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기고, 첫 복음의 입술을 때면 성령께서 입술의 권세와 지혜로 임해 주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복음 선포를 가능케 하십니다.

    2

    “예언 할것이다!” (18절)

    (노파심에 나누는 묵상입니) '예언', 단어 붙들고 말도 안되게 오해하는 사람이 없어야겠습니다. 여기서 이 ‘예언’은 우리의 미래를 알려주시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언’이라고 말하면 자동적으로 점, 사주 생각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무언가 나의 미래가 잘될지 안될지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예언(자)은 과거나, 당시나, 현재나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개인, 어떤 민족, 그들이 아직 당도하지 않은 미래의 얘기가 들어있을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최후의 심판’ 같은것은 당연히 미래적이고 계시적 메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예언'이 “너는 내년에 결혼할꺼야!” “올해 아들 사업이 잘될꺼야!” 하는 등의 ‘예언’(?)과는 아예 다른 의미의 예언이라는 것이죠.

    이토록 당연한 얘기를 이렇게나 힘주어 나누는 이유는 여전히 ‘예언’을 오해해서 성령을 찾고, 사주를 보려는 ‘샤머니즘적 기독인’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왔습니다). 제발 이런 ‘거짓 신앙인’들이 활개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성령의 은사로 예언을 받았습니다" 라고 말하며 점봐주고 다니는 거짓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성도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애초에 이런 메세지에 현혹되어서 성령으로 점보려고 찾아 헤메는 사람들이 오해를 멈추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예언하는것은, 하나님의 뜻과, 복음과 구원의 메세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내가, 복음을 전하는 당신이 이 시대의 예언자 입니다! 아멘

    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21절)

    아멘!! 기독교의 절대진리 입니다. ‘누구든지’입니다. 잘난사람, 못난사람, 부자, 가난한자, 가리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믿으면 됩니다.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을 완성해주셨다는 것을 믿으면 됩니다. 선행이 필요 없어서가 아닙니다. 선행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야하는것입니다.

    세상의 거짓말에 속지 마십시다. 예수 이름 말고 다른 이름을 찾고, 다른 구원의 방법을 찾고, 모든 종교가 하나라고 말하고, 자격있는자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수많은 ‘거짓 구원론’들에 현혹되지 않아야겠습니다 .

    안타깝게도 현실은, 수많은 성도들이, 심지어 많은 목회자들이 이렇듯 ‘예수 구원론’을 타협하고, 버리고 있습니다. 세상이 주장하는 인권, 자유, 철학, 통합의 메세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타협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이름이 구원이며, 그분의 이름이 능력이며, 모든 이를 차별없이 구원하시는 사랑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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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 하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4절)

    복음은 언어와 민족을 뛰어넘는다는 의미,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단순하고도 명료한 메세지 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이에게 복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행하신 ‘하나님의 큰일’(11절)은 반드시 선포되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것이 있다면 동역자들, 함께 하는 기도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1-4절)

    그래서 교회는 함께 모여 기도합니다. 교회가 기도할때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실 것입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면 닫힌 입이 열리며 복음이 선포되기 시작할것입니다. 남녀노소와 민족과 지역을 가리지 않고 선포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여들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듣게 될것입니다.

    모든 이에게는 복음이 필요하고, 모든 교회는 이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바꿀수 없는 진리 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가 성령충만하길 기도합니다. 주 안에서 복음을 붙들고 함께 동역하길 기도합니다!

    2

    “모두 갈릴리 사람들이 아닙니까?” (7절)

    이는 두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는 그들이 갈리리 사람인데 어떻게 다른 나라와 민족의 말을 하는가? 이 현상 자체가 놀랍다는 말입니다. "기적같은 일이다!" 두번째는 그들의 배경이 ‘갈릴리’밖에 안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들은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는 자들이 아닌데 어떻게 2nd language를 하고 있는가? 하는 말인것이죠.

    어쩌면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명자를 부르시고 일하게 하실때는 하나님은 능력과 기적을 보여주신다는 거죠. 하나님은 사명자를 부르실때 사람을 가리지 않으십니다. 애초에 사도들 부르실때 사람을 가렸다면 그 12사도를 뽑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12사도의 면면을 보면 ‘높은 지위’ ‘높은 학력’ ‘높은 재력’ 높은 덕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능력있는 자가 선택되서 능력있는 일을 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누구나 부름 받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하는것입니다.

    출신이 갈릴리면 어떻고, 로마면 어떻습니까? 박사학위자면 어떻고 초졸자면 어떻습니까? 부자면 어떻고 홈리스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성령으로 임해주시고 능력 주실때 우리는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성경도 기록합니다. "내게 능력주신분 안에서 내가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아멘

    3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새 술에 취했다”라고 조롱하며 말하기도 했습니다. (13절)

    수많은 언어들로 쏟아내는 복음의 말씀을 그들은 분명히 들었습니다. 이는 명백하고 부인할수없는 기적적인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안믿을 사람은 어떻게든 안믿습니다!

    세상에는 이와같이 복음을 ‘불신’하기로 결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증거를 보여주고, 눈앞에 선명한 하나님의 기적이 보여도 나름의 이유를 댑니다. 아니라고 거절합니다. 복음을 조롱하며 믿는 자들을 비웃고 핍박하기까지 합니다. 어쩌면 이들이 바로 모세시대에 애굽의 바로가 보여준 강퍅한 마음 같습니다. 도무지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는것입니다.

    기도하게 됩니다. 마음에 불신을 결정내린 자들, 거절하기로 마음 먹은 자들, 믿지 못할 이유를 어떻게든 찾아내려고 혈안이 된 사람들, 복음을 조롱하고, 믿는 자들을 수치주려는 자들의 마음에 복음으로 인해 균열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양날이 선 검과 같아서 그들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갤수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 주변에 절대 깨어질것 같지 않았던 자들의 마음이 복음으로 깨지게 해주세요! 예수님을 믿게 해주세요! 인생이 변하게 해주세요.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해주세요! 오스틴 땅에, UT Austin 캠퍼스에 불신이 깨어지고 믿음과 구원이 실현되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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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 항상 우리와 같이 다니던 동안에,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해 예수께서 우리들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워가시기까지 함께 다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뽑아.” (21-22절)

    우리가 모르던 그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12제자를 알고 그들에게 주목했습니다. 그러나 12제자만 예수님 곁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시작부터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단지 성경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그 12제자 조차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 정도나 그나마 조금 기록됐고, 다른 제자들은 간헐적 사건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한명 한명 충분히 소개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빌립, 작은 시몬,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바돌로매 같은 제자들이 어떤 일을 주로 했는지 상세히 알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맛디아나 요셉 같은 사람은 오늘 본문의 기록이 없었다면 그마저도 아예 모르고 지나갔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기억 못해도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세상이 인정하지 않아도 여전히 의미 있는 인생입니다. 맛디아나 요셉이 보여준 이러한 섬김의 태도를 본받겠습니다. 심지어 맛디아, 요셉 외에도 또 기록안됐지만 꾸준히 섬겼을 그들을 생각합니다. 오늘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수많은 선교사님들과, 사람들이 떠나버린 한적한 시골이나 산골 어딘가에서 섬기는 목회자들을 생각합니다. '나의 이름'을 위함이 아니라, '세상의 인정'을 위함이 아니라 잃어버린 영혼과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뛰는 그들을 생각하며 나 또한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로 마음을 다잡습니다.

    2

    “그러고 나서 그들이 제비를 뽑았는데 맛디아가 뽑혀서 그가 열한 사도들과 함께 사도의 수에 들게 됐습니다.” (26절)

    저는 최후 2인에서 뽑히지 않은 요셉의 마음을 조금은(?) 알것 같습니다. 20살이 갓 넘어서 사역을 시작했을때 무언가 나름 중요한(?) 사역들을 교회에서 할때면 이상하게도 자주 마지막 2인의 후보에서 떨어졌습니다. 미리 떨어져버리면 기대나 안할텐데, 항상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거론되는 후보(?)가 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결국이었습니다. 메인 집회에 인도를 할때도, 연주를 할때도, 설교를 할때도, 처음 교육 전도사에서 전임교역자로 인터뷰를 볼때도 마지막 2인에서 최종 탈락하는 1인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마다 실망도 하고, 좌절도 되고, 우울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감정들은 길어야 며칠 갔습니다. 그리고 그런 실패(?)의 감정이 드는 날들속에도 맡겨진 사역은 빠짐없이 열심히 해냈습니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오늘의 제가 만들어 진것입니다. 여전히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인간적으로야 순간 실망도 되고, 우울할수도 있겠죠. 그러나 사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일을, 부름받은곳에서 순종하면 그만입니다! 안되면, 떨어지면 '하나님께서 내가 하기 원하시는 일이 아니구나' 하면 됩니다! 안되면 '내가 아직 부족하니 더욱 성장하여 부르실때 하면 되겠구나' 하면 됩니다.

    살다가 요셉 같이 중요하다 생각된 기회(?)에서 뽑히지 않을때 그러므로 너무 시험들지 마세요! 별일 아닙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나의 삶이 의미없다고 말하는게 아닙니다. 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필요없다고 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다른 부르심이 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때가 아닐수도 있겠지요. 그저 매일 내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성장에 더욱 진심을 내면 됩니다. 나는 나의 부르심과 내게 맡겨진 일에 항상 집중하면 그뿐입니다!

    3

    "맛디아가 뽑혀서 그가 열한 사도들과 함께 사도의 수에 들게 됐습니다." (26절)

    12사도 옆에서 항상 함께 했던 제자 맛디아처럼 저도 많은 '담임목사님'들 옆에서 '부목사'로 그렇게 사역을 오랜 기간 해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제비뽑기'였는지 모를 시간들을 지나 저도 한명의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뽑힌(?)건가요? ㅋ

    맛디아는 12번째 사도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사도이며 감당해야 할일은 당연히 더 많아졌고, 개인의 신앙이 아닌 교회를 책임지는 사도의 책임이 지워졌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그에게 더욱 기대합니다. 그는 더욱 본을 보이는 사람이 되야합니다. 사도는 그저 타이틀이 아닌 삶과 죽음으로 짊어져야하는 책임입니다.

    담임목사!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부목사 때도 치열했습니다. 그러나 부인하지 못하겠습니다. 담임목사는 더욱 치열합니다. 책임의식도 다릅니다. 심장에 느끼는 무게가 다릅니다.

    하나님의 '제비뽑기'에 선택되는것 이상으로 중요한것은 뽑힌 이후의 책임감 있는 삶입니다. 회사에 뽑혔는데 사원이 일을 안한다면? 열심히 공부한 수많은 이들을 제치고 하버드 들어가고, 열심히 연습한 수많은 이들을 제치고 쥴리어드 들어갔는데 공부도 안하고, 연습도 안한다면? 12사도의 빈자리를 채울 자로 선택됐는데 맛디아가 아무것도 안한다면? 담임목사로 부름받았는데 사역을 성실히 안한다면? 안될 말 입니다.

    이제 맛디아는 사도로써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이것이 선탣받은 자의 의무입니다. 우리가 있는 자리가 바로 선택받은 자리 입니다. 책임이 있는 자리 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내게 맡겨진 책임에 부끄럽지 않게 더욱 열심으로 섬기겠습니다. 우리 모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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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버지가 약속하신 선물을 기다리라” (4절)

    성령님은 선물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선물과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제자들만 봐도 그들이 기대했던 선물은 “나라의 회복” 이었습니다. (6절) 그러나 성령은 이 모든 기대와는 비교도 안되는 큰 선물입니다. 모든 영혼의 회복을 위한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이와같이 물리적인 세상의 그것들과 차원이 다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거리가 멀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은 모든 인류에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가치로 매길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세상의 선물과는 달라서 그 대상자를 가리지 않고 구하는 모든자에게 빠짐없이 임하여 집니다.

    구원의 확신을 주시는 성령님, 사명을 위해 권능으로 임하시는 성령님, 진리와 지혜의 영이 되셔서 깨닫게 하시고 분별하게 하시는 성령님, 보혜사가 되셔서 함께 해주시는 성령님! 이처럼 가장 귀한 선물 되시는 성령님을 모시고 기쁨 가운데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야겠습니다. 다른 선물 달라고 때쓰는 자녀 말고, 성령을 받았기에 기쁨과 감사가 이미 충분하다 선언하며 사는 철든 자녀가 되야겠습니다. 성령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2

    “지금 입니까?” … 너희가 알 것이 아니다….. 내 증인이 될 것이다.” (6-8절)

    우리는‘언제'를 모릅니다. 알고있지만 사실 착각입니다. 예를들어 학교 다닐때는 내년이 되면 한 학년이 올라가는것을 압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도 우리의 착각입니다. 누군가는 내년이 되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몸이 심하게 아파서 일년 학교를 쉬게 되어 내후년에 학교를 가게되기도 합니다. 예상은 한다지만 엄밀히 말해서 우리는 정확한 때를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걱정하며 살기보다는 오늘에 충실하며 살아야합니다.

    오늘을 충실히 살아야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본문의 말씀을 붙들고 적용하자면 우리는 예수님을 전하는 증인이 되야합니다. 지금 해야합니다. 나의 육신의 삶이 언제 끝날지 모르고, 그들의 육신의 삶이 언제 끝날지 모르고, 최후 종말이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러니 “지금입니까?” 물을 시간에 전도해야합니다. ‘지금’이 그나마 우리에게 주어진 확신할수있는 유일한 시간입니다. 그러니 지금을 낭비할수 없습니다. 지금 해야합니다.

    삶에 모든 영역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일 누리려고 오늘을 희생시키는것이 마냥 지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내일이 없는것처럼 오늘을 낭비하고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저 오늘 일어나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최고를 누리라는 것입니다. 일을 할때도 마지막인것처럼, 놀때도 마지막인것처럼, 가족을 사랑하는것도,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것도 오늘이 마지막인것처럼 미루지 말고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지금’을 최선으로 살아내는 신앙인이 되야겠습니다.

    3

    “다시 오실 것이다!” (11절)

    주님 다시 오십니다. 이는 우리가 믿는 바입니다. 우리 예수님 거짓말 한적이 없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지키지 않으신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일어날 일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위해 오실길을 예비하는게 바로 VOW교회의 비전입니다. 마치 세례요한이 약속된 메시야를 기다리며 그분의 오실 길을 예비했던 것처럼 우리도 다시 오실 예수님을 전하고,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언젠가 다시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목소리가 되기로 결단했습니다. (the Voice of one who crying out in the Wilderness) 아무쪼록 VOW의 이 비전에 vow(서원)한 이 교회를 통하여 다시 오실 예수님이 선포되고, 믿지 않는 자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에 이르는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오스틴과 대학 캠퍼스, 그리고 온라인의 지경을 통해 경계넘어서 선포되는 복음의 구원의 역사가 계속 이어져가길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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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리 마음에 기쁨이 그쳤고 우리의 춤이 애곡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15절)

    98년즈음 한국에 경제 위기가 찾아오며 IMF가 시작되었을때 많이 회자되었던 말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너무 빨리 샴페인을 터트렸다!”

    당시 한국의 경제가 급 성장하면서 많은이들의 마음에 기쁨이 넘쳤고, 춤(?)을 추기 시작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15절) 많은 이들이 절제 없이 소비하기 시작했습니다. 허영, 허세, 사치들을 무분별하게 즐기는 사람들도 많이 생겨나고, 기업들도 무리해서 사업을 진행하는 일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너무나도 빨리 ‘샴페인’을 터트린 한국은 어느날 생각지도 못하게 IMF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얼마나 많은 기업과 가정이 폭삭망했는지 모릅니다. 정말 많은 가장들이 슬프게도 자살했고, 또 많은 이들이 길거리로 내 몰리듯 쫓겨났습니다. 기쁨이 멈추고 춤이 애곡으로 변해버린것입니다. (15절)

    남유다도 비슷합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의 시즌에 '기쁨과 쾌락'에 젖어 무절제, 욕심, 거짓, 허세, 우상숭배 등의 수많은 죄들을 반복함으로 결국 '영광의 면류관'을 떨어뜨리고 짓밟히게 된것입니다.기쁨은 그치고, 춤은 애곡이 된것입니다.

    인생이 기쁘고, 춤출만하며, 면류관의 영광으로 가득하다면, 이때 필요한것은 질서, 절제, 지혜, 거룩입니다. 더나가 하나님을 향한 진심어린 감사와 현혹되지 않는 믿음 입니다. 기쁨고 춤출만한 인생이라고 무질서, 무절제, 죄, 욕망으로 가득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떠난다면 우리도 이와 같은 심판을 마주하게 될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쁨을 그치게 하고 춤이 애곡으로 변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원래

    [시30:11, 우리말성경] 주께서 내 슬픔이 춤이 되게 하셨고 내 베옷을 벗기고 기쁨의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원래 이렇게 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을 누리는 인생 되야겠습니다!

    2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개역개정21절)

    “옛적 같게 하옵소서” 현재가 얼마나 엉망이면 옛날을 찾을까요? 망치거나 실수하지 않았다면 옛날의 영광으로 회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옛날의 영광위에 고스란히 오늘의 영광을 쌓아 올렸을 것이고 그러면 과거가 그립지 않았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남유다는 당시 꽤 오랫동안 '어제'의 영광을 망가뜨리는 '오늘'을 살았습니다. 매일 그렇게 조금씩 과거의 영광을 깍아먹으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날 더이상 깍아 먹을 영광이 없게 되고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만나 철저하게 망하게 된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오늘'은 너무 중요합니다. 오늘을 건겅하게 살아내지 못하면 나의 어제의 영광도 빛을 바래기 시작합니다. 오늘을 건강하게 살아내지 못하니 내일도 당연히 불안하고 위험합니다. 그래서 오늘을 잘 살아야합니다. 이렇게 할 때 과거의 영광이 고스란히 오늘로 이어질 것이고, 내일의 기대가 소망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오늘을 사는 사람은, 그러므로 '옛적'을 그리워 하지 않고,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과거의 영광과 오늘의 실수를 오가는 삶이 아닙니다. 이게 딱 '사사시대'나 '열왕시대'에 이스라엘이 보여준 신앙입니다. 이 모습은 단언코 건강한 신앙의 모습이 아닙니다. 건강한 신앙은 주님 앞에서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살아냄으로 이미 누리고 있는 영광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더 나가 더나은 내일을 소망하며 전진하는것입니다. '옛적'과 '오늘'을 오가며 제자리 걸음하는 신앙말고, 계속 건강하게 전진하는 신앙인이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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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소서. 우리의 수치를 보소서” (1절)

    1절에는 두가지 ‘보소서’가 기록됩니다. 다른 두 '원어'가 사용됩니다. 첫번째 보소서는 “나를 좀 주목해주세요!”라는 의미에 가깝고 두번째 보소서는 “나를 보고 상황을 좀 이해해주세요!” 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이 두가지는 다릅니다. 우리가 본다고 다 보는게 아닙니다. 주의 깊게 본다고 상황이 바뀌지 않습니다. 본 사람이 그 상황을 이해하고 대처할때 비로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하는것입니다.

    오늘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저를 좀 봐주세요!" 라고 말하고 있는것이 아니라 “보시고 상황을 살펴 도와주세요!”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웃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볼때 이런 마음으로 봐야할것입니다. 그냥 보고 사실을 인지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들의 상황을 보고 인지한 후에 이해하고 대처하기에 이르러야 하는것입니다.

    보고 헤아리지 않으면 행동으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인임을 보셨습니다.(관찰) 그러나 보신것에서 그치지 않고 헤아리셨기 때문에(관심) 독생자 예수님을 대속제물로 보내시는 ‘은혜의 대처'를 실행하신(관행)것입니다.

    관찰(觀察)이 관심(關心)으로 이어지고, 결국 관심이 관행(觀行)으로 까지 이어지는 이웃이 되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관행'이란 '습관처럼 정해진 행동'을 의미하는것이 아니고 한자어 '볼 관'을 써서 '보고 행하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때 가지시는 마음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볼때 가져야하는 마음인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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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물도 돈을 지불해야만 하고 우리의 나무도 돈을 주고 사야만 합니다.” (4절)

    당연한 얘기 아닌가요? 우리도 물을 위해 돈을 지불하고 나무를 위해서도 돈을 지불합니다. 물론 본문이 기록된 시대에는 말도 안되는 얘기입니다. 물을 사다뇨? 나무를 사다뇨? 당장 우리만 봐도 물을 돈주고 사먹게 된게 30-40년이 채 안된 이야기 입니다. 그전까지는 지불 안하고 사용하는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저도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누군가가 "물을 돈주고 사먹는 날이 올꺼야!"라고 했을때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아니 물을 왜 돈주고 사먹어? 그냥 먹으면 되지!!"

    우리는 우리가 습관적이고 풍족하게 누리는것 일수록 당연하다고 여기는 실수를 합니다. 물도, 나무도 사실 그런 경우였습니다. 공기와 햇빛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계속 이렇게 환경이 오염되다보면 여느 디스토피아적 영화들처럼 결국 산소도 대가를 지불하고 얻어야하고, 햇빛도 대가를 지불하고 누릴수 있는 그런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사실 당연한것은 없습니다. 당연한듯 누리고 있는 모든것, 내것이라고 여기는 것들도 사실은 은혜입니다. 특히나 딱히 지불하고 있지 않은데 누리고 있다면 두말할 필요없이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인하여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합니다.

    구원도 마찬가지 입니다. 당연한것이 아닙니다. 공짜가 아닙니다. 원래 우리가 권리를 주장할수있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로 지불하셔서 우리가 누리게 된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이 주어진것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인해서도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계속 드려야 할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게 속편한것 같습니다. 모든 것에 있어서 ‘지불이 당연하다’ 라고 생각하는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살면 지불안하고 얻거나 누리는 모든것에는 감사와 찬양과 기쁨이 있을 것이고, 지불하게 되면 당연히 내야할것을 내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니까 시험들일이 없습니다! 할렐루야!

    우리의 인생에 공짜는 없습니다!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와 찬양과 기쁨과 만족으로 살겠습니다. 지불해야하는것은 정직하게 지불하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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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조상들이 죄를 지었으나 이제 가고 없습니다. 그들의 죄악을 우리가 감당하고 있습니다.” (7절)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조상들도 죄를 졌겠지요. 그러나 그들 자신도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남유다가 경험하는 심판은 ‘조상의 죄’만으로 임한것이 아니라 조상과 그 세대의 죄로 인해 임한것입니다. 나의 죄로 인하여 임한것입니다.

    자꾸 죄의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면 진심 어린 회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범죄자들 보세요 “저 사람이 시켜서 했습니다!” 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반성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반성을 안하니까 풀려 나면 또다시 죄를 짓는것입니다.

    “조상의 죄가 아닌 우리의 죄, 나의 죄의 판결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라는 겸손하고 정직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남의 죄를 대속하여 죽으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만약 이 말을 하시려면 그분만 하실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나의 죄입니다!" 라는 겸손하고 정직한 고백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정직한 인정과 회개를 통해 회복을 경험하게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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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그의 예언자들의 죄와 그의 제사장들의 죄악 때문이었다.” (13절)

    남유다가 블레셋의 공격 앞에서 허무하게 망하고 예루살렘 본진을 빼앗기는 이유는 리더들의 죄때문이었습니다. 예언자, 제사장이라고 하는 백성의 리더들이 무너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참담한 상황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공격당하고, 무너지는(?) 이유는 (많은경우) 목사들 때문입니다. 영적 리더들이 잘못한게 너무 많습니다. 잘 못하고 있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목사들은 교회 안에서, 또 교회 밖에서 미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정죄를 받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이/예언자들이 잘했다면 ‘예루살렘’성전이 공격당하는 일이 이렇게 쉽게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목사들이 잘했다면 교회가 지금같은 사회적 적의감을 마주하지 않아도 됬을지 모릅니다)

    목사로써 살고 있기 때문인지 이 본문의 사건을 보면서 엄청난 책임의식을 느낍니다. 고민도 많이 되고, 걱정도 많이 됩니다. 혹 내가 ‘예루살렘’(교회)이 무너지게 하는 원흉같은 삶을 살고 있는 목사는 아닌가 자문하게 됩니다.

    저를 포함하여 세상에 목회자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겠습니다. 교회의 리더를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들이 바른삶을 살수 있도록, 거룩을 지킬 수 있도록, 믿음 안에 온전하도록, 건강한 리더가 되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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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를 구원할 수 없는 민족을 우리가 바라고 기다렸다.” (17절)

    남유다는 블레셋과 대치하면서 애굽을 기다렸습니다. 자신들을 구원할수 없는 나라를 향해 기대하며, 믿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어쩌다가 애굽을 기다리게 됐을까요? 애굽이 쎄(?)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럴듯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이들이 이와같이 '구원'을 받아보겠다고 나름 쎄(?)보이는 세상의 우상을 기다립니다. 나를 구원할 돈, 지위, 권력, 지인, 배경, 지식등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일단 이것들이 좀 쎄(?)보이기 때문에 기대감은 상당합니다. 그러나 이런 '우상'들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다른 신은 없고, 다른 방법도 없습니다. 우상을 기다리는것은 자유(?)인데 한가지는 확실합니다. 우상은 절대 구하러 오지 않습니다. 구하러 오지 못합니다. 심지어 백번 양보해서 온다고 해보세요 그러나 구할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만 구원하러 오십니다. 예수님만이 구원 하실 수 있습니다.

    ‘애굽’을 기다리는 인생들을 찾아가 ‘예수님’을 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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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 시온이여.. 너를 포로가 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딸 에돔이여, … 네 죄악을 처벌하시고 네 죄악을 드러내실 것이다.” (22절)

    오늘 본문의 당시를 사실대로 나열하자면 '시온'이 (남유다) 심판받고 있고, 에돔은 블레셋과 함께 심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2절의 말씀은 역전된 상황을 기록합니다. 때가 이르면 오히려 '시온'은 회복되고, 에돔은 심판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입장이 바뀌는 날이 옵니다.

    사실 에돔과 유다의 악연은 에서와 야곱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이고, 유다(이스라엘)는 야곱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적으로 사사건건 충돌했고 그때마다 입장이 엎치락 뒤치락 했습니다. 언젠가는 유다가 '갑'이고 에돔이 '을'이었고, 오늘 본문같이 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인생의 입장은 이렇게 자주 바뀝니다. 어제의 '갑'이 오늘의 '을'이 되기도 합니다. 반대의 경우도 당연히 많습니다. 그러니 잘나갈때(?) 하나님을 찾고, 어려울때도 하나님을 찾아야합니다. 또 잘나가든 못나가든 정의롭고, 바르게 행동해야합니다. 그래야 입장이 바뀔때 심판 받지 않습니다.

    입장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가치와 기준, 정의를 쫓아 살아야겠습니다!

    *이제 UT Austin Ignite 동아리 모임을 위해 출발합니다.

    잃어버린 젊은 세대들이 예수님을 만나도록, 식어버린 신앙은 다시 불 붙도록, 하나님의 건강한 가치가 캠퍼스 안에 세워지도록,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많은 청년들을 하나님의 시절을 쫓아 만나가도록 기도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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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첫번째 나눔은 일단 문맥을 잠시 떠나서 단어들만 보고 해석 및 적용을 해보려고 합니다!

    "어떻게 금이 빛을 잃고 어떻게 순금이 변해 버렸는가?" (1절)

    금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도, 오늘날에도 여전히 금을 사서 모으는 사람들이 있는것이죠. ‘금 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어떻게 금이 빛을 잃고 어떻게 순금이 변해 버렸는가?? (1절) 하고 탄식합니다. 결과적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는 것이죠.

    절대 배신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인생 보험’도 결국 변할수 있습니다. 참 웃긴 사실이 무엇입니까? 보험 회사도 또 다른 보험을 든다는 사실입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고 우리의 인생을 보장하는 것은 이 세상에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예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금’이 가진 진실입니다. ‘금’마져도 변합니다. 배신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금이 ‘빛’을 잃어도 크게 동요하지 않습니다. 다시 닦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것이죠. 실제로 금이 빛을 잃었다고 해서 가치가 하락하는것은 아니니까요.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전히 ‘금’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왠만해서는 '금'에 대한 신앙(?)을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레미야는 경고합니다. 금이 단지 ‘빛’을 잃은 정도가 아니라 금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1절)

    그러므로 결국 변해버릴 ‘금’을 믿을것도 아니고, ‘우상’을 믿을 것도 아니고, ‘영광’을 믿을것도 아니고, ‘능력’을 믿을것도 아니고, ‘명예’를 믿을 것도 아니고, ‘지위’를 믿을 것도 아니고 ‘건강’을 믿을 것도 아닙니다. 믿어봐야 결국 견디다 못해 변하고 사라집니다.

    꾸준히 관리하고 운동해서 건강하다고 믿었는데, 그렇게 자만했는데 그냥 허리숙이다가 일어나면서 허리 다치더라구요. 그러니까 그렇게 믿고, 자신하던 건강이 소용없고 이틀을 꼬박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당신의 금고에 신주단지 모시듯 (상징적인)‘금’을 쌓아두고 만족해봐야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금고(?)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게 인생 정답 입니다. 그분만이 변하시지 않고, 그분만이 배신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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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문맥 안에서 이 말씀을 봐야합니다!

    사실 여기서 ‘금이 빛을 잃고 어떻게 순금이 변해버렸는가?” (1절) 라고 말할때 '금'은 이스라엘 백성을 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과 같은 자녀들이었는데 그 영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금수저’로 만들어 주셨는데 그들 자신이 굳이 ‘흙수저’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치있는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피값을 주고 사신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독생자를 주셔서 구원하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굳이 표현하자면 '금'과 같은 자녀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보아도 그들의 탁월함이 그들을 영광스럽게 만든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영광스럽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금’과 같은 자녀들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치를 변하게 한것은 바로 그들이 저지른 죄입니다.

    이와같이 나의 가치를 깍아먹는 인생습관, 나를 더럽히고, 망가뜨리는 인생습관을 버려야합니다. ‘금’으로 선언해주셨으니 '금'과 같은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야합니다. ‘의인’이라 불러주셨으니 의인다운 삶을 살아야합니다. ‘사명자’라 불러주셨으니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만들어 주신 내 가치를 파괴시키는 인생, 하나님의 얼굴에 먹칠하는 인생은 이제 그만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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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는건지(?) 느닷없이 허리를 다쳤습니다. 하필 아내가 한국에 있는데 허리를 다치니까 여러모로 걱정이 됐습니다. 과거 이런 상황에 허리가 악화되면서 아예 거동이 안되는 경험도 해본터라 ‘더 심해지면 어쩌지?’하는 걱정을 떨쳐버릴수 없었습니다.

    허리를 다치면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데 사람이 무력해집니다? 아무것도 못합니다. 가벼운걸 들고 못 들고를 떠나서 몸을 돌리지도 못합니다. 움직일때도 최대한 느리게 어그적 거립니다. “앞에 있는 종이 좀 줄래?’ 부탁 받아도 그정도도 해주질 못합니다.

    ‘구덩이에 빠진 인생’이 이런 난감한 인생입니다. 살아는 있습니다. 뭘 해야하는지는 압니다. 빠져 나가야겠죠!! 그러나 누가 건져내주지 않으면 구덩이는 빠져 나올수가 없습니다. 본인이 멀쩡해도 구덩이에서 나올수가 없습니다. 나름 최선을 다해보고, 발버둥 치지만 누가 꺼내주지 않으면, 도움의 손을 내려주지 않으면, 줄을 내려 주지 않으면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덩이’에서는 주의 이름을 불러야합니다. (55절) 교만하지 말고, 자신하지 말고, 괜찮다고 자신을 속이지 말고, 쿨한척 하지도 말고 하나님을 불러야합니다. 나를 '구덩이'에서 건지시는 분은 내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임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도 하나님을 불러봅니다!

    "하나님~~~ 저 좀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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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혹 동물 다큐를 보다가 ‘위험에 처한 동물’을 보게 됩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환경에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걸려 곤욕을 치르게 되는것이죠. 그러면 그런 동물을 구하기 위해 인간이 다가갑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구조대원을 향해 대부분의 동물들이 극도의 경계를 보여 줍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이유는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두려운것이죠. ‘도움의 손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도우러 오는 그 사람을 믿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그 사람이 가지고 오는 큰 가위가 자신을 살리려고 가져오는것인지 죽이려고 가져오는것인지 그들은 구분을 못하는것이죠. 그래서 구조대와 대치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동물들이 잠잠하고 순해질때가 있습니다. 고난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너무 지쳐버리면 구조대를 믿기 시작합니다. 두려워하기보다 맡겨버립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죠! 그렇게 믿게 될때 결국 구조 되는것입니다.

    내가 주를 부를때 주께서 가까이 오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57절)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러 오실때 두려워하거나 의심하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내가 생각한 방법이 아니여도, 과정이 내 기대와 달라도, 그분이 당장 하시는 방식이 두렵게 느껴질지라도 믿어야합니다. 구덩이에 있는데 하나님이 물을 들이 붓는 이유는 죽으라고 붓는게 아니고 떠오르라고 붓는것입니다! 이렇게 믿어야 구원 받습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전적으로 믿을때 구원의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구덩이에서 건짐받는 하루가 될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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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동을” (40절)

    이를 영어로 보니까 ‘our ways’ (ESV)로 기록합니다. (원어의 뜻도 이와같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회개나 점검을 생각할 때 ‘죄’라고 하는 영역 정도를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누가봐도 잘못한 영역 정도로 점검의 영역을 국한해서 생각하는것이죠.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우리가 점검하고 살펴봐야하는 것은 ‘나의 방법/길’입니다. (our ways) 완악하다고 여겨지는 부분 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 생각, 행동을 점검하는 것이죠. 그래서 ‘좋은 일’이라도 나의 방법이 아닌 그분의 방법으로 하고 있는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죄의 영역도 점검하고, 일상의 영역도 점검하는 것입니다.

    삶의 전반을 살피는 습관! 잘못한것이 없는지만 살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잘하고 있는지, 특히나 하나님의 방법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행하고 있는지를 살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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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펴보고 점검하자” (40절)

    그렇다면 '살펴보고 점검하자'는 어떤 의미? 어떤 방법을 의미하는걸까요? 이는 ‘철저한 조사’를 의미합니다. (investigation)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잠시 멈춰서서 사건 현장을 보고, 경찰들의 말을 귀동냥하고, 주변을 기웃거리고, 구경꾼들에게 묻는다고해서 범인을 찾는것은 아닙니다.

    경찰도 마찬가지 입니다. 현장을 본다고 해서, 대략적인 조사를 통해서 범인을 쉽게 찾게 되는것이 아닙니다. 범인을 찾기 위해서는 결국 엄청난 인력의 철저한 조사가 필요합니다. 이런 철저한 조사를 통해서 결국 범죄가 밝혀지고 범인도 밝혀지게 되는것입니다. 이게 바로 ‘철저한 조사’의 힘입니다.

    우리의 죄와 우리의 삶의 방법을 '살펴보고 점검하는'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한번 스윽 보고, 대충 보고, 시늉하면서 “다 체크했다!”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심령을, 우리의 인생을 철저히 조사해야합니다. 티비 뒤와 창틀과 침대밑과 모서리들을 점검하는, 심지어 덮어놓은 카페트 밑까지 확인하는 군대 생활관 검시 장교처럼 날카롭고 예리하게 내 자신을 살피면 그때 비로서 ‘언제나 깨끗한 환경’에서 사는 자가 되게 될 것입니다.

    '검시관'을 위해서 살펴보고 점검하는것이 아닙니다. 내가 깨끗하고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 점검하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청소'라는 행위, 보여지기 위한 점검이 아니고 '건강한 삶'을 위해 점검하는 것입니다. 결국 '점검'은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그러므로,

    ‘Deep cleaning’. That is what we ne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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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께 돌아가자!” (40절)

    원래 여기서 ‘돌아가자’라는 단어는 뒤에는 (문법적으로) ‘누구에게’ 혹은 ‘어떠한 행동’이 붙게 되어있습니다. [Return to whom/ return to do something!] 이런식으로 쓰이게 되어있다는 것이죠.

    예레미야는 어떤 ‘행동’으로 돌아가자 말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가자라는 대상을 말합니다. 행동이 아닌 대상, 예레미야는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이것이 더욱 본질적인 메세지이기 때문입니다.

    행동 하나 바꾸는 것으로 우리의 인생 전체를 바꾸지 못합니다. 아이들을 보면 본질을 알아야 생활 습관이 바뀝니다. “칫솔질 해!” 보다 중요한건 “항상 우리는 깨끗해야 아프지 않을 수 있단다! 건강을 위해서 청결해야해!” 입니다. 아이가 어느순간 이 본질적 메세지를 알면 “칫솔질해, 세수해, 목욕해”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청결을 관리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모든 영역(?)에서 깨끗함을 유지하게 되는것입니다.

    우리는 행동의 리턴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행동교정'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행동교정으로 쉽게 만족하거나 우쭐댈수 없다는 것입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분노를 용서로 교정하는것은 당연히 훌륭한 시도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변화는 인생 전반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움도, 분노도, 시기도, 나태도, 거짓도 따로 말하지 않아도 한번에 정리되기 시작하는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하나님께 돌아가야합니다. Return to do something 이전에 return to God 임을 기억해야합니다. 한가지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주 앞에서 바꾸는 회기가 필요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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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영혼이 내 안에서 낙심하고 있습니다” (20절)

    느닷없이 낙심이 찾아올때가 있습니다. 일이 너무 많기도하고, 생각대로 잘 안풀리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그럴때 낙심이 찾아오는것입니다. 사실 별일이 아닌데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평소같으면 낙심하지 않을 상황에서도 마음이 쉽게 상처되고 낙심하게 됩니다.

    그때마다 소망되시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21-22절) 또 아침마다 새롭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함으로(23절) 낙심됐던 제 마음을 새롭게 재정비 합니다. 이런 과정이 없다면 오늘을 살수 없고, 낙심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을 때 의지할 하나님이 계셔서 참 좋습니다. 참 감사합니다. 이런 시간들을 지나 어느덧 다시 소망가운데 앉아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때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우리 주변에도 '낙심'한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향해 “낙심하지 마세요!” 라고 말하는것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라는 위로가 더 큰 위로가 될것입니다. 이 말로 위로받고, 위로하시는 하루 되시면 좋겠습니다. 또한 서로의 곁을 지키며 함께 낙심을 이겨내는 가족, 이웃, 공동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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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립니다”(24-26절)

    ‘기다림’은 쉽지 않습니다.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들,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만 생각해봐도 ‘기다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두려움과 지루함의 시간들이죠. 혹 초초함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반면 ‘기다림’이 설레고 행복한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애인을 기다리는 사람, 가장 갖고 싶었던 것을 주문해서 배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기다림의 시간이 기대감과 설레임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정작 ‘기다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것은 결과 입니다. 두려움과 초초함으로 구조대를 기다리는데 구조대가 오지 않는다면? 설레는 마음으로 애인을 기다리는데 애인이 오지 않는다면? 지루함과 싸우면서 내 차례를 기다리는데 내 앞에서 문을 닫아버린다면? 'Out for delivery' 라는 메세지를 보고 오메불망 문밖에서 기다리는데 택배가 오지 않는다면? 기다림의 결과가 이와같다면 기다림은 결국 커다란 실망이 됩니다. 그래서 ‘기다림의 결과’가 중요합니다.

    세상의 기다림은 그런 의미에서 실망을 줄때가 많습니다. 구조대도 안오고, 사랑하는 사람도 안오고, 차례를 기다리는데 내 차례가 안오기도 하고, 택배가 안오기도 합니다. 배신입니다. 실망입니다. 결과가 이렇게 되면 두려움은 더 큰 두려움으로, 설레임은 배신감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기다림’에 대한 기대만큼 의심도 큰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을 기다리는것은 실망이 없습니다. 그분은 성실하십니다.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러므로 의심없이 기다리세요! 그날이 반드시 오게 될것입니다. 두려움으로, 초조함으로, 설레임으로 기다리기보다는 믿음으로 기다리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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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적 기억하는 아버지의 분노는 두가지 모습이었습니다. 어느날인가는 아버지께서 치킨을 사가지고 들어오십니다. 그런데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 아버지가 분노는 했으나 좋은 분위기에서 말로 풀어보려고 들어오신 날입니다. 그런 밤이면 우리 삼남매는 치킨을 열어 앞에두고 약 두시간 정도 아버지의 훈계를 듣고 나서 치킨을 먹는것으로 하루를 마무리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은 아버지의 분노가 얼굴에 여실히 드러날때가 있습니다. 이는 ‘훈계’의 분위기가 아닌 ‘매’의 분위기 입니다. 아버지가 참다 참다 드디어 ‘진노’를 하게 된것이죠!

    참 어리석지요. ‘치킨’이 중요한게 아니고 ‘훈계’가 중요한데 두시간이나 훈계를 들어놓고서는 그 이후에 먹은 치킨 때문에 ‘훈계’는 까맣게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진노의 날’을 피할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축복을 기억하는것도 좋지만 ‘훈계’를 기억해야합니다. 지적을 기억해야 합니다. 꾸중을 기억해야합니다. (실생활이나 영성이나 모두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훈계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변합니다. 성장합니다. 실수가 줄어듭니다. 하나님께서 훈계 하신것중에 아직까지 하고 있는건 뭔지 첵업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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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분이 내 심령에서 평안을 빼앗으셨으니” (17절)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는 마음 입니다. 환경에 지배되는 평안이라면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이 아닌 가짜 평안 입니다.

    가짜 평안은 환경이 좋을때 드러납니다. 그러나 환경이 어그러지면 같이 없어집니다. 심지어 가짜 평안은 환경이 좋아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할때가 많습니다. 불안과 초조의 감정들에게 쉽게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짜 평안이 아닌 하나님의 평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바로 그 평안을 하나님께서 빼앗아 가신 것입니다. 끔찍한 형벌입니다.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인생!! 마음에 안정을 못누리는 사람은 모든 종류의 정신병에 쉽게 노출되기도하고, 육신에도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걸리는 수많은 현대인들의 병만 보아도 알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때때로 극심한 스트레스로 밤잠을 설치거나 휘청(?)거리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저를 아시는 분은 제가 몇번이나 병원에 실려간 사실을 아마 알고 계실꺼예요)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평안'이 필요합니다. 주님과 함께 살면됩니다. 그분을 모시고 살면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면 됩니다! 자유를 위해, 욕망을 위해, 쾌락을 위해 평강의 하나님을 버리는, 떠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겠습니다. 걱정에 함몰되어 '환경을 이기는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평안의 하나님은 포기할수 없는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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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의 마음이 주께 소리 질러 외쳤다” (18절)

    원래 간절하면 소리 지르게 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같은 삶을 살 때 그들도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좀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오랜만에(?) 둘째가 나와서 키우고 있는지 이제 15개월입니다. 그런데 아기를 보니까요 아기는 계속 소리지릅니다. 울고 또 웁니다. 혹은 소리도 그렇게 질러댑니다. (우리 둘째딸이 좀 심하죠 ㅋ) 아파도, 배고파도, 심심해도, 좋아도 그냥 계속 쉼없이 아빠, 엄마를 찾습니다. 누가 보면 세상 혼자라도 된것 마냥 잠시 떠나면 막 소리 지릅니다. 그 모습조차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부르짖음은 이와 같아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힘들때만 할것이 아닙니다. 그냥 매 순간 그분을 향한 간절함, 갈망, 부르짖음이 있어야합니다. 그게 없으니까 결국 ‘고난의 순간’을 마주하는데까지 가게 되는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은 시절을 따지지 않습니다. 상황을 따지지 않습니다. 계속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주님께 집착(?)된 인생이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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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여, 보시고 고려해 주소서.” (20절)

    최악의 상황입니다. 포위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살기 위해 자녀들을 먹을 판입니다.

    그런데 이 비통함에 젖은 고백을 보면서 느닷없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간은 최악을 만나면 어디까지 타락하게 될까? 어떤 행동까지 하게 될까?’

    아이를 먹을지도 모른다는 이 기록이 도무지 쉽게 수긍되지 않습니다!! 나 살기 위해서, 내가 굶주렸고 방법이 없으니 내 아기라도 먹어야겠다구요?!? 정말 인간이 이렇게까지 행동할 수 있다구요?!!

    사는거에 집착하면, 나만 생각하면 자칫 말도 안되는 죄도 서슴없이 지게 됩니다. 불법도, 비윤리적 행동도, 비도덕적 행동도 망설임 없이 합니다. 양심의 소리는 모른척 합니다. 심지어 부성애, 모성애까지 버려버리는것이죠.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사랑을 버리지 않을리 없습니다.

    SANITY를 지키지 못하면 SAINT(성도)는 될수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정신을 놓치지 말아야합니다. 죄와 타협하고, 모른척해도 안됩니다. 자칫 어마무시한 죄를 짓게 될지도 모릅니다. 평생 후회해도 해결할수 없고, 잊을 수 없는 일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잠4:23, 우리말성경]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네 마음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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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원수들이 멸망 시켰습니다!” (22절)

    원수들은 언제나 기회만 엿보고 있습니다.

    [벧전5:8, 우리말성경]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사람을 찾습니다. 라고 기록합니다.

    이런 상황인데 원수들에게 나를 짓밟을 기회를 주는 행동을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사탄은 우리가 죄 지을 때마다, 그래서, 신이 납니다. 너무 흥겨워서 칼춤을 춥니다.

    하나님께서 떡하니 막고 계셨는데 죄를 빌미로 길이 열리자 원수가 파도처럼 밀려와 희열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들을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기록된 예루살렘의 상황인것이죠.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을 미연에 방지 할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너희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여라” (막14:38절) 기도해야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기도로 분별하고, 기도로 죄를 거절하고, 기도로 거룩 마음을 다져야합니다. 미리 미리 기도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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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 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살면서 절대 겪어보고 싶지 않은 경험입니다. 간혹 지인들의 어린 자녀들이 몹쓸병에 걸려 병투병하는 얘기를 전해듣습니다. 그러면 병에 걸린 아이가 받는 고통도 형언할수 없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며 숨죽여 울고 있을 부모의 아픔이 떠올라 너무 맘이 아플때가 있습니다. 그때 감히 아이의 아픔을 상상하는것만으로, 또 그 부모의 아픔을 상상하는것만으로도 숨이 탁 막혀오는것을 느낄때가 있습니다. 단지 상상하는것 뿐인데 머리가 어지럽고 토를 할것만 같은 고통을 느낄때가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무너지는 성읍을 바라보며, 무너지는 남 유다를 바라보며, 이런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셨을까요? 하나님은 쾌재를 부르며 심판하고 계셨을까요? ‘사랑의 매’를 든 부모가 아이를 때리며 기분 좋아하는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아이를 혼내면서 즐거워하는 부모가 어디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마음이 아프십니다. 내장이 뒤틀리고, 간이 쏟아져나오는 것 같은 아픔보다 (11절) 더 큰 아픔으로 하나님은 신음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나중에, 참다 참다, 이런 일을 영원히 막기 위해서 예수님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대속하게 하셨겠지요.

    하나님 또 다시 아프시지 않도록 철든 자녀가 되야겠습니다. 어쩌면 오늘도 나 때문에 울고 계실, 아파하고 계실 하나님입니다. 그분의 사랑과 눈물을 안이상 악행을 멈춰야합니다.

    2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너를 보고 손뼉을 친다. 딸 예루살렘을 보고 그들이 비웃으며 머리를 흔든다.” (15절)

    간혹 이런 일이 있습니다. 살인자가 재판을 받습니다. 이후에 이송 수감을 위해 수갑을 차고 이동합니다. 그때 수갑 차고 나오는 죄인에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꼴 좋다!”라고 소리칩니다. 살인자는 이런 반응을 보며 극도로 분노합니다. 그리고 대적하여, 욕하고, 화냅니다.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에 재판을 받고 심판을 받은것입니다. 그러니 정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그를 향해 '정의의 목소리' 혹은 '진노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살인자가 이와같이 정의의 목소리를 높이는 자들에게 오히려 분노를 쏟아낸다면 이것이 옳은 일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잘못된 행동입니다.

    많은 이들이 죄로 인하여 결과적으로 심판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이스라엘과 같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자초하여 심판을 받는 와중에 자꾸 하나님을 원망하고, 주변도 원망합니다.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기도 합니다. 이는 잘못된 행동입니다. 죄를 지으면, 심판 받았으면, 자신을 심판한 자나, 자신에게 정의 목소리를 외치는 자들을 원망하고 비난하고 화낼것이 아니라 회개해야 합니다. 원망이 아니라 회개, 변명이 아니라 회개, 분노가 아니라 회개를 해야합니다.

    회개의 메세지! 오늘 마주한 잔인한 심판은 회개 하라는 하나님의 메세지 임을 깨달아야 할것입니다. 회개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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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에 그분이 명령하신 말씀을 이루셨다” (17절)

    이말씀은 마치 [신28:37, 우리말성경] 너는 여호와께서 너를 끌고 가실 그 모든 민족들에게 미움의 대상이 되고 조롱거리와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 오래된 신명기의 말씀이 성취된것과 같이 보입니다. (많은 주석가들의 해석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 말인즉슨 이스라엘 백성은 아주 오래전부터 하나님의 경고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그런데 경고를 받고도 정신 못차린것이죠.

    그리고 결국 때가 이르렀을때 그들은 하나님의 선언되었던 이 심판을 받게 된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와같이 당신의 말씀에 성실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언젠가 다시 때가 이를때 이 세상을 심판 하러 오실 것입니다. 주님 약속하신데로 그때가 되면, 이 땅에 오셔서 믿음의 자녀를 구원하시고, 악하고 믿지않는 자녀들은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이는 반드시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예견된 최후심판과 지옥행(?)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깨어 정신차리고 믿음안에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처럼 실수하는 인생을 답습해서는 안됩니다.

    심판과 지옥은 진짜 있습니다.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신명기에 예언된 이 말씀이 수백년이 지나 이스라엘 이뤄진것처럼 때가 되면 최후의 심판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그러니 정신차리고 바른 길을 걷고, 온전한 믿음의 삶을 살아야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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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전과 성벽이 무너집니다.(6,8절)

    잘못 지어지거나 균열이 생기면 건물은 견디다 못해 언젠가 무너지게 되어있습니다. 애초부터 잘못 지어진 (부실공사)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 같은것은 결국 무너져 수많은 사상자를 내기도 했습니다. 지을때는 잘 지었지만 이후에 여러가지 상황을 겪으며 균열이 생긴 건물들도 이와같이 제때 수리하지 않아서 무너지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거대하든, 얼마나 튼튼하든 상관 없습니다. 결국은 ‘작은균열’이 그 건물을 무너뜨릴수 있습니다.

    오늘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은 ‘죄’라는 균열로, ‘우상숭배’라는 균열로 결국 무너지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신 것이지만 이미 ‘균열’로 무너지고 있었던 성입니다.

    ‘균열’이 있는 성은 어떻게 보수해야할까요?

    일단 보수를 논하기 전에 우선은 균열이 있는지 없는지 먼저 항상 점검해야합니다. 그러다가 만약에 균열이 발생되면 보수 해야겠죠. 그리고 이런 일을 계속 반복합니다. 그러나 어느 때가 지나면 보수의 한계점을 만나게됩니다. 그리고 그런 타이밍이 오면 고치는 대신 파괴하고 다시 새롭게 지어올리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무너뜨려 다시 재건하기로 결정하신 것이죠.

    꾸준한 점검없이는 건강한 신앙이 없고, 결함에 대한 보수 없이는 건강한 신앙이 없고, 아무리 보수를 해도 계속 죄를 지어서는 건강한 신앙을 가질수 없습니다. 건강한 신앙에 균열을 일으키는 모든 삶의 습관을 그러므로 모조리 끊어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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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은 모든 면에서 소망을 잃어버립니다. 삶의 터전도 잃어버리게 되고,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또한 결국은 포로가 되어 고통 가운데 놓이게 됩니다. 이 모든 어려움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께로부터 환상을 받지 못하는 예언자’들 입니다. (9절)

    하나님과의 단절은 소망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절망의 상황에도 하나님이 응답하시면 꿈을 꿀수 있죠. 그러나 절망의 상황에 하나님까지 침묵하시면 아무런 소망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시편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것 같을때 가장 답답해하고 힘들어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시기에 얼마나 답답하고 두렵고 슬펐을지 감히 상상이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임마누엘’ 예수님을 허락하셨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분은 내 안에 언제나 내주하십니다. 나의 어려운 인생에 부재하지 않으십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 말씀하시는 하나님, 보여주시는 하나님, 침묵중에도 내 곁을 떠나시지 않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고아같고 죄인같은 나를 받아주시고 함께 해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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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분의 명령을 거역했다.” (18절)

    군대에 있는 모든 이들은 명령에 복종하게 되어있습니다. 심지어 별을 한두개 달고 있어도 별 세개를 만나면 복종해야합니다. 그렇다면 군대 내에서 누가 복종하지 않을까요? 바로 대장 입니다. 그는 별을 네개나 달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국군에는 별 5개가 없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대장은 그 위에 누가 없기 때문에 군대체계 안에서로 국한해서 본다면 복종할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는 이유는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대장’으로 여길때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도 거역합니다. 내 인생에 주인이 나고, 내 인생에 가장 높은 사람이 나고, 내 말이 나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기 때문에 나의 말, 나의 생각, 나의 뜻을 행하고 대신에 하나님의 명령은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에 대장은 예수님 입니다. 나는 그분의 명령앞에 그러므로 순종해야합니다. 내 인생에 대장 행세하고 주인 행세를 행하다가는 오늘 ‘남유다’보여주는 꼴을 당하게 될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내 인생에 대장되시고 내가 그분의 명령을 따를때 비로서 가장 안전하며 거룩한 인생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군대생활’을 참 많이 싫어(?)했지만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것은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나의 대장되시고 나는 그분의 병사로 복종하며 살것을 기쁨으로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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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밖에는 칼의 살육이 있고 집 안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20절)

    당시 남유다는 예루살렘에 갇혀있었습니다. 바벨론이 밖에서 칼을 들고 포위하고 서있고, 성 안에서는 음식이 없으니 굶어 죽거나 자녀를 먹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사면초가! 진퇴양난! 고립무원! 이라는 말로 표현하죠. 아마 많이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이 사자성어가 탄생하게 된 역사의 기록을 보면 결국 항우라는 사람은 이와 같이 사면초가, 그리고 고립무원이 되어 스스로 자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인생이 이러한 사면초가, 진퇴양난, 고립무원이 되었어도 자살하지 않습니다. 눈물이 흐를지라도 결국 하나님께 나와 아뢰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이와같이 사방이 막힌것 같고, 앞으로든 뒤로든 전진도 후퇴도 못하고, 아무도 와서 구원해 주지 못할것 같을때, 자살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좌절만 하지 말고 하나님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무조건 하나님께 매달려야 할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매달리면 진퇴 양난으로 난감해 하던 사람에게 꽉 막혀있는 앞뒤가 아닌 활짝 열려있는 양옆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할것입니다. 사방이 막혀서 갈곳이 없어 보여 절망하던 사람에게는 활짝 열려있는 ‘북동쪽'과 남서쪽’같은 사잇길이 비로소 눈에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실 인생이 '사방'이 아닌 '팔방'일 수 있잖아요) 또한 고립되어 자신을 구원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것 같아 슬픔과 비통함에 빠진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할때, 자신을 구원할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고 위로와 힘을 얻게 될것입니다.

    우리의 피할 길 되시고, 도움이 되시며, 언제나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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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아, 너희가 살펴보라. 내게 가해진 내 고통과 같은 고통이 어디에 있는가?” (12절)

    과거에는 죄인을 심판해서 대로나, 도시에 입구에 걸어놓는(?)일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로마의 십자가형도 사실은 이런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심판받은 죄인’을 잘보이는 곳에 걸어두는 이유는 심판받은 이들을 보고 절대 죄를 따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인을 향한 자비없는 심판은 이와같이 성경에 빼곡히 기록되어있고, 오늘날 뉴스에도 비일비재하게 소개됩니다. 긍국의 목적은 다 같습니다. 죄인을 향한 심판을 보고 똑같은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지은 사람들이 자비 없는 심판을 받는것을 보면서도 죄를 짓는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나는 절대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나는 저런 심판을 받을리 없어 라고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보고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가장 어리석고 안타까운 사람입니다. ‘심판의 본’은 이미 충분히 보았습니다 그러니 죄짓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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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분이 나를 힘쓰지 못하게 하셨다. 내가 당해 낼 수 없는 사람들의 손에 주께서 나를 넘기셨다.” (14절)

    보기에는 바벨론이 심판한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반복적으로 기록된것처럼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심판한줄 알면 정신 못차립니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바벨론’만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사용해서 심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반드시 심판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재판관 눈치를 보기보다는 더 높은 기준인 하나님을 봐야합니다. 하나님이 최후의 심판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야 말로 '대법관'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살아야합니다. 세상의 심판을 피할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절대 심판은 피할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심판의 끝판왕(?)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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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는 오늘 이스라엘이 경험하는 이런 완전히 망한것 같은 삶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죄로 인하여 철저히 망한 인생, 아무리 찾아도 위로도 없고 응답도 없는 인생은 아직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간헐적 어려움이야 경험했지만 오늘 본문에 기록같은 경험은 해본적이 없습니다.

    생각이 이쯤이르니 하나님께 너무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내 곁을 언제나 지켜주셨고, 때에 따라 응답해주셨고, 위로와 격려로 힘을 주셨고, 죄 가운데 있는 나를 완전히 심판하시기 보다는 예수의 보혈로 용서하시고 구원해주신 하나님이 떠올라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나의 잘남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나를 거룩의 길로 인도하시고, 내 눈물을 닦아주시고, 손을 뻗을 때 위로하시고, 나의 자녀들을 돌보시고, 원수와 대적을 당해낼 힘을 주시고, 나를 거절하지 않으시고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다시한번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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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1:1, 우리말성경] 사람으로 가득 찼던 성읍이 얼마나 외롭게 앉아 있는지! 민족들 가운데 뛰어났던 성읍이 어찌 과부처럼 됐는지! 열방들 가운데 공주였던 이 성읍이 노예가 되고 말았다.

    간혹 중독자들을 봅니다. 정도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중증 중독자들은 보는 순간 안타까운 마음이 들정도로 그 육신과 외형이 망가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도 아름답고 건강한 시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지 않는 것을 인생에 반복적으로 허용하다 보니 중독됐고, 결국은 어느 순간 완전히 망가진, 회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모습으로 망해버린 것입니다.

    남 유다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반복적으로 우상숭배와 죄를 허락합니다. 중독입니다! 그 결과 남유다는 '아름답고 찬란한 영광'을 잃고 맙니다. 바벨론의 손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당하게 되는것이죠. 예루살렘 성읍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영광의 모습은 사라지고 처참하게 망해버립니다.

    그래서 예래미야는 탄식(1절)하게 되는것입니다. “언제 이스라엘이 이렇게 됐을까? 그 아름답고 영광스럽던 이스라엘이 어쪄다 이 꼴이 됐을까~ 애통하도다. 애통하도다”

    이스라엘의 이 역사를 보면서 깨달아야합니다. 조그만 실수에도, 한번 시도하는 죄에도 그러므로 민감해야합니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영광과 아름다움으로 모든 실수를 덮을 수 있을것이라고 착각해서도 안되고, 나의 아름다움과 영광이 내가 무엇을 하든 계속 유지될것이라고 생각하는 오해도 버려야합니다. ‘성읍’을 잘 유지하고 싶다면 계속 정신 차려야합니다. 우상도 버리고 죄도 버려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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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1:2, 우리말성경] 예루살렘이 밤에 비통하게 울어 눈물이 뺨 위로 흐른다. 그를 사랑하던 사람들 가운데 위로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의 모든 친구들이 배신하고 적이 되고 말았다.

    남 유다가 붙들었던 ‘친구들, 사랑하는 이들’이 제법 많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막상 바벨론에게 포위되고 나라의 힘을 잃어버리자 ‘친구도, 사랑하는 이들’도 다 배신하고 적이 되버립니다.(2,7,9절) 친구라고 믿었던 주변 국가들이, 사랑하는 관계라고 생각했던 '동맹국'들이 바벨론 눈치 보느라 유다를 모른척 하거나 오히려 바벨론 편에 섰을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이게 남유다가 마주한 현실입니다.

    결국 우리 곁을 지켜주시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보호자, 인도자 되시고 승리를 주시는 우리 편이 되십니다.

    오늘 남유다 백성이 바벨론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영영 그들을 버리고 배신하고 적이되신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회복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매’일 뿐입니다. 다 배신하고 떠난 그곳에서 하나님 만이 그렇게 이스라엘의 회복의 역사를 써내려가기 시작하신 것이죠.

    다른 모든 관계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최선을 다해야 할것입니다. 여기저기 기웃 거리며 인맥 쌓고, 돈을 쌓고, 지위를 쌓느라 하나님 버리고 살면 안됩니다. 나중에 진짜 어려울 때 다 배신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내가 그토록 믿었던 돈도, 지위도, 사람들도 하나같이 배신 할수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사겠다고 그렇게 노력하며 살았는데 어려울 때 배신 당하는 것입니다. 돈도, 지위도, 인맥도 사실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에 위기 앞에서 배신하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하나님을 바라봐야합니다. 하나님은 배신하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인생이 되십시다. “네 마음과 생명과 뜻을 다해 네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명령을 잊지 말고 실천해야합니다.

    3

    [애1:11, 우리말성경]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들이 빵을 찾으며 탄식합니다. 그들의 귀중품들을 먹을 것과 바꾸며 목숨을 유지합니다. "오 여호와여, 살펴보소서. 내가 경멸을 받나이다."

    먹고 살려니까 귀중품도 팝니다. 유다백성은 바벨론의 포위 때문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니 먹을것이 없고, 그러니 귀중품도 팔아버립니다. 귀중품보다 사는게 먼저니까요!

    그러면 ‘포위되는 날’이 오기전까지 유다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요? 많은 이들은 아마 '귀중품'을 모으는 인생을 살았을것입니다! 그게 인생의 목적인것 마냥, 행복의 비밀이 거기에 있는것 마냥, 그게 전부인것 마냥 살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막상 인생이 어려움에 처하니까 어떻게 하죠? 생명이 위협 당하니까 어떻게 하죠? 귀중품 팔아 버립니다. 살아야하니까요. (생각해보면 이 와중에도 또 귀중품을 받고 음식을 넘겨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전히 귀중품을 쫓고 있는것입니다. 나중에 포위가 길어져 자신들도 음식이 떨어져서 그렇게 쟁취한 귀중품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후회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토록 우리가 집착하는 '귀중품'의 민낯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까요? 위기 앞에서 저렇게 쉽게 버릴수 있는 '귀중품'을 위해 살아야할까요? 아닙니다. 위기가 올때도 절대 팔아버릴수 없는 것을 위해 살아야합니다. 이렇게 최후까지도 넘겨줄수 없고 지켜야하는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게 맞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할 최고의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은 영생입니다. 구원 입니다. 이것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놓칠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귀중품'을 위해 사는 인생이 되기보다는 '영생'을 바라보며 사는 인생이 되어야합니다. 아둥바둥 사는 인생, 욕심에 휘둘려 사는 인생이 되기 보다는, 예수님을 믿으며 그분의 뜻을 행하며 사는 인생이 되어야합니다. 무엇보다 어떤 상황에도 믿음을 타협하지 않으며 사는, 거룩을 타협하지 않으며 사는 신앙인이 되어야합니다.

    진짜 중요한것,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것, 온 인생을 다해 추구해야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 한분 뿐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며 예수님을 위해 사는 인생이 되야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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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을 일깨워서” (1절)

    많은 사람들의 아침은 알람 소리와 함께 시작됩니다. 더 자고 싶지만 일어나라는 알람소리에 자신을 깨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알람소리에 일어나는것은 아닙니다. 알람이 울리면 꺼버리는것이죠. ‘조금만 더..’ 하며 다시 잠에 빠져듭니다. 그렇게 몇번을 반복하다 보면 결과는 늦잠입니다. 이후에 늦게 잠에서 깬 그 사람은 주로 화를 냅니다. “아니 왜 알람을 맞춰놨는데 울리질 않아?!!” 자기가 꺼놓구서는 기계한테 책임을 전가 합니다. 심지어 방문을 열고 나가 엄마나, 아내등에게 화를 냅니다. “아니 나를 깨워야할꺼 아니야!!” 여전히 책임을 전가하려고 합니다.

    그럼 이런 대답이 돌아오죠!! “깨웠어! 그런데 니가 계속 잤지!”

    맞습니다. ‘알람소리’는 계속 있었습니다. 안울린것도 아니고, 안깨운것도 아닙니다. 안일어난 것은 우리 일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복종과 순종, 선한일을 해야하는것 (1절) 남을 헐뜯지 않고 다투지 말아야 하고 너그럽고 온유한 사람이 되야하는(2절) 알람은 이미 켜져있는지 오래였습니다. 들어도 너무 많이, 자주 들은 '알람소리'입니다. 다만 그들이 혹은 우리가 '알람소리'에 일어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일어 나야합니다!!!! 알람 소리에 일어나야합니다.

    알람 세팅(?)보다 중요한게 알람이 울리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알람’을 끄지 말고 나를 깨우십시다. 계속 그렇게 ‘알람소리’를 무시하다가 결국 큰코 다치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이제 나 자신을 향해 울리는 하나님의 알람소리를 듣고 ‘일깨워야’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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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는 우리의 의로운 행위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자비 때문이다.” (5절)

    바울은 디도에게 ‘칭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상기 시킵니다. 우리의 선행으로 구원을 얻은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것이다 명확하게 얘기해줍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라는 기독교의 이 구원론은 세상의 불신자들에게 많은 공격을 당합니다. 그들은 ‘선행의 인과’로 구원을 얻는것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것' 보다 훨씬 타당한, 지성적인, 논리적인 구원론이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착한 사람'이 구원받는게 타당하지 '믿는 사람'이 구원받는게 타당하니?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사람을 구원에까지 이르게 하는 선행은 무엇일까요? 어디까지 해야, 어떤 행동을 해야 구원을 얻을 수있을까요? 법을 지키면? 윤리와 도덕을 지키면? 사회적 덕목을 따르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가만 보면 법, 윤리, 도덕, 문화, 덕목등도 지역에 따라 세대에 따라 계속 달라지던데요? 한참 과거에는 '종을 부리는것'이 악함이랑 전혀 상관이 없었잖아요. 오늘날 그러면 문제가 되죠?! 언젠가는 (아주 오래되지 않은 과거 조차도) 여성과 유색 인종을 무시하던게 '죄'와 전혀 상관없었던 때도 있잖아요. 그때는 무죄인데 지금은 죄인것들이 너무 많고, 여기서는 무죄인데 저기서는 죄인 것들도 너무 많죠. 참고로 ISIS같은 사람들은 테러를 '선행'으로 여기는 끔찍하고도 잔인한 생각을 하죠.

    어떤 선행이, 얼만큼의 선행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절대 선행' 인걸까요? '절대 선행' 없이 상대적 선행으로 구원받는 걸까요?? ‘ 만약 그렇다면 기준이 제각각이니 아무나 다 구원받을수 있다는 말인가요?

    “선행으로 구원을 얻는다!” 는 언뜻 이성적인것 같고, 논리적인것 같고, 타당한듯 보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 라는 기독교의 주장보다 더 의로운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선행으로 구원을 얻는것은 불가능한 이야기 입니다. 그 누구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선행의 절대 기준’을 정의 내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롬3:20, 우리말성경]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육체가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입니다.

    우리의 선행으로 완벽한 '선'을 이뤄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이는 오직 하나님 한분 뿐이시니라!”(막10:18)

    결국 우리의 선행이 아닌, '하나님의 선'으로 우리는 구원 받는것입니다. 예수님의 선하심이 믿는 우리의 우리의 죄를 씻고 '의인'으로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구원이며 칭의의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니 우리는 선하게 살아야합니다. 그 누구보다도 선하게 살아야합니다. 선하게 살아서 구원받는게 아니라 선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 받았으니 그 누구보다 선하게 살아야하는것입니다.

    3

    기독교의 구원은 값싸지도 않고, 불의하지도 않습니다. 허무맹랑한 얘기도 아니고, 무지성적인 주장도 아닙니다. 구원이 가능한 유일한 지혜요 진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믿을 만한 이야기이다. 그러니 확신을 가지고 말하라!” (8절)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전하세요! 복음을 전하세요! 기독교 구원론을 전하세요! 그리고 칭의 받았으니 세상 누가봐도 놀랄정도의 ‘선한일’을 하세요! ‘칭의’는 ‘성화’로 반드시 이어져여합니다. 입에 가득담은 복음의 메세지와 인생을 가득채운 선행의 본으로 세상에 오직 한 구원의 길이 되시는 예수님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야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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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르쳐라” (1-8절)

    인생에 가르침은 필수 입니다. 적절한 가르침이 없다면 그게 누구든지 간에 실수로 가득한 인생,무질서로 가득한 인생, 악함으로 가득한 인생, 우회(detour)로 가득한 인생이 될것입니다. 잦은 실패는 필연이 되고, 성장은 더딜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중요한 ‘가르침’을 거부하는 문화가 오늘날 어느정도(?) 형성되어 있는듯 보입니다. ‘가르침’에 ‘꼰대의 잔소리’라는 프레임을 입혀서 소중한 가르침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때는 말이지!”로 시작하면서 실상은 가치없는 잔소리가 있는것도 (안타깝지만) 사실입니다. 때론 그들의 가르침이 지혜가 아닌 편협한 전통 일때도 있습니다. 불합리한 얘기들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진주 같은 가르침’도 여전히 너무 많습니다. 입에는 쓰지만 보약 같은 가르침 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르쳐야할 때는, ‘바른교훈’을 (1절), 눈치보지 말고 가르쳐야합니다. 사람들 눈치보느라 가르치지 못한다면 ‘그들’ 책임이 아니라 가르치지 않은 나의 책임입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성별에 상관없이, 지위와 직분에 상관없이 가르쳐야하는 바른 지혜는 반드시 가르쳐야합니다.

    또한 누군가 가르친다면 배워야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가르침을 절대 무시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많다고 나이 적은 자의 가르침을 무시하지 않고, 성별과 지위의 다름 때문에 가르침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꼰대의 말’에서도 지혜를 걸러내 배우는 자가 될수 있어야합니다.

    가르침과 배움이 있는 개인 그리고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2

    “본이되라!” (7-8절)

    주변 인물중에 언행에서 본이 될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비난할 것이 없는 온전한 말’을 하는 사람, (8절) ‘모든 일에 선한 행실의 본’을 보이는 사람(7절)이 누군지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사실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나의 자녀는 나의 언행을 어떻게 평가 할까요? 나의 아내와 남편은, 교회의 성도와 이웃들은 나의 언행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어쩌면 교회 성도들은 나의 언행을 ‘바르다’라고 평가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막상 딸에게 물어보면 “우리 아빠는 맨날 화내고, 말도 막해요!” 라고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이웃에게는 ‘천사같은 언행’의 대명사이면서, 아내에게는 ‘무심하고 나쁜 언행의 남편’인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바른 언행’은 삶의 장소, 시간 그리고 대상을 구분하지 않아야합니다. 바른 언행으로 점철된 인생, 다른 말로 본이 되는 인생이 되야겠습니다.

    3

    종은 주인에게 복종하고, 말대꾸하지 않고 주인을 기쁘게 해드리라고 합니다. 주인의 것을 훔치지 않고 착한 마음으로 모든 일에 충성하라고 합니다. (9-10절)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하고, 말대꾸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의 것을 훔치지 않는 자가 되야합니다. 시간, 은사, 물질, 영광을 훔치지 않는 자가 되야합니다. 하나님께 자원하며 충성하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롬1:1; 벧전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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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이 편지를 쓴다. 내가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의 믿음과 경건에 이르는 진리를 아는 지식을 위한 것이요.” (1절)

    ‘신앙인으로써의 명확한 정체성 그리고 사명 의식과 목적’ 이는 신앙인이라면 모두가 바울과 같이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반복적으로 점검하고 자문해야하는 영역 인것이죠!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과 함께 다시 점검해야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맡겨진 일을 잘하고 있는가? 만약 점검해보고 그렇지 않다면 다시 재정비해야겠습니다.

    건강한 정체성에서 건강한 자존감을 갖게 됩니다. 정확한 사명의식이 있어야 성실한 삶의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목적은 방향을 설정하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되고, 방황하는 인생에 돌파구가 되어줍니다.

    바울을 닮아 건강한 정체성과 사명의식과 목적을 가지고 사는 삶이 되야겠습니다.

    2

    세상의 리더는 성품보다는 능력에 무게를 더 두는듯 보입니다. 예를 들면 리더를 뽑을 때 경력, 능력, 기술등을 철저히 수치화 해서 살펴보는 과정이 있습니다.

    물론 능력과 성품 모두 좋다면야 금상첨화입니다. 그러나 안타깝지만 그런 사람이 드뭅니다. 그래서 보통은 능력이 있는 사람을 뽑습니다. 리더로 책임지고 일하는데 있어서는 능력이 성품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성품이 좀 모나도 능력이 확인되면 고용하고 승진 시키지만, 성품이 아무리 좋아도(평판이 좋아도) 능력이 없는 사람은 고용하거나 승진시키지 않는 경우가 많죠.

    이뿐만이 아닙니다. 조금더 불편한 진실이 있습니다. 세상은 리더를 뽑을 때 배경으로 뽑습니다. 태생적인 '금수저' 말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다른 이들보다 태생부터 한 두발 앞서 있습니다. 이 방법이 옳다라고 말할수는 없지만 현실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없는척 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태생' 때문에 좌절하기도하고, '배경'때문에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교회에 리더가 되는 장로/감독직을 어떻게 세우실까요? 하나님은 능력보다 성품이고, 인격을 보시죠. 또한 하나님은 '태생적 배경'으로 리더십을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부모가 '믿음의 가족'이기 때문에 리더로 뽑거나, '사도의 자녀'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교회의 장로를 만들거나 하지 않습니다. 부자라는 배경 때문에, 높은 사회적 지휘라는 배경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리더로 세우는 그런 일은 (하나님 손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결론 내리고 싶습니다. 신앙과 고결한 성품 그리고 실력을 두루 겸비한 사람이 되는데 집중하자! 태생적 배경이 화려하거나 위대하지 않아도 그로인해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자! 하나님과 사람들이 모두 인정할 만한 리더의 자질을 갖추는데 집중하자!

    하나님께서는 신앙과, 성품, 실력과, 본질을 갖춘 자를 리더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아멘

    사실 참 리더는 임명되는것이 아니요 자연스럽게 인정받는것입니다.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사람, 누가 보든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 지는 사람, 인생 배경에 압도되지 않고 오히려 훌쩍 초월해버린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참 리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녀들을 찾으시며, 이런 자녀들을 당신이 원하시는 리더로 삼아 주실 것입니다.

    3

    “그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지만 행위로는 부인하니 그들은 가증스러운 사람들이요, 불순종하는 사람들이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부적합한 사람들이다.” (16절)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지만 행위로는 부인하는 사람들’ 오늘날 교회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와 같습니다. 오늘날의 교회 뿐 아니라 사실 교회의 역사가 반복적으로 보여준 문제와 같습니다.

    신앙은 삶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행동이 중요합니다. 행동으로 구원받는게 아니라고 해서 행동이 안 중요한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그런 오해가 어디있습니까?)

    나의 행동을 철저하게 점검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심지어 율법의 기준조차도 상회하는 본질적 선행이 있는지 점검해보면 좋겠습니다. 점검한 후에는 악한 행동은 멈추고 선한 행동은 더욱 확장해가야겠습니다. 믿음을 행함으로 보여주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진정성 있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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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7만명이 죽었습니다.” (15절)

    이스라엘의 최 북단에서 최 남단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죽은 수가 자그마치 7만명입니다. 7이라는 숫자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완전수’의 의미라는것을 상기해보았을때 하나님의 계획하신 심판이 온전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떠올리게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와 같이 피할수 없습니다. 어디에 숨어서 될일이 아닙니다. 세상의 재앙은 잘만 피하면 피해지고, 운이 좋아도 피해집니다. 세상의 재앙은 한 지역에 국한되기도 하고, 한 시간대에 국한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어디에 있든, 언제에 있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마지막 때에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을 이와같이 받을 것입니다. 한명도 빠짐없습니다. 피할길은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살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심판과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다시 한번 기억합니다.

    2

    “저들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주의 손으로 저와 제 집을 치십시오.” (17절)

    다윗의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그는 두가지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은 죄가 없다라는것인데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죄가 있습니다. (24:1절) 애초에 이 일이 이스라엘 백성의 죄 때문에 시작된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다윗이 직접 맞는다고 한들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씻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해서 다윗이 맞을 수는 없습니다. 그 자신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우리도 다윗같이 착각을 하는것 같습니다. “그들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잘못한게 많습니다! 알고보면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는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반드시 믿어야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해서 징계받을수 없듯이, 그 누구도 ‘죄인’을 위해 대신 심판 받을수 없습니다. 대속은 오직 죄 없으신 예수그리스도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반드시 믿어야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서는 죄사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서는 구원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3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내 주 왕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바치십시오.” (22절)

    “아니다. 내가 값을 지불하고 사겠다.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공짜로 얻은 것으로 번제물을 드릴 수 없다.” (24절)

    아라우나는 아라우나대로, 다윗은 다윗대로 하나님께 드리기를 꺼려하지 않습니다. 재앙을 그치게하고,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실 일이라면 아낌없이, 계산없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것, 이는 마땅히 배워야할 자세일것입니다.

    간혹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께 헌신하면 그것이 마치 ‘목회자의 헌신’ 인것마냥 착각하는 목회자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성도들도 있습니다. 소위 말해 ‘편승하는 신앙인’, ‘숟가락만 올려놓는 신앙인’입니다. (저도 이런 마음이었던 적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헌신은 그들의 헌신이고, 공동체의 헌신은 공동체의 헌신입니다. 같이 할때는 같이 하더라도 나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내것을 드리는 신앙과 예배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남의 것으로 나의 드림을 대신 할수 없습니다. 헌신과 희생없는 신앙과 예배도 없습니다.

    기꺼이 내것을 드리는 신앙, 주를 위해 지불하는것을 꺼리지 않는 신앙,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신앙의 자세를 놓치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도 주시는 형국인데 그분 앞에 아끼는 일이란 없어야겠습니다.

    4

    “다윗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이스라엘에 내리던 재앙이 그쳤습니다.” (25절)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우리의 삶에 있는 재앙을 그치게 해주실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때, 서로가 중보할때 오늘 우리의 삶에 있는 재앙을 주께서 멈추게 해주실 것입니다.

    기도하는자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것입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하루, 극복하는 하루, 뛰어넘는 하루, 자유해지는 하루, 회복되는 하루 경험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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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아내와 결혼한지 10주년이 되었습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통해서 더욱 성숙하고 돈독한 부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참 많이도 싸웠습니다. 가벼운 다툼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아내의 ‘진노’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아내가 처음부터 진노한것은 아닙니다. 제가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니까 언짢음을 지나 진노까지 하게 된것입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되는 일이지만 1-3년 반복하면 별거 아닌일도 별거가 되고 그러다가 별거(따로사는)하는것입니다)

    그래서 반복해서 짓는 죄가 제일 나쁩니다. 잘못을 반복한다는 것은 회개하지 않았다는 의미고, 깨닫지 못했다는 의미고,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고, 의지적으로 거부하겠다 메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법도 자꾸 같은 죄를 반복하면 ‘가중처벌’을 하게 됩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자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안받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은 그래서 죄를 반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TMI이지만 저는 이제 아내의 ‘진노’를 마주하지 않습니다. 10년쯤 되니 이제 배울만큼(?) 배웠고, 깨달을만큼 깨달은것이겠지요! 아직 여전히 다투고, 때로는 서로를 얹짢게 하지만 더이상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면서 서로를 진노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지 않습니다.

    죄를 반복하지 않아야겠습니다. 잘못을 반복하지 않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 가족에게, 나의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웃에게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아야겠습니다.

    2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졌는데 하나님은 왜 다윗을 부추기심으로 같이 심판하기 원하실까요?

    아이가 죄를 지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부모는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거야?” 죄를 지은건 아이인데 모두 부모를 찾습니다. 책임을 아이에게만 묻지 않고 부모에게도 묻는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와 같다고 생각됩니다. 죄는 이스라엘 백성이 지었습니다. 그러나 다윗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기 때문입니다. 왕은 백성이 죄를 짓는것을 그냥 두고보아서는 안되는 사람 입니다.

    부모는 자신의 아이의 죄를 막아야하듯이, 왕은 자신의 백성의 죄를 막아야하듯이, 나의 죄뿐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의 죄까지도 같이 주의깊게 살피고 막아야겠습니다. 나의 역량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손을 뻗어 죄를 멈추게 만드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나의 자녀, 가족, 교회, 더나가 동네, 세대, 민족, 나라까지도 내 손이 닿는다면, 다시 말해 내가 그런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가진 자라면 그때마다 손을 뻗고 목소리를 높여 그들이 죄에서 돌이키게 하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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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가져다주겠느냐” (15절)

    본능의 충족을 원하는 리더, 인내하지 못하는 리더, 판단이 흐린 리더, 누군가를 사지로 내모는 리더, 말해놓고 보는 리더, 솔선수범하지 않는 리더 등 다윗의 이 한마디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본능적이고 가장 기본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나의 주변과 이웃을 곤란에 빠뜨리고 희생시키는 일을 하면 안되겠습니다.

    내게 필요하고, 소망하는 일일 지라도 나의 주변과 이웃이 위험에 빠지는 일이라면 인내하고 또 인내 해야겠습니다.

    나의 필요를 쫓아 분별하고 판단하는게 아니라 전체적 상황을 보고, 주변까지 지혜롭게 살펴서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하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나는 땀 한방을 안흘리면서, 나는 위기에 몸을 먼저 내 던지지 않으면서, 내가 직접 물뜨러 가지도 않으면서 나의 이웃이나, 동료들을 사지로, 노동으로, 위험으로 마냥 내모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말이 앞서는 리더는 더더욱 되면 안되겠습니다. 감정과, 욕구와, 필요등이 떠오를 때 이를 무작정 생각없이 내 뱉고 보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대책없고, 이기적이고, 분별없고, 베려없고, 충동적이고, 본능적이고, 본이 안되는 행동과 말을 실수로라도 하지 않는 리더/이웃이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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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물을 가져다 주겠느냐?” (15절)

    “이 세명의 용사들은” (16절)

    놀랍습니다. 그리고 참 다행입니다. 이 말도 안되는 일에 3명이나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적진을 돌파하여 군주에게 물을 떠다 주었습니다.

    조금 생뚱 맞지만 한명이 아니여서 너무 다행입니다. 물론 세명이 해도 힘든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위험의 길도 동행하는 친구가 있고, 동역하는 동료가 있다면 한결 수월하기 마련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로도 되고, 보호도 됩니다. 혼자는 불가능 한 일도 같이 하면 가능한 일이 참 많습니다.

    어려운 일도 같이 하는 공동체, 이러한 이상적인 공동체와 그런 일원을 꿈꿔 봅니다. 이왕 해야하는 일이라면, ‘왕’이 원한다면 같이 하는것입니다. 혼자에게 떠미는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떠미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하는것입니다. 같이!!!

    나의 왕되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명이 때로는 목숨(?) 걸어야할만큼 어렵게 느껴지는 일들도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 돌파해야하는 일같이 느껴질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가 아닌 같이 하면 한결 수월할것이라 믿습니다.

    같이 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같이 해주실것입니다. 우리가 같이하고, 하나님께서 같이 하실때 수월하게 ‘적진’을 돌파하고 ‘생수’를 필요한자에게 떠다 먹여 살리는 용사가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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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들은 싸움의 순위를 매기는 것을 너무(?) 좋아합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남자 아이들은 온통 이 이야기 입니다. “누가 전교 싸움 일등이야?” 나이를 먹어 중년이 되도 동창들 만나면 싸움 순위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방송을 보니까 남자 연예인들도 끊임없이 ‘연예인중 싸움 순위’를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싸움순위’는 인정받지 못합니다. 왜냐면 모두 소위 말하는 ‘카더라 순위’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일어나지도 않았고, 본적도 없는 생각과 구술에 의해서 정해진 순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신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UFC나 권투는 다릅니다. 공정한 심판, 그리고 반복되는 대전의 결과에 따라 데이터가 축척되고 그에 따라서 순위가 결정됩니다. 그래서 이 순위는 공신력을 얻게 됩니다. 실제 순위에 따라 실력 차이가 상당합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다윗의 용사들도 싸움 순위(?)가 정해져 있습니다. 처음 3명, 그다음 3명 또 이어지는 30명 등등 입니다. 이들의 ‘용사순위’는 ‘카더라 순위’가 아닙니다. 이들이 실제 전쟁에서 승리한 역사에 기반한 정확한 순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용사는 그냥 되는것이 아닙니다. 실천과 결과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것이 ‘용사’로 인정받는 기준이 됩니다. 소문도 아니고, 몸집도 아니고, 큰 목소리도 아니고, 거짓말도 아닙니다. 용사는 반드시 실제 전쟁터에서 싸워보고 결과를 마주하는 데이터를 통해서 순위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일을 실제로 하지도 않으면서, 영전 전쟁의 링에 올라가보지도 않았으면서, 교회안에서만 머물고, 믿음의 저변에만 앉아 있으면서 큰소리치고 으시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소리지르고, 주장해봐야 오늘 성경에 기록처럼 ‘못 미치는 30인’ 혹은 30인에 이름 못올리는 수많은 군사가 될 뿐입니다.

    이왕이면 ‘찐 용사’ 되고 싶습니다. 말로만 ‘싸움짱’ 신앙인이 아닌 실제 뛰고, 싸우는 (영적으로) 용사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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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말'이 참 중요합니다. 그 말에 인생 전체가 담깁니다. 진짜 중요한것이 담깁니다. 그의 생각, 철학, 경험, 지혜의 정수가 담깁니다. 허투루 말하는것이 없습니다. '마지막 말'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마지막 말은 그렇게 '왕'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가르침과 선포, 지혜가 담김니다. (2,3절) '공의'와 '경외'라는 메세지 입니다.

    최근에 많은 신앙인들에게 존경받고 사랑받던 고 팀켈러 목사님께서 목회자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말'(?)이 많은 목회자들에게(신앙인들에게)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첫번째 “칼날 위에 서라” 이는 이 시대에는 참여하되 분별하며 동화되지는 말라!라는 메세지입니다.

    두번째 “소비만 하지 말고 투자하라!” 온통 세상의 사라질것을 위해 소비하는데 연연하기 보다는 교회, 신앙, 그리고 사명을 위해 돈, 시간, 인생을 투자하라는 메세지입니다.

    세번째 “당신의 평판을 잊어버리라” 이는 개인의 명성과 자격, 소위 말하는 큰 일과, 사역의 성공에 목메지 말고 오롯이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달리는 건강한 사명자가 되라는 메세지입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나 하나님의 손을 놓치 않는 목자가 되야겠습니다. 사라질 것들을 위해 나를 허비하는 인생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을 위해 나를 온전히 소비하는 목자가 되야겠습니다. 나의 평판을 위함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뛰는 목자가 되야겠습니다. 성공을 위해 살기보다는 성화를 위해 사는 목자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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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 한 점없는 아침 햇살, 비갠 뒤의 땅에 돋아나는 새싹”(4절) 공의를 따라 행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행하는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소망'이 되어줄 것입니다.

    나의 주변에 누군가에게 '소망'이 될만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쫓아 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기에 많은 이들에게 공정하고 참 선을 베푸는 이웃이 되길 원합니다. 그들의 삶에 빛이 되고, '돋아나는 새싹'같은 소망이 되어주는 이웃이 되길 원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악한이웃'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들은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가시덤불같다”(6절)

    이런 인생은 누구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뽑아버리려고 하겠죠. 잘라내 불에 태어버리려고 하겠죠! 기대되지 않는 인생! 기피할수밖에 없는 사람! 어둠을 몰고다니는 사람! 상처를 주는 하는 사람! 이러한 악한 이웃은 절대 되지 말아야합니다.

    소망되신 예수님을 닮은 사람, 사람들이 기대하는 인격과 성품의 사람, 공의와 사랑의 사람이 되야겠습니다.

    3

    용사들의 이름과 성취가 기록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군사들이 도망갈때 (9,11절) 도망가지 않고 이스라엘을 지킨 용사들입니다. 심지어 용사중 하나인 엘르아살은 손에 힘이 빠져 칼을 쥘수 없을 때까지 싸웠다고 기록합니다.

    우리도 ‘영적전쟁터’에 있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사라지고, 믿음의 자녀들은 교회를 떠나고, 말씀의 가르침을 세상의 가르침과 타협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부딪혀 싸우기 보다는 도망가는 군사가 더 많은 시절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나는 어떻게 할것인가?! 그러므로 결단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누군가는 수많은 이스라엘 군사처럼 도망갈것입니다. 누군가는 엘르아살처럼 손에 쥐가 나도록 싸울것입니다. 어떤 삶을 살것인지 결정해야합니다. 다만 결정하기 전에 기억해야할 것은 하나님은 오늘 도망간자들의 이름이 아닌 용사들의 이름을 기록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이 어떻게 할지 결정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끝까지 싸우는자. 두려움을 이기고 전진하는 자! 모두가 도망가도 지켜야할 ‘믿음의 땅/사명의 땅’을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의 약속된 승리가 주어질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왕이면 다 같이 용사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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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쭈욱 다윗의 고백을 읽고 있자니 그의 인생도 참 쉽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수 없습니다. ‘어둠에 둘러싸인 인생’ ‘적군과 맞선 인생’ ‘담을 기어 올라야하는 인생’ ‘원수를 마주하는 인생’ ‘난폭한 사람들의 위협’ ‘낯선 이방인들과 경계하는 인생’

    그러나 이러한 순간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함께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고백입니다.

    매 순간마다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 입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 두렵지 않습니다! 낙망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좌정해 계시니 내 인생에 좌절은 없습니다.

    고난의 나열에 집중하기 보다는 함께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더욱 집중해야겠습니다. 절망적 상황을 보는 인생이 아니라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을 보는 인생이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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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길은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흠이 없으니” (31절)

    ‘완전한 길’은 찾기 어렵습니다. 세상에는 완전한 길이 없기 때문에 무작정 빨리 달리지 못합니다. 고속도로에서 파손되고 파인 길만 밟아도 차는 쉽게 사고를 당합니다.

    세상이 자랑하는 ‘아우토반’을 가도 무작정 달리는데 두려움이 따릅니다. 심지어 자동차 경기를 하는 서킷을 가도 무작정 달리는데 두려움이 있습니다. 돌 하나, 조그만 결점 하나로도 차들과 생명이 죽음의 사고에 휘말릴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물리적인 길이든, 개념적인 길이든 ‘완전한 길’은 그래서 찾기가 어렵습니다. 자칫 ‘완전한 길’인줄 알고 기분내며 달렸다가 사고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흠이 없는 말씀’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쉽게 찾을 수 없습니다. 충고를 한다는 수많은 멘토가 있고, 유명한 강사들이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1타강사’ 혹은 ‘인생멘토’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각자 말이 다 다릅니다. 누구는 꿈을 꾸라고 하고, 누구는 꿈을 꾸지 말라고 합니다. 누구는 즐기면서 하라고 하고 누구는 즐기면서는 절대 이룰수 없다고 말합니다. 누군가는 의미를 쫓지 말고 본능에 충실하라고 하고, 누군가는 본능보다는 의미있는 인생을 살라고 말합니다. 이 말들이 다 소위 ‘탁월한 강연자’들의 지혜입니다. 인생에 단 하나의 정답이 되는 ‘흠이 없는 말씀’은 이토록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 사람, 저사람의 ‘흠이 없는 말씀’을 따르다가 이도저도 안되는 인생에 답답함만 경험하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답을 찾았습니다. ‘완전한 길’ 그리고 ‘흠이 없는 말씀’ 은 하나님 입니다. 우리 예수님 입니다.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분의 길은 안전하고, 완벽합니다. 그분의 말씀은 변함없이 영원한 구원의 진리이며, 그 누구도 토달지 못하는 인생의 지혜입니다.

    답은 하나님 입니다. 답은 예수님 입니다. 영원히 길과 진리되신 하나님만을 믿고 그분을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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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께서 내가 가는 길을 넓혀 주셔서 내 발이 미끄러지지 않았습니다” (37절)

    길을 넓혀주셔서 발이 미끄러지지 않았다?! 이 말을 묵상하며 생각해보면 딱 한가지 생각밖에 나지 않습니다.

    ‘도대체 원래 길이 어떻게 생겼길래 넓히지 않으면 미끄러지는거지?!? 아~ 원래 길이 그냥 걷기에도 너무 비좁아 양옆으로 쉽게 미끄러지는 천길 낭떨이지 같았구나’

    다윗이 걷던 길은 그냥 ‘길’이 아니라 ‘좁은 길’ 입니다. 마치 ‘평균대’ 같습니다. 길 이긴 길인데 애초에 폭이 10센티밖에 안됩니다. 평균대 위에서는 왠만하면 다 그냥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우리의 인생길이 그렇습니다. 다윗같이 못 누리는거 없이 누리며 사는데도 인생은 평균대처럼 ‘좁은 길’입니다. 그러니 우리 같은 인생은 (상징적으로 생각해보면) 외줄타기 하고 있는것인지 모릅니다. (우리라고 하니까 좀 그렇다면 저..저는 그런것 같습니다 ㅋ)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넓혀주시지 않으면 미끄러질수밖에 없는 인생일지 모릅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고, 평균대 선수들도 자신감 가지고 걷고 뛰고, 돌다가 간혹 미끄러집니다. 자신감 있어서 움직임이 화려해지면 질수록 넘어질 확률도 큰폭으로 늘어납니다. 그래서 애초에 해결은 평균대 폭을 넓히는것입니다.

    나의 인생의 ‘폭’을 넓혀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나의 길을 안전하게 하시고 미끄러지지 않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니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애초에 ‘인생의 길’은 평균대와 같이 좁습니다. 혼자 자신감 넘치게, 화려하게, 뛰어다니기 보다는 조심스럽게, 손잡아주시는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주님께서 넓혀주시는 길로 안전하게 걸어다녀야겠습니다! 내가 걷고있는 ‘인생 줄’을 ‘대로’로 만들어 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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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께서 높은 곳에서 손을 뻗어 나를 꼭 붙잡아 주셨으며 깊은 물속에서 나를 건져내셨습니다.” (17절)

    저는 물을 무서워합니다. 어릴적 한번도 아니고 세번이나 빠져 죽을뻔 하니 이쯤되면 물이랑 안맞는(?) 인생 입니다. 물에 들어가면 몸이 쉽게 굳어버립니다. 그래서 물이 더 싫습니다.

    제가 물에 빠졌을 때를 돌이켜보면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혼자 살아 나올수 없었다는것입니다. 빠졌을 때마다 잡아 올려주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의 손길이 없었다면 저는 속절없이 죽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생의 문제 앞에서 나 자신을 구하는것은 어려은 일일 뿐더러, 영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나의 죄로 인한 심판 앞에서 나 자신을 구원할 수는 있는 이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것이 누구든 한명도 빠짐없이 건져내는 손길이 필요합니다. 구원이 손길이 필요합니다.

    “주께서 높은 곳에서 손을 뻗어” 다윗을 구원하신 것처럼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감사와 찬양을 주님께 올려 드립니다. 온세상이 건지시고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길 소망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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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께서 나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분이 나를 기뻐하셨기에 나를 건져 주신 것입니다.” (20절)

    요즘 둘째 아이가 너무 예쁩니다. 너무 예뼈서 어쩔줄 모를 지경입니다. 아이가 딱히 뭘 하는건 아닙니다. 때로는 인간적으로보면 귀찮게(?)하는 경우들이 더 많겠지요. 그러나 그냥 예쁩니다. 너무 예쁩니다. 그래서 자주 안아줍니다. 자꾸 품에 안습니다. 행여 위험해질까봐 노심초사 합니다. 여기저기 기어다니고, 보행기를 잡고 걸어다닐때 뒤에서 쪼르르 따라다닙니다. 딸 하나가 다치는 것을 볼수는 없으니까요. 뭘 잘해서 도 아니고, 착해서도 아닙니다. 자격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그냥 너무 예뻐요.

    그렇게 아이가 기다가, 걷다가 위험한 곳을 가려 할때면 서둘러 아이를 들어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습니다.

    아이는 내게 한없는 기쁨입니다.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하나님께 우리는 바로 이런 자녀입니다! 자격이 있어서는 아닙니다. 그럴듯한 행동을 해서도 아닙니다. 그저 아버지는 자녀된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시고 기뻐하십니다

    나의 자격을 믿을게 아니라 ‘아빠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합니다.

    나의 거룩을 믿는게 아니라 '아빠 하나님'의 의 사랑을 믿습니다.

    아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가슴이 벅차고 기쁩니다. 그리고 마음에 안정이 임합니다. 하나님이 내 아빠여서 너무 좋습니다. 주안에서 안전한줄로 믿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를 다시 한번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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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25절을 보면 다윗이 오해하고 있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주 앞에 흠 없이 살고 내 자신을 지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24절)

    그는 간음도 했고, 살인교사도 했습니다. 그런데 죄가 없다뇨? 그러면 다윗은 거짓말을 하는걸까요? 그럴리 없죠!

    다윗은 ‘잊으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용서하시면 다시 과거를 들추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용서 앞에 자신의 죄가 없어졌다고 믿고 이렇게 선언하고 있는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씻어주심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다윗처럼 온전히 믿지 못하고 오히려 여전히 죄책감에 종이되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전히 ‘구원의 무게’를 오롯이 혼자 지고 살려고 합니다. 그러니 '율법주의' 같은 것에, '행위구원론'같은 말에 여전히 속습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은 온전히 믿지 못하면, 완벽하게 죄를 씻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믿지 못하면 '사랑'이 아닌 '눈치'로 동기 부여받습니다. 이미 용서 받았을 죄에 여전히 메여 전전긍긍하는 삶을 삽니다. 옳지 않습니다. 제일 중요한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라!"지 "하나님 눈치보라!" 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회개한 자를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죄책감으로 빌미를 잡거나, 과거의 실수를 이용해 우리를 계속 옭아메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당신의 사랑의 십자가로 죄에 구속된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죄책감으로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믿는 자가 아니라 사랑안에 자유하며 그러므로 더욱 사랑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는 자신감 넘치는 신앙인이 되야겠습니다.

    [롬8:1-2, 우리말성경]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죽음의 법에서 여러분을 해방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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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하 22:1-7 절중)

    지은 찬양으로 은혜 나눕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

    내 산성 구원이시니

    나의 피할 바위되시며,

    나의 방패 구원이시니

    찬양받기 합당하신

    나 여호와를 부르니

    그가 나의 적들로부터

    나를 영원히 구원하리

    내가 고통 가운데

    여호와를 부르고

    주의 도우심을 간구하네

    내가 고통 가운데

    여호와를 부르니

    내 하나님 내 기도 소리

    들으시네

    주의 성전에서 찬양해

    나를 구원하신주 찬양해

    새노래로 주님께 노래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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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몹시 지쳤습니다’ (15절) 다윗이 나이가 들었습니다. 육신은 어쩔수 없습니다. 아침 이슬같고, 흩날리는 파도같고, 화려했다 지는 꽃과 같습니다.

    과거에 ‘거인족’을 이겼던 용사가 바로 다윗입니다. 골리앗은 그 앞에서 꼼짝없이 단한번에 쓰러졌습니다. 다윗이 그런 용사였습니다. 심지어 사자, 곰과도 싸워 이긴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참 무상합니다. 영원할것 같은 건강도, 힘도, 영광도, 권력도 다 이와 같습니다. 다 사라집니다. 우리의 손에서 모래알 같이 빠져 나갑니다.

    성경을 보니까 영원한게 두가지 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신을 의지할것이 아니요. 과거를 의지할것도 아니요. 권세를 의지할것도 아니고, 돈을 의지할것도 아니고, 사람을 의지할것도 아닙니다. 오늘 승리를 가져다준 아비새도 몇년후면 곧 ‘몹시 지치는 인생’이 될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살것입니다. 말씀의 지혜와 가치를 쫓아 살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살것입니다. 영원한 구원을 주시는 유일하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겠습니다.

    2

    블레셋은 계속 ‘거인족’으로 승부를 봅니다. 왜 그러는지 뻔합니다. 이게 세상의 논리입니다. ‘거인’으로 안되면 ‘더 큰 거인’! 그것으로도 안되면 손가락 발가락 합쳐 24개인 사람이라도 데려와 승부를 보려고 합니다.

    강함으로 승부보는 세상! 힘으로 군림하려는 세상! 권위와 더 큰 권위로 끊임없이 충돌하는 세상! 세상은 이와 같이 ‘힘의 논리’를 신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인’은 계속 집니다. 다윗의 용사들이 탁월해서 그런것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들의 탁월함보다 더 본질적 승리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것’입니다.

    애초에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것은 다윗의 탁월함이 아닌 (간혹 그렇게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다윗을 사용하신 능력의 하나님 입니다.

    우리는 ‘힘의 논리’를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힘’을 믿습니다. 약할때 강함되시는 하나님!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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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15절), “그 후… 전쟁할 때에”(18절), “또 다시 ..전쟁에서”(19절) “이번에는 가드에서 전쟁이 또 벌어졌습니다.” (20절)

    전쟁이 멈추지 않습니다. 계속 전쟁입니다. 싸우고 또 싸웁니다. 인생이 ‘전쟁’ 투성 입니다. 오늘 전쟁이 멈추고, 내일 또 전쟁이 일어납니다. 어제 싸운 친구와 오늘 또 싸우기도 하고, 오늘 싸운 친구 말고 다른 친구랑 내일 또 싸우기도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을 단 하루도 쉰적이 없다!” 말할정도로 싸움은 멈추지 않습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반복되는 전쟁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불필요한 전쟁, 완악한 전쟁은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러나 싸워야만 하는 전쟁이라면 그런 전쟁은 반드시 싸워 이기겠습니다. 매일 전쟁해야하고, 매일 싸워야하더라도 피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싸우겠습니다. 믿음을 지키는 싸움, 거룩을 지키는 싸움, 영혼을 지키고, 구원을 지키는 싸움이라면 반드시 싸우고 또 싸워 승리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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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느닷없는 상황입니다. “사울과 피로 얼룩진 그 집안 때문이다. 그가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이다.” (1절) 다윗의 잘못도 아니고, 지금 당장의 일도 아닌 과거의 일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다윗이 시대 때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시작된것입니다.

    시대의 흐름은 단절되어있지 않습니다. 어제 없는 오늘이 없고, 오늘 없는 내일이 없습니다. 어제 위에 오늘이 임했고, 오늘 위에 내일이 임하는것입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 입니다. 부모없는 아이가 없듯이 인간관계도 연결과 연속성에 있습니다.

    결국 이것이 세상이 이치요 질서이기 때문에 과거의 문제가 오늘의 문제이며, 그대의 문제가 나의 문제가 됩니다. 그러니 ‘연대책임’이라는 부분에 대한 깊은 묵상이 필요합니다. ‘내 맘이니까 막 해도되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이기적이고 완악한 마음입니다. ‘나는 괜찮고 좋으니까 상관없지 뭐!’ 악한 생각입니다. ‘다음 세대는 모르겠고 나 있을때만 문제가 없으면 되지 뭐’ 이 또한 완악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지으신 시간과 관계의 역학에 묶인 피조물들입니다. 세상의 질서와 흐름 안에서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행동은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것보다 많은 의미를 갖게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나의 행동에 대한 책임 의식을 조금더 무겁게 가져갈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나의 행동의 무게가 내일의 누군가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할수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오늘 나의 경솔함이, 나의 방종이, 몇년후 나의 자녀에게 치명적 위기가 되어 돌아올수있다는 사실을 염두해야합니다.

    이쯤되니까 ‘인생살기 참 힘들다!’ 라는 생각이 들기도합니다. 오늘 내 삶을 살기도 바쁜데 다른 사람의 인생과, 다른 세대의 인생까지도 생각해야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시대를 살아낸 누군가들이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냈기에 오늘 우리가 누리며 살고있는것입니다.

    저주를 남기는 인생이 아니라, 심판을 남기는 인생이 아니라, 축복과 기쁨, 평화를 남기는 신앙인이 되야겠습니다. 오늘을 부끄럼없이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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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를 향한 열심이 지나쳐서 그들을 죽였던 것입니다” (2절)

    열심이 방향을 상실하면 치명적입니다. 원래 “바보가 열심까지 있으면 가장 위험하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사울왕은 ‘열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하나님의 방향을 생각지 않습니다. 본인에 생각대로 움직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가 제사를 드릴때도, 아각을 살리고, 전리품을 챙길때도,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일때도 결국 이 ‘방향을 상실한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닐때도 보세요 10년을 마다않고 얼마나 꾸준(?)합니까? ㅋ 웃프지만 그는 열정의 사람입니다.

    “열정을 가지면 성공한다?!” 이는 인간이 교만해서 나온 말입니다. 열정이 있어도 방향을 상실하면 성공은 커녕 대차게 망합니다. 심지어 주변도 망하게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방향을 설정하고 열정을 내야합니다. 하나님께 물어보고 열심을 내야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열심을 내야합니다. 무작정 열심은 가장 위험한 도구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해하지는 마세요 ‘열심’ 이라는 자세 자체는 좋은것이죠)

    3

    오늘 하나님의 심판은 ‘죽음’입니다. 은혜로 점철된 기독교 신앙을 집중적으로 듣다보면 이렇게 ‘죽음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집니다. 마치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일어난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우리 사랑의 하나님은 단 한번도 공의의 하나님이시지 않으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을 악을 싫어하시고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원래가 ‘죄의 삯은 사망’이었습니다.

    오늘의 이 강력한 심판의 말씀은 우리에게 그러므로 경종을 울립니다. 죄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똑똑히 직면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좋은게 좋은거지” 허허실실 넘어가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한없이 사랑하시지만, 한없이 단호하십니다!

    자칫 잊을뻔한 나의 삶에 ‘공의의 메세지’를 선언하시는 하나님은 허투루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내 삶에 하나님의 공의로 재정비해야할 부분이 무엇인지 오늘 하루의 삶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점검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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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14절)

    결국 이 땅의 회복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오늘날의 땅’도 실제 기근과 ‘영적 기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완악한 피흘림에 의해서 저주에 시달리는듯 보일 정도입니다. 심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완악한 시대입니다.

    이땅의 회복을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다윗의 기도가 없었다면 (1절) 이스라엘은 회복의 실마리도 못찾았을 것이고, 실마리를 못찾았다면 회개가 없고, 공의의 실현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계속 심판가운데 신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시대에 ‘다윗’입니다. 이땅을 위해 중보해야하는 다윗입니다. 당신이 교회입니다. 내가 교회입니다. 우리가 이땅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공의가 실현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는 응답이 이뤄질것임을 믿습니다.

    이 땅과, 나라, 세대, 사람을 위해 중보하는 하루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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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겨진 영웅’

    한 이름 모를 여인이 등장합니다! 어마어마 합니다 요압을 만나고 자신의 백성을 설득 시킵니다. 요압을 만나자고 하는것도 특별한 경우고 자기 백성을 설득하는것도 특별한 경우입니다. 이 모든것을 해내고 성의 비극적 죽음을 막은 사람이 바로 이 여인입니다.

    요압은 이 승리로 인해 다시 기세등등 군대장관이 됩니다. 그러나 영웅은 이 여인 입니다. 요압은 기껏해야 아군 아마사를 죽였고 이 여인은 자그마치 적장 세바의 목을 베었습니다.

    세상에는 이와같이 숨겨진 영웅이 많습니다. 우리도 영웅이 될수 있습니다. 아니 영웅이 되어야합니다. 안 유명해지고 상으로 치하받지 못한다고 한들 ‘Unsung hero’는 항상 필요합니다. 선두에 선 영웅 하나로 되지 않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소위 말하는 외각 지역에서 평생을 섬기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선교지에서 숨 다하는 날까지 사명을 감당하시는 선교사분들이 있습니다. (크게 인정받지 못해도) 가정과 자녀를 위하는 아빠와 엄마가 있습니다. 아무도 하기 싫어하는 일을 도맡아 하는 직장인들, 공무원들도 있습니다!

    우리 바우 교회도 이러한 'unsung hero'들이 있습니다.'목사'처럼 선두에서 보이지는 않아도 열심히 자기 자리에서 여러모로 섬기는 아내(사모)가 있습니다. 또한 작은 교회임에도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여러 종류의 섬김을 겸손히 그리고 열정적으로 섬기시는 성도님들이 있습니다. 벌써부터 1인 2,3역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이와같이 지혜가 탁월하고 용기 있고 능력이 있어도 이 여인처럼 'Unsung hero'로 살기를 주저 하지 않는 특별히 귀한 자들입니다! 바르고 옳은 일을 위하여 솔선수범하지만 영광에 집착하지 않는 ‘이름모를‘ 수많은 영웅들이 필요합니다!

    반면 저는 여전히 ’요압‘같고 싶습니다. 이왕이면 요압같이 드러나고 칭찬받는 영웅이고 싶습니다! 이름도 없이 활약한 이 여인이 귀한것은 알겠는데 저는 여전히 ‘요압’이 누리는 영광이 눈에 밟힙니다! (너무 솔직했나요?!) 이것이 저의 연약함이며 미성숙함입니다!

    영광은 주님께 돌리고 나는 내가 해야할 일에 집중하는 unsung hero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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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여인은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나왔을까요? 성읍을 사랑하고 같이 사는 이웃을 지키고 싶은 마음! 용기는 이와같이 진정있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사랑하면 계산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며 묶이지 않습니다. 머뭇거리지 않고, 미루지 않습니다. 시도합니다. 한계조차 뛰어넘을 각오로 달려듭니다. 사랑한다면 모른척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여인은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한걸음, 아니 몇걸음이라도 내딛는것입니다.

    복음의 선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이웃과 성읍’을 사랑하면 우리도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살리기 위해서 발벗고 나서게 됩니다. 해야할 일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의 사랑으로 그들에게 다가가게 됩니다. 나의 상황으로 변명하지 않고, 나의 처지를 변명의 무기로 삼지 않습니다.

    사랑해야겠습니다. 더욱 사랑해야겠습니다!

    잃어버린 영혼, 위기에 처한 영혼, 복음을 모르는 영혼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만큼 뛰어들어 이들을 구해내는 통로요 도구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핑계 그만! 실천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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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란은 결국 진압됩니다. 그러나 뒷맛이 씁쓸합니다. 저는 그렇게 느껴집니다. 그냥 애초에 없어도 되는 일들이 있었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몰론 세바같은 사람은 비극을 자처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전체 사건을 생각해보면 어찌되었든 이 모든 반란과 전쟁과 진압 과정이 모두 필연적인 역사는 아니였습니다.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일!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일! 정신차리고 조심했다면 없었을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소의 삶이 참 중요합니다. 자칫 평소의 한 실수가 ‘나비효과’가 되어 이러한 생각지도 못한 큰 참극을 만들어 낼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인생에 이는 ‘작은 물결’을 세심히 살피며 한걸음 한걸음 조금더 신중하고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실수야 필연적이라지만 할수만 있다면 줄이고 또 줄여서 불필요한 고난을 피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오늘 제가 깨어있어야하는 이유입니다. 항상 영적 경각을 놓치지 말아야하는 이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큐티가 참 좋습니다! 오늘도 큐티 덕에 다시 한번 ‘작은 물결’을 점검하며 시작합니다! 나 자신과 우리 모두에게 외칩니다!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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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1절)

    세바는 우리가 다윗과 함께 하면서 누릴 축복이 없다고 말합니다. “받을 축복이 없으면, 받을 유익이 없으면 그와 함께 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애초에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을 추종할까 생각했던 이유는 ‘복’때문입니다. 자신들이 누릴 이익이 있는가?를 계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안되는것 같으니까 세바의 말에 힘을 실어주고 그렇게 다윗을 떠나버립니다.

    이는 마치 ‘기복신앙’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줄 알고 주님께 옵니다. 그런데 막상 기도하는데 응답도 안되고 잘되는 일도 없는것 같으니까 그냥 하나님을 떠나버립니다. 심지어 누군가는 종교를 바꾸기도 합니다. 물어보면 내 기도를 안들어 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건강도, 가족도, 재정도, 회사도 놓고 기도했는데 하나님 응답 안하시니 나는 축복하는 타 종교를 찾아 가서 기도해야겠다라는것입니다.

    기독교는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익을 주실까봐, 분깃을 나누실까봐 그분 곁에 머무는게 아닙니다. 복 때문에 하나님 눈에 들려고 하는것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이라는 그 어떤 복과도 비교할수 없는 극강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사실 하나 붙들고 하나님을 굳건히 믿으며 주를 위해 살아야하는것입니다.

    기복신앙은 반드시 버려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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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촌각을 다투는 일, 아주 중요한 일들이 있습니다. 다윗에게 세바를 잡는 일은 그런 일입니다. 이런 중요한 일을 아마사에게 맡겼습니다.

    아마사는 누구인가요? 압살롬의 반역 세력의 선봉입니다. 그러니 사실 그는 참수를 당해도 할말이 없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런 아마사를 용서하는것 뿐 아니라 이와 같이 중요한일까지 그에게 맡긴 것입니다. 아마사는 이 일을 무조건 해내야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적입니다. 그는 기한안에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합니다. 이런 저런 변명을 할수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그는 하지 못했습니다. (혹은 하는척 하며 하지 않았습니다)

    두번째 기회를 얻은자, 은혜를 얻은자에게 이와 같이 중요한 일이 맡겨졌다면 목숨을 거는 마음으로, 반드시 실현시키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반드시 해내야합니다.

    주님께서 제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죄인인 나를 용서하시고 ‘복음’이라는 너무나 중요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복음에 빚진자 입니다’ 나는 이 일을 반드시 이뤄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기회가 무색하지 않도록 맡기신 사역에 올인 하겠습니다. 내게 허락하신 ‘인생’이라는 기한안에 반드시 맡겨주신 ‘목회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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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은 또 은근슬쩍 넘어가면서 징계 하려고 합니다. 암논의 잘못을, 압살롬의 잘못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바로 잡지 않고, 하는듯, 안하는듯 징계하다가 수많은 어려움을 마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요압의 잘못을 또 은근슬쩍 ‘구렁이 담넘어가듯’ 징계하려고 합니다.

    다윗은 정확하게 그를 불러서 그가 압살롬을 죽인 까닭과 그가 다윗을 협박했던 사건들을 지적하며 징계 했어야 합니다. 정확하게 선을 그어주고 정의를 실현했어야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 그런 과정 없이 은근슬쩍 요압을 군대 장관에서 내리고 아마사를 세우는 일로 요압에게 무언의 징계를 실천합니다. 또한 더 나가서 가장 중요한 ‘반역자 세바 잡는 일’에도 요압 자신이 아닌 아마사, 그리고 아비새를 불러서 시킵니다. 이 또한 요압을 향한 다윗의 은연한 징계였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나요? 요압이 회개하고 다윗앞에 와서 사과를 구했을까요? 아닙니다. 결국 암논과 압살롬때처럼 또 불필요한 분노와 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요압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마사를 죽여버리는것입니다.

    과거에서 배우지 못하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과거의 실수를 답습하는 사람만큼 답답한 사람이 없습니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인생이 되야겠습니다.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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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실래 같은 사람이 제 곁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익을 위해 서로 다투는 유다사람이나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서(41-43절)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것 같이 보이는 바르실래는 그래서 더욱 빛나보입니다.

    요즘 주로 혼자 사무실에서 일하다보니 간혹 ‘동역자’들이 그리울때가 있습니다. 물론 성도님들이 옆에서 도와주시기 때문에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간혹 함께 일했던 ‘동료 목회자’들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제가 함께 동역했던 ‘담임목사님’들도 생각이 납니다. 저는 과연 그분들께 ‘바르실래’같은 사람이었을까요?

    바르실래 같은 사람이 되야겠습니다. 계산없이 동역하는자! 욕심내지 않는 동역자! 진심으로 함께 일하는 동역자! 사랑과 충성의 동역자가 되야겠습니다! 그리고 내 주변에 바르실래 같은 사람을 만나게 해주시길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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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늙은 왕이 젊은 아들을 죽이고 계속 왕위를 누리는 이야기들을 우리는 역사의 기록속에서 간혹 만나곤 합니다.

    그러나 바르실래는 다릅니다. 자신을 부르는 다윗왕에게 “저는 이제 늙어서 짐 말고는 아무것도 할수 없습니다!”(35절) 라고 자신을 한껏 낮추어 말합니다.

    과도한 욕심은 사람을 추하게 만들고, 건강한 초심도 잃게 만들고, 넘겨야 할때를 모르게 만듭니다. 이런 욕심은 이미 이뤄놓은 위대한 업적의 진정성 마져 훼손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간혹 기업도 휘청대고, 교회도 휘청댑니다. 젊은시절 그들이 이뤄낸 위대한 업적마저 그 가치가 훼손되기도 합니다.

    팀켈러 목사님의 소천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분의 살아 생전 기르침은 수많은 이들에게 귀감과 도전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그분이 리디머교회를 은퇴하실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결정에 응원과 감사를 표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분은 한국의 ‘누구들’처럼 교회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물러나기를 거부하거나 교회를 사유화 하려 하거나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한번 주님 곁으로 가신 팀켈러 목사님을 생각하며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저도 제 자리를 아는 인생, 욕심부리지 않는 사람이 되야겠습니다. 알잘딱깔센, 혹은 낄끼빠빠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써놓고 보니까 이렇게쓰는게 맞나 싶은데 한번 써보고 싶었습니다. ㅋㅋ)

    있어야할 자리에서, 있어야 할 때에, 해야할 일은, 깔끔하고 센스있게 해 놓고 빠지는 사람!! 더 하라고 말해도 있어야할 때와 사라져야할때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 주님을 위해 일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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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이 길갈로 건너갈 때 김함도 그와 함께 건너갔습니다.(40절)

    이제 김함 하기 나름입니다. 신뢰받던 바르실래의 추천으로 그 대신에 김함이 다윗과 함께 복귀의 길에 올랐습니다.

    김함의 시작은 다행(?)스럽게도 바르실래의 힘을 받았습니다. 일종의 ‘낙하산’입니다. 그러나 낙하산이여도 그 다음부터 만들어 내는 인생은 오롯이 자신의 몫입니다. 그러니 그는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우리도 모두 일종의 낙하산입니다. ‘칭의 받은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우리같이 불의한 자들이 주님을 위해 일하는 자가 될수 있었을까요? (대표적인 낙하산이 바로 바울입니다. 예수님 아니었으면 그가 어디 교회 안에 발이라도 들일수 있었을까요?) 그러니 우리도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기회입니다. 은혜의 시간입니다. 그러니 최선과 성실로 살아야겠습니다. 김함이라면 바르실래가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겠죠! 우리는 예수님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하고, 내 자신의 삶에 미안하지 않게 최선을 다해 살아야할것입니다.

    시작이 남들보다 앞서도 게으르고 나태하면 금방 처지기 마련입니다. ‘낙하산’으로 시작한 인생 ‘낙하산’으로 끝내면 안됩니다! ‘정직원’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사는 신앙인 되겠습니다! 칭의 받았으니 성화의 삶에 게으름은 없어야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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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의 종인 제가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기에 제가 오늘 내 주 왕을 맞으러 요셉의 온 집안에서 제일 먼저 나왔습니다. (20절)

    시므이는 다윗이 복귀 할때 서둘러 가장 먼저 다윗을 찾아가 “제가 과거에 왕께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게 참 웃깁(?)니다. 막상 얼마전 다윗이 그렇게 궁을 떠나 도망갈때는 자신이 행한 그 일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윗을 향한 정의 실현이라고까지 생각하는듯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바뀌니까 그때 그 행동이 ‘죄였다’ 라고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시므이라는 사람에게 ‘죄’는 이와같이 제멋대로 입니다. 언제는 죄가 아니였다가 또 언제는 죄가 되기도 합니다. 그냥 자신이 기준이 되고 상황에 따라 ‘선악’이 쉽게 바뀌는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위험합니다. ‘선악’을 구분하는 기준점이 나 자신인 사람이 위험합니다. 시기와 상황과 환경에 따라서 죄를 재정의 하는 사람은 위험합니다.

    죄에 대한 통일된 기준과 일관성 있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죄에 대해서 ‘포스트모더니즘’적 (상대주의적) 시각으로 접근하면 안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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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일 먼저 나왔습니다.”(20절)

    시므이는 살기위해 제일 먼저 다윗의 귀환길로 마중을 나갑니다. 목숨을 구걸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윗에게 이렇게 어필합니다. “제가 제일 먼저 나왔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합니다. 회개에서 중요한것은 속도보다 진정성입니다. ‘빠른회개’는 어떤 면에서 당연히 좋은 자세 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빠르다 한들 진심이 없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용서를 구할때도 그런 얘기를 농담삼아 합니다. “사과에 영혼이 없는데?!?” 진정성이 없다는 것이죠!

    시므이는 진정성 있는 사과를 위해 다윗을 찾아온것이 아닙니다. 속도는 빨랐지만 가장 중요한 진심이 결여됐습니다. 결국 차후에 솔로몬의 때에 시므이는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죽게 됩니다.

    회개는 속도전이라기 보다는 진정성에 그 방점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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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다윗에게 섭섭할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비새는 시므이를 보자 대신 분노해주며 “죽여야합니다!”(21절) 라고 말합니다. 이는 다윗을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느닷없이 그런 아비새를 꾸짖습니다.

    므비보셋은 궁으로 돌아와 추궁하는 다윗 왕에게 그간 일어났던 사건의 자초지종을 진실되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반응은 시큰둥합니다. “그랬구나!”라고 반응하는것이 아니라 “어찌되었든 그냥 시바랑 가진것을 나누라!”므비보셋 입장에서는 약간은 찝찝한(?)반응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아비새도, 므비보셋도 그러므로 섭섭할수 있습니다. 두사람 모두 '다윗의 사람'이길 자처하는 사람이고, 최선을 다해 충성하고 섬기려는 마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자칫 이 사건들 속에서 다윗은 그것을 몰라주는것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섭섭함이라는 감정에 압도되고 속으면 안됩니다. 실제 인간적으로 섭섭할것 같은 이 순간에도 다윗이 가장 신뢰하는 군사중에 한명이 아비새인것은 변함이 없고, 여전히 죽이지 않고 왕의 상에 함께 먹게 하는 자는 시바가 아니고 므비보셋입니다.

    섭섭함이라는 감정에 압도되면 변함없이 누리고 있는 이와같은 은혜를 잊게 되고, 은혜를 잊으면 감사를 상실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충성과 믿음을 잃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도 때로는 주변 지인 그리고 심지어 사랑하는 하나님께 이런 인간적으로 ‘섭섭한’ 마음을 느낄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에 절대 압도 되서는 않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신뢰를 오해해서도 안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해 가진 섭섭한 마음을 내려 놓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가진 섭섭한 마음을 내려 놓아야겠습니다. 상처에는 병균의 침투가 훨씬 수월하듯 ‘섭섭함’의 마음에는 사탄의 침투가 훨씬 수월한 법입니다. 섭섭함이 아닌 감사로 사는 하루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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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지금은 압살롬 때문에 이 나라에서 도망치셨다!” (9절)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하라고 했습니다. 압살롬이 선봉에 섰지만 혼자는 아니었습니다. 그 옆자리를 지킨 자들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며 리더들’이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공범입니다.

    한때 연예인들이 악플(?) 때문에 자살하는 일들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많은 이들이 ‘악플러’에게 온갖 욕설과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결국 저녀석 때문에 죽은거야!! 저 사람은 선을 넘었어!!” 그러나 알고보면 그들 중에도 악플은 단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국 경찰 조사에서 무더기로 악플러 들이 잡혀오면 그들은 얼굴을 가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뭐 별거 한거 없어요! 그냥 동조 한것 뿐이예요!! 진짜 나쁜 사람은 저 사람이예요. 저 사람이 시작했어요! 저 사람 때문이예요!”

    사건이 터지면 이와 같이 ‘최악질 그놈(?)’ 뒤에 딱 숨습니다!!! ‘압살롬’ 뒤에 숨으면서 자신은 아니라고 말하는것이죠.

    일진들이 말합니다. “저는 한게 없어요!! 다 쟤가 한거예요! 그냥 본것 뿐이예요!” 교사도 말합니다. “제가 교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일일이 어떻게 다 압니까?!” 경찰도 말합니다. “조사해봤지만, 사실 아이들 자라면서 다 일어나는 뭐 그런 일인줄 알았죠!!” 가해자 엄마도 말합니다. “우리애가 그럴리가 없어요! 크면서 다 그러는거죠!”

    어쩌면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악행에 공범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말로, 생각으로, 인터넷의 클릭으로, 댓글로, 소문으로, 비웃음으로, 무관심함으로, 침묵으로, 수동적 참여자가 됨으로 공범일지도 모릅니다.

    악한 시대에 흐름을 쫓아 공범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하며, 잘못이 드러나면 그 안에 나의 죄가 있는지 점검하고, 참된 회개와 회복을 위한 발빠르고 용기있는 시도를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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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한 사람들이 움직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뜻 움직였다가 어떤 부정적 결과를 마주할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움 가운데 아무도 다윗을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답답한(?) 다윗이 먼저 길을 열어 줍니다. 그들이 용기를 내서 다가올수 있도록 문을 열어줍니다.

    형제이면서도 자신을 버린 유다에게는 서둘러 자신을 데리러 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마사 같은 압살롬의 군대장관에게는 자신의 군대장관 자리를 먼저 제안 합니다. 용서와 화해의 길을 먼저 열어주는것이죠. (12-13절)

    이는 화해의 지혜입니다. 관계회복을 만들어 내는 성숙한 자세입니다.

    우리는 자주 내가 피해자이기 때문에 무작정 기다리는 화해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가해자가 너무 미안하고, 두려운 나머지 화해의 ‘화’자도 끄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들이 먼저 다가와 용서를 빌고 화해하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게 안된다면 예수님의 ‘화평의 마음’을 생각하고 먼저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의 문을 열어주는 다윗 같은 마음도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우리 예수님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때 먼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그분이 먼저 용서와 화해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화평’을 선행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본받아야겠습니다.

    3

    다윗왕은 온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되돌려 한마음이 되게 했습니다. (14절)

    분열을 하나로 묶는 힘은 용서와 사랑입니다. 다윗은 자칫 분열되고 깨질수 있는 이스라엘을 다시 하나로 묶습니다. 자신을 대적했던 민족이나 사람들도 품어 버립니다. (물론 차후 필요한 공의위 심판을 집행하기도 합니다)

    사랑과 용서가 가진 힘은 놀랍습니다. 안될것 같은 일을 가능하게 합니다. 안변할것 같은 사람도 사랑과 용서 앞에서 변하게 되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 앞에 나같은 사람도 변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로 변했습니다. 할렐루야!

    사랑과 용서의 실천은 분열을 하나로 바꾸고, 내가 가는 곳마다 기쁨과 연합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이며 닮아야만 하는 성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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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요압은 “왕께서 압살롬 때문에 통곡하며 슬퍼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1절)

    이미 업질러진 물입니다. 요압은 사로잡을 수 있는 압살롬을 결국 죽였습니다. 자신이 발로 차버린 것입니다. 하지 말라는 일을 했습니다. 그 파장은 생각보다 컸습니다. 승리의 기쁨으로 덮힐 줄 알았으나 다윗의 슬픔은 덮히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의 죽음 때문에 ‘다윗군대의 승리’는 소리내어 기뻐하지 못할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내 실수가 그냥 은근슬쩍 덮힐것이라고 생각할때가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하는걸 아는데 그냥 일단 하고 봅니다. ‘아무도 모를꺼야!’ 혹은 ‘뭐 알아도 그냥 지나가겠지 뭐!’ 하는 안일한 생각들이 있는 것입니다.

    일단 저지르고 보는 이런 태도를 경계해야합니다. 대충 넘어가게 될것이라는 사탄의 거짓에도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불필요한 비극을 만들어내는 ‘죄의 시작’을 분별하고 경계해야겠습니다.

    2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는데 왕이 밖으로 나가지 않으시면 밤이 오기 전에 왕곁에 남아 있을 군사가 한명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왕이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당한 모든 재앙보다 더 심한 환난이 될 것입니다.” (7절)

    (자신이 이 모든 상황의 원흉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 본다면) 요압이 하는 말 중에도 맞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말투와 태도가 거슬리는것도 사실입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다윗이 이해할수 있습니다. 상황을 알수 있습니다. 어쩌면 요압은 ‘자기방어기제’를 발휘해 더 쌔게 나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자칫 압살롬을 죽인 분노를 오롯이 당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말하는건 아닙니다. 말에는 지혜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톤도 중요하고, 단어선택도 중요합니다. 지혜는 그 전달하는 방법도 지혜로와야한다는 말입니다.

    주변과 이웃에, 심지어 가족과 사랑하는 이에게 ‘조언’을 할때, 꼭 해야할 말을 하는것이라 할지라도 말투와 전달방법, 단어선택과, 표현에 있어서 지혜롭게 전달해야겠습니다. 사랑에 기반하고, 겸손하며, 정죄하지 않고, 격려하며, 그러나 단호하게 말할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겠습니다.

    3

    언젠가 자녀가 죽었는데 그 주일에 강단에서 설교하신 목사님을 뵌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천국의 소망을 가진 자라지만 이 땅에서의 갑작스러운 헤어짐은 누구에게나 슬픔을 가져다 주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꿋꿋이 말씀을 이어 나가셨습니다. 하고싶거나, 회복됬거나, 기쁨으로 서는것은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당신께서도 위로를 받고 계셨고, 다시 걸어갈 힘을 얻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요압의 말을 듣고 어쩌면 꾸역꾸역(?) 성문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회복됬거나, 기쁘거나, 하고 싶어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다시 다윗의 왕의 사명은 시작됩니다.

    때로는 다 회복되서 일어나는것이 아니라 일어났더니 회복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꾸역꾸역(?)의 마음이지만 일어나 보니 여차저차 시작되는것입니다. 그렇게 부르심의 자리에서, 일상에서 실제적 회복이 시작됩니다.

    다 털고 일어날수 없어도 주님 앞으로 나와서 다시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회복되지 않았어도 일어나 있어야할 자리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명 의 자리로 돌아갈 때 회복하실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모두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힘들지만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회복하실 것입니다. 다시 멈춘것 같은 인생이 출발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재 출발하는 열차가 다시 출발할때처럼 요란스럽고 느릴수 있을지언정 결국은 다시 예전처럼 혹은 그 보다 더 빨리 달리게 될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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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왔을 것이다!” (27절) 이때까지 아히마아스가 다윗에게 만들어준 자신의 이미지 입니다. 항상 좋은 사람으로 마주하고, 말할때마다 다윗이 좋아할만한 일만 전했을 것입니다. 행여라도 안좋은 소식은 자신의 입술로는 전하지 않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은 막연히 아히마아스를 보는것만으로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소식을 가지고 오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것입니다.

    만들어 내는 이미지! 사람들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는 이미지에 집착(?)하여 사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나를 향한 타인의 시선과 정의’에 목메어 사는 경향이 있는것이죠. 살다보니 ‘좋은 사람’으로 인식되는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타인에게 잘보이고 싶은 마음으로 메여서 사는것입니다. . 사실 그 동기 자체가 나쁘다고 할수는 없습니다. 정말 좋은 사람이 되고싶어서 그런것일수 있지요. 거짓말로 내 자신을 꾸미고 뒤에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면야 ‘좋은 사람’으로 타인에게 인정받는거 자체가 나쁜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간혹 선이 어딘지 모르고 ‘타인의 환심’을 살려고 메여 살다가 진짜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해야할말을 하지 못하거나, 거짓된 자신에게 묶여버리는 인생이되는 사람들도 봅니다. ‘가면인생’ 입니다.

    ‘좋은 사람’ ‘좋은소식’ 다 좋습니다. 그런데 이왕이면 진심으로 좋은 사람, 진실을 전할수 있는 사람, 외식과 가식으로 인공적인 나를 만들어 광고하듯 살아가는 인생을 조심해야겠습니다. 자칫 ‘좋은사람’ 되고 싶어서 참 목회자로서 해야할 말도 못하는 목사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2

    “어린 압살롬은 무사햐냐?” (29절)

    “성문 위쪽 방으로 올라가 통곡했습니다.” (33절)

    다윗은 이와 같이 소식을 전하는 자들을 민망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아비의 마음으로 생각하면 다윗의 마음이 아예 이해가 안되는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은 동시에 목숨걸고 전쟁터에 나간 자들의 왕이며 리더입니다. 지금 다윗을 위해 목숨을 건것은 다윗의 아들이 아니고 군사들입니다. 오히려 아들이 다윗과 군사들의 목숨을 노린 자 입니다. 그러니 소식을 전한 자들은 다윗의 이러한 반응 앞에 상당히 당황하고 민망해 했을 것입니다.

    리더의 시각으로 가만히 이 사건을 보고있자니 리더는 항상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됩니다. 입술에 “압살롬은 괜찮니?” 가 움찔거려도 그 전에 “우리 군사들은 괜찮은가?”를 물을 수 있는 리더적 지혜와 결단, 상냥함(?)도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MBTI 논할게 아니라 리더는 리더로써 상황가운데 옳은 반응을 해야합니다.

    반대로 아히마아스의 시각으로 묵상해 보자니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음 넓게 이해해주면 어떨까?!!! 마음 한켠에 서운함이 일어나는것이야 어쩔수 없다손 치더라도 심호흡 한번 크게 하고 ‘아빠 다윗’의 마음을 잠시나마 이해해주면 어떨까? 그렇게 할수만 있다면 ‘섭섭함’ 혹은 ‘서운함’에 휘둘려 관계가 깨어지는것을 막아볼수 있을 것 같기도합니다.

    3

    “내가 너 대신 죽을 수만 있었다면..” (33절)

    느닷없고 뜬금없지만 이런 생각이 듭니다. 대신죽는것은 진짜 어려운 일입니다. 말을 상대적으로 쉬울수 있으나 진짜 대신 죽는거는 완전히 다른 경우겠죠! 다윗도 애초에 대신 죽고 싶었다면 전쟁 안하고 그냥 항복하면 될일입니다. 다윗의 마음이야 의심하지 않겠지만 실제로 대신 죽는것은 그만큼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었습니다!!! ‘대신죽는다’ 하는다 느닷없이 그래서 예수님이 생각납니다. 이 쉽지 않은 일을 예수님 대신 해주셨구나. 그것도 내가 아직 죄인일때 대신 죽어주셨구나! 새삼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감동하게 됩니다.

    날 위해 대신 죽어주신 예수님을 위해 사는 하루가 되야겠습니다.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내 안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사신것입니다!” 아멘! 주를 위해 열심을 내겠습니다. 주님께서 하실만한 일에 올인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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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람들이 자신의 주변으로 모이고, 아버지는 도망가고, 수많은 군사와 함께 기세등등하게 전쟁으로 나갈때 압살롬은 ‘이제 거의 다 왔다!’ 생각했을것 같습니다. 꿈꾸던 일이 이루어지는것에 상당히 고무되어있었을것 같습니다. 그러나 허망하게도 그 끝은 비참한 죽음입니다.

    일이 잘되면 잘못가고 있는지 잘 모를때가 있습니다. 모든게 다 잘되니까 옳은 길이라고 착각하는것입니다. 일이 이쯤되면 주변에서도 말리지 않습니다. 옳은길 아닌거 같아도 현재 일이 너무 잘 되고 있으니까 선뜻 말리지 못하는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든 일이 잘못되면 발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모두 자기 장막으로 도망쳤습니다(17절)

    일이 잘되는게 ‘옳다’는 싸인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일이 순적하게 흘러 갈수록 경계하고, 점검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펴야합니다. 형통하면 더욱 기도해야합니다. ‘성공의 목전’까지 아무 일이 없어도, 심지어 ‘성공’한것같이 느껴지는 순간을 만나도 그것이 곧 ‘옳은 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것은 아닙니다.

    물론 오늘 나의 인생이 형통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형통함보다 더 기대하는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입니다. 하나님의 깨닫게하심입니다. 걸음과 과정마다 순결하게, 정직하게, 바르게, 의롭게 행하고 형통의 순간마다 하나님께 점검받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2

    ‘기념되는 인생’

    ‘기억’된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건 ‘어떻게 기억되는 인생인가?’ 하는 것이겠죠!! 본인이 기억되고 싶어서 ‘기념비’를 세워놓았으니 사람들은 기념비를 볼때 압살롬을 기억할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억이 아름답거나 긍정적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압살롬이 이런식의 기억을 위해서 기념비를 세운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생각하며 좋은 기억을 해주면 좋겠다!’ 아마 이것이 그의 바램이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기념 한다면 좋은 기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억하고 있으나 아무런 감흥이 없거나, 기억하고 있으나 완악하게 기억하고, 어리석게 기억하고, 추악하게 기억한다면 슬픈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념할때마다 그분의 사랑에 감동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게 됩니다. 그분은 선하시며 인자하시고, 그분은 거룩하시며 위대하십니다.

    예수닮은 인생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그런 ‘기념비’적인 삶을 살고 싶습니다.

    3

    “그러자 아히마아스는 들길로 내달려 에티오피아 사람을 앞질렀습니다.” (23절) 무엇을 그토록 하고 싶었던 걸까요?

    젊어서는 하고 싶은 일도 많습니다. ‘이거’하면 잘될것 같고 성공할것 같습니다. 남들보다 앞서고, 먼저해야할것 같습니다. 지름길로 내 달리면 더 찬란한 미래가 만들어 질것 같습니다. 높은 사람 눈에 들고, 유능한듯 보이면 더욱 인정받을것 같습니다.

    그러나 앞질러 가도 보장되는것은 없습니다. 먼저한다고 해서 언제나 가장 최고가 되는것도 아닙니다. (최초가 언제나 최고가 되는것은 아닙니다.) 유능한 사람의 눈에 든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되는것도 아니고, ‘좋은소식’을 알고 있다고 해서 다 ‘좋은결과’를 마주하는것도 아닙니다. (주식하는 사람들이 말하더라구요 맨날 ‘좋은소식’이라고 하는데 나중에 물어보면 ‘망했다’ 해요. 젤 먼저 뛰어들었는데 제일 많이 피를 보았다?! 하더군요!)

    하나님의 속도에 맞추고, 내게 맡겨진 일에 성실하며, 쓸데 없는 고집 부리지 않고, 바르고 옳은 일을 하고, ‘좋은일‘에 설레발 치지 않고, 쓸데없는 경쟁하지 않고, 꼭 해야할것만 같은 일을 못하게 되도 실망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는 지혜를 아히마아스에게서 배울수 있어서 좋습니다!

    지름길 내 달리는게 아니라 정도(正道)를 내 달리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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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신전심’ 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생각합니다. 가장 위기의 순간에 서로를 향해 생각할수있다는것, 그리고 그것을 행동에 옮길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평안할때야 누구든 서로 챙길수 있습니다. 모든게 풍족하고, 모두가 안전할때는 서로 나서서 돕고, 서로 챙기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합니다. 그러나 위험하고, 어렵고, 부족하면 서로를 챙기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다윗과 군대들은 목숨을 건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보호하며 또 돕기를 원합니다. 진심입니다. 다윗은 숨어 들지 않고, 군사들은 다윗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가족은 서로를 챙깁니다. 형제자매가 서로를 챙깁니다. 어려운 시기에 이웃들 간에 서로 챙깁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서로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서로의 이익을 위하여 움직입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는 어떤 모습인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지금 경험하는 바우교회와 성도님들은 다윗과 군대들 같습니다. 얼마나 위하고, 돕고, 기도하고, 함께 하는지 모릅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이러한 공동체가 계속 이어지길 기도합니다. 이러한 공동체의 초심이 사라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저 또한 다윗과 같은 리더가 될수 있기를 기도하며 또 기도합니다.

    2

    “나를 봐서라도 어린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해 주라!” (5절) 좀 늦은 감이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면 진작에 불러다가 혼낼것은 혼내고 책임질것은 지게 하고, 그리고 다시 회복할수 있게 했어야합니다. 본인 혼자 맘으로 사랑하고 생각하고, 아껴봐야 아무도 모릅니다. 소용이 없습니다. “내 아들좀 살리도!” 라고 말하는 다윗의 이 마음을 압살롬은 여전히 알길이 없습니다. 아마 죽임당할때까지 알지 못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지금 표현하세요. 미안하다는 사과를 지금 하세요. 해야할 말을 미루지 마세요. 아끼면 아낀다고 말해주세요! 소중하면 소중하다고 말해주세요! 혼자 생각하면 그 사람은 모릅니다. 모를 뿐만 아니라 오해가 쌓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데 다윗처럼 결국 적이되고 원수가 되버릴지도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가족이, 부모와 자녀가 그렇게 원수처럼? 지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뒤에서 표현하는 사랑, 뒤에서 표현하는 소중함!! 그런거 말고 앞에서, 지금, 더 늦기 전에, 충분히 표현해야겠습니다. (다윗이 애초에 그렇게 했으면 지금 오늘 본문같은 사건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3

    “나를 위해 어린 압살롬을 건드리지 않도록하라!’ 하고 명령하신 것을 저희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12절) 요압은 한 군사로부터 상기받습니다. ‘압살롬은 죽이면 안된다!’

    그러나 요압은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일을 준행합니다. 어쩌면 ‘옳은 일’이 아니라 그냥 자신의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한 일 일수도 있습니다.

    요압은 멈출수 있었습니다. ‘한 군사’가 왜 요압에게 압살롬의 상황을 말했을까요? 충분히 생포할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죽이라고 알려준게 아닙니다. 그런데 요압은 그 모든 기회를 차버립니다. 그렇게 하지 말아야하는 것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상기’ 시켜주실때가 깨달을 시간입니다. 멈춰야하고, 하지 말아야할 때입니다. 이 기회마져 놓치면 요압처럼 실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전범’들을 알고 있습니다. 전쟁범죄자들은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 취해서 자신들이 마땅히 하지 말아야할 비 인간적인 일까지 자행한것입니다. 세상은 아무리 ‘전쟁’이라 하지만 이들을 ‘죄없다’ 하지 않습니다.

    하지 말아야하는 일, 이미 하지 말아야한다고 알고 있는일은 하지 말아야합니다. 상기되는 기회까지 있었다면 더더욱 하지 말아야합니다.

    말씀이 ‘상기’시키는 경고의 말씀을 받아 더더욱 하지 말아야할 일을 하지 않는 하루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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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각자의 역할이 너무 소중합니다. 후새의 역할, 사독과 아비아달의 역할,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의 역할, 그리고 그 소식을 전하는 ‘한 여종’의 역할! 그리고 숨겨주는 바후림에 있는 “어떤 사람”의 역할, 누구하나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맡겨진 일을 감당해야합니다. ‘구원의 메세지’를 전달하는데 있어서 어떤 자리, 어떤 역할이든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해야합니다. 내가 그 역할을 감당하지 않으면 거기서 메세지가 끊어집니다.

    맡겨진 일에 있어서는 포기함 없이 완성해내는 사람이 되야겠습니다.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라는 관점 안에서도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해야겠습니다.

    2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을 통해 일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들은 다윗과 추종자들은 요단강을 건넙니다. ‘어디까지 후퇴해야하는가?’ 아마 강을 건너면서 더욱 선명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발목을 차는 물, 무릎에 차오르는 물, 허리를 차오르는 물, 때론 가슴팍을 적시는 물을 느낄수록 ‘비참한 현실’을 뼈져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어디까지 떨어질것인가? 어디까지 후퇴하게 되는가? 요단강을 건너게 될줄이야….’

    그러나 그렇게 요단강을 건너서 좌절에 빠져있을 뭇 이스라엘 백성과는 다르게 아히도벨은 집에 가서 자살을 합니다. 아직 전쟁 시작도 안했지만 결국 자신들이 질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요단강’ 건널때 우리 인생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절망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회복 불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히도벨은 ‘요단강’건너 도망간 이스라엘을 보고 오히려 좌절하고 낙망하며 자살했습니다.

    삶의 마지노선을 넘어서 내려(?)갈때 너무 좌절하지 않아야겠습니다. 여기가 끝처럼 여겨지는 지점을 넘어 후퇴할지라도 낙심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내가 지금 넘어가고 있는 ‘요단강’은 절망의 의미가 아닌 회복의 시작이 될수있다는 것을 믿어야겠습니다!! 오히려 ‘요단강’ 안넘어갔으면 다 죽었고 거기서 끝입니다.

    쉽게 좌절하지 않겠습니다. 쉽게 의심하고 낙망하지 않겠습니다. ‘요단강’ 건넜다고 망했다 선언하지 않겠습니다. “다시 시작입니다!” 선언할수있는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3

    누군가 이렇게 생각지도 않았는데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9절) 이런 도움을 받을때 막 감동이 밀려 옵니다. 힘이 납니다. 세상 참 살만해집니다. 그들이 가져온 음식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가져온 사랑과 관심, 베려 때문입니다. (물론 음식도 중요하죠 ㅋ)

    어제 묵상하다가 이런 나눔을 했습니다. “지쳤으면 쉬세요! 그래야 회복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회복의 비밀 한가지를 더 붙이기 원합니다. 우리는 이웃의 사랑과 관심, 도움을 받을 때 회복합니다.

    내가 이웃이 필요한것처럼, 이웃도 내가 필요합니다. 그들이 말하기 전에 그들의 상황을 먼저 세심하게 살피고 능동적으로 다가가고 도와주는 이웃이 되면 좋겠습니다. 서로서로 좋은 이웃이 되면 서로서로 위로받고 힘을 얻게 될것입니다.

    사랑과 관심이 우리를 회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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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내가 모르는 사이에도 순간 순간 내 생명이 휘청거릴 만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윗이 쉬고 있는 이 순간에도 아히도벨은 다윗을 죽일 완벽한 계획을 짜고 있는것입니다.

    오늘 길을 걸으며 안전하다고 느끼는 그 순간에 어딘가에서 술을 마신 사람이 차를 타고 운전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은 건널목을 안전하게 건넜습니다. 그리고 그가 건너자마자 바로 뒤 따라 오던 한 사람이 그 음주운전차량에 치여 사망했습니다. 그가 10초만 늦었거나 운전자가 10초만 빨랐어도 피해자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어쩔때는 이와같이 진짜 종이 한장차이로 삽니다. 사고를 면합니다.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어떤 위기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나갔는지 모를 뿐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수십, 수백, 수천을 넘습니다. 하루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수많은 생사의 기로를 넘는것입니다.

    다윗은 오늘 삽니다. 이는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이며 은혜입니다. 아히도벨이 아닌 후새의 작전을 선택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4절) 후새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다윗은 그날 하루 그냥 아무일 없이 지나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죽을 위기에서 목숨을 건짐 받은 날이었다는 것까지는 몰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섭리의 손길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오늘을 사는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아무런 사고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자칫 우리가 피해자 일수 있고, 우리가 사고의 대상자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는게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 자체가, 하루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인생의 이 모든 순간을 ‘화양연화’여기며 살아가야겠습니다. 감사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2

    누구에게 ‘좋은 계획’인가?(14절) 경기를 하거나 전투를 할때 탁월한 계획이 있습니다. 이대로만 하면 반드시 이길만한 ‘좋은 계획’이 있습니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요? 상대에게는 정말 ‘나쁜 계획’이라는 뜻입니다. 나에게는 좋은데, 남에게는 그게 오히려 가장 안좋은 계획이라는 뜻입니다.

    압살롬에게 좋은 계획은 다윗에게는 안좋은 계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러한 좋은 아히도벨의 계획을 좌절시켜 버리십니다.

    ‘좋은 계획’이라고 다 좋은게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좋은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편에서, 하나님의 시각에서 ‘좋은 계획’을 선택하십니다. 그러니까 마냥 내 자신에게 좋은 계획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에서 ‘좋은 계획’인지 살펴봐야합니다. 내가 아무리 좋은 계획을 세워도 하나님께는 오히려 안좋은 계획 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섬기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실만한 ‘좋은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목자가 되고 싶습니다!

    3

    ‘대세’라는것은 참 무섭습니다. 아히도벨이 전략을 내놓았을때 “압살롬과 이스라엘 의 모든 장로들이 보기에 이 계획은 휼륭했습니다”(4절)라고 기록합니다. 왕 이하 모두 입니다. 이게 대세입니다.

    그런데 그때 압살롬이 후새를 불러 묻습니다. “네 의견은 무엇이냐?!”(6절) 후새는 대세는 기울었지만 해야할 말이 있기 때문에 담대하게 합니다. 대세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대세를 거스르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말하고 나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오히려 후새의 말이 대세가 되었습니다.(14절) 아히도벨은 역전되버린 이 대세를 다시 바꾸지 못합니다. (대세는 이와 같이 쉽게 바뀌는게 아닙니다)

    아무리 대세라도 그 대세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말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말해야합니다. 대세를 역전시킬수 있어합니다. 대세를 따르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흐름을 역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흐름으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대세'가 우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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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어떻게 네 친구에게 충성하는 것이냐? 어째서 네 친구를 따라가지 않았느냐?” (17절)

    ……. 아무리 생각해도 압살롬이 할 말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너는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이 네 아버지에게 충성하는 것이냐? 너는 어째서 너의 아버지 다윗에게 이렇게 하는것이냐?!” 후새는 강력하게 따지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아닌가요?!

    지금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게 하고 있는일이 가장 ‘패륜’적인 일입니다. 지금 ‘친구’ 논하며 후새에게 뭐라고 할 자격이 압살롬에게는 없어보입니다.

    ‘너나 잘하세요!’

    영화의 유명한 대사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내 눈에 들보를 살펴보는 하루가 되야겠습니다. 나는 혹 뭐 잘못하고 있는건 없는지 지적하기 전에 좀 살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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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께서 택하시고 이 백성들과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선택한 분의 편에 서서 그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18절)

    압살롬은 당연히 자기에게 하는 말인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새는 이 얘기를 압살롬에게 하며 마음속으로는 다윗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후새가 믿기는 다윗왕이 여전히 하나님의 선택이고, 백성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향한 후새의 마음은 아직 꺽이지 않았습니다. 고개는 압살롬을 향해 꺽여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은 아닙니다!! 그는 다윗의 복권을 위해 그 마음이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것은 꺽이지 않는 마음 입니다’ 그리고 이게 요즘 세대를 관통하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일명 ‘중꺽마’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향해서, 하나님의 사람을 향해서, 하나님의 사명을 향해서도 이 정신이 중요합니다. ‘중꺽마!’ 마음이 꺽이면 안됩니다. 눈앞에 마주한 기세가 생각보다 강해도 마음까지 항복하면 안됩니다. 마음이 꺽이지 않으면 결국 승리하게 될것입니다!! 후새도 다윗도 결국 승리하게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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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당시 사람들은 아히도벨이 주는 계획들을 마치 하나님께 여쭈어서 받는 말씀과 꼭같이 여겼습니다.” (23절)

    제가 목회하면서 가장 조심하는 부분중에 하나입니다. 교육전도사 부터 오늘날까지 딱 20년입니다. 항상 조심했습니다. 성도님들은 겸손해서 ‘목회자’가 말하면 잘 듣습니다. 의지합니다. 때로는 대신 결정해주길 원합니다. 무슨 말을 해도 바로 순종할 준비를 하고 오는 성도님들도 계십니다. 그래서 무섭고 놀랍고 조심스럽습니다. 항상 그래서 ‘조언’이라는 영역을 조심했습니다. 쉽게 내 뱉지 않고, 결론짓지 않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왠만하면 ‘사람의 지혜’로 말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간혹 그들이 ‘나의 어리석음’을 지혜로 착각하게 될까봐. 나의 ‘인간적 언어’가 마치 그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릴까봐 기도하고 또 조심하게 되는것 입니다.

    아히도벨에게서는 전혀 그런 모습이 없습니다. 그는 점차 착각한거 같습니다. 결국 그는 원색적이고, 동물적인, 충고라고도 할수 없는 얄팍한 생각들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이 이야기들을 잘 주워 행합니다. 같이 망하는 길로 내 달리는 것입니다.

    ‘조언’하는 자나, ‘듣고 실행하는 자나’ 책임지고 조심해야합니다. 함부로 말하고, 분별없이 실행하면 안됩니다. 내 말과 행동을 하나님께 맡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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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므비보셋이 궁금합니다. 눈앞에 먹을 것을 한트럭 가지고 온 시바보다 자신이 사랑을 베풀었던 므비보셋이 어디있는지 궁금합니다. 뭐하는지 궁금합니다.

    ‘내가 사랑했던, 내가 아껴줬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있는가? 왜 나의 어려움에 동참하지 않는가? 왜 나를 모른척 하고 있는가?’

    사람이 상황이 어려워지고 마음이 어려워지면 내 주변 사람들을 향해 더욱 기대하고, 더욱 실망하곤 합니다. 그들도 나름의 입장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 므비보셋은 나름의 상황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밝혀지지요) 그런데 그런걸 이해하고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나의 상황을 위해서 그들이 일상을 버리고 뛰어 들어오길 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때 양껏 상처받고, 마음에 분노와 미움, 앙갚음의 마음들이 생깁니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사실이지만, 내 인생이 힘들때,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의 인생의 일상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의 치열함과는 다르지만 그들도 그들의 치열함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다 나를 위로하고, 모두가 다 내 중심으로 움직일수 없습니다 . (쓰고 보니까 더 슬프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나의 고난에 함몰되어 나의 이웃을 향한 미움과 실망, 원망과 분노, 앙갚음의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기도에 힘쓰며 하나님 앞에 쏟아내고 하나님의 위로와 인도하심 그리고 회복을 경험하길 기도합니다. 오늘 기대해야할 분은 하나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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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계속 저주를 퍼부었습니다!”(5절) 왜 지금일까요? 왜 시므이는 지금에서야 다윗을 향하여 저주를 퍼붓고 있나요? 다윗이 숨어있었나요? 다윗이 찾기 어려웠나요? 아닙니다. 다윗은 언제나 거기 있었고, 자신을 향해 나오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판결도 해주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함구하고 있다가 지금에서야 다윗을 저주합니다.

    다윗이 약할때 그때 공격합니다. 참 못났습니다. 평소에는 아무말도 못하다가 다치고, 약하고, 아프니까 그때 공격합니다. 이는 ‘싸움의 지혜’가 아니라 ‘싸움의 비겁함’입니다.

    아픈자의 상처를 들쑤시는 자! 다친 자를 더욱 상해하는 자, 눈물 흘리는 자를 더욱 비틀어 짜내는자! 사실 엄밀히 따지면 시므이의 말처럼 다윗이 사울왕의 집안에 피를 흘린게 아닙니다. 그들이 스스로 전쟁가운데 목숨을 잃은것입니다.

    비겁한 싸움꾼이 되서도 안되고, 약자에게 강자가 되어서도 안되고, 상처 입은자의 상처를 공격해서도 안됩니다. “거봐라 꼴좋다!” 하지 말고 원수여도 “어디 다친데 없어요?!” 라고 물을 수있는 사람이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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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지쳐 한곳에 머물러 쉬었습니다!” (14절) 인생이 지치면 좀 쉬어가세요! 어쩔수 없지요. 쉴때는 쉬어야 합니다. 고단하면 쉬어야합니다. 숨을 좀 돌리세요. 눈을 좀 돌려 주변도 보고 여유도 좀 부려 보세요! 쫓기고 있어도 잠깐 쉴수 있습니다. 그렇게 회복을 해야 또 다시 움직 일수 있습니다. 계속 움직이는게 능사가 아니고, 건강한 쉼을 통해 재도약의 힘을 얻어야 합니다.

    지쳤으면 좀 쉬세요! 쉬는게 죄가 아닙니다. (맨날 쉬고 있는 사람은 그만 쉬세욧! ㅋㅋ 당신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ㅋㅋㅋ)

    지친자가 주안에서 안식할때 하나님께서 회복시켜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그 날을 꿈꾸며 움직이겠습니다! 쉬게 하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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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 앞에 내가 은혜를 입었다면 그분이 나를 돌아오게 하시고 언약궤와 그분이 계시는 곳을 다시 보여주실 것이다!” (25절) 라고 말합니다.

    말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뤄질것입니다!”지만 실제 그가 원하는 것은 궁으로 돌아가는것입니다. 그러니 언약궤도 보내고, 사독도 보내고, 아비아달도 보내고 거기다가 후새까지 보내 압살롬의 동태를 정확하게 살피려고 합니다. 다시 돌아갈 의지가 없다면, 그냥 하나님께서 하시는대로 두려고 한다면 굳이 스파이를 보내고, 언약궤를 보내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윗은 돌아가고 싶습니다!! 다윗은 왕궁을 떠나 도망가고 있지만 왕궁으로의 회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뜻대로 될것이다!” 선포하는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으나 하나님의 뜻 앞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기도 하셨습니다. “주님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세요!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

    이왕이면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맞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때 내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복종시키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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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믿어야합니다. “나는 네가 소식을 전해 올 때까지 광야의 나루터에서 기다리고 있겠다”(28절) 또한 “그들의 두 아들, 곧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이 그들과 함께 거기에 있으니 무엇이든지 들리는 대로 그들 편에 소식을 전하여라.”(36절)

    다윗은 사람을 믿습니다. 그들이 적진에서 다윗을 향한 충정을 저버리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 잘못된 정보를 다윗에게 전달하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 사독, 아비아달, 후새, 아히마아스, 요나단 등을 믿는것입니다.

    사람은 믿으면 배신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배신 당한 경험들도 있고, 간혹 배신한 경험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한켠에서는 여전히 사람을 믿어서 힘을 얻고, 도움을 얻고, 보호받고, 축복을 받기도 합니다.

    이웃을, 친구를,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을 믿어줘야합니다. ‘신뢰사회’가 상실되었는데 이러한 사회가 회복되길 꿈꿉니다. 신뢰사회가 회복되면 인간관계에서부터 오는 고단함과 두통이 사라지게 될것입니다! 삶에서 고단한 영역 하나가 줄어드는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니 같이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서로 서로 믿는 사회!! 할렐루야! 이런 사회를 꿈꾸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먼저 믿고 실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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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하여 다윗의 친구 후새는 성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압살롬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습니다” (37절)

    요15:13절에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것보다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후새는 다윗에게 신하이면서 동시에 친구입니다. 그는 어쩌면 목숨을 거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갑니다. 압살롬이 의심해서 죽여버릴 수 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후새는 다윗을 위해 그 위험한 길을 선택합니다.

    좋은 친구! 생각해보면 어릴적 ‘좋은 친구’들이 좀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요즘은 ‘친구’ 만날 시간이 없습니다. 정말 ‘친구’가 있나? 하는 슬픈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목숨을 걸고 함께 뛰어줄 친구가 있는가?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친구로의 삶을 살고 있는가?! 자문도 해봅니다.

    어제 밤 늦게 한국에 한 친구가 연락이 왔습니다. "너 괜찮니?"의 문자였습니다. 한국까지 전해진 달라스의 총격 사건 소식을 듣고 혹 제가 연류되어있을까봐, 저의 지인이 연류되어있을까봐 걱정되는 마음에 연락을 한것입니다! 친구는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친구 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진짜 좋은 친구 되십니다. 하나님께 좋은 친구! 그리고 나에게 허락된 귀한 만남 속에서 ‘좋은 친구’같은 자가 되야겠습니다.

    나의 친구들과 서로 사랑하며 지내고, 이왕 이렇게 된거 좋은 친구도 더 생기면 좋겠습니다. 또 누군가에게 좋은 친구가 되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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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도망가야겠다!”

    우리가 알던 다윗은 없습니다. 골리앗을 향해 뛰어나가던 다윗은 없습니다. 백전노장 다윗, 무엇보다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어딜가나 승리를 경험했던 다윗입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도망가야겠다!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 죽임당할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한없이 유약해지고, 과거의 영광이 무색하리 만큼 쉽게 변합니다. 흔들리기 시작하면 방도가 없습니다. 그냥 무너집니다. 그리고 그 결과 같이 있던 사람들까지 갈바를 알지 못하고 같이 흔들리게 됩니다.

    사람은 경험으로, 지식으로, 능력으로, 영광으로 나를 지키는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나를 지키는것입니다. 나의 것을 의지하면 과거의 영광과 능력, 지위와, 경험과, 지식과 상관없이 순식간에 변하고, 유약해지고, 방황하고, 도망가버립니다. 과거에는 용맹했는데 오늘 전혀 다른 사람처럼 살수 있습니다.

    과거에 교회를 섬기던 지식과 경험, 능력과 성취의 기억으로 오늘 ‘개척교회’를 섬기면 새로운 고난 앞에 순식간에 두려움에 휩싸이고 도망가고 싶어질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야합니다. 그래야 두려움으로 쓰러지지 않습니다.

    어제 하나님과 함께 했다면, 오늘도 하나님과 함께 해야하고, 내일도 하나님과 함께 해야합니다. 그래야 어제 주님으로 인해 용맹하던 나로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수 있습니다. 어제 이겼던 ‘골리앗’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이길 수 있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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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아침에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느날 아침 갑자기 왕은 도망가야한다고 말합니다. 궁을 떠나야한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집을 떠나야한다고 말하는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삶의 터전을 떠나는일? 그건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일이 하루 아침에 임하리라는 생각도 사실 잘 못합니다. 그런데 다윗의 신하들은 그렇게 다윗과 함께 길을 떠납니다. 잇대라는 이방에서 망명온 사람 조차도 다윗과 함께 도망의 길에 오릅니다.

    다윗에게서 눈을 돌려 잠시 ‘신하’들의 모습만 놓고 본다면 참 귀한 사람들 입니다. 여차하면 그냥 모른척 하거나 안가면 그만 입니다. 심지어 잇대한테는 다윗이 따라 오지 말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러니 안가도 됩니다. 익숙한 곳에 머물러도 됩니다. 그러나 ‘주인’이 가니까 그들도 그냥 따라 나서는 것입니다.

    충성은 이런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리더가 바른 길을 선택해야합니다 .그러니 항상 리더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하나님을 향한 충성은 죽기까지 따르는 충성입니다. 계산하지 않는 충성입니다. 삶의 터전 마저도 떠날 수 있는 충성입니다. 다행인것은 우리 하나님은 다윗처럼 실수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엄한 곳으로 이끌지 않으십니다. 나의 리더 되신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 해야겠습니다. 주님만 따라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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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잇대는 외국에서 왔고, 불과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측근 누구보다도 더 진정성 있는 추종자가 됩니다. 출신과 배경, 시간과 상관없이 진정성있는 자세가 다윗에게 가장 신임받는 한 사람으로 서게 만들어주는것입니다.

    [마20:16, 우리말성경] 이처럼 나중 된 사람이 먼저 되고 먼저 된 사람이 나중 될 것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제자는 ‘모태신앙’이라고 보장되는것도 아니고, 초신자라고 해서 무시될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출신, 배경, 시간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의 진심을 보십니다. 그리고 순장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십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최측근(?)이 될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세상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진실된 제자로, 가장 열정적인 추종자로 살아가야겠습니다! 더이상 신앙의 시간과 신앙적 출신과 배경으로 자랑하지 않겠습니다. 진정성으로 승부보는 신앙인이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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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년입니다. 압살롬이 준비한 시간입니다. 부지런하게, 지혜롭게 민심을 훔치고, 다윗을 깍아 내리는데 쓴 시간입니다.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긴 시간동안에 결국 해야할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사건이 일어났을 때부터 다시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이고, 다시 왕궁으로 불러들이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시간의 중요성을 알지만 간과할때가 참 많습니다. 하루 하루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할수 있는 일이 너무 많다고 말하고, 해야할 일도 너무 많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몇년이 지나고 나서 여전히 그대로인 경우가 태반입니다.

    지난 수년의 시간동안 해야할 일을 하나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이를 갈고 준비한 사람들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할일도 빼앗기고, 성취했어야할 일도 전혀 이루지 못하고, 성장도 못하고, 후퇴하는 인생이 되기도 합니다.

    시간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면, 시간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면 그 시간을 중요하게 써야합니다. 가치 있는 시간을 가치있게 써야지 가차없이 낭비하면 안됩니다.

    오늘 해야할 일을 해야합니다. 주어진 시간에 완수 해야합니다. 미루면 안됩니다. 허송하면 안됩니다. 시간을 성장하는데 쓰고, 성취하는데 쓰고, 성공하는데 쓰고, 성실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4년후에 변한 모습을 기대합니다! 나의 수년후는 오늘과는 달라야합니다. 성장한 모습이여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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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하15:7-8, 우리말성경]

    7 4년 만에 압살롬이 왕께 말했습니다. "헤브론에 가서 제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십시오.

    8 왕의 종이 아람의 그술에서 살 때 '여호와께서 저를 예루살렘에 다시 가게 해 주시면 제가 여호와를 섬기겠다' 고 서원했습니다."

    막아야하지 않을까요? “너는 왕의 자리를 이어야할 자가 아니냐?” “조금 더 자숙하고 차후에 때가 되면 왕의 기름부으심을 받아야하는것 아니냐?” 실제 압살롬은 형들의 죽음으로 장자의 역할을 해야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여호와를 섬기러 헤브론으로 가는것은 깊이 상의해봐야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막지 않고 “평안히 가라”(9절)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반역이 일어나고 나라가 혼란을 겪고 다윗의 노년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막아야할 일은 막아야합니다. 13:27절에도 왕자들을 요구하는 압살롬의 요구를 막지 않았기 때문에 암논이 바로 거기서 죽임을 당한것입니다.

    막아야할 일을 막아야할 때 꼭 막아야합니다. 우리 주변에 ‘막아야할 일’은 분별하고 더 늦기전에 막아야합니다. 막는것은 거절이 아니고 지혜일수 있습니다. 보내주는것이 응원이 아니라 막는것이 응원일 수 있습니다. 막는것이 살리는 길일수 있습니다. 오늘 말려야하는 사람, 말려야 하는 일을 분별하여 막는 하루가 되야겠습니다.그것이 설령 ‘나 자신’일지라도 말려야하면 말려야겠습니다. “가지 마라! 하지마라!” 해야할 말을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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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살롬, 그는 “흠잡을 데가 없는’ 사람입니다. (25절) 외모가 말입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외모가 출중하고, 드러나는 것이 흠잡을데 없어 보여도 내면이 바르지 못하면, 영혼이 바르지 못하면, 진심이 바르지 못하면 ‘흠이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내면의 흠까지는 잘 못살핍니다. 또한 외면의 모습이 너무 화려하고, 예쁘고, 멋지고, 탁월하면 모가난 내면이 보여도 크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진심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모의 흠잡을데 없는 모습으로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나는 외모를 버렸다!” 이것이 사울왕을 버리고, 이세의 첫째 아들을 차기 왕으로 선택하지 않을 때 하셨던 말씀입니다.

    내면에 흠이 없는 인생이 되기를 힘써야합니다. 정신이 바르고, 행동에 정직한 진심을 담아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외모로 유명해지는 자 보다 내면으로 유명해지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내면에 흠이없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지는 인생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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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살롬의 자녀 이야기도 나옵니다. “딸의 이름은 다말이었고 외모가 아름다웠습니다!” (27절) 아마 아빠 닮았겠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 집안 자랑할게 외모밖에 없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합니다.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이 외모 말고는 없기 때문에 자꾸 외모 얘기만 하는것 같이 느껴집니다. 원래 그 사람을 설명할 때 가장 큰 특징이 되는 것으로 설명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압살롬도, 압살롬의 딸도 가장 먼저 붙는 형용사가 외모관련 입니다.

    이쯤되니 나를 가장 잘 표현하는 형용사!, 나를 자랑하는 형용사가 뭘까 생각해봅니다. 누군가가 나를 정의할때 “외모가 아름다웠습니다’ 가 아니라 (물론 저의 경우에는 애초에 해당사항이 없는 형용사이긴 하지만 ㅋㅋ 아무튼) ‘충성의 종’ 혹은 ‘기쁨의 종’, ‘성실한 종 입니다!’ 라는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자랑할것은 나의 외모가 아닙니다. 내가 든 가방, 내가 타는 차, 내가 사는 집, 내가 입는 옷, 나의 배경, 나의 인맥, 나의 지위, 나의 능력도 아닙니다. 자랑해야하는것은, 나를 꾸미는 대표적인 형용사는 ‘하나님의 사람’ 이라는 타이틀(?)인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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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압의 진의가 드러납니다. 그는 압살롬에게 큰 관심이 없어보입니다. 이 일을 통해 다윗이 자신을 아직도 총애하는지, 자신의 입지는 아직도 건제한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죠. 그런데 자신의 입지가 아직도 건재하다는것을 확인했으니 돌아온 압살롬에게 굳이 신경쓸 필요가 없습니다.부른다고 찾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요압같이 나를 위한 꿍꿍이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때로는 나의 유익을 위해 움직이다가 본이 아니게 남들도 유익을 누리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그런 계획으로 하는것은 아닙니다. 그저 나 잘되려고 한것인데 우연찮게 타인도 유익을 얻은것 뿐입니다. 요압이 딱 이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바람직 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에 최종 목적이 ‘나의 유익’이라면 바람직 하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을 상처입히게됩니다. 오늘 압살롬의 말처럼 “차라리 그냥 그랄에 있었으면 더 나았겠다!” 하는 생각까지 들게 만듭니다.

    남을 위할때는 오롯이 남을 위해 행동할줄 알아야합니다. 항상 ‘나’를 중심으로 이해타산을 따지고 움직이는 것은 참된 기독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진정성있게 타인을 돕고, 끝까지 돕는 건강한 신앙인, 건강한 이웃이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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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중 왕께서는 선악을 분별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천사와 같으시기 때문입니다.”(17절)

    정말 그럴까요? 다윗은 선과 악을 그토록 정확하게 분별하는 자일까요? 아닙니다. 그가 저지른 밧세바와의 죄, 살인교사, 암논의 성폭행에 대한 침묵, 압살롬의 살인에 대한 침묵등을 볼때 다윗은 선악의 분별을 정확하게 해내지 못하는 자임을 알수 있습니다.

    다윗은 탁월한 왕, 지혜의 왕,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는 왕입니다. (상대적으로) 그러나 그런 다윗일 지라도 선악을 분별하는데 있어서는 꽤나 많은 실수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묵상하는 본문에서도 다윗은 또 실수 합니다.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선악을 우리가 분별할수있다고 생각하는것은 착각입니다. 교만입니다. 물론 일반적인 선과 악을 분별합니다. 세상에 기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악을 분별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완벽한 선악의 분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례로 판사도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검사도 잘못된 구형을 하고, 심판들도 운동 경기중에 잘못된 판단을 합니다. ‘판단’하라고 세워놓은 사람들 마저도 ‘완벽한 판단’의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VAR 같은 시스템을 도입할까요? ‘심판’의 판정이 오류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심해야합니다. 선악을 분별하는 일에 앞서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합니다. “주님! 압살롬을 불러와야할까요?” 물어야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런 기도의 시간 (하나님의 기준에 점검하는 시간)을 갖지 않습니다.

    지혜가 있고, 능력이 있고, 경험이 있고, 인정을 받아도 선악을 구별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 앞에서 점검하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점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과정을 생략해서는 안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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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은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지만 거기까지 입니다. 용서하는듯 하지만 용서하지 않은것 같기도 합니다. 압살롬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헷갈리는 일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궁으로 가지는 못하고 아버지의 얼굴도 못봅니다. 자신이 그랄에 있을때와 사실 크게 다르지 않은것입니다.

    용서가 완전하지 않으니까 압살롬은 참된 회복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불안하고, 그로 인해서 불안정합니다. 이런 부분때문에 나중에 압살롬은 아버지와의 대립각을 더욱 날카롭게 세우게 되는것입니다.

    반면 우리 하나님의 용서는 다윗의 그것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회복시키십니다. ‘궁’으로 들어오게 하십니다. 우리와 얼굴을 마주해주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다시 불러오신 하나님은 완전한 회복을 선언해주십니다.

    생각해보면 나는 ‘압살롬 같은 죄인’입니다.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각양각색의 죄로 점철된 인생임을 부인 할수는 없습니다. 마음의 이러저런 죄들에서 자유하지 않는자 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런 나를 완전히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나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용서 안받은것도 아니고, 받은것도 아닌것 같은 상황으로 내몰지 않고, 완벽하게 용서해주시고 새로운 삶과 기회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무엇보다 믿음 안에서 ‘영원한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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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압은 다윗의 마음을 살핍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복귀 시킬 계략을 세웁니다.

    그런데 이게 궁금합니다. 다윗은 정말 압살롬을 복귀 시키려고 했던것일까요? 아버지 다윗이 압살롬을 그리워하는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리워하는것과 사면을 시키는것은 다른 얘기입니다.

    요압이 다윗의 마음을 살핀것까지는 어쩌면 좋은 행동입니다. 나쁜 마음이야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석하고 적용해내는 요압은 너무 주관적입니다. 너무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해서 진행해 버립니다.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것은 좋은 행동입니다. 그러나 앞서 나가면 항상 문제입니다. 먼저 움직이기 시작하면 실수가 많습니다. 자기 딴에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일을 하는 경우들도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하나님의 뒤를 따라가는게 중요합니다. 영적 페이스 조절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명령할때까지 기다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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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다른 질문은 이것입니다. 과연 압살롬이 이렇게 사면 받는것이 맞는 것일까요?

    ‘아버지’ 다윗의 마음은 이해가 됩니다. 사면해주고 싶겠죠. 아들이고, 이제 형들이 다 죽다보니 장자의 권한을 가진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용서하는것은 말이 안됩니다. ‘왕의 아들’이기 때문에 사면의 특혜를 누리는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적법한 절차를 거쳐 판결을 받아야합니다.

    ‘용서’는 아름다운 행동입니다. ‘용서’라는 행동 자체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다윗에게 죄를 지었다고 보기 전에 암논에게 (물론 암논도 죄인이지만) 죄를 지은 사람이고, 주변 인물들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입니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면 다윗이 용서할 권리는 없습니다. 만약 사면의 우선적 권리가 있다면 이는 압살롬의 만행으로 피해를 받은자들에게 있습니다. 용서를 해도, 사면을 해도 그들이 먼저 해야합니다.

    결국 당연한 얘기지만 압살롬은 그들에게 먼저 사죄를 구해야합니다. 사죄를 구했는데 용서를 못받는다고 해도 할말이 없습니다. 그저 용서를 구해야하고, 적법한 절차에 의해 내려진 판결은 겸허하게 받아 들여야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과정이 생략되고 그냥 ‘사면’ 되버린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서로 사면하고, 자기들끼리 입맞춰서 없었던일로 해버리는것, 마치 현대의 정치인들을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피해자들은 안중에도 없는 서로 사면하기!!! 뉴스를 장식하는 ‘잘못된 정치인’의 모습입니다. (모든 정치인이 그렇다는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사면보다 중요한것은 진정성있는 사죄입니다. 압살롬은 돌아오고 나서 아버지 보는데만 관심이 있지 진심어린 사죄를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개인이, 사회가, 나라가 피해자를 생각하지 않고 무턱대고 진행하는 ‘사면’들이 멈췄으면 좋겠습니다. 피해자를 두번 죽이는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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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나 지금이나 소문은 참 빠르고, 참 부정확합니다. 소문이라는게 그렇습니다. 생각해보면 애초에 소문이 빠를 수 있는 이유는 ‘확인’이라는 과정을 생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그와 연결되 태생적으로 부정확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말을 전할때는, 상황을 전할 때는 검증이 필수에 가깝습니다. 아무런 과정이 없이 들은데로 (잘 듣지도 못했는데) 전하는것도 문제고, 거기다가 덧붙이는것도 문제고, 해석해서 전하는것도 문제입니다.

    소문 때문에 누군가는 낙심에 빠지고, 회사에서 짤리고, 관계가 깨지고, 공든탑이 무너집니다. 심지어 누군가는 ‘소문’ 때문에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소문을 전하지 말아야합니다. 확인되지 않은 말을 옮기면 안됩니다. 요즘같이 SNS가 전세계에 소통창구가 된 시대에는 더 그렇습니다. ‘뉴스룸’이라고 하는 미국의 유명한 드라마에서는 뉴스를 전하기 전에 아무리 ‘SNS’에서 떠들석 해도 출처 확인과, 내용검증을 반드시 거친 후에 방송하는 방송 윤리를 흥미롭게 본 기억이 납니다. 이 ‘검증 과정’ 때문에 속보, 특종, 단독의 기회를 놓칠지언정 그 뉴스는 반드시 ‘검증’을 거친 내용만 방송했던것으로 기억합니다. ‘소문’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이와같이 조금더 진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문’이 가져다 줄수 있는 비극적 결말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됩니다.

    소문은 만들지도 말고, 전하지도 말고, 속지도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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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적한 때에 적절한 개입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방관했고 결과는 딸아이는 트라우마에 갇혀 살고, 암논은 죽고, 압살롬은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이미 암논이 저지른 근친상간부터가 잘못입니다. 이 일을 듣고 2년동안 함구한 다윗은 적절한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기 입장의 변명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가족일이니까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고 안팎으로 사건이 커지게 해서 좋을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덮어논 사과는 점점 더 썩기 마련입니다. 썩은 부분을 도려내는 것이 방법이지 덮어놓는다고 해결되는것이 아닙니다.

    덮어놓은 죄는 지독한 냄새를 풍깁니다. 점점더 많이 아프고, 더 썩게 만듭니다. 나도 죽이고 남도 죽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피해자도 만들어 냅니다. 덮어놓으면 더 쉽고, 빠르게 썩기 딱 좋은 환경이 됩니다. 그래서 옛말에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때를 놓치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 덮어놓은 죄, 썩은내가 진동하고, 결국은 잘라내게 되기 전에 열어서 환부를 드러내고 치료해야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암논’으로 시작된 죄가 결국 ‘압살롬’에게까지 확장되는 이런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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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다말은 어디있나요? 다말 때문에 생긴 일 아닌가요? 그런데 다말의 일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다말이 위로를 받은것도 아니고, 다말의 트라우마가 치료된것도 아닙니다.

    분노의 발산으로 일이 해결되지 않고, ‘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일을 해결하는 방식속에 하나님이 계셔야합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의 감정에 휘둘리고, 지식에 휘둘리고, 경험에 휘둘리고, 주변의 말에 휘둘리면 일이 해결되지 않고 또 다른 일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

    우리 다말 좀 누가 챙겨주세요 제발!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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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을 깨닫는 순간이 있습니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수치심이 몰려 옵니다. 정신 차리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알게 됩니다. 그러면 바로 그 순간에 변명의 이유를 찾습니다.

    암논이 딱 그렇습니다. 분노에 휩싸여 성폭행 하고 나서 정신이 들고 보니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졌는지 깨닫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멀쩡(?)했던 자신이 성폭행까지 하게 된것은 다말이라는 여인 때문이다! 라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은 결백하다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납득시킬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 여자 때문이다!! 저 여자가 유혹했기 때문이다! 당장에 내 집에서 내 쫓아라!’

    간혹 뉴스보다가 성폭행 가해자가 인터뷰 중에 “그 여자가 옷을 야하게(?)입어서 그랬습니다!” 라는 말이라고 할수도 없는 얘기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최악에 변명입니다. 미친소리 입니다 (표현이 거칠어서 죄송합니다)

    죄를 지은 후에 그 죄를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죄의 결과를 책임져야하는데 그 결과가 무거운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 앞에 변명도하고, 남에게 누명을 씌우기도 합니다. 아예 죄를 부정하고 도망가는 경우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었다면 결과를 책임지는 마음으로 인정하고 회개해야합니다. 결과와 판결에 대해서도 책임을 질줄 알아야합니다.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는 최악은 더더욱 피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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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사자인 암논에게 다말이 말합니다. “지금 오라버니가 내게 한 일보다 더 악한 일이예요”(16절) 무슨 말인가요? 성폭행도 당연히 죄고 다말을 버리는건 더 큰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암논은 막무가내 입니다. 그렇게 다말은 암논의 집에서 쫓겨 납니다. 그때 다말은 “색동옷을 찢어 버리고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19절) 자신의 슬픔과 분노를 표출한것입니다. 당시 결혼하지 않은 공주를(18절) 의미하는 색동옷을 찟음으로 일종의 ‘미투’를 한것입니다

    다말은 이와같이 자신이 할수있는 방법으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 좀 봐주세요!! 암논이 제게 한 악한 일을 보세요!” 나름의 방법으로 외친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나요?! 모두 쉬쉬 거립니다. 친오빠도 조용히 칩거하라고 말합니다! (20절)

    세상의 불의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도움을 구하는데 ‘조용히 해’ 라고 직간접적으로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다리세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랬기 때문에 ‘미투’운동이나 ‘Black lives matter’ ‘Asian hate’같은 문제들이 나중에서야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시도가 있었으나 그때마다 침묵을 종용당해 왔었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일 가운데 도움을 구하는 목소리를 듣는다면 그들이 편에서 함께 서서 목소리를 내 주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불의한 걸 알면서도 온갖 핑계로 침묵시키거나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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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로 처량하게 시간을 보냈을 다말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20절) 처량한 인생, 슬픔 가운데, 외톨이 같이 숨어 지내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다말 같이 어떠한 사건에 피해자가 되서 평생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에 갇혀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들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이웃이 되면 좋겠습니다. 처량하고, 슬픈 그들의 인생에 위로가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애써 닫고 들어간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가 방안에 갇힌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이웃이 되면 좋겠습니다.

    처량한 자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신을 도와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먼저 다가가고, 우리가 먼저 다가가면 좋겠습니다. 처량한 나의 삶에 찾아오셔서 “샬롬”을 외쳐주신 예수님! 처량한 이들에게 예수님 닮은 이웃이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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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동생 압살롬의 여동생 다말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다!” (4절) 암논은 다말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암논은 다말을 사랑하는게 아닙니다. 다만 욕정에 휘둘리고 있는것입니다. 이는 그가 위력을 가지고, 폭력적으로 다말을 범하는것으로 확실히 드러납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오해하고 함부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뉴스에 보면 ‘데이트 폭력’ 얘기도 나오고, 스토커 얘기도 나옵니다. 자녀를 사랑한다고 부모 마음대로 조정하려고 하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들립니다. 본인들은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폭력을 행사합니다. 사랑 아닙니다!

    나의 욕망으로 움직이는 마음과 행동은 절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죄를 저지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폭력적이고, 강압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사랑은 없습니다. 건강하게 사랑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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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나답같이 “교활한 사람”의 말을 듣는것도 문제고, 분별하지 못하는것도 문제입니다. 진짜 ‘요나답’같은 사람하고는 어울려서도 안되고, 귀를 기울여서도 안됩니다. 그들의 말은 더욱 특별히 분별해야합니다.

    악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경계해야합니다. ‘친구따라 강남간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라는 말도 있습니다. 조심해야합니다. ‘친구’라는 좋은 말로 찾아온다고 해서 다 귀기울이고, 친밀해져서는 안됩니다.

    나를 망가지게 하는 친구, 죄를 권하는 친구, 하나님을 떠나게 하고, 신앙을 부정하게 하는 친구를 멀리해야합니다. 듣지 말아야합니다. 분별해야합니다.

    오히려 “내가 동생의 여동생을 사랑하고 있어!” 라고 하면 뺨(?)이라도 때리며 (물론 폭력은 안됩니다) 정신차리라고 해줄수있는 친구를 만나야합니다. 정신을 혼란하게 만드는 친구말고 정신을 차리게 하는 친구를 만나야겠습니다. 내가 그런 친구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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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논은 다말보다 힘이 셌으므로 힘으로 눌러 다말을 욕보였습니다.”(14절) 나의 힘은 군림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볼품없는 인생인가요? 자신의 강함을 한없이 약한자에게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힘’은 그렇게 사용하는게 아닙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라고 말씀은 기록합니다. 힘/권능을 받으면 어떻게 하나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가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힘은 주의 사명을 사용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힘은 약한자를 위해 사용합니다. 힘은 보호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힘은 일을 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힘의 논리에 함몰되면 이와 같이 ‘힘’을 나의 욕망을 위해 사용하게 됩니다. 힘을 폭력으로 치환할것이 아니라 보호와 사랑과, 일로 치환시켜야합니다. 힘은 남용해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힘의 논리를 붙들고 섬기며 살아야겠습니다. 보호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주를 위해 일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죄짓는데 힘쓰는 최악의 사람이 되지 않고 선을 행하는데 모든 힘을 쏟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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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아이는 죽고 이후에 다시 아이를 갖게 됩니다. 그 아이가 바로 솔로몬 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여호와께서는 그 아이를 사랑하셨습니다” (24절)라고 기록합니다.

    이걸 보면 하나님은 회개한 자의 죄된 과거를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솔로몬은 다윗과 밧세바에게서 나온 아이 입니다. 계속 과거의 죄를 생각한다면 솔로몬도 괜히 미워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그를 사랑합니다!

    죄인을 향한 미움은 생각보다 꽤나 오래 갑니다. ‘주홍글씨’라고도 합니다. 마냥 평생을 미움 받습니다. 회개하고, 사죄하고, 나름의 죄값을 치뤄도 그들을 향한 용서는 잘 실현되지 않습니다. 한번 죄인은 영원한 죄인이 되는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회개한 자의 죄를 잊어주셨습니다. 그렇게 다윗과 밧세바의 회개 이후에 주어진 아이를 하나님께서도 친히 사랑해주신 것입니다.

    죄인을 향한 기한 없는 미움과 증오, 회개한 자들을 향한 의심과 여전한 분노, 죄인의 주변 인물들까지 모조리 미워하고, 연좌제로 모두를 괴롭게 하는 ‘죄인’을 향한 멈추지 않는 정죄를 내려 놓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개하는 자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일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들에게 온전한 기회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나같은 죄인의 죄를 잊어 주시고 두번째, 아니 그 이상의 기회를 주고 계심에 감사드리며 이번에 얻은 기회에서는 실수함이 없도록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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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이 성을 함락 시키면 이 성에 제 이름이 붙을까 두렵습니다.” (28절). 요압은 암몬 자손의 도성 하나를 빼앗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연락해서 마지막으로 ‘숟가락’을 얹으라고 말합니다. 언뜻보면 다윗을 위하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기 이름이 붙을 수 있다고 예상하는것 자체가 사실은 과거에는 전혀 없었던 일입니다.

    요압은 세력을 키웠고, 다윗의 비밀도 알고 있습니다. 자의적으로 전투를 하고, 왕의 저의를 파악하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는 이미 아브넬을 죽일때부터 조금씩 보여지던 모습입니다. 아직 발톱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요압은 그렇게 다윗에게 껄끄러운 리더십이 되었습니다.

    동역으로 시작했다가 적이 되는 사람이 많습니다. 협력 관계였다가 적대하는 관계가 되기도 합니다. 세력이 커지면 교만해지고, 이득이 커지면 충돌이 일어납니다. 시간이 지나도 순수하게 동역하고, 겸손하게 협력하는 자세를 놓치지 말아야겠습니다.

    간혹 교회를 섬기는데 부목사가 담임목사를 향해 세력다툼을 한다는 얘기를 들은적 있습니다. 성도와 목회자간의 다툼의 얘기도 듣습니다. 회사 창립자들 간의 다툼과 배반은 흔하게 듣는 얘기입니다.

    변하지 않는 동역, 변하지 않는 겸손 잊지말아야할 동역자의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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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은 ‘옳은 판단’의 능력을 상실하지 않았습니다. 나단의 이야기를 듣고 분노하는 다윗이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온전한 정신’의 다윗은 왜 간음과 살인교사까지 저지르게 된걸까요? 이런 일을 저지르고도 태연자약하게 살고 있는것일까요? 자신에게는 다른 기준을 적용시키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객관적이다가, 자신에게만 주관적인 사람들 있습니다. 남들에게는 단호하고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타인은 정죄하고, 본인은 무조건 용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이 하면 죄고, 내가 하면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 합리화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도 오늘 본문의 다윗처럼 ‘옳은 판단’의 인지능력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자신에게만은 선택적 ‘이중잣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남이하면 불륜인거는 내가 해도 불륜입니다. 남이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 기준 앞에서 나를 단호하게 점검하는 삶의 태도를 절대 놓치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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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의 잘못을 지적하시고, 판결을 내리십니다. “내가 네 집에서 너를 대적하는 악을 일으키겠다. 내가 바로 네 눈 앞에서 네 아내들을 데려다가 네 이웃에게 줄 것이니 그가 밝은 대낮에 네 아내들을 욕보일 것이다!” (11절)

    죄의 궁극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그전에도 죄가 가져오는 수많은 비극들이 있습니다. 다윗의 경우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가 세상에 나오자 마자 병이 들게 되고 결국 죽게 됩니다. 나중에 다윗의 아내들이 욕보임을 당하고, 다윗의 자식에게 배반을 당하게 되기도 합니다.

    죄가 가져오는 결과는 이처럼 참혹합니다. “어차피 용서받아요!”라고 말하며 가벼이 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용서는 받을 수 있을 지언정, 죄가 만들어 낸 결과의 참혹함은 되돌리지 못할때가 대부분 입니다.

    죄를 멈추는걸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죄는 미워해야합니다. 죄를 증오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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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개합니다. 단순하지만 확실한 메세지입니다. 다윗은 회개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지었습니다!” (13절) 회개해야합니다.

    한가지 덧붙이고 싶다면 다윗은 밧세바에게도 사과를 구해야합니다. ‘여호와께 죄지은것’은 본질적인 것이고, 그전에 그는 밧세바에게, 그리고 우리아에게, 심지어 요압에게도 죄를 지었습니다. 죄명이라 함은 간음, 살인교사, 위력에의한 불법종용, 살인청부 등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지은 죄도 회개해야합니다. 미안하다고 사죄해야합니다.

    진정한 회개를 실천해야겠습니다. 죄는 다른 사람에게 지어놓고 하나님께만 회개하고 끝나버리니까 자꾸 세상에서 교회의 ‘회개’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피해자들에게 사죄하는 전방위 회개를 실천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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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아, 그는 끝내 아무것도 모르고 죽었습니다. 세상 억울한 죽음입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나라, 몸바쳐 충성한 나라, 그 나라의 주군의 손에 의해서 죽임당한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죽이라는 편지를 자기 손으로 직접 배달한것 자체가 너무 잔인하게 느껴집니다) 거기다가 그 주군이 자신의 아내를 범하기까지 했습니다. 자신의 직속 상관인 요압도 우리아를 배반하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자신의 아내도 심신으로 남편을 배반한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이 모든 비극의 한가운데서 이 비극을 더욱 처연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아는 아무것도 모르고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세상 억울한일입니다. 슬프고 분노가 일어납니다. 이런 일은 다시는 없어야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어납니다. 세상 억울한 죽음들이 너무 많습니다. 슬프고 분노가 일어나는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권력의 희생양, 욕망의 희생양들이 끊이지 않고 생깁니다! 정치세력, 작전세력,일진무리, 피해자들은 그렇게 늘어만 갑니다! 악한세력은 서로 서로 결탁하고 연약한 개인을 압살합니다. 그렇게 이 시대의 우리아는 계속 발생합니다! 가해자는 너무 득새하고 피해자는 너무 연약합니다. 억울합니다.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너무 답답합니다. 끝끝내 아무것도 모르고 점점 죽어가는 이들때문에 슬픕니다.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런 피해자가 생기지 않는 세상이 되게 해주세요!! 죄인들이 득새하지 않게 하시고, 악한 자들이 승리하지 않게 하시고, 죄가 덮어지는 일이 없게해주세요!! 억울한 인생들이 안나오게 해주세요!!! 너무나 죄악된 세상입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우리아’ 같은 사람들을 보호하시고 승리하게 해주세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같은 사람, 요압 같은 사람, 밧세바 같은 사람 되지 않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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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르는 척 지나갑니다. 요압도, 다윗도, 밧세바도 지나갑니다. 그런데 “다윗이 한 이 일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했습니다!” (27절) 하나님은 그냥 지나가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모르는척 한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서로 모르는척 하기로 말을 맞췄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범인들, 공범들은 입을 맞춥니다. 경찰 앞에서 모른척 합니다. 서로 태연한척 합니다. 그런 죄를 안지은척 합니다. 그러나 결국 조사관은 증거를 가지고 있고, 증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들통납니다. 그들은 계속 모른척 하고, 부정하지만 소용없습니다. 조사관은 다 알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본인의 얼굴을 기둥 뒤로 숨기며 자신이 안보인다고 생각합니다. 몸은 그대로 밖에 두고 자기 눈만 가렸을 뿐입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 앞에서 이와 같습니다. 내가 모른척 한다고 해서, 내가 아니라고 부정한다고 해서, 서로 입을 맞춰서 다수가 죄 안지었다고 말한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게 아닙니다. 죄가 죄가 아닌게 되는게 아닌것입니다.

    나를 보고 계신 하나님이 느껴지는 아침입니다. 내가 애써 모른척하고, 애써 잊은척 하고, 애써 태연한척 하고 있는 나의 죄된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주를 경외하는 하루, 주를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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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이 성행하는 불법 도박장을 잡으려고 수사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불법도박장의 위치를 알아야하기 때문에 도박꾼으로 위장하고 도박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점점 큰판으로 이동하다가 진짜 ‘큰판’을 맞나게됩니다. 그리고 그때 불법 도박꾼들을 일망타진 하는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이런 문제가 발생합니다. 도박꾼으로 가장한 경찰이 계속 도박을 하다가 결국 진짜 도박에 중독되버리는 것입니다. 바짝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하는데 가짜로 도박을 하다가 자꾸 돈을 따게 되니까 자기 본분을 잃어버리게 되는것입니다.

    자신이 누군지 까먹으면 실수합니다. 항상 깨어서 경계하지 않으면 실수합니다. 치명적입니다. 다윗이 그렇습니다. 그는 왕입니다. 당시 왕은 군대의 선봉이 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이 누군지 까먹어 버립니다. 깨어 분별해야하는데 전혀 깨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전쟁에 있어야할 그가 왕궁을 거닐고, 한 여인을 향해 음욕을 품고 간음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지 절대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나의 본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죄를 짓기 위해서 열심을 내는 다윗같은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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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은 헷 사람 우리아를 보내라고 요압에게 전했습니다.” (6절) 딱 여기까지만 읽으면 이런 기대를 하게 됩니다. ‘아! 다윗이 상황이 이쯤되니까 당사자를 불러 사과하려고 하는구나!’

    그러나 헛된 기대입니다. 그는 우리아를 불러서 밧세바의 임신이 우리아의 아기로 꾸미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거짓말이 더 큰 거짓말로, 폭력이 더 큰 폭력으로 확장되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국에서 화두가 되고있는 여러가지 문제중에 ‘학폭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참 슬픈것이 ‘학폭’문제는 중고등학교에 시작되는 문제가 아니라는것입니다. 믿기 어렵지만 학폭 문제는 이미 초등학교 저학년에서부터 충분히 보여지는 문제입니다. 사실 이 학폭의 문제가 초등학교 저학년때 발견되었을 때 그러한 일을 저지른 아이를 따끔하게 타이르거나 혼내는 과정을 통해서 잘못을 잘못으로 깨닫게하는 필요성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좀더 일찍 죄를 죄로 인지하고 바꿀수 있는 시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죄는 빨리 인정하고 회개해야 바꿀수 있습니다. 죄를 그냥 두면 더 큰 죄로, 더 극단적인 비극을 만들어 내게 되어있습니다.

    다윗의 음란은 그렇게 간음이 되었고, 이는 거짓말, 그리고 살인교사까지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아이도 죽고, 우리아도 죽습니다.

    죄는 지금 멈춰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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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혜 갚는 다윗입니다. (물론 받는 사람이 잘 받지를 못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참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받았습니다. 자라나면서는 부모에게 은혜를 받았고, 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받은 은혜도 많습니다. 어릴적 상대적으로 용돈(?)이 적었던 저에게 매일 맛있는것을 사주고 자신의 용돈을 나눠 썼던 친구도 있습니다. 캐나다유학 시절에는 거의 먹여 살리다시피 한 전도사님도 계십니다. 미국에 와서는 물심양면으로, 거기에 기도를 더해 도와주신 많은 성도님들도 계십니다. 저는 참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하나님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형언할수 없고, 다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죄사함이고, 구원입니다.

    은혜는 갚아야합니다. 할 수 있는 만큼 갚아야합니다.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갚아야합니다. 생각이 이쯤 이르니까 걱정(?)이 앞섭니다. 은혜 갚아야할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다윗의 이 모습을 본받아 은혜 갚는 하루를 실천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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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몬 자손은 자기들이 다윗에게 미움을 사게 된것을 깨닫고” (6절) 사과 대신에 전쟁을 선택합니다. 그냥 사과하지 전쟁을 선택하는 그들의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사과하면 사는데, 전쟁하니까 돈은 돈대로 쓰고 사람은 사람대로 죽어나갑니다. 이 얼마나 비극적입니까?

    물론 사과해도 다윗이 쉽게 용서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착각이었습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수 없이 경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짜 미안합니다!” 라고 사과하면 ‘전쟁’보다는 더 나은 결과를 보았을 것입니다.

    사과해야할때는 사과해야합니다. 전쟁이 아니라, 고집이 아니라 사과 해야합니다. 잘못을 인정하면 최악을 피할 수 있습니다. 사과가 필요할때 용기내서 사과하고, 고집내려 놓고 사과하고, 싸우지 않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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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은 백성과 하나님의 성을 위해 싸웁니다 (12절) 그러나 아람은 돈 때문에 싸우고, 암몬은 어쩔수 없이(?) 싸웁니다. (왕의 치명적 실수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람은 당연히 도망가고, 암몬도 그거 보고 같이 도망가 버립니다.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는 중요합니다. 우리는 필요없는 것을 위해 싸우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아야합니다. 얼떨결에 싸우는 행동도 하지 말아야합니다. 휩쓸려 싸우는것도 하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싸울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사명을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지키기 위해서는 싸워야합니다. 그러나 쓸데없는 ‘가치’들을 쫓느라 싸우면 수치를 당할 뿐입니다. ‘아람’과 ‘암몬’처럼 되는것은 시간 문제 입니다.

    주께서 나를 위해 싸워주시는것처럼 나도 주를 위해 싸우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싸우기 보다는 더 사랑하고 더 양보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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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심을 의심하지 않는 사회/진심이 통하는 사회, 진심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 거짓진심으로 타인을 속이지 않는 사람! 오늘 본문 서두를 잃으면서는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다윗이 어느날 사울왕 집안에 남은 사람을 찾습니다. 명목은 ‘요나단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은혜를 갚아야겠다’ 입니다.

    다윗의 이 시도는 진심일까요? 다윗의 이 이야기를 들은 하인들과 주변 사람들은 이것을 다윗의 진심으로 여겼을까요? 혹 거짓말을 해서 사울 집안의 잔존세력을 찾은후 씨를 말려버리려는것은 아닐까요?

    진심은 통해야합니다. 진심이 의심되면 얼마나 답답한지 모릅니다. 얼마나 억울한지 모릅니다. 그걸 알면서도 서로의 진심을 의심하는 시대!, 진심이 통하지 않고 어쩌면 있지도 않을 ‘숨겨진 진의’를 찾느라 진땀을 빼고 있는 사회인지 모르겠습니다.

    진심으로 가득찬 사람이 되야겠습니다. 언행에 진심을 담아야겠습니다.. 또한 다른 이들의 진심은 믿어주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손해볼지라도 상대의 진심을 진심으로 믿어주기 시작할때 비로소 사회는 ‘진심이 통하는 사회’로 변화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너무 꿈같은 사회 일까요? 나 혼자 너무 순진한 사람으로 당하는 인생이 되지는 않을까요? 그러나 이런 고민속에서 다시 거짓으로 후퇴하기 보다는 진심의 삶을 고집해보겠습니다. 진심의 사람, 진심을 믿어주는 사람이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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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바는 a.k.a ‘사울의 종’으로 다윗왕 앞으로 불려 나갑니다. 그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하는 생각이듭니다. 그래서 그는 다윗왕을 만나자마자 “예 왕의 종입니다” (2절) 그렇게 말합니다. 그의 마음이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경각심이 일어날 만한 사건입니다. 살기 위해, 무서워서, 위기를 피하기 위해서 내가 섬기던 분을 부정하고 갈아타는(?)것은 영적 배신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의 제자인데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가 떠오르는 것도 그래서 인것 같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한번 하나님의 종은 영원히 하나님의 종입니다. 내 앞에 나의 신앙을 위협하는 존재가 있을때, 그러한 사건을 만날때 “그러나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종입니다!” 라고 신앙을 지켜야 할것입니다. 말 한번을 할때도, 상황 한번을 모면 할때도 ‘신앙의 부정’은 없는지 ‘신앙의 타협’은 없는지 항상 경각심을 가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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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심은 삶으로 증명되는것이다! 라는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므비보셋은 그렇게 다윗 왕의 상에서 함께 식사를 하는 자가 됩니다. 심지어 13절 기록처럼 ‘항상’ 입니다.

    진심은 말과 행동 그리고 꾸준함으로 증명됩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것이 꾸준함입니다. 꾸준함이 곧 우리의 마음을 대변하는 태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요나단을 향해 보여준 이러한 진심의 마음을 본받아 하나님을 향한 꾸준한 마음! 변하지 않는 진심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먼저 진심이신 것처럼 저도 하나님을 향해서 진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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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우리편이면 너무 좋은데 하나님이 다른 편이면 오금이 저립니다. 오늘 하나님은 다윗을 축복하십니다. 자기 자식이라고 특별히 힘써주시는 것이죠. 그러니 다윗 앞에 죽어나간 나라가 한두개가 아닙니다. 다윗 앞에 땅을 빼앗긴 나라들, 왕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다윗 입장에서 하나님은 ‘sweetest Father’ 입니다. 그러나 적대하는 나라들의 입장에서 하나님은 ‘worst nightmare’ 입니다.

    하나님의 편,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고 싶습니다. ‘원수’를 대하는 하나님은 ‘무섭다’ 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외의 존재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 서는것 말고는 사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분 편에 서는거 말고는 구원을 확신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변 국가와 왕들이 다윗하고 동맹을 맺으려고 합니다. ‘다윗편’ 해서 나라의 목숨을 구하고 싶은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승리를 주시고 성취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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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리의 책임이 무겁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느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윗의 성향과 저의 성향이 같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런 ‘승리’의 과정에서 흘린피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 저 같은 사람은 ‘승리’의 기쁨도 잠시 큰 책임감을 동시에 느낄듯 합니다.

    성공을 가벼이 여길수 없습니다. 승리를 통해 얻은 것을 가볍게 사용할 수 없습니다. 피로 물든 승리에 마냥 누리며 행복해 할수만은 없습니다.

    어쩌면 다윗도 비슷한 마음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다윗은 수많은 승리가 반복되고, 사람들이 그를 더욱 높이기 시작할때 하나님께 그 모든 것을 돌려 드렸습니다. 그게 ‘금, 은’이든 ‘모든 전리품’이든 다 하나님께 돌려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로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승리와 성공의 무게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나 기분좋고 방탕하라고 주시는 성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공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요, 이 땅에는 평화를 끼치는 자가되야겠습니다. 승리에 도취되면 망하는것입니다. 승리의 결과를 가지고 더욱 선으로 갚는 인생이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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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를 이 자리까지 오르게 하셨습니다!”(18절) 다윗에게 ‘이 자리’는 왕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꼭 ‘왕의 자리’에 오른 자만 하나님을 찬양해야하는가? 한다면 아닙니다.

    오늘 내가 있는곳은 ‘왕의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내가 이 자리까지 오르게(?)하신 분이 하나님 맞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가 세상이 보는 ‘왕’의 자리는 아닐지언정 ‘오늘 이 자리’를 가능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립니다.

    자칫 ‘왕의 자리’를 만날때까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묻어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우로 따지면 상을 받을때까지 ‘수상소감’을 묻어두는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배우가 한작품 한작품 만나는게 감사와 찬양의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굳이 ‘수상’의 날까지 기다릴 필요없습니다. ‘대배우’의 수식을 들을때까지 기다릴 필요없습니다. 그때는 그때 감사하면 되고, 오늘은 오늘의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합니다.

    그날, 그자리, 특별한 지위, 영광스러운 자리를 마주할때만 “이 자리까지 오르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할것이 아니라 매일 내가 서있는곳이 가능케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인생이 되고 싶습니다. 솔직히 오늘 이 자리까지 오게 된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날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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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의 기도처럼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이뤄주시는 일들을 인하여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영원히 높이게 되는(26절) 일이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 치료받은 나병환자 때문에, 예수님께서 살리신 나사로 때문에 많은 이들로부터 예수님 영광받으시고 찬양받으신것처럼, 나의 삶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섭리로 인해 더 많은 이들이 주를 알고, 믿고, 찬양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길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만들어 가신 바우교회의 기적의 간증을 통해 더 많은 이들이 예수를 만나고, 알고, 믿고, 찬양하는 일이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만 드러나고, 하나님만 찬양받고, 하나님만 영광받으시면 좋겠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Voice of Wilderness 의 비전은 광야에서 외치는 복음의 소리를 통해 ‘He must increase, I must decrease’의 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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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새로운 장소를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예배의 처소를 찾아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어린 아이들도 마음껏 예배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새로운 예배 장소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생각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나도 간과하고 있는 착각의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장소’ 없어서 일못하시는 분 아니십니다. 장소에 메인 분도 아닙니다. ‘성전’ 없어서 역사하시지 못하는 분도 아닙니다. 내가 만들어 주고, 내가 찾아줘야 일하시는 분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께서 일하십니다.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양 떼를 따라디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삼았다.”(8절)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일하시는 분이시고, 능력이시며, 역사를 일으키시고, 약속을 이루시는 분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이 본질을 잃으면 자칫 ‘인간적 전략의 늪’에 빠지거나 ‘하드웨어’의 속임수에 빠지거나 ‘내 능력’이라는 착각에 빠집니다. 마치 내가 주를 돕는것으로 생각하고, 내가 주를 위해 무언가 위대한 일을 한다고 착각할지 모릅니다.

    주님이 나의 주인이시지 내가 그분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분이 역사하시고 저는 순종합니다. ‘왕’됐다고 착각하면 안되겠습니다. 아무리 의도가 좋았다고 한들 순간 교만이라는 유혹을 조심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아름다운 VOW 성전을 세워가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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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계할지언정 내 사랑은 결코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13,14절) 여기서 나오는 ‘징계’야 말로 은혜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징계’를 당하는것입니다. 애초에 포기하면 징계같은거 하지 않습니다.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포기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떠나지 않는 사랑’, ‘징계할지언정 포기하지 않는 사랑’인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기대합니다) 벌써부터 어깨가 무겁습니다.

    그러므로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성장하는 목회자가 되겠습니다. 징계받지 않아도 될만한 목회자가 되겠습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포기하시지 않는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목회자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징계받으면 바로 깨닫고 회개하는 목회자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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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계속 될것이며 네 보좌가 영원히 서 있을 것이다!” (16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세워주십니다. 다윗의 집안을 세워주십니다. 다윗이 세우는거 아니고, 인간의 탁월함이 만들어 낸 역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입니다. 나라도 다윗의 집안도 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바우 교회를 세우시는 분인줄 믿습니다. 교회가 계속 건강한 역사를 세워가는 교회 되게 하실줄로 믿습니다. 섬기는 자들과 그들의 가정을 세워가실줄 믿습니다. 성도들을 세워가실줄 믿습니다. 저와 저의 가족을 세워가실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세우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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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진짜 좋아서 춤춰 본 기억이 없습니다. 원래 춤이랑 친하지도 않고 뭔가 몸으로 즐거움을 표현하는것은 더더욱 익숙하지 않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기뻐 뛰며 찬양하고, 감사와 기쁨을 표현하라고 하면 “저는 그런거랑 익숙하지 않습니다!! 맘은 그런데 뛰지 못해요!”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제가 기억하는 한 저도 모르게 기뻐서 껑충 껑충 뛰며 춤 같지도 않는 춤을 추며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던 시간이 한번 있었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춤신이 들린것 마냥 몸을 가만히 두지 못했던 때를 기억합니다. 때는 바야흐로 2002년 월드컵 입니다. 16강, 8강, 4강의 오르는 그 순간에, 그 동점골에, 그 결승골에, 그 승부차기에 환호하며 껑충 껑충 뛰다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빠져 사람들에게 밟히던 기억이 납니다. (발로 차이고 깨지는 당시 노키아 핸드폰을 보면서도 여전히 겅중겅중 뛰고 있던 제 모습이 제3자의 모습처럼 아직도 기억에 선명합니다.) 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같이 있던 남녀노소가 그랬습니다.

    그와중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는 원래 뛰지 않아요, 춤추지 않아요. 흥분하지 않아요!” 감격과 흥분은 성향을 뛰어넘었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축구의 감격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쁨과 감격, 환희와 흥분이 자유롭게 표현되는 예배가 회복되면 좋겠습니다. 성향 핑계, 지위 핑계, 상황 핑계, 나이 핑계 좀 그만해야겠습니다. ‘왕’도 뛰는데 누근들 못뛰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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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의 예배의 모습을 판단하는 미갈과 같은 실수가 교회 안에 있습니다. 누가 뛰면서 찬양하면 수근거립니다. 누가 울면서 기도하면 수근거립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수준에 맞는 예배 모습’이 아니면 창피해 합니다. 그런 예배를 찾아 교회를 헤맵니다. 옆에서 막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는데 허벅지를 살짝 찌르면서 귓속말합니다. “좀 조용히 기도해! 사람들이 자꾸 보잖아!”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드립니다. (21절) 그러니 그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나의 기준으로 판단해서도 안되고 창피해 해서도 안됩니다. 그의 예배는 당신을 만족시키려고 하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편한마음으로 관람하라고 드리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예배의 모습을 섣불리 판단하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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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웃은것은 미갈 자신이면서 마치 다윗의 여종들이 비웃고 있는것처럼 말합니다.

    우리가 자주 하는 말입니다. 싫어하는건 나 혼자인데 말할때 이렇게 합니다. “다 너 별루래!! 다 니가 틀린거래! 모두가 그러던데?” 실체가 없는 말입니다. 확인해보지도 않고 자신이 대변자처럼 다른 사람들 생각까지 말합니다. “다 너 싫어해! 다 너 그 행동 비웃어!!”

    다윗은 확실하게 말합니다. “그건 당신 생각이지! 나의 종들은 오히려 나를 우러러 볼것이요!”

    나의 생각을 일반화 시키는 오류, 확인되지 않은 다수의 생각이 나의 생각과 같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는 오해, 확인하지 않았지만 ‘대세’를 들먹이며 내 개인의 생각을 주장하려는 독선! 그렇게 내 생각으로 타인의 행동에 무작정 생채기를 내려고 하는 악의는 멈춰야합니다. 정말 말하고 싶으면 “내 생각에는 말이야!!”라고 정확하게 말해야겠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대중’을 혹은 “타인”을 들먹여서는 안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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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그마치 행렬이 3만명입니다. 거기다가 온갖 악기의 연주가 울려 퍼집니다. 그리고 분명 화려한 수레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언약궤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진심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결과가 안좋았습니다. 웃사는 죽고 언약궤는 가지고 오지 못합니다.

    다윗은 억울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진심과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런 비극적인 사고가 잃어났는지 이해가 잘안됩니다. 그래서 분노도 일어나고 두려움도 일어납니다.(8,9절)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하나님께서 언약궤는 반드시 제사장들이 메고 이동하라고 이미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최선’을 기다린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최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최선’이 틀린 마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최선’을 싫어하시는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의 최선’을 기대하십니다.

    뱡향이 틀리면 최선과 진심도 답이 아닙니다. 도둑질에 최선을 다한들, 살인에 최선을 다한들 칭찬 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음식을 차려도 알러지 있는 음식을 차렸다면 의미없습니다. 먹을수 없고 다 쓰레기통에 버려야합니다.

    방향을 잃은 열심은 무섭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해야겠습니다. 나의 최선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에 열심을 내야겠습니다. 진심이 귀하긴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방법을 지키는것이 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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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눈앞에서 언약궤가 흔들리며 떨어지려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요? 1) 그냥 상관하지 않고 두고 본다 2) 웃사처럼 반사적으로 흔들리는 언약궤에 손을 얹는다 3) 이동 행렬 전체를 잠시 멈추라고 한다. 4) 소를 진정시킨다 5) 애초에 자신이 알고 있듯이 (그는 고핫 자손이며, 레위 출신으로 이미 언약궤의 이동방법에 대해 알고 있는 자다) 출발전에 “수레 실으면 안되요!” 라고 말하고 메고 온다.

    웃사가 언약궤를 잡은것은 어쩔수 없는 단 하나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웃사의 죽음이 억울하게 보이는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기회들이 많았습니다. 여전히 선택의 폭이 있었습니다. 그가 아는 바대로 애초에 다윗왕에게 메고 이동할것을 권고했으면 될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발했다면 자신이 아는 것처럼 거룩한 언약궤가 흔들리면 행렬을 멈추게하고 재정비 하면 됩니다. 소를 좀 진정시키면 됩니다. 그때라도 멈춰서 다시 어깨에 메면 됩니다. 심지어 실제로 떨어지고 있었던것도 아니니 꼭 그렇게 잡지 않아도 될 일입니다.

    오늘 내가 하는 일이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 변명합니다. “누구나 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라고 변명합니다. “자연스러운 일이니 죄가 아니야!”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이런 변명을 앞세워 잘못행하다가 웃사처럼 혼나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억울해하고, 분노합니다.

    이는 사실이 아닐때가 많습니다. 어쩔수 없는 일도 아니고, 다른 선택이 없었던일도 아닙니다. 그냥 내가 그렇게 선택했을 뿐입니다. 내가 분별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내가 죄악된 행동에 경각심이 없었고, 경계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오늘 선택할수 있습니다. 악보다 선을, 우상보다 하나님을 선택할수 있습니다. 웃사의 실수와 변명을 답습하지 않아야겠습니다. 내가 잘못 실수해 놓고서 하나님을 비난하고 그분께 분노하고 두려워하는 오해도 버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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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처럼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바로 어제 본문만 봐도 하나님과의 대화의 친밀도가 다른 이랑 비교도 안되는 수준입니다. 그러나 그런 다윗도 잘 모릅니다. 실수하고 해맵니다. 언약궤를 수레에 옮기고, 웃사가 죽자 언약궤를 버려놓듯이 오벧에돔의 집에 남겨두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회개는 커녕 분노하고 두려워할뿐입니다.

    신앙의 성숙이 모든것을 분별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나의 삶의 모든 선택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성숙하고, 하나님과 친밀해도 계속 더 사모해야하고, 더 점검해야합니다. 더욱 분별하고, 매일 이와 같은 신앙의 삶을 반복해야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적 친밀함과 성숙함도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너희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예수님의 이 경고의 말씀이 더욱 선명하게 들리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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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냉정합니다. 왕이 바뀔 때가 바로 정치가 가장 안정되지 않을때 입니다. 그리고 이 기회가 바로 적군에게는 가장 공격하기 좋은 적기 입니다.

    세상이 어디 우리 상황 봐주고 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우리 상황을 봐주고 그렇지 않습니다. ‘우는 사자’처럼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가 가장 약해질때 휘몰아치듯 공격해 옵니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삶에 고난속에서 더 큰 고난들을 자주 마주하는지 모릅니다. 어려운 상황에 더 큰 위기를 마주하는지 모릅니다.

    유학갔는데 IMF가 터지고, 힘들게 유학생활 하는데 홈스테이 주인이 도망가 버리고, 열심히 아르바이트 했는데 알고보니 월급으로 사기 당하고, 학비 필요한데 집에 불나고 다 겪은 일들 입니다.

    그러나 위기 속에서 다윗은 “여호와께 물었습니다!”(19절)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고 승리했습니다. 믿음의 인생은 사탄의 파상공세를 막아냅니다. 기도하는 인생은 위기를 극복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결국 승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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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우상들을 다 버리고 도망했으므로”(21절) 급하면 자기 신이고 뭐고 다 버리고 도망가버립니다. 이게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진심입니다.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가지 않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버리시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을 버리지 않습니다. 힘들다고 버리고, 어렵다고 버리고, 무섭다고 버리고, 불리하다고 버리고, 이익이 없다고 버리고, 방해된다고 버리고, 나 살겠다고 버리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예수를 버렸습니다. 우리 예수님 ‘우상’아닙니다. 그렇게 버릴수 없습니다. 버려서는 안됩니다. 좋을 때 가지고 있다가 힘들때 버리는 우상같이 취급하면 안됩니다.

    나를 버리시지 않은 예수님을 기억하며 끝까지 예수님을 버리지 않는 믿음의 굳은 의지와 결단을 지켜야합니다. 그 어떤 이유로도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주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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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디테일한 개입이 놀랍습니다. 그냥 “올라가 싸워라!” 정도가 아닙니다. 매복 전술을 상세히 알려줍니다. 타이밍까지 알려주십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일들이 많은데 이 말씀붙들고 기도 좀 더 뜨겁게 해야겠습니다 ^^ 하나님의 디테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정확한 때가 필요합니다. 이왕 이렇게 된거 이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 뜨겁고 간절하게 기도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세밀한 지혜와 개입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응답이 이뤄질때 다윗처럼 하나님의 방법과 때에 온전히 순종하여 움직이는 제가 될수 있게 준비하고 있어야겠습니다. 응답해주실 주님께 미리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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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기록된 숫자를 보니 비로서 더욱 실감이 됩니다! 다윗은 30에 유다의 왕이 됐고 37살에 이스라엘의 왕이 됬습니다. 이밀인즉슨 그가 경험한 드라마틱한 인생은 그가 20대 경험한 것이라는 것이죠. 겨우 20대입니다.

    20대를 무시하는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20대를 지나온 사람으로써 그 나이에 다윗이 경험한 것과 같은 인생을 경험했다면 저는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니면 결국 죄를 지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모여들 때 리더십 능력부족으로 그들을 잘 인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윗이 이런 인생이 결국 ‘기름부으심’ 때문에 기능하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고 은사가 있던 어린시절의 다윗! 하나님은 거기에 기름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더욱 두각을 나타내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우리는 비로서 가능한 사람이 됩니다. 나 혼자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합니다. 내 능력으로는 택도 없는 일을 해 냅니다. 인생의 경험이 일천한데도 지혜와 통찰로 헤쳐나가기 시작합니다!

    오늘도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때 (비록 사람의 손을 빌리지만)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해지는 취임입니다. 결국 이 상징적 취임을 통해서 그의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37살의 다윗보다 지금의 제가 3살이 더 많습니다! 비슷한(?) 나이대여서 그런지 자꾸 제 자신을 대입하게 됩니다. 다윗과 같이 저도 지금 섬기는 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받고 하나님의 능력과 인정안에서 이 교회를 성공적(?)으로 섬기고 싶습니다! 쭈욱 잘 섬기고 싶습니다! 이 모든 일이 기능하게 하실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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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비웃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에서나 다윗이지 다른 사람들은 콧방귀 낍니다! 그러나다윗은 이러한 시각 앞에서 전혀 위축되지 않습니다! “너는 안돼” 라고 한껏 조롱해도 칼을(?) 갈며 준비할 뿐입니다. 그렇게 여부스 사람은 다윗앞에서 무너집니다!

    신앙인의 강력함은 교회 안에만 머물지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인정하고 리더로 찬양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에서도 빛납니다! 그 누구보다 성실하고 탁월하고 강력하고 빛이 납니다!

    간혹 교회에서는 모든 리더의 자리를 꽤차고 인정받으면서 회사에서는 매일 ‘무능자’ 혹은 ‘월급루팡’으로 불리며 시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는 전혀 건강한 신앙인이 아닐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비웃음을 당할지언정 비천하지 않습니다. 비루한자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당당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강력하게 마주하며 살아야합니다!

    세상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끝까지 조롱합니다. 아무것도 할수 없다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결국 승리하셨습니다! 그들의 비웃음을 오히려 비웃듯 온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자녀들의 본 모습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은 승리의 하나님 입니다! 능력의 하나님 입니다!

    세상에 주눅들지 않고, 위축되지 않고, 굴복하지 않고, 정의 내려지지 않는,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세상을 깜짝 놀래키는, 복음으로 정복하는 신앙인이 되기로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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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겁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큰 일이 터지면 주로 첫번째 반응이 두려움입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동시에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후속조치에 대한 준비를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 주변 가족들은 저에게 ‘유리멘탈’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습니다.

    이스보셋을 보면서 안타깝기도 하고 제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한 나라의 왕으로써 (아직 그는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국가의 위기를 선포하고 군대지휘관들을 다시 모아 이 위기를 어떻게 타계할지 상의하고 또 필요한 명령을 내리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아브넬의 죽음이 충격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사실 아브넬은 이미 이스보셋을 향하여 배신(?)을 선포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오히려 아브넬의 죽음을 기회로 보는 담대함도 보여줄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물론 이 모든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흐르고 있는 어쩔수 없는 영적 흐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보셋에게서 다윗으로 왕권을 옮기려고 하십니다. 그러니 거시적이고 영적인 시각으로 보면 이는 자연스러운 흐름 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 속에 있는 개개인을 보면서는 이스보셋의 행동에서 답답함과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는 왜 이렇게 밖에 하지 못하는가? 특히 낮잠시간이라고 낮잠 자고 있는 모습에서 왜 그가 망할수밖에 없는 왕인지 명백하게 드러나기도 합니다.

    ‘유리멘탈’은 결국 내 자신을 의지하고, 내 상황을 너무 의지한 나머지 그것들이 무너질때 생기는 부작용과 같은 것입니다.

    담대함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내가 약할때 강함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면 이런 저런 인생의 사건들을 마주할때 두렵고 자포자기 하는 인생의 실수를 멈출수 있습니다.

    오늘 마주하는 일 가운데 담대하고, 차분하고, 기민하게 반응하고 움직이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강함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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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에게는 정치적 기회이기도 하지만 위기가 계속 찾아옵니다. 아브넬 죽는거 부터가 정치적 위기였습니다. 자칫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오해를 받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 지원을 받지 못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다윗은 아브넬을 향한 합당한 애도를 표현하고 일을 바르게 처리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의 진심을 알리는데 성공합니다. 다행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끝나고 나서 얼마 지나지도 않아 또 다시 이스보셋이 죽는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는 기회같지만 또 다시 찾아온 위기이기도 합니다. 어렵게 얻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인데 이 사건을 통해서 또 다시 오해 받을 수도 있습니다.

    정치적 입지를 떠나서 아브넬처럼 이스보셋 사건도 다윗의 마음에서 비롯된 사건이 아닙니다. 그가 흘린 피가 아닙니다.

    다윗은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반짝 거립니다!! 어떻게 자신의 진심을 소통해야할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확한 애도는 물론이거니와 그를 죽인 자들을 향한 확실한 심판을 보여줍니다.

    결국 돌파의 힘은 진심에서 나왔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관계와 상황의 어려움 속에서 진심이 보여주는 힘은 놀랍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진심을 소유하는것, 그리고 진심으로 반응하는것이 중요합니다. 기술과 임기응변(?) 이전에 진심입니다. 가식은 들키고 진심은 통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심, 이웃간에 관계에서 진심, 회사에 동료들과 일하며 진심,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진심, 진심으로 살고, 진심으로 반응하고, 진심으로 소통하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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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본 ‘기회의 순간’이 ‘사자의 입’으로 걸어들어가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주식을 안하지만 주식에서 ‘기회는 지금이다!’ 생각하고 올인 했다가 ‘사자의 입’으로 걸어들아가는 형국이 되어 망했다고 하는 사람들의 기사나 비슷한 뉴스를 접한 기억들이 있습니다.

    내가 보는 ‘기회의 순간’이 참 치명적으로 위험한 착각일수 있습니다.

    ‘기회의 순간’을 공의의 시선으로 판단하고, 합법의 시선으로 판단하고, 주변의 충고의 목소리를 무시하지 않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시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과정을 생략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늦으면 좀 어떻습니까? 죽는거보다 낫습니다. 내 인생의 기회는 하나님으로 이미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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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것이 제자리로 돌아가야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왕 이후에 다윗임을 정확하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이스보셋이 아닌 다윗의 통치로 돌아가야합니다. 그것이 제자리 입니다. 미갈도 제자리로 돌아가야합니다 원래가 다윗의 아내였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제자리를 잃었던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올때 혹은 제자리로 돌려 놓으려고 할때 반발력이 생깁니다. 이스보셋과 그의 집안은 방해가 되기도하고 또 충돌을겪게 됩니다. 미갈의 현 남편도 울며불며 아내를 떠나 보내야합니다.

    제자리를 떠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되돌리려할때 반발이 생깁니다. 그러니 애초에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혹 제자리를 떠나게 됐고 다시 돌려놓는 상황이 될때가 되면 반발력 때문에 멈추지 말아야합니다. 제자리로 돌려야합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통치로 돌아가게 될것입니다. 미갈은 원래대로 다윗의 아내로 다시 돌아오게 될것입니다. 덕분에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 돌아오게 될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가정으로, 교회로, 비전과 사명으로, 거룩과 경건으로, 일터로 돌아갈것입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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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브넬은 “상의”했다고 하지만 사실 상의가 아닌거 같아 보입니다. 아브넬은 “당신들은 전부터 다윗을 왕으로 삼기를 원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건 반역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아브넬 이렇게 당당하게 얘기합니다. 상의가 아닌 권위자로써의 명령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는 줄곧 권위를 바르게 사용하지 못했고, 나라를 다윗에게 넘겨주는것도 본인의 정치적 유익 때문에 다윗에게 넘기려고 했던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행사된 권위는 결과적으로 다윗을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만드는데 유익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권위는 나의 유익만을 위해 혹은 나에게 유익한 때에만 쓰는게 아니라 공공의 유익과 바른 상황에 써야하는 것입니다. 권위를 바른 때에, 바른곳에 사용할 줄 아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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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그 즈음 전장에 나갔던 다윗의 부하들과 요압이 적을 무찌르고 많은 전리품을 갖고 돌아왔습니다” (22절) 요압은 여전히 좋은 군인입니다. 군사로써 탁월합니다. 유다는 그로 인해 전쟁에서 큰 승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부정하지 못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요압은 동시에 다윗에게 큰 골칫거리 입니다. 왕의 명령보다 자신의 의지가 더 중요한 사람입니다. 탁월은 한데 자신의 뜻대로 행동합니다.

    요즘 다시 화제가 되고 있는 AI ChatGPT가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기전에 소설 속 ‘아시모프의 로봇3원칙’이 많은 이들에게 AI의 행동 윤리 강령으로 알려져있었습니다. 여기서 가장 기본이 되는, 가장 우선되는 원칙이 바로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된다.” 입니다. 아무리 로봇이 유용하고 수많은 일을 능동적이게 한다고 해도 로봇은 인간에게 반드시 지켜야할 선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선을 지키지 못하면 패기됩니다.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죠!

    하나님께 여전히 ‘좋은 군인’처럼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하는 것만 보면 ‘좋은 군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자기랑 다를때 자신의 뜻을 실행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딱 요압같은 사람입니다. “제사보다 중요한것이 순종입니다!” 사울왕에게 이미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요압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면 안됩니다.

    ‘좋은군인’이면 좋은 군인답게 끝까지 왕의 명을 따르는 자가 되야합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왔다갔다 하면 안됩니다! 맡겨진 일에는 주인의식을 갖되 내가 주인이라는 착각은 해서는 안됩니다! 주인의 뜻을 거스르는 ‘좋은군인’이란 애초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요압처럼 선넘는 자가되지 않기로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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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압은 이해가 안됩니다. 나의 가족을 죽인 원수가 왔었는데 내가 모시는 나의 군주가, 내가 사랑하는 나의 군주가 그 원수를 그냥 보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섭섭하고 배신감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그 분노를 앞뒤 안가리고 실행합니다 그렇게 다윗 몰래 아브넬을 죽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원수들이 너무 평안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 그냥 내버려두시는거 같습니다. 그냥 평안하게 돌려 보내주는거 같습니다. 나를 짜른 그 사람 더 승진하고 더 잘됩니다. 나를 아프게 한 그 사람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삽니다. 나에게 사기친 사람이 잘 살기도 합니다. 너무 억울합니다. 분노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 섭섭하고 배신감이 일어납니다. 요압이 다윗앞에서 경험한 이 일이 우리가 간혹 하나님앞에서 느끼는 경험입니다. 그러나 이때마다 우리는 직접 칼을 들어 그들을 죽이지 않습니다. 이는 공의의 실현이 아닌 또다른 불의의 탄생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불의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때 해결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맡겨야합니다. 이는 마치 세상의 불의를 개인이 해결하지 않고 법에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분노에 휩쌓여 살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섭섭함과 배신감이라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겠습니다. 결국에 공의를 실현하실 하나님을 믿고 인내하겠습니다. 불의가 사라지는 날을 꿈꾸며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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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움은 오랫동안 계속됐습니다!” (1절) 이스보셋도 계속 왕의 자리를 고집합니다. 분명히 다윗은 점점 강해지고 자신의 집안은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다윗이 기름부음 받음을 이스보셋도 모를리 없습니다. 그러나 계속 고집을 부려봅니다. 맞습니다. 원래 권력이라는게 그렇게 쉽게 놓아지는것이 아닙니다. 욕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지키고 싶은 마음이 드는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만약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욕을 내려 놓았으면 어땠을까? 하나님의 뜻을 받아 들여서 자신이 먼저 다윗에게 왕권을 넘겼으면 어땠을까? 아마 그랬다면 불필요한 싸움이 지속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간혹 넘겨야하는것을 놓지 못하고 붙들고 고집부리고 싸우는 사람들 봅니다. 기업의 최고 경영자가 회사를 못넘기고 고집 부리기도하고, 교회의 목사가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넘겨야하는것이 확실한데, 모두가 알고 있는데 본인만 인정하지 않고 싸웁니다. 그렇게 오랜기간 싸우다보면 다치고 상처입는 사람만 점점 많아 집니다.

    언젠가 그런 시간, 그런 상황들을 마주할 때가 온다면 겸허하게 내려 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야겠습니다. 넘겨줘야할때 후회가 남거나 욕심이 생기지 않도록 허락된 시간동안에 모든것을 다 쏟아내야겠습니다. 기회가 있을때 최선을 다해 일하고, 누리고, 섬기고, 언젠가 넘겨야할때가 오면 기쁨으로 홀가분하게 넘길 수 있는 자가 되야겠다고 미리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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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의 골치거리가 요압이라면 이스보셋의 골칫거리는 아브넬입니다. 처음에는 너무 힘이 됬는데 나중에는 골칫덩이가 되고 만것입니다. 아브넬은 심지어 사울왕의 첩과 동침하고 오히려 큰소리치기도하고 이스보셋을 협박하기도 합니다.

    앞서 말한것처럼 아브넬은 이스보셋이 왕이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공을 인정받아 이스라엘에서 큰 세력과 기반을 쌓아 올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왕도 아닌데 그와 비슷한 권세를 누리며 안하무인의 자세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가 무섭습니다. 내가 한 일에 대한 대가를 내가 임의로 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정도 일했으니까 회사에서 이정도 돈은 좀 꿀꺽해도되!” 그렇게 횡령도 합니다. “내가 이 교회를 위해 이정도 일했으니까 나는 이 교회에서 하고 싶은거 다해도되, 내가 가지고 싶은거 다 가져도 되! 이 교회의 주인은 나지!”

    나의 성취에 대한 과대평가, 대가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착각!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도둑이 되고, 월권을 행사하기도하고, 탈취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불의한 일을 합리화 하고, 타당한 권리라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성취와 영광에 상관없이 공의를 따라 살아야합니다. 정의를 벗어나서는 안됩니다. ‘성취’는 불의한 행동에 타당한 명분이 아닙니다. 나의 업적이 나의 무질서한 행동을 용인해주는 변명이 되지 못합을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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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들을 뽑아 우리 앞에서 겨루게 하자!” (14절) ‘청년’들이 무슨 자신들을 위한 유희의도구도 아니고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화가 납니다. 둘이 굳이 써워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적이 아닙니다. 적은 블레셋입니다. 오히려 유다와 이스라엘은 전략적 연맹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진것입니다. 아브넬이 이런 말도 안되는 제안을 하면 요압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거절해야하는데 그 또한 거절없이 선뜻 받아 들입니다.

    결국 이 어리석은 일로 인하여 4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죽게 되고 요압의 동생 아사헬이 죽임 당하게 됩니다.

    요압과 아브넬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서로 마주하고 보니 세력다툼이라도 하고 싶고, 강함이라도 증명해보이고 싶었나봅니다. 어쩌면 둘만의 자존심 싸움이 확장된걸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아도 지혜로운 행동이 절대 아닙니다.

    어리석은 제안은 해서는 안되고, 받아서도 안됩니다. 욕심과 자기 증명이라는 명분으로 파괴적인 일을 해서도 안됩니다. 폭력적 과시를 멈춰야합니다. 즐거움과 유희를 위해서 타인을 이용하고 어려움에 빠뜨리는 일은 더더욱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불필요한 일에 목숨걸고 자원해서 뛰어드는 것은 아닌지 분별이 필요 하기도 합니다. 멈추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한 아사헬같은 실수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 본 이 사건은 말그대로 인재 입니다. 재앙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합니다. 리더라면 더더욱 조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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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압의 동생 아사헬은 자기를 잘 모릅니다. 아브넬은 아사헬에게 쫓기며 이렇게 말합니다. “더이상 쫓아오지마!! 내가 너 무서워서 도망가는거 아니야!! 여기서 그냥 다른 군사한두명 잡아서 가! 계속 쫓아오면 내가 널 죽일수밖에 없다!”

    이쯤되면 아브넬이 진짜 봐줬습니다. 기회를 줬습니다. 그런데 아사헬은 들은척도 안합니다.

    아마도 아사헬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했을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착각합니다. 나의 적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결국 허망하게 죽고 맙니다. 본인의 착각과 어리석음과, 아집과, 고집 때문에 죽게 된것입니다. (물론 죽인 아브넬이 제일 나쁜 사람입니다. 그러나 진짜 아사헬은 죽임당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뭐 하나 잘하면 쉽게 착각합니다. 아사헬의 경우 ‘기민함’이었을 것입니다. 또 상황이 내게 유리하게 풀려가면 쉽게 착각합니다. 흥분하고 앞뒤 안가립니다. 그러나 이럴때 일수록 더욱 조심하고, 객관적이여야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해야합니다. 잘하기 때문에, 상황이 내게 유리한것 같아서 무분별하게 내 인생의 ‘아브넬’을 쫓다가는 허망하게 망할수있습니다.

    결국 자신을 향한 객관적인 눈, 분별의 지혜, 충고를 받아들이는 자세, 환경에 현혹되지 않는 중심, 타인의 능력을 인정하는 겸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순종의 자세가 매일의 삶에 필요합니다.

    3

    아닌거는 좀 일찍 말하면 됩니다. 좀 일찍 멈추면 됩니다. 아브넬이 먼저 말하던지, 요압이 아브넬이 말하기 전에 먼저 멈추면 됩니다. 그런데 한참 쫓던 요압은 아브넬이 “그만좀 해라”(26절) 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비로소 멈춥니다.

    아브넬이 자존심 놓고 조금 일찍 더 “그만하자!” 항복(?) 선언했다면 피해가 적었을수도 있습니다. 요압이 아브넬이 사과하기전에 깨닫고 멈췄다면 더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건졌을수 있습니다.

    안되는 일을 하는것을 알았으면 최대한 빨리 멈춰야합니다. 최대한 빨리 말리고, 최대한 빨리 멈춰야합니다.

    목회도 하다보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내 욕심으로 일할때가 있습니다. 하다보면 함께 돕던 성도님들이 희생자가 되어 쓰러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정신 차리고 멈춰야하는데 계속 달립니다! “이러다가 다 죽어~”라고 말할판입니다. 멈춰야할 일을 빨리 멈추는 지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시작도 안하는 지혜가 있음 더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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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그마치 10년입니다. 그리고 숙적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슬픈건 슬픈거고 사실은 사실입니다. 이제 다윗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지난 10년의 시간 속에서 다윗은 여전히 돌아가야할 곳을 잊지 않습니다. 자신의 인생의 비전도 잊지 않습니다. 차곡 차곡 쌓아 올렸던 그의 시간과 경험들은 이제 새로운 변화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가 열렸습니다.

    물론 어느정도 기반이 닦인 그곳에 머물수도 있습니다. 10년 살았으면 ‘이방땅’이여도 집처럼 느껴질만 합니다. 괜한 시도를 인해 잘보였던 아기스의 눈밖에 날수도 있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회주의자라는 오해를 받을수도 있고, 사울왕의 죽음의 애통에 대한 진심까지도 거짓으로 매도 될수 있습니다. 다윗은 결정해야합니다. 비전을 쫓을 것인가 안주할 것인가?

    이 순간에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유다 성읍으로 올라가도 되겠습니까?”(1절)

    단순한 접근이지만 진짜 사명과 비전, 인생의 목적은 긴 시간이 흘러도 버릴수 없습니다. 안주하지 않습니다. 도전이 필요하고 위험을 감수해야하기도합니다. 때가 이르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실천되야합니다.

    “왜 지금 교회 개척을 해야해요?” 개척 얘기가 처음 나왔을때 들었던 질문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짧게 대답하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부르실때의 비전이고, 2년전부터는 때를 위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길이 열렸네요!” 자그마치 20년입니다. 17살에 목회의 비전을 받은 순간부터 잊지 않았던 교회의 비전을 놓고 37살부터 개척기도를 시작하고 39살에 개척에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비전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합니다. 용기있게 실천합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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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년 6개월간의 기다림은 다윗에게는 지난 10년의 도망자의 시간과는 또 다른 의미로 힘든 시간이었을것입니다. 유다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은 ‘사무엘의 기름부음’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자가되야합니다. 그런데 유다의 왕으로 기름부음 받았습니다. 조금 기다릴줄 알았는데 7년이 넘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이스라엘은 정치적 과도기에 빠집니다.

    그러나 이 시간들 동안 조급함으로 실수하지 않고, 강제와 폭력으로 빼앗지 않고, 적대하고 미워함으로 쓸데없이 적을 만들지 않고 차근 차근 일하고, 건강하게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스럽게 열어가시는 또다른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물론 다윗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을 터트리고 적을 만드는 요압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다윗이 보여준 ‘유다 7년6개월’의 지혜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유다 7년6개월'을 의심없이 살아낸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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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의 마음이 애통합니다. 극심한 슬픔에 빠져있습니다. 사울의 죽음도 그렇지만 사실 요나단의 죽음이 너무나 가슴 아픕니다.

    다윗은 주로 이스라엘을 위해 블레셋과 싸우던 군대장관입니다. 그는블레셋과의 전투마다 앞섰던 사람이고 항상 승리를 가져다 주었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많은 전투에 요나단과 함께 참여하여 생사고락을 함께 나눴을 것입니다. 피보다 진한 우정은 그렇게 탄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요나단의 죽음을 들었으니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요? ‘내가 거기 있어야했는데, 내가 같이 싸웠어야했는데, 내가 지켜줬어야하는데… 나의 형제여, 나의 친구여….’ 이런 생각이 드니 다윗의 마음은 무너지고 찟어질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사실 수년간 사울왕 때문에 요나단을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소식을 듣기도 쉽지 않은 상황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떨어져있다가 오랜만에 들은 소식이 사망 소식인것입니다. 슬프고도 슬픕니다.

    느닷없고 생뚱(?)맞지만 친구들이 생각납니다. 10년 20년 못본 소위 말하는 ‘베프’들이 있습니다. 일상과 상황에 쫓겨 못본 친구들입니다. 간헐적으로 소식을 듣고 연락이 닿지만 그정도입니다. 그러나 사실 인생이라는 전쟁터에서 우리는 언제 이렇게 갑자기 혹은 허망하게 죽을지 모릅니다. 친구한테 연락좀 해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안부좀 물어야겠습니다. 만날수 있는 친구들은 좀 만나야겠습니다. ‘허망한 죽음’뒤에 애통함으로 눈물흘리기 전에 미리미리 만나고 안부 묻고, 기도하고, 전도해야겠습니다. 느닷없이 친구가 생각나는 센티(?)한 아침이네요!

    사랑한다 친구야! 잘지내지? 보고싶다! 한번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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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의 애가에는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제물 낼 밭도 없을 것이다”(21절) “그는 너희를 자줏빛 좋은 옷으로 입혔고 너희 겉옷을 금장식으로 꾸며주지 않았느냐?”(24절)

    사울왕이 다윗을 쫓고 있어 나쁘게만 생각되는데 간과하지 말아야할 사실을 상기 시킵니다 .그래도 사울은 죽기전까지 백성과 나라를 위해 블레셋과 계속 싸운 사람입니다. 부정할수 없는 사실입니다. 사울왕이 아니였다면 이미 벌써 망했을수도 있습니다. 여인들이 누리는 재정의 풍족함과 제물을 얻을 밭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르지만, 잊고 있지만, 익숙하지만 오늘 누리고 있는 것은 은혜입니다. 아이가 모르는 사이에 매순간 부모가 흘려보내는 은혜를 누리고 있는것처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 ‘제물을 낼 밭’이 있고 나를 치장할 ‘좋은 옷과 금장식’이 있는것입니다.

    은혜가 떠오르는 아침입니다. 모든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일상의 누림이 놀라운 축복임을 다시 한번 상기 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누리는 것으로 인하여 주를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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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해야겠습니다. 다윗은 이 애가를 가르치라고 명령합니다. 기억해야합니다. 우리는 지난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다시 기억했습니다. 성찬을 통해서도 반복적으로 기억합니다.

    기억은 우리의 삶을 점검하게 합니다. 잘못에서 돌이키게도 하고, 다시 감사하게 하고, 은혜를 갚게도 합니다.

    미국이 기억하는 날중에 마틴루터킹의 날이 있습니다. 그를 기억하면 평등과 평화가 생각납니다. 나라가 분열될때마다 이 기억은 미국인들의 차별의식에 경종을 울립니다.

    예수님을 기억하는 인생이되야됩니다.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부활절에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성찬때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예수를 기억함으로 감사와 찬양, 거룩과 경건, 사명과 섬김의 삶을 놓치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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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울왕은 치명상을 당합니다 그리고 도망치던 중에 소망이 없는 상황을 직시하고 자신의 무기든자에게 죽여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그는 거절하죠. 이쯤되자 사울왕은 자신의 칼로 자결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사울의 무기맡은 자도 함께 자결하게 됩니다. (삼상31:3ff절)

    그런데 이것을 바로 옆에서, 혹은 주변에서 지켜보던 군사있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말렉 출신 군사’입니다. (그가 오늘 본문의 기록처럼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알수 있었던것은 아마 그가 사울왕의 근간을 지키는 군사의 무리중 하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이 순간에 ‘기회’라고 하는 좁은 문을 본능적으로 보게 됩니다. ‘여기서의 최선은 죽은 사울왕의 팔에서 고리를 빼고, 왕관을 가지고 다윗에게 가는것이다! 그리고 내가 죽였다고 하자! 어차피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러면 사울과 원수된 다윗에게 큰 칭찬을 받고 신임을 얻게 될것이다!’

    그는 찰나에 순간에 혹은 위기의 순간에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탁월한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존 본능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실행에 옮기는 실행력이 있습니다.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속에서도 태연할 정도로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는 차분함도 있습니다. 그가 다윗을 찾아가는 이러한 행보는 그의 정치적 이해도와 욕심도 보여줍니다. 나름의 지식이 있다는 것이죠. 실제로 그는 ‘외국인’입니다.(13절) 기존에 이스라엘에서 사회적 지위가 절대 높아질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사울왕의 죽음’을 기회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세상은 이와 같이 찰나의 순간에 기회를 만들어 내는 사람을 탁월하다고 말합니다. 위기의 순간을 기회로 만드는 사람을 실력자라고 말합니다. ‘흙수저’ 인생을 생존본능에 따라 ‘금수저’로 만들어 내는 인생에 대한 찬양과 동경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선악의 구분을 정확하게 하십니다. 능력과 결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 시작과 과정과 결과를 판단하시는 것이죠.

    실제로 수많은 ‘기회주의자’들의 ‘생존본능’은 불법으로 가득한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들 본인들에게는 살기위한, 성공하기 위한, 타당한 행동이었으나 결국 들키는 순간 법정에 서서 그들의 행동에 대한 판결을 받게 됩니다.

    본능적(?)으로 ‘기회’가 보일때 하나님의 눈으로 검증하겠습니다. ‘생존의 길’이 보일때 하나님의 눈으로 검증하겠습니다. ‘성공’의 유혹 앞에서 과정의 거룩함을 점검하겠습니다. 거짓위에, 타인의 눈물 위에, 욕심 위에 나의 삶을 세우지 않도록 경계 또 경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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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다윗의 슬픔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원수의 죽음을 이토록 진정성 있게 아쉬워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원수도 아닙니다. 생명을 빼았으려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슬퍼하는가?!

    다윗은 사울이라는 인물을 ‘나의 원수’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다윗은 한 인물을 단면적으로, 내 중심적으로 해석하지 않은것입니다. 다윗 본인에게는 ‘원수’가 맞습니다. 그러나 사울이라는 인물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원수’는 아닙니다. 그는 나의 베프 요나단의 아버지고, 이스라엘 백성의 왕입니다.무엇보다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사람’입니다.

    한 인물을 바라보는 다윗의 시각은 성숙합니다. 아니 성숙을 더욱 뛰어넘습니다. 영적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의 시각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죄인으로 낙인찍지 않습니다. 그 사람 안에 소망과 빛을 보십니다. 시몬을 베드로로 보십니다. 세리 마태에서 제자 마태를 보십니다. 핍박자 사울안에 있는 ‘복음전도자’를 보는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이 내 안에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목회자가 이런 시각을 갖춘다면 성도를 대할때 성숙하고 영적인 대면을 할수 있을 것입니다. 내 눈만으로 보면 ‘원수같은 성도’들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가능성을 보게 됩니다. 다윗의 눈으로 보면 중보하게 됩니다. 나의 시각, 나의 해석, 나의 눈만으로 타인을 이해해서 평생 원수로만 사는, 미움에 휘둘려 사는 목회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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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생전 예수님의 주장들은 부활로 증명되었습니다. 부활로 증명된 신격은 예수님 말고 없습니다. 부활을 주장하고 선언한 자는 많으나 다들 죽음 이후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거짓말쟁이요 예수님만이 진짜 입니다.

    예수님 여인들에게, 경비병들에게, 제자들에게, 수많은 이들에게 반복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거짓이 아닌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모든 주장도 사실입니다. 구원의 메세지도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합니다. 그분을 믿어야 영원히 삽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분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으세요! 고민하지 마세요! 의심하지 마세요!

    이 사실을 믿는 자라면 가서 전하세요! 믿지 않고 아직도 ‘골방’에 앉아있는 인생들에게 가서 전하세요 “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 부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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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만큼 중요한 말씀은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그곳에서 너희가 예수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라!” (7절) 입니다.

    천사들이 전하게 한 말씀입니다. 부활의 소식은 기쁨과 감동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환희와 감격에 머물지 않습니다. ‘갈릴리의 조우’는 곧 사명을 위한 조우였습니다. 결국 부활은 기쁨을 넘어서 사명의 부르심의 메세지를 동시에 담습니다.

    부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사명자입니다. ‘사람낚는 어부’로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부활하신 영광의 예수님과 그곳에서 주저 앉으면 안됩니다. 일어나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이는 마치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변모하시는 영광을 보았지만 초막 셋짓고 거기에 거하지 않고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산을 내려 온것과 같습니다.

    부활신앙은 사명의 신앙입니다. 부활의 감격은 사명의 힘으로 전환되어야합니다. 부활의 기쁨은 사명의 동기가 되어야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위해 살기로 결정합니다. 오늘 ‘큐티’라는 나의 ‘갈릴리’에서 나를 만나주신 부활의 예수님이 내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겠습니다. “너는 내 양을 먹이라!”

    아멘 또 아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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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혹 식사 습관이 안좋거나 삶의 습관이 안좋아서 결과적으로 간이 상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결국 치료를 위해서 간이식을 위해 적합한 사람을 찾기 시작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찾기가 어렵습니다. 부모나 형제 자매 중에 간이식 적합자를 다행히 찾게 되면 이제 간 이식의 과정에 들어갑니다. 사실 간이 안좋아진 것은 아픈자의 안좋은 삶의 습관입니다. 그런데 그의 건강의 회복을 위해서 건강한 간을 가진 사람이 시간은 물론이거니와 생명을 걸고 수술대위에 몸을 누입니다. 그렇게 간을 때어내어 이식에 성공하면 다행히 간 질병에 걸린 사람이 회복이 됩니다.

    건강한 사람의 희생을 통해 회복되는 은혜를 경험한 것입니다. 막 산건 그 사람인데 육체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절제하고 살아낸 건강한 사람이 희생해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렇게 한 사람의 희생으로 간의 건강을 회복한 사람이 다시 간이 망가지는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간 이식 해준 사람의 마음은 아랑곳 않고 그냥 막 삽니다. 그러면 결국 또 다시 간이 아파지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제대로라면 간이식 받고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으먼 이번에는 제대로 삽니다. 건강한 삶의 습관을 살아냅니다. 간이 혹 망가지지 않도록 경계하며 삽니다.

    예수님 우리의 회복을 위해서 십자가 위에 올라주셨습니다. 잘못은 내가 했는데, 내가 병자인데 예수님께서 수술대 위에 목숨을 내걸고 누워주셔서 ‘간’이 아닌 ‘생명’을 때어주신 것입니다.

    제대로 살아야겠습니다. 그분 때문에 치료됐습니다. 그분 때문에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두번째 기회입니다. 그분의 희생과 사랑이 무색해지지 않도록 변화된 인생을 사는것인 ‘내게 맡겨진 십자가를 지는 삶’의 첫걸음인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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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께서 원하신 일이었다” 라는 말이 참 감동적입니다. 간혹 아이가 아프면 정말 대신 아프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픔을 자처하는 마음입니다. (물론 대신 아파줄 능력은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에 내가 대신 “으스러”질수 있다면 자처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이 마음인것을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감동되는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 아기들은 부모의 이런 마음을 잘 모릅니다. 대신 아파주고 싶어하는 부모의 절절한 사랑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커서 애기를 낳고 기르다보면 아이를 사랑하면서 비로서 ‘이 사랑’을 알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의 마음도 그러므로 행해 봐야 그분의 마음을 더욱 잘 알게 됩니다. 자처하여 십자가를 지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마음, 희생하는 마음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실천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낼 때 비로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다시 한번 더 느끼게 됩니다.

    사랑의 실천이 오히려 사랑의 크기를 가늠하게 하는것입니다. 사랑해봐야 받은 사랑에 대해 진정한 감사할수 있습니다.

    오늘 ‘십자가’를 실천하므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가깝고 실제적으로 느끼는 하루 되길 기도합니다.

    3

    용서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나같은 죄인, 나같은 쓸모없는 자를 용서해주시고 사명으로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기대하는 목적이 있는 줄 압니다. 용서 받았으니 다른 삶을 사는게 맞습니다.

    이제는 내가 아니요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시는 줄 믿습니다. 내가 먹고, 마시는것, 말하고, 행하는것, 죽고, 사는것 모두 주를 위하는 인생이 되야하는 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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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추구하는 인생이 있습니다. 내가 편안하게 누리는 확보된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님께서 내 삶에 들어오십니다. 그러면서 공고히 쌓아 놓았던 나의 삶의 패턴들이 위험을 받습니다. 내가 누리는 권리들을 기존과 같이 누리기 힘들어 집니다. 예수님이 맞는 말을 하고 계시고, 그 방법이 맞습니다. 그런데 알고 있지만 예수님 때문에 나의 삶과 내 주변이 많은 변화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것이 불편합니다. 소화가 안됩니다. 점점 두고보던 소극적 마음이 적극적인 개입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예수를 내 쫓아야겠다!’

    그렇게 바리새인들과 기득권자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예수님은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십니다. 내가 누리던것에 대해서 점검하라고 하십니다. 삶의 가치도 바꾸게 하시고, 그동안 누리던것이 죄라고 도전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나를 죽여야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충돌하는 나의 의지, 내 생각, 나의 기준, 나의 방법, 나의 욕망을 죽여야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죽이는 유대인들처럼 오히려 예수를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를 죽여서 자신의 자유를 얻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죽이면 자유를 얻는게 아니고, 예수를 죽이면 영원한 죄수가 되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나를 풀어주러 온 사람을 죽이면 나는 그 감옥에 다시 영원히 갇히게 되는것입니다.

    내 삶에 예수님이 찾아와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나의 어그러진 인생에 빛이 되주셔서 무엇이 어둠이고, 무엇이 죄인지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뱡향을 알려주시고, 비전이 되어주시며, 기준이 되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를 죽이는 어리석은 인생이 아니라 나를 죽이고 예수를 따르는 인생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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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 십자가 위에서 안팎으로 고통이 이루 말할수 없습니다. 육신은 형언할수없는 고통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계속 모욕을 합니다. 죄인이라고 말하는것도 억울하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것도 화가 납니다. 거기다가 자신의 제자들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수많은 “호산나”를 외쳤던 자들도 침묵하고 있습니다. 여기 저기서 간헐적으로 침도 날라오고, 돌도 날라옵니다. 대제사장은 끝까지 조롱합니다. “어디 한번 십자가에서 내려와봐라!” 외부에서 가해지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할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면에서도 이런 울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그분은 왜 침묵하시는가?’ 생각이 이쯤이르자 예수님 소리치기도 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예수님은 마지막에 마지막 사명의 순간까지 극심한 고난을 당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안팎에서 공격이 들어옵니다. 끈질기게 들어옵니다.

    교회를 개척하며 섬겨가는데 외부에서 공격합니다. “네가 지금 거기에 교회를 새롭게 개척하는게 맞아? 니가 잘하고 있는거야? 결국 안될꺼야! 고생만하겠지! 원래 여기는 안돼! 이러다가 금방 접고 갈꺼지?!” 부정적인 얘기들이 들려오곤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내 내면에서도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내가 잘하고 있는걸까? 이게 정말 맞나?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서두르지 않으시지? 만약 내가 비전을 잘못들은거면 어떻게 하지?’

    사명을 감당하는 자 안팎에서 날라오는 공격을 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처럼 끝까지! 사명은 끝까지 입니다. 저도 끝까지! 우리 모두 끝까지 화이팅입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제 인생의 비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맡기신 사명 다 이룰때까지 달려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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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가 없는 분을 왜 풀어주지 못할까요? 왜 ‘명절사면’ 생각하고 있나요? 특별 사면 같은거 굳이생각안해도 됩니다. 죄가 없는데 그냥 풀어주면 됩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지금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특별사면’까지 들먹이고 있는것입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내 자리 지키기 위해서, 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죄가 없는 타인에게 불의를 행합니다. (‘나름 나는 최선을 다했어’ 정도로 불의를 행한 자신을 위로합니다.)

    어린아이는 “형이 했어!” 라고 형에게 누명을 씌어버리기도하고, 회사 선임은 임원의 추궁을 받자 은글슬쩍 “왜 일을 이렇게 밖에 못하지?” 라고 자신이 결제한 것의 책임을 후임에게 떠넘기기도 합니다. 그들도 자신이 잘못한것을 압니다. 그런데 살아야하니까 거짓말하는것입니다. ‘나자신’을 위해 타인을 죽음으로, 절벽으로 내 모는 것입니다.

    불의 입니다. 범죄입니다. 십자가에 더 가까운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고 오히려 빌라도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아이러니 입니다. 세상의 모순입니다. 죄인이 죄의 심판을 받지 않고, 의인은 죄인으로 누명을 쓰기도 합니다.

    결국 궁극적으로 ‘나’를 지키려고 선이라는 선은 모조리 넘어서는 자들이 만들어 내는 비극입니다.

    ‘나’를 위해 모든것을 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모든 일에 적법한 명분이 될 수 없습니다. ‘나’를 위하여 불법을 행해서도 안되고, ‘나’를 위하여 남을 위기로 몰아세워도 안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진리와 공의, 공정과 거룩을 지키는 선택을 하는자가 되야겠습니다. (빌라도는 자리는 지켰는데 영혼은 못지켰습니다!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2

    손을 씻어서 죄를 씻을 수 있다면 세상 모든 이가 맘편하게 죄짓습니다. “나는 아니예요” 발뺌한다고 죄가 없어진다면 누구도 죄를 경계하지 않을 것입니다.

    죄는 그렇게 씻기지 않습니다. 죄는 그렇게 무마되지 않습니다.

    죄는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로 씻을 수 있습니다. 다른 대속은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세상에서 깨끗한척 해도, 아닌척 해도, 발뺌하고, 부정해도 절대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차라리 빌라도 예수께 “저의 연역함을 이해해주시고 저를 좀 용서해주세요!” 하는게 당연히 더 맞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손을 씻다뇨!! 아니라고 부정하다뇨!!!

    그런데 세상도 그럽니다. 분명히 죄 사함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믿어라!” 라고 친절히 죄를 씻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나름의 ‘손씻기’와 ‘부인’으로 죄를 모른척하려고 하고, 죄인이 아닌척 하려고 하고, 죄의 문제가 해결된척 하려고 합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죄는 그렇게 씻기지 않습니다. 죄는 그렇게 무마되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보혈 앞에서, 그 긍휼을 의지하여 기도합니다. 회개합니다. “주님 저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죄인입니다. 그러니 주님 나의 죄를 씻어주세요! 나를 정결하게 해주세요! 나를 구해주세요!” 아멘

    3

    “모든 백성이 일제히 대답했습니다. 그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리시오!”(25절)

    정신좀 차려야겠습니다. 생각좀 해야겠습니다. 쉽게 말하고, 쉽게 결론 내려도 안되겠습니다. 이렇게 위험한 말을 그들은 막 내뱉고 있는것입니다.

    정확하게 알아야합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바른 눈으로 봐야합니다. 군중에 휩쓸리고, 분위기에 휩쓸리면 안됩니다. 내가 하는 말에 책임을 질수 있는지, 내가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내 뱉어야합니다.

    어느 때나 바른 생각과 분별, 바른 언어, 바른 결정이 필요합니다. 조급하고, 군중에 휩쓸리고, 분별하지 못하고, 감정에 휘둘려 내리는 결정은 반대로 철저히 경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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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가 십자가를 져야했다면 그는 잘수 있었을까요? 야고보가, 요한이 잡혀 죽는다고 했다면 그들은 잘 수 있었을까요? 내가 죽음의 당사자라면 그렇게 피곤하다는 핑계로 잘 수 있었을까요? 피곤을 따지면 예수님이 더 피곤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못 주무시죠! 십자가를 지는 당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3명의 제자는 좁니다. 예수님의 일은 결국 ‘남의 일’ 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일’은 마음은 가지만 ‘나의 일’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핑계와 변명이 쉽습니다. 자기 합리화가 쉽습니다. ‘내 일’이 되야 기도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중보의 비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가 ‘그분의 죄’가 되었기 때문에 십자가를 오르셨습니다. 그렇게 “괴롭고, 슬픈”일인데도 ‘남의 일’이 아닌 ‘자신의 일’이 되었기 때문에 기도하셨고 십자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분의 일’이 아니고 ‘나의 일’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일’뿐만아니라 나에게 맡겨진 ‘나의 일’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위한 기도는 나의 일 입니다. 그러니 간절히, 절실히, 졸지 않고 기도해야겠습니다.

    2

    예수님도 세번이나 똑같이 기도하시네요! 십자가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시피 ‘어려움’이라는 단어로 설명할수없는 사건입니다. 그 무게는 형언할 수 없고, 수치화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무거운 짐을 지는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같은 기도를 세번이나 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한 마음은 반복적인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괴롭고 슬픈’ 마음은 반복적 기도가 필요합니다. “똑같은” 기도라도 필요합니다. 누군가는 반복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믿음없는 행동이라고 할지 모릅니다. 착각입니다. 오해입니다. 기도는 힘입니다. 기도는 위로입니다. 기도는 생각을 바꾸게 하고, 두려움이 사라지게 합니다. 기도는 결연한 의지를 다지게 하고, 반복된 기도는 용기를 줍니다.

    감당이 안되는 일, 소화가 안되는 일, 선뜻 용기가 안나는 일, 해결할 수 없는일, 버거운 일, 이런 일들을 마주할때 마다 기도해야합니다. 반복해서 기도해야합니다. 계속 기도해야합니다. 그렇게 힘을 내서 마주하러 나가야합니다. “가자! 보라. 저기 나를 넘겨줄 사람이 가까이 오고있다!” 기도하는 자가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기도하는 자가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기도로 준비된자 십자가를 질수있게 됩니다. 기도로 준비된자 문제를 뛰어넘게 됩니다. 기도로 준비된자 사명을 성취하게 됩니다. 일상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반복적 기도는 필수 입니다.

    3

    “친구여 무엇을 하려고 여기에 왔느냐?”(50절) 친구면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친구면 친구다워야 합니다. 요나단과 다윗 정도는 아니더라도 친구로써 배반하는 짓(?) 같은것은 하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예수님 친구로 불러주시지만 가룟유다 아랑곳 않고 예수를 팔아버립니다.

    친구되신 예수님을 파는 행동을 멈춰야합니다. 나의 친구들에게 배신하지 않는자가 되야합니다. 나의 이웃과 나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절대 배반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들의 뒤통수를 대신 맞아 줄지언정 그들의 뒤통수를 때리는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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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월절 만찬을 하시며 예수님 감사기도를 드리십니다.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예수님은 이 식사가 마지막 식사임을 아십니다. 이후에는 십자가의 죽음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것을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의 기도를 잊지 않으십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마음이 무거울때가 있습니다. 오늘 하루가 얼마나 고될지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밥을 먹는데도 모래알 같습니다. 산적한 일들이 눈에 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날을 마주하면 감사가 잘 나오지 않습니다. 하루가 시작되도 감사보다는 한숨이 나오고, 일용할 식사를 먹어도 감사보다는 ‘먹어서 뭐하나’ 하는 한탄만 나옵니다.

    예수님이 처하신 상황도 인간적으로 보면 딱 이런 상황인것입니다. 이제 이거 먹고 나면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감사를 잊지 않으십니다. 바울과 베드로 같은 사람도 감옥에 있어도 감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하루의 고단함이 예견되었을 지라도, 사역과 부르심의 일들이 무겁게 느껴질지라도 오늘 하루를 허락하시고 일용할 양식도 허락하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십자가를 통해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감사하겠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십자가로 인하여 감사의 이유는 오늘도 충분합니다.

    2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다!” (32절) 우리 예수님 우리보다 앞서 가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 눈에는 뒤에 계시는것 같고, 안보이는것 같을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항상 앞서 가시는 분이십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갈릴리에서 다시 낚시 시작한 베드로를 불러 사명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앞서 가시는 예수님, 떠나시지 않는 예수님, 예비하시는 예수님, 일하시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언제나 내 곁에 계시는 주님을 인하여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3

    “너는 세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 (34절) 예수님 가룟유다도 알고 계시지만 베드로의 배반도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만찬의 자리에서 내쫓지 않으십니다. 또한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경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 큽니다. 포용하시는 그분의 마음이 너무 큽니다. 인내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존경스럽습니다. 죄인을 담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결정이 너무 위대합니다. 이런 마음이 아니였다면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의 구원의 자리에 머물 수 없습니다.

    나를 내쫓지 않으시고 경고해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경고하실때 깨달아야겠습니다. 항상 겸손하게 듣고 점검해야겠습니다. 혹 착각 속에 사는 신앙인이 아닌지 깨어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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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년 연봉을 한번에 쏟아서 소비하는 일! 그 누구도 쉽게 하지 않는 일이고,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향유옥합을 예수님께 드린것이 아닙니다. 깨어 부어드렸습니다. 한번 부어진 향유옥합은 이제 엎질러진 물과 같습니다. 주워담을수 없고, 나중에 다시 쓸수도 없습니다. 팔수도 없습니다. 이왕 향유옥합같이 가치 있는것을 주려면 깨지 말고 통으로 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나중에 활용할곳도 많지 않겠습니까?!

    이쯤되니 헌신을 할때도 조심스럽게, 소극적으로, 아끼면서, 지혜롭게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제자들도 “향유옥합을 왜 그렇게 생각없이 깨어 다쏟아버리느냐?! 차라리 그렇게 하려면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어야 가치를 극대화 해서 사용할 수 있었던것 아니냐?!” 하고 책망하는것입니다. 그럴듯한 생각입니다. 제자들의 말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피를 쏟으셨습니다. 아끼면서, 소극적으로, 조심스럽게 주신것이 아니라 전부를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모두 쏟아버리신 예수님이십니다. 제자들 말대로라면 예수님 그렇게 십자가에 한번에 죽으시는것보다 오래오래 살아서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구원하는 리더의 역할을 하는게 더 맞는거 아닙니까?! 그러나 한번의 완벽한 십자가의 헌신이 인류를 구원하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이룬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깨어진 향유옥합처럼, 다시 주워담을수 없는 인생으로, 주를 위해 완전히 소진되는 인생으로, 올인되는 인생으로 드려질때 예수님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좀더 가치 있는 헌신을 생각한다는 명분으로 항상 조심스럽고, 항상 소극적이고, 항상 아끼면서, 언젠가 훗날을 생각하며 드리기보다는 지금 전력으로 쏟아붓는 마리아의 신앙을 본받아야겠습니다.

    헌신은 전략이 아니라 전력입니다. 모든것을 한번에 쏟아붓는 마음입니다.

    2

    가룟유다는 아마 예수님께 칭찬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역동안 일관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사역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향한 관심과 사랑, 도움을 반복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주는것”이라고 하면 당연히 예수님께서 좋아하시고 칭찬하실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왜 이 여인을 괴롭게 하느냐? 이 여인은 내게 좋은 일을 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14절)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기로 작정합니다. 가치가 충돌합니다. 돈에 대한 생각이 다릅니다. 인간적으로 빈정이 상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때문에 무안 당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자신이 생각하는 예수가 아니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가난한 자를 위한다고 하더니 결국 자신에게 주는걸 원하는거구나?!’

    유다는 철저히 예수님을 오해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의중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 지금 돈달라고 하는것도 아닙니다. 에수님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이 없는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항상 너희곁에 있을 것이니 항상 도울수 있다! 그러나 나는 항상 너희 곁에 있는것이 아니다!” 상황이 이쯤되는 마리아의 오늘 이 헌신은 맞다 라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나의 의지, 나의 해석, 나의 꿈, 나의 욕심으로 하나님을 해석하면 충돌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팔아버리는, 떠나버리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가룟유다 3년동안 ‘신앙생활’ 잘하다가 느닷없이 예수님 팔기로 결정한것입니다. 처음 그 뜨거웠던 마음, 기적과 은혜 다 잊어버리고 이제 예수님 팔려고 하는것입니다.

    아무리 가까이서 3년동안 ‘신앙생활’ 했어도 이 시간들 동안 자신의 생각, 의지, 해석, 꿈, 욕심등을 키워 간다면 어느순간 예수를 파는 유다처럼 예수를 떠나게 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께 항복하는 인생이 되야겠습니다. 나의 생각을 그분의 생각에 동기화 시키는 인생이 되야겠습니다.

    3

    은 30받으려고 “예수 팔 기회를 엿보았습니다”(16절)

    쓸데없는 기회를 엿볼 시간에, 옳지 않은 일을 하는데 시간과 열정과 에너지를 쏟기보다는 주님의 뜻을 찾고 실천할 기회를 엿보아야겠습니다!

    그렇게 ‘은30’을 위한 즉 성공을 위한 기회는 엿보는데 주를 섬기기 위한 기회는 엿보고 있지 않을수도있습니다! 주님을 섬길 기회를 엿보다가 뛰어드는, 여호수아 같이 성막을 떠나지 않다가 모세의 뒤를 있는 섬김의 기회를 잡는것 같은 신앙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 1

    맘대로 살면서 조롱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18절) “왜 그렇게 답답하게 살아! 너만 착하냐? 종교가 밥먹여주니? 좀 즐겨! 왜 누리질 못해! 그냥 좀 막 살아도돼!”

    끓이기 시작하는 물에 들어간 개구리는 “너도 좀 누리면서 살아!! 온천 얼마나 좋아!!”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점점 죽고 있습니다. 그의 끝은 명백한 죽음입니다.

    ‘경건하지 못하고 정욕을 따라 사는 사람은’(18절) 즐긴다고 생각합니다. 누린다고 생각합니다. 자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물밖에 있는 사람들을 조롱합니다. “제발 너도 좀 즐겨! 유연성있게 살라고!!” 그러나 착각입니다.

    세상의 조롱에 절대 휘둘리지 말아야합니다. 속지 말아야하고, 충동적으로 반응해서도 안됩니다.

    쾌락을 쫓아 사는 이들은 누리고있는것도아니고, 즐기고 있는것도 아닙니다. 본인의 착각입니다. 단언컨데 그들은 죽어가고 있는것입니다. 그것도 잔인하고 비참한 최후입니다. 영원한 심판입니다. 쾌락주의는 절대 인생의 정답이 아닙니다. 쾌락은 찰나고 심판은 영원합니다.

    [수24:15, 우리말성경] 그러나 만약 너희 마음에 여호와를 섬기는 일이 내키지 않으면 그때는 너희 스스로 누구를 섬길 것인지,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에서 섬겼던 신들이든 지금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아모리 사람의 신들이든 오늘 선택하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길 것이다."

    2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십시오.”(21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함을 이미 받은자요, 앞으로도 받을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2-23절처럼 “긍휼히 여기는자’가 되어야합니다.

    긍휼이 여김을 받을 자격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긍휼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는 자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과 실천이 필요하겠습니다. 내 머리 속에 지금 떠오르는 ‘걔는 안돼!’ 바로 그 사람이 긍휼의 대상이 되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이 묵상이 모든 ‘죄’를 다 덮으라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본문의 기록 처럼 “더러워진 옷까지도 미워하되”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죄 자체가 긍휼의 대상이 되는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죄를 지은 이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필요한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 죄를 짓는 자들, 그들을 향해 죄를 깨닫게 하고, 긍휼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인도할때 그들이 돌이키게 되는 기적과 은혜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긍휼의 마음으로 기도하고 실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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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함께 얻은 구원” (3절)

    ‘나의 믿음’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믿음’도 중요합니다. 신앙의 개인주의, 개교회주의가 팽배한 시대입니다. 나 하나의 신앙을 지키는것으로 만족합니다. ‘우리교회’만 괜찮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말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행동이 그렇습니다.

    서로를 살피는 신앙을 회복해야할 때입니다. 나만 건강한 신앙말고 함께 건강한 신앙을 만들어야합니다. ‘우리교회’가 아니라 ‘모든 교회’가 건강한 교회 되도록 기도하며 살펴야 할 것입니다.

    2

    교회 안에 ‘경건’을 무너뜨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보다 더욱 거룩하지 못하고, 정치적이며, 이기적이고, 욕심이 넘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성적행동(음란으로 통칭하는)에 대한 통계를 보면 교회 밖이나 안이 거의 같다는 결과를 보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것이죠) 또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순결과 마땅히 지켜야할 사명을 잃어버리고 방탕한 사람들도 봅니다.

    교회가 이와 같이 안에서 무너지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당장에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방향을 잃어버립니다. 심지어 믿음을 떠나기도 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교회 밖으로는 영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부패한 집단’을 본받을 사람들은 없습니다.

    유다는 오늘 이렇게 권고 합니다. “그 가운데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해 싸우라는 편지로 여러분을 권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절)

    교회 안에 바른 분별과 믿음의 순결을 위한 필수적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교회는 유명무실 해질것입니다. ‘슬그머니’ 들어오고 있는 마귀의 사람들과 생각들을 철저하게 분별하는 교회가 되야겠습니다. 깨어 있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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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는 잘 몰라도 요나단은 압니다. 그는 점점 비뚤어져가는 아버지 밑에서도 효를 버리지 않았고, 나라를 위한 충을 버리지도 않은 자입니다. 다윗을 향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도 버리지 않은 자 입니다. 그런 요나단이 전쟁의 한 복판에서 쫓기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끝까지 쫓아가” 이 말을 읽는데 너무나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도망가는 요나단의 모습이 애처롭습니다. 그도 살기 위해 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도망치며 달리는 그 말 위에서 맘속으로 얼마나 하나님을 찾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죽음 이후에 요나단은 하나님과 함께 했을 것입니다. 그의 육신의 죽음이 안타깝고 슬프고, 처량해보이지만 그의 죽음 이후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안식 가운데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사실 인생이라면 누구나 ‘쫓아오는 죽음’을 달고 살아갑니다. ‘인생’이라는 전장을 열심히 달립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예외없이 ‘죽음’이 쫓아옵니다. 누군들 아닙니까? 믿음이 없고, 악한 사람만 ‘죽음’이 쫓아오는게 아닙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도, 의로운 사람도 예외없이 ‘죽음’이 쫓아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다 죽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삶은 극명하게 다릅니다. 예수를 믿는자요, 그분을 사랑하는 자는 죽음 이후에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갑니다. 어떻게 죽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믿는자에게는 영원한 구원과 안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요. 악한 자들은 영원한 심판 가운데 들어갑니다. (사울왕의 죽음은 그런 의미에서 비극중에 비극입니다. )

    이와같이 누구나 이 땅의 죽음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음 앞에 진짜 비참해지지 않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합니다. 그분을 내 마음과 생명과 뜻을 다해 사랑해야합니다.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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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욕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사람이 다윗을 모욕하고, 하나님을 모욕하는듯한 인생을 살았다는것이 참 아이러니 합니다.

    사울은 왕이 된 이후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허울’과 ‘자리’에 목맨 인생입니다. 보여지는것, 지위, 인정등에 목말랐던 인생 입니다. 그러니 죽는 그 순간에도 진정한 참회같은것이 없습니다. 그저 나의 죽음이 어떻게 비춰질까 그게 걱정입니다. 그의 죽음이 더욱 안타깝고 비참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한 순간도 자유하지 못한 인생, 무엇이 잘못인지 조차 잘 깨닫지 못하고 죽는 인생 입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만 안타까워 보이는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의 삶도 안타까워 보입니다. 그는 왕이었기 때문에 살아생전 자신의 삶을 영광스럽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껍질만 있는 인생이었습니다.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속이고, 시기하고, 추적하고, 분노하고, 외롭고, 귀신을 찾고, 가족도 믿지 못하는등 얼마나 비극적인 인생을 살았는지 모릅니다.

    잘못된 인생의 가치들에 휘둘리면 살아도 사는게 아닙니다. 세상에서 보기에 화려해 보이거나 행복해 보일수는 있으나 그뿐입니다. 실제로는 그의 생과 사가 모두 영광스럽지 못합니다. 살때도 비참하고, 죽음도 안타깝습니다.

    죽음은 우리가 어찌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생전 인생의 방향과 행동들을 선택할수 있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오늘을 살아내면서 바른 가치를 쫓기로 결정합니다. 바른 생각, 정신, 마음, 행동, 언어로 살기로 결정합니다. 생의 순간이 비참하지 않도록, 오늘이라는 하루가 저주가 되지 않도록 바른 길을 걷는 인생이 되야겠습니다.

    3

    “그 뼈를 추려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 묻고 7일 동안 금식했습니다” 13절

    선을 선으로 가는 야베스 사람들입니다. 과거 사울왕에게 받았던 선을 기억하는것입니다. 전쟁때문에 사울도 죽고 사울의 자녀도 죽었습니다. 사울왕의 왕조가 끝난 것입니다. 야베스가 모른척 할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의 시신을 찾아오는 일은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선을 선으로 갚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선을 선으로 갚아야겠습니다.이웃에게 반은 선을 선으로 갚아야겠습니다. 부모에게 받은 선을 선으로 갚아야겠습니다. 누구에게든 선을 받았다면 선으로 갚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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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기와 질투, 타인의 것을 가지고 싶은 욕심과 욕망이 폭력적으로 실행되면 ‘약탈’이 됩니다. 아말렉은 그렇게 약탈하고 기쁨의 파티를 합니다.

    누군가의 것을 ‘약탈’한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타인을 향한, 그들이 가진것을 향한 시기와 질투, 욕심과 욕망이 있었던것을 압니다. 때로는 그들의 소유가, 그들의 배경이, 그들의 능력이 부러웠습니다. ‘나도 가지고 싶다!’

    ‘약탈’은 아말렉 사람들만 보여주는 모습이 아닙니다. 오늘 전투에서 승리한 다윗의 군사들 중에도 하나님께서 하락하신 승리의 전리품을 가지고도 더 욕심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같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나눠주지 맙시다! 나에게 더욱 큰 몫을 보장하시오! 나는 더 가지고 싶습니다!” 말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약탈’의 마음 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나는 ‘다윗의 편’이지 라고 쉽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말렉군사’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약탈의 행동뿐만 아니라, 약탈의 시작이 되는 이웃의 것을 향한 시기와 질투, 욕심과 욕망, 탐심등부터 철저하게 경계해야겠습니다. 내게 허락된것에 만족하는 자족의 마음도 가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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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굳이 도망간 젊은 400명을 기록하면서 (17절) 아말렉의 군세가 다윗의 군세보다 훨씬 컸다는 것을 성경은 간접적으로 드러냅니다.

    파티를 하고 있는 아말렉의 큰 군사들과 피곤에 쩔어 헐레벌떡 쫓아온 다윗의 400의 군사가 서로 처음 마주했을 때 어땠을까요? 아말렉은 다윗의 군세를 보고 비웃었을지 모릅니다. 가볍게 여겼을지 모릅니다. 아말렉은 군세도 훨씬 크고, 심지어 인진들(?)까지 데리고 있습니다. 전쟁의 유리함은 1000% 그들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웃음만 나오는 상황입니다. 다윗의 패거리가 우스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은 완전히 패배합니다. 그들은 다윗의 편에 서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은 ‘신앙인’을 잘 모릅니다. 그들은 신앙인을 가볍게 보고, 우습게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신앙인이라면 강력합니다.

    나는 강력합니다! 당신은 강력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편에 계시면 승리합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세상은 나를 향해 비웃다가 큰 코 다치게 될것입니다. 하나님의 위용과 능력을 알게 될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나는 강합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나를 향해 비웃는 원수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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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까지 이르니라”(25절) 다윗이 만들어 놓은 ‘전리품 나눔’은 이스라엘의 규례가 되어 계속 이어집니다.

    좋은 전통을 만들것인가? 본이될만한 legacy 를 만들것인가? 아니면 않좋은 선례를 만들것인가?

    오늘 내가 속한 이곳에서 하는 행동과 말이 선하고 본이 될만한 유산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좋은 유산, 건강한 전통을 만들어 내고 싶습니다. 모든 이가 순응하고 따를 만한 건강한 원칙을 행하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오늘도,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쫓아 말하고 행하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나의 자녀가 내가 행한 방법과, 생각과, 의지를 본받을수 있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섬기는 바우 교회 안에 이러한 건강하고 바른 영적 유산을 만들어 내는 행적을 걷고 싶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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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은 여호와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8절)

    느닷없이 찾아온 절망, 기쁨중에 찾아온 절망입니다! 3일 길을 돌아오는 동안 다윗과 군사들은 마음에 안도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집에 도착하니 난장판이 되어있고 모두가 잡혀가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늘 경험하듯이 절망적 사건은 예고없이 찾아오고 기쁨중에 느닷없이 찾아 옵니다.

    다윗과 군사들은 형언할수 없는 슬픔에 빠져듭니다. 그리고 이 슬픔은 이내 ‘원망’으로 폭발합니다. “다윗을 돌로 쳐 죽이자!”

    그러나 ‘원망’은 일을 해결하지 않습니다. 이해는 갑니다. 그러나 ‘원망’과 ‘분노의 표출’이 일을 해결하지 않습니다.

    간혹 아이가 장난감에 다치거나, 뜨거운 것에 살짝 데이거나 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을 보거나 듣게 됩니다. 그때 부모가 다친 아이를 앞에 두고 “당신이 여기에 뜨거운 물을 놓아서 일어난 일이야! 당신 책임이라고! 당신이 혼나야지!”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나요? 아내를 향한 원망이 화상을 입은 아이의 상처를 치료하지 않습니다. 원망과 분노는 절망적 상황을 해결하지는 않습니다. (심지어 마음의 짐도 다 해결되는것도 아닙니다)

    느닷없이 찾아온 어려운 일 앞에 주변을 원망하고, 주변에게 분노를 쏟아내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분노하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지혜롭지는 않은) 행동보다는 다윗처럼 눈물을 흘리더라도 하나님께 나와 그분께 간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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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절망할때가 아닙니다. 시글락에 시체들이 누워있는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망가진것같지만 아직 구해야할 가족이 있습니다.(2-3절) 여기서 절망해 버리면 가족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합니다. 실제 가족이 죽어서가 아니라, 기회가 없어서가 아니라 먼저 절망 했기 때문에 기회를 놓치는것입니다.

    절망은 있는 기회마져 상실하게 합니다. 사탄은 그래서 우리를 절망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되십니다.

    아직 절망할 때가 아닙니다 쫓아가서 가족을 구해야할 때입니다. 아직 절망할 때가 아닙니다. 건강을, 사업을, 꿈을, 자녀를, 관계를, 회사를, 생명을, 신앙을 포기할 때가 아닙니다. 소망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쫓아가거라. 네가 그들을 따라잡아 반드시 모두 구해 낼 것이다!”

    나의 절망의 순간과 상황을 해결하실 하나님을 믿으며 소망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은 절망을 이기는 소망이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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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면 계산하지 않고 뛰어듭니다.

    아말렉 군사가 얼마나 많은지도 잘 모릅니다. 그리고 다윗의 군사는 이미 3일을 왔고 또 추적하느라 지쳤습니다. 실제로 200명은 추적길 도중에 주저앉아 버리고 맙니다. 그정도로 지친것입니다. 그러니 아말렉을 따라 잡아 만나도 문제입니다. 아내와 자녀뿐 아니라 남자들도 모두 잡히고 죽임당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현실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약속이 있기에 그 말씀 붙들고 뛰어듭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가족을 사랑함으로 그들은 망설임없이 뛰어드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뛰어듭니다. 서둘러 합니다. 계산하지 않습니다. 고민하지 않습니다.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계산하지 않고 뛰어듭니다.

    “첫번째 계명은 이것이니 마음과 생명과 뜻을 다해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사랑하면 계산하지 않고 뛰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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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간혹 유튜브에 댓글을 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면식이 없는 사람들은 영상을 통해 비춰지는 모습을 보고 또 그 영샹의 이야기를 듣고 응원의 메세지를 보내곤합니다. 그러나 가끔 그냥 미움을 쏟아내는 댓글들도 있습니다.

    왜 나를 미워하지?

    사람들은 서로의 진의를 의심합니다. 그러니 믿지 못하고 미움이 일어납니다. 나 대신 신뢰받는 그를 향해 시기와 질투를 하기도 합니다. 그 사람의 배경이 미움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냥 딱히 이유 없이 싫어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가, 혹은 내가 미움 받을 만한 행동을 할때도 있습니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지만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미움 받을 때 그 미움의 정확한 원인이 나에게 있다면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까닭없는 미움을 받을때가 혹 있다면 초연하면 됩니다. 나를 향한 적대적인 그 미움에 함몰되지 않아야합니다. 그 미움에 압도되면 감정과 생각, 심지어 육신까지도 피폐해지게 됩니다. 혹은 나를 향한 미움을 보여주는 사람의 눈치를 보며 삶이 휘둘리게 되는 일들도 생깁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을 향한 건강한 태도를 가져야겠습니다. 회개와 초연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나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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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다윗에게는 이 ‘미움’은 완전 쾌재를 부를만한 일이었습니다. 꼼짝없이 동족을 죽여야하는 상황에 진퇴양난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미움’ 때문에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된것입니다. 미움을 받았는데 결과적으로 그게 하나님의 은혜가 되었습니다.

    최약의 순갼이 최선의 순간으로 변하는 마법같은 현장입니다.

    생각해보면 다윗을 향한 사울의 미움이 다윗에게 고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향한 블레셋 지휘관들의 미움은 다윗에게 최선이 되었습니다.

    결국 어떠한 사건이 항상 절망을 뜻하거나 반대로 항상 긍정을 뜻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그저 모든 상황을 최선을 만들어 나가시는 하나님을 믿기로 결정합니다. 일상의 사건들 앞에서 일히일비하지 않으며 최선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믿기로 결정합니다.

    3

    다윗은 돌아가긴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블레셋으로 돌아갑니다. 그의 ‘돌아감’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진짜로 돌아가야할 곳은 블레셋이 아닌 이스라엘 입니다.

    우리는 주님께로 돌아가는 여정! 천국으로 향하는 여정에 있습니다. 중간에 멈추지 않아야겠습니다. ‘블레셋’으로 돌아가고 나서 “도착이다!” 하면 안되겠습니다. ‘블레셋’ 도착하고 나서 “집이다!”하면 안되겠습니다. 천국에 닿는 그 날까지 돌아가는 여정에 게으름은 없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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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 사울을 떠난다고 하신것은 이미 반복적으로 선포되었고 일어난 일입니다. 심지어 사울 본인도 압니다. (15절) 그런데 그럴때마다 사울은 크게 절망한듯 보이지 않았습니다. 안타깝지만 어쩔수 없다는듯 그렇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사울이 본문에서 마주한 ‘오늘’이 도래한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급해지니까 하나님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실리 없습니다. 그러니 죽은 사무엘귀신이라도 만나고 싶어 무당을 찾습니다. 안타깝지만 이 모습이 바로 ‘기복신앙’의 전형입니다.

    평소에는 찾지도 않습니다. 내 곁에 안계신다고 해도 상관 안하는듯 삽니다. 그러나 본인은 혼자 신앙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울도 말끝마다 습관처럼 “여호와께서”라고 말합니다. 본인은 여전히 자신의 생각 안에서 ‘여호와’의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여호와와 단절된 인생을 삽니다. 그러다가 힘들면, 어려우면, 고난이 닥치면 그때 급하게 하나님 찾는것입니다.

    평소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안에 거합니다. 묻지 않아도 알정도가 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중에 뜻을 묻기 보다는 기도하고 행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손잡고 가는 사람이 “하나님 저 어디로 가야하나요?” 묻지 않습니다. 그 손이 이끄시는데로 따라갈 뿐입니다. 그러니 답답하지 않고, 두렵지 않으며, 심지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됩니다. 왜냐면 동행하는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보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에 따라 하나님을 찾는 신앙 말고 언제나 동행하는 신앙을 가져야겠습니다. 계절이 있는 신앙인보다는 ‘적도의 신앙’이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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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없이 마주하는 죽음은 두렵습니다. (20절)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들의 마지막 죽음을 보면 두려움이 아닙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 하나님과 동행한 인물들의 죽음은 축복의 시간인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임종을 앞둔 성도님들을 마주하며 ‘임종기도’를 할때 두려움에 압도되어있는 분들을 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두려움이 있지만 하나님과 구원이라는 평안가운데 임종을 마주하는 경우를 보게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의 입장입니다. 그래서 처음 죽는거(?)라는 생경함에서 오는 두려움이 있을지언정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자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자에게는 죽음보다 더 두려운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사울에게 ‘죽음의 선포’는 그의 모든 기력마저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삶! 죽음 이후에 이어지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의 삶을 믿는 믿음! 절대 놓치지 말아야할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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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수시고 길을 떠날 수 있도록 기운을 내십시오.” 무당이 말합니다. 자기 집에서 빨리좀 나가달라는것 아닙니까? 사울이 계속 자기 집에 누워있는거 불편하다는것입니다. 좀 껄끄럽다는 것입니다.

    무당은 절망의 소식을 들은 사울을 위해 기도해주지 않습니다. 대신 빨리좀 기운차려서 나가달라고 합니다. 사실 상황이 이쯤 되면 굿(?) 한번 해줄법한데 그런거 전혀 없습니다. (원래 돈 줘야 굿도 하는거죠! ㅋㅋ 이게 ‘굿’의 진심입니다)

    사탄은 절대 우리의 유익을 위해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망함을 선언하고 기뻐합니다. 그 위기에서 우리를 구해주거나, 위로하거나, 도와주거나 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럴 능력도 없고, 우리에게 그런 관심도 없습니다. 망하게 하면 그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위기에 있는 자녀들을 위로하십니다. 도우십니다. 힘이 되어주십니다. 건져주십니다. 심지어 십자가에도 대신 올라가십니다. 피를 흘려주시기까지 합니다.

    사탄과 우상에게 기대는 마음을 완전히 접어야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상황을 바꿀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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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의 입장이 난처해졌습니다. 그동안은 잘 속여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속일 수 없습니다 꼼짝없이 자신의 백성들을 죽여야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죽임당하게 될것입니다.

    사실 이는 다윗이 자초한 일입니다. 누가 다윗에게 이러한 위험천만한 삶을 살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거짓말 위에 삶을 세워 올리라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자신의 의지를 따라 살기 위해 이렇게 했던것입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입니다.” “자기 꾀에 자기가 걸려 넘어진것입니다”

    내가 자초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안 할 수 있습니다. 그 전에 돌이키거나 아예 시작도 안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내 무덤 파는 짓은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거짓위에 삶을 지어 올려서는 안되겠습니다. 멈출수 있을 때 멈춰야겠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삶의 방식을 고집하면 안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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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 대답 하지 않으시니까 (6절) 무당을 찾아갑니다. 오늘날에도 흔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무당집에 권사, 집사, 장로가 그렇게 많습니다. 직접 ‘돗자리’펴는 ‘성도들’까지 있는 판국입니다.

    어찌 되었던 무당은 그렇게 ‘사무엘의 영’을 불러올립니다.

    (저는 사실 이 부분이 웃기기도 합니다) 누군들 아니겠습니까? 무당 한번 찾아가 보세요! 아기신도 있고, 할아버지 신도 있고, 좁쌀벌레 신도 있고, 고무신도 있습니다. 신은 이름을 정하는데로 신입니다. 그러니 ‘사무엘의 영’이라고 부르지 못할것도 없습니다. 부른다고 이름대로 그들이 정말 아기, 할아버지, 고무, 좁쌀이 아닙니다. 사무엘의 영이 진짜 사무엘의 영의 아닌것은 이처럼 당연한것입니다. “땅에서 올라오는 사무엘의 영”이라뇨 더더욱 있을수도 없는 일입니다.

    무당이 불러내는 신은 귀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실때 귀신을 부르는것? 귀신에게 의지하는것? 신앙인들이 장난으로라도 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응답을 안하시면 회개를 해야합니다. 기다려야합니다. 무당? 아닙니다. 미신? 아닙니다. 귀신?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하나님께서 항상 대답해주실만한 인생을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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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째서 너는 내 생명에 덫을 높아 죽게 하려는것이냐?” (9절)

    무당은 목숨이 위기에 처하면 메세지를 전하지 않습니다.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언자는 목숨이 걸려도 목숨을 걸고 일합니다. 메세지를 전합니다.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신앙인은, 사명자는 목숨이 위기에 처하면 숨는 자들이 아닙니다. 말해야할 것을 감추는 자들이 아닙니다. 여전히 예수님을, 예수님의 복음을, 예수님을 가르침을 선포하는 자들입니다.

    세상이 ‘신앙인’들을 옥죄어 옵니다. 사울이 무당들을 끊어버린것처럼 달려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침묵할수 없습니다. ‘무당같은 신앙인’되지 말고 목숨거는 사명자 되야합니다.

    우리는 침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멈추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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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살기 위해서 갔다가 미친척 침을 흘려야만 했던 땅 그 곳이 바로 ‘가드’입니다. 수치입니다. 좋지 않은 기억이 남아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오늘 다윗이 가드를 다시 찾습니다. 수치의 기억만 있는 땅, 다윗이라고 다시 오고 싶었을까요? 그러나 어쩔수 없는 선택이다 그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다시 찾은 가드는 더이상 수치의 땅은 아니였습니다. 600의 군사를 데리고 공식적인 ‘사울의 원수’가 되어 온 다윗을 가드는 사뭇 다르게 대합니다. 결과적으로 다윗에게 ‘다시 찾은 가드’는 시글락을 얻는 땅이고, 사울을 피할수 있는 땅이고, 1년 4개월을 나름 세를 불리며 살 수 있는 땅이되었습니다.

    땅이 바뀌거나 사람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곳의 주인은 아기스 입니다. 그런데 같은 땅, 다른 느낌이 되었습니다.

    인생이 그런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여기가 너무 저주스럽습니다. 힘듭니다. 고단합니다. 빨리 떠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또 언젠가 보면 그 같은 곳이 너무 살기 좋습니다. 평안합니다. 풍족합니다. 행복합니다. 결국 답은 하나님 입니다.

    물론 다윗이 가드로 향할때 하나님께 물었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가 가드 땅에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마음으로 왔다! 라고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러한 행적과 상관없이 영적원칙을 본다면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움직이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합니다. 어딜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과 함께라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괜찮습니다.

    “왜 오스틴이예요?” 여전히 계속 듣는 질문입니다. 물론 다윗같이 도피의 마음으로 달려온 곳이 오스틴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쫓다보니 여기입니다. 그래서 여기가 좋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좋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들이 차근차근 성취되길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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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브넬은 회개했을까요? 분노했을까요? 변명했을까요? 다윗은 큰 소리로 아브넬을 부릅니다. 일부러 사울이 들으라고 하는것 같습니다. “네 주를 지키지못했으니 말이다!” (16절)

    아브넬이 얼마나 당황했을지 안봐도 뻔합니다.동시에 다윗을 향한 분노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내 왕의 창과 물통을 찾으면서 사울왕의 눈치를 살폈을 것입니다. 사울왕이 딱히 아무말도 안하지만 분위기가 사뭇 불편해졌습니다. 사울왕은 그렇게 한번 아브넬을 흘깃 보더니 못마땅한 표정을 하며 고개를 돌립니다. 그리고는 “내 아들 다윗의 목소리 아니냐?!” 하며 다윗과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합니다.

    아브넬은 사울의 옆에서 가시방석입니다. 이 대화의 끝에 마주해야할 사울왕이 할 말이 무엇일지가 두렵습니다. “짐싸라! you out!” 그나마 그정도면 다행인데 “왕을 못지켰으니 다윗의 말처럼 너는 죽어 마땅하다! 여봐라 아브넬을 죽여라!”(16절)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변명할것인가? 나의 잘못을 드러낸 그 사람을 향해 분노할 것인가? 아니면 회개할 것인가?

    우리는 명확하게 지적된 잘못앞에서 어떤 자세를 주로 취하게 되는가 생각해봅니다. 변명인가, 분노인가? 회개인가?

    변명이 아닌 회개로, 분노와 부정이 아닌 겸손한 인정과 은혜를 간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설때 회복의 은혜를 누리게 될줄 믿습니다.

    실수하지 않는 하루, 명확한 죄 앞에 변명이 아닌 회개하는 하루가 되기로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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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울과 다윗은 관계에 있어서 건널수 없는 강을 건넜습니다. 사울왕이 “내가 잘못했다. 내 아들아 돌아가자!” 라고 해도 다윗은 돌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관계의 신뢰는 이미 완전히 깨졌습니다.

    불편해진 관계가, 소원해진 관계가, 적대적이된 관계가 돌아올수 없는 선을 넘기 전에 다시 회복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6년전쯤에 아내랑 싸움이 잦아지고 관계가 점점 어려워지던때가 있었습니다. 자칫 서로에 대한 감정이 완전히 상해서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버릴지도 모를 상황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선’을 지킬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상처입은 관계를 회복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아직 기회가 있을때, 아직 신뢰의 여지가 있을 때, 아직 원수가 되지 않았을 때 화해하고, 용서하고, 깨어진 관계가 아무는 관계의 축복을 경험하면 좋겠습니다.

    부모와 자녀간에, 부부간에, 친구간에, 동료간에, 이웃간에, 성도간에 참된 관계의 회복과, 관계의 재정비가 있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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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께서 내 목숨도 소중히 여겨 나를 모든 고난에서 구해 주실 것입니다” (24절)

    여호와께서 나의 삶도 소중히 여겨 나를 모든 고난에서 구해주실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삶도 소중히 여겨 당신을 모든 고난에서 구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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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주려고 합니다. 십 사람들은 사울왕에게 잘 보이고 싶습니다. 충성하고 싶습니다. 당대의 권력자에게 줄을 서고 싶습니다. 인정받고 싶습니다. 대적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다윗이 어디 있는지 사울왕에게 말합니다.

    그 사람에게 잘 보이기위해서, 인정받기 위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유익을 누리기 위해서 지금 내가 하는 이 행동을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있는가?

    옳은 일이라고 생각되서 하는 일도 있습니다. 줄서고, 인정받고 이런거는 잘 모르겠고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내 생각에는 이게 맞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울 왕에게 도망자, 반역자, 죄인인 다윗의 위치를 말해주는것입니다. 이 일을 하면서 일말의 죄책감이 없습니다. 왜냐면 내가 생각하기에 옳은 일을 하고 있는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내가 ‘옳다’ 생각했기 때문에 이는 옳은 일일까요?

    이런 두가지 경우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나의 유익을 생각하다가 저지르게 되는 악한일이 있는것은 아닌가? 내가 옳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에는 불의한 일을 한것은 아닐까? 결국 어떠한 일을 할때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항상 해야하고, 그 기준점이 말씀이며 하나님이여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 앞에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 행동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정의 내린 ‘의’를 쫓아 행하지 않습니다. 세상/주변이 말하는 대세를 쫓아 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 행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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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울을 죽일것도 아닌데 왜 굳이 위험하게 적진으로 들어가는가? 또 다시 도망가면 되는 일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위험을 감수해야할 때가 있습니다!

    다윗은 이 위험천만한 행동을 통해서 사울에게 메세지를 던지고 싶어 합니다. 원래 불의한 자들에게 의를 선포하는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거짓된 자들에게 진리를 선포하는 일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잘못된 일을 하는 자에게 그 잘못을 지적해주는 일은 정말 위험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위험을 감수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바리세인과 율법학자들과의 대면을 피하지 않으십니다. 바울도 위험을 감수하고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로마로 향하게 되는것입니다. 두사람 모두 위험 때문에 도망가지 않습니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전해야하는 것을 전해야 할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위험에 달려들더라도 전해야 하는것입니다. 복음의 메세지가 그렇습니다. 사랑의 메세지가 그렇습니다. 공의의 메세지가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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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말합니다. “나랑 누가 같이 가지?!” (6절) 이거 뭐 “같이가자!”보다 더 무서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침부터 제 눈을 뚫어지게 처다보시며 이런 말씀을 하시는것 같습니다. “추수할것은 많은데 추수할 일꾼은 없구나 누가 갈꼬?!!”(마9:37) “내가 누구를 보낼까? 우리를 위해 누가갈까?!” (사6:8)

    “주님 제가 일꾼하겠습니다! 주님을 위해 제가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자가 되어 성도와 함께 동역하여 맡겨진 일을 해야겠습니다.

    같이 가시죠! 같이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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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아도취! 나발은 자신의 부와 권세에 한껏 도취됩니다. 그 유명한 다윗이 자신에게 도움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또 그런 다윗에게 수치를 주었습니다. ‘내가 바로 이런 사람이야!’ 라는 생각에 이른 그는 한껏 고무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파티를 열였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내가 다윗한테도 큰 소리 친 사람이야!!! 하하하!” 자랑합니다. 이내 “괜찮겠어?”라고 묻는 이웃에게 “무슨 소리야! 나 나발이야!!!” 더욱 큰소리쳤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말그대로 자아도취입니다! 별것도 아닌데 별것이 된것마냥, 모든것을 다 가진것 마냥, 위대한 사람인것마냥 착각하는 것이죠. 부가 조금있다고, 권세가 조금 있다고, 지위가 조금 높다고, 조금 유명하다고 ‘망나니’가 되도 되는것이 아닙니다. 허세도 버려야하고, 착각도 내려 놓아야하고, 안하무인의 자세도 내려 놓아야합니다. 자기 객관화도 중요하고, 겸손의 자세도 중요하고, 이웃사랑의 실천도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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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일의 시간동안 나발은 굳어버린듯 그러나 살아있습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무슨 일이야!” 이 일은 날개달린 소문이 되어 삽시간에 집안 그리고 주변으로 뻗어 나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10일정도가 지난 후 나발은 죽었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소망을 갖습니다. 아직 안죽었으니까 살수 있을꺼야! 회복 될 수 있을꺼야! 많은 이들의 관심이 나발의 생사에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소망’ 그러나 결국 그는 그렇게 죽습니다.

    악인에게 소망은 없습니다. 희망은 없습니다. 모순적이게도 악하게 살면서 왠만한 소망은 다 가지고 삽니다. ‘잘될꺼야! 회복될꺼야! 살 수 있을꺼야! 구원받을 수 있을꺼야!’ 악인도, 주변인도 그렇게 ‘악인’을 응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인’에게 결국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끝끝내 보여주십니다. 잠시 생명이 있는것 같고, 아직 살아있는것 같으나, 소망이 있는것 같으나 결국 죽습니다. 결국 심판입니다. 악은 소망이 없습니다.

    악은 소망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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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복되는 결혼을 통해 다윗은 지지부진했던 자신의 기반을 조금씩 세워 올립니다. 지금, 이 문화권에 살면서 ‘많은 아내’라는 상황을 오롯이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지만 당시 문화권과 다윗의 지위를 생각해보면 그 당시 이는 특별하지 않았을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성경 기록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윗이 도망자에서 서서히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성장해 가는지 보여주십니다. 단지 ‘나발을 복수’ 하심에 최종의 목적이 있는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다윗의 지경을 확장해가시고, 재정을 확장하시고, 인력을 확장해 가십니다.

    다윗에 인생에서 앞장서서 일하시는 하나님이 보입니다. 두팔 걷어붙이고 일하시는 하나님이 보입니다. 다윗이 모르는 사이에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봅니다. 그는 아직 ‘도망자’의 신분이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착착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윗을 도우시는 하나님은 오늘 나의 인생을 도우십니다. 나의 기반을 닦으십니다. 나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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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비가일이 다윗을 ‘주’로 볼때 그 앞에 겸손히 서게 되고, 용서를 구하고, 마땅히 드릴 것을 드리며, 그간의 다윗의 행적에 감사하며 찬양하고 높이게 됩니다.

    반면 나발은 다윗을 “그가 누구냐? 이새의 아들이 뭐 대수냐? 누구의 도망간 종 아니냐? 출처도 없는 녀석이다?”(삼상25:10,11)라고 했습니다. 다윗을 인정하지 않는 나빌은 무시하고 모멸감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주’로 인정하는 자들은 그분 앞에서 겸손할 줄 압니다. 죄와 실수에 대해서 용서를 구합니다. 마땅히 드려야할 것을 드립니다. 그동안 지켜주신것에 대한 감사와 찬양도 놓치지 않습니다. 앞으로의 일들도 주님 앞에 간구하며 맡겨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주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 “예수님이 누구시냐? 하나님이 누구시냐? 신들중에 하나 아니냐? 그냥 없는데 있는척 하는 우상 아니야?”-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능력을 믿고 욕심에 휘둘려 삽니다. 아비가일의 말처럼, 그의 이름처럼 정말 ‘바보’입니다.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천지의 창조주이고, 온 세상의 주인 되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주인 되십니다. 주종의 관계를 정확하게 인지해야겠습니다. 내가 종인데 주인행세 하는 ‘나발/바보’같은 행동은 그만 해야겠습니다. 나는 주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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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점을 남기지 않는 인생! 아비가일은 다윗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괜히 나발을 죽였다가 나중에 나라의 지도자 되실때 ‘이유없이 피흘린 자!’ 내지는 ‘직접 복수에 가담한 자’ 라는 오명을 남기지 말라고 합니다. 당신의 마음에 거리낄 일을 행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31절)

    잘나가는 인생들도 한 순간의 ‘오점’ 때문에 잘나가던 순간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가장 두드러지게 뉴스에 나오는게 바로 연예인과 정치인들입니다. 한창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는데 ‘일진논란’에 휩싸입니다. 한참 사랑받기 시작했는데 ‘음주운전, 뇌물수수, 마약소지투여, 성매매’등으로 일순간에 인생이 완전히 망가집니다. 그들이 아무리 유명하고,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도 이러한 ‘오점’은 그들이 자리를 잃게 하거나,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인생에 한 순간에 일어나는 감정에 휘둘려 오점을 남기는 것은 정말이지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오늘 나의 행동이 10년후에 나를 봤을때 부끄럽지 않은 행동인가? 오늘 나의 이 행동이 내가 지위가 바꼈을때 보아도 옳은 행동인가? 오늘 나의 행동이 혹 나에게 걸림돌이 되어 나의 이후의 인생을 망치는 것은 아닌가? 오점은 아닌가?

    한 어린 연예인이 이런 인터뷰를 하더라구요. “저는 어려서부터 연예인이 꿈이 었기 때문에 그 어떤 구설이 있을수 있는 일에도 관여하지 않았고, 혹 막무가내로 찍히는 사진도 절대 없게 하려고 노력했고, 몸가짐도 바르게 하려고 했습니다! 연예인도 아니었던 그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말이죠!”

    ‘연예인’ 하려는 아이도 이정도의 각오와 자기 절제를 하는데 하나님 믿는 다는 사람이 이정도 각오와 절제도 없다면 부끄럽습니다! 인생 오점, 마음에 거리끼는 일들은 하지 말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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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남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요!” “(34절) 아비가일은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사람! 내 주변을 살리는 사람!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앞에 놓인 자를 살리는 사람! 예수를 몰라 죽는 사람들을 살리는 사람!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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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황을 파악한 종 한명’이 귀한 시대입니다. 이런 사람 한명 있으니까 살 수 있는 기회가 생깁니다. 애초에 이 사람이 자기 혼자 살겠다고 다윗의 진영으로 도망가거나, 제 3국으로 도망갔다면 혼자는 살수 있을지언정 많이 죽었을 것입니다.

    완악한 사람이 넘쳐나는 시대에 상황을 바로 볼줄 아는 깨어있는 ‘한명의 종’ 같은 사람이 있어야합니다. 그래야 비극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한명의 종’이 내가 되어야겠다라는 책임의식이 생깁니다. 많으면 많을 수록 좋지만 일단 남을 보고 기대하기 전에 내가 그 사람이 되야겠습니다. 그리고 나면 ‘아비가일’같은 또 다른 강력한 조력자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 우리 주변에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을 바꾸는데 필요한 사람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단 한명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나 한명이 시작하면 상황이 바뀔수 있는것입니다. 악한 상황을 선한 상황으로 역전시키는 통로가 되는, 바로 그 한명이 되는 삶이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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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리 생각하셔야합니다” (17절) 빨리 생각하고 행동해야합니다. 구원의 실행은 지체하지 않아야합니다. 고민하지 않아야 합니다.

    ‘돈룩업’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운석이 지구를 향해 날라오는것을 한 지역 대학의 교수가 우연찮게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곧 지구의 완벽한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고 그는 결국 백악관까지 찾아가 대통령을 만나게 됩니다. “빨리 무언가 행동을 취해야합니다!” 그는 상황의 긴박함과 절박성을 호소 합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sit tight and access” 입니다. 일단 상황좀 지켜보자는 것입니다. 운석이 지구를 향해 날라오고 시간이 없다고 하는데, 다 죽을 것이라고 하는데 “잠시 상황좀 지켜보자”라고 말하는 대통령을 보며 그 교수는 답답함에 얼굴이 붉어집니다. 영화를 보며 덩달아 답답하고 분노했던 감정을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이처럼 “sit tight and access”를 우선순위를 상실한 시대를 조롱하고, 진짜 위기에는 무감각해진 나라의 치리자들을 조롱하는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구원이 필요한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 개인의 입장을 생각하고, 상황을 고려하고, 다양한 계산법으로 개인의 이익을 생각하느라 정작 당장 취해야하는 구원의 행동이 늦어지는 사람들, 다 함께 멸망으로 내달리는 사람들! 마지 죽으러 다 같이 달려가는데 무슨 옷 입을까 고르는 사람들 같아 보입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당장 우선적으로 해야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지체 없이 해야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다윗은 당장에 올라올 것이고, 아비가일은 종의 말처럼 “빨리” 결정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이들이 죽게 될 것입니다.

    지금 당장, 바로, right now, 구원을 위해 움직여야 합니다.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일도 촌각을 다투는 긴박한 일입니다. ‘심판’은 인류가 피할수 없는 영화속 등장한 ‘운석’과도 같은것 입니다. 심판은 확실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구원을 위해 지체없이 움직여야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구원을 위한 실천을 지체 없이 바로 해야겠습니다. ‘sit tight and access’ 아닙니다! ‘stand up hurry and announce’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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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남자 가운데 하나라도 살려 둔다면” (22절) 다윗은 분노에 휩싸여 움직이고 있습니다. 명분이 좋긴 합니다.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21절) 그러나 그래도 다윗이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딱히 들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선을 선으로 갚지 않은 나빌 때문에 ‘모든 남자’를 다 죽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는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따지면 얼마나 많은 싸움과 전쟁이 일어나야합니까?!

    나의 입장으로 결론내리지 않고, 과도하게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나의 의가 절대적 의라는 착각을 하지 않고, 움직이기 전에 한번더 생각하고, 분노를 실행하기 전에 한번더 참으며, 할수만 있다면 용서하는 실천에 대해 묵상하며 적용을 결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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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언젠가 9년동안 섬겼던 뉴저지 온누리 교회를 떠나게 될때 성도님들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교회를 떠나는 저의 발걸음에 사랑을 가득담아 축복해주셨고 또 마음을 다해 아쉬워하고 슬퍼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제가 잘 했었나 봅니다?!? ㅋㅋ 그건 아니지만 ㅋ 나름(?) 열심히 하긴 했습니다. 덕분에 생각보다 많은 (?) 성도님들께 사랑받았고 축복받을 수 있었습니다.

    최선과 성실, 열심과, 충성, 선함과 공정함, 사랑과 배려, 건강한 가르침과, 정직, 그리고 본이 되는 삶. 이러한 삶을 살 때 우리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축복받고, 인정받게 됩니다. 당연히 존경받게 됩니다.

    오늘 드디어 그 대단했던 한 생애를 마감한 사무엘의 엔딩을 봅니다.

    ‘온 이스라엘이 모여 그를 위해 애곡하고’

    사무엘이 참 잘했습니다. 최선과 성실, 공의의, 선, 베려와 본, 충성과 열심, 정직과 사랑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낸것입니다.

    많은 이들에게 진심으로 존경받고 사랑받을 만한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존경을 강탈하듯 취하는 리더 말고, 존경을 할수밖에 없는 사무엘 닮은, 예수님 닮은 리더가 되야겠습니다.

    사무엘이여 수고하셨습니다! 그동안 감사합니다. 저도 당신과 같이 열심으로 수고하겠습니다! 먼저 그 길을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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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부상조’ 합시다. 다윗은 먼저 잘해주었습니다. 문제를 야기 시키지도 않았고, 오히려 일종의 보호자의 역할도 해주었을 것입니다. 충분히 충돌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배려가 불미스러운 일이 없도록 만든것입니다.

    그러나 나빌은 굳이 불미스러운 일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서로 돕고 잘 살수 있는데, 화평을 만들수 있는데 굳이 분열을 만드는 사람인것입니다.

    교만합니다. 배려가 없습니다. 긍휼의 마음도 없고, 감사도 없습니다. 경솔하기가 그지없습니다. 10,11절 말씀을 보면 나빌이 얼마나 예의 없이 말하는 사람인지도 알게 됩니다. 무례합니다.

    나빌과는 다르게 살아야겠습니다!

    도움을 구하는자 모른척하지 않고, 은혜를 구하는 자를 수치 주지 않으며, 선대하는자에게 은혜를 갚으며, 화평을 원하는 자에게 평화의 손을 내미는 자가 되기로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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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필로그입니다. 이게 참 갑자기 뜬금없는데요.말그대로 에필로그 나눔입니다.

    결혼을 잘해야합니다. 아비가일은 지혜로운 여인인데 하필 인색하며 악한 남편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지혜로운 여인이니까 남편 보는 눈도 좀 지혜로왔으면 좋았을텐데 중요할때 이런 실수(?)를 했나 봅니다.

    사실 ‘사람’이 제일 어렵습니다. 분명히 만날때는 괜찮은 사람 같았는데 결혼해보니까 악한 사람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내 친구 일때는 몰랐는데 다른 사람 대하는거보니까 진짜 나쁜 사람이기도 합니다. 과거에 알던 그 친구는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언젠가 다시 만난 그 친구는 아주 나쁜 사람으로 변해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혜가 있어도 사람을 만나는게 참 어렵습니다. 나부터 '어려운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어려운 사람' 되지 마십시다! 계속 쭈욱 선한 사람이 됩시다. 앞뒤가 같은 사람이 됩시다. 악을 버립시다. 본이 되는 사람이 됩시다. 사랑의 사람이 되십시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사 악인을 분별하게 하시고, 거룩한 이와 결혼하게 하시고 (미혼자들에 한해) 선함을 지켜내는 지혜와 강단이 있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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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울왕은 웁니다! 통곡 합니다. 큰 소리로 모두가 다 들을만한 ‘퍼포먼스’입니다. 그의 눈물이 진정성 있는 회개나 슬픔으로 보이지 않고,. 소위 ‘악어의 눈물’이라는 눈물로 보이는 까닭은 그가 다윗을 죽이지는 않을 지언정 (사실 당시 상황과, 주변 눈치 보느라 죽이지 못했다고 하는게 정확한 말이겠죠) 다시 왕궁으로 복귀 시키거나, 지휘를 회복하거나, 더이상 쫓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안위를 위해 맹세하라고 말할 뿐입니다. (참으로 엄청난 자기애 입니다.)

    거짓 눈물, 나를 위한 눈물 입니다. 순간을 모면하려는 눈물입니다. 아가들도 부모가 “이놈” 하면 우는 시늉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이놈” 하면 급하게 ‘우는시늉’합니다. 악어의 눈물입니다.

    이런 거짓 눈물을 보고 있자니 예수님의 눈물과 애통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은 자신 때문에 울지 않고 잃어버린 자들을 위해 우셨습니다. 그들 때문에 마음에 애통을 가지셨습니다. (마9:36)

    오늘 나의 ‘애통’함이 사울의 것을 닮아 있는지 예수님의 그것을 닮아있는지 생각해봅니다. 위기를 모면하려는 악어의 눈물, 남을 속이려는 악어의 눈물, 내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한탄의 눈물인가? 아니면 긍휼과 참회, 진심의 눈물인가?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눈물은 참회의 눈물이고, 사람을 살리는 눈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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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의지를 따라 선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왕도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 선을 빌어줄뿐 아니라 자신도 선을 행해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냥 살려주는것 정도로 충분한 선일까요?? 사울왕은 더욱 선을 행할수 있습니다. 그런 권력, 지위, 재정, 인력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하나 부족한것이 없습니다. 충분히 선을 행할수 있습니다.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하나님 그들에게 선을 베풀어주세요!” 그러나 실제로 ‘선’도 행해야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들에게 우리의 능력 안에서 충분히 선을 행해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을 위해서는 기도하고, 우리의 선은 직접 행해야할 것입니다.

    이웃을 향한, 은인을 향한, 어려움에 있는 자를 향한 ‘선행’이 실천되는 하루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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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네가 분명 왕이 될 것이고 이스라엘 왕국이 네 손에 세워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20절)

    기다리겠습니다. 기다려야합니다. 기다리다가 줄을 이탈하고, 다른 줄로 옮겨타고, 세치기 하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더 느려지거나, 아니면 아예 기회를 놓치는 경우들을 일상에서 경험합니다. 기다리는게 지름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을 통해서, 사울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왕이 될것이다!” 라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기다립니다.

    나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진중하게 기다릴줄 아는 다윗같은 자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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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해’라고 하는 유명한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를 보면 조선의 왕은 용변을 볼때도 혼자 보지 않고 주변에 신하들이 둘려보는 중에 용변을 보고 처리 조차도 타인이 해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혼자 용변을 보러 들어갑니다. 사실 ‘용변을 보는 행위’는 인간이 가장 취약해 지는 행위 입니다. 그러므로 나라마다 다를지라도 중요한 인물일수록 ‘용변’을 본다면 반드시 경호원(?) 혹은 그와 비슷한 무언가(?)를 대동하게 됩니다. 이는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경호법입니다. 의전 대상이 화장실 들어가기 전에 사전에 경호원이 들어가 아무도 없는지 확인하고 나옵니다. 이 후에 의전 대상자가 들어가고 경호원이 문을 지키고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울왕의 용변을 보러 가는 모습은 사뭇 다릅니다. 위험 의식이라고 는 전혀 없습니다. 걱정이 없습니다.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사울왕은 유리한 고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 자신이 다윗에게 위협을 당하거나 죽임 당할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조심할 필요도 없고, 경계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추적자지 유약한 도망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울의 군사력이 우위에 있고, 더불어 전체적 상황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습게도 ‘용변’으로 한순간에 입장이 바뀝니다. 사울이 죽임당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여기서 사울은 깨달아야합니다. 자신이 생각하듯이 자신이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편에 선 순간 인간이 지닌 모든 ‘우위’가 다 무용해 질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편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우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긴장은 다윗이 할것이 아니라 사울이 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강자이고 그는 약자 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편이시라면 상황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역전 시키시는 하나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없는 승리도 만들어 내시는 분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내 편이 아니라면 무조건 두손 두발 다 들고 항복해야합니다. ‘나의 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편이 아니면 회개하고 돌이키고 멈추는게 지혜입니다. 안그러면 자칫 ‘용변보다가 죽임당하는’ 최악의 수치, 허무한 종말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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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 공동체는 영적인 리더와 영적인 리딩에 순종하는 추종자들이 있는 공동체 입니다. 다윗은 영적이여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왕을 죽이는 최악의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러한 영적 리딩에 따라 당장에라도 사울왕을 죽이고 싶고, 죽일 수 있지만 리더에 말에 순종하여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공동체 인가요?

    리더만 잘한다고 되는것도 아닙니다. 팔로워만 잘한다고 되는것도 아닙니다. 다 잘해야합니다. 그래야 분별하고, 분별한 지혜를 지킬수도 있는것입니다.

    분별하는 리더, 청종하고 순종하는 팔로워가 되겠습니다. 누구나 인생의 한때는 리더요, 한때는 팔로워가 됩니다. 그러니 이 두가지 태도가 다 필요합니다. 아무쪼록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데 일조하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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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손에 있는 왕의 이 옷자락을 보십시오. 내가 왕의 옷자락을 잘라 냈지만 왕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11절)

    할수 있는데 옳지 않기 때문에 하지 않는것! 하면 나에게 유익인데 옳지 않기 때문에 하지 않는것, 생각을 깊게 하지 못할 상황속에서 조급하게 실족하지 않는것, 평소에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잘 알고 있는것! 다윗에게는 배울점이 너무 많습니다!

    상황이 물흐르듯 해결되고, 내 앞에 당장에 이익이 보여진다해도 바로 실행하기 전에 분별부터 해야겠습니다. 옆사람 얘기 듣기전에 기도부터 해야겠습니다. 당연한 일같아 보이는것도 하나님의 뜻을 한번더 확인하는 과정을 가지겠습니다.

    죽이면 돌이킬수 없습니다. 엎지르면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 안에서 신중해야 함을 다시 한번 상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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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나단이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비상입니다. 요나단이 왔다는 것은 사울에게 다윗의 위치가 노출되었다는것과 다름 없는것 아닙니까? 또한 ‘진영의 논리’에 빠지면 다윗은 자신을 찾아온 요나단을 보지 않고 서둘러 도망가야합니다. 요나단은 ‘사울진영’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상해를 입히거나, 도망가지 않고 요나단을 만납니다. 그리고 위로와 격려를 받습니다. 서로 진영의 반대편에 서있지만 ‘진영의 논리’로 대하지 않고 진심을 가지고 대합니다. 존중과 사랑을 가지고 대합니다.

    ‘친구’라도 진영이 다르면 원수가 되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보았습니까? 다윗과 요나단은 성숙한 인간상을 보여줍니다. 사랑의 인간상을 보여줍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미움과 증오가 많아졌을까 생각해본적이 있습니다.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저주하기도 하고 마냥 적대적으로 대하기도 합니다. 서로 깍아내리고 절대 믿지 않습니다. 단지 진영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단지 진영’이라는 표현이 거슬리는 사람도 있겠죠’)

    다름은 꼭 충돌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것이 아닙니다. 다름은 꼭 미움이 대상이 되야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영과 진영이기 이전에 사람과 사람이라는 생각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서로에 대한 존중과 인정, 겸손과 성숙한 대화가 먼저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람간에 미움과 증오, 분노와 푹력, 정죄와 비난만이 있다면 결론은 죽음과 멸망뿐입니다. 사랑과 성숙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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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나단이 정말 ‘인물’입니다. 대단합니다. “자네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이 될 걸세. 나는 자네 다음이지. 내 아버지 사울 왕도 다 알고 있는 일이네!” (17절)

    이렇게 진심을 다해 말할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가만히 두면 내것입니다. 내가 누릴 수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둘째, 세째가 유산 상속이 첫째에게 되는것을 두고 보지 못하고 첫째를 죽이는(?) 참혹한 뉴스도 듣습니다.

    원래 ‘다음 사람’은 더욱 집착이 심해지고, 욕심이 심해지고, 포기가 어려워집니다. 견물생심이라 하죠! 다음 사람이다 보니 이미 보았습니다. 보았으니 욕심이 쉽게 사라질리 없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이 “내꺼 아니고 니꺼야!”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자네 다음이지!!” 말하는 요나단이 진짜 인물입니다.

    내 손에 닿아도 내것이 아니면 욕심내면 안됩니다. 내것이 아님을 알면 취할 수 있어도 취하면 안됩니다. 잘못된 방법으로 내것이 아닌 것을 취해도 안됩니다. 내것이였어도 넘겨야 할때가 되면 넘길 줄도 알아야합니다.

    생각해보면 “나는 자네 다음이지!” 라는 말은 요나단도 결국 나라에서 두세번째로 높은 권력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도 사실 요나단의 위치는 지금과 별반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혹 욕심 내서 ‘왕’의 자리를 탐하면 ‘second in command’도 놓치게 되는것입니다. 욕심은 가진것도 놓치게 만듭니다.

    욕심과 유혹앞에 흔들리지 않는 ‘요나단’ 같은 사람이 되야겠습니다.

    3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복 주시기를 바란다!”(21절) 다윗을 넘기려고 하는 자나,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고 하는 사울이나 답답(?)합니다. 하나님은 생각도 없는데 자기들까리 신났습니다.

    아무데나 하나님을 갖다 붙이는 사람들!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생을 살면서 마치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실 것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 심지어 악한 일, 옳지 않은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실것이라고 믿는 사람들!

    한마디 해주고 싶습니다! “정신차려!”

    목회자도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기 비전을 쫓아 살고, 하나님의 비전이 아닌 자신의 비전을 돕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줍니다! 최악의 경우 ‘역기능교회’가 됩니다. 내 자신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습니다

    “정신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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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마18:24) 자그마치 1만 달란트 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길로 자신에게 100데나리온 빚진자를 찾아 빚을 갚으라고 종용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를 잡아 감옥에 가두고야 맙니다. 본인은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누렸는데 이웃에게는 받은 은혜를 전혀 나누지 않습니다.

    그일라 거민을 구하려고 하자 다윗의 부하들은… 반대했습니다 (3절) 구제를 반대하던 이 무리들이 바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고통에 처해있고, 빚지고 도피하며, 사회에서 소외되어 불평으로 가득한 자들이었습니다. (삼상22:2)

    이들은 도움이 필요할 때 다윗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그때도 여전히 도망자였지만 자신의 상황은 생각하지 않고 이들을 받아주고 함께 하는 은혜를 배풀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다윗의 무리’가 지금 다른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도우러 가자고 말하는 다윗에게 안된다고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내가 필요할 때 도움 받고, 은혜를 누렸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웃을 도우라!” 하시면 내 상황 뒤로 하고 달려가서 그들에게 도움의 손을 뻗어야겠습니다. 받은 은혜는 반드시 나눠야하고, 받은 도움은 반드시 이어 나가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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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은 자신의 입장을 정확하게 정리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인생의 방향을 설정합니다. 사람의 말을 안듣는 것은 아닙니다. 의논하고 참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뜻을 쫓아 결정하게 됩니다. 그렇게 그일라로 가고, 또 그렇게 그일라를 떠납니다. 그일라로 가는것을 반대하는 자가 있었던것처럼 다 이겨놓은 땅에서 도망나가는 것을 반대했던 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를 거점 삼아야합니다!!! 우리가 승리한 땅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최종 순종합니다.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것은 1) 다윗같이 하나님께 묻는 자세일 것입니다. 2) 주변 이웃을 바라보는 관심어린 시선과 마음일 것입니다. 3) 일을 함에 있어 성도의 마음과 의견을 관심있게 듣는 것입니다. 4)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강단있게 순종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리더’로 교회를 섬길 때 이런 자세를 무엇하나 놓치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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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이 넘겨줄 것이다!”(12절) 으이그!!!! 으이그, 왜 이러는걸까요? 염치도 없고, 고마움도 참 금방 잃어버립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 입니다. “으이그 이 그일라 사람들아!!!!!”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이 내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자고로 신의를 지켜야죠! 적어도 뒤통수는 때리지 않는 사람이 되야겠다 싶습니다! 은혜를 은혜로 갚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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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낄것이 없는 인생이 불의의 피해자가 됩니다. 아히멜렉이 완전 무결한 제사장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사형죄명’처럼 그는 반역을 꾀한자가 아닙니다. 다윗과 작당모의한 자도 아닙니다. 그는 제사장의 양심을 가지고 다윗에게 옳게 해야할 일만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아히멜렉과 그의 가족들은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공의가 불의에 지는 세상! 불의가 득세 하는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사람이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어그러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이렇듯 꼬였다고 해서 불의의 편에 설수는 없습니다. 공의를 저버릴수도 없습니다. 불의가 승리하는 세상이 보기에 답답하다면 공의로 맞서야지 굴복으로 항복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권력을 등에 업은 불의는 무섭습니다. 돈을 양손에 쥐고 덤벼드는 불의는 무섭습니다. 담합해서 달려드는 불의한 세력은 더 무섭습니다. 그래도 공의의 편에 서야합니다. 공의로운 행동을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시선에 부끄럽지 않은 결정을 내려야겠습니다. 공의가 결국 승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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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엑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도엑 같은 자가 어떻게 제사장 주변에 있습니까? 도엑같은 자가 어떻게 사울왕 옆에서 때에 맞춘듯 서있습니까?

    악독을 노리는자! 악을 행하기 위해 주도면밀한 자! 부지런을 내는 자! 거리낌이 없는자! 악행으로 한 자리 차지하려는 자! 최악입니다!

    도엑같은 자에게 ‘악행’은 죄가 아닙니다. 기회의 또 다른 단어 입니다. 성공의 또 다른 단어입니다.

    악행으로 일어서려는 자가 되서는 안되겠습니다. 악행으로 인정받으려고 하면 안되겠습니다. 악행은 왠만해서는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그러니 애초부터 악행의 패달을 밟지 말아야합니다.

    내 안에 있는 ‘도엑’을 죽여버립니다! (일부러 강력하게 포현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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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탓입니다!” 다윗이 무슨 죄입니까? 그도 억울합니다. 다윗은 여전히 목숨이 경각에 놓인 도망자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도엑을 시킨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은 “나도 억울합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 탓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통감의 마음, 미안해 하는 마음, 책임지는 마음, 위로와 격려의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 “내 탓이요”라고 했으니 그것을 책임지는 행동 (23절) 다 내게 필요한 태도입니다.

    교회를 섬기다가 나를 향해 날라오는 듯한 비난과 화살을 맞을 때 “내 탓입니다!” 할수 있을까요? 억울할때도 “나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는 목회자가 될 수 있을까요? 통감하고, 미안해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책임지는 말과 행동을할수 있는 목사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런 성도가 될 수 있을까요?

    '상처받아 뛰어나온 성도’, '위기가운데 탈출한 성도', '갈곳없어 달려나온 성도'를 마주할때 통감하고, 미안해하고, 사랑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책임지는 목자의 삶이 되야겠습니다. 그들이 안전할수 있도록, 더이상 죽음의 위협 가운데 살지 않도록 하는 목자가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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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의 집안 사람들은 다윗의 위치가 파악되자 다윗을 만나러 옵니다. 다윗이 처음 도피 생활을 시작할때 다윗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다윗과 함께 하게 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울왕의 압박이 다윗의 측근을 향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이스라엘 땅에서 편하게 살기는 글렀습니다.

    어려운 시기니까 함께 하고, 돕기 위해서 다윗과 함께 하면 그림이(?) 참 예쁩니다. 그런데 어쩔수 없는 도피의 일환으로 다윗과 함께 하게되는걸 보니 마음 한켠이 좀 씁쓸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아둘람으로 다윗을 찾아온 다윗의 형들이 “너때문에 우리 인생도 꼬였다!” 불평했을지 모릅니다.

    어려울때 돕고 함께 하는게 진짜 가족입니다. 어쩔수 없이 돕거나, 어쩔수 없이 함께 하는거 말고 진심으로 걱정하고, 위로하고, 도움을 주는것이 가족입니다. 나의 가족, 나의 교회, 신앙의 형제, 자매, 성도들은 정말 나의 가족입니다. 이들과 함께 해주고, 어려울때 곁을 지키고, 도와주는 진짜 가족같은 목회자가 되야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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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칭 ‘아웃사이더’들이 다윗 주변으로 모여듭니다. 그 수가 400명이나 됩니다. 사실 다윗이 어떤 기반이 있는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 있을때나 권력자지 지금은 도망자에 불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윗에게 모입니다.

    이때 다윗의 모습을 다시 한번 옅볼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몸 하나도 건사하기 어렵지만 400명을 내치지 않습니다. 지금 다윗을 찾아온 사람들이 다윗이 기존에 알던 군사도 아니요, 배경이 탁월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들의 면면을 보면 ‘고통속에 있는 사람, 빚진 사람, 불평불만이 가득한 사람들’입니다. 손이 더 가면 가지,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과 함께 합니다. 그들을 책임지는 참된 리더의 자세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사람들을 내 기준과,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는 리더가 되야겠습니다. 내게 ‘필요한 사람’과 ‘필요하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하지 않겠습니다. 나의 ‘양’이라면 내 인생이 ‘아둘람’같은 광야에 있거나, ‘도망자’ 같은 어려운 상황에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 리더가 되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사람들을 보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들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나고 교회가 세워질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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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울은 곁에 사람들이 많습니다! 용사이며, 가족입니다. 다윗과 너무 비교됩니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사울은 혼자 있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은데 그는 철저하게 ‘혼자’라고 느끼고 있는것입니다. 심지어 사울왕은 자신의 아들 요나단의 반역을 염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의 마음이 얼마나 외롭고 지쳐갈지 예상이 됩니다.모두가 의심되고, 모두가 불편하고, 모두가 원수같습니다.

    세상이 나를 혼자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내가 나를 고립시키고 혼자로 만드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내 미움, 의심, 시기, 질투, 분노, 욕망, 집착, 분노, 폭력, 가식, 거짓, 외식 등이 나를 외롭게 만듭니다.

    나의 인간관계에 있어서 혼자된것 같고 외로울때, 사람들이 많은데도 군중가운데서 외톨이로 느낄때 타인에게서 그 원인을 찾기 전에 내 내면의 문제를 살펴볼줄 알아야겠습니다. 내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주고, 아프게 하고, 원망하고, 비난하고, 나를 떠나게 만드는 언행들을 멈춰야겠습니다! 더욱 사랑하겠습니다. 더욱 존중하겠습니다. 더욱 믿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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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려움 때문에 생각이 마비되고 행동이 마비되는 경험들을 해보았습니다. 실제로 어릴적 강아지에게 4-5번 정도 물린 경험이 있습니다. 이때 문에 결국 강아지 PTSD가 생겼고 느닷없이 짖어대는 강아지를 만나면 몸과 생각이 얼어버리는 경험을 지금도 합니다. 결국 이와같이 두려움에 함몰되면 멈춰버립니다. 고장(?)납니다. 실수하게 됩니다. 내리는 결정마다 악수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왕을 두려워합니다. 두려움에 압도되자 도망갑니다 도망도 어떤 의미에서는 악수입니다. 실수 입니다. 그런데 하필 도망 간곳이 가드 입니다. 이는 더 큰 실수 입니다. 아마 이스라엘에서는 어딜가나 알아보니까 어쩔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가드는 아닙니다. 다윗은 더 나가서 미친척도 합니다. 가드왕 아기스가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싶습니다. 두려움에 함몰되어 마비되거나, 실수를 거듭하는 연약함을 이겨내고 싶습니다. 두려움의 정체를 파악하고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나는 두려움에 압도되지 않습니다! 나는 더이상 도망가지 않습니다! 나는 더이상 실수 하지 않습니다.

    주 안에서 두려움을 극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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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누군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드 사람들은 다윗을 보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나열합니다. 그들의 시선에서 다윗은 이미 “이스라엘 땅의 왕’입니다. (11절) 그리고 수만을 죽인 용사입니다. 무엇보다 다윗이 바로 그 ‘가드 사람 골리앗’을 쓰러뜨린 사람입니다. 그러니 가드 사람에게는 원수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타인이 기억하는 이 사실을 다윗은 기억하지 못하는것 같습니다. 내가 주안에서 어떤 사람인지 기억하지 못하니까 ‘심히 두려워하고’ 침흘리며 미친척 합니다. (어쩌면 가드 사람들이 더 두려워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내가 누군지 잊지 말아야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보혈로 구원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의 피값으로 산 가치있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상황이 바뀌고, 환경이 변해도 이러한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누군지 기억해야합니다. 그래야 세상 앞에서 침흘리고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에 굴복한 패배자의 모습으로 서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주 안에서 내가 누군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에 부끄러움 없는 삶의 태도로 살아내겠습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되 사탄에게 (악의 권세자에게) 구원을 구걸하는 자가 되서는 안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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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이런 미치광이를 데리고 왔느냐? 당장에 내 쫓아라!” (15절) 한낱 왕일 지라도 그 앞에 ‘이런 사람’ (미치광이)를 세울 수 없습니다.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 미치광이가 서면 안됩니다. 합당하지 않은 자가 서면 그 자체로 왕을 무시하는 행동이고, 잘못된 행동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선 자입니다. 그러므로 행동과 마음과 생각을 조심하고 또 조심하려고 합니다.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만왕의 왕 앞에서 ‘미치광이’로 혹은 ‘부족한 자’로 서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서 드려지는 ‘주일공예배’의 자리에서도 온 마음과 생각과 육신을 최선과 성실로 구분하고 준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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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 입니까? “왕께서 내게 임무를 주시며 ‘아무도 네 임무를 알지 못하게 하여라’ 라고 하셨습니다”(2절) 그런데 이런 비밀스러운 일을 다윗은 아히멜렉의 한번의 물음에 술술 말하고 있습니다! ㅋㅋ 말이 되나요? 얼마나 모순적인 상황인가요? 다윗 말대로라면 지금 절대 비밀로 해야하는 것을 술술 말하고 있는 꼴입니다. 진짜 허술한 거짓말입니다. 거기다가 무기도 안가지고 나왔다고 합니다. (8절)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거짓말입니다. (물론 아히멜렉이 속았다는 사실도 조금 웃기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큰 줄기/문맥을 벗어나 잠시 ‘거짓말’을 묵상합니다. 거짓말은 이와 같이 구멍 투성입니다. 허술합니다. 거짓말 하는 본인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거짓말은 만들어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자칫 하면 할수록 구멍만 커집니다. 말도 안되는 얘기입니다. 아이가 거짓말하는 것을 보면 진짜 웃음 밖에 안나옵니다. 어릴적 부모에게 거짓말할때 부모님이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거짓말 하면 다 보여! 엄마 아빠는 다 알수 있어!” 그때는 진짜 까마득히 몰랐는데, 부모가 되서 보니까 진짜 아이의 거짓말은 들을 때마다 실소가 터져나오게 됩니다. 어찌나 허술한지 모르겠습니다. 짐짓 자신의 거짓말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같아 보여서 그런 아이의 모습이 더욱 웃기고 애처롭습니다. ㅋ

    거짓말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 들키게 되어있습니다. 들키면 수치를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정직이 답입니다. 정직한게 힘입니다. 정직으로 돌파하는 습관을 키워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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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소한 3무 입니다. 다윗은 지금 곁에 사람도 없고, 음식도 없고, 무기도 없습니다. 다윗이 항상 가지고 있던 것들인데 지금은 없습니다. 당황 스럽습니다. 그리고 너무 힘듭니다.

    이와 같이 필요한 것이 없으면 사람은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필요를 얻기 위해 하지 않던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다윗도 평소같으면 하지 않을 ‘진설된 빵’을 달라고 합니다. 이거 보통은 제사장이 먹는 빵입니다. 그러나 일단 필요를 채우기 위해 ‘비 일반적인 일’도 자행합니다. 또한 무기가 얻기 어렵다고 하지만 본인이 버렸던 (무시했던) 골리앗의 칼을 기쁨으로 취합니다. (사울이 주었던 칼도 안가지고 전쟁에 나갔던 바로 그 다윗이 말입니다) 또한 협력자가 없으니 거짓말을 해서 아히멜렉을 속여 자신을 돕게 만듭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 없으면 채우기 위해서 기본을 무시하는 경우들이 생깁니다. 불의한 시도를 통해 필요한 것을 얻으려고 하기도 합니다. 조급하고, 막무가내가 되기도 합니다. 물론 다윗의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게 아닙니다. 정죄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다윗이었다면 더 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므로 더욱 ‘조심해야겠다’ 생각하게 됩니다. ‘필요’가 부재할때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 자칫 실수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죄를 지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필요’가 명분이 되어 ‘죄’를 용인하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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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만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게 주십시오.”(9절) 골리앗의 칼이 좋은 것이야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무기도 흔하지 않았으니 ‘골리앗의 칼’은 더더욱 귀한 무기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것보다 더 좋은것이 있습니다. 다윗도 한때 ‘사울왕의 칼’대신 이것 들고 전쟁터로 달려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좋은것보다 더 좋은것은 하나님입니다. 최고로 좋은것보다 더 좋은것은 하나님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내 수중에, 내 인생에 ‘좋은것’을 얻었다고 해서 마냥 만족할수 없습니다. 다 이룬것도 아닙니다.

    ‘좋은것’이 하나님을 대체할 수 없음을, ‘최고로 좋은것’도 하나님과 비견될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골리앗의 칼’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곁에 계시지 않으면 무용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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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장이 덜컹 내려 앉습니다. 내심 얼마나 아니길 바랬을까요. 그러나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화살이 네 앞에 있지 않느냐!!”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기로 작정했다는 의미입니다.

    “정말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바라며 다음 날을 맞이했지만 내 기대와는 다르게 우려하는 일이 벌어질 때가 있습니다. 참담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실망스럽기도 하고 괜시리 하나님을 올려다보며 한마디 해보고 싶기도 합니다.

    어릴적 집에 불이 났을때도, 그렇게 망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집에 빨간 딱지가 붙을 때도, 군면제를 위해 그렇게 금식하며 기도했는데 나이 30에 결국 입대해서 자대를 배치 받았을때도 딱 이런 마음 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우려하는 일이 벌어지자 그 다음 길로 발을 내 딛습니다. “다윗은 길을 떠났고”(42절)

    우려하던 일이 안일어나면 좋지만 일어나도 결국 그 다음 걸음을 걸어야합니다. 슬프고, 울고, 마음 찟어지고, 고단하고, 참담하지만 다음 발을 내 딛어야합니다. 왕궁의 안락한 삶을 버리고 미지의 땅으로 나가야해도 움직여야합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기다렸는데도 우려하는 일이 벌어졌다면 마음을 추스리고 다음 걸음을 걸어야겠습니다.

    2

    요나단은 같이 안갑니다. 다윗과 의형제를 맺었고 너무나 사랑하는 친구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다윗의 길로, 요나단은 성으로 돌아갑니다.

    친한것과 해야할 일은 구분이 됩니다. 친하다고 당장에 해야할 일을 버리거나, 있어야 할 곳을 떠날수는 없습니다. 지금 당장 다윗이 왕이 아닙니다. 사울이 왕이고, 요나단은 왕자입니다. 이제 요나단은 더욱 바빠져야합니다. 싸움에 선봉에 서있던 다윗이 부재할 것입니다. 이제 요나단의 몫입니다. 그러니 그는 왕궁으로 돌아가야합니다. 아버지가 이해 안되고, 친구는 보고 싶지만 그래도 다시 궁으로 돌아가 나라를 위해 싸우는 왕자의 책무를 다해야합니다.

    우선순위를 착각해서는 됩니다. 사명을 잊어서도 안됩니다. 상황 때문에 책임을 타협해서도 안됩니다. 맡겨진 일을 쉽게 내려 놓고나 포기하거나 잊어버려서도 안됩니다.

    살다보니 책임과 사명 때문에 관계도, 고향도, 꿈도, 평안한삶도 떠나야할 때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자리를 지켜야합니다. 사명을 책임져야합니다.

    오늘 내가 돌아가야할 ‘성’으로 돌아가겠습니다! (4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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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성대지 말고/지체하지말고’ (38절) 무슨 이유에서든지 단호해야할 때, 서둘러야할때 서성이고 지체하면 망합니다. 소돔을 도망쳐 나오다가 서성이고 망설이고 돌아보니 소금기둥 됩니다.

    서성이면 안되는곳, 지체하면 안되는 곳에서는 이런 저런 변명이 떠올라도 서둘러 떠나야합니다. 그게 살 길입니다. 자꾸 생각하다보면 머물 이유도 많고, 망설일 이유도 많고, 지체할 이유도 많습니다.

    그러니 더이상 있지 말아야하는 곳이라면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바로 서둘러 떠나야합니다.

    지금 혹 있지 말아야하는 곳임을 알게 되었다면, 바로 그곳에서 서성이지 말고, 지체하지 말고 바로 떠나길 도전합니다. 저도 지체없이 떠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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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식탁에 자리해야할 첫날 다윗이 자리에 없자 사울왕은 그가 ‘정결하지 못하구나’라고 생각합니다. (26절)

    정결하지 못하면 앉지 못할 ‘왕의 식탁’ 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서 사울왕의 마음은 온통 다윗을 찾아 죽일 생각뿐입니다. 누가 부정합니까? 자리에 앉지 않은 다윗이 아니고 바로 사울왕 입니다.

    남이 부정하다고 쉽게 생각합니다. 그들이 정결하지 못하다고 쉽게 판단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가 제일 부정합니다. 제일은 아닐지라도 그들 못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 눈에 들보는 못보면서 남의 눈에 티를 보고” 정죄하는 꼴입니다.

    내가 기준이 되거나, 나 자신을 법의 예외로 보거나, 자기 합리화에 빠지면 나 자신을 건강하게 점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웃지 못할 얘기가 회자 되는것입니다.

    요나단의 지적이 날카롭습니다! “다윗이 죽어야할만큼 지은 죄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 말인 즉슨 “다윗이 잘못한게 아니라 아버지가 잘못하고 있는것입니다!” 라는 일갈입니다.

    지적하기 바쁜 정죄의 습관은 조심하고, 나는 의롭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착각은 경계하고 무엇보다 ‘왕의 식탁’ (하나님의 식탁)에 초대 받아 앉아 있으면서도 그 한가운데서 ‘죄를 생각하고있는’ 패도를 버리겠습니다. (예배 드리는 중에도, 큐티 중에도, 기도 중에도 머리 한켠에 미움, 분노, 욕심, 불평, 의심 등의 마음이 일어날 때가 있고, 생각이 머무는 경우가 있는데 정말 조심하고 경계하고 버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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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와 내 나라” (31절) 놀라운 말입니다. 사울왕의 생각이 얼마나 틀어져버렸는지 보이는 대목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나라는 사울왕 자신의 것이 되었습니다. 생각이 이쯤되니 남에게 줄 수 없고, 자녀에게 넘기는것이 당연하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교회의 리더들이 이런 실수를 범하는것을 봅니다. 내것이라고 생각하면 남에게 줄수(?)없고 당연히 자녀에게 넘어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세습입니다!

    많은 대기업들도 똑같은 일들을 자행합니다. 내것이기 때문에 남에게 주지 않으려고 하고 어떻게 해서든 내 자녀에게 넘기려고 합니다.

    왜 이렇게 ‘내것’에 집착 할까요? 내것으로 만들어야한다는 집착과 욕심은 나를 썩게 만들고,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합니다. ‘내것’을 만들려고 하니까 도둑질도 하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거짓말도 합니다. ‘내것’으로 만들어야하니까 방해한다고 생각되면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기도 하는것입니다. ‘내것’이라고 믿기 시작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아까워하고, 희생이라고 생각하고, 분노하기도 합니다.

    내것은 없습니다. 위임이며,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드리고, 주변과 나누고, 성실하게 지키고 사용하고, 때가되면 하나님께 넘겨 드리면 됩니다.

    내것이 아니고 주의 것입니다! 아멘!

    3

    요나단은 너무 슬픕니다. 다윗의 처한 상황때문에 너무 슬픕니다. 단식하며 슬퍼합니다. 불의한 일이 친구에게 일어나고 있음이 그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합니다. 그래서 중보합니다. 눈물의 중보입니다.

    오늘 나의 친구, 이웃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누군가의 악함을 인하여 도망치고, 숨고, 피해를 당하고, 두려워하고 있을 이들, 세상의 불의한 자들에게 당해 고난 가운데 있는 이웃을 위해 애통하는 마음으로 중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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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호와께서 우리 아버지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자네와 함께 하시길 바라네!”

    사울은 정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사용하셨던 겸손의 사람이었습니다.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이상 사울은 반짝(?)거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의 안에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빛이납니다. 건강한 영향력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선한 일을 하며, 거룩한 삶을 추종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주님의 도구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당신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사명을 알고 순종하는 자 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마음의 평안을 누리며 살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건강하고 선한 영향력의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거룩한 인생 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야합니다. 내주하시는 성령과 함께 그분에 뜻안에 거하는 하루 될줄로 믿습니다! 아멘

    2

    요나단은 왕의 아들입니다. 권력은 요나단에게 있지 다윗에게 있지 않습니다. 다윗의 권력은 왕자의 그것에 비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런 요나단이 다윗에게 부탁을 합니다. “내가 사는 동안 여호와와 같이 내게 끊임없는 긍휼을 베풀어 주고 내가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고..”

    요나단은 왜 이러는 걸까요?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보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사울왕을 이어 왕을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요나단은 다윗에게 맹새하도록 합니다. “내게 긍휼을 베풀어 주고 죽임당하지 않게 지켜주시게! 너를 대적하는 모든 자가 멸망할때 부디 내 집안과 의리를 끊지 말고 지켜주게” (14-15절)

    요나단은 사울 같지 않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왕’에 있는것을 분별할때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왕’에 있음을 분별할때 그 뜻에 순종하며 오히려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그리고 다윗을 지지 합니다. 본인에게도 충분히 아쉬울만한 일입니다. 실망감과 분노가 일어날만한 일입니다. 빼앗기는것 같은 느낌을 받을수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순종합니다.

    요나단은 모르는척 자신의 인생의 숙적이 될만한 인물인 다윗을 처리할수 있는 기회 앞에 있습니다.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다윗을 처리함으로 이후에 자신의 왕의 권세를 누릴 수있게 되는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도 요나단은 다윗의 편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기로 결정합니다. 이게 요나단의 위대함 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합니다. 분별된 뜻을 수용해야합니다. 나의 정의가 아닌 하나님의 정의를 쫓아 살아야합니다. 쉬운길이라도 정의로운 길이 아니면 멈춰야합니다. 이웃을 내 인생의 꿈을 이루는 방해물로 볼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이웃을 사랑의 대상으로 봐야겠습니다.

    3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린 약속, 친구와 한 약속, 내 자신에게 한 약속!

    약속은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약속을 지키는 하루가 되야합니다. 약속을 지키는 인생 되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한 ‘약속’을 알고 계십니다!

  • 1

    요나단은 다윗에게 말합니다. “네 마음의 소원을 말하라 내가 무엇이든지 이뤄주리라!” 이 말을 듣고 다윗은 요나단에게 자신의 소원을 말합니다. “사울왕이 나를 정말 죽이려고 하는지 아닌지 그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알려주세요!”

    다윗에게 소원을 말하라고 했더니 기껏 사울왕의 의중을 파악해 알려달라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원하는 소원’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평생 살 돈을 주세요 떠나야겠습니다!” 혹은 “당신의 아버지를 어떻게든 막아주세요!’ 라든가, “당신과 내가 함께 반역을 일으킵시다!” 라든가 뭐 이런 대단한 얘기가 나올것 같은데 그저 ‘사울왕의 정확한 의중’을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칫 나의 소원이 욕심인 경우가 있습니다. 본이아니게 파괴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하게 너무 이기적일 때도 있습니다. 거룩하지 못한 경우도있고, 심지어 불법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의 소원’이라고 말하며 간구할 때 소원의 동기, 내용, 결과까지도 점검해봐야겠습니다. ‘내가 지금 소원하는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정말 맞는 것인가? 거룩한것인가? 옳은 것인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것인가? 혹 불법적이진 않은가? 피해를 만들어 내진 않는가? 너무 이기적이진 않은가? 선한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인가? 소원을 욕심과 착각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간구를 욕망의 해방구로 착각해서는 안되겠습니다!

    2

    다윗은 ‘평안’(8절, 개역개정)을 원합니다. 우리말 성경으로 보면 환경의 평안을 말하는것 같고, 개역개정으로 보면 마음의 평안까지도 말하는것 같습니다. 다윗이 원하는 것은 온전한 평안 입니다.

    평안한 인생이 되길 저도 소망합니다. 환경이 평안하고, 마음도 평안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것은 나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성실하다고, 부지런하다고 되는것도 아닙니다. 내가 착하고 거룩하다고 되는것도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잘해도 타인이, 환경이 불러오는 불안과 어려움을 막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참된 평안은 없습니다.

    오늘 나의 인생에 샬롬, 하나님의 평안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하는 일들이 잘되고, 마음에는 평안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소소하게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조급하게 만드는 일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런 일들에 함몰되지 않고 하나님의 평안으로 이기는 하루 되길 기도합니다.

    3

    “내가 만약 죄가 있다면 당신이 직접 나를 죽이십시오” 떳떡한 다윗입니다. 하나님 앞에, 요나단 앞에, 사울왕 앞에 그는 죽임을 당해야할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떳떳합니다!

    떳떳한 인생, 부끄러울것 없는 인생, 숨지 않아도 되는 인생이 되야합니다. 오스틴에 살고 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얘기하다보면 결국 한다리 건너, 두 다리 건너 지인들이 연결됩니다! 대화 나눌때마다 놀라고 소름 끼칠 지경입니다. 그러면서 서로 농답합니다. “혹 그 사람이 저에 대해서 뭐라고 않좋은 소리 안했죠?!?”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고 떳떳한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실수 많고, 죄많은 인생이지만 떳떳한 인생되도록 항상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최선, 하는 일에 있어서 최선, 악이 아닌 선을 쫓아 행하는 삶을 어디서나 살아야겠습니다.

    떳떳한 하루,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입니다!

  • 1 나의 피할 곳은 어디인가?

    다윗은 갈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베프나 아내도 왕궁에 있고 자신만 도망쳐 나왔습니다. 사울왕은 대놓고 다윗을 죽이려고 했고 온나라가 이제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소문은 언제나 순식간입니다! ㅋ) 그러니 누가 숨겨줄 사람도 없습니다. 누가 왕과 대적하는 위험을 자처하겠습니까? 분명히 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을 따르던 추종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도 쉽게 믿기 어렵습니다.

    다윗은 어디로 피해야하나요? 사실 이와같이 피할곳이 마땅찮을 때가 참 많습니다. 믿을 사람도 잘 없고, 믿을만한 사람이 있다해도 실제로 보호의 능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힘들때, 도움이 필요할 때 피할 곳이 마땅찮음을 느낄때가 있습니다.

    다윗의 선택은 결국 사무엘입니다. 그나마도 사무엘만이 사울왕의 권력 앞에 굴복하지 않고, 불의에 휘둘리지 않고, 상황에 주눅들지 않고 다윗을 지켜줄것 같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을 만나자 그간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일을 사무엘에게 쏟아냅니다. 그렇게 정서적인 안정감을 누립니다. 사무엘은 여러면에서 도망쳐 나온 다윗의 상황에 큰 위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다윗을 지킨것은 결국 ‘하나님의 영’입니다. ‘전령’을 멈추게 한것도, 사울을 멈추게 한것도 결국 하나님의 영입니다.

    나를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나를 보호하시는 분은 하나님 입니다. 사람도 사용하시고 환경도 사용하십니다. 그마저도 안되면 (오늘 본문 기록처럼) 기적같은 일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십니다. “나의 피할 반석이요, 요새요, 방패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2

    사울은 세번이나 다윗을 잡으려고 시도합니다. 전령들이 갈때마다 예언을 합니다. 다른 방해가 있는것도 아니고 ‘예언’입니다. 이 사실을 통해 알게 되는 사실은 무엇일까요? 다윗을 다른 누구가 아닌 하나님께서 보호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울왕이 3번이나 시도하고, 거기에 멈추지 않고 자신이 직접 시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아니라고 하시는데, 확실하게 보여주시는데도 정신 못차리는 사울입니다. 자신의 의지를 어떻게든 실현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셔도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멈출 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일에 고집 부려서는 안됩니다. 한번에 못 깨달으면 두번 세번 만에는 깨달아야합니다. 사울처럼 깨닫지 못하고 고집 피우면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굳이 부딪히고, 깨지고, 수치를 당하고 멈추지 말고 그전에 영적 전조가 있을때 멈춰야합니다.

    목회자 중에 사울왕 같은 실수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결국 일에 중독되고, 성취에 중독되고, 내 의지와 꿈에 중독되고, 자리에 중독되어 멈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의지에 휘둘리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목회자가 되야겠습니다.

    3

    “사울도 예언자들 가운데 있느냐?” 예언자면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의 영에 충만하고 그분께서 입에 심어주시는 말을 하는 인생이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사울왕은 다시 악한 영에게 고난 당하는 일상으로 이내 돌아옵니다.

    무엇이 더 좋은것일까요?! 왕궁에서 살지만 악한 영에 휘둘리고, 마음의 평안이 없고, 미움과 시기와, 불안에 휩싸여 사는 인생? 아니면 가진것없고, 누리는것 없는 ‘다 벗은’것 같은 인생일 지라도 항상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고 그분의 말씀으로 가득한 인생일까요?!

    이왕이면 항상 건강한 ‘예언자’무리에 있는 제가 되길 원합니다. 타락한 사울왕이 되기보다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무엘이 되고 싶습니다. 왕궁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주님 계신곳이 왕궁입니다. 주님의 영과 함께 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 1

    ‘동해 번쩍 서해 번쩍’ 다윗은 바쁩니다. 전투도 해야하고 하프도 연주해야합니다. 그러나 무엇하나 허술함이 없고, 열심히 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또 실제로 잘하고 결과도 좋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울이라는 인물의 악행이 너무 강렬해서 그렇지 다윗의 성실도 이 ‘악한 이야기’에 묻히기는 너무나 소중한 메세지 입니다. 다윗도 압니다. 바보가 아닙니다. 사울의 상태도 알고, 자기를 향한 적개심도 내심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가장 큰 장점은 성실입니다. 어릴적 아버지의 명으로 양을 칠때부터 줄곧 일관성있게 보여준 다윗의 강점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실히 전투에 임하고, 성실하게 하프를 연주합니다!

    받은 은사를 상황의 핑계없이 할수있을 때까지 성실히 감당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본받아 마땅합니다. 우직하게 자리를 지키는 다윗의 모습이 멋져 보입니다. 원래 영화 보면 원래 담당자가 재앙의 현장에서 다 도망갈때까지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그 직전까지 해야할 일을 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은사의 발현과 성실한 실행, 끝까지 부름받은바 일에 매진하는 사명자로써의 삶을 결단합니다. 우직하면서 동시에 지혜로운 사명자 되야겠습니다.

    2

    사울왕을 돕는 군사들이 있고, 사울왕의 명을 거스르는 미갈과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악의에 대한 판단! 그리고 나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일제시대때 한인들을 괴롭혔던 친일파들이 있습니다. 광복이 되고 독립투사들이 소위 말하는 친일파들을 압박하기 시작하자 여전히 돈과 권력이 남아있던 이들은 살인청부업자를 돈주고 사서 독립투사들의 암살을 추진합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들의 악독한 시도는 실패로 끝납니다. 그 이유는 암살을 신청(?)받았던 살인청부업자가 그 대상자가 독립투사임을 알고 오히려 그들에게 가서 이 모든 시도를 다 밝히 드러낸것입니다. 살인청부업자 조차도 친일파 편에 서서는 안된다는 판단을 한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군인들은 “어쩔수 없어요! 저의 주인은 왕입니다! 그러니 죽이라면 죽여야죠!” 라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사울왕의 편에 섭니다. 어쩔수 없다는거죠! . 그러나 어제 본문에서처럼 요나단도 그렇고, 오늘 미갈도 그렇고 왕의 명령이지만 어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로운 선택과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어제 넷플릭스에서 ‘나는 신이다:신이버린 사람들’이라는 다큐를 보았습니다. JMS이단에 관한 얘기였습니다. 보다가 머리가 아프고, 구역질이 나고, 마음이 심란해서 꺼버리고 말았습니다. 계속 볼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충격에 충격을 거듭했는데 그중에 마음이 아팠던 부분은 바로 정명석을 위해 뛰는 사람들, 또 속는 자매들이었습니다. 정명석이 불법자요, 이단자요, 사기꾼인게 드러나는데도 정명석의 편에서서 그의 말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울이고 뭐고 아닌건 아닌겁니다. 나는 예수님 편입니다. 나는 공의의 편입니다. 나는 사랑의 편입니다. 나는 정직의 편이고, 거룩의 편입니다. 나는 나의 위치, 지위, 일자리, 환경과 상관없이 하나님 편입니다. 하나님의 편에서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을 하겠습니다.

    3

    "그를 침대에 누인채로 내게 데려오라 내가 그를 죽이겠다." 그러나 사람들이 들어가서 보니 침대에는 머리에 염소털을 씌운 우상만 뉘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15-16절)

    할렐루야!! 이왕 이렇게 된거 ‘침대위에 있는 우상’을 죽여야합니다. 쓸데 없는 생각버리고, 다윗을 죽이겠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버리고, 침대위에 있는 우상을 죽여야 합니다. 왕권이라는 우상, 욕심이라는 우상, 집착이라는 우상, 폭력이라는 우상을 죽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이왕 이렇게 된거 우상을 죽이는 하루 되야겠습니다!

  • 1

    요나단! 그 이름은 중재자, 보호하는자, 죄를 막는자 입니다. 아버지 사울은 이제 다윗을 향해 대 놓고 살의를 들어내기 시작합니다. 이쯤되면 거의 ‘매드킹’입니다. 사울의 이러한 미친짓(?)을 막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울은 살인자, 혹은 살인 교사자가 됩니다. 다윗은 소중한 목숨을 허망하게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는 ‘매드킹’과 다윗 사이에 중재자가 되어야합니다. 용기를 내서 또한 지혜를 가지고 이 악한 상황을 바꾸려는 시도가 필요합니다. 이 시도가 성공한다면 한명의 목숨은 보호 받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가 죄를 지을 영적 위기에서 벗어날수 있습니다.

    지금도 누군가는 이 시대의 요나단으로 활동 중입니다. 이 지역의 요나단으로 활동 중입니다. 죄를 지을려고 하면 어떻게든 막으려고 합니다. 누군가가 피해를 당하려고 한다면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합니다. 이 시도와 노력을 통해서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덜 다치고, 누군가는 죄를 지을 목전에서 다행스럽게 돌이키기도 합니다.

    죄가 요구되는 상황을 마주할때 무엇이 잘못됬는지 지혜롭게 그리고 담대하게 말하는 자가 되겠습니다! 이웃이 불필요한 피해를 받을 위기에 놓이게 될때 그들 편에 서서 보호하는데 힘을 보태는 자가 되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말하는것을 절대 못하는 성격이라 이 적용과 결정이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하지만 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 해 나갈줄 믿습니다! 아멘!

    2

    지적받는 자의 자세! 수용의 자세! 물론 사울왕은 결론적으로 보면 요나단의 이 충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윗을 계속 미워하고 죽이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만 국한해서 보게 되면 일단 사울왕은 잘못을 지적당할때 수용하고 고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잘못을 지적당할때 감정이 상합니다.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때로는 분노가 일어납니다. 자기보호본능이 튀어나오면서 싸울 준비를 하기도 합니다. 지적이라면 무조건 거절하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 지적받고 자신이 잘못하고 있는걸 알아도 고집스럽게 ‘잘못된 길’을 계속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혜로운 지적, 사랑에 기반한 충언을 수용하지 못하면 그 말의 능력과 가치가 실현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충언하는자도 중요하지만 수용하는 자는 더 중요합니다.

    아내에게 지적받고, 성도에게 지적받고, 친구들에게 지적받고, 이웃에게 지적받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날카롭게 지적할때 건강한 자세로 듣고, 분별하고, 인정하고, 수용해서 더 나은 변화를 만들어 내는 내가 되기로 결정합니다.

    사랑의 지적 앞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분노와 자기 변론과, 싸움의 본능과, 감정만 앞세우는 미성숙함을 대적합니다!

    수용해야하는 지혜로운 지적 앞에서 바꾸고, 변하고, 수정하고, 성장하는 목회자가 되겠습니다.

    3

    다윗이 요나단을 믿습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거 아닌가요? 다윗과 요나단은 베프고, 요나단과 사울은 부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 한켠이 꺼림직 합니다. ‘요나단의 말을 믿는게 맞나?’

    그즈음에 요나단이 다윗을 찾아와서 “내가 일을 다 해결했으니, 아버지가 죽이지 않는다 하셨으니 다시 궁으로 돌아가자!” 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이 말을 믿고 다시 왕궁으로, 다시 사울왕 앞으로 들어갑니다. 맞습니다. 요나단을 믿고, 그의 말을 믿는것입니다.

    서로 믿어주는 관계, 서로 신뢰하는 관계, 믿을만한 관계를 형성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계에 있어서 내가 진실되고 정직해야합니다. 서로 진실되고 정직해야합니다. 관계에 있어서 배신의 아이콘이 아니라 신실의 아이콘이 되야겠습니다.

    “그는 정말 믿을만해!” 소리 듣는, 남편, 아빠, 친구, 이웃, 목사 되려면 진짜 노력 많이 해야겠습니다!

  • 1

    사울은 정말 의뭉스럽고 뒤에 감춰둔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입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것은 사울을 사위 삼는것 입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죽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뒤에서는 사람들을 조정해서 다윗에게 말을 흘리게 합니다. 자신의 살인계획을 위해 앞으로는 웃으면서 몰래 몰래 음모를 시행하고 있는것입니다. 앞뒤가 완전히 다른 사람 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투명합니다.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왕의 사위가 됩니까? 사울의 의뭉스러움에 자신도 의뭉스럽게 반응하고 그런거 아닙니다. 그는 진짜 결혼할 때 필요한 부분을 자신이 채울 수 없다고 생각한것입니다. 그것 뿐입니다. 그러니 처음에는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결혼 지참금이 ‘블레셋 사람 100명 죽이기’라고 하니까 기쁨으로 나가서 오히려 200명을 죽이고 돌아옵니다.

    의뭉스러운 사람이 될것인가? 투명한 사람이 될것인가? 확실한것은 그 누구도 앞뒤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무섭고, 그들이 뒤에서 실행하는 음모는 파괴적입니다. 사람을 교묘하게 조정하고, 이간과 분열을 쉽게 만들어 냅니다.

    솔직하고 투명한 사람이 되야겠습니다. 소위 말해 앞뒤가 같은 사람, 언어도 행동도 일치하고 사람들에게 솔직하되 존중하고, 베려하고, 인정하는 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혹 좋지 않은(?)말을 해야할 경우는 뒤에서가 아닌, 숨겨셔가 아닌, 교묘하게가 아닌 정직하게 드러내고 신사적 매너를 가지고 성숙하고 지혜롭게 드러내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물론 사울왕은 다윗에게, 그러므로, 정직하게 “나 너 죽이고 싶어!” ㅋㅋㅋ 할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정직할수 없는 마음을 품었다면 회개하고 버리는것이 맞습니다!

    2

    다윗이 사울을 평생의 적으로 만든것이 아니라 사울이 다윗을 평생의 적으로 만든것입니다. 세상을 적을 만들면서 사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데 혼자 화내고, 혼자 시기하고, 혼자 경쟁하고, 혼자 경계합니다. 상대는 그럴 맘도 없습니다. 잘지내고 싶습니다. 그마저도 아니면 사실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혼자 자신과 그를 ‘대적’의 관계로 몰아 붙이는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힘들까요? 자신이 힘듭니다. 마음도 힘들고, 상황도 힘듭니다.

    굳이 적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불필요한 적을 만드는 태도를 버려야겠습니다. 적대적으로 대하는 태도도 버려야겠습니다. 삐뚫어진 눈으로 타인을 보는 시선도 바로 잡아야겠습니다. 피해망상적 해석의 습관도 버려야겠습니다. 타인의 진심을 의심으로 판단하는 습관도 버려야겠습니다.

    사울이 진짜 대적해야하는것은 ‘블레셋’이지 ‘다윗’이 아닙니다!! 내 편하고 척을 지는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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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지혜롭게 행하매” 라고 기록합니다. 다윗의 행함은 달랐습니다. 탁월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임해 다윗처럼 항상 더 지혜로운 인생이 되고 싶습니다. 더 잘하고 싶습니다. 주를 위해서라면 정말 잘하고 싶습니다. 맡겨진 일마다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 내고 싶습니다!

    다윗이 누렸던 이 능력과 축복이 내 삶에도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매 이에 그의 이름이 심히 귀하게 되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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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주님 생각

오늘도 주님생각 QT나눔

  • 030723 삼상 2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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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요나단은 다윗에게 말합니다. “네 마음의 소원을 말하라 내가 무엇이든지 이뤄주리라!” 이 말을 듣고 다윗은 요나단에게 자신의 소원을 말합니다. “사울왕이 나를 정말 죽이려고 하는지 아닌지 그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알려주세요!”

    다윗에게 소원을 말하라고 했더니 기껏 사울왕의 의중을 파악해 알려달라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원하는 소원’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평생 살 돈을 주세요 떠나야겠습니다!” 혹은 “당신의 아버지를 어떻게든 막아주세요!’ 라든가, “당신과 내가 함께 반역을 일으킵시다!” 라든가 뭐 이런 대단한 얘기가 나올것 같은데 그저 ‘사울왕의 정확한 의중’을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칫 나의 소원이 욕심인 경우가 있습니다. 본이아니게 파괴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하게 너무 이기적일 때도 있습니다. 거룩하지 못한 경우도있고, 심지어 불법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의 소원’이라고 말하며 간구할 때 소원의 동기, 내용, 결과까지도 점검해봐야겠습니다. ‘내가 지금 소원하는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정말 맞는 것인가? 거룩한것인가? 옳은 것인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것인가? 혹 불법적이진 않은가? 피해를 만들어 내진 않는가? 너무 이기적이진 않은가? 선한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인가? 소원을 욕심과 착각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간구를 욕망의 해방구로 착각해서는 안되겠습니다!

    2

    다윗은 ‘평안’(8절, 개역개정)을 원합니다. 우리말 성경으로 보면 환경의 평안을 말하는것 같고, 개역개정으로 보면 마음의 평안까지도 말하는것 같습니다. 다윗이 원하는 것은 온전한 평안 입니다.

    평안한 인생이 되길 저도 소망합니다. 환경이 평안하고, 마음도 평안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것은 나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성실하다고, 부지런하다고 되는것도 아닙니다. 내가 착하고 거룩하다고 되는것도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잘해도 타인이, 환경이 불러오는 불안과 어려움을 막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참된 평안은 없습니다.

    오늘 나의 인생에 샬롬, 하나님의 평안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하는 일들이 잘되고, 마음에는 평안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소소하게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조급하게 만드는 일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런 일들에 함몰되지 않고 하나님의 평안으로 이기는 하루 되길 기도합니다.

    3

    “내가 만약 죄가 있다면 당신이 직접 나를 죽이십시오” 떳떡한 다윗입니다. 하나님 앞에, 요나단 앞에, 사울왕 앞에 그는 죽임을 당해야할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떳떳합니다!

    떳떳한 인생, 부끄러울것 없는 인생, 숨지 않아도 되는 인생이 되야합니다. 오스틴에 살고 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얘기하다보면 결국 한다리 건너, 두 다리 건너 지인들이 연결됩니다! 대화 나눌때마다 놀라고 소름 끼칠 지경입니다. 그러면서 서로 농답합니다. “혹 그 사람이 저에 대해서 뭐라고 않좋은 소리 안했죠?!?”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고 떳떳한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실수 많고, 죄많은 인생이지만 떳떳한 인생되도록 항상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최선, 하는 일에 있어서 최선, 악이 아닌 선을 쫓아 행하는 삶을 어디서나 살아야겠습니다.

    떳떳한 하루,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입니다!

  • 030623 삼상 19: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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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의 피할 곳은 어디인가?

    다윗은 갈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베프나 아내도 왕궁에 있고 자신만 도망쳐 나왔습니다. 사울왕은 대놓고 다윗을 죽이려고 했고 온나라가 이제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소문은 언제나 순식간입니다! ㅋ) 그러니 누가 숨겨줄 사람도 없습니다. 누가 왕과 대적하는 위험을 자처하겠습니까? 분명히 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을 따르던 추종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도 쉽게 믿기 어렵습니다.

    다윗은 어디로 피해야하나요? 사실 이와같이 피할곳이 마땅찮을 때가 참 많습니다. 믿을 사람도 잘 없고, 믿을만한 사람이 있다해도 실제로 보호의 능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힘들때, 도움이 필요할 때 피할 곳이 마땅찮음을 느낄때가 있습니다.

    다윗의 선택은 결국 사무엘입니다. 그나마도 사무엘만이 사울왕의 권력 앞에 굴복하지 않고, 불의에 휘둘리지 않고, 상황에 주눅들지 않고 다윗을 지켜줄것 같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을 만나자 그간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일을 사무엘에게 쏟아냅니다. 그렇게 정서적인 안정감을 누립니다. 사무엘은 여러면에서 도망쳐 나온 다윗의 상황에 큰 위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다윗을 지킨것은 결국 ‘하나님의 영’입니다. ‘전령’을 멈추게 한것도, 사울을 멈추게 한것도 결국 하나님의 영입니다.

    나를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나를 보호하시는 분은 하나님 입니다. 사람도 사용하시고 환경도 사용하십니다. 그마저도 안되면 (오늘 본문 기록처럼) 기적같은 일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십니다. “나의 피할 반석이요, 요새요, 방패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2

    사울은 세번이나 다윗을 잡으려고 시도합니다. 전령들이 갈때마다 예언을 합니다. 다른 방해가 있는것도 아니고 ‘예언’입니다. 이 사실을 통해 알게 되는 사실은 무엇일까요? 다윗을 다른 누구가 아닌 하나님께서 보호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울왕이 3번이나 시도하고, 거기에 멈추지 않고 자신이 직접 시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아니라고 하시는데, 확실하게 보여주시는데도 정신 못차리는 사울입니다. 자신의 의지를 어떻게든 실현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셔도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멈출 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일에 고집 부려서는 안됩니다. 한번에 못 깨달으면 두번 세번 만에는 깨달아야합니다. 사울처럼 깨닫지 못하고 고집 피우면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굳이 부딪히고, 깨지고, 수치를 당하고 멈추지 말고 그전에 영적 전조가 있을때 멈춰야합니다.

    목회자 중에 사울왕 같은 실수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결국 일에 중독되고, 성취에 중독되고, 내 의지와 꿈에 중독되고, 자리에 중독되어 멈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의지에 휘둘리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목회자가 되야겠습니다.

    3

    “사울도 예언자들 가운데 있느냐?” 예언자면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의 영에 충만하고 그분께서 입에 심어주시는 말을 하는 인생이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사울왕은 다시 악한 영에게 고난 당하는 일상으로 이내 돌아옵니다.

    무엇이 더 좋은것일까요?! 왕궁에서 살지만 악한 영에 휘둘리고, 마음의 평안이 없고, 미움과 시기와, 불안에 휩싸여 사는 인생? 아니면 가진것없고, 누리는것 없는 ‘다 벗은’것 같은 인생일 지라도 항상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고 그분의 말씀으로 가득한 인생일까요?!

    이왕이면 항상 건강한 ‘예언자’무리에 있는 제가 되길 원합니다. 타락한 사울왕이 되기보다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무엘이 되고 싶습니다. 왕궁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주님 계신곳이 왕궁입니다. 주님의 영과 함께 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 030523 삼상 19: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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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동해 번쩍 서해 번쩍’ 다윗은 바쁩니다. 전투도 해야하고 하프도 연주해야합니다. 그러나 무엇하나 허술함이 없고, 열심히 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또 실제로 잘하고 결과도 좋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울이라는 인물의 악행이 너무 강렬해서 그렇지 다윗의 성실도 이 ‘악한 이야기’에 묻히기는 너무나 소중한 메세지 입니다. 다윗도 압니다. 바보가 아닙니다. 사울의 상태도 알고, 자기를 향한 적개심도 내심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가장 큰 장점은 성실입니다. 어릴적 아버지의 명으로 양을 칠때부터 줄곧 일관성있게 보여준 다윗의 강점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실히 전투에 임하고, 성실하게 하프를 연주합니다!

    받은 은사를 상황의 핑계없이 할수있을 때까지 성실히 감당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본받아 마땅합니다. 우직하게 자리를 지키는 다윗의 모습이 멋져 보입니다. 원래 영화 보면 원래 담당자가 재앙의 현장에서 다 도망갈때까지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그 직전까지 해야할 일을 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은사의 발현과 성실한 실행, 끝까지 부름받은바 일에 매진하는 사명자로써의 삶을 결단합니다. 우직하면서 동시에 지혜로운 사명자 되야겠습니다.

    2

    사울왕을 돕는 군사들이 있고, 사울왕의 명을 거스르는 미갈과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악의에 대한 판단! 그리고 나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일제시대때 한인들을 괴롭혔던 친일파들이 있습니다. 광복이 되고 독립투사들이 소위 말하는 친일파들을 압박하기 시작하자 여전히 돈과 권력이 남아있던 이들은 살인청부업자를 돈주고 사서 독립투사들의 암살을 추진합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들의 악독한 시도는 실패로 끝납니다. 그 이유는 암살을 신청(?)받았던 살인청부업자가 그 대상자가 독립투사임을 알고 오히려 그들에게 가서 이 모든 시도를 다 밝히 드러낸것입니다. 살인청부업자 조차도 친일파 편에 서서는 안된다는 판단을 한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군인들은 “어쩔수 없어요! 저의 주인은 왕입니다! 그러니 죽이라면 죽여야죠!” 라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사울왕의 편에 섭니다. 어쩔수 없다는거죠! . 그러나 어제 본문에서처럼 요나단도 그렇고, 오늘 미갈도 그렇고 왕의 명령이지만 어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로운 선택과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어제 넷플릭스에서 ‘나는 신이다:신이버린 사람들’이라는 다큐를 보았습니다. JMS이단에 관한 얘기였습니다. 보다가 머리가 아프고, 구역질이 나고, 마음이 심란해서 꺼버리고 말았습니다. 계속 볼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충격에 충격을 거듭했는데 그중에 마음이 아팠던 부분은 바로 정명석을 위해 뛰는 사람들, 또 속는 자매들이었습니다. 정명석이 불법자요, 이단자요, 사기꾼인게 드러나는데도 정명석의 편에서서 그의 말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울이고 뭐고 아닌건 아닌겁니다. 나는 예수님 편입니다. 나는 공의의 편입니다. 나는 사랑의 편입니다. 나는 정직의 편이고, 거룩의 편입니다. 나는 나의 위치, 지위, 일자리, 환경과 상관없이 하나님 편입니다. 하나님의 편에서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을 하겠습니다.

    3

    "그를 침대에 누인채로 내게 데려오라 내가 그를 죽이겠다." 그러나 사람들이 들어가서 보니 침대에는 머리에 염소털을 씌운 우상만 뉘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15-16절)

    할렐루야!! 이왕 이렇게 된거 ‘침대위에 있는 우상’을 죽여야합니다. 쓸데 없는 생각버리고, 다윗을 죽이겠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버리고, 침대위에 있는 우상을 죽여야 합니다. 왕권이라는 우상, 욕심이라는 우상, 집착이라는 우상, 폭력이라는 우상을 죽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이왕 이렇게 된거 우상을 죽이는 하루 되야겠습니다!

  • 030423 삼상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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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요나단! 그 이름은 중재자, 보호하는자, 죄를 막는자 입니다. 아버지 사울은 이제 다윗을 향해 대 놓고 살의를 들어내기 시작합니다. 이쯤되면 거의 ‘매드킹’입니다. 사울의 이러한 미친짓(?)을 막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울은 살인자, 혹은 살인 교사자가 됩니다. 다윗은 소중한 목숨을 허망하게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는 ‘매드킹’과 다윗 사이에 중재자가 되어야합니다. 용기를 내서 또한 지혜를 가지고 이 악한 상황을 바꾸려는 시도가 필요합니다. 이 시도가 성공한다면 한명의 목숨은 보호 받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가 죄를 지을 영적 위기에서 벗어날수 있습니다.

    지금도 누군가는 이 시대의 요나단으로 활동 중입니다. 이 지역의 요나단으로 활동 중입니다. 죄를 지을려고 하면 어떻게든 막으려고 합니다. 누군가가 피해를 당하려고 한다면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합니다. 이 시도와 노력을 통해서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덜 다치고, 누군가는 죄를 지을 목전에서 다행스럽게 돌이키기도 합니다.

    죄가 요구되는 상황을 마주할때 무엇이 잘못됬는지 지혜롭게 그리고 담대하게 말하는 자가 되겠습니다! 이웃이 불필요한 피해를 받을 위기에 놓이게 될때 그들 편에 서서 보호하는데 힘을 보태는 자가 되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말하는것을 절대 못하는 성격이라 이 적용과 결정이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하지만 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 해 나갈줄 믿습니다! 아멘!

    2

    지적받는 자의 자세! 수용의 자세! 물론 사울왕은 결론적으로 보면 요나단의 이 충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윗을 계속 미워하고 죽이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만 국한해서 보게 되면 일단 사울왕은 잘못을 지적당할때 수용하고 고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잘못을 지적당할때 감정이 상합니다.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때로는 분노가 일어납니다. 자기보호본능이 튀어나오면서 싸울 준비를 하기도 합니다. 지적이라면 무조건 거절하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 지적받고 자신이 잘못하고 있는걸 알아도 고집스럽게 ‘잘못된 길’을 계속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혜로운 지적, 사랑에 기반한 충언을 수용하지 못하면 그 말의 능력과 가치가 실현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충언하는자도 중요하지만 수용하는 자는 더 중요합니다.

    아내에게 지적받고, 성도에게 지적받고, 친구들에게 지적받고, 이웃에게 지적받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날카롭게 지적할때 건강한 자세로 듣고, 분별하고, 인정하고, 수용해서 더 나은 변화를 만들어 내는 내가 되기로 결정합니다.

    사랑의 지적 앞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분노와 자기 변론과, 싸움의 본능과, 감정만 앞세우는 미성숙함을 대적합니다!

    수용해야하는 지혜로운 지적 앞에서 바꾸고, 변하고, 수정하고, 성장하는 목회자가 되겠습니다.

    3

    다윗이 요나단을 믿습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거 아닌가요? 다윗과 요나단은 베프고, 요나단과 사울은 부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 한켠이 꺼림직 합니다. ‘요나단의 말을 믿는게 맞나?’

    그즈음에 요나단이 다윗을 찾아와서 “내가 일을 다 해결했으니, 아버지가 죽이지 않는다 하셨으니 다시 궁으로 돌아가자!” 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이 말을 믿고 다시 왕궁으로, 다시 사울왕 앞으로 들어갑니다. 맞습니다. 요나단을 믿고, 그의 말을 믿는것입니다.

    서로 믿어주는 관계, 서로 신뢰하는 관계, 믿을만한 관계를 형성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계에 있어서 내가 진실되고 정직해야합니다. 서로 진실되고 정직해야합니다. 관계에 있어서 배신의 아이콘이 아니라 신실의 아이콘이 되야겠습니다.

    “그는 정말 믿을만해!” 소리 듣는, 남편, 아빠, 친구, 이웃, 목사 되려면 진짜 노력 많이 해야겠습니다!

  • 030323 삼상 18: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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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울은 정말 의뭉스럽고 뒤에 감춰둔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입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것은 사울을 사위 삼는것 입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죽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뒤에서는 사람들을 조정해서 다윗에게 말을 흘리게 합니다. 자신의 살인계획을 위해 앞으로는 웃으면서 몰래 몰래 음모를 시행하고 있는것입니다. 앞뒤가 완전히 다른 사람 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투명합니다.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왕의 사위가 됩니까? 사울의 의뭉스러움에 자신도 의뭉스럽게 반응하고 그런거 아닙니다. 그는 진짜 결혼할 때 필요한 부분을 자신이 채울 수 없다고 생각한것입니다. 그것 뿐입니다. 그러니 처음에는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결혼 지참금이 ‘블레셋 사람 100명 죽이기’라고 하니까 기쁨으로 나가서 오히려 200명을 죽이고 돌아옵니다.

    의뭉스러운 사람이 될것인가? 투명한 사람이 될것인가? 확실한것은 그 누구도 앞뒤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무섭고, 그들이 뒤에서 실행하는 음모는 파괴적입니다. 사람을 교묘하게 조정하고, 이간과 분열을 쉽게 만들어 냅니다.

    솔직하고 투명한 사람이 되야겠습니다. 소위 말해 앞뒤가 같은 사람, 언어도 행동도 일치하고 사람들에게 솔직하되 존중하고, 베려하고, 인정하는 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혹 좋지 않은(?)말을 해야할 경우는 뒤에서가 아닌, 숨겨셔가 아닌, 교묘하게가 아닌 정직하게 드러내고 신사적 매너를 가지고 성숙하고 지혜롭게 드러내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물론 사울왕은 다윗에게, 그러므로, 정직하게 “나 너 죽이고 싶어!” ㅋㅋㅋ 할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정직할수 없는 마음을 품었다면 회개하고 버리는것이 맞습니다!

    2

    다윗이 사울을 평생의 적으로 만든것이 아니라 사울이 다윗을 평생의 적으로 만든것입니다. 세상을 적을 만들면서 사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데 혼자 화내고, 혼자 시기하고, 혼자 경쟁하고, 혼자 경계합니다. 상대는 그럴 맘도 없습니다. 잘지내고 싶습니다. 그마저도 아니면 사실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혼자 자신과 그를 ‘대적’의 관계로 몰아 붙이는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힘들까요? 자신이 힘듭니다. 마음도 힘들고, 상황도 힘듭니다.

    굳이 적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불필요한 적을 만드는 태도를 버려야겠습니다. 적대적으로 대하는 태도도 버려야겠습니다. 삐뚫어진 눈으로 타인을 보는 시선도 바로 잡아야겠습니다. 피해망상적 해석의 습관도 버려야겠습니다. 타인의 진심을 의심으로 판단하는 습관도 버려야겠습니다.

    사울이 진짜 대적해야하는것은 ‘블레셋’이지 ‘다윗’이 아닙니다!! 내 편하고 척을 지는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3

    “더 지혜롭게 행하매” 라고 기록합니다. 다윗의 행함은 달랐습니다. 탁월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임해 다윗처럼 항상 더 지혜로운 인생이 되고 싶습니다. 더 잘하고 싶습니다. 주를 위해서라면 정말 잘하고 싶습니다. 맡겨진 일마다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 내고 싶습니다!

    다윗이 누렸던 이 능력과 축복이 내 삶에도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매 이에 그의 이름이 심히 귀하게 되니라” 아멘!

  • 030223 삼상 18: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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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울이 ‘선을 넘은 날’ 입니다. 사울은 어느날부터 다윗을 주목했습니다. 조금 지나자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미워하고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악신이 그를 괴롭히던 그 날, 그는 선을 넘었습니다. 실제 다윗을 향해 창을 던진것입니다. 미움과 살인은 또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미움의 감정을 살인이라는 행위로 표출시키는것은 또 다른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사울왕이 바로 이 ‘넘기 어려운 선’, 혹은 ‘절대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어버린 것입니다. 다윗이 피했기에 망정이지 그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살인자가 될수도 있었습니다.

    ‘선’을 지키는것이 어렵습니다. 간혹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던 사람들이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것을 봅니다. 횡령도 하고 간통도 하고, 심지어 살인도 합니다. 그럴때마다 생각합니다. ‘그들의 물욕, 성욕, 분노의 감정과 생각들은 어쩌다가 저 지경까지 갔을까?? 어쩌다가 선을 넘게 되었을까? 넘지 말아야 할 선 앞에서 도대체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기에 그 선을 넘은것일까?!’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내안에 방치해 놓은 ‘미움’ ‘욕심’ ‘악의’는 웅크리고 때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우리가 넘지 말아야 할 선 앞에 위태하게 서 있을때 우리를 밀어 버립니다. 그래서 죄의 감정은 방치해서도 안되고 키워도 안됩니다. 별거 아닌 감정이 아닙니다. 내가 제어 할 수 있는 악의가 아닙니다.

    내 안에 방치하고 키우고 있는 악의적 생각들을 다시 한번 떠올립니다. 이게 괜찮은게 아닙니다. 이 문제들을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왕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악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령님이 함께 하시기에 저는 이런 방치된 ‘악의적 감정과 생각’들을 해결해야겠습니다. 더이상 악을 키워 악에게 잡혀먹는 어리석은 인생의 길을 위태하게 걸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가는 위험을 감수해서는 안되겠습니다.

    2

    누가 함께 하느냐에 따라 일의 결과가 달라지는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함께 사역하는 교역자, 함께 사역하는 청년들, 때에 따라서는 그 결과가 참 달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릴적 운동경기나 게임에서 팀을 짤때도 누구랑 같은 팀을 할지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쟤랑 한팀하면 무조건 이겨!’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만큼 든든하고 기쁘고 행복하고 자신감 넘치는일이 없습니다. 실제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가는곳마다 승리했다 성경은 기록합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기록하는 것입니다.

    다윗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십니다. 아멘! 그분이 내 편이고, 내가 그분 편입니다. 전쟁이야 피할 수 없는 것이요. 전투야 해야할 일이지만 그래도 걱정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항상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심지어 나를 노리고 정확하게 날라오는 창도 피할 수 있게 되는것입니다. 할렐루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줄 믿습니다. 주를 위해 가는 곳마다, 하는 일마다 성취하게 해줄실 줄 믿습니다.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사랑받는 목자가 되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보여주신 축복으로 함께 해줄실줄 믿습니다. 아멘

    3

    미워하는 자에게 휘둘려 살지 마세요! 나를 미워하는자, 나를 향해 적의를 내뿜는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다윗은 오늘 자신에게 집중하며 삽니다. 사울의 증오가 자신의 인생 전체를 쥐고 흔들지 못하게 합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에 의해서 흔들리고 방황하는 오늘을 살지 말고, 내게 주어진 삶, 나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집중하며 생산적이고, 두려움에 메이지 않은 삶을 살길 축복합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보다 사랑하는 자가 더 많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십니다! 아멘!

  • 030123 삼상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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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은 빛이나는 인생입니다. “내가 제일 잘나가!” 노래불러도 되는 인생입니다. 모두에게 주목받고, 모두에게 사랑받습니다. 특별히 다윗보다 더 높고 권력이 있는 자들에게도 사랑받았습니다. 다윗은 하는 일마다 잘되고 실패를 모릅니다. 주변에서 이러한 인생을 보면 괜히 부러워지고 간혹은 시기와 질투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막상 다윗의 인생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일단 ‘집에 돌아가지’못하게 되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이 부분도 나름의 맘고생이 될수 있습니다. 또한 사울왕이 계속 일을 맡겼기 때문에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냥 일도 아닙니다. 여기저기서 전투를 많이 해야했습니다. 전투는 항상 목숨을 잃을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현장입니다. 이렇듯 다윗의 인생은 주목받고, 사랑받고, 인정받고, 승승장구하고 실패를 몰랐지만 그러한 삶을 실제 살아내는 다윗은 그냥 쉽게 살아낸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있습니다. 둘째로는 그가 누리는 영광에 가린 그의 성실과 수고, 땀흘림과 노력 그리고 눈불의 결과물 입니다.

    타인의 성공을 쉽게 보고,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간혹 요행으로 소위 말하는 ‘성공’을 이룬것 같은 사람들도 보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영광에 가려진 성실과 노력과 눈물과 최선을 통해서 그들이 오늘날 서있는 그곳에 서있는것입니다. 이유없이 사랑받고, 이유없이 인정받고, 이유없이 찬양받는 인생은 잘 없습니다.

    오늘 나의 삶의 성실과 수고, 최선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해질 때 다윗같이 빛나는 인생! 하나님을 빛내는 인생이 될줄로 믿습니다.

    2

    시기보다는 사랑이 어떨까요?! 잘하는 사람을 보고 질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실력자와 적이 됩니다. 대척점에 서게 되는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지혜일까요? 실력자와 친구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짜 사랑하고 그들에게 배우고, 동역자가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력자와 이러한 관계가 형성되면 자연스럽게 배우고 성장합니다. 질투는 파괴하지만 사랑은 성장항게 합니다.

    결국 다윗을 경계한 사울은 후퇴하지만 요나단은 안타깝게 죽기 전까지는 훌륭하게 성장하고 멋지게 일하는 왕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다윗의 영향력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 입니다.

    애초에 시기와 짍투를 갖는 이유는 내가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그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마음입니다. 전혀 중요하지 않은 여담(?)이지만 다윗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때 이스라엘 모든 성읍의 ‘여인들’이 나와 다윗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여인들이 뛰놀며’ 다윗을 노래했다고 합니다. 모든 남자들은 어디있나요? 형제님들 어디있나요?! 다들 배가 아팠을까요?! ㅋ 우스운 추론이지만 정말이지 배가 아파서 안나왔다면 ‘못난녀석들’입니다! ㅋㅋ

    다시 묵상으로 돌아가봅니다! 인정 받고 싶어서 시기와 질투로 상대를 무시하려 한다면 실수 하는것입니다. 모순적이게도 시기와 질투는 오히려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지름길이 됩니다. 실제로 나를 성장시키고 빛나게 하는것은 사랑과 인정, 그리고 동역인 경우가 많습니다.

    선후배, 동료 목회자들을 사랑하며 그들에게 계속 배우고 성장해야겠습니다. 소위 말해 사역을 ‘잘하는’ 선후배동료 목사들을 온오프라인에서 만날때 진심으로 인정하고 사랑하고 배우는 자세를 갖춰 유익을 누리며 건강하게 성장하고 사역하는 또 다른 목회자가 되야겠습니다.

    3

    사울은 나라가 자기꺼라고 생각하나 봅니다.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8절)

    그런가 봅니다. 사람이 권력을 맛보다 보면, 분별하지 못하고 권력을 누리다보면 이렇게 타락하나 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자기꺼라고 생각하다뇨! 말도 안되는 얘기입니다.

    오늘 누리고 있는 모든것! 소소한것부터, 영광스러운 유무형의 모든것들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위임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큰 일 납니다. 그 순간부터 좌충우돌 하게 되어있습니다. 집착, 욕심, 강탈, 남용, 교만, 질투, 시기등 헤아리기 힘든 문제들이 폭발하게 됩니다.

    모든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허락된것입니다. 주의 것입니다. 주께서 주시면 받고, 기쁨으로 누리고, 성실히 사용하고, 진심으로 감사해야겠습니다. 주께서 가져가시면… 가져가시면….”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겠습니다! 아멘!

  • 022823 삼상 17:5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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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리더의 역할이 참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윗은 믿음으로 뛰어나가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쓰러뜨립니다. 그러자 이때까지 꼼짝도 안하고 있던 이스라엘 군사들이 막 뛰쳐 나가서 도망가는 블레셋 사람들은 죽이기 시작합니다. 리더가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딛자 비로소 군사들이 뛰는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자 사도들과 제자들이 이어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걸었던것 또한 기억합니다. “뛰어가라!” 라고 외치는 리더보다 “나를 따르라!”라는 리더가 더 영향력이 있음도 알고 있습니다.

    물론 먼저 뛰어나가는것이 거의 대부분 두렵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을 보며 다시 한번 믿음의 걸음을 먼저 때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골리앗을 향해서도 먼저 나가고, 요단강에 발도 먼저 담구고, 십자가도 먼저 지는 리더가 되야겠다 결심하게 됩니다. 바우 교회를 섬기며 언제나 믿음으로 먼저 앞장서는 다윗같은 목회자가 되기로 다짐합니다.

    2

    꽤나 멀리서 물맷돌을 던져 골리앗을 맞췄습니다. 골리앗은 넘어졌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윗은 그런 골리앗에게 다가가서 그의 칼을 뽑아 그를 죽이고 그의 목을 뱁니다.

    그런데 이것은 정말 놀라운 사건 입니다. 다윗이 물맷돌을 맞춘것만큼 놀라운 사실은 쓰러진 골리앗에게 다윗이 뛰어갔다는것입니다. 다가갔습니다. 우리는 골리앗이 죽은줄 알지만 돌한번 날리고 골리앗이 쓰러졌을때 그가 정말 죽었는지 속이는건지 다윗은 알길이 없습니다! 그나마도 안전거리, 유리한 거리에 있었는데 이제 골리앗에게 가까이 가면 그러면 더이상 기회가 없을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성경의 기록처럼 그는 칼도 없습니다. 일종의 무방비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저같으면 그렇게 쉽게 다가가지 못합니다. 뛰어가지 못합니다. ‘정말 죽었을까?’

    그러나 다윗은 달려갑니다. 애초에 골리앗을 향해 달려 나갈때부터 그는 의심이 없습니다! 내가 이긴다!! 그는 죽었다!!

    이것이 믿음의 자녀의 용기이며, 확신의 자세입니다. 믿는다고 뛰어나갔습니다. 승리해도 의심하는게 우리입니다. ㅋ 잘되도 못믿어 하는 우리 입니다. ‘혹시 잘못되면 어쩌지?’ 분명히 골리앗 쓰러졌는데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는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승리를 믿고, 끝까지 승리를 쟁취해야겠습니다. ‘골리앗’ 쓰러지면 두번 생각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달려가서 확정지어야합니다!!

    넘어진 골리앗에 겁먹어 우물쭈물하는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왕 믿음의 걸음을 시작했으니 끝 맺을때까지 확실하게 달려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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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울왕은 다윗이 궁금합니다. “너는 누구의 아들이냐!” 묻습니다! 그때 다윗이 대답합니다. ‘왕의 종 이새의 아들입니다.’ 누구의 아들이냐 물었는데 ‘사울왕의 종’이라고 먼저 말합니다. 마치 처음 하나님께 부름받을때 겸손했던 사울와 같아 보입니다.

    다윗은 겸손합니다. 골리앗이라고 하는 적장을 물리쳤고 덕분에 말도 안되는 승리를 얻었습니다. 그러면 우쭐하기 쉽상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겸손합니다. 전쟁에 나가지도 못하고 앉아서 유명무실한 왕이 됐지만 그런 사울에게 존중과 존경의 의미를 담아 말합니다.

    겸손한척 말고 진짜 겸손한 사람이 되아햡니다! 나의 성취 때문에 ‘겸손’의 자세가 흔들린다면 절대 진짜 겸손이 아닙니다. 지위 때문에 갑자기 ‘겸손’의 태도와 깊이가 바뀐다면 절대 진짜 겸손이 아닙니다. 진짜 겸손한 사람이 되야합니다.

  • 022723 삼상 17:4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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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때까지 계속 ‘골리앗’으로 기록하던 성경은 다윗의 출연과 함께 ‘블레셋 사람’으로 기록합니다. (17:26) 그 이후로 쭈욱 ‘블레셋 사람’으로 기록됩니다.

    골리앗은 이 역사의 현장에서 더이상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는 더이상 넘지 못하는 두려움의 바로 그 대상 ‘골리앗’도 아닙니다. 그저 블레셋 사람중 하나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골리앗’을 보았기 때문에 움직이지 못할 때 다윗은 처음부터 그를 ‘블레셋 사람’으로 보니 망설임 없이 달려 나가는것입니다.

    ‘골리앗’이 커보이고, 무서워 보이는 이유는 어쩌면 내가 문제를 그렇게 부풀려 보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가 마주한 문제는 넘어설 수 없는 ‘그 문제’가 아니고 그냥 쉽게 넘어설수 있는 ‘문제중에 하나’ 입니다.

    문제를 마주하는 태도부터 바꿔야겠습니다. 문제마다 입버릇처럼 “큰일이야!’를 남발하기 보다는 “별거 아니야!”로 선포하는 자세를 견지해야겠습니다. 그리고는 다윗처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 승리하면 좋을것 같습니다.

    ‘골리앗’ 아닙니다. 그저 ‘블레셋 사람’입니다. 가볍게 뛰어넘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승리할 것입니다. 해결될 것입니다. 거뜬히 넘어 설 것입니다. 아멘

    2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자기가 이길줄 압니다. 블레셋 사람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니까 무조건 자기가 이긴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런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자신들이 이기고 있는줄 압니다. 십자가 앞에서 바리세인들은 자신들이 이기고 있는줄 압니다. 사탄은 자신들이 이기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이길자가 없습니다.

    원수의 승리 공식은 이렇습니다. 덩치를 부풀리고, 나를 보호하는 방패와, 강력한 공격의 무기를 갖춥니다. 돈, 권력, 지위, 인맥등으로 빼곡하게 인생을 채워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준비해도 하나님과 대적한다면 절대 승리할 수 없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승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마주할때 ‘골리앗의 방법’으로 준비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자세로 준비합니다. 하나님을 아는것이 힘입니다. 하나님을 믿는것이 강력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함이 곧 승리입니다.

    원수들의 승리 공식에 빠지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으로 승리를 경험하는 다윗같은 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3

    다윗은 단 한방으로 골리앗을 무너뜨려버립니다! ‘한방신화!’

    많은 이들이 꿈꾸는 ‘인생역전 한방인생’은 ‘로또한방’ ‘코인한방’인것 같습니다 ㅋ 그러나 우리가 꿈꾸는 ‘한방인생’은 내 삶에 있는 사탄을 한방에 없에는 꿈입니다. 내 삶에 있는 죄악을 한방에 죽여버리는 꿈입니다. 내안에 불신을 한방에 없애버리는 꿈 입니다.

    한방신화’는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단 한방에 내 인생에 있는 모든 사라져야하는 하나님의 대적들이 제거되는 기적과 은혜를 경험하길 기도합니다. 다윗의 기적을 경험하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 022623 삼상 17:2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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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찐 형제 모멘트’가 기록됩니다. 형이 말합니다. “너 여기서 뭐해!! 놀러왔지? 헛소리 하지 말고 빨리 집에나 돌아가!!” 그러자 동생이 대답합니다. “남이사!! 내 볼일 있어서 왔거든?!” 그러면서 다시 뒤돌아 얘기를 이어 갑니다.

    뜬금 없지만 “좀 친해져라!” 얘기해주고 싶습니다! ㅋ 좀 반가워 하면 안됩니까? 좀 애뜻해하면 안됩니까? 다른곳도 아니고 전쟁터 아닙니까?? ‘태극기 휘날리며’ 영화는 못되더라도 그래도 감격적인 상봉정도는 해줘도 되잖아요!!?

    세상에 모든 형제 자매들이 친해지면 좋겠습니다!

    오늘 형제 자매들에게 좋게 말하고, 선하게 대하고, 질투하지 말고, 자격지심 발언 하지 말고, 사랑하고, 반가워하고, 환영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온 사랑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너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ㅋ

    2

    형의 텐션을 이해합니다. 다윗이 물어보고 있는 내용을 통해서 증명되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엘리압도 싸우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창피합니다. 동생한테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들켰습니다. 안그래도 기름부으심을 자기가 안받고 다윗이 받아서 짜증(?)나는데 자신의 연약함까지 들킨것 같아서 분노가 올라왔는지 모릅니다.

    내 감정 지키자고, 내 입장 지키자고 다짜고짜 남에게 화를 내고, 비난 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너는 뭐 다를줄 알아?! 너네도 다 똑같애!!! 내가 두려워서 안하는게 아니예요! 너는 네 일이나 신경써! 넌 좀 그냥 사라져 줄래?!” 등등 상대에 마음도, 생각도 확인도 안하면서 내 감정 지키자고, 내 입장을 지키자고 남을 잡아 끌어내리고, 비난하고, 원망하고, 오해를 만드는 등의 행위는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내가 오늘 느끼는 부끄러움은 그가 만들어낸 부끄러움이 아니고 내 자신이 만들어낸 부끄러움일 때가 많습니다. 내 부끄러움을 직면하고 내 내면에서 해결해야합니다. 남을 비난한다고 해결되지 않고, 숨긴다고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분노한다고 해결되지도 않고, 변명한다고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결정을 하고 싶고,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부끄러운 인생을 깨닫는 기회가 허락될때 타인을 향해 분노와 비난을 쏟아냄으로 기회를 놓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오히려 겸손히 깨닫고 삶을 재정비하는 지혜가 있게 되길 기도합니다.

    3

    유명한 말입니다. “don’t tell me what I can’t do!” 왜 할수없다고 말하나요?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없어서 입니다. 또 상대는 그에 반해 이미 능숙하고 경험많고, 강력한 군인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상황은 약점으로보고 남의 상황은 강점으로보는 눈을 많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듯 합니다. 내 상황은 무조건 최악으로 보이고, 안좋아 보입니다. 어리고, 경험부족이고, 약합니다. 오히려 골리앗이 자기는 크게보고 남은 약하게 봅니다.

    건강한 자각! 나를 바라보는 건강한 믿음의 시각을 갖춰야합니다. 그래야 남이 나를 정의 내려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의 상황에 나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보다 상황을 크게 보지도 않습니다.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크게 봅니다.

    Don't tell me what I can’t do! Just tell what I should do then I will show you how I do it with God.

  • 022523 삼상 17: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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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다윗은 참 일관성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양치라고 하면 양칩니다. 오라고 하면 옵니다. 가라고 하면 갑니다. 형들 생사를 확인하라고 전쟁터를 보내도 또 갑니다. 다윗이 전쟁에 안나간거 보면 아직 징집에 적합한 나이가 아니거나, 군인으로써의 자격이 미달되었다고 여겨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은 안가도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말하면 그는 바로 순종합니다. 다윗의 수많은 강점중에 단연코 ‘순종’이 눈에 띕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순종의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좋은일, 이들이 될만한 일, 즐거운 일에는 순종이 쉬우나 반대되는 일들은 순종이 어렵습니다. 꺼려집니다. 대안을 찾기 마련이고, 임의적으로 실행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필요한 사람은 완전히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이미 사울왕은 불순종했기 때문에 버림 받았습니다.

    정확한 순종, 미루지 않는 순종, 임의적이지 않은 순종, 선택적이지 않은 순종, 끝까지 순종, 오늘 나의 순종이 담아야할 순종의 태도 입니다.

    2

    사울왕은 골리앗을 잡는 사람에게 엄청난 이익을 약속합니다. 군대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40일이 지나도록 골리앗과 싸우려 들지 않습니다. 왜 입니까? 목숨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이익을 약속해도 결국 자신이 나가서 싸우다가 지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목숨의 중요성은 재차 강조할 필요가 없는 절대 우선 가치중 하나 입니다.

    문맥을 따라가다 보면 약간은 뜬금없는 묵상이며 적용이긴 하지만 잠시 멈춰 생각을 정리합니다.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므로 나는 생명을 걸고 도박을 할 수 없다!’ 라고 한다면 이는 영적으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생’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그 어떤 ‘이익과 유익’이 약속되어도 나의 구원과 영생을 위협하는 것이라면 절대 뛰어들지 않겠습니다. 내가 지켜야할 단 하나의 최우선의 가치가 있다면 구원이며 영생인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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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님 욕하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혹 상사가, 보스가 부모를 욕하는데, ‘상사니까, 보스니까, 형님이니까, 힘있는 사람이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야지’ 라고 할까요? “우리 부모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러십니까?” 한소리 크게 치며 얘기해야하는거 아닌가요? 당장 싸울 태세를 갖춰야하는거 아닌가요??

    다윗은 골리앗의 덩치나, 힘, 권력에 주눅들지 않습니다. 그런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모욕하는 그녀석으로 보일뿐입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고, 가만히 둘수 없습니다.

    신앙인들 중에 하나님 욕하는데 ‘보스’니까 모른척하고, 형이라서 모른척하고, 상사니까 모른척하고, 목소리 커서, 힘이 쎄서, 능력과 권력이 있어서 모른척 하고 넘어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엄마 아빠 모욕하는데 상사니까 내가 참는다! 하고 있는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삶으로 언어로 모욕하는 그 사람이 권력자든, 능력자든, 지위가 높던, 나이가 많던, 상사든, 지식과 배경이 높은 자든 ‘다윗’이라면 가만히 있을수 없는게 맞습니다.

    하나님을 모욕하는자! 하나님을 욕하는자! 하나님을 부인하고 조롱하는자! 가만히 있는게 능사가 아닙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침묵하는게 아니고 그저 무서워서 침묵하는것일수도 있습니다.

  • 022423 삼상 1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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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리앗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치를 줍니다. 그러나 사울이하 그 누구도 골리앗과 감히 대적하여 싸울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왜 싸우지 못하나요? 그들이 잃어버린것은 자신감이 아닙니다. 그들이 잃어버린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원래 건강한 자신감도 ‘골리앗’ 같은 어마어마한 대적 앞에 서면 흔들릴수 있습니다. ‘자신감’ 자체가 근본적으로 나를 믿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유한하고 그러므로 ‘자신감’은 어느 순간 강력한 대적 앞에서 아침 이슬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으면 자신감이 흔들려도 전진합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전능하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은 불변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믿는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능의 하나님은 한계가 없습니다.

    세상은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자신감을 가지면 해낼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감보다 중요한것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자신감이 있어도 번지점프나 스카이다이빙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조교를 믿으면, 교관을 믿으면 그들 품에 안겨 뛰어내리게 됩니다.

    내 자신을 믿는 힘으로 돌파하는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돌파하는것은 한계를 뛰어넘게 합니다. 오늘 내게 필요한것은 건강한 자신감 이기 이전에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임을 다시 한번 상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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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능성을 봐야합니다. 골리앗은 키가 큽니다. 거기다가 청동 투구를 썼고, 5000세겔이나 나가는 갑옷을 입었고, 청동 단창을 메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무거운 창과 방패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가능성을 봐야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길수있습니까? 어쩌면 조그맣고, 날쌔며, 무기 사용에 정확도가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승산이 있을 수 있습니다. 원래 언제나 ‘천적’이 있기 마련입니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승산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것이 가장 먼저입니다. 그래서 1번 나눔에서 먼저 이 묵상을 나눈 것입니다)

    모든 문제를 마주할때, 아무리 큰 문제라도 가능성을 봐야합니다. 잠잠하고, 냉철하게 분석하고 가능한 길을 모색해야합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다윗도 그런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그의 공격 준비와 행적이 그랬습니다.

    너무 큰 문제라고 해서 미리 포기하고, 미리 항복하지 마십시다. 찬찬히 뜯어보면 방법은 있습니다. 할수있는 일이 있습니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승산이 있습니다.

    숨막히는 인생의 문제 앞에서, 나를 요동하는 문제들 앞에서, 피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고, 부인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은 문제들 앞에서 1) 하나님을 믿고, 2) 잠잠히 그러나 최선을 다해 가능성의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할수있습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 당신이 만난 ‘골리앗’은 약점 투성이입니다. 약점으로 점철된 인생입니다. 그거 가릴려고 크고 무거운 ‘청동’으로 감싸고 있을 뿐입니다. 오히려 자세히 보면 약점 투성이 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하나님께 함께 이길 수 있습니다. 승리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골리앗은 별거 아닙니다. 하나님이 더 크십니다. 주와 함께 동행하고 승리를 맛보게 될줄로 믿습니다! 아멘!

  • 022323 삼상 16: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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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사울왕을 쉽게 대해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영을 거두시고 거기다가 ‘악한 영’까지 보내셔서 사울왕의 삶이 실제적인 고통가운데 놓이게 하십니다.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임에 확실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한 사람을 괴롭히는 모습도 익숙하지 않고, ‘악한영’을 보내신다는 기록은 더더욱 익숙하지 않고,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실제적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악한영’이 어떠한 존재인지 조차도 확실하게 이해할수 없는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확실한것은 하나님은 사울왕의 행적을 싫어하셨고, 계속 고집스럽게 그 삶을 살아내는 사울을 혼내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혼내시면 무섭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등 돌리시면 정말 무섭습니다. 원래 큰 사랑을 주는 사람일수록 돌아서면 정말 무서운 법입니다! 뒤도 안돌아 보는 법입니다. 무섭게 변한 사람을 뭐라 할게 아니라 그 사람이 그렇게 변할 수 밖에 없이 만든 사람을 혼내야합니다. 사울왕을 고난 가운데로 내모는 하나님께 뭐라할것이 아니라, 애초에 하나님께서 이토록 분노하게 만든 사울왕에게 뭐라고 해야합니다.

    사울은 진짜 좀 혼나야합니다. 혹 제가 사울은 아니겠죠?! 오늘도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나를 떠나지 않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내 삶에 ‘악한 영’이 없어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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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상황을 만드시고, 인맥을 사용하시네요! 일단 사울왕에게 직접 ‘악한영’을 보내 아프게 만듭니다. 그 다음에 다윗의 지인을 통해 다윗이 왕궁으로 들어와 사울을 만나게 하십니다.

    다윗이 이렇게까지 유명한 사람입니까? 모두가 아는 하프 연주자 입니까? 그는 알려진 ‘음악 치료사’ 혹은 ‘퇴마사’ 입니까? 그런게 아닐 것입니다. 이새의 집안이 유력했다해도 그 집안의 막내이며 양치던 녀석이라 그나마도 유명하면 이새의 첫째, 둘째 아들 정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을 잘 아는(?) 인맥을 사울왕 앞에 있게 하셨고, 이를 사용해 다윗을 왕궁으로 불러들입니다.

    물론 아직 ‘다윗의 때’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름 부으셨고, 다윗에게 하나님의 역사를 예고편처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기름부음 받고 여전히 양을 치던 다윗은 자칫 ‘기름부으심의 의미’를 과소평가 하거나, 잊었을지도 모릅니다. 기름 부음받은 후에도 양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절) 그런데 이 사건을 통해 그는 드디어 들판을 떠나 왕궁으로 들어와 그때부터 계속 왕궁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상황을 통해 우리를 인도해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우리를 인도해가실 것입니다. 또한 반대로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의 삶도 인도해가실 것입니다.

    우리보다, 나보다 먼저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찬양합니다.약속하신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나갑니다. 바우교회에 필요한 상황을 만들어 주시고, 바우 교회에 필요한 사람을 만나게 해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주셔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게 해주세요. 아멘

  • 022223 삼상 1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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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않으셨다” 사무엘 앞에서 인사를 나눴을 뿐인데 느닷없이 사무엘 선지자가 한 말입니다. 황당합니다. 거절감이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 감정적이라면 인생 전체를 부정당한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갑자기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하고, 성격에 따라서는 누군가는 분노했을수도 있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을수도 있지요.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택함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 모든 이가 택함 받는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부르심이 있고, 각자에게 맡겨진 일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 “예스!”가 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왕이 될 수 있는것도 아니고, 왕이 되야하는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하나님 안에서 부름 받고 일 할 때 거절의 순간을 마주하면 ‘내 일이 아니구나!’ 하면 됩니다. 이 일에 내가 택함받지 않았다고 해서 내 삶이 의미없는것이 아닙니다. 인생 전체를 부정당한것도 아닙니다. 그저 ‘이 일’이 ‘내 일’이 아닌것 뿐입니다.

    물론 사무엘 같은 유명(?)한 사람이 와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선택한다면 선택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것도 사실입니다. 선택된 사람이 부러운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원칙은 동일합니다. 내 일이 아닌것입니다.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않았습니다!” 라는 말을 들을때 거절감이 아닌 ‘나의 부르심은 무엇일까?’ 오히려 기대감으로 반응하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신 그 자리에서, 그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왕’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여전히 나를 부르시고 사용하시는 줄 믿습니다. 유명하지 않고, 위대하지 않고, 영광스럽게 느껴지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여전히 나를 부르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찬양합니다. 부르심에 성실한 하루가 되겠습니다.

    2

    주변에 유튜버들이 있습니다. 한 10만명 이상의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 입니다. 간혹 얘기할 기회가 있어서 얘기해보면 어느날 갑자기 구독자가 늘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시작할때는 다른 채널과 같이 조용한데 어느날 갑자기 자고 일어나니까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한것이라고는 그저 꾸준하고 성실하게 양질의 영상을 만들어 올린것 뿐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다윗에게 사무엘이 기름을 부었습니다. 모든 형들이 다윗을 바라보는 눈초리가 부러움과 질투입니다. 방금 전까지도 식사자리에 초대받지 못하고 양을 치던 다윗입니다. 그의 입장에서는 뜬금없고,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한 순간에 무언가 자신의 입지가 바뀌는것이 느껴집니다. 그가 한것이라고는 그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맡겨진 양을 목숨걸고 매일 돌보았던것 뿐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자고 일어나니 한 순간에 인생의 입지가 바뀌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성실과 순종을 보여주었던 다윗의 ‘중심’을 기쁘게 보셨습니다. 기회는 주로 기대하는 자에게 주어지지 않고, 성실한 자에게 주어집니다.

    ‘성실’은 부르심의 기본값입니다. 능력보다 우선입니다. 배경보다 우선입니다. 타고난 자질보다 우선입니다. 일단 성실이 기본탑재 되어있어야 무슨 일이든 믿고 맡길 수 있습니다.

    부르심에 성실한 하루가 되겠습니다! (묵상하고 보니까 결국 한가지 묵상과 적용이네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매일 반복되어 지치는 감이 없지않아 있지만 이 말씀으로 위로와 격려를 받고 또 다시 꾸준히 달리기로 결단합니다! 아멘!

    오늘의 기도

    지금 있는 이곳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인줄 믿습니다. 성실함으로 감당하게 해주세요. 아멘!

  • 021123 삼상 15:24-35

    1

    “엄마 말 들어서 손해볼것 없다!” 어릴적 자주 듣던 말입니다. “아내 말 들어서 손해볼것 없다!” 결혼해서 자주 듣던 말입니다. 예수의 판결에 상관하지 말라했던 아내의 말을 무시했던 빌라도를 생각해보면 일견 맞는 말 같아 보입니다. 역시 아내말이 최고입니다!?? ㅋ 그러나 사실 아내 말 들었다가 죄의 원흉이 된 아담같은 사람, 아내 말대로 살았다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최악의 왕이 되었던 아합왕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아빠 속이라는 엄마 말 들었다가 어려움을 경험한 야곱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누구의 말을 들어야하는가? 오늘 사울왕은 ‘백성들의 말’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말’은 버렸습니다. (24,26절) (개인적으로는 사울 자신의 내면의 말을 따라 행한것 같은데 그는 ‘백성의 말’을 따랐다고 변명합니다. 어찌되었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은 버렸습니다.)

    루에도 수많은 ‘말’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습니다. 엄마의 말, 아내의 말, 상사의 말, 친구의 말, 멘토의 말, 시대의 말, 내면의 말 등입니다. 똑같은 사건, 똑같은 환경을 가지고 수많은 ‘말’들이 귀를 때리고 마음을 흔듭니다. 괜히 ‘팔랑귀’가 있는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범람하는 ‘말’의 홍수 속에서 어떤 말을 선택하고 따를것인가?는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답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고민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 사는 인생!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거 하지 말고, 하라는거 하는 삶! ‘말’이 넘치는 시대에 흔들리지 않고 사는 가장 확실한 지혜입니다.

    2

    “경배하게 해주세요” 사울왕은 계속 경배하게 해달라고 사무엘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결국 31절에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그러나 이는 ‘경배’에 대한 집착과 열정이 아닙니다. 체면과 영광에 대한 집착입니다. ‘나’를 위해 예배드리는것입니다. ‘여호와께 드리는 예배’를 통해 자신의 왕권이 건재함을 증명하려고 한것입니다. 사무엘과의 변함없는 친분(?)증명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나를 위한 예배! 나의 유익을 위한 예배! 내 진심이 어찌됐던, 내 신앙의 순결함이야 어찌됐던간에 상관이 없습니다. 예배라는 형식과 도구를 통해 나의 건재함이 증명만 된다면?! 나에게 유익이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세인의 예배’입니다 . 거짓 예배, 가증스러운 제사입니다. 아마 사무엘은 그런 사울왕의 모습을 보면서 절망가운데 고개를 가로저었을 것입니다.

    나를 위한 예배가 판을 칩니다. 거짓된 예배, 사람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는(?) 예배가 있습니다. 꼭 이런 ‘거짓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오늘 사울이 보여주는것처럼 예배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합니다. 당연한 것이 ‘예배’가 자신의 이익인데 그걸 못드리면 손해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죽자고 예배에 목메는 것입니다.

    속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배 받지 않으십니다. 나를 위한 예배를 버리겠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영광을 위해 감히 사용하려고 하는 죄를 버리겠습니다. 하나님을 사용해서 세상에 나를 증명하려고 하는 무서운 교만을 버리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귓가에 맴도는 수많은 말중에서 항상 하나님의 말을 선택하는 분별과 지혜를 주세요!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진심을 담은 예배를 항상 세워가게 해주세요!

  • 022023 삼상 15: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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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금 뭐하는 짓이야!!!” 한참 파티하고 있는데 문을 열고 들어와서 분노로 외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파티 할 때야? 지금 이러고 있을 때냐고?? 뭐가 잘못된지 모르겠어?! 지금 여기 있는 이거 뭐야!! 이건 뭔데?!” 순간 한참 달아올라있던 파티장은 제대로 찬물을 맞습니다. 현장은 그렇게 얼어붙어 버립니다.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물쭈물하고 있을때 현장 파티의 주동자가 소리를 지르며 들어온 사람에게 서둘러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며 어색하게 웃어보입니다. 그러면서 “이거 좋은 날 왜이래!!!나가서 얘기해 나가서!” 라고 말하며 그를 밖으로 끌어내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뒤돌아 보고 어물쩡 서있는 사람들에게 “놀아요 놀아!! 다시 파티 시작!” 이라고 말하며 나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소리지른 친구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더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파티는 끝났습니다. 노래끄고 다들 귀가하세요!”

    사울왕은 파티각이고, 사무엘은 초상각입니다 같은 사건 앞에서 이렇게 다릅니다. 사울은 승리의 축배를 들때 하나님은 배신감에 치를 떨고 계십니다.

    하나님 빼고 우리끼리 행복한 시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슬픈데 교회는, 성도는 자기 뜻대로 해놓고서는 마냥 즐거워하고 행복해합니다. ‘기념비’도 세우고 흥분을 가라앉히기 어려워하기도 합니다. 동상이몽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해내는것’보다 중요한것은 ‘뜻대로 해내는것’입니다. ‘나의 만족’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만족’이 기준입니다. ‘나의 방법’이 아닌 ‘그분의 방법’으로 해야합니다.

    나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서 파티를 여셨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순종으로 기껏 나와 내 주변만 파티하고 하나님은 슬퍼하시고 분노하신다면 의미 없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착각하는 신앙인/사명자 되고 싶지 않습니다. ‘개척교회’를 섬기면서 나의 만족을 채우고, 나의 방법으로 섬기고 혼자 ‘파티’하는 어리석은 목사가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사무엘이 뛰쳐 들어와서 찬물 끼얹기 일이 없도록 항상 깨어 순종하는 목사가 되야겠습니다.

    2

    사울의 그 말이 마음에 걸립니다. “당신의 하나님!”(15절) 무언가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사울왕은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하나님’이라 하지 않습니다. 수사적 표현이라고 하더라도 사울왕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고 있는 심정적 거리가 가히 가깝지는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나의 하나님’이 ‘당신의 하나님’ 혹은 ‘그들의 하나님’이 될때 내 삶은 하나님과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 하나님과의 동거함이 너무 중요합니다. ‘나의 아버지’와 ‘당신의 아버지’는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남입니다.

    하나님과 남남으로 살지 않기를, 먼발치에서 미온적으로 살지 않기를, 지식으로만 경험하고 살지 않기를, 형식으로만 행하며 살지 않기를, 허울만으로 살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3

    “사무엘은 마음이 아파서 그날 밤 내내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11절) 이는 사울이 처한 상황때문에 마음이 아프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이 공감되서 아팠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 사울 그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나님은 쾌재를 부르시며 사람을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붙잡고 싶고, 구원하고 싶은 하나님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복하십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지 마십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떠나갈때,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배반할때, 사울이 ‘당신의 하나님’이라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은 슬퍼하십니다. 마음이 아프십니다. 아들의 불순종이 그의 마음에 커더란 아픔을 안겨 주는것입니다.

    중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공감 될 때 행해집니다. 나의 마음으로 중보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중보하는것입니다. 나의 마음으로 중보하면 그냥 슬프고 안쓰럽고, 때로는 분노하는등 감정으로만 가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님의 마음을 공감하여 중보하면 마땅히 그를 위해 드려야할 기도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날 밤 내내’ 부르짖게 되는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위하여 중보하는 목자가 되야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하니님 오늘도 나 자신과 내 주변 이웃들 속에서 주를 떠나는 일이 없게 하시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을 끊어내게 하시고, 자칫 실수하는 자들을 주께서 돌이키게 하시사 진정한 회복을 경험하는 하루가 되게 해주세요! 나의 하나님! 주님께 기쁨이 되는 하루가 되게 해주세요!

  • 021923 삼상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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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늘날 AI는 무섭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회자되고 있는 ChatGPT는 그동안의 AI에 대한 노파심이 어쩌면 노파심으로 끝날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과도 같습니다. 사람들은 AI를 생각할때 무엇을 가장 두려워할까요? 아마도 영화에서 단골소재가 되는것처럼 AI의 반란일것입니다. 사람의 조정대로 움직이지 않는 인공지능, 어느 순간에 인간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인공지능, 자신의 생각과 판단대로 움직이는 인공지능을 인간은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AI가 똑똑해지고, 내가 하는 명령을 완벽하게 소화하는것은 기대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너무 똑똑해서 내 명령을 어기고 자기 마음과 생각대로 하는것은 절대 원하지 않는 일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반란을 일으킨 인공지능’과 같아 보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사울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아말렉을 내가 벌하겠다. 그러니 모든것을 파괴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도구로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사울 인공지능’이 알아서 결정내리고 아각왕을 살리고, 전리품을 보전합니다.

    (사람을 ‘인공지능’이랑 비교했다고 노여워하지마세요! 그저 예시에 불가합니다 ㅋ) 이 상징적 비교를 통해서 우리는 인간이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취해야할 입장과 행동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나의 선한 의지, 나의 지혜로운 결단’이 하나님의 명령과 다를때 우리는 ‘반역하는 인공지능’과 같은-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는-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아야합니다.

    오늘날 ‘인공지능’의 능력은 프로그래머의 언어를 따라, 그 기대와, 한계안에서 움직일때 가장 최선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언어를 따라, 그분의 기대와 그분이 정해지신 안전한 한계 안에서 움직일때 가장 선한것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2

    아말렉은 잊었어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습니다. 악은 태평한 오늘을 삽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안계시다 말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지났을까요? 하나님은 잊지 않고 계시다가 때가 되었을때 아말렉을 진멸하십니다. 악을 진멸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악은 절대 심판 받게 되어있습니다. 악은 말합니다. 오늘이 괜찮으니까 하나님 안계신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날도 괜찮으니까 하나님을 조롱합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면 반드시 악은 진멸되게 되어있습니다.

    찰나의 세상에서 악이 허락되어 보일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한 세상에서 악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그날에 반드시 악은 멸망당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이 오늘 태평하다고 해서 부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혹 다 멸망하는줄 알았는데 ‘아각’ 같이 악의 잔존 세력이 남더라도 동요할 필요 없습니다. 원칙은 같습니다. 결국 악은 망합니다.

    악을 부러워도 말고, 악을 사랑하지도 말고, 악에게 동요하지 말고, 악을 남겨두지도 말고, 악을 명분화하지 말고, 악은 그저 보이는 족족 ‘진멸’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거룩하고 진실된 주일 예배가 되게 해주세요. 믿음의 자리로 나오고 회복해야할 영혼들이 교회예배의 자리로 나오게 해주세요. 오늘 하루도 안전하게 지켜주세요! 아멘

  • 021823 삼상14:3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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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울 때문데 답답해죽겠습니다. 진짜 사사건건 제대로 하는게 하나도 없습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제사드리는것부터 시작해서, 전투로 나가지 않는것, 전쟁중에 금식을 명령하는것, 거기다가 밤새 전투하는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도 굳이 죄인 찾겠다고 설치는것까지 무엇하나 제대로 하는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만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보실때도 이렇게 답답할까요? 제대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으면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할까요? 사울처럼 ‘나는 하나님의 뜻을 잘 지키는 사람이다’ 라는 착각에 빠져 있을까요?? 내 뜻을 하나님께 강요하며/응답을 강요하며 내달리고 있는것은 아닐까요? 너무 두렵습니다. 혹 내 주변에서 나를 보는 사람도 이렇게 답답해 하고 있는것은 아닐까요?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상황을 보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주변을 세심하게 들으면서 바르게 동역하는 신앙인이 되야겠습니다.

    2

    사울은 계속 실수투성이 입니다. 그런데 제때에 그를 말리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하는 제사장이 있었고, 요나단을 죽이려고 할 때 그것을 말리던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사울의 실수는 더욱 커졌을 것입니다. 그의 실수와 죄로 인해 더 많은 이들이 죽고, 요나단이 죽는 비극이 일어났을것입니다. 하나님이 더욱 분노하시는 일이 계속 일어났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사울이 원래 그렇게 사리분별이 없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간혹 일하다보면 이런 경우들이 생깁니다. 평소같지 않게 분별력이 흐려지고 번뜩임을 놓치는 경우들을 봅니다. 그러니 주변에서 도와줘야합니다. 조언도 해주고, 필요하면 꾸짖기도 해야합니다. 옳은것과 그른것을 명확하게 애기해 줄 동역자들이 있을때 개인도 망가지지 않고, 공동체도 망가지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동역의 공동체’를 만나는게 쉽지 않습니다. ‘분별의 지혜자’들을 만나는것이 쉽지 않습니다. 또한 내가 건강한 동역자, 지혜로운 분별자가 되는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 삶에 좋은 동역자들을 붙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지혜로운 말씀의 분별자들을 보내주시길 기도합니다. 나 또한 나의 주변에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동역자, 지혜로운 분별자가 되줄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간구합니다.

    분별과 동역을 통해 건강한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워가길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의 기도

    사울같은 실수에 빠지지 않는 목회자 되게 해주세요! 동역하고 분별하는 공동체를 함께 세워가게 해주세요.

  • 021723 삼상 14: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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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간혹 저는 강대상 위에서 급격하게 손을 떨거나 식은땀을 흘리곤 합니다. 순간 머리가 멍해지거나 하얗게 되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이유는 주일날 모든 예배가 끝날때까지 제가 밥을 안먹기 때문입니다. 주일 ‘강대상의 긴장감’ 때문에 식사를 하지 못하다보니 본이 아니게 설교중에 순간 ‘저혈당 쇼크’ 같은 증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스라엘 백성은 한창 전쟁의 추격중에 있고, 전투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 군사에게 사울왕이 금식을 선포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명령입니까? 자칫 적군과 싸우기도전에 적군 쫓다가 ‘저형당 쇼크’로 모두 쓰러지겠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고, 건강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의 오판으로 인해서 쓸데없이 많은 전쟁의 희생자가 나오고, 요나단은 음식을 먹었을 분인데 죄인이 됬고, 다 얻은 전쟁의 승리는 하마터면 놓칠뻔 했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역사에 뚜렷한 방해요소가 되었습니다. 웃픈 사실은 그는 자신이 ‘영적’이라 생각했을것이라는 것입니다. ‘‘전쟁 중에 믿음으로 금식을 선포한 영적인 왕’ 이 얼마나 멋진 모습인가?!’ 라는 잘못된 영적 우월함에 빠져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는 그저 ‘영적 바보’에 불가합니다.

    ‘종교의식, 형식, 신앙의 자아도취’에 빠지면 하나님의 역사의 방해요소로 전락합니다. 그러니 바리세인이 안식일날 마땅히 구해야할 자들을 구하지 못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막고, 유대기독교인들은 이방기독교인들을 할례시키려고 하거나, 아예 전도의 대상자에서 빼려고 했던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방해요소가 되지 않고, 주변 신앙인들이 가는 길을 방해하지 않는, 신앙의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는, 의미없는 종교의식과 율법적형식에만 메이지 않는 목사가 되야겠습니다. (사울만 모르고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가 혼자 걸림돌입니다. 이런 리더가 되면 안되겠다 다짐합니다)

    2

    난장판! 본문을 보는데 그런 생각을 머리에서 지울 수 없습니다. 피째 고기를 향해 달려드는 눈이 뒤집힌 군사들, 전쟁승리의 기쁨의 순간인데 모두 단 한가지 생각밖에 없습니다. “밥을 먹어야한다!”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 기쁨은 전혀 누리지 못하고 그저 ‘미치도록 배고프고 피곤했던 순간’으로 이 전쟁은 그들에게 기억될 것입니다. 아마 피째 고기 먹고 비로서 정신이 들었을때는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것인가? 나는 죄인이구나!’ 라고 느꼈을테니 승리한 이 전쟁은 어떤 이들에게는 ‘트라우마’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사중에 입다를 기억합니다. 그는 전쟁의 승리의 기쁨이 일순간 슬픔과 절망으로 바뀌는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기쁨을 빼앗아 가신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자초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이 ‘승리’는 안타깝게도 그에게 평생의 비극적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내 인생에 하나님께서 기쁨과 승리를 주시지 않는것일까요? 어쩌면 내가 분주하고, 내 방법에 메여있고, 나의 결핍에만 집중하고, 내 상황으로만 반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의 순간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기뻐해야하는 순간이 오히려 평생의 트라우마로 기억되는 모순적인 신앙의 삶을 반복적으로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에 허락하신 승리의 기쁨을 자각하고 누리는 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 승리의 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나의 배고픔’에 함몰되거나 ‘나의 결핍’에 함몰되어 정신없이 사는, 피곤하게 사는, 죄짓고 사는 슬픈 인생이 되지 않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오늘 ‘블레셋’을 이기게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기뻐하는 하루가 되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기도

    건강한 목사, 건강한 지도자, 착각하지 않는 신앙인 되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시고,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기쁨을 오롯이 누리는 자가 되게해주세요. ‘나의 결핍’에 함몰되지 않는자, 믿음의 눈으로 보는자 되게 해주세요. 아멘

  • 021623 삼상 14: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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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누군가는 움직여야죠!

    요나단은 무기든 자와 함께 같이 블레셋을 향해 조심스럽지만 용감하게 나갑니다. 600명과 함께 있는 나라의 왕 사울은 쥐죽은듯 조용하게 있지만 한명의 무기든 자와 있는 요나단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누군가는 앞장서서 위기를 감수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자동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기다린다고 성취되거나 해결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뛰어들어야합니다. “눈을 들어보라 추수할 것은 많으나 추수할 일꾼이 없구나!” 그렇습니다. 누군가는 ‘추수하는 수고’의 걸음을 걷기 시작해야하는 것입니다.

    맡겨진 사명, 해야만 하는 일을 보았다면 앞장서는자, 지체하지 않는자, 계산보다는 믿음으로 뛰어드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내가 선두주자가 되야겠습니다.

    2 누군가는 도와줘야죠!

    요나단의 경우 ‘무기든 자’가 함께 그 길에 나섭니다. 요나단 혼자는 두렵습니다. 물론 둘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혼자보다는 어찌됐든 둘이 낫습니다. 참 다행인것은 요나단의 무기를 맡은 자는 요나단의 선포와 결정에 따릅니다. 그도 상황이 안좋다는것쯤은 분별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합니다. 그리고 용감하게 싸웁니다. 그 둘이 처음에 죽인 적군이 20명입니다. 1명당 10명씩 죽인것입니다. 주먹 싸움도 아닌 무기 싸움에서 1명이 10명을 책임지는 싸움이 가능이나 한 일입니까? 절대 그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무기든 자’는 목숨을 건 돕는자로 선뜻 길을 따라 나섰던 것입니다.

    말씀의 메세지는 선명합니다. 동역자가 되야합니다.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이 간단한 메세지가 삶에 적용되고 실천될때 ‘승리’라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될것입니다.

    3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먼저 나서는자, 뒤 따라 돕는자가 나타나자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은 협력하는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게 하십니다. 사실 2명이 20명과 싸우는거 말도 안됩니다. 그런데 요나단과 무기든자가 이깁니다. 여기서부터 여호와의 도와주심이 확실해집니다.

    하나님은 사명을 위해 뛰어나가는 자를 모른다 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붙들고 뛰어나가는 자를 모른다 하지 않으십니다. 동역자도 붙여주실 뿐만 아니라, 확신을 주시기도하시고, 더 나가 직접 개입 하십니다.

    선두주자, 동역자, 그리고 전능자가 연합하여 이루는 기적을 보고 싶습니다! 바우 교회에 이런 기적이 일어나게 되길 기도합니다.

    4 결국 분위기가 바뀔 것입니다.

    하나님의 승리의 기운은 주변에 숨어있던 자들의 마음까지 바꿔버립니다. 패배로 가득했던 기운은,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기운은 이제 승리의 기운으로 빠르게 바뀝니다. 용기의 기운으로 빠르게 바뀝니다.

    하나님은 반전의 하나님! 역전의 하나님이십니다. 더 늦기전에 하나님의 ‘역전의 역사’에 숟가락을 얹는 이들이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뭐라고 하지 않을테니 그저 ‘숟가락’ 얻는자가 매일 매일 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승리’의 기쁨을 이왕이면 더욱 많은 이들이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기쁨을 이왕이면 더더욱 많은 이들이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기도

    ‘요나단의 걸음’을 걷게 해주세요. ‘무기든자’를 만나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하게 해주세요. ‘분위기의 역전’과 ‘많은 이들의 동참’을 경험하게 해주세요! 하나님께서 바우 교회에 행하시는 기적을 보게 해주세요! 아멘

  • 021523 삼상 13: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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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울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딴에는 잘해보려고 번제드렸는데 엄청나게 혼이 납니다. 그래도 명색이 왕인데 말입니다. 거기다가 거의 저주스러운 예언을 듣습니다.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입니다.” 이후에 사무엘은 또 기브아로 올라가버립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군사는 이제 600명밖에 없고 무기든자는 그나마도 사울과 요나단 뿐입니다.

    어찌하오리까?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지금도 당장 걱정이 태산이고, 미래도 암울합니다. 그러나 싸우러 가야지요! 그러나 눈앞에 전쟁을 치뤄야지요! 토 쏠리는 현실입니다!

    소망하기는 절망밖에 없는 인생이 더 최악으로 치닫지 않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절망’ 가운데 우상을 붙들거나, 사울같은 치명적 실수를 범하는 일이 없기를 소망합니다. 암울한 현실에 의지할 주님 마져 등돌리시는 것 같은 상황을 저는 마주할 용기가 없습니다. 절망을 뚫고 나갈 힘이 제게는 없습니다. 그러니 조심해야겠습니다.

    내게 다가오는 ‘필연적 전쟁’은 내가 어찌 할수 없습니다. 인생의 필연적 고난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굳이 내가 만들어 내는 어려움은 불필요합니다. 사울이 마주한 블레셋과의 전투는 필연적이었을지 모르나 그 이후의 상황은 본인이 자처한 불필요한 절망입니다. 필연적 고난에 불필요한 고난을 자처하여 내 자신을 절망의 벼랑끝으로 몰아붙이는 이런 상황이 안생기게 되길 기도합니다.

    2

    600명 그리고 사울과 요나단 얘기를 듣는데 마음이 짠합니다. 나와 아내, 두 아이들, 그리고 20명 남짓한 바우 교회 성도님들이 생각납니다. ‘이 전투를 우리가 이길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항상 듭니다. 거대한 세상을 보고, 녹록치않은 환경을 보면 주눅들게 되고 한숨만 나오기도 합니다. 무기든 자가 사울과 요나단 밖에 없다는데 어찌나 감정이입이 잘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는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제 안에, 우리 가족 안에, 성도님들 안에, 바우 교회 안에 우리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그래서 이 ‘전쟁’ 소망이 있습니다. ‘믹마스’가 하나님의 땅이 될 것입니다. ‘오스틴’이 하나님의 땅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이 아닌 하나님의 위대함으로 전쟁할것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기도

    컨퍼런스의 예배와 강의를 통해 성실하게 배우고 깨닫는 귀한 시간이 되게 해주세요! 좋은 만남과 교제가 이어지는 하루가 되게 해주세요!

  • 021423 삼상 1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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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누가 뭐래도 이기심!

    전쟁을 앞두고 극도의 불안감과 공포를 느끼는 백성들이 있습니다. 결국 참지 못하고 그들은 “굴과 수풀과 바위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어버립니다. 남은 백성들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많은 백성들은 개인의 안위를 생각하며, 마땅히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군인 1인의 몫’을 내버려둔채 도망가 숨어버린 것입니다.

    함께, 공동체의 일원으로, 사회의 일원으로 감당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같이 전투에 나갔으면 1인의 군인몫은 해줘야합니다. 책임이며 의무입니다. 그런데 겨우 나의 감정에 충실하고, 나의 의지에 충실해서 나의 책임을 피해 도망가고 숨어버린다면 감당해야할 일을 감당 할 수 없습니다.

    사회적 의무로 예를 든다면 우리는 납세의 의무, 국방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 선거의 의무 등이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개인의 상황과 감정을 변명으로 이러한 의무를 감당하지 않고 마땅히 감당해야할 ‘1인의 몫’을 다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무질서해지고 체제유지에 어려움을 겪게 될것입니다. 나 하나의 무책임 함이 나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무책임의 무게를 기억해야합니다. 무책임이 가져오는 결과의 무게를 알아야합니다.

    점점 사회야 어찌되었던간에, 공동체야 어떻게 되든 간에 이기적인 상황과 감정에 따라 사는것이 일반이 되고 있습니다. 두려움, 공포, 불편함, 어려움, 귀찮음등 여러 부정적 감정들을 공감할 수 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이기적으로 회피하고 숨어버리는 행동은 옳은 행동은 아닙니다.

    사회적 의무, 성도로의 의무, 팀원으로의 의무, 회사원으로의 의무, 친구로써의 의무, 가벼이 여겨서는 안되겠습니다.

    한 일원으로, 한명의 몫을 오롯이 지켜내는, 나만큼 남도 보고, 사회도 볼줄 아는 성도가 되야겠습니다. 원래 “내 이웃은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하는것입니다!”

    2 각자의 역할

    사울은 전쟁터에서 백성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는 것을 봅니다. 군인들의 사기의 문제 입니다. 한켠 기다리고 있는 영적 리더인 사무엘은 오지 않습니다. 아직 전쟁을 위한 번제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사울은 무엇을 해야할까요? 그는 군인들의 사기를 회복 시켜야합니다. 전쟁터에서 사울왕은 곧 군대장관입니다. 그는 군인들의 마음을 용감하게 해줘야합니다. 우리는 불리한 전쟁상황에서 사기가 저하된 군인들을 사기 중천하게 만드는 용장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필요하면 ‘킹스 스피치’를 해야합니다. 그렇게 흩어지는 군인들을 잡고 사기를 회복해야합니다. 그게 사울의 할일입니다. ‘번제’는 그가 할 일이 아니고 사무엘 제사장이 할 일입니다!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자신의 역할이 아닌 남의 역할을 하면서 혼란을 가중시킵니다. 내게 맡겨진 일은 잊거나 소홀히 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나는 내게 맡겨진 일을 해야합니다. 그게 우선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극단적 예를 들어보자면 사고의 현장에서 아직 구급대원이나 의사가 안옵니다. 내가 할수 있는 일은 구조를 요청하는 전화를 하는것, 옆에서 환자를 돌보는것, 위급한 상황이 되고 구조대원이나 의사가 안오면 환자를 실고 빠르게 병원에 데려다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현장에서 제가 칼을 꺼내들고 환자의 배를 가른다면? 내가 의사인척 그의 몸 구석 구석에 손을 대기 시작 한다면 상황은 더욱 나빠질것이 뻔합니다. 배를 갈랐는데 구조대원이 와서 “왜 이러셨어요?” 묻는데 “사람들도 동요하고, 구조대와 의사도 와야할 시간에 안오길래 어쩔수 없었어요” 라고 한다고 그게 답이 되는것은 아닙니다.

    교회든 가정이든 서투르게 다른 사람의 일을 하려다가 망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기다려야 할 일에 손을 대거나, , 반대로 오히려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은 안해서 상황을 회복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내가 할 일에 집중하는 하루, 내가 해야하는 일이 뭔지 정확하게 아는 하루, 나의 한계와 영역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하루가 되야겠습니다. 나의 일을 미루지 않고, 남의 일에 쉽게 침범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경계가 필요합니다. 일단 아빠, 목사 이 두가지만으로도 할일이 태산같습니다 ㅋ 집중해야겠습니다. ㅋ

    내 일을 열심히 하면 내일이 밝게 다가오리라 믿습니다. 급하지 않게, 의심하지 않으며, 상황에 함몰되지 않으며 내게 맡겨진 일에 충실한 하루! 오늘을 살아 갈 삶의 태도 입니다.

    오늘의 기도

    한 주간 달라스에서 진행되는 C3 Conference를 참석하게 됩니다. 많은 목사님들을 만나 배우고 교제하는 시간을 일텐데. 오가는 길을 지켜주시고 많이 배우고, 건강하게 교제하고 돌아오는 시간이 되게 해주세요.

  • 021323 삼상 12: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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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호와의 눈에 얼마나 악한 일인가”

    ‘끼리끼리’라고 말합니다.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립니다. 소위 말하는 ‘선한사람’들 끼리 어울린다고 하면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서로에게 건강한 기준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이 끼리끼리 모여있다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악한지 분간하지 못합니다. 선의 기준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구하는 일이 얼마나 악한 일인지 알지 못합니다. 일반적 시선으로만 봐도 당연하다 여겨지는 악이 그들에게는 일상인 경우가 다반사 입니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빼앗고, 폭력을 휘두르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것입니다.

    누가 기준인가?는 언제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요구했습니다. 주변 국가가 다 왕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눈’으로 보면 왕을 구한것은 그닥 ‘악한 일’이 아닙니다. 주변 국가의 눈으로 보면 왕을 구한 일은 ‘당연한 일’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 이는 너무나 악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거룩의 기준입니다. 소위 말하는 세상의 표준이 우리가 취할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일반적인 표준이 아닙니다. 세상의 표준은 아까 말한것처럼 ‘끼리끼리’ 모여서 ‘무리의 이익’을 위해 형성된 것이 대부분이고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시대의 권력자들과 다수의 목소리에 따라 바뀌기까지 합니다. ‘세상의 표준’이 언제나 악하고 언제나 틀린것이 절대 아닙니다. 주로 건강하고 질서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것은 ‘세상의 표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으로 선택하는 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특별한 죄의식 없이 쏟아내는 나의 간구가 어쩌면 “왕을 주소서”라고 하는 ‘하나님의 눈’ 앞에서 악을 구했던 이스라엘의 간구와 똑같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간구를 뱉어내기 전에 하나님의 기준에서 살피고,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하나님의 기준으로 점검하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될 때 깨닫고 돌이키고 회개하는 내가 되길 다짐하고 기도합니다.

    2 수습이 중요합니다

    악은 벌어지지 말아야겠지만 결국은 벌어졌습니다. 그러면 수습이 중요합니다. 차후 행해지는 바른 대처! 이것이 지금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른 대처는 무엇인가?

    “너희 모두가 이런 죄악을 저질렀지만 여호와를 떠나지 말고 너희 마음을 다해 여호와를 섬기라. 헛된 우상들을 따르지 말라” (20-21)

    겸손하고, 용감하고, 의롭게 수습해야합니다. 내가 저지른 악을 참담한 마음으로 인정해야합니다. 용서를 빌어야합니다.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은 필요한 용기입니다. “미안해”라고 말할수 있는 용기, “죄송합니다!” 라고 사죄할 수 있는 용기가 오늘 내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서 ‘의롭게 수습’해야합니다. 악을 버리고 공의를 선택하는것입니다. 선을 선택하는것입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십니다. 수습할 기회를 발로차버리는 어리석은 행동을 멈춰야합니다. 하나님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너희가 계속 악을 행한다면 너희와 너희 왕은 모두 멸망할 것이다.”

    오늘 하루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수습해야하는 일들, 이웃과의 관계에서 수습해야하는 일들, 회사에서, 가정에서, 친구들 안에서, 내면에서 수습되어야 하는 일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우박과 비’로 하나님의 강력한 경고와 깨달음의 메세지를 들었습니다. 수습의 하루가 되야겠습니다. 회복시키는 하루가 되야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시선 아래서 매 순간을 살아내는 제가 되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기준이 나의 삶의 기준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되는 자녀 되길 원합니다. 마음의 심연까지 하나님의 시선으로 점검하게 하시고 매일이 새롭고 의로운 믿음의 자녀 되게 해주세요! 한주간의 모든 일정을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 되게 해주세요! 아멘

  • 021223 삼상 1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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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무엘의 자녀들이 온전히 서지 못한것을 뺀다면 사무엘은 가장 닮고 싶은 ‘목회자상’입니다. 그는 어릴적부터 하나님을 섬기고, 백성을 영도하는 한 길을 걷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떠나지 않고, 사람들의 영광을 취하거나, 타인의 것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속이지 않았고, 권력으로 압제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사사’에서 ‘왕’으로 넘어가는 것이 사무엘의 입장에서는 인간적으로 서운하고 섭섭한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는 완악해지지 않습니다. 보통 권력자가 권력을 넘길 때 넘어지기 마련인데 사무엘은 그러한 욕심에 함몰 되지도 않습니다. 인간적 서운함으로 왕을 구하는 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습니다.

    이제 올해로 꼭 20년입니다. 사무엘 따라 갈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앞으로 허락된 섬김의 시간들도 꾸준함과 정직, 겸손과 죄에 대한 단호함, 절제, 성실, 인내, 청렴, 결백, 순종, 하나님을 향한 충성등을 배우고 실천 하는 목회자가 되야겠습니다. 자녀들도 부지런히 사랑하고 섬기고 바른길로 인도하는 아빠목자가 되야겠습니다!

    (목사만 이렇게 살아야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믿음의 성도가 같은 삶의 태도로 살아가야하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 생각됩니다! ㅋ 우리 모두 화이팅입니다)

    2 사무엘의 리마인더!

    사무엘은 왕에게 기름 부으면서 애굽 노예시절과 구원의 이야기, 그리고 사시시절이 도래했던 이유와 구원의 하나님을 이스라엘에게 상기시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재정비 시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지 말아라! 하나님을 경외하라! 하나님께 순종하라!”

    결국 ‘구원’의 기억이 그들을 새롭게 재정비하게 합니다. 은혜의 시절을 기억할 때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reminder’를 통해 ‘re-mind’(새마음)가 되도록 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억 할 때 새로운 마음이 됩니다. 하나님을 기억 할 때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사랑과 구원을 절대 잊지 말아야합니다. 구원의 사실을 기억하고 또 마음에 새겨야합니다.

    새로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정리된 마음, 새로운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 아침 재정비를 통해서 자칫 일어날 수 있는 실족을 미리 방지하고, 바른 사명의 길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겠습니다.

    마음과 삶을 재정비하는 하루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3

    뜬근없지만 “잘하고 있는 것이다!” (14절) 칭찬듣고 싶은 아침 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사명자였으면 좋겠다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도 알고 있습니다. 칭찬을 받는것은 1차적으로 내게 달린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칭찬해 주셔서 내가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잘하면 하나님께서 칭찬 해주시는 것입니다. 칭찬은 받고 싶은데 칭찬받을만한 행동을 안하는것은 모순적인 삶입니다.

    ‘남편’으로써는 아내의 칭찬을 받고 싶습니다. 그래서 칭찬을 갈구하거나 요구하기보다는 먼저 칭찬받을 만한 행동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ㅋ ‘아빠’로써도 마찬가지 입니다. 첫째달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그래서 칭찬을 구걸하지 않고 먼저 딸에게 칭찬받고 사랑받을 만한 행동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칭찬 받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칭찬받을만한 하루를 살것입니다. 교회를 섬기면서, 성도를 섬기면서, 가족을 섬기면서, 무엇보다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뜻을 쫓아 오늘 하루를 살면서 ‘칭찬받아 마땅한 종’의 모습을 계속 묵상하면서 열심을 내봐야겠습니다! 아빠 마음에 꼭드는 아들이 되야겠습니다. 아빠 하나님 앞에 아빠의 칭찬을 고파하는 순수한 아들의 모습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바우 교회의 주일 공예배를 기뻐 받아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크신 은혜를 누리게 해주세요. 마음을 재정비하는 하루가 되게 해주시고, 말씀을 통하여 새로운 비전과 결단이 서는 하루가 되게 해주세요! 아멘

  • 021123 삼상 11:1-15

    야베스는 어려운 상황을 마주할때 ‘이스라엘 온 지역에 전령’을 보냅니다.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있습니까?!” 짙은 어려움은 혼자 돌파하지 못합니다. 막막한 현실을, 참혹한 현실을 돌파하는것이 어렵습니다. 하물며 혼자 돌파해야한다면 더윽 참담하고 절망적인 마음이 됩니다.

    최근 튀르키예는 너무나 어려운 상황을 마주했습니다. 전 세계에 손을 뻗었습니다.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다행히 수많은 나라,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처럼 응답하기 시작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지진의 현장으로 한 달음에 달려가고, 나라 차원에서 구조대를 보내고, 군대를 조직해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현재 130여개의 국제 구조팀이 현장에서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고, 57개팀이 추가 투입을 위해 현장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재정을 여기저기서 모아서 터키에 피해 복구와피해자를 위해 전달하기도 합니다. 너나 할 것 없이 함께 같이 힘을 모아 어려움에 처한 국민과 나라를 돕고 있는것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리 해야할 것입니다. 교회가, 성도가 더욱 발벗고 나서야 할 것입니다. 바우 교회도 너무나 작은 교회지만 이와 상관없이 어떻게든 조그만 재정이라도 함께 모아 보내야겠습니다.

    피해복구에 필요한 구조대, 의료진, 병원, 재정, 음식, 쉘터, 복구팀등 아직도 필요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주님이 도와주시길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가족을 잃고 상실과 형언할 수 없는 아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 본인이 경중상을 당해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 삶의 터전을 잃어버려서 갈곳을 잃은 사람들, 막막한 모든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오늘은 다른 묵상을 덧붙이기보다는 오롯이 튀르키예를 위해 기도하고 마음 쏟는 하루가 되길 결정합니다! 하루의 맡겨딘 일을 하는 가운데서도 계속 중보해야겠습니다.

  • 021023 삼상 10: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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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대!

    혹시 내가 뽑힐까? 하는 설레이는 기대 혹은 나서기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뽑힐까? 하는 기대! 이스라엘은 기대감으로 가득합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이미 내정하셨던 (사무엘과 사울을 제외하고는 몰랐겠지만) 사울을 ‘제비뽑기’라는 - 이스라엘이 당시 사용한 공식적인-방법으로 드러나게 하십니다. 이때 이 결과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또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나타났습니다.

    나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일만 계속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누구나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나의 기대에서 벗어나면 실망하고, 분노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나의 기대’대로 이뤄지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당시 민족의 대소사를 ‘제비뽑기’로 결정했습니다. 그이유는 ‘제비뽑기’는 당시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주는 그들만의 전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선택의 영역에서 그 누구도 관여할 수 없는 ‘제비뽑기’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와 주권이 작용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오늘 ‘왕 선출’도 이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앞에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이 선포된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개인의 기대’와 맞지 않고 혹 만족이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이며 선택’이기 때문에 그들은 이를 받아들여야 하는것입니다.

    ‘나의 기대’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대로 일이 진행되는데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불량배’(27절개역개정)입니다. 제가 ‘불량배’들한테 돈좀 빼앗겨봐서 압니다. 돈 달라고 해서 줬는데 “이것밖에 없어!?” 하면서 자신의 기대치보다 적은 돈이라고 때립니다. 그래서 불량배입니다. 빼앗고, 만족도 없는 ‘양야치’?입니다 ‘신앙의 불량배’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나의 기대 대로 언제나 이뤄주는것은 ‘지니’입니다. 주권대로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지니’를 믿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2 선택

    선택은 받았는데 숨어버리고 싶을때가 있습니다. 내가 할수 없을 것 같고, 그런 능력도 없는것 같고, 막상 하려고 하니까 너무 큰 두려움이 엄습 할 때가 있습니다. 고등학교때 처음 드럼을 배우고 얼마후 ‘집회’에서 드럼을 쳐아할 때 한참 연습을 했지만 결국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숨어버려서 다른 형님 드러머가 쳐야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첫 찬양 인도가 정해졌을때도 “한 주만, 한 주만더요” 하면서 계속 미뤘던 기억이 있습니다.. 첫 설교때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숨고 싶었고, 중간에 뛰어 내려오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책임을 동반합니다. 그러니까 쉽지가 않습니다. 사울의 입장에서 들뜰만한 일이지만 동시에 너무나 두렵고 부담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짐짝 사이’에 숨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때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겨내야겠습니다. 내가 하는거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것입니다. 내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단한번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일을 하는데 ‘내 능력’으로 한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나’를 생각하면 두렵고 떨리고 숨게됩니다. 그러나 나를 부르신분, 나를 믿어주시는 분, 내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생각하면 두려움과 떨림이 용기와 설레임과 기대로 바뀝니다. “내게 능력 주신 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감당 할 수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기대가 이뤄지길 기대합니다.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대화를 하게 하시고, 오늘 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감당하게 해주세요! 튀르키예지진 현장에 오늘 하루를 지켜주셔서 구조자들의 안전을 허락하시고, 모든 필요한 작업들고 구조들이 신속하게 일어나게 해주세요! 필요한 모든 구호 물품들이 낙오되는일 없이 잘 모여들게 해주세요. 슬픔의 현장에 하나님의 기적들이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아멘

  • 020923 삼상 1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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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울은 ‘왕’으로 기름부음받았고 예견된 모든 일이 하나도 빠짐없이 ‘그날’ 다 이뤄졌습니다. 이쯤되니 기대는 확신이 되고 마음의 의심은 설레임으로 바뀝니다.

    이제 그는 왕이 되는 것입니다!

    왕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고,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사람들에게 자랑해도 부족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고, 모든 예언의 성취로 확증된것입니다. 그러니 자칫 과도한 설레에 함몰되어 설레발을 떨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경거망동하지 않습니다. 아직 길갈로 돌아가서도 ‘7일’이라는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침착해야합니다. 진중해야 합니다. 설레발로 중요한 일을 망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돌아오는 길에 사울의 삼촌을 만나고 사무엘을 만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삼촌에게 “저 왕이 된데요!” 하며 떠벌리지 않습니다. 자신이 겪었던 기적같은 일이 아닌 그저 사무엘을 통해 나귀를 찾은 이야기만 합니다.

    사울은 진중하고, 쉽게 흔들리지 않고, 설레발 떨지 않고 침착합니다. 들은대로 행동하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성숙하게 행동합니다.

    돌이켜보면 ‘개척교회’의 부르심을 받고 첫 걸음을 땔 때 이런 경험들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저런 응답을 통해 의심을 설레임으로, 기대를 확신으로 바꿔주셨습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준비’의 순간에 진중함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조심했습니다. 사람들이 물어봐도 신중하게 대답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뤄가시는 일에 나의 ‘설레발’로 초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를 향하신, 바우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응답대로 모든 일이 순적하게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모든 일이 순조로울때 설레발로 하나님의 일을 망치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잘 될수록, 성취될수록 말을 조심하고, 행동을 조심하고, 생각을 조심하고, 무엇보다 겸손하고, 인간관계를 조심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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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역개정은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라고 말합니다. 우리말성경 번역본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 행하라” 라고 말합니다. 결국 ‘기회’는 ‘하나님의 인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삶에서 ‘기회’를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 ‘기회’가 ‘하나님의 인도’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이해되고 사용될때가 더 많은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나 좋을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취해 방향을 상실할 때가 있습니다. 어디선가 “기회다!”라는 소리가 들리면 앞뒤 재지도 않고 그냥 내 달려 취하는 것입니다.

    ‘기회’라는 단어가 참 혹하는 단어입니다. 가슴 설레는 단어입니다. 오죽 이 단어가 주는 기대감이 컸으면 “인생을 살면서 큰 기회가 세번이와 그걸 잡으면 성공하는겨!” 이런 말들을 하겠습니까? ㅋ

    그러나 신앙인에게 ‘기회’라는 단어는 먼저 분별과 점검이 필요한 단어 입니다. 이 ‘기회’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인가? 하나님의 뜻인가? 하나님의 섭리와 방향인가? 분별하고 점검하는것이죠!! 그리고 나서 따라 행하면 됩니다.

    다행인것은 세상은 “인생에는 세번의 기회가 와!” 라고 말하지만 신앙인들에게는 인생 전체가 ‘기회’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신앙인들에게 ‘하나님의 인도’는 인생 전반에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믿음의 자녀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번의 기회가 아닌 평생의 기회를 마주한 사람들입니다!

    ‘기회’를 마주할때마다 쉽게 들뜨지 않고, 생각없이 뛰어들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분별하며 행하는 제가 되야겠습니다. 사탄은 ‘기회’앞에 붙은 단어를 뛰어들기 전까지 잘 안보여줍니다. 이게 ‘좋은’ 기회인지 ‘나쁜’ 기회인지 뛰어들기 전가지 앞에 붙은 이 형용사를 안보여주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칫 분별 없이 뛰어들면 ‘기회’가 ‘내가 죽는 기회’로 돌변할 수 있습니다. ‘망하는 기회’로 돌변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쫓아 살기로 결정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계속 전세계가 긍휼을 가지고 기도하며 또 구조하고 있는 튀르키예를 놓고 기도합니다. 벌써 사망자가 1만2천명이라는 기사를 접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생명, 그 영혼들 하나님께서 이 위기 가운데 임하시고 인간의 성정으로 이해할수 없으나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위로와 회복이 그 땅과 사람들안에 일어나게 해주세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아멘

  • 020823 삼상 9: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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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견자의 집이 어디인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사무엘 본인에게 와서 이렇게 묻는 젊은 사울을 본 사무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이미 하나님을 수십년간 섬겼던 경험으로 점철된 노장이 바로 사무엘입니다 그런 사무엘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사무엘 놓고 사무엘도 모르는-사울은 한낱 ‘하룻강아지’ 처럼 보였을지 모릅니다.

    회사 부장님이 신입사원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저만 해도 한참 후배 전도사님 교회 들어와서 방황(?)하는거보면 ‘아이고 일을 할 수 있으려나! 뭘 좀 믿고 맡길 수 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사무엘이 사울을 볼때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 허우대만 멀쩡해서 뭘 할 수나 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죠! 그러나 사무엘은 하나님의 뜻을 의심없이 존중합니다. 그리고 사울을 최고의 VIP로 잘 섬깁니다.

    ‘나’로’ 남’을 판단하는것이 바로 ‘라때’입니다. 나의 기준과 경험으로 타인의 재량을 재고 판단하는 것이 바로 ‘꼰대’입니다. 경험이 다르고, 능력도 다르고, 은사도 다르고, 지식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서로를 믿어주고, 인정하고, 존중하고,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이 맘에 안들 수 있습니다. “맞는 사람 뽑았습니다” 해서 만나봤는데 영 허술해 보일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입니다. 내 주변에서 ‘사울’을 만나게 된다면 인정하고, 존중하고, 믿어주고, 협력하는 ‘사무엘’과 같은 자가 되야겠습니다. 주님 제발! 차세대 교역자 좀 보내주세요!! 제발! 제가 잘 할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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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울은 분명히 아버지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기억하시죠? 그런데 지금 일정이 더욱 늦어지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전화가 있는것도 아니기 때문에 상황상 아버지가 나귀를 찾아나선 사울을 걱정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사무엘에게 “저는 아버지가 걱정하시니 빨리 돌아가야겠습니다” 하지 않습니다. 선견자 사무엘의 인도를 따라 일정을 조율합니다. 사울도 선견자 사무엘과의 만남과 대화 속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습니다.

    자칫 ‘내가 할 일, 내가 하려고 계획한 일’에 압도 되어있으면 그 ‘일’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앞에서 펼쳐질때 무관심하게 되는 실수를 범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나를 따르라!” 라고 말해도 “저 집에 잠깐 돌아가서 할일 마져하고 그 이후에 오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격입니다.

    간혹 ‘사역’을 할 때 ‘일’에 함몰되어 하나님의 뜻이 다른 방향을 가르키는데도 무시하고 애초에 내 뜻과 계획을 향해 달려갔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내 계획과, 나의 상황, 내 일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움직이기 시작할때,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기 시작할때 ‘나의 일’ 때문에 ‘나의 계획’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포기하거나 그 자리를 떠나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나의 일’ 때문에 ‘교회 일’ 때문에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한 ‘하나님의 일’을 무시하거나 깨닫지 못하는 실수는 절대 범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계속 구조작업이 벌어지고 있는 튀르키예의 상황을 주님의 손에 맡겨드립니다. 영혼들을 위로하시고 구원해주세요! 하나님 바우교회를 기억하셔서 좋은 동역자, 교역자를 보내주세요! 함께 바우를 섬길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오늘하루도 ‘나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일하는 자가 되게 해주세요!

  • 020723 삼상 9: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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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가 바뀌고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이 다릅니다. 급변하는 시대! 언제 어떻게 눈부신 발전이 소개될지 모르는 시대입니다. 시대는 언제나 그렇게 변화를 마주합니다

    신정시대에서 이제 왕정시대로 이스라엘은 그 변화점에 있습니다. 커다란 변화가 몰려옵니다! 그래서인지 본문은 느닷없이 예전에는 ‘선견자’라했는데 요즘에는 ‘선지자(예언자)’라고 부른다는 것을 기록합니다. 기록은 무엇을 위한 기록인가요?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시대가 변하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해도 안변하는 것이 있습니다. 신정시대든 왕정시대든, 선견자 시대든 선지자 시대든, 어떤 시대든 결국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보세요 왕정이 시작되는 이 변화의 시기에 왕을 분별하여 세우시는 분이 결국 하나님 입니다. 과거에도 선견자를 찾아 하나님의 뜻을 물었던 백성인데 왕정을 눈앞에 분 ‘변화의 시대’ 혹은 ‘새시대’를 맞아도 결국 그들은 선지자를 찾아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합니다

    시대는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대를 막론하고, 변화를 막론하고 필요합니다. 그분의 통치는 언제나 필요합니다.

    인생은 수많은 변곡으로 켜켜히 쌓여있습니다. 시대의 상징으로 생각해보면 ‘아날로그시대’였다가 ‘디지털시대’가 됩니다. ‘통기타시대’였다가 ‘일렉트로닉시대’입니다. ‘현장예배’가 ‘온라인예배’가 되기도합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변하는 시기에 변함없는 하나님이 변함없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주님께 묻고, 언제나 주님의 통치아래 살아가는 인생이 될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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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섭리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온통 하나님의 섭리로 가득찹니다. 암나귀소실된것부터, 사울이 찾아나서는것, 그 많은 사환중에 그 사환이 동행하는것, 사무엘 선지자의 동선, 그리고 대기하듯 있는 소녀들 등 모든것이 완벽한 타이밍처럼 보입니다. 이런 인생의 퍼즐은 하나님의 특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라면 문제인것이 하나님의 이러한 개입과 삽리가 잘 안보입니다. 심지어 경험하는 순간에도 잘 모릅니다 오늘 내가 만난 사람, 오늘 내가 방문하는 그곳이 어떤 의미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의 은혜는 오늘과 지금을 최선과 성실로 살아내는 자들이 결국 함께 누리는 선물같습니다

    그러고보니 사울이 여러곳을 거쳐 거기까지 갔습니다. 돌아가려할때 이번에는 바로 그 사환이 한번만 더 가보자고 했습니다. 드릴것이 없다고 포기하지 않고 주머니를 털었습니다. 어린 소녀들의 말이지만 청종해서 끝까지 갑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섭리가 선물처럼 이루어지는것입니다.

    오늘 나의 만남, 나의 방문, 나의 시간들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으며 최선과 성실을 유지해야겠습니다 게으름은, 쉬운 포기는 섭리의 적임을 깨닫습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튀르키예에 큰 지진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고 피해를 보았습니다. 위로해주세요. 돕는 손길들을 계속 보내주시고 하나님의 기적의 회복들이 땅과 사람들 곳곳에 임하게 해주세요! 살려주시고, 치료해주시고, 회복해주세요! 어려운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로 선이 이뤄지길 믿음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020623 삼상 8: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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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내가 원하는것은 미화되어 있습니다. 이걸 얻으면 삶이 달라질것 같습니다. 이 대학을 가면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것 같고, 이 회사를 들어가면 삶이 완전히 달라질것 같습니다. 이것만 얻으면 행복하고, 문제가 해결되고, 안전하고, 평화로울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왕이 그렇습니다. 다른건 필요 없습니다. 듣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웃나라에서 볼 수 있는 왕은 이미 이스라엘에게는 미화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를 다 해결해줄것 같고, 전쟁에 앞서 나가서 싸워 줄 것 같습니다.

    한편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꾸고 있는 ‘미화된 꿈’에서 ‘미화’를 벗기고 보면 자녀들은 군대로 징집될것이고, 내야되는 세금은 많이지게 되고, 자칫 억압 당하고, 착취 당하고, 부당한 일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타의에 의해서 자유의 신분이 아닌 ‘종’의 신분이 되어지는 일도 일어날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언제나 나를 해방시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언제나 해답이 되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앉는다면 무작정 원하고, 바라고 소망하는 -이스라엘백성이 보여준 - 이 어리석은 실수를 고집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소망에 대해 경고하시는가? 아니면 권고하시는가? 마음을 열고 겸손하게 청종해야겠습니다.

    2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진 영향력과 권위는 실로 엄청납니다. 백성은 수십년을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과 소통했고, 그의 명령 앞에서 백성은 회개하기도 하고 함께 전쟁에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의 말을 듣기를 거절” 합니다. (19절)

    ‘거절’은 생소한 반응입니다. 원래 사무엘이 말하면 잘 들어야합니다. 분명히 백성들은 지난 수십년을 그렇게 해왔습니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갔고, 회개하라면 회개하고, 출정하라면 출정했습니다. 그런데 한 순간 듣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나의 욕망은 하나님을 거절하게 만듭니다! 나의 교만은 하나님을 거절하게 만듭니다. 나의 착각은 하나님을 거절하게 만듭니다.

    하나님 말씀 여태 잘 듣고 살다가, 순종하며 살다가도 욕심과 교만, 착각의 늪에 빠지면 한 순간 ‘거절’의 카드를 꺼내듭니다. 내 안에 일어나는 거절의 태도를 거절합니다!!!

    3

    백성과 다짜고짜 싸우기보다는 하나님과 상의합니다. 사무엘의 이 태도에 목회자로써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습니다. 평생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사무엘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권위 아래 있는 백성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들어야하는 말을 전하는데 “듣기 싫소! 듣기를 거절합니다!” 라고 말을 잘라먹습니다! 이쯤되면 화를 낼법도 합니다. 싸울만도 합니다. “내가 아직 이렇게 시퍼렇게 두눈을 뜨고 살아 있는데 왕을 달라고?!” 인간적으로 서운한 마음을 쏟아낼 법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은 이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를 앞에 쏟아내기 전에 하나님께 일단 보고하고 봅니다! 심지어 “백성의 말을 다 듣고” 라고 말합니다. 그 와중에 다 들어준것입니다.

    감정에 휘둘려 성도와 싸우는 목회자, 성도의 말에 귀 기울여주지 않는 목회자,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꿇지 않는 목회자, 절대 이런 목회자는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새로운 날을 허락하신 주를 찬양합니다 .오늘 저녁에 말씀을 나누는 UT기독교연합동아리 개강예배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히 임하여 주시고 도전과 은혜로 함께 해주세요! UT대학에 신청한 바우 기독교 동아리가 잘 허가 되게 해주시고 이를 통하여 대학생들이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가 세워지게 해주세요! 한주간도 건강한 목회자로 살아가게 하시고, 바우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보는 한주 되게 해주세요! 아멘

  • 020523 삼상 8:1-9

    reel

    1

    제가 ‘사역’을 해보니까 인간적으로 좀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사역자의 가장 큰 변명이 무엇입니까? ‘바쁨’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바쁜데 하물며 사무엘은 얼마나 바빴을지 상상이 안갑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를 찾았고, 얼마나 많은 일을 감당해야하고, 그의 이동거리는 또 얼머나 길고 번거로운 일이었겠는가? 사무엘은 사사의 역할도 하고, 선지자의 역할도 하고 제사장의 역할도 했던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 아이들을 돌볼 시간과 에너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사무엘처럼 제 아이들을 잘 돌보지 못합니다?!??! 이게 맞습니까?!?!? 아닙니다!

    “비겁한 변명”입니다! 나의 상황을 변명으로 마땅히 해야할 또다른 일들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이런 식의 접근을 한다면 해야할 많은 일 앞에서 계속 변명으로 일관하게 될지 모릅니다.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또한 하지 말아야 하는 일 앞에서 변명으로 합리화하는 습관들을 내려 놓고 우선순위의 정리하겠습니다. 맡겨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 감당하는 자가 되기로 다짐 합니다.

    하나님 가정과 교회, 맡겨진 모든 사명을 감당할 지혜와 능력과 체력을 허락해주세요!

    2

    그러나 아들들의 악함을 사무엘의 부족함과 죄이다! 라고 다 뒤집어 씌울수는 없습니다. 아들들이 악을 선택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단언컨데 사무엘이 아들들에게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하라!” 가르치지 않았을것입니다. 이는 아들들의 선택이고 그들의 죄입니다.

    지난 주 주일 설교중에도 함께 나눴지만 죄의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악행입니다. 나의죄의 책임이 나의 부모에게 있고, 사회와 환경에 있고, 하나님께 있는것이 아닙니다.

    아들들은 ‘죄의 길’을 따를 것이 아니라 사무엘 ‘아버지의 행위’를 따라야했습니다. [시1:1, 우리말성경] 복이 있는 사람은 악한 사람들의 꾀를 따라가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으며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과 자리를 함께하지 않고

    ‘죄의 길’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길’을 따라 살 것입니다.

    3

    “모든 나라와 같이 왕을 세워” 주세요! 이스라엘 주변을 봅니다. 모든 국가가 ‘신정정치’가 아닌 ‘왕정정치’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트랜드(?)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도 왕정정치 하고 싶습니다. 왕 가지고 싶습니다. 왠지 왕을 가지면 나라가 더 좋아질것 같습니다.

    ‘모든 세상’이 그렇게 한다고 하면 왠지 우리도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별로 좋지 않은 일인데도 ‘모두’ (실제로는 모두가 아닙니다)가 한다고 하면 나도 그냥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이들이 흐름과 유행을 쫓아 막무가내로 따라합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주변의 흐름을 쫓아 하나님의 통치를 무시하고 버리기로 결정합니다. 자신들이 무슨 결정을 하는지 잘 인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8절의 말씀처럼 그들이 요구하는 ‘왕정’은 본질적으로는 우상숭배를 하는 것과 같은 결정입니다.

    [롬12:2, 우리말성경] 여러분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세대를 본받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본받기를 다시 한번 결정합니다. 내 인생이 ‘왕정’이 아니라 ‘신정’으로 남아있어야합니다. 흐름과 유행의 가치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부름과 선행의 가치를 쫓아 살아갈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기도

    주일을 허락하심에 감사합니다! 함꼐 모여 기쁨으로 예배하는 바우 교회 되게 해주시고 다시 한번 우리의 인생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게 되는 귀한 예배 시간이 되게 해주세요! 주님! 오셔서 나를 다스려주세요! 세상의 흐름과 유행에 부문별하게 휘둘리지 않게 하시고 분별하는 지혜와 절제하는 자 되게 해주세요! 아멘

  • 020423 삼상 7:12-17

    reel

    1

    야곱은 벧엘에 기념비를 세웁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면서 그 갈라진 강에서 기념비를 세웁니다. 사무엘은 백성과 함께 추격하여 블레셋을 무찌르고 미스바와 센 사이에 기념비를 세웁니다. 이름하여 ‘에벤에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에 대한 기념입니다. 찬양과 감사의 기념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은혜를 갈무리 해 놓아야합니다. 나의 영광은 갈무리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는 갈무리 해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록하고 기념하며 돌아보는 자의 삶이 건강합니다.

    사실 나의 벽에는 ‘벧엘, 요단강, 에벤에셀’ 의 기념비 보다 나의 상장과 자격증과, 기념의 사건과 사진들이 걸려있습니다.

    누군가 전문의가 일하는 사무실에 가보면 언제나 발견하는 벽에 걸린 거치물들을 봅니다. 빛나는 졸업장, 찬란한 자격증, 금빛 가득한 상장과 트로피, 줄줄이 이어진 이력, 영광스런 순간의 사진들 등입니다. 모든 기념들이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표효하고 있습니다. 단언컨데 “하나님의 은혜로 이 어려운 학교를 졸업하였음” 이렇게 써있는 액자는 본적이 없습니다. “이 어려운 자격증을 따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에벤에셀’” 이라고 적혀있는 트로피를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념의 순간들’을 돌이켜보면 이 모든 일이 가능했던것은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 졸업장에, 그 상장에, 그 기념비에, 그 토르피에 적힐 이름은 사실 나의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 입니다. 오늘 ‘에벤에셀’도 승리한 이스라엘 백성의 이름이 적힌게 아닙니다. 이 일을 가능케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적힌것입니다.

    바우교회에 하나님께서 ‘에벤에셀’의 은혜와 기적을 베풀어 주실줄 믿습니다. 승리하는 영광의 순간을 마주하게 될것입니다. 영적으로 빼앗겼던 오스틴의 지역 지역들을, 영혼들을 회복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것입니다. 아멘!

    그러나 그 날이 오면 바우 교회가 세울 기념비에는 ‘에벤에셀’이라 적히게 될것입니다. ‘정용환 개척목사’의 이름도 아니고 ‘바우교회 개척성도’들의 이름도 아닐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래서 ‘개척도구’ 혹은 ‘voice’라고 하는 비전에 집착하는것입니다. 내 이름은 없고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만을 선포하고 싶은 갈망이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영광과 찬양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록될것입니다.

    나의 기념비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워야합니다. 그래야 건강합니다. ‘기념비’마다 나의 이름을 적어놓고 내 영광으로 기억하면 자칫 안주하고, 교만하고, 실족하고, 과도한 자기애에 빠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갈취하려드는 위험들에 쉽게 빠지게 될것입니다.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과 은혜가 적힌 기념비를 곳곳에 세워야겠습니다. 그리고 기념비를 자주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감사드리며, 방향을 재정비하고, 교만을 버리며, 겸손과 순종으로 마음을 다짐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을 ‘에벤에셀’로 가득 채우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바우 교회를 세워가시는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

    ‘‘평생’ 그리고 ‘순회’ 라는 사무엘의 사역의 자세에 도전을 받습니다. 결국 반복입니다. 계속 반복입니다. 올해 벧엘과 길갈 그릐고 미스바를 순회했으면, 이듬해에 또 하는것입니다. 자기 집이 있는 라마로 돌아와도 또 다스리는 것입니다.

    신앙은 반복이고, 사명도 반복입니다. 꾸준한 신앙의 발걸음, 반복하는 사역의 성실함이 ‘건강한 이스라엘’을 유지하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올해도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가정을 섬기고, 성도를 섬기고, 이듬해에도 동일하게 해야겠습니다. 그 다음해에도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평생’ ‘순회’하는 신앙인이요 사명자가 되기로 다시 한번 결단합니다!

    오늘의 기도

    오늘도 에벤에셀의 하나님의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을 마주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여 드립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 삶을 살게 해주세요! ‘반복된 섬김’의 참된 의미를 알아 실족하지 않게 하시고, 포기하지 않게 하시고 성실과 꾸준함으로 사명을 감당하게 해주세요! 아멘

  • 020323 삼상 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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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호와의 궤를 지키는 것’ 또한 20년간 ‘여호와를 사모’하는것, 그리고 ‘사무엘의 지시에 따라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는것’ 귀한 영적 자산입니다. 지키고, 사모하고, 제거하는 신앙의 3박자는 오늘을 사는 나에게도 필요합니다.

    내 삶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지키고(?)-삶 속에서 다시는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우상과 악은 더더욱 경계하며 제거할때 20년이 아니라 주님앞에 갈 그때까지 신앙의 건강을 지켜갈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렇게 결단하고 믿음의 걸음을 걸을 때 내 앞에 있는 ‘블레셋’ 또한 하나님께서 제거해주시리라 믿습니다.

    2

    이스라엘 백성에게 믿음의 호 시절이 열리는 그때 블레셋 적군은 일어납니다. 영적인 세계가 그렇습니다. 내가 이제 좀 일어나 보려고 하면, 모든 것이 회복되려고 하면 ‘블레셋’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이기고 승리할 것입니다.

    승리를 위해 이스라엘은 두가지 면에서 탁월하게 행동합니다. 하나는 “부르짖음’입니다. 전쟁의 문턱에서 사무엘에게 기도할 것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블레셋 사람을 추격하여 싸우기에 이릅니다.

    나를 향하여 원수가 일어나고, 전쟁이 시작될때 이 두가지를 잊지 않겠습니다. 기도와 중보-결국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믿음으로 나가서 부딪혀 싸우는 것입니다.

    간혹 기도만 하고 앉아 있을때가 있습니다. 학생이 시험잘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시험치러 가지 않는것과 같은 황당함 입니다. 원래 문제 해결이라는것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는것이 기도로만 되지 않습니다. 기도는 기본이고 나가서 부딪혀야합니다. 간절한 기도와 더불어 믿음의 실천이 필요한것이죠!

    바우교회개척과 함께 ‘믿음의 호시절’이 시작된줄 믿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영적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블레셋’이 일어난 것이죠!! 이제 필요한 것은 간절한 기도이며, 용맹한 참전입니다

    그래서 매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참전의 마음으로 열심히 교회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혹 게으른 군사는 아닌지 도피한 군사는 아닌지 계속 점검하고 있습니다) 모든 이들이 사무엘의 마음으로 이 전쟁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해주길 부탁합니다. 바우교회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또한 모든 성도가 함께 이 ‘전쟁’에 참여하여 ‘블레셋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까지 이르러 치는’ 열심의 동참이 있길 소망합니다. (이미 계신 성도님들이 이렇게 기도와 동참으로 함께 해주시고 계셔서 얼마나 큰 힘이 나는지 모릅니다. 감사합니다!)

    3

    원래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영광의 목전에서 블레셋을 만났습니다. 일종의 ‘어둠’입니다. 그러나 어두운 이 길 끝에 있는 것은 찬란한 해돋이 입니다.

    나의 삶에 하나님은 빛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어둠은 결국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상도 사라지고, 블레셋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찬란한 영광을 꿈꾸며 오늘의 어두움을 결연한 의지로 넘어서야겠습니다. 빛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겠습니다. 거의 다 왔습니다.

    누구든 이 어둠을 지나 찬란한 영광의 빛을 마주할때까지 멈추지 않고 달려나가길 응원합니다.

    오늘의 기도

    내 삶에 하나님을 지킵니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우상은 더더욱 제거 합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것처럼 모든 안팎의 문제를 넘어서 영광의 빛을 보는 바우교회와 성도 되게 해주세요! 오늘 인생의 ‘어둠’을 지나고 있는 자들에게 힘이 되어주시고 빛의 소망을 깨닫게 하시사 그들 모두 이 어둠에서 주저 앉지 않고 걷게 하시고 결국 영광의 빛을 보는 기적을 허락해주세요! 승리를 주세요! 회복을 주세요! 아멘!

  • 020223 삼상 6: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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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런 날이 있습니다.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그런 날 말입니다. 그냥 일상의 일을 하고 있는데, 아무런 기대도 없이 지내고 있는데 느닷없이 내 인생으로 하나님께서 걸어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삶에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설거지를 하다가, 회사에서 일을 하던 중에, 잠시 쉬는 중에, 식사를 하다가, 집에서 책을 보다가, 아이와 함께 놀아주다가, 티타임을 갖는 중에, 멍때리던 중에, 잘려고 준비중일때, 시장에서 장을 보다가, TV를 보며 한참 웃고 있다가도 느닷없이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일상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이제 우리와 언제나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기쁨이 넘칩니다. 내 인생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으로 인해 기쁨이 넘칩니다. 일상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으로 인해 기쁨이 넘칩니다. 성령 하나님으로 언제나 함께 하시기에 기쁨이 넘칩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오늘의 일상이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찰 예정입니다. 할렐루야!

    2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생에 ‘번제’는 맞지만 ‘범죄’는 틀립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인생은 ‘성도’가 지향해야 할 인생입니다. 그러나 경거 망동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며, 내 뜻과 생각을 따르는 불순종의 ‘범죄’는 ‘성도’가 지양해야 하는 인생입니다.

    [민4:20, 우리말성경] 죽지 않으려거든 그들은 한순간이라도 ‘거룩한 것들을 보아서는 안된다.”

    이미 명령하셨던 하나님 입니다. 그러나 벧세메스 사람들은 결국 이 명령을 어기고 ‘거룩한 것’인 언약궤를 들여다보는 ‘범죄’를 저지른것입니다. 대가는 무섭습니다. 70명이나 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성도는 예배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인생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을 하고, 금지한 것을 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처럼 그저 호기심에, 혹은 몰라서, 혹은 알고도, 혹은 무신경함으로 범죄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결과는 아차! 해도 돌이킬수 없을 때가 거의 대부분 입니다. 죄를 향한 무지와, 무던함, 무절제한 호기심과, 의지를 경계하고 잘라내야겠습니다.

    죄는 ‘기쁨의 날’을 한순간의 ‘저주의 날’로 바꿔버릴수도 있습니다. 무시무시합니다. 죄를 향해 경계 또 경계해야합니다.

    오늘의 기도

    오늘도 여전히 날씨 때문에 많은 지역 주민들이 고생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 날씨때문에 일상에 마주한 문제들이 다 해결되게 해주세요. 사건 사고에서 보호해주세요!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하루, 죄는 경계하는 하루가 되게 해주세요! 아멘

  • 020123 삼상 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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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언약궤를 “제자리로” 돌려보내야합니다. 하나님을 제자리로 돌려보내야합니다. 내 삶에 ‘하나님’을 원래 계셔야하는 곳으로 돌려 보내야합니다. 왕은 보좌에 앉고, 집 주인은 집 안방을 차지하는 법입니다.

    운전하려고 차 문을 열고 당황 할때가 있습니다. 큰 딸 녀석이 운전대에 앉아서 핸들을 잡고 운전하는 시늉을 하고 있는것입니다. 패달에 발도 안다고, 컸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창밖을 통해 앞을 제대로 보지도 못합니다. 그런데도 움직이지도 않는 그 차 핸들을 붙잡고 신이 나서 이래저래 돌리려고 해봅니다. 마냥 귀여워 보이기도 하지만 이내 이렇게 말합니다. “출발하게 뒤로가 앉아!” 아이는 운전석에 앉으면 안됩니다. 아이는 운전대를 잡아서는 안됩니다. 아빠가 앉아야합니다. 운전자가 앉아야합니다. 그런데 만약 하율이가 “아빠가 그냥 뒤에 가서 앉아계세요!” 말하고 시동을 걸고 출발하면 사고는 필연이 됩니다.

    나는 나의 자리로, 하나님은 ‘제자리’로 가야합니다. 나의 중심, 삶의 운전대에 하나님께서 앉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자리로 가셔야 재앙이 멈춥니다! 할렐루야!

    가정에 중심에도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교회의 중심에도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혹 가정과 교회의 중심에 내 자신이 앉아있는지 점검하고 경계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을 ‘제자리’로 모시는 하루가 되야겠습니다.

    2

    듣고 보아서 아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은 사춘기가 지나고 운전면허를 딸수 있는 나이가 되면 더이상 부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출발하게 뒤로가!”라고 말하면 “운전면허 땄으니까 제가 할래요! 아빠가 뒤로가세요!” 라고 말합니다. “아직 안돼! 뒤로가!” 라고 말해도 그들은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해야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자세는 ‘신실’입니다. 좋은 자세입니다. 그러나 하지 말아야 일을 포기하지 않는 자세는 ‘고집’입니다. 버려야하는 자세입니다.

    내 ‘고집’을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을 내 인생에 제자리로 모시지 못합니다. 본문이 다시 상기하는것처럼 ‘고집’ 부리면 애굽과 바로처럼 망하는것이요, 블레셋 사람들처럼 그 시간들 동안 (7개월)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어릴적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다가 아버지에게 매 맞은 일도 있고, 학창시절 무작정 우기고 고집하다가 친구관계가 깨지는 일도 경험했고, 사역 하면서 내 방법으로 고집을 부리다가 실패한 경험도 있습니다. 심지어 성도들에게 상처를 준적도 있고, 그 유명한 ‘시험에 들게하는 목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안에서 개선 해야만 하는 내 생각, 내 방법, 내 소망, 내 의지, 내 시간, 내 꿈을 계속 고집하는 어리석은 태도를 서둘러 버려야겠습니다.

    오늘 내게 필요한것은 ‘고집’이 아니라 ‘신실함’입니다. ‘고집’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떠오르는 ‘교회’에 대한 내 방법과 내 생각과 내 의지와 내 시간들이 혹 ‘고집’이 아닌지 점검해야겠습니다.

    3

    블레셋 사람들은 끝까지 하니님을 의심합니다. 이 모든 재앙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재앙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궤는 뭘 의심하냐는 듯이 좌우로 치우침 없이 곧장 벧세메스로 올라갑니다.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도 계속 의심하는 ‘불신의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반복해서 기적을 보여줘도 기적의 순간들마다 사람들은 반복적으로 의심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나를 향하고, 교회를 향한 섭리와 계획, 사랑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눈이 오고 날이 추워졌습니다. 어제도 사고가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오가는 모든 사람이 안전한 하루 되게해주세요. 날씨때문에 출근하지 못한 회사원, 등교하지 못한 학생들이 많습니다. 오늘 하루 가족들이 더욱 사랑하고 돈독해지는 하루가 되게해주세요! 가정과 일터 그리고 교회에서 하나님을 제자리로 모시는 내가 되고 성도들 되게 해주세요. 아멘

  • 013123 삼상 5:1-12

    1

    맞아요! 우리 하나님은 ‘신 옆에 신’으로 계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다곤 옆에 언약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부정하고, 우상을 파괴하십니다.

    ‘우상숭배’를 하는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이런 취급을 하곤합니다. 우상 옆에 하나님 같이 세워두려고 합니다. ‘다곤’도 있고, 하나님도 있는 삶을 사는것이죠! 종교 다원주의고, 종교 혼합주의입니다.

    우상과 하나님은 공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리석고 연약한 인간의 바램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용인하지 않으십니다.

    내 삶에 용인한 (아니 어쩌면 모시고 있는) ‘다곤’은 당장 내다 버려야합니다. 하나님은 우상과 공존하지 않습니다. 내 삶에 하나님을 모십니다. 다른 말로 모든 우상을 내 쫓습니다.

    내 생명, 내 삶, 내 꿈, 가족, 자녀, 부모, 돈, 명예, 권력, 행복, 만족, 심지어 바우 교회 조차도 우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내 삶에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2 다곤 vs. 하나님

    승자는 당연히 하나님입니다. 다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지고, 머리와 손이 잘리는 처첨한 형국을 마주합니다. 이 팩트만 놓고 본다면 결국 블레셋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들은 분명히 ‘다곤’의 수치와 패배를 보았습니다. 결국 누가 참 신입니까? 하나님 입니다.

    그런데 블레셋이 ‘언약궤’ 즉 하나님을 버립니다. 언뜻 생각하면 당연한것 같지만 정말 이상한 결정입니다. 다곤이 졌습니다. 다곤의 유명무실함이 증명됐습니다. 아무런 유익이 없고, 블레셋을 보호할 수 없으며, 하나님과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영적이든, 이성적이든) 다곤을 버리고 하나님을 잡아야하는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자꾸 ‘언약궤’를 옮깁니다. 하나님을 자신들의 삶에서 멀리 떨어뜨려버리려고 합니다.

    이런 영적무지와, 상식적이지도 않은 일, 심지어 완악하다 여기지는 일들이 여전히 오늘도 일어납니다. 소위 말하는 ‘신앙인’들 사이에서도 하나님과 ‘다곤’을 선택해야하는 상황에서 고민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도 일어나고, 심지어 하나님 대신 ‘다곤’을 선택하는 상상불가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곤’을 옮겨야 합니다. ‘다곤’을 포기해야합니다! 반드시 하나님을 선택해야합니다!

    3

    블레셋은 이미 다곤에 익숙합니다. 다곤과 친밀(?)합니다. 다곤이 편하고 이해와 조율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보아하니 ‘여호와’는 너무 거룩하고, 너무 무섭습니다 ㅋ 결국 ‘편한 신, 친밀한 신, 습관이 된 신, 내가 조율 가능한 신’을 그래서 선택합니다.

    내가 하나님 외에 것에 그렇게 익숙해지면 결국 선택의 기로에서 ‘다곤’을 선택하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범하게 될것입니다. 우상과 친해지고, 우상이 편해지고, 우상에게 무감각해지는 어리석은 삶을 지금 청산 해야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내 삶에 있는 모든 우상을 제거해주세요. 하나님께서 다곤의 목을 자르고 손을 잘라 넘어뜨리시는것처럼 내 안에 있는 모든 우상이 죽어지게 하시고 오직 주님만을 선택하고, 주와 동행하는 삶이 되게해주세요! 모든 우상을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주님 되십니다! 주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아멘

  • 013023 삼상 4:12-22

    1

    한시대를 풍미(?)했던 엘리가 이렇게 갔습니다. 그는 제사장이었고, 40년간 사사였습니다. 인정받았던 젊음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옳은 길로 이끌고 ‘사사’답게 백성을 전쟁에서 이끌고 승리하던 시절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한때의 영광’을 뒤로하고 그는 방관의 죄와, 자식들의 죄까지 그 값을 톡톡히 치르게 됩니다.

    ‘영광의 시절’을 보내다가 그 끝이 비극적인 사람들은 생각보다 주변에서 많이 보게 됩니다. ‘영광의 젊은 시절’이 꼭 ‘비극적 결말’로 끝나야하는 원칙이 있는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이 길을 걷는 이유는 젊은 시절, 혹은 어느 시절 누렸던 ‘영광’이 그들의 눈을, 생각을, 마음을 마비시켰기 때문일 것입니다.

    호시절, 인정받는 시절, 사용받는 시절에 절제, 경계, 겸손, 성실, 경건, 거룩, 성찰등의 과정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겠습니다. 진정성 있는 기도, 말씀, 예배를 세워야겠습니다. 더 나가 내 주변도 같은 마음으로 정비하고 살펴야겠습니다. 안팎으로 잘 정검하고 꾸준한 거룩으로 살아야겠습니다.

    2

    ‘믿음의 가정’의 몰락을 봅니다. 시작은 믿음의 가정인데 결국은 엘리도 죽고, 아들들도 죽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일어납니다.

    우리 가정이 ‘믿음의 가정’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직 아이들이 어립니다. 저와 아내도 열심을 내어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지금 보면 ‘믿음의 가정’이 맞습니다. 각자의 영역(?)에서 믿음을 지키고 건강하게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의 사건을 마주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자라가고, 저와 아내의 섬김이 오랜 시간 이어져 가면서 (엘리의 경우 사사로만 40년입니다) 신앙의 순수성과, 사역의 열심, 가족 전체가 주님을 향한 건강한 믿음을 지키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가족은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말씀의 가르침과 기준이 필요합니다. 시대가 악합니다. 교육계의 침투한 ‘인본주의’는 아이들이 자라감에 따라 무엇이 진리인지 혼동하게 만들것입니다. 인간 관계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죄의 유혹들도 있을 것입니다. 본능을 제어함을 지혜롭게 가르치지 못하면 ‘피 고기’를 찾아 해매던 엘리의 자녀들처럼 본능에 충실하여 죄짓는 일도 일어날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너무나 쉽게 죄를 짓기 시작하게 되고, 한번 지은 죄는 점점더 그 더러움과 어둠을 확장해 갈것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그런것처럼 말입니다)

    가족이 건강한 믿음을 지켜나갈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함께 믿음의 가정을 이뤄가야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한주가 되게 해주세요. 한주간도 가정을 건강하게 지켜주시고, 모든 성도님과 가정도 건강하게 지켜주세요. 우리의 믿음이 항상 점검되게 해주시고 죄의 유혹을 단호히 거절하는 하루 하루 되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임재를 빼앗기지 않는 한주 되길 기도합니다! 아멘

  • 012923 삼상 4:1-11

    오늘 이스라엘이 경험한 전쟁의 패배와 비극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있고, 심판은 하나님의 장중안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렇게 홉니와 비느하스는 심판 받았고, 그들을 용인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됩니다. ㅠ 참으로 비극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맥의 메세지를 뒤로하고 잠시 문맥적 메세지를 떠나 이런 생각에 머무르게 됩니다.

    1

    왜 신앙인은 실수하고 ,실패하고, 어려운일을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서 하나님을 찾는가?!? 이스라엘 백성은 4000명 죽고나서야 ‘언약궤’를 찾습니다. 실패하니 그때서야 하나님 생각이 납니다. 교만이고, 어리석음이고, 착각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기복신앙이고, 원시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이라면 이는 ‘건강한 관계의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인 상호 관계를 허락하셨고, 맺고 싶어 하십니다. 일방적이지 않은 교제(?)되어지는 참된 관계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를 자꾸 ‘원시신앙, 기복신앙’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용합니다.

    건강한 관계, 진실된 관계는 필요할때만 찾지 않습니다. 간헐적인 만남을 갖는 관계가 아닙니다. 목적과 계산이 필요한 관계가 아닙니다. 잊었다가 기억했다가 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나의 유익과 만족을 위해, 나의 성공을 위해 하나님을 사용하려는 기복/원시 신앙을 버리겠습니다.

    2

    세상은 하나님을 오해합니다. 블레셋은 처음에 ‘언약궤’를 필두로 돌아온 이스라엘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두러워 하는 것입니다.. 역사속에 기록된 ‘애굽을 심판한 하나님’도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마음을 굳세게 먹고 붙어보니 자기들이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도 빼았습니다. ‘아! 하나님도 별것 아니구나!’ 그렇게 블레셋은 하나님을 오해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일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의지입니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 특별히 홉니와 비느하스를 심판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잠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조율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역사는 ‘블레셋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과정’입니다.

    그러니 자칫 환경과 상황으로 하나님을 판단한다면 누구나 하나닝믈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되면 하나님을 믿지 않게되고, 믿었다가 떠나게 되고, 혹은 더 나가서 하나님을 가볍게 보게 되기도 합니다. (블레셋처럼 말입니다)

    나와 내 주변의 삶에 일어나는 상황과 환경으로 하나님을 쉽게 오해하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내려 놓아야합니다. ‘실패든 성공’이든 모든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조율 안에 있습니다.

    당장 눈 앞에 일어나는 승리가 승리가 아닐 수 있고, 실패가 실패가 아닐 수 있습니다. 성공이 축복이 아닐 수 있고, 망함이 저주가 아닐 수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이든 ‘전능하신 하나님’은 변하지 않고 ‘만유의 주재’되신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굳은 심지의 믿음, 이것이 필요한 아침입니다. 아멘!

    오늘의 기도

    바우 교회가 함께 모여 주일 공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진정한 예배가 되게 해주시고, 새로운 성도들을 보내주시고, 찬양과 말씀과 교제가 모든이를 새롭게 하는 특별한 은혜가 있게 해주시고,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교회 되게 해주세요! 아멘

  • 012823 삼상 3:15-21

    1

    잠못드는 밤이 있습니다. 내일 해야할 ‘사역’ 때문에 생각이 많습니다. ‘사역’ 쉽지 않을수록 잠못드는 밤은 늘어만 갑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설레(?) 일입니다. 그런데 어린 사무엘의 경우 막상 듣고 보니 ‘설렘’이 아닌 ‘두려움’이었습니다. 이제 내일 해가 뜨면 오늘 밤 하나님께 들었던 이 무시무시한 메세지를 나의 ‘아버지’와도 같은 엘리제사장에게 고해야합니다. 사무엘이 내일 감당해야할 ‘사역’은 이렇게 어려운 사역입니다. 그는 어쩌면 (나와 같다면) 잠못드는 밤을 보냈을 것입니다.

    내 앞에 놓인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힘든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이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일이지만 여전히 감당하기 어려운 사명들이 있습니다. 잠들기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의 해가 뜨고, 사명을 감당해야할 날이 밝으면 용기를 내서 걸어나가야합니다. 할 일을 해야합니다.

    오늘도 나에게 맡겨진 ‘사역’은 두렵기만 합니다. 이 사역이 무겁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앞이 캄캄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더딘것 같고, 방법이 딱히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순간순간 나를 사로잡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린 사무엘이 그 모든 ‘두려움’을 넘어 사역을 감당한것처럼 나에게 맡겨진 이 ‘교회’라는 사역을 감당해야겠습니다.

    2

    잠못드는 밤이 있습니다. 엘리는 어린 사무엘을 하나님께서 부르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담부터 잠이 안옵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가? 왜 나를 부르시지 않고 어린 사무엘을 부르는 것인가? 이렇게 세대는 지나가고, 얼마전 한 예언자로부터 들었던 하나님의 저주의 예언이 시작되는가? 이게 정녕 끝인가?!’ 엘리는 생각과 걱정이 꼬리를 물며 잠 못드는 밤을 보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엘리의 속도 모르고 그렇게 아침이 밝습니다.

    아무리 걱정하고, 아무리 생각이 많은 잠 못드는 밤이라고 해도 결국은 ‘걱정하던 바로 그 내일’은 찾아 옵니다. 걱정을 하든 안하든, 생각이 많든 안 많든 ‘내일’은 기어코 ‘오늘’이 됩니다.

    그래서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밤에, 생각과, 걱정이 꼬리를 무는 밤에-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을 대면하여 대화하고 있는것처럼-나도 걱정이 아닌 기도의 자리를 세워야합니다. 내일까지 미룰 것도 아닙니다. 걱정으로 밤을 새고, 걱정으로 새 날을 마주할것이 아니라, 걱정의 밤에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문제를 대면하고, 걱정을 토로하고, 잘못한것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기로 결정합니다. 엘리는 그저 두려움과 걱정으로 밤을 보냈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3

    어린 사무엘은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함에 있어서 가감이 없습니다. 개인적 해석이 난무하고, 덧붙이고, 생략하고, 악마적/작위적 편집으로 본질을 바꾸는것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오늘날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들은데로 가감없이 전합니다.

    사무엘은 그렇게 하나님의 인정받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이스라엘의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귀로 들었고, 나는 손에 쥐어진 성경으로 듣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전했다면 목자이며 설교자인 나도 성경 말씀을 가감없이 전해야합니다. 성경에 메세지에 더하고, 빼며, 비약하고, 생략하고, 이기적이고, 상황적이며, 작위적인 해석들을 조심 또 조심해야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오늘도 깊은 잠을 자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허락하신 오늘 감당해야할 사역을 건강하게 감당하게 해주세요. 말씀을 준비함에 있어서 더욱 철저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지혜와 메세지로 입술에 담게 해주세요! 이 ‘광야’ 같은 땅에 하나님의 메세지를 외치는 ‘목소리’가 되기 원합니다. Let me be your voice on the wilderness! 아멘

  • 012723 삼상 3:1-14

    1

    분별할 능력은 엘리에게 있습니다. 분명히 경험과 지식도 엘리가 월등합니다. 오늘 본문도 보면 (세번만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먼저 파악하는것은 엘리지 사무엘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중요한 ‘하나님의 메세지’는 능력과 경험과 지식이 있는 엘리,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한 엘리에게 들려지지 않고, 아직 어리고, 능력도 없고, 지식과 경험이 일천한, 하나님의 부르심 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어린 사무엘에게 들려집니다.

    하나님의 메세지는 소위 말하는 능력과 분별, 지혜와,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들려지는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능력과 경륜이 있는자랑만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검증된 사람’을 선호하지만 하니님은 ‘주님께 집중된 사람’을 선호합니다.

    하나님은 ‘듣는 사람’ 또는 그 마음이 준비되고 (여호와의 전에 거하고 있는) 능력이 없어도 하나님께 집중된 사람을 통해 말씀하시고 일하십니다.

    ‘어린 사무엘’이 되고 싶습니다. (실제로 ‘위대한 목사’들에 비하면 저는 ‘어린 사무엘’이 맞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이 시대에 하나님의 메세지를 듣고 선포하며 전하는 ‘어린 사무엘’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주의 전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2

    시청등급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볼수있는게 있고, 어린 아이들이 볼수 없는게 있습니다. 말그대로 ‘청소년 관람불가’ 입니다. 아직 그들이 내용을 소화시킬 능력이 안된다고 판단하는것입니다.

    사무엘은 어립니다. 아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본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린 사무엘에게 들려지는 하나님의 메세지는 “안녕! 반가워!” 가 아닙니다. 첫 메세지임에도 ‘청소년 청취불가’에 가깝습니다! 한 집안의 몰락이며 저주입니다. 강력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톤 자체가 벌써 무섭습니다. ‘메세지의 경중’을 생각했을때 이는 어린 사무엘이 기대하거나 소화할만한 그 무언가가 아닌것 같아 보입니다.

    도전적(?)인 영적 원칙을 하나 나열해보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메세지는 ‘내가 듣고 싶은것’을 듣는 시간이 아닙니다. 항상 좋은 말만 선포되는것이 아닙니다. 내가 들을만한 준비가 되었을때 하나님의 메세지가 들려지는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메세지는 하나님의 때에 선포됩니다.

    이 영적 원칙을 모르면 들어도 듣지 않습니다.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들어도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들어도 모른척 해버립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듣기 싫고, 무섭고, 찔리고, 깜짝 놀랄만한 메세지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준비 안된것 같은데 깨닫고도 너무 놀랄만한 메세지를 주시는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향한, 가족을 향한, 공동체를 향한, 교회를 향한, 사회와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메세지가 선포될 때 수용하고, 깨닫고, 전하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부르실때 사무엘도 됐다가, 니느웨에 회개를 선포하는 요나도 됐다가, 다윗의 죄를 들추는 나단도 됐다가, 회개를 선포하는 세례요한도 돼야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엘리’가 아닌 ‘사무엘’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주의 전’에 거하며 하나님의 음성에 집중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메세지를 수용하고 세상 가운데 가감없이 선언하는 설교자 되게 해주세요! 실족하지 않는 목회자가 되게 해주세요! 아멘

  • 012623 삼상2:22-36

    1

    당장 개입하지 않으면 죄는 점점 커집니다. 제사 음식을 집어먹던 엘리의 아들들은 ‘그 때’ 개입하지 않았더니 어느덧 성적인 타락을 하기 시작합니다.

    간혹 조그만 상처를 그냥 두고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점점 염증이 커지고, 고름이 생기고, 어느 순간 보니 썩어가는것 같습니다. 큰 일이다 싶어 병원에 가서 의사선생님에게 말합니다. “선생님! 제발 제 팔좀 고쳐주세요!!”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굳은 표정으로 말합니다.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 팔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최선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치료’ 할수 없습니다. 때를 놓쳤기 때문에 ‘잘라내는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의사되신 하나님의 판단은 ‘잘라내기!’ 입니다.

    죄가 더 커지기 전에, 더 치명적이기 전에 개입해야합니다.

    한국 사회를 보면 ‘왕따’, ‘일진’ 등의 문제로 학교들과 사회가 떠들석 합니다. 분명히 족히 수십년은 됐을 법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교사들이, 학교가, 사회가 ‘당장’ 뛰어들지 않았더니 이 문제가 커져서 더이상 걷잡을 수 없이 되었습니다. (바로 잡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문제는 사회, 개인, 가정, 교회 안에 비일비재 합니다.

    당장 대면하고 치료해야합니다. ‘너무 늙어서’까지 기다리면 결국 엘리 같이되고, 엘리의 자녀들같이 됩니다. (죄를 지은 엘리의 자녀들만 심판 받는게 아니라 엘리까지도 멸망되는것입니다. 마치 ‘일진 학생’들과 ‘피해자’만 어려움을 당하는게 아니라 사회 전체와 분위기가 어려움을 당하는것과 같습니다)

    당장 죄를 대면해야합니다. “내가 어떻게 이런 짓을 했지?” 나의 죄에 개입해야합니다. 가만 두면 죄는 결국 나를 죽이고 말것입니다.

    2

    둘째 딸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습니다. 너무 예쁩니다 (팔불출이여서 죄송합니다 ㅋㅋ) 그런데 유독 이 아이가 이쁜 이유는 자꾸 와서 앵깁니다. 제가 움직이면 옆에서 기어서 따라 옵니다. (물론 엄마가 옆으로 지나가면 엄마를 따라갑니다 ㅋ) 아무튼 자꾸 앵기고, 따라오고, 다리를 붙잡고 있습니다. 컨디션이 좋을때는 교회의 성도님들과 방문객들에게도 잘 안겨있고, 따라가고, 웃어줍니다. 그러니까 엄청 귀여움 받고 사랑받습니다. 하나가 그렇게 점점 자라매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가(둘째딸) 앞으로도 계속 같이 걷고, 앵기고, 옆에 있으며 사랑받는 자녀가 되길 소망합니다.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26절) 그런데 여기서 ‘자라매’는 원어적 의미로 보면 ‘가다, 걷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더 나가 ‘동행하다’ 라는 뜻도 있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자라면서 ‘정도’를 걷습니다. 또한 사람들 곁에 함께 걷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마치 에녹과 같고, 아브라함같고, 모세 같습니다. 하나님께 ‘은총’을 받는것은 결국 하나님과 함께 걷는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자라게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저도 하나님의 시선 안에서 ‘사무엘’이고 싶고 ‘하나’이고 싶습니다. 항상 주님과 동행함으로 ‘점점 자라나는’ 자녀되길 원합니다. 그분과 동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듬뿍받는 자녀가 되고 싶습니다. 또한 주변에 이웃들 편에 서고, 그들과 함께 걸어주며 그들에게 은총을 받는 목자 되길 원합니다.

    오늘의 기도

    ‘사무엘’이 필요한 시대이며, 필요한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이 땅에서 오스틴을 위한 ‘사무엘’이 되게 해주시고, 이 세대를 위한 ‘사무엘’이 되게 해주세요. 죄를 당장에 끊어내게 하시고,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속에서 건강하게 자라는 자녀가 되게 해주세요! 하나님과 이웃에게 사랑을 주고 받는 신앙인 되게 해주세요! 아멘

  • 012523 삼상2:12-21

    1

    자리가 신앙을 만들고, 환경이 자동적으로 건강한 신앙을 주는것은 아닙니다. 저는 목회자의 자녀로 살지 않았지만 저의 두 딸은 ‘목회자의 자녀’로 살고 있습니다. 확실한것은 이들이 ‘목회자의 자녀’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건강한 신앙인’이 되는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두 딸이 자주 교회 오고, 심지어 ‘섬기는 삶’을 산다고 해도 그것이 이들의 믿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목사’가 ‘건강한 신앙’을 보장하는것이 아니라는것도 알고 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모든 환경과 상황과 배경이 ‘건강한 신앙’을 위한 최고의 환경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 완악한 자들보다 더욱 악한 사람들이었고, 신앙을 오히려 자신들의 이익과 쾌락을 위해 사용한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자주 나오는 것으로, 교회 안에서 섬기는 ‘사역의 감투’로 신앙이 증명되지 않습니다. 진심이 없는 허울의 신앙은 거짓되고 역겹기 마련입니다. ‘허울의 신앙’은 하나님께는 관심이 없고, 알고 싶지도 않고, 심지어 무시합니다.

    ‘신앙의 지위’로 신앙생활 하지 않겠습니다. ‘신앙의 감투’를 나의 쾌락과 만족을 위해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환경과 상황을 핑계로 자녀의 신앙을 돌보지 않는 실수를 멈추겠습니다. 하나님을 아는데 힘쓰겠습니다. 그분을 경외하겠습니다.

    2

    제 입장이 그래서 그렇겠지만 엘리 제사장이 자꾸 눈에 걸립니다. 그에게 나를 투영하게 됩니다. 어린 전도사 시절이 생각납니다. 청년 성도님이 교회에 찾아옵니다. 따듯하게 환대합니다. “잘지내졌어요?! 요즘 별일 없으시구요?” 일상의 대화가 따듯하게 이어집니다. 대화 가운데 성도님이 말씀하십니다. “요즘 부모님 사업 때문에 문제들이 있네요 전도사님 좀 기도해주세요!” 그렇게 대화가 끝날때쯤 온 마음을 다한 기도로 만남을 마무리합니다. 그 청년에게 저는 세상 따듯한 전도사이고, 가족에게 축복이 되는 그런 전도사입니다. 그런데 그때 막상 우리 집은 ‘빨간딱지’가 붙고 아버지, 어머니는 심신이 지쳐갈 때였습니다. 밖에서는 세상 따듯하게 기도해주던 ‘전도사’였지만 집만 오면 입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버리는 못난 아들이었습니다. 망해가는 집을 보고 싶지 않았고, 심신이 지쳐 쇠약해져가는 부모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참 어리석고, 못났고,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겉만 번지르르한 ‘바리세인’의 모습입니다. ‘회칠한 무덤’입니다.

    엘리가 그렇습니다. 엘가나와 한나에게는 세상 따듯한 목사입니다. 일상의 대화를 나누고 축복하며 “당신에게 더욱 자녀의 축복이 있을꺼예요!” 기도합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의 아들들은 나몰라라 입니다. 자녀들의 행태를 온 마을이 압니다. 그러니 엘리 제사장이 모를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자신의 자녀들에게 쏟아야할 관심과 의무를 다하지 않습니다.

    목회자의 이중생활 입니다. 밖에서는 좋아보이는데 안에서부터 썩어 들어가는것입니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경험했고 아직도 경험하고 있는 일입니다. 저도 자칫 잘못하면 빠질수 있는 위험입니다. 엘리 제사장을 보며 정신 차려야겠습니다. 건강한 신앙으로 가족과 공동체를 사랑하고 섬기는 목자가 되야겠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중생활을 하는 성도님들이 계시다면 ‘엘리의 발자국’을 따르지 않게 되기를 도전합니다.

    오늘의 기도

    엘리와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가족을 더욱 사랑하고 신앙의 열심을 내는 목사가 되게 해주세요! 환경과 상황, 지위와 신앙의 감투로 내 신앙이 증명되지 않습니다. 오늘의 건강한 신앙을 살아내게 하시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하루 되게해주세요! 아멘

  • 012423 삼상2:1-11

    1

    “never say never” 이런 말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계속 ‘never’를 말합니다. 원어적 톤을 함유해서 해석해보자면 한나의 고백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처럼 거룩하신분은 없습니다. 예외란 없습니다. 하나님같은 분은 없습니다. 예외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같은 반석 되시는 분은 없습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한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절대성’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면에서든 대체불가 입니다.

    ‘대체불가’의 영역을 다른 것을 대체했을떼 발생하는 문제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아내와 남편을 다른 남자와 여자로 대체하면 ‘불륜’이 되고 건축자재를 시멘트에서 모래로 대체하면 건물은 무너집니다. 음식을 함에 있어서 소금을 같은 하얀색이라는 이유로 설탕으로 대체하면 음식은 버리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역은 ‘절대 대체불가’ 영역입니다. ‘거룩’을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다른 기준으로 대체하면 그때부터 나의 거룩은 무너집니다. ‘하나님’을 다른 ‘돈’으로 혹은 ‘인맥’으로 혹은 ‘능력과 배경’으로 대체하면 그때부터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반석되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기 시작하면 조그만 문제 앞에서 쉽게 붕괴되는 삶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 같은 분은 절대 없습니다. 그분은 절대 대체불가한 분입니다. 나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를 단호하게 끊어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대체하려고 할때마다 대차게 망했던것을 기억합니다.

    2

    한나는 ‘전능’과 ‘반전’이라는 키워드를 경험합니다. 생명의 잉태는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면 응답할수없는 기도 입니다. 그런데 응답하셨으니 하나님의 ‘전능’을 경험하게 됬습니다. 한나는 엘가나의 또다른 아내 브닌나와 상황적 원수의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인하여 고난당하던 위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나에게 아들을 주심으로 인해서 그 ‘불리한 상황’을 역전하셨습니다. 한나는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관통하는 ‘전능’과 ‘반전’의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나의 찬양이 “아들 주셔서 감사합니다!”가 아닙니다. 그녀의 기도는 더욱 크고, 넓고, 깊고, 통찰이 있습니다. 자신에 경험에 기인하여 하나님이 모든 영역에서 전능하시고, 모든 영역에서 주관자이시며, 모든 영역에서 반전이 가능하신 분이심을 찬양하는것입니다. 한나의 찬양은 자기자신(개인)에게 국한되어있지 않고 본질을 포괄하는 찬양입니다.

    결국 ‘사무엘 잉태와 탄생’의 사건으로 한나는 앞으로 인생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반전의 하나님이심을 믿게 되는것입니다. 이 믿음이 바로 오늘 본문에 기록된 한나의 기도이며 찬양입니다. 한나는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아는 신앙인입니다. 그런데 한나처럼 보지 못하면 오늘 ‘전능’과 ‘반전’의 하나님을 경험했는데 내일 다른 문제를 만나면 또 다시 의심하고, 고꾸라지고, 포기하고, 비난하고, 원망합니다. ‘case by case’ ’의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믿음의 문제’ 앞에 하나를 배우면 하나만 보았기 때문에 “너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혹은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하겠느냐!” 라는 책망을 듣게 된것입니다.

    저는 인생의 문제와 어려움 앞에서 이미 전능의 하나님과 반전의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인내의 하나님, 거룩의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자비의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공급의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도 경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어려움들 앞에서도, 문제가 다양하고, 변화무쌍할지라도, 그 문제의 무게가 크고 작든 상관없이 이제는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는 신앙인으로 살것입니다.

    전능하시고 반전에 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찬양합니다. 아멘

    오늘의 기도

    내 인생에 하나님 같은 분이 없습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내 호흡이고, 내 생명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비전이고 꿈입니다. 이 모든 일을 앞서 준행하시는 전능과 반전의 하나님을 믿고 오늘도 승리의 삶을 살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의 주가 되어주심에 감사합니다. 아멘

  • 012323 삼상1:19-28

    1

    한나가 임신하고 출산한 사건은 한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중에 하나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성경은 한나가 임신하기 전의 마음과 일련의 사건을 나름 상세히 기록합니다. 아이의 탄생 이후도 상세히 기록합니다. 그런데 막상 한나가 임신하고 아이를 낳는 사건은 20절 한절로 기록하고 끝납니다. 임신했을때 한나의 감격, 10개월간 그녀가 하나님께 드렸을 감사와 기쁨넘치는 삶, 그리고 아이가 탄생했을때 느꼈을 형언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에 대한 기록도 없습니다. 한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인 ‘임신과 출산’의 과정과 감격이 생략되어 있는것입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이요, 가장 의미있는 순간입니다. 기록한다면 가장 길고 상세하게 기록되어야할 순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순간을 지나 다른 순간에 집중하십니다. 예컨데 학생은 대학을 입학한 순간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감격적이고 의미있는 순간이라 생각하지만 세상은 그가 대학을 가서 이뤄내는 배움과 이후의 삶에 더 초첨을 맞춥니다. 실제 본인이 이후에 자서전을 쓴다고하면 본인도 아마 ‘대학입학’을 하나의 짧은 챕터로 넘어가거나 혹은 한줄로 넘어가거나 혹은 아예 기록을 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ㅋ

    너무 내 중심으로 인생의 중요성을 나열하다보면 거기에 머물게 됩니다. ‘임신과 출산’이 인생이 전부가 되면 사무엘 낳고 나서 다음이 없습니다. 그냥 아이를 품에 안고 애지중지 하며 삽니다. ‘서원’ 잊어버립니다. 모른척합니다. 아이에게 집착하고 아이 중심으로 살게 됩니다.

    ‘중요한 사건’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에 묶이면 다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속도가 늦어지고, 방향이 흔들립니다. ‘중요한 사건’이 새로운 시작에 발판이 되어 다음으로 도약해야합니다. 의미를 두되 의미에 함몰되지 않아야겠습니다.

    ‘개척’ 사건은 중요하지만 시작에 불과합니다. 요즘 고민은 ‘개척’이라는 단어를 언제 땔것인가 입니다. ‘개척교회’가 아닌 ‘교회’로써의 정체성을 놓고 달려갑니다. ‘그 후’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사건’에 머물지 않고 더욱 중요한 사건을 향해 달려나가는 멈추지 않는 사명자가 되기로 결정합니다.

    2

    어린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한나와 하나님 사이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관련 있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아버지 엘가나 입니다. 사무엘은 한나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엘가나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또 이 어린 아이를 받아주는 것은 누구입니까? 엘리입니다. 엘리가 어린 사무엘을 달라고 한것도 아닙니다. 입이 하나 늘었습니다. 생각지 못하게 손이 가는 동거자(?) 하나가 생긴것입니다. 또 어린 사무엘입니다. 본인의 의지로 결정한게 아닙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께 드린 서원이 많은 인물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서원’을 행하면 나의 신앙이 언뜻 위대해보입니다. 그런데 사실 주변의 도움과 협력도 큰 부분을 차지 합니다. 저의 어머니를 시작으로 서원된 제 인생은 6학년때 제 자신이 서원함으로 이어져왔습니다. 그리고 저의 서원을 지키기 위해 목회자가 되었을때 이를 위해 아내가 같이 협력해주었습니다. 개척을 할때도 하나님께 드린 나의 서원이지만 이 서원에 나의 아내와 자녀들이 협력해주었습니다. 그들의 의지와 서원은 아니지만 그들의 협력이 없었다면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서원’을 지키며 교만하고, 으쓱하고, 대단하다는 착각은 경계 해야합니다. 나의 ‘서원’에 함께 동역해주고 협력해주는 나의 동역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기억하는 하루가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서원’이 동역과 협력으로 실천되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한주간도 승리하게 해주세요! 바우교회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동역과 협력의 성도들을 축복하시고 우리가 함께 드리는 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일이 이뤄지고 영광이 드러나게 해주세요! 간구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신 하나님을 다시 한번 찬양합니다. 아멘

  • 012223 삼상 1:9-18

    1

    과거를 돌이켜보면 새벽 예배가 끝나고 나면 개인 기도시간으로 이어지는데 한참동안이 지나도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걔중에는 계속 몸을 흔들며 소리를 내며 기도하는 분들도 계셨지만 가끔 옆을 가보면 그냥 누워 계시는 분, 또 졸고(?) 계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간혹 필요에 따라서 그분들 어깨를 건드리며 ‘성도님 이제 일어나서 가셔야죠!’ 할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잔거 아닙니다! 기도하고 있었어요!” 그러면 전 대답하곤 했습니다. “아 네!! 안녕히 돌아가세요!”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도님들의 그 말, “저 잔거 아니예요 기도한거예요!” 그 말을 믿었다면 기도제목을 묻거나 아니면 적어도 엘리처럼 “간구가 응답되길 원합니다!” 라는 격려와 축복의 말을 해줬을 것입니다.

    엘리를 보며 많은 회개를 하게 됩니다. 엘리도 잘한게 없습니다. 사실 이미 그의 영성이 ‘제사장’으로써의 그 수준이 아닌듯 합니다. 성경에 보면 엘리가 분명 한나의 ‘입’을 ‘주목’했다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한나에 대해 내린 결론은 ‘술취함’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한나가 한두번 기도했을까? 싶습니다. 그녀의 간절함이 오늘 본문에 보여지는 그 한번 이었을까? 생각해보면 아닐것 압니다. 그러나 엘리는 ‘제사장’으로써 한 영혼을 향한 ‘주목’이 없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결론을 내려 버립니다. 마치 제가 그런 실수를 하는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정신이 바짝 듭니다. 회개해야겠습니다. 영혼을 향한 ‘주목’이 진심이어야겠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의 눈물과 상황을 꽤뚫어보는 사랑을 담은 ‘주목’을 실천해야겠습니다.

    또한 쉽게 말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엘리는 자신의 판단으로 결론을 내린후 마치 그것이 사실인것처럼 한나에게 말합니다.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한나에게 어떤 상황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서둘러 결론을 내려버리는것입니다. 그러한 사실확인이 안된 얘기로 한나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을 내 뱉는것입니다. 목사인 제가 간혹 하는 실수 입니다. 사실확인도 안된 나만의 판단으로 성도에게 상처가 될만한 말을 합니다. 아버지인 제가 간혹 하는 실수 입니다. 상황파악도 정확하게 못하고 아이에게 판단하고 결론지어 상처주는 말을 합니다.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판단한 후에 단언하는 말로 내뱉고 상처줍니다. 섣불리 결론 내리고, 판단하고, 가벼이 내 뱉는 말들을 조심 또 조심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다행인것은 엘리는 한나의 말을 들은후 얘기합니다. “평안히 가라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는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한다!” 그래도 엘리는 저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입니다. 단지 말뿐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상한 심령인 한나의 마음에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을 해줍니다. 어디까지나 응답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축복의 말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격려와 소망의 말은 우리도 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진심을 담아 대화하고, 듣고, 함께 소망하고, 축복하고 격려하는 말로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목회자가 되야겠습니다.

    2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지만 아들이 없던 제 어머니는 하나님께 “아들을 주시면 사무엘과 같이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서원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어릴적부터 저에 귀에 못히박히도록 반복됐습니다. “너는 사무엘과 같은 아들이야! 너는 목사가 될꺼야!” 제가 기억하는 선 안에서 ‘장래희망’을 써낼때 ‘목사’라고 써낸 나이가 초등학교 2학년때입니다. 그리고 이후 신앙안에서 자라고 또 자라 어느날 목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서원하는 힘과, 그 책임감을 믿습니다. 한나의 서원은 이스라엘 역사에 참 귀한 인물의 탄생의 서막이 됩니다. 귀한것은 한나가 서원한데로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냥 감정과 마음의 간절함에서 쏟아내고 응답받은 이후에 모른척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차후에 계속 삼상을 묵상하면 곧 또 다시 나올 얘기 입니다.

    하나님께 서원하면 지켜야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있어 진심인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약속을 저버리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께 ‘약속’하면 하나님께서도 기대하십니다. 하나님께 ‘약속’은 그런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돌아보며 ‘서원’의 순간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잘 넘어갔다’ 생각했던 서원이 불현듯 떠올랐다면 지켜야할 때입니다. 책임감을 가지고 지켜야합니다.

    저에게는 서원이 ‘목사’고, 서원이 ‘교회’입니다.

    하나님께 드렸던 ‘서원’이 책임감 있게 지켜질때 하나님의 뜻이 더욱 풍성하게 성취되는 일을 목도하게 될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앞에 오늘도 정한 마음으로 섬기고 충성하게 해주세요. 복된 주일입니다. 성심의 예배를 드리게 하시고 바우 교회에 성도의 부흥이 있게해주시고, 믿음이 교제가 이뤄지게 해주시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하루 되게 해주세요! 올바른 목회자로써의 마음과 행실을 잊지 않고 실천하는 하루 되게해주세요! 아멘

  • 012123 삼상 1:1-8

    1

    엘가나는 두 아내가 있습니다. 그리고 두 아내 사이에서 편애가 심합니다. 이러한 편애는 결국 두 아내 사이를 “적수”로 만들어 버립니다. 가족일 수 있는데 (사실 가족이여야합니다) 그러나 ‘적수=원수’가 되어있습니다. 거기에 브닌나는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빌미로 더욱 한나를 괴롭게하고, 남편은 아무것도 모르는것처럼 한나를 더욱 편애하고 더욱 선물도 주고 신경 씁니다. 그러나 한나가 가진 본질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엘가나도 이런 상황이 답답합니다. 한나에게 토로합니다. “왜 울며 먹지 아니하느냐? 내가 열 아들보다 낫게 해주고 있지 않느냐?”

    아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아픈 가정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는데 서로 이기적으로 사랑합니다. 서로의 아픔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돌보고, 자신의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 공격하기도 합니다. 남몰래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가정 안에서 이런 일을 비일비재 합니다. 아빠는 나름의 노력으로 가정의 평화를 가져오려고 합니다. 돈벌려고 바쁘게 일합니다. 가정이 힘들어하면 이렇게 토로합니다. “내가 지금 나 좋자고 이래? 내가 돈 많이 벌어다 주잖아!!! 내가 놀아?” 아내는 삶의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남편이 있어도 외롭고 자식이 있어도 외롭습니다. 선물도 주고, 잘해준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마음이 흔들거리고 힘듭니다. 자녀도 사랑한다고 하면서 부담주고 조정하려는 부모 때문에 그 마음이 흔들립니다. 형제 자매 사이도 부모의 ‘편애’ 때문에 ‘적수’가 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습니다.

    서로 잘해보려고 하는데, 나름의 방법으로 노력하지만, 또 살아보려고 하지만 결국은 그것이 서로에게 비수가 되어 상처를 주고 겉으로는 ‘가족’인데 알고보면 ‘적수의 공동체’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가족구성원이 서로를 사랑한되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편애하지 않는것! 나의 입장과, 나름의 방법이 아닌 서로의 말과 마음에 귀 기울여주고 서로를 위해 행동하는 것! 가족 안에서도 경쟁이 일어날 수 있지만 파괴의 경쟁이 아닌 선의의 경쟁, 혹은 서로 발전되는 건강한 도전을 하는 것! 위로와 격려와 사랑과 베려와 하나됨이 있는 가정! 이러한 가정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간혹 아내가 “둘째만 너무 사랑해!” 라는 농담반, 진담반의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첫째아이가 간혹 서운해 하기도 하고 “아빠는 하나만 좋아해!” 라는 말도 합니다. “아빠는 하나한테는 화를 안내!” 라는 말도 합니다. 나의 사랑이 가족 모두에게 건강하고 충분하게 경험될수있도록 더욱 사랑하고, 가족을 건강하게 하나로 품는 아빠가 되야겠습니다.

    아내와 두 딸을 더욱 사랑하겠습니다. 내 방법이 아닌 그들의 기대와 마음을 관심같고 더욱 사랑하겠습니다. 분열이 아닌 하나가 되는 가족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2

    지금 자식이 없는것이 ‘수치’ 아닙니다. 그런데 그때는 그랬습니다. 자식이 없는것이 곧 ‘신의 저주’같이 여겨졌습니다. 큰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확실한것은 한나에게 자녀가 없는것은 하나님의 의지 였다는 사실입니다. 가져야하는것, 마땅히 있어야하는것, 나를 수치에서 건져줄 반드시 필요한 그 무언가가 내게 없다면 참 슬픕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더더욱 슬프게 느껴집니다.

    어릴적 처음 목회를 시작하면서 ‘찬양인도’를 할때 이런 말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전도사님은 목소리가 참 특이해요!!” (최대한 예의있게 말해준 피드백이겠죠! ㅋㅋ) 사실 제 자신이 느끼던 바라 저도 힘들어 하고 있던 사역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목도 약해서 매일 쉬기 일수였습니다. 그래서 간혹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찬양인도자 만들어 달라고 한거 아니잖아요!! 교회가 필요해서 섬기는데 제게는 왜 가수들 같은 노래 실력과 목소리를 주지 않으셨나요?? 왜 제게 그런 탁월한 은사와 실력을 허락하지 않으셨나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기도가운데 항상 이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내가 허락한것이 네게 족하도다!” ㅋㅋㅋ 그리고 딱 ‘그 정도의 은사’로 교회 안에서 찬양인도만 15년 가까이 했습니다 ㅋㅋㅋㅋ

    인간적으로는 ‘수치스러운 능력’이라는 생각을 한적이 많습니다. 이정도면 ‘찬양’으로 섬기면 안되는거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오늘날 까지도 찬양하고 있습니다 ㅋ 그리고 누군가는 “은혜롭습니다!” 격려하고 응원해줍니다. 할렐루야!

    한나가 임신하지 못함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는 그녀에게 수치였습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한나의 아이는 하나님께 ‘서원된 아이’가 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한나의 태를 여시고 ‘서원된 아이’ 즉 사무엘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중요한 사사요, 선지자요, 예언자를 허락하십니다. 이는 이전의 ‘수치’를 다 덥고도 남을 엄청난 축복입니다.

    이 시대를 살면서 ‘마땅히 있어야하는것’이 지금 업다고 해서, 내가 필요한것이 당장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고 해서, 나의 기대보다 내 능력과 상황이 떨어진다고 해서 수치스럽게 여길 필요 없습니다. 배경, 학력, 능력, 인맥, 출신이 시대의 기준에 미치지 못해 ‘수치’스럽게 여겨지고 있다고 해서 나의 삶이 의미가 없거나 실패한 인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며, 인내하고 그 길을 걸어갈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필요한 것을 허락하시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줄로 믿습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바우 교회가 아직 성도들로 가득 채워지지 않았지만 한나처럼 ‘격분하고 슬퍼할’것이 아니라, ‘브닌나’같은 교회를 보며 마음에 요동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섭리와 때를 믿으며 기쁨으로 섬기게 해주세요! 오늘도 행복하게 가정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는 하루가 되게 해주세요! 아멘

  • 012023 빌 4:14-23

    1

    지난 주일 설교에도 잠시 등장했던 얘기가 있습니다. 주중에 설교준비중에 한 목사님께 연락을 받았습니다. 터키에서 저에게 돈을 보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터키 단기선교를 몇번 다녀오면서 보았던 형제였습니다. 그분이 저의 sns를 보고 교회 개척을 알게되고 이에 동역하기 위해서 헌금을 한것입니다. 액수는 100텔레였습니다. 미국달러로 환산하면 현재 약 6불 정도의 액수였습니다. 이 얘기를 듣는데 얼마나 감동이 되는지 아직도 그 전화기 너머를 통해 이 소식을 들을때의 감격과 기쁨을 기억합니다. 액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마음과 동역 그리고 ‘두렙돈’의 헌신에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바울처럼 감옥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처럼 ‘도움’이 필요한 상황은 맞습니다. 이때 터키의 한 형제가 제게 ‘빌립보 성도’가 되어 도움을 준것입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공급의 하나님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아멘

    지난 5개월 교회개척의 시간동안 ‘터키형제’ 뿐 아니라 정말 많은 분들이 동일한 마음으로 ‘빌립보성도’를 자처하며 헌금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분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 풍성한 대로 교회의 모든 쓸 것과, 우리 가정의 모든 쓸 것을 채워주셨습니다. 모든 후원자들에게 감사하고, 모든 동역자들에게 감사하고 무엇보다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

    “오직 여러분의 봉사에 열매가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사역과 섬김에 결실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열매’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섬김’만큼 중요한것이 꾸준함과 성실을 통해 얻어지는 ‘열매’입니다. 간혹 시작은 하지만 ‘열매’를 보기 전에 멈춰버리는 섬김을 봅니다. 시작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열매를 얻는 순간까지 꾸준해야겠습니다. 아무리 땅을 개간하고 씨를 뿌려도 그 이 후에 물을 주고, 잡초를 뽑는 수고를 이어가지 않으면 그 농사를 통해 열매 맺기가 힘들어 집니다. 끝까지 사명을 감당해야겠습니다.

    이 말씀을 개역개정으로 보면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결국 ‘열매’가 우리에게 유익하다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됩니다. ‘시작’이 유익한것이 아니라 ‘열매’가 유익한것입니다.

    사역을 시작해야겠습니다. 또한 시작한 사역은 열매 맺을 때까지 멈춤없이 감당해야겠습니다.

    바우교회의 열매를 보는 그날까지 화이팅입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힘을 주세요! 인내하게 하시고, 꾸준함과 성실함을 놓치지 않게 해주세요. 바우 교회에 열매가 맺는 그날까지 정진하게 해주세요! 오늘도 영육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 011923 빌4:8-13

    1

    사실 이게 정말 서운한 일입니다. 돈이 필요하고, 상황이 안좋은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면, 내가 믿었던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실망감이 큽니다.

    어릴적 힘든 상황을 마주했던 우리 가족을 도와주지 않았던 친척을 보았습니다. 슬펐고, 그 친척에 대해 마음이 불편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캐나다 가서도 생각해보면 여유가 없었습니다. 나름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경제적으로 계속 어려웠습니다. 막노동을 한적이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소개한 다른 사람을 쓰겠다며 저를 잘라내는 사장님께 느꼈던 배신감을 기억합니다.

    (사장님도 신학생, 저도 신학생, 소개한 사람도 신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서운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도움이 필요한데 왜 도와주지 않는거야?!’ 타인을 향한 원망과 배신감, 서운함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도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러나 정황을 보면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돕던(?)일을 꾸준히 하지 않았던것 같습니다. 바울 입장에서는 얼마나 서운한 일입니까?? 힘들때 도와주는게 찐(?)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힘들때 바울을 돕지 않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빌립보교회를 향해 분노하거나, 서운해하거나, 배신감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나는 기쁩니다.. 그리고 당신들의 상황도 이해합니다” (10절)

    바울은 이 ‘궁핍의 문제’를 ‘자족’으로 풀었습니다. 타인들의 도움과 후원에 의존한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자족’으로 이 문제를 풀었습니다. 그러니까 타인을 향한 배신감과 분노, 서운함에 함몰되지 않습니다.

    내가 힘들때 남이 도와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모두 나만 바라보고 있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도와줄수 있는 상황이 되는것도 아닙니다. 마음이 있다고 꼭 그게 실행되는것도 아닙니다.

    (마음만이라도 있다는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싶습니다!)

    서운, 분노, 비난, 원망, 배신감등의 감정으로 공격하는 사탄의 거짓과 술수에 넘어가지 않아야겠습니다. 도움주는 이에게 감사하고, 기대했던이가 도움 주지 못하면 오히려 그 사람의 상황을 위해 중보하고, 내 자신의 상황에 자족하는

    ‘성숙한 신앙’을 배워야겠습니다.

    2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배고픔과 궁핍에도 처할 줄 안다” 바울의 말입니다. 그는 가난할때 어떻게 살아내야하는 줄 압니다. 그 시기를 어떻게 넘어가야하는지 배웠습니다. 아끼고 자족하고 일하는 아주 간단한 지혜부터, 가난에서 오는 내면의 불만족과 걱정, 의심, 불안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배웠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난’중에도 신앙의 정도를 놓치지 않는 비결을 배웠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요함’에 처신하는 지혜도 중요합니다. 가끔 오해합니다. ‘가난함’에 대한처신법은 배워야하지만 ‘부요함’은 그냥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부요하면 모든 문제가 다 사라지고 살기 편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도 쉽게 지킬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부요한 사람'도 ‘비결’을 배워야합니다. 그걸 배우지 않으니까 낭비하고, 흐트러지고, 방탕하고, 무질서하고, 신앙에서 멀어집니다. 부요해서 하나님을 버립니다. 만족하지 못합니다.

    여유가 있을 때나, 가난할 때나, 부자 일 때나, 삶을 질서있게 살아내고, 신앙의 정도를 지키고, 자족하며 사는 비결을 반드시 배우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 가난할까요? 여유있을까요?부자 일까요? 모르겠습니다.

    한가지 확실한것은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 있다는것입니다. 자족하며 살겠습니다. 바른 신앙의 삶을 살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주변에 인생의 ‘감옥’을 경험하고 있는 이웃들이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게 해주세요! 오늘 하루도 자족하게 하시고 배풀고 나누는 하루가 되게 해주세요! 축복의 통로가 되는 하루가 되길 원합니다. 아멘

  • 011823 빌4:1-7

    1

    “부탁 좀 하겠습니다!”(3절) 

    부탁했는데 거절당하면 상처가 됩니다. 그래서 쉽게 부탁을 못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에게는 큰 고민없이 부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왠만하면 들어줄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혹여 거절당해도 내 마음에 상처가 안될 건강한 신뢰의 관계를 이미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간에 건강한 신뢰관계가 필요합니다.
    성도간에 ‘부탁’을 하고, 들어줄 수 있는 도움을 주고 받는 관계가 되어야합니다. 

    서로 ‘형제 자매’라고 부르지만 막상 부탁 하나 하려고 하면 눈치봐야하고, 서로 부담되고, 계산해야하고 망설이게 되고, 상처 받게 되게 된다면 ‘동역자’ ‘믿음의 가족’ 혹은 ‘형제 자매’라는 호칭이 부끄럽습니다. 

    저도 요즘에 부탁도 많이 받고, 부탁도 하고 있습니다. 뉴저지에서 어스틴 방문한다는 성도님들께 미안한 마음이긴 하지만 이것저것 가져다 달라고 부탁합니다. 심지어 방문하는 지인에게 ‘마해영 순대’를 요구(?)하는 궁상(?)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ㅋㅋ 

    성도님들께는 교회 섬김을 부탁합니다. 
    사역을 부탁합니다. 

    성도님들도 전화하거나 문자 합니다. 롸이드가 필요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경우 연락들 하십니다. 부탁의 연락이 오면 너무 좋습니다!!! 신뢰받고 있는것같고, 그들이 어려울때 내가 생각난것 같아서 너무 좋습니다. 거기다가 그 ‘부탁’을 들어줄 능력과 상황이되면 더더욱 좋습니다!!!! 

    성도님들의 부탁전화!! 기다리겠습니다! ^^ 

    영적인것도 부탁하고, 일상에서도 부탁하고 좋습니다!! 신뢰하고, 의지하고, 부탁하고, 도와주는 가족같은 성도 좋습니다! 성도는 가족입니다. 교회는 가족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묵상을 보시는 분들께 부탁드립니다. 바우 교회를 위해 기도를 좀 많이 해주세요! ^^성장, 부흥, 창립, 차세대 (Ft. 예배장소) 기도제목 입니다! 

    2
    살을 찌워야 할 판입니다! 자꾸 주변에서 살이 너무 빠졌다고 무슨 일이냐고 스트레스 때문이냐고, 몸은 괜찮냐고, 건강은 어떠냐고 묻습니다. 누군가 저를 모르는 분은 제가 옆에 있는데 느닷없이 저의 아내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옆에 있는 남편 한국 사람 아니죠?!”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닙니다! 저는 건강합니다. 스트레스 없습니다. 몸도 괜찮습니다. 영양제도 잘 챙겨먹고 있습니다. 

    오히려 기쁩니다. 기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오늘 아침 또 말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4절) 

    기뻐할 일이 없어도 주 안에 있으면 기쁜게 성도입니다. 뭐 딱히 기뻐할 일이 있어서 기쁜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보고 웃는 둘재딸을 보고 있노라면 저 내면 깊은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아침마다 말씀을 묵상하며 도전과 깨달음이 올때마다 영혼의 만족과 기쁨이 있습니다. 

    바우 예배 드릴때 인원이 없으면 우울해지려고 하는데 그때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수의 성도님들을 보면 그분들 때문에 안도되고 감사하고 기쁩니다. 지난주처럼 방문객도 많고 성도가 많으면 그것때문에도 기쁩니다. 아침에 커피한잔도 기쁘고, 조그만 개인 사무실도 너무 기쁩니다. (평생 첫 개인 오피스인데 기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처럼 ‘염려’의 상황이고, 바울처럼 ‘염려’의 상황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하나님께 감사로 아뢰라고 하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아뢸분이 계시니 참 기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안에서 기쁨을 누립니다. 자유함을누립니다! 

    너무나 기쁜 아침입니다! 항상 이토록 기뻐하며 살고 싶습니다.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기도

    기쁨이 넘치는 하루 되게 해주세요. 기쁨에 압도 되는 하루 되게 해주세요.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 신뢰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 가족공동체가 되게해주시고 서로 돕고, 베풀고 사는 개인이며, 교회되게해주세요! 아멘 

  • 011723 빌3:10-21

    1

    “저도 목사님처럼 되고 싶어요!” 라는 말은 안타깝게도 아직 한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회개합니다!

    그렇다고 “저처럼 사세요!” 라는 말도 부끄럽지만 아직 한번도 하지 못했습니다. 도전받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닮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만나 보았습니다.

    우리 주변에 본받을 만한 사람들이 있어서 참 좋습니다. 예컨데 도덕과 윤리의 기준을 뛰어넘어 선함을 추구하는 이들, 공의를 따르는 이들이 있습니다하나님의 사랑으로 행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교에 목숨을 걸고 사나 죽으나 주의 영광과 복음을 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지런함과 성실의 기준을 한차원 올려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룩과 경건, 온유와 겸손, 화평과 충성, 인내와 겸손, 절제와 신앙의 본이 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완벽한’ 이는 못찾았지만 삶의 여러 영역에서 ‘본’이 될만한 이는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행하는 사람들을 눈여겨” 보아야합니다. 우리 주변에 ‘바울’은 없어도 혹은 ‘완벽한 본’은 없어도 다양한 부분과 영역에서 ‘본’이 되는 다양한 이들이 있습니다.

    저도 ‘사랑’을 배우는 성도님이있고, ‘절제와 겸손’을 배우는 목사님이 있고, ‘열심과 성실’을 배우는 지인들이 있습니다.

    (실명을 거론하면 그분들이 ‘교만’의 위험에 빠질지 모릅니다 ㅋㅋ)

    꼭 ‘한명의 본’을 보고 배울필요 없습니다. 예수 닮은 복수의 사람들을 보고 배우면 됩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제 인생을 본받으세요!” 라고 말하기는 힘들어도 “꾸준함은 배울만 합니다!”라고 말 할수 있습니다. (쓰고 보니까 부끄럽네요ㅋ 예를들면 그렇다는겁니다! ㅋㅋ)

    삶의 영역에서 ‘본’이 될만한 영역을 확장해야겠습니다. 또한 주변을 둘러보며 ‘본’이 될만한 모든 이에게 성실하게 배워야겠습니다. (나중(?) 얘기지만 ‘본’이 되는 인생이 될 때쯤 ‘내가 타인에게 본이 될만한 인생이 되었구나’ 자축하고 교만하여 망하지 않게 조심해야겠습니다. ㅋ)

    2
    서로에게 본이 되는 교회를 꿈꿉니다. 모든 ‘성도’가 서로에게 ‘본’이 된다면 건강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더 나가 세상 사람들 가운데 ‘본’이 된다면 비로소 교회가 부흥하고, 세대는 회복되는 기적이 시작 될 것입니다.

    본은 ‘말’의 영역이 아닌 ‘삶’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말하는 이’에게 도전받는것보다 ‘삶으로 증명되는 이’에게 더욱 도전받습니다.

    모든 성도가 ‘삶’으로 본을 이루고
    모든 성도가 ‘삶’으로 세상에 본이되는
    내 자신이 ‘삶’으로 설교하고 본이되는 날을 꿈꿉니다! 오늘부터 다시 시작입니다!

    오늘의 기도
    가정에서, 자녀들 앞에서 ‘본’이 되는 건강한 아빠, 건강한 신앙인이 되고 싶습니다. 삶에 모든 영역에서 성장되는 목사가 되게 해주세요! ‘본’이 되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도 이 말씀의 도전을 붙들고 조심스럽게 깨어 생활하는 하루가 되게해주세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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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주님생각 QT나눔

  • 020123 삼상 6:1-12

    1

    언약궤를 “제자리로” 돌려보내야합니다. 하나님을 제자리로 돌려보내야합니다. 내 삶에 ‘하나님’을 원래 계셔야하는 곳으로 돌려 보내야합니다. 왕은 보좌에 앉고, 집 주인은 집 안방을 차지하는 법입니다.

    운전하려고 차 문을 열고 당황 할때가 있습니다. 큰 딸 녀석이 운전대에 앉아서 핸들을 잡고 운전하는 시늉을 하고 있는것입니다. 패달에 발도 안다고, 컸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창밖을 통해 앞을 제대로 보지도 못합니다. 그런데도 움직이지도 않는 그 차 핸들을 붙잡고 신이 나서 이래저래 돌리려고 해봅니다. 마냥 귀여워 보이기도 하지만 이내 이렇게 말합니다. “출발하게 뒤로가 앉아!” 아이는 운전석에 앉으면 안됩니다. 아이는 운전대를 잡아서는 안됩니다. 아빠가 앉아야합니다. 운전자가 앉아야합니다. 그런데 만약 하율이가 “아빠가 그냥 뒤에 가서 앉아계세요!” 말하고 시동을 걸고 출발하면 사고는 필연이 됩니다.

    나는 나의 자리로, 하나님은 ‘제자리’로 가야합니다. 나의 중심, 삶의 운전대에 하나님께서 앉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자리로 가셔야 재앙이 멈춥니다! 할렐루야!

    가정에 중심에도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교회의 중심에도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혹 가정과 교회의 중심에 내 자신이 앉아있는지 점검하고 경계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을 ‘제자리’로 모시는 하루가 되야겠습니다.

    2

    듣고 보아서 아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은 사춘기가 지나고 운전면허를 딸수 있는 나이가 되면 더이상 부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출발하게 뒤로가!”라고 말하면 “운전면허 땄으니까 제가 할래요! 아빠가 뒤로가세요!” 라고 말합니다. “아직 안돼! 뒤로가!” 라고 말해도 그들은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해야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자세는 ‘신실’입니다. 좋은 자세입니다. 그러나 하지 말아야 일을 포기하지 않는 자세는 ‘고집’입니다. 버려야하는 자세입니다.

    내 ‘고집’을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을 내 인생에 제자리로 모시지 못합니다. 본문이 다시 상기하는것처럼 ‘고집’ 부리면 애굽과 바로처럼 망하는것이요, 블레셋 사람들처럼 그 시간들 동안 (7개월)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어릴적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다가 아버지에게 매 맞은 일도 있고, 학창시절 무작정 우기고 고집하다가 친구관계가 깨지는 일도 경험했고, 사역 하면서 내 방법으로 고집을 부리다가 실패한 경험도 있습니다. 심지어 성도들에게 상처를 준적도 있고, 그 유명한 ‘시험에 들게하는 목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안에서 개선 해야만 하는 내 생각, 내 방법, 내 소망, 내 의지, 내 시간, 내 꿈을 계속 고집하는 어리석은 태도를 서둘러 버려야겠습니다.

    오늘 내게 필요한것은 ‘고집’이 아니라 ‘신실함’입니다. ‘고집’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떠오르는 ‘교회’에 대한 내 방법과 내 생각과 내 의지와 내 시간들이 혹 ‘고집’이 아닌지 점검해야겠습니다.

    3

    블레셋 사람들은 끝까지 하니님을 의심합니다. 이 모든 재앙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재앙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궤는 뭘 의심하냐는 듯이 좌우로 치우침 없이 곧장 벧세메스로 올라갑니다.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도 계속 의심하는 ‘불신의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반복해서 기적을 보여줘도 기적의 순간들마다 사람들은 반복적으로 의심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나를 향하고, 교회를 향한 섭리와 계획, 사랑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눈이 오고 날이 추워졌습니다. 어제도 사고가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오가는 모든 사람이 안전한 하루 되게해주세요. 날씨때문에 출근하지 못한 회사원, 등교하지 못한 학생들이 많습니다. 오늘 하루 가족들이 더욱 사랑하고 돈독해지는 하루가 되게해주세요! 가정과 일터 그리고 교회에서 하나님을 제자리로 모시는 내가 되고 성도들 되게 해주세요. 아멘

  • 013123 삼상 5:1-12

    1

    맞아요! 우리 하나님은 ‘신 옆에 신’으로 계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다곤 옆에 언약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부정하고, 우상을 파괴하십니다.

    ‘우상숭배’를 하는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이런 취급을 하곤합니다. 우상 옆에 하나님 같이 세워두려고 합니다. ‘다곤’도 있고, 하나님도 있는 삶을 사는것이죠! 종교 다원주의고, 종교 혼합주의입니다.

    우상과 하나님은 공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리석고 연약한 인간의 바램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용인하지 않으십니다.

    내 삶에 용인한 (아니 어쩌면 모시고 있는) ‘다곤’은 당장 내다 버려야합니다. 하나님은 우상과 공존하지 않습니다. 내 삶에 하나님을 모십니다. 다른 말로 모든 우상을 내 쫓습니다.

    내 생명, 내 삶, 내 꿈, 가족, 자녀, 부모, 돈, 명예, 권력, 행복, 만족, 심지어 바우 교회 조차도 우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내 삶에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2 다곤 vs. 하나님

    승자는 당연히 하나님입니다. 다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지고, 머리와 손이 잘리는 처첨한 형국을 마주합니다. 이 팩트만 놓고 본다면 결국 블레셋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들은 분명히 ‘다곤’의 수치와 패배를 보았습니다. 결국 누가 참 신입니까? 하나님 입니다.

    그런데 블레셋이 ‘언약궤’ 즉 하나님을 버립니다. 언뜻 생각하면 당연한것 같지만 정말 이상한 결정입니다. 다곤이 졌습니다. 다곤의 유명무실함이 증명됐습니다. 아무런 유익이 없고, 블레셋을 보호할 수 없으며, 하나님과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영적이든, 이성적이든) 다곤을 버리고 하나님을 잡아야하는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자꾸 ‘언약궤’를 옮깁니다. 하나님을 자신들의 삶에서 멀리 떨어뜨려버리려고 합니다.

    이런 영적무지와, 상식적이지도 않은 일, 심지어 완악하다 여기지는 일들이 여전히 오늘도 일어납니다. 소위 말하는 ‘신앙인’들 사이에서도 하나님과 ‘다곤’을 선택해야하는 상황에서 고민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도 일어나고, 심지어 하나님 대신 ‘다곤’을 선택하는 상상불가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곤’을 옮겨야 합니다. ‘다곤’을 포기해야합니다! 반드시 하나님을 선택해야합니다!

    3

    블레셋은 이미 다곤에 익숙합니다. 다곤과 친밀(?)합니다. 다곤이 편하고 이해와 조율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보아하니 ‘여호와’는 너무 거룩하고, 너무 무섭습니다 ㅋ 결국 ‘편한 신, 친밀한 신, 습관이 된 신, 내가 조율 가능한 신’을 그래서 선택합니다.

    내가 하나님 외에 것에 그렇게 익숙해지면 결국 선택의 기로에서 ‘다곤’을 선택하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범하게 될것입니다. 우상과 친해지고, 우상이 편해지고, 우상에게 무감각해지는 어리석은 삶을 지금 청산 해야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내 삶에 있는 모든 우상을 제거해주세요. 하나님께서 다곤의 목을 자르고 손을 잘라 넘어뜨리시는것처럼 내 안에 있는 모든 우상이 죽어지게 하시고 오직 주님만을 선택하고, 주와 동행하는 삶이 되게해주세요! 모든 우상을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주님 되십니다! 주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아멘

  • 013023 삼상 4:12-22

    1

    한시대를 풍미(?)했던 엘리가 이렇게 갔습니다. 그는 제사장이었고, 40년간 사사였습니다. 인정받았던 젊음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옳은 길로 이끌고 ‘사사’답게 백성을 전쟁에서 이끌고 승리하던 시절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한때의 영광’을 뒤로하고 그는 방관의 죄와, 자식들의 죄까지 그 값을 톡톡히 치르게 됩니다.

    ‘영광의 시절’을 보내다가 그 끝이 비극적인 사람들은 생각보다 주변에서 많이 보게 됩니다. ‘영광의 젊은 시절’이 꼭 ‘비극적 결말’로 끝나야하는 원칙이 있는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이 길을 걷는 이유는 젊은 시절, 혹은 어느 시절 누렸던 ‘영광’이 그들의 눈을, 생각을, 마음을 마비시켰기 때문일 것입니다.

    호시절, 인정받는 시절, 사용받는 시절에 절제, 경계, 겸손, 성실, 경건, 거룩, 성찰등의 과정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겠습니다. 진정성 있는 기도, 말씀, 예배를 세워야겠습니다. 더 나가 내 주변도 같은 마음으로 정비하고 살펴야겠습니다. 안팎으로 잘 정검하고 꾸준한 거룩으로 살아야겠습니다.

    2

    ‘믿음의 가정’의 몰락을 봅니다. 시작은 믿음의 가정인데 결국은 엘리도 죽고, 아들들도 죽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일어납니다.

    우리 가정이 ‘믿음의 가정’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직 아이들이 어립니다. 저와 아내도 열심을 내어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지금 보면 ‘믿음의 가정’이 맞습니다. 각자의 영역(?)에서 믿음을 지키고 건강하게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의 사건을 마주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자라가고, 저와 아내의 섬김이 오랜 시간 이어져 가면서 (엘리의 경우 사사로만 40년입니다) 신앙의 순수성과, 사역의 열심, 가족 전체가 주님을 향한 건강한 믿음을 지키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가족은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말씀의 가르침과 기준이 필요합니다. 시대가 악합니다. 교육계의 침투한 ‘인본주의’는 아이들이 자라감에 따라 무엇이 진리인지 혼동하게 만들것입니다. 인간 관계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죄의 유혹들도 있을 것입니다. 본능을 제어함을 지혜롭게 가르치지 못하면 ‘피 고기’를 찾아 해매던 엘리의 자녀들처럼 본능에 충실하여 죄짓는 일도 일어날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너무나 쉽게 죄를 짓기 시작하게 되고, 한번 지은 죄는 점점더 그 더러움과 어둠을 확장해 갈것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그런것처럼 말입니다)

    가족이 건강한 믿음을 지켜나갈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함께 믿음의 가정을 이뤄가야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한주가 되게 해주세요. 한주간도 가정을 건강하게 지켜주시고, 모든 성도님과 가정도 건강하게 지켜주세요. 우리의 믿음이 항상 점검되게 해주시고 죄의 유혹을 단호히 거절하는 하루 하루 되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임재를 빼앗기지 않는 한주 되길 기도합니다! 아멘

  • 012923 삼상 4:1-11

    오늘 이스라엘이 경험한 전쟁의 패배와 비극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있고, 심판은 하나님의 장중안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렇게 홉니와 비느하스는 심판 받았고, 그들을 용인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됩니다. ㅠ 참으로 비극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맥의 메세지를 뒤로하고 잠시 문맥적 메세지를 떠나 이런 생각에 머무르게 됩니다.

    1

    왜 신앙인은 실수하고 ,실패하고, 어려운일을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서 하나님을 찾는가?!? 이스라엘 백성은 4000명 죽고나서야 ‘언약궤’를 찾습니다. 실패하니 그때서야 하나님 생각이 납니다. 교만이고, 어리석음이고, 착각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기복신앙이고, 원시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이라면 이는 ‘건강한 관계의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인 상호 관계를 허락하셨고, 맺고 싶어 하십니다. 일방적이지 않은 교제(?)되어지는 참된 관계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를 자꾸 ‘원시신앙, 기복신앙’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용합니다.

    건강한 관계, 진실된 관계는 필요할때만 찾지 않습니다. 간헐적인 만남을 갖는 관계가 아닙니다. 목적과 계산이 필요한 관계가 아닙니다. 잊었다가 기억했다가 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나의 유익과 만족을 위해, 나의 성공을 위해 하나님을 사용하려는 기복/원시 신앙을 버리겠습니다.

    2

    세상은 하나님을 오해합니다. 블레셋은 처음에 ‘언약궤’를 필두로 돌아온 이스라엘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두러워 하는 것입니다.. 역사속에 기록된 ‘애굽을 심판한 하나님’도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마음을 굳세게 먹고 붙어보니 자기들이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도 빼았습니다. ‘아! 하나님도 별것 아니구나!’ 그렇게 블레셋은 하나님을 오해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일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의지입니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 특별히 홉니와 비느하스를 심판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잠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조율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역사는 ‘블레셋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과정’입니다.

    그러니 자칫 환경과 상황으로 하나님을 판단한다면 누구나 하나닝믈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되면 하나님을 믿지 않게되고, 믿었다가 떠나게 되고, 혹은 더 나가서 하나님을 가볍게 보게 되기도 합니다. (블레셋처럼 말입니다)

    나와 내 주변의 삶에 일어나는 상황과 환경으로 하나님을 쉽게 오해하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내려 놓아야합니다. ‘실패든 성공’이든 모든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조율 안에 있습니다.

    당장 눈 앞에 일어나는 승리가 승리가 아닐 수 있고, 실패가 실패가 아닐 수 있습니다. 성공이 축복이 아닐 수 있고, 망함이 저주가 아닐 수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이든 ‘전능하신 하나님’은 변하지 않고 ‘만유의 주재’되신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굳은 심지의 믿음, 이것이 필요한 아침입니다. 아멘!

    오늘의 기도

    바우 교회가 함께 모여 주일 공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진정한 예배가 되게 해주시고, 새로운 성도들을 보내주시고, 찬양과 말씀과 교제가 모든이를 새롭게 하는 특별한 은혜가 있게 해주시고,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교회 되게 해주세요! 아멘

  • 012823 삼상 3:15-21

    1

    잠못드는 밤이 있습니다. 내일 해야할 ‘사역’ 때문에 생각이 많습니다. ‘사역’ 쉽지 않을수록 잠못드는 밤은 늘어만 갑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설레(?) 일입니다. 그런데 어린 사무엘의 경우 막상 듣고 보니 ‘설렘’이 아닌 ‘두려움’이었습니다. 이제 내일 해가 뜨면 오늘 밤 하나님께 들었던 이 무시무시한 메세지를 나의 ‘아버지’와도 같은 엘리제사장에게 고해야합니다. 사무엘이 내일 감당해야할 ‘사역’은 이렇게 어려운 사역입니다. 그는 어쩌면 (나와 같다면) 잠못드는 밤을 보냈을 것입니다.

    내 앞에 놓인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힘든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이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일이지만 여전히 감당하기 어려운 사명들이 있습니다. 잠들기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의 해가 뜨고, 사명을 감당해야할 날이 밝으면 용기를 내서 걸어나가야합니다. 할 일을 해야합니다.

    오늘도 나에게 맡겨진 ‘사역’은 두렵기만 합니다. 이 사역이 무겁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앞이 캄캄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더딘것 같고, 방법이 딱히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순간순간 나를 사로잡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린 사무엘이 그 모든 ‘두려움’을 넘어 사역을 감당한것처럼 나에게 맡겨진 이 ‘교회’라는 사역을 감당해야겠습니다.

    2

    잠못드는 밤이 있습니다. 엘리는 어린 사무엘을 하나님께서 부르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담부터 잠이 안옵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가? 왜 나를 부르시지 않고 어린 사무엘을 부르는 것인가? 이렇게 세대는 지나가고, 얼마전 한 예언자로부터 들었던 하나님의 저주의 예언이 시작되는가? 이게 정녕 끝인가?!’ 엘리는 생각과 걱정이 꼬리를 물며 잠 못드는 밤을 보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엘리의 속도 모르고 그렇게 아침이 밝습니다.

    아무리 걱정하고, 아무리 생각이 많은 잠 못드는 밤이라고 해도 결국은 ‘걱정하던 바로 그 내일’은 찾아 옵니다. 걱정을 하든 안하든, 생각이 많든 안 많든 ‘내일’은 기어코 ‘오늘’이 됩니다.

    그래서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밤에, 생각과, 걱정이 꼬리를 무는 밤에-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을 대면하여 대화하고 있는것처럼-나도 걱정이 아닌 기도의 자리를 세워야합니다. 내일까지 미룰 것도 아닙니다. 걱정으로 밤을 새고, 걱정으로 새 날을 마주할것이 아니라, 걱정의 밤에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문제를 대면하고, 걱정을 토로하고, 잘못한것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기로 결정합니다. 엘리는 그저 두려움과 걱정으로 밤을 보냈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3

    어린 사무엘은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함에 있어서 가감이 없습니다. 개인적 해석이 난무하고, 덧붙이고, 생략하고, 악마적/작위적 편집으로 본질을 바꾸는것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오늘날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들은데로 가감없이 전합니다.

    사무엘은 그렇게 하나님의 인정받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이스라엘의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귀로 들었고, 나는 손에 쥐어진 성경으로 듣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전했다면 목자이며 설교자인 나도 성경 말씀을 가감없이 전해야합니다. 성경에 메세지에 더하고, 빼며, 비약하고, 생략하고, 이기적이고, 상황적이며, 작위적인 해석들을 조심 또 조심해야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오늘도 깊은 잠을 자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허락하신 오늘 감당해야할 사역을 건강하게 감당하게 해주세요. 말씀을 준비함에 있어서 더욱 철저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지혜와 메세지로 입술에 담게 해주세요! 이 ‘광야’ 같은 땅에 하나님의 메세지를 외치는 ‘목소리’가 되기 원합니다. Let me be your voice on the wilderness! 아멘

  • 012723 삼상 3:1-14

    1

    분별할 능력은 엘리에게 있습니다. 분명히 경험과 지식도 엘리가 월등합니다. 오늘 본문도 보면 (세번만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먼저 파악하는것은 엘리지 사무엘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중요한 ‘하나님의 메세지’는 능력과 경험과 지식이 있는 엘리,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한 엘리에게 들려지지 않고, 아직 어리고, 능력도 없고, 지식과 경험이 일천한, 하나님의 부르심 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어린 사무엘에게 들려집니다.

    하나님의 메세지는 소위 말하는 능력과 분별, 지혜와,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들려지는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능력과 경륜이 있는자랑만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검증된 사람’을 선호하지만 하니님은 ‘주님께 집중된 사람’을 선호합니다.

    하나님은 ‘듣는 사람’ 또는 그 마음이 준비되고 (여호와의 전에 거하고 있는) 능력이 없어도 하나님께 집중된 사람을 통해 말씀하시고 일하십니다.

    ‘어린 사무엘’이 되고 싶습니다. (실제로 ‘위대한 목사’들에 비하면 저는 ‘어린 사무엘’이 맞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이 시대에 하나님의 메세지를 듣고 선포하며 전하는 ‘어린 사무엘’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주의 전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2

    시청등급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볼수있는게 있고, 어린 아이들이 볼수 없는게 있습니다. 말그대로 ‘청소년 관람불가’ 입니다. 아직 그들이 내용을 소화시킬 능력이 안된다고 판단하는것입니다.

    사무엘은 어립니다. 아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본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린 사무엘에게 들려지는 하나님의 메세지는 “안녕! 반가워!” 가 아닙니다. 첫 메세지임에도 ‘청소년 청취불가’에 가깝습니다! 한 집안의 몰락이며 저주입니다. 강력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톤 자체가 벌써 무섭습니다. ‘메세지의 경중’을 생각했을때 이는 어린 사무엘이 기대하거나 소화할만한 그 무언가가 아닌것 같아 보입니다.

    도전적(?)인 영적 원칙을 하나 나열해보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메세지는 ‘내가 듣고 싶은것’을 듣는 시간이 아닙니다. 항상 좋은 말만 선포되는것이 아닙니다. 내가 들을만한 준비가 되었을때 하나님의 메세지가 들려지는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메세지는 하나님의 때에 선포됩니다.

    이 영적 원칙을 모르면 들어도 듣지 않습니다.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들어도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들어도 모른척 해버립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듣기 싫고, 무섭고, 찔리고, 깜짝 놀랄만한 메세지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준비 안된것 같은데 깨닫고도 너무 놀랄만한 메세지를 주시는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향한, 가족을 향한, 공동체를 향한, 교회를 향한, 사회와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메세지가 선포될 때 수용하고, 깨닫고, 전하는 자가 되야겠습니다. 부르실때 사무엘도 됐다가, 니느웨에 회개를 선포하는 요나도 됐다가, 다윗의 죄를 들추는 나단도 됐다가, 회개를 선포하는 세례요한도 돼야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엘리’가 아닌 ‘사무엘’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주의 전’에 거하며 하나님의 음성에 집중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메세지를 수용하고 세상 가운데 가감없이 선언하는 설교자 되게 해주세요! 실족하지 않는 목회자가 되게 해주세요! 아멘

  • 012623 삼상2:22-36

    1

    당장 개입하지 않으면 죄는 점점 커집니다. 제사 음식을 집어먹던 엘리의 아들들은 ‘그 때’ 개입하지 않았더니 어느덧 성적인 타락을 하기 시작합니다.

    간혹 조그만 상처를 그냥 두고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점점 염증이 커지고, 고름이 생기고, 어느 순간 보니 썩어가는것 같습니다. 큰 일이다 싶어 병원에 가서 의사선생님에게 말합니다. “선생님! 제발 제 팔좀 고쳐주세요!!”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굳은 표정으로 말합니다.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 팔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최선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치료’ 할수 없습니다. 때를 놓쳤기 때문에 ‘잘라내는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의사되신 하나님의 판단은 ‘잘라내기!’ 입니다.

    죄가 더 커지기 전에, 더 치명적이기 전에 개입해야합니다.

    한국 사회를 보면 ‘왕따’, ‘일진’ 등의 문제로 학교들과 사회가 떠들석 합니다. 분명히 족히 수십년은 됐을 법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교사들이, 학교가, 사회가 ‘당장’ 뛰어들지 않았더니 이 문제가 커져서 더이상 걷잡을 수 없이 되었습니다. (바로 잡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문제는 사회, 개인, 가정, 교회 안에 비일비재 합니다.

    당장 대면하고 치료해야합니다. ‘너무 늙어서’까지 기다리면 결국 엘리 같이되고, 엘리의 자녀들같이 됩니다. (죄를 지은 엘리의 자녀들만 심판 받는게 아니라 엘리까지도 멸망되는것입니다. 마치 ‘일진 학생’들과 ‘피해자’만 어려움을 당하는게 아니라 사회 전체와 분위기가 어려움을 당하는것과 같습니다)

    당장 죄를 대면해야합니다. “내가 어떻게 이런 짓을 했지?” 나의 죄에 개입해야합니다. 가만 두면 죄는 결국 나를 죽이고 말것입니다.

    2

    둘째 딸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습니다. 너무 예쁩니다 (팔불출이여서 죄송합니다 ㅋㅋ) 그런데 유독 이 아이가 이쁜 이유는 자꾸 와서 앵깁니다. 제가 움직이면 옆에서 기어서 따라 옵니다. (물론 엄마가 옆으로 지나가면 엄마를 따라갑니다 ㅋ) 아무튼 자꾸 앵기고, 따라오고, 다리를 붙잡고 있습니다. 컨디션이 좋을때는 교회의 성도님들과 방문객들에게도 잘 안겨있고, 따라가고, 웃어줍니다. 그러니까 엄청 귀여움 받고 사랑받습니다. 하나가 그렇게 점점 자라매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가(둘째딸) 앞으로도 계속 같이 걷고, 앵기고, 옆에 있으며 사랑받는 자녀가 되길 소망합니다.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26절) 그런데 여기서 ‘자라매’는 원어적 의미로 보면 ‘가다, 걷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더 나가 ‘동행하다’ 라는 뜻도 있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자라면서 ‘정도’를 걷습니다. 또한 사람들 곁에 함께 걷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마치 에녹과 같고, 아브라함같고, 모세 같습니다. 하나님께 ‘은총’을 받는것은 결국 하나님과 함께 걷는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자라게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저도 하나님의 시선 안에서 ‘사무엘’이고 싶고 ‘하나’이고 싶습니다. 항상 주님과 동행함으로 ‘점점 자라나는’ 자녀되길 원합니다. 그분과 동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듬뿍받는 자녀가 되고 싶습니다. 또한 주변에 이웃들 편에 서고, 그들과 함께 걸어주며 그들에게 은총을 받는 목자 되길 원합니다.

    오늘의 기도

    ‘사무엘’이 필요한 시대이며, 필요한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이 땅에서 오스틴을 위한 ‘사무엘’이 되게 해주시고, 이 세대를 위한 ‘사무엘’이 되게 해주세요. 죄를 당장에 끊어내게 하시고,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속에서 건강하게 자라는 자녀가 되게 해주세요! 하나님과 이웃에게 사랑을 주고 받는 신앙인 되게 해주세요! 아멘

  • 012523 삼상2:12-21

    1

    자리가 신앙을 만들고, 환경이 자동적으로 건강한 신앙을 주는것은 아닙니다. 저는 목회자의 자녀로 살지 않았지만 저의 두 딸은 ‘목회자의 자녀’로 살고 있습니다. 확실한것은 이들이 ‘목회자의 자녀’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건강한 신앙인’이 되는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두 딸이 자주 교회 오고, 심지어 ‘섬기는 삶’을 산다고 해도 그것이 이들의 믿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목사’가 ‘건강한 신앙’을 보장하는것이 아니라는것도 알고 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모든 환경과 상황과 배경이 ‘건강한 신앙’을 위한 최고의 환경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 완악한 자들보다 더욱 악한 사람들이었고, 신앙을 오히려 자신들의 이익과 쾌락을 위해 사용한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자주 나오는 것으로, 교회 안에서 섬기는 ‘사역의 감투’로 신앙이 증명되지 않습니다. 진심이 없는 허울의 신앙은 거짓되고 역겹기 마련입니다. ‘허울의 신앙’은 하나님께는 관심이 없고, 알고 싶지도 않고, 심지어 무시합니다.

    ‘신앙의 지위’로 신앙생활 하지 않겠습니다. ‘신앙의 감투’를 나의 쾌락과 만족을 위해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환경과 상황을 핑계로 자녀의 신앙을 돌보지 않는 실수를 멈추겠습니다. 하나님을 아는데 힘쓰겠습니다. 그분을 경외하겠습니다.

    2

    제 입장이 그래서 그렇겠지만 엘리 제사장이 자꾸 눈에 걸립니다. 그에게 나를 투영하게 됩니다. 어린 전도사 시절이 생각납니다. 청년 성도님이 교회에 찾아옵니다. 따듯하게 환대합니다. “잘지내졌어요?! 요즘 별일 없으시구요?” 일상의 대화가 따듯하게 이어집니다. 대화 가운데 성도님이 말씀하십니다. “요즘 부모님 사업 때문에 문제들이 있네요 전도사님 좀 기도해주세요!” 그렇게 대화가 끝날때쯤 온 마음을 다한 기도로 만남을 마무리합니다. 그 청년에게 저는 세상 따듯한 전도사이고, 가족에게 축복이 되는 그런 전도사입니다. 그런데 그때 막상 우리 집은 ‘빨간딱지’가 붙고 아버지, 어머니는 심신이 지쳐갈 때였습니다. 밖에서는 세상 따듯하게 기도해주던 ‘전도사’였지만 집만 오면 입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버리는 못난 아들이었습니다. 망해가는 집을 보고 싶지 않았고, 심신이 지쳐 쇠약해져가는 부모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참 어리석고, 못났고,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겉만 번지르르한 ‘바리세인’의 모습입니다. ‘회칠한 무덤’입니다.

    엘리가 그렇습니다. 엘가나와 한나에게는 세상 따듯한 목사입니다. 일상의 대화를 나누고 축복하며 “당신에게 더욱 자녀의 축복이 있을꺼예요!” 기도합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의 아들들은 나몰라라 입니다. 자녀들의 행태를 온 마을이 압니다. 그러니 엘리 제사장이 모를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자신의 자녀들에게 쏟아야할 관심과 의무를 다하지 않습니다.

    목회자의 이중생활 입니다. 밖에서는 좋아보이는데 안에서부터 썩어 들어가는것입니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경험했고 아직도 경험하고 있는 일입니다. 저도 자칫 잘못하면 빠질수 있는 위험입니다. 엘리 제사장을 보며 정신 차려야겠습니다. 건강한 신앙으로 가족과 공동체를 사랑하고 섬기는 목자가 되야겠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중생활을 하는 성도님들이 계시다면 ‘엘리의 발자국’을 따르지 않게 되기를 도전합니다.

    오늘의 기도

    엘리와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가족을 더욱 사랑하고 신앙의 열심을 내는 목사가 되게 해주세요! 환경과 상황, 지위와 신앙의 감투로 내 신앙이 증명되지 않습니다. 오늘의 건강한 신앙을 살아내게 하시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하루 되게해주세요! 아멘

  • 012423 삼상2:1-11

    1

    “never say never” 이런 말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계속 ‘never’를 말합니다. 원어적 톤을 함유해서 해석해보자면 한나의 고백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처럼 거룩하신분은 없습니다. 예외란 없습니다. 하나님같은 분은 없습니다. 예외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같은 반석 되시는 분은 없습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한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절대성’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면에서든 대체불가 입니다.

    ‘대체불가’의 영역을 다른 것을 대체했을떼 발생하는 문제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아내와 남편을 다른 남자와 여자로 대체하면 ‘불륜’이 되고 건축자재를 시멘트에서 모래로 대체하면 건물은 무너집니다. 음식을 함에 있어서 소금을 같은 하얀색이라는 이유로 설탕으로 대체하면 음식은 버리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역은 ‘절대 대체불가’ 영역입니다. ‘거룩’을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다른 기준으로 대체하면 그때부터 나의 거룩은 무너집니다. ‘하나님’을 다른 ‘돈’으로 혹은 ‘인맥’으로 혹은 ‘능력과 배경’으로 대체하면 그때부터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반석되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기 시작하면 조그만 문제 앞에서 쉽게 붕괴되는 삶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 같은 분은 절대 없습니다. 그분은 절대 대체불가한 분입니다. 나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를 단호하게 끊어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대체하려고 할때마다 대차게 망했던것을 기억합니다.

    2

    한나는 ‘전능’과 ‘반전’이라는 키워드를 경험합니다. 생명의 잉태는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면 응답할수없는 기도 입니다. 그런데 응답하셨으니 하나님의 ‘전능’을 경험하게 됬습니다. 한나는 엘가나의 또다른 아내 브닌나와 상황적 원수의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인하여 고난당하던 위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나에게 아들을 주심으로 인해서 그 ‘불리한 상황’을 역전하셨습니다. 한나는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관통하는 ‘전능’과 ‘반전’의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나의 찬양이 “아들 주셔서 감사합니다!”가 아닙니다. 그녀의 기도는 더욱 크고, 넓고, 깊고, 통찰이 있습니다. 자신에 경험에 기인하여 하나님이 모든 영역에서 전능하시고, 모든 영역에서 주관자이시며, 모든 영역에서 반전이 가능하신 분이심을 찬양하는것입니다. 한나의 찬양은 자기자신(개인)에게 국한되어있지 않고 본질을 포괄하는 찬양입니다.

    결국 ‘사무엘 잉태와 탄생’의 사건으로 한나는 앞으로 인생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반전의 하나님이심을 믿게 되는것입니다. 이 믿음이 바로 오늘 본문에 기록된 한나의 기도이며 찬양입니다. 한나는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아는 신앙인입니다. 그런데 한나처럼 보지 못하면 오늘 ‘전능’과 ‘반전’의 하나님을 경험했는데 내일 다른 문제를 만나면 또 다시 의심하고, 고꾸라지고, 포기하고, 비난하고, 원망합니다. ‘case by case’ ’의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믿음의 문제’ 앞에 하나를 배우면 하나만 보았기 때문에 “너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혹은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하겠느냐!” 라는 책망을 듣게 된것입니다.

    저는 인생의 문제와 어려움 앞에서 이미 전능의 하나님과 반전의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인내의 하나님, 거룩의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자비의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공급의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도 경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어려움들 앞에서도, 문제가 다양하고, 변화무쌍할지라도, 그 문제의 무게가 크고 작든 상관없이 이제는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는 신앙인으로 살것입니다.

    전능하시고 반전에 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찬양합니다. 아멘

    오늘의 기도

    내 인생에 하나님 같은 분이 없습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내 호흡이고, 내 생명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비전이고 꿈입니다. 이 모든 일을 앞서 준행하시는 전능과 반전의 하나님을 믿고 오늘도 승리의 삶을 살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의 주가 되어주심에 감사합니다. 아멘

  • 012323 삼상1:19-28

    1

    한나가 임신하고 출산한 사건은 한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중에 하나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성경은 한나가 임신하기 전의 마음과 일련의 사건을 나름 상세히 기록합니다. 아이의 탄생 이후도 상세히 기록합니다. 그런데 막상 한나가 임신하고 아이를 낳는 사건은 20절 한절로 기록하고 끝납니다. 임신했을때 한나의 감격, 10개월간 그녀가 하나님께 드렸을 감사와 기쁨넘치는 삶, 그리고 아이가 탄생했을때 느꼈을 형언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에 대한 기록도 없습니다. 한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인 ‘임신과 출산’의 과정과 감격이 생략되어 있는것입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이요, 가장 의미있는 순간입니다. 기록한다면 가장 길고 상세하게 기록되어야할 순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순간을 지나 다른 순간에 집중하십니다. 예컨데 학생은 대학을 입학한 순간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감격적이고 의미있는 순간이라 생각하지만 세상은 그가 대학을 가서 이뤄내는 배움과 이후의 삶에 더 초첨을 맞춥니다. 실제 본인이 이후에 자서전을 쓴다고하면 본인도 아마 ‘대학입학’을 하나의 짧은 챕터로 넘어가거나 혹은 한줄로 넘어가거나 혹은 아예 기록을 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ㅋ

    너무 내 중심으로 인생의 중요성을 나열하다보면 거기에 머물게 됩니다. ‘임신과 출산’이 인생이 전부가 되면 사무엘 낳고 나서 다음이 없습니다. 그냥 아이를 품에 안고 애지중지 하며 삽니다. ‘서원’ 잊어버립니다. 모른척합니다. 아이에게 집착하고 아이 중심으로 살게 됩니다.

    ‘중요한 사건’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에 묶이면 다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속도가 늦어지고, 방향이 흔들립니다. ‘중요한 사건’이 새로운 시작에 발판이 되어 다음으로 도약해야합니다. 의미를 두되 의미에 함몰되지 않아야겠습니다.

    ‘개척’ 사건은 중요하지만 시작에 불과합니다. 요즘 고민은 ‘개척’이라는 단어를 언제 땔것인가 입니다. ‘개척교회’가 아닌 ‘교회’로써의 정체성을 놓고 달려갑니다. ‘그 후’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사건’에 머물지 않고 더욱 중요한 사건을 향해 달려나가는 멈추지 않는 사명자가 되기로 결정합니다.

    2

    어린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한나와 하나님 사이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관련 있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아버지 엘가나 입니다. 사무엘은 한나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엘가나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또 이 어린 아이를 받아주는 것은 누구입니까? 엘리입니다. 엘리가 어린 사무엘을 달라고 한것도 아닙니다. 입이 하나 늘었습니다. 생각지 못하게 손이 가는 동거자(?) 하나가 생긴것입니다. 또 어린 사무엘입니다. 본인의 의지로 결정한게 아닙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께 드린 서원이 많은 인물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서원’을 행하면 나의 신앙이 언뜻 위대해보입니다. 그런데 사실 주변의 도움과 협력도 큰 부분을 차지 합니다. 저의 어머니를 시작으로 서원된 제 인생은 6학년때 제 자신이 서원함으로 이어져왔습니다. 그리고 저의 서원을 지키기 위해 목회자가 되었을때 이를 위해 아내가 같이 협력해주었습니다. 개척을 할때도 하나님께 드린 나의 서원이지만 이 서원에 나의 아내와 자녀들이 협력해주었습니다. 그들의 의지와 서원은 아니지만 그들의 협력이 없었다면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서원’을 지키며 교만하고, 으쓱하고, 대단하다는 착각은 경계 해야합니다. 나의 ‘서원’에 함께 동역해주고 협력해주는 나의 동역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기억하는 하루가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서원’이 동역과 협력으로 실천되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한주간도 승리하게 해주세요! 바우교회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동역과 협력의 성도들을 축복하시고 우리가 함께 드리는 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일이 이뤄지고 영광이 드러나게 해주세요! 간구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신 하나님을 다시 한번 찬양합니다. 아멘

  • 012223 삼상 1:9-18

    1

    과거를 돌이켜보면 새벽 예배가 끝나고 나면 개인 기도시간으로 이어지는데 한참동안이 지나도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걔중에는 계속 몸을 흔들며 소리를 내며 기도하는 분들도 계셨지만 가끔 옆을 가보면 그냥 누워 계시는 분, 또 졸고(?) 계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간혹 필요에 따라서 그분들 어깨를 건드리며 ‘성도님 이제 일어나서 가셔야죠!’ 할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잔거 아닙니다! 기도하고 있었어요!” 그러면 전 대답하곤 했습니다. “아 네!! 안녕히 돌아가세요!”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도님들의 그 말, “저 잔거 아니예요 기도한거예요!” 그 말을 믿었다면 기도제목을 묻거나 아니면 적어도 엘리처럼 “간구가 응답되길 원합니다!” 라는 격려와 축복의 말을 해줬을 것입니다.

    엘리를 보며 많은 회개를 하게 됩니다. 엘리도 잘한게 없습니다. 사실 이미 그의 영성이 ‘제사장’으로써의 그 수준이 아닌듯 합니다. 성경에 보면 엘리가 분명 한나의 ‘입’을 ‘주목’했다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한나에 대해 내린 결론은 ‘술취함’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한나가 한두번 기도했을까? 싶습니다. 그녀의 간절함이 오늘 본문에 보여지는 그 한번 이었을까? 생각해보면 아닐것 압니다. 그러나 엘리는 ‘제사장’으로써 한 영혼을 향한 ‘주목’이 없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결론을 내려 버립니다. 마치 제가 그런 실수를 하는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정신이 바짝 듭니다. 회개해야겠습니다. 영혼을 향한 ‘주목’이 진심이어야겠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의 눈물과 상황을 꽤뚫어보는 사랑을 담은 ‘주목’을 실천해야겠습니다.

    또한 쉽게 말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엘리는 자신의 판단으로 결론을 내린후 마치 그것이 사실인것처럼 한나에게 말합니다.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한나에게 어떤 상황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서둘러 결론을 내려버리는것입니다. 그러한 사실확인이 안된 얘기로 한나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을 내 뱉는것입니다. 목사인 제가 간혹 하는 실수 입니다. 사실확인도 안된 나만의 판단으로 성도에게 상처가 될만한 말을 합니다. 아버지인 제가 간혹 하는 실수 입니다. 상황파악도 정확하게 못하고 아이에게 판단하고 결론지어 상처주는 말을 합니다.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판단한 후에 단언하는 말로 내뱉고 상처줍니다. 섣불리 결론 내리고, 판단하고, 가벼이 내 뱉는 말들을 조심 또 조심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다행인것은 엘리는 한나의 말을 들은후 얘기합니다. “평안히 가라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는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한다!” 그래도 엘리는 저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입니다. 단지 말뿐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상한 심령인 한나의 마음에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을 해줍니다. 어디까지나 응답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축복의 말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격려와 소망의 말은 우리도 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진심을 담아 대화하고, 듣고, 함께 소망하고, 축복하고 격려하는 말로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목회자가 되야겠습니다.

    2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지만 아들이 없던 제 어머니는 하나님께 “아들을 주시면 사무엘과 같이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서원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어릴적부터 저에 귀에 못히박히도록 반복됐습니다. “너는 사무엘과 같은 아들이야! 너는 목사가 될꺼야!” 제가 기억하는 선 안에서 ‘장래희망’을 써낼때 ‘목사’라고 써낸 나이가 초등학교 2학년때입니다. 그리고 이후 신앙안에서 자라고 또 자라 어느날 목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서원하는 힘과, 그 책임감을 믿습니다. 한나의 서원은 이스라엘 역사에 참 귀한 인물의 탄생의 서막이 됩니다. 귀한것은 한나가 서원한데로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냥 감정과 마음의 간절함에서 쏟아내고 응답받은 이후에 모른척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차후에 계속 삼상을 묵상하면 곧 또 다시 나올 얘기 입니다.

    하나님께 서원하면 지켜야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있어 진심인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약속을 저버리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께 ‘약속’하면 하나님께서도 기대하십니다. 하나님께 ‘약속’은 그런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돌아보며 ‘서원’의 순간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잘 넘어갔다’ 생각했던 서원이 불현듯 떠올랐다면 지켜야할 때입니다. 책임감을 가지고 지켜야합니다.

    저에게는 서원이 ‘목사’고, 서원이 ‘교회’입니다.

    하나님께 드렸던 ‘서원’이 책임감 있게 지켜질때 하나님의 뜻이 더욱 풍성하게 성취되는 일을 목도하게 될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앞에 오늘도 정한 마음으로 섬기고 충성하게 해주세요. 복된 주일입니다. 성심의 예배를 드리게 하시고 바우 교회에 성도의 부흥이 있게해주시고, 믿음이 교제가 이뤄지게 해주시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하루 되게 해주세요! 올바른 목회자로써의 마음과 행실을 잊지 않고 실천하는 하루 되게해주세요! 아멘

  • 012123 삼상 1:1-8

    1

    엘가나는 두 아내가 있습니다. 그리고 두 아내 사이에서 편애가 심합니다. 이러한 편애는 결국 두 아내 사이를 “적수”로 만들어 버립니다. 가족일 수 있는데 (사실 가족이여야합니다) 그러나 ‘적수=원수’가 되어있습니다. 거기에 브닌나는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빌미로 더욱 한나를 괴롭게하고, 남편은 아무것도 모르는것처럼 한나를 더욱 편애하고 더욱 선물도 주고 신경 씁니다. 그러나 한나가 가진 본질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엘가나도 이런 상황이 답답합니다. 한나에게 토로합니다. “왜 울며 먹지 아니하느냐? 내가 열 아들보다 낫게 해주고 있지 않느냐?”

    아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아픈 가정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는데 서로 이기적으로 사랑합니다. 서로의 아픔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돌보고, 자신의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 공격하기도 합니다. 남몰래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가정 안에서 이런 일을 비일비재 합니다. 아빠는 나름의 노력으로 가정의 평화를 가져오려고 합니다. 돈벌려고 바쁘게 일합니다. 가정이 힘들어하면 이렇게 토로합니다. “내가 지금 나 좋자고 이래? 내가 돈 많이 벌어다 주잖아!!! 내가 놀아?” 아내는 삶의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남편이 있어도 외롭고 자식이 있어도 외롭습니다. 선물도 주고, 잘해준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마음이 흔들거리고 힘듭니다. 자녀도 사랑한다고 하면서 부담주고 조정하려는 부모 때문에 그 마음이 흔들립니다. 형제 자매 사이도 부모의 ‘편애’ 때문에 ‘적수’가 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습니다.

    서로 잘해보려고 하는데, 나름의 방법으로 노력하지만, 또 살아보려고 하지만 결국은 그것이 서로에게 비수가 되어 상처를 주고 겉으로는 ‘가족’인데 알고보면 ‘적수의 공동체’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가족구성원이 서로를 사랑한되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편애하지 않는것! 나의 입장과, 나름의 방법이 아닌 서로의 말과 마음에 귀 기울여주고 서로를 위해 행동하는 것! 가족 안에서도 경쟁이 일어날 수 있지만 파괴의 경쟁이 아닌 선의의 경쟁, 혹은 서로 발전되는 건강한 도전을 하는 것! 위로와 격려와 사랑과 베려와 하나됨이 있는 가정! 이러한 가정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간혹 아내가 “둘째만 너무 사랑해!” 라는 농담반, 진담반의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첫째아이가 간혹 서운해 하기도 하고 “아빠는 하나만 좋아해!” 라는 말도 합니다. “아빠는 하나한테는 화를 안내!” 라는 말도 합니다. 나의 사랑이 가족 모두에게 건강하고 충분하게 경험될수있도록 더욱 사랑하고, 가족을 건강하게 하나로 품는 아빠가 되야겠습니다.

    아내와 두 딸을 더욱 사랑하겠습니다. 내 방법이 아닌 그들의 기대와 마음을 관심같고 더욱 사랑하겠습니다. 분열이 아닌 하나가 되는 가족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2

    지금 자식이 없는것이 ‘수치’ 아닙니다. 그런데 그때는 그랬습니다. 자식이 없는것이 곧 ‘신의 저주’같이 여겨졌습니다. 큰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확실한것은 한나에게 자녀가 없는것은 하나님의 의지 였다는 사실입니다. 가져야하는것, 마땅히 있어야하는것, 나를 수치에서 건져줄 반드시 필요한 그 무언가가 내게 없다면 참 슬픕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더더욱 슬프게 느껴집니다.

    어릴적 처음 목회를 시작하면서 ‘찬양인도’를 할때 이런 말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전도사님은 목소리가 참 특이해요!!” (최대한 예의있게 말해준 피드백이겠죠! ㅋㅋ) 사실 제 자신이 느끼던 바라 저도 힘들어 하고 있던 사역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목도 약해서 매일 쉬기 일수였습니다. 그래서 간혹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찬양인도자 만들어 달라고 한거 아니잖아요!! 교회가 필요해서 섬기는데 제게는 왜 가수들 같은 노래 실력과 목소리를 주지 않으셨나요?? 왜 제게 그런 탁월한 은사와 실력을 허락하지 않으셨나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기도가운데 항상 이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내가 허락한것이 네게 족하도다!” ㅋㅋㅋ 그리고 딱 ‘그 정도의 은사’로 교회 안에서 찬양인도만 15년 가까이 했습니다 ㅋㅋㅋㅋ

    인간적으로는 ‘수치스러운 능력’이라는 생각을 한적이 많습니다. 이정도면 ‘찬양’으로 섬기면 안되는거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오늘날 까지도 찬양하고 있습니다 ㅋ 그리고 누군가는 “은혜롭습니다!” 격려하고 응원해줍니다. 할렐루야!

    한나가 임신하지 못함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는 그녀에게 수치였습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한나의 아이는 하나님께 ‘서원된 아이’가 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한나의 태를 여시고 ‘서원된 아이’ 즉 사무엘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중요한 사사요, 선지자요, 예언자를 허락하십니다. 이는 이전의 ‘수치’를 다 덥고도 남을 엄청난 축복입니다.

    이 시대를 살면서 ‘마땅히 있어야하는것’이 지금 업다고 해서, 내가 필요한것이 당장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고 해서, 나의 기대보다 내 능력과 상황이 떨어진다고 해서 수치스럽게 여길 필요 없습니다. 배경, 학력, 능력, 인맥, 출신이 시대의 기준에 미치지 못해 ‘수치’스럽게 여겨지고 있다고 해서 나의 삶이 의미가 없거나 실패한 인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며, 인내하고 그 길을 걸어갈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필요한 것을 허락하시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줄로 믿습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바우 교회가 아직 성도들로 가득 채워지지 않았지만 한나처럼 ‘격분하고 슬퍼할’것이 아니라, ‘브닌나’같은 교회를 보며 마음에 요동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섭리와 때를 믿으며 기쁨으로 섬기게 해주세요! 오늘도 행복하게 가정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는 하루가 되게 해주세요! 아멘

  • 012023 빌 4:14-23

    1

    지난 주일 설교에도 잠시 등장했던 얘기가 있습니다. 주중에 설교준비중에 한 목사님께 연락을 받았습니다. 터키에서 저에게 돈을 보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터키 단기선교를 몇번 다녀오면서 보았던 형제였습니다. 그분이 저의 sns를 보고 교회 개척을 알게되고 이에 동역하기 위해서 헌금을 한것입니다. 액수는 100텔레였습니다. 미국달러로 환산하면 현재 약 6불 정도의 액수였습니다. 이 얘기를 듣는데 얼마나 감동이 되는지 아직도 그 전화기 너머를 통해 이 소식을 들을때의 감격과 기쁨을 기억합니다. 액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마음과 동역 그리고 ‘두렙돈’의 헌신에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바울처럼 감옥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처럼 ‘도움’이 필요한 상황은 맞습니다. 이때 터키의 한 형제가 제게 ‘빌립보 성도’가 되어 도움을 준것입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공급의 하나님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아멘

    지난 5개월 교회개척의 시간동안 ‘터키형제’ 뿐 아니라 정말 많은 분들이 동일한 마음으로 ‘빌립보성도’를 자처하며 헌금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분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 풍성한 대로 교회의 모든 쓸 것과, 우리 가정의 모든 쓸 것을 채워주셨습니다. 모든 후원자들에게 감사하고, 모든 동역자들에게 감사하고 무엇보다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

    “오직 여러분의 봉사에 열매가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사역과 섬김에 결실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열매’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섬김’만큼 중요한것이 꾸준함과 성실을 통해 얻어지는 ‘열매’입니다. 간혹 시작은 하지만 ‘열매’를 보기 전에 멈춰버리는 섬김을 봅니다. 시작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열매를 얻는 순간까지 꾸준해야겠습니다. 아무리 땅을 개간하고 씨를 뿌려도 그 이 후에 물을 주고, 잡초를 뽑는 수고를 이어가지 않으면 그 농사를 통해 열매 맺기가 힘들어 집니다. 끝까지 사명을 감당해야겠습니다.

    이 말씀을 개역개정으로 보면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결국 ‘열매’가 우리에게 유익하다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됩니다. ‘시작’이 유익한것이 아니라 ‘열매’가 유익한것입니다.

    사역을 시작해야겠습니다. 또한 시작한 사역은 열매 맺을 때까지 멈춤없이 감당해야겠습니다.

    바우교회의 열매를 보는 그날까지 화이팅입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힘을 주세요! 인내하게 하시고, 꾸준함과 성실함을 놓치지 않게 해주세요. 바우 교회에 열매가 맺는 그날까지 정진하게 해주세요! 오늘도 영육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 011923 빌4:8-13

    1

    사실 이게 정말 서운한 일입니다. 돈이 필요하고, 상황이 안좋은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면, 내가 믿었던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실망감이 큽니다.

    어릴적 힘든 상황을 마주했던 우리 가족을 도와주지 않았던 친척을 보았습니다. 슬펐고, 그 친척에 대해 마음이 불편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캐나다 가서도 생각해보면 여유가 없었습니다. 나름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경제적으로 계속 어려웠습니다. 막노동을 한적이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소개한 다른 사람을 쓰겠다며 저를 잘라내는 사장님께 느꼈던 배신감을 기억합니다.

    (사장님도 신학생, 저도 신학생, 소개한 사람도 신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서운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도움이 필요한데 왜 도와주지 않는거야?!’ 타인을 향한 원망과 배신감, 서운함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도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러나 정황을 보면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돕던(?)일을 꾸준히 하지 않았던것 같습니다. 바울 입장에서는 얼마나 서운한 일입니까?? 힘들때 도와주는게 찐(?)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힘들때 바울을 돕지 않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빌립보교회를 향해 분노하거나, 서운해하거나, 배신감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나는 기쁩니다.. 그리고 당신들의 상황도 이해합니다” (10절)

    바울은 이 ‘궁핍의 문제’를 ‘자족’으로 풀었습니다. 타인들의 도움과 후원에 의존한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자족’으로 이 문제를 풀었습니다. 그러니까 타인을 향한 배신감과 분노, 서운함에 함몰되지 않습니다.

    내가 힘들때 남이 도와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모두 나만 바라보고 있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도와줄수 있는 상황이 되는것도 아닙니다. 마음이 있다고 꼭 그게 실행되는것도 아닙니다.

    (마음만이라도 있다는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싶습니다!)

    서운, 분노, 비난, 원망, 배신감등의 감정으로 공격하는 사탄의 거짓과 술수에 넘어가지 않아야겠습니다. 도움주는 이에게 감사하고, 기대했던이가 도움 주지 못하면 오히려 그 사람의 상황을 위해 중보하고, 내 자신의 상황에 자족하는

    ‘성숙한 신앙’을 배워야겠습니다.

    2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배고픔과 궁핍에도 처할 줄 안다” 바울의 말입니다. 그는 가난할때 어떻게 살아내야하는 줄 압니다. 그 시기를 어떻게 넘어가야하는지 배웠습니다. 아끼고 자족하고 일하는 아주 간단한 지혜부터, 가난에서 오는 내면의 불만족과 걱정, 의심, 불안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배웠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난’중에도 신앙의 정도를 놓치지 않는 비결을 배웠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요함’에 처신하는 지혜도 중요합니다. 가끔 오해합니다. ‘가난함’에 대한처신법은 배워야하지만 ‘부요함’은 그냥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부요하면 모든 문제가 다 사라지고 살기 편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도 쉽게 지킬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부요한 사람'도 ‘비결’을 배워야합니다. 그걸 배우지 않으니까 낭비하고, 흐트러지고, 방탕하고, 무질서하고, 신앙에서 멀어집니다. 부요해서 하나님을 버립니다. 만족하지 못합니다.

    여유가 있을 때나, 가난할 때나, 부자 일 때나, 삶을 질서있게 살아내고, 신앙의 정도를 지키고, 자족하며 사는 비결을 반드시 배우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 가난할까요? 여유있을까요?부자 일까요? 모르겠습니다.

    한가지 확실한것은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 있다는것입니다. 자족하며 살겠습니다. 바른 신앙의 삶을 살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주변에 인생의 ‘감옥’을 경험하고 있는 이웃들이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게 해주세요! 오늘 하루도 자족하게 하시고 배풀고 나누는 하루가 되게 해주세요! 축복의 통로가 되는 하루가 되길 원합니다. 아멘

  • 011823 빌4:1-7

    1

    “부탁 좀 하겠습니다!”(3절) 

    부탁했는데 거절당하면 상처가 됩니다. 그래서 쉽게 부탁을 못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에게는 큰 고민없이 부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왠만하면 들어줄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혹여 거절당해도 내 마음에 상처가 안될 건강한 신뢰의 관계를 이미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간에 건강한 신뢰관계가 필요합니다.
    성도간에 ‘부탁’을 하고, 들어줄 수 있는 도움을 주고 받는 관계가 되어야합니다. 

    서로 ‘형제 자매’라고 부르지만 막상 부탁 하나 하려고 하면 눈치봐야하고, 서로 부담되고, 계산해야하고 망설이게 되고, 상처 받게 되게 된다면 ‘동역자’ ‘믿음의 가족’ 혹은 ‘형제 자매’라는 호칭이 부끄럽습니다. 

    저도 요즘에 부탁도 많이 받고, 부탁도 하고 있습니다. 뉴저지에서 어스틴 방문한다는 성도님들께 미안한 마음이긴 하지만 이것저것 가져다 달라고 부탁합니다. 심지어 방문하는 지인에게 ‘마해영 순대’를 요구(?)하는 궁상(?)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ㅋㅋ 

    성도님들께는 교회 섬김을 부탁합니다. 
    사역을 부탁합니다. 

    성도님들도 전화하거나 문자 합니다. 롸이드가 필요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경우 연락들 하십니다. 부탁의 연락이 오면 너무 좋습니다!!! 신뢰받고 있는것같고, 그들이 어려울때 내가 생각난것 같아서 너무 좋습니다. 거기다가 그 ‘부탁’을 들어줄 능력과 상황이되면 더더욱 좋습니다!!!! 

    성도님들의 부탁전화!! 기다리겠습니다! ^^ 

    영적인것도 부탁하고, 일상에서도 부탁하고 좋습니다!! 신뢰하고, 의지하고, 부탁하고, 도와주는 가족같은 성도 좋습니다! 성도는 가족입니다. 교회는 가족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묵상을 보시는 분들께 부탁드립니다. 바우 교회를 위해 기도를 좀 많이 해주세요! ^^성장, 부흥, 창립, 차세대 (Ft. 예배장소) 기도제목 입니다! 

    2
    살을 찌워야 할 판입니다! 자꾸 주변에서 살이 너무 빠졌다고 무슨 일이냐고 스트레스 때문이냐고, 몸은 괜찮냐고, 건강은 어떠냐고 묻습니다. 누군가 저를 모르는 분은 제가 옆에 있는데 느닷없이 저의 아내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옆에 있는 남편 한국 사람 아니죠?!”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닙니다! 저는 건강합니다. 스트레스 없습니다. 몸도 괜찮습니다. 영양제도 잘 챙겨먹고 있습니다. 

    오히려 기쁩니다. 기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오늘 아침 또 말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4절) 

    기뻐할 일이 없어도 주 안에 있으면 기쁜게 성도입니다. 뭐 딱히 기뻐할 일이 있어서 기쁜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보고 웃는 둘재딸을 보고 있노라면 저 내면 깊은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아침마다 말씀을 묵상하며 도전과 깨달음이 올때마다 영혼의 만족과 기쁨이 있습니다. 

    바우 예배 드릴때 인원이 없으면 우울해지려고 하는데 그때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수의 성도님들을 보면 그분들 때문에 안도되고 감사하고 기쁩니다. 지난주처럼 방문객도 많고 성도가 많으면 그것때문에도 기쁩니다. 아침에 커피한잔도 기쁘고, 조그만 개인 사무실도 너무 기쁩니다. (평생 첫 개인 오피스인데 기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처럼 ‘염려’의 상황이고, 바울처럼 ‘염려’의 상황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하나님께 감사로 아뢰라고 하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아뢸분이 계시니 참 기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안에서 기쁨을 누립니다. 자유함을누립니다! 

    너무나 기쁜 아침입니다! 항상 이토록 기뻐하며 살고 싶습니다.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기도

    기쁨이 넘치는 하루 되게 해주세요. 기쁨에 압도 되는 하루 되게 해주세요.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 신뢰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 가족공동체가 되게해주시고 서로 돕고, 베풀고 사는 개인이며, 교회되게해주세요! 아멘 

  • 011723 빌3:10-21

    1

    “저도 목사님처럼 되고 싶어요!” 라는 말은 안타깝게도 아직 한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회개합니다!

    그렇다고 “저처럼 사세요!” 라는 말도 부끄럽지만 아직 한번도 하지 못했습니다. 도전받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닮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만나 보았습니다.

    우리 주변에 본받을 만한 사람들이 있어서 참 좋습니다. 예컨데 도덕과 윤리의 기준을 뛰어넘어 선함을 추구하는 이들, 공의를 따르는 이들이 있습니다하나님의 사랑으로 행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교에 목숨을 걸고 사나 죽으나 주의 영광과 복음을 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지런함과 성실의 기준을 한차원 올려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룩과 경건, 온유와 겸손, 화평과 충성, 인내와 겸손, 절제와 신앙의 본이 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완벽한’ 이는 못찾았지만 삶의 여러 영역에서 ‘본’이 될만한 이는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행하는 사람들을 눈여겨” 보아야합니다. 우리 주변에 ‘바울’은 없어도 혹은 ‘완벽한 본’은 없어도 다양한 부분과 영역에서 ‘본’이 되는 다양한 이들이 있습니다.

    저도 ‘사랑’을 배우는 성도님이있고, ‘절제와 겸손’을 배우는 목사님이 있고, ‘열심과 성실’을 배우는 지인들이 있습니다.

    (실명을 거론하면 그분들이 ‘교만’의 위험에 빠질지 모릅니다 ㅋㅋ)

    꼭 ‘한명의 본’을 보고 배울필요 없습니다. 예수 닮은 복수의 사람들을 보고 배우면 됩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제 인생을 본받으세요!” 라고 말하기는 힘들어도 “꾸준함은 배울만 합니다!”라고 말 할수 있습니다. (쓰고 보니까 부끄럽네요ㅋ 예를들면 그렇다는겁니다! ㅋㅋ)

    삶의 영역에서 ‘본’이 될만한 영역을 확장해야겠습니다. 또한 주변을 둘러보며 ‘본’이 될만한 모든 이에게 성실하게 배워야겠습니다. (나중(?) 얘기지만 ‘본’이 되는 인생이 될 때쯤 ‘내가 타인에게 본이 될만한 인생이 되었구나’ 자축하고 교만하여 망하지 않게 조심해야겠습니다. ㅋ)

    2
    서로에게 본이 되는 교회를 꿈꿉니다. 모든 ‘성도’가 서로에게 ‘본’이 된다면 건강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더 나가 세상 사람들 가운데 ‘본’이 된다면 비로소 교회가 부흥하고, 세대는 회복되는 기적이 시작 될 것입니다.

    본은 ‘말’의 영역이 아닌 ‘삶’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말하는 이’에게 도전받는것보다 ‘삶으로 증명되는 이’에게 더욱 도전받습니다.

    모든 성도가 ‘삶’으로 본을 이루고
    모든 성도가 ‘삶’으로 세상에 본이되는
    내 자신이 ‘삶’으로 설교하고 본이되는 날을 꿈꿉니다! 오늘부터 다시 시작입니다!

    오늘의 기도
    가정에서, 자녀들 앞에서 ‘본’이 되는 건강한 아빠, 건강한 신앙인이 되고 싶습니다. 삶에 모든 영역에서 성장되는 목사가 되게 해주세요! ‘본’이 되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도 이 말씀의 도전을 붙들고 조심스럽게 깨어 생활하는 하루가 되게해주세요.
    아멘